설기현/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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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클럽 경력
1.1. 프로 데뷔 이전
1.2.1. 2000-01 시즌
1.3.1. 2001-02 시즌
1.3.2. 2002-03 시즌
1.3.3. 2003-04 시즌
1.3.4. 2004-05 시즌 초
1.4.1. 2004-05 시즌
1.4.2. 2005-06 시즌
1.5.1. 2006-07 시즌
1.5.2. 2007-08 시즌 초
1.6.1. 2007-08 시즌
1.6.2. 2008-09 시즌 초
1.6.4. 2009-10 시즌
1.7.1. 2010 시즌
1.8.1. 2011 시즌
1.9.1. 2012 시즌
1.9.2. 2013 시즌
1.9.3. 2014 시즌
1.10. 현역 은퇴
2. 국가대표 경력
3. 기록
3.1. 대회 기록
3.2. 개인 수상 기록
3.3. 수훈
3.4. 통산 성적
3.4.1. 국가대표
4. 플레이 스타일


1. 클럽 경력[편집]



1.1. 프로 데뷔 이전[편집]


학창 시절부터 알아주는 유망주였다. 강릉제일고등학교광운대, 청소년 대표팀[1]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하던 설기현은 특이하게도 2002년 월드컵을 앞둔 유망주 육성 계획에 따라 K리그가 아닌 벨기에 주필러 리그의 로얄 앤트워프에서 프로데뷔를 한다.[2]


1.2. 로열 앤트워프 FC[편집]


파일:external/dimg.donga.com/6812529.1.jpg

2000-2001

통산 27경기 11골 1도움


1.2.1. 2000-01 시즌[편집]

이후 주필러 리그에서 2000~01 첫 시즌 27경기 동안 11골[3]을 넣으며 좋은 활약을 했고 이는 차범근[4]에 이어 역대 2번째 유럽리거 시즌 10골 기록[5]이었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다음 시즌은 같은 리그 우승후보인 RSC 안데를레흐트로 이적한다.

아무튼 설기현이 진출한 2000년 초반 당시에는 그야말로 한국 선수로는 차범근에 이어 매우 오랜만에 유럽리거로 맹활약했기 때문에 온갖 언론 매체에서 이런 활약을 다루고 지금의 손흥민 못지않은 주목을 받았었다. 사실 90년대 중후반에 한국 선수들은 유럽 리그에서 그다지 활약을 하지 못했으며 1998년만 해도 유럽리그로 리그1에서 서정원에레디비시에서 노정윤이 진출하여 활약한게 고작이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2000-01 시즌: 27경기 11골 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주필러 리그
25
22
3
10
1
벨기에 컵
2
2
0
1
0
합계
27
24
3
11
1

1.3. RSC 안데를레흐트[편집]


파일:/image/260/2011/09/15/seol.jpg

2001-2004

통산 95경기 23골 9도움


1.3.1. 2001-02 시즌[편집]

로얄 앤트워프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직전 시즌 리그 챔피언이자 벨기에 명문팀 RSC 안데를레흐트로 이적했다. 첫 시즌에는 준주전급 자원으로 활용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끈 슈퍼컵에서의 해트트릭을 포함해 24경기 7골 1도움을 기록했다. 2001년 9월 11일 로코모티브 모스크바와의 UCL 조별리그 1차전 경기[6] 에서 교체출전해 그라운드를 누비며 처음으로 UEFA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한 한국인이 된 시즌이기도 하다.

2001-02 시즌: 24경기 7골 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주필러 리그
20
10
10
3
1
벨기에 슈퍼컵
1
0
1
3
0
UEFA 챔피언스 리그
1
0
1
0
0
UEFA 챔피언스 리그 예선
2
2
0
1
0
합계
24
12
12
7
1

1.3.2. 2002-03 시즌[편집]

전반기 새롭게 팀의 감독이 된 휴고 브로스 감독의 신임을 받아 팀의 주전 공격수로써 폭발력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많은 골을 넣었다. 그러나 후반기를 지나며 다소 힘에 부치며 주전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한 시즌. 그럼에도 리그 12골 6도움을 기록하며 본인의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다. 이때의 활약으로 무려 발롱도르 후보에 선정되기도 했다.

2002-03 시즌: 43경기 13골 7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주필러 리그
32
21
11
12
6
벨기에 컵
3
3
0
0
0
UEFA컵
8
7
1
1
1
합계
43
31
12
13
7

1.3.3. 2003-04 시즌[편집]

이 시즌 안데를레흐트가 벨기에 주필러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생애 첫 리그 트로피를 거머쥐게 되었다.[7] 하지만 설기현 개인적으로는 부상 악재도 겹치며 벨기에 진출 이후 가장 부진했던 시즌이라고 볼 수 있다.

잉글랜드 이적설이 불거지던 1월 안데를레흐트와 바이아웃이 포함된 1년 연장 계약을 체결했다.

2003-04 시즌: 26경기 3골 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주필러 리그
19
16
3
2
1
벨기에 컵
1
1
0
0
0
UEFA 챔피언스 리그
2
2
0
0
0
UEFA 챔피언스 리그 예선
4
4
0
1
0
합계
26
23
3
3
1

1.3.4. 2004-05 시즌 초[편집]

2004년 여름 이적시장에서 꾸준하게 잉글랜드 진출을 추진했고 2부리그의 울버햄튼과 계약을 체결했다. 이 시기에 사실 PL에서도 제의가 왔었는데 본인은 경기를 뛰는걸 중요하다 여겼는지 울버햄튼을 선택했다.

2004-05 시즌 (안데를레흐트) : 2경기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주필러 리그
1
0
1
0
0
UEFA 챔피언스 리그 예선
1
0
1
0
0
합계
2
0
2
0
0

1.4. 울버햄튼 원더러스 FC[편집]


파일:/image/109/2005/12/28/200512281238421200_1.jpg

2004-2006

통산 76경기 10골 12도움


1.4.1. 2004-05 시즌[편집]

데이브 존스 감독의 러브콜을 받았고 존스 감독의 무한 신임을 받았으나 성적부진으로 경질 전까지 설기현은 9경기에서 단 2개의 도움에 그쳤다. 9월 11일 위건과의 홈경기에서 선발출장해 데뷔전을 치렀으며 9월 21일 칼링컵 32강 번리 원정에서 잉글랜드 무대 첫 골을 터뜨렸다. 9월 25일 카디프와의 홈경기에서 2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으나 팀은 2:3으로 졌다.

존스 감독의 경질 후 스튜어트 그레이 감독 대행 체제에서 혹독한 시기를 보냈다. 대행 체제에서 첫 두 경기에서 교체출장조차 하지 못했고 11월 13일 로더럼 원정에서 교체출전해 역전 결승골을 어시스트해 2-1 승리를 이끌었음에도 신임은 크지 않았고 계속 교체멤버로 나섰다. 그레이 감독대행이 치른 7경기에서 설기현은 4경기에 교체 출전하며 단 1도움만을 기록했다. 이때 울버햄턴 홈페이지에는 '도대체 뭐하러 저런 선수를 데려왔는지 모르겠다'는 류의 비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

그러다가 전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글렌 호들이 부임하자마자 입지가 확연히 달라졌다. 호들 감독의 전술에 따라 최전방 공격수와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를 넘나들며 팀의 주전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12월 18일 크루 알렉산드라와의 홈경기에서 후반 25분에 교체투입돼 경기 종료 직전 정확한 크로스로 시즌 4호 도움에 성공하며 극적인 무승부를 이끌어냈다.[8] 12월 29일 브라이튼전에서 90분 풀타임을 소화한 뒤 2005년 새해 첫 경기인 플리머스 아가일과의 홈경기에서 기습적인 중거리 슈팅으로 울버햄튼에서의 첫 리그 득점포를 터뜨렸다. 이 경기를 기점으로 잉글랜드 무대 적응에 성공했음을 알렸고 본격적으로 챔피언십에서 맹활약하기 시작했다. 1월 8일 밀월 FC와의 FA컵 3라운드에서 강력한 왼발 슈팅으로 짜릿한 결승골을 기록해 부임 후 5무1패로 첫 승 신고식을 하지 못하던 호들 감독에게 첫 승을 안겼다. 1월 15일 웨스트햄과의 홈경기에선 2개의 어시스트(시즌 5호, 6호)로 4:2 승리를 이끌어 팀의 리그 7경기만의 승리를 이끌었다. 1월 22일 밀월 원정에서는 경기 종료 직전 추가시간에 낮게 깔리는 벼락같은 중거리 슛으로 2:1 승리를 이끌었다. 리그 2호 득점에 시즌 4호 득점이다.[9]

FA컵 32강에서 아스날을 만났는데 티에리 앙리가 설기현과 경기 중 몸을 충돌할 뻔한 뒤 양팔을 닭날개처럼 퍼덕이는 몸짓을 해서 국내에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겁쟁이라는 뜻 외에 동양인을 비하하는 뜻이라고 인종차별 논란이 일었으나 일반적으로 동양인 비하 제스처로 쓰이는 것은 아니라서 가라앉았다.

2월 4일 선덜랜드와의 리그 홈경기에서는 헤딩으로 동점골을 만들었다. 리그 3호 득점에 시즌 5호 득점이다. 3월 5일 크루 원정에서 어시스트 2개(시즌 7호, 8호)를 몰아치며 4-1 역전승을 이끌었다. 3월 12일 프레스턴 원정에서는 동점골을 성공시켜 리그 4호, 시즌 6호 득점을 성공시켰다. 4월 16일 코번트리 시티 원정에서 치명적인 백패스 미스로 2:2 무승부에 빌미가 됐고 호들 감독에게 강한 질책을 듣기도 했다.#

2004-05 시즌 챔피언십과 각종 컵대회를 합쳐 총 40경기 6골 8도움을 기록했다. 설기현의 2004-05 시즌 활약을 보고 싶다면 울버햄튼 2004-05 시즌 리뷰를 보면 된다.

2004-05 시즌 (울버햄튼): 40경기 6골 8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EFL 챔피언십
37
28
9
4
8
칼링컵
1
1
0
1
0
FA컵
2
2
0
1
0
합계
40
31
9
6
8

1.4.2. 2005-06 시즌[편집]

2006년 1월 30일 박지성이 속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FA컵에서 대결하기도 하였다. 2005-06 시즌 통산 설기현은 챔피언십과 각종 컵대회를 합쳐 36경기 4골 4어시스트[10]를 기록했다. 다만 이 스탯들은 모두 전반기에 기록했었고, 후반기 들어 폴란드 공격수 토마스 프란코프스키의 영입[11]과 함께 주전 경쟁에서 밀림과 함께 피부 발진 등으로 컨디션 난조를 겪어 9경기 연속 결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즌 전 강력한 승격 후보로 꼽히던 울버햄튼은 설기현과 졸레온 레스콧이 버티고 있음에도 7위[12]라는 실망스러운 성적으로 승격에 실패했다. 결국 호들 감독은 팀을 떠나고 레스콧과 함께 EPL 클럽의 강력한 러브콜을 받게 되었다.

울버햄튼 구장에는 설기현이 7000번째 골을 넣었다는 문구가 적혀있다. https://youtu.be/N-DiGYW0IEU?t=346

2005-06 시즌: 36경기 4골 4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EFL 챔피언십
32
22
10
4
4
칼링컵
2
2
0
0
0
FA컵
2
2
0
0
0
합계
36
26
10
4
4

1.5. 레딩 FC[편집]


파일:20201229_163844.jpg

2006-2007

통산 34경기 4골 5도움


1.5.1. 2006-07 시즌[편집]

2006년 7월,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한 챔피언쉽 우승팀인 레딩 FC로 이적하며 박지성, 이영표에 이은 한국인 3호 프리미어리거가 되었다. 당시 레딩은 구단 최고 이적료를 지불하며 기대를 보였다.

이적 초기에는 EPL 선수랭킹 11위에 오르는 등 EPL에서 상위급의 선수로서 활약했으며, 레딩에서도 이달의 선수로 선정되는 등 팀의 핵심으로서 활약했다. 데뷔전인 미들즈브러와의 홈경기에서부터 어시스트로 공격포인트를 기록했고, 2R 아스톤빌라 원정에서도 선제골을 어시스트해 2경기 연속 공격포인트를 기록했다. 5라운드 셰필드 유나이티드 원정에서 짜릿한 왼발 슛으로 자신의 첫 프리미어리그 골을 터뜨렸다. 6라운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홈경기에서는 이날 1년 만에 복귀전을 치른 레프트백 가브리엘 에인세를 혼쭐을 냈다.[13]


특히 7라운드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전에서 요시 베나윤을 농락하고 기록한 결승골은 입이 쩍 벌어질 정도의 슈퍼골이다.[14]

13라운드 찰튼전에서는 공격수로 출장하여 헤딩으로 시즌 3호골을 득점했다.

이 초기의 엄청난 활약을 바탕으로 설바우두라는 칭호까지 얻게 되는데 어원을 생각하면 얼마나 큰 기대를 받았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심지어는 EPL 07/08시즌 오프닝에도 출연했었을 정도로 활약상이 컸다.

그러나 본인은 윙어가 아닌 최전방 공격수를 소화하고 싶다는 고집[15]으로 인해 스티브 코펠 감독과 갈등[16]을 빚기도 했고 저 여파로 인해서인지 이후 후반기부터 점점 부진의 늪에 빠져 결국 4골 4어시스트로 시즌을 마감했다.

2006-07 시즌: 31경기 4골 5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7
22
5
4
4
FA컵
4
4
0
0
1
합계
31
26
5
4
5

1.5.2. 2007-08 시즌 초[편집]

풀럼 FC와의 링크가 진해지며 이적설이 돌았으나 레딩의 스티브 코펠 감독이 설기현의 이적설에 대해 극구 부인했으며 설기현도 레딩에서 시즌 초반 경기를 소화하며 이적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적시장 마지막 날 풀럼과 레딩 양 구단이 설기현과 리암 로세니어의 트레이드에 합의하며 풀럼으로 팀을 옮기게 되었다.

2007-08 시즌 (레딩): 3경기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
2
1
0
0
합계
3
2
1
0
0

1.6. 풀럼 FC[편집]


파일:20201229_163806.jpg

2007-2010

통산 26경기 2골 2도움


1.6.1. 2007-08 시즌[편집]

풀럼의 스폰서이던 LG의 영향도 있어 보이나 등번호로 7번을 달기도 했던 만큼 팀 내 대우나 입지는 괜찮아 보였다. 그러나 설기현 영입을 추진한 로리 산체스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고 로이 호지슨이 부임하면서 입지가 크게 좁아진다. 베스트11을 고집하는 조직력 축구의 신봉자였고 교체를 통한 전술 변화도 잘 주지 않는 호지슨 밑에서 변변한 출장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사실 호지슨은 선수교체나 베스트11을 잘 안 바꾸는 편이기도 했고, 한번 전력 외 구성이 되면 잘 안 쓰는 감독이었다.

2007-08 시즌 (풀럼): 15경기 2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12
4
8
0
1
칼링컵
1
1
0
0
1
FA컵
2
0
2
0
0
합계
15
5
10
0
2

1.6.2. 2008-09 시즌 초[편집]

08~09시즌을 앞둔 한국 투어에서 부산, 울산전에서 어느정도 인상적인 플레이를 보여주며, 출전의 기대감을 보여줬다 2008-09 시즌 개막전 헐 시티 원정에서 선제골을 기록한 것이 풀럼에서의 유일한 리그 득점이었다. 뒤이어 아스널과의 경기도 선발 출전했지만 호지슨의 구상에는 점점 없어졌다. [17]

2008-09 시즌 (풀럼): 6경기 1골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4
2
2
1
0
칼링컵
2
2
0
0
0
합계
6
4
2
1
0

1.6.3. 알 힐랄 FC (임대)[편집]

파일:/image/001/2009/01/29/PYH2009011604200001300_P2.jpg
결국 사우디 알 힐랄로 6개월 임대를 떠났다.

2008-09 시즌 (알 힐랄): 26경기 1골 6도움

1.6.4. 2009-10 시즌[편집]

알 힐랄로 완전이적하지 않고 마지막 도전을 위해 계약 기간이 1년 남은 풀럼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극히 적은 출전시간만을 부여받았고 결국 2010년 1월, 풀럼과의 계약을 상호 합의 하에 해지했다.

2009-10 시즌: 5경기 1골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
0
2
0
0
칼링컵
1
1
0
0
0
UEFA 유로파 리그 예선
2
1
1
1
0
합계
5
2
3
1
0

1.7. 포항 스틸러스[편집]


파일:/image/139/2010/12/14/SK004_20101214_130101.jpg

통산 18경기 7골 3도움


1.7.1. 2010 시즌[편집]

K리그로 복귀하며 축구팬들에게 회자될만한 먹튀전설을 쓰기 시작하며, 그 첫 단추가 포항 스틸러스 입단이었다. 포항의 1년 연봉 12억을 완전히 먹고 튄 것 정도까진 아닌데 중요한 부분에서 말아먹는 바람에 평가가 매우 안 좋아졌다. 거기다 이후 행적들은 포항 팬들의 신뢰를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우선 부상이 너무 잦았다. 포항 입단 직후 첫 훈련에서 부상을 당해 3월, 4월, 5월 경기에 나온다, 안 나온다 하더니 결국 반 시즌을 그냥 날려먹었다. 그래도 후반기 들어와 골도 기록하고 나름대로 밥값은 해주나 했는데...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 포항이 8강 2차전 조브아한과의 경기에서 결정적인 찬스를 허무하게 날려 팀의 무승부에 일조[18]하면서 제대로 욕을 먹고 삐걱대기 시작하였다.



이 슛은 여러가지 이름으로 놀림거리가 되는데,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도 포항 팬들 사이에서 한가위 대보름 폭발슛, 포항제철 대붕괴슛, 용광로 대폭발슛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아쉬워하는 설기현과 어처구니없어하는 박창현 당시 감독대행,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닌 서포터즈, 맨 마지막 리플레이까지 봤다면 매우 심하게 화가 나 죽일 기세로 달려오는 모따까지 포항 관계자 모두가 절망했다.

파일:external/www.steelers.co.kr/%EC%A1%B0%EB%B0%94%ED%95%9C~1(2).jpg
아이러니하게도 모따는 전부터 '설기현에게 패스하면 골 넣는다는 감이 온다'라고 인터뷰를 하는 등 설기현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파일:external/sccdn.chosun.com/2011021101000752000054781.jpg
이후 서포터즈들과 서로 주먹감자를 주고 받는 좋지 않은 장면을 연출했지만 그래도 본인 입으로 당연히 재계약 의사를 내비치면서[19] 계약이 끝난 뒤에도 2월까지 팀에 잔류하자 팬들도 당연히 설기현이 팀에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쉬운 조브아한전의 실책을 빼면 괜찮은 활약을 보여준 설기현을 지나친 비난한 것에 대한 화해의 표시로 생일파티[20]까지 열어주었다.

그러나 잔류하겠다는 발언부터 이 모든것이 거짓이었다. 당연히 재계약 할 것이라고 한 뒤 딱 2달만에 당연히 재계약 하지 않았다.

재계약 하지 않은 배경으로는 새 감독 부임 후 첫 동계훈련부터 스쿼드에서 제외된 부분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전반 시즌은 생각보다 깊었던 부상으로 인해 경기에 못나갔으나 후반에는 기록에서 보여주듯이 16경기에서 7골 3어시스트를 할 정도로 기량을 회복했으나 새 감독 부임 이후 사실상 그 다음 시즌이 출전이 불분명해져서 연봉을 대폭 낮춰서 출전 기회를 잡을 수 있는 팀으로 이적한 것으로 보인다.

서두에 언급된 대로 리그 스탯만 놓고보면 잘 했다. 하지만 그 연봉에 부상으로 시즌을 반 날려먹은 것과 결정적 순간에 한가위 대보름 폭발슛의 임팩트가 너무 컸다. 지나친 비난에 팬들과도 충돌하는 등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시즌이 끝난 후에는 팬들도 부상이 본인의 자의도 아니고 괜찮은 스탯을 보이다가 실수한 만큼 다음 시즌엔 더 잘 해보자고 생일 파티를 열어준 것이고, 설기현도 이에 부응해 당연히 재계약을 할 것처럼 언론에 흘리다가 기미도 없이 갑자기 라이벌 팀 울산으로 이적해버렸으니 포항 팬들 입장에서 배신감이 매우 큰 사건이었다.

사실 설기현의 커리어 내내 언급되는 통수는 거진 이 패턴인데, 이적이나 은퇴나 모두 선수 본인이 할 수 있는 판단이고 직장 선택의 자유이다. 그러나 프로 축구라는 것은 팬층이 있어야 성립이 되는 것이기에 똑같은 이적을 하더라도 이들에게 배신감을 주는 형태로 해서는 서로 좋은 말이 나오기 어렵다. 설기현은 항상 시즌 직후에는 구단에 잔류하겠다, 충성하겠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혼자서는 항상 다른 계획이 있었다. 그리고 그 혼자만의 생각이 확고하게 굳어지면 이전까지 했던 말이 뭐였든 바로 뒤도 안 돌아보고 구단에 퇴단 통보를 해버리는 식이라서 자주 논란이 되었다.

2010 시즌: 18경기 7골 3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K리그
16
16
0
7
3
AFC 챔피언스 리그
2
2
0
0
0
합계
18
18
0
7
3

1.8. 울산 현대[편집]


파일:/image/382/2011/11/26/42155104.2.jpg

통산 45경기 9골 10도움


1.8.1. 2011 시즌[편집]

결국 시즌 개막 직전 그 많은 팀들 중에 하필이면 포항의 자타공인 라이벌 울산으로 이적하면서 포항 팬들에게 죽일놈으로 찍혔다.

특히 이적하면서도 좋은 소리를 못 들은 것이 본인은 최전방 공격수 자리에서 뛰고 싶은데 팀에선 자꾸 윙 포워드를 강요한다고.[21] 하지만 본래 볼 터치가 둔탁하고 골 결정력이 떨어지는 대신 돌파력과 크로스가 역대급인 선수라 포항 입장에선 당연히 윙 포워드로 쓰고 싶을 수 밖에 없었다.[22] 최전방 공격수 자리를 찾아간 울산에서도 윙 포워드가 제 포지션이라 보고 측면으로 돌렸다. 막상 떠나온 포항에서는 슈바가 부상으로 전반기 결장을 했던 탓에, 남아있었다면 설기현 본인이 원하던 최전방 공격수 자리에 반시즌이나마 기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못내 포항 팬들에게 미안했는지, 2011년 4월 23일 리그 7라운드에서 벌어진 포항 홈에서의 동해안 더비[23]에서 한 번 더 포항을 상대로 홈런볼을 차줌으로써 포항 팬들이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게 만들었다. 물론 안 좋은 의미로.

파일:attachment/설기현/seolbillpaper.jpg

K리그/2011년 챔피언십 플레이오프에서 친정팀 포항을 상대로 페널티킥을 얻어내고 성공! 이것이 그대로 결승골이 되면서 울산을 챔피언 결정전으로 진출시킴과 동시에 챔피언스 리그 티켓을 따냈다.[24] 반면에 포항은 K리그의 챔스티켓이 3.5장으로 줄면서 플레이오프를 노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2011시즌 성적은 정규시즌과 PO, 컵 대회를 모두 합쳐 45경기 9득점 10도움. 포항-울산 시절이 통수로 자주 회자되지만 세간의 인식과 달리 울산에서의 설기현은 나쁜 선수가 아니었다. PO 5경기 2골 2도움을 빼고 정규시즌만 따지면 29경기 3골 5도움으로 연봉에 비해 공격포인트는 적긴 했으나 유럽에서도 먹힌 피지컬을 앞세운 요란한 돌파로 반대편의 인사이드 포워드 박승일과 함께 상대팀 바이탈 존을 헤집으며 포메이션 상으로만 최전방이지 실제로는 뒤로 쳐져 미드필더들과 함께 움직인 김신욱의 보좌 역할을 잘 해내 철퇴축구 1기의 준우승에 공헌했다.

돌이켜 보면 그나마 울산 시절이 공헌도, 임팩트, 헤어지는 과정 모든 면에서 가장 양호했다고 할 수 있다. 노쇠화가 완연했던 인천 시절과 달리 포항, 울산의 설기현은 부상으로 못 나왔을 때를 제외하곤 활약이 좋았다. 울산에선 시즌 절반 정도 날린 포항 시절보다 많이 출전하며 철퇴축구 탄생에 기여했고, 가장 중요한 플옵에서는 꽤나 몰아치면서 챔스 티켓에 공헌한 바 있고, 라이벌 팀인 포항에서 울산으로 이적한 것보다야 울산에서 인천 이적한 것이 낫다.

팀내 후배들과 사이도 좋았고 많은 후배들이 따랐다고 한다. 이 시기를 함께 한 김신욱도 2017년 울산 시절을 기억하며 "개인적으로 선수 때 제일 존경하는 선배를 꼽자면 인간적으로 성장시켜준 것이 설 코치님", "선수였지만 전술이나 팀을 이끌어가는 것이 탁월했다." 등으로 언급했다.
#

2011 시즌: 45경기 9골 10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K리그
29
29
0
3
5
K리그 PO
5
5
0
2
2
러시앤캐시컵
7
6
1
2
3
FA컵
4
3
1
2
0
합계
45
43
2
9
10

1.9. 인천 유나이티드 FC[편집]


파일:/image/343/2013/08/10/20130810231_59_20130810223303.jpg

2012-2014

통산 77경기 13골


1.9.1. 2012 시즌[편집]

2012 시즌을 앞두고는 연봉 문제로 울산 현대와 다투는가 싶더니 인천 유나이티드 FC로 이적했다. 허정무 감독과의 인연이 큰 이적을 결심하는데 역할을 한듯. 연봉을 울산에서 받던 수준의 절반으로 줄이고, 인천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한 후 지도자 준비를 할 것이라 밝혔다.

포항 시절보다는 좋게 헤어졌음에도 한 동안 울산 팬들에게도 통수 소리를 들었는데, 전지 훈련에도 참가하고 재계약할 것처럼 이야기하더니 또 갑자기 인천으로 이적했기에 울산 팬들에게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로 인해 포항과 울산에서 모두 뛰었음에도 두 팀 팬들 모두에게 욕먹는 거의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물론 전지훈련 참가 후 이적하는 일이 희귀 케이스도 아니긴 하지만, 상기한대로 설기현 이적의 대부분은 "이 선수는 당연히 남겠지" 라는 기대감을 본인이 열심히 심어놓고선 갑자기 뒤도 안 돌아보고 이적해버리기 때문에 논란이 생겼다.

2012년 11월 18일 인천 유나이티드와 대전 시티즌과의 경기에서 관중슛 사건을 홈에서 저질렀다.# 무슨 이유에서건 관중석을 향해 공을 찬 것은 비상식적인 행동이다. 비록 심판은 옐로 카드로 넘어갔지만 어린 관중에게라도 맞았다면 큰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이후 언론에 밝힌 바로는 설기현 본인은 판정에 불만을 품고 공을 광고판에 찬다는 것이 그만 관중석으로 날아갔다고, 당연히 네티즌들은 그것조차 개발로 홈런을 치냐고 신나게 깠다.

다음날 19일 인천 공식홈페이지를 통해 사과문을 게재했다.
설기현입니다.
먼저, 어제 경기중의 의도치 않은 실수로 여러분들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어제 경기중의 일련의 일들을 여러분께서 모두 보셨기 때문에 상황은 따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팀의 고참선수로 후배선수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소 흥분된 상태에서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했던 것 같습니다.
어제의 제 실수로 인해 불편을 겪으신 많은 분들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이점, 깊이 반성하고 있으며 앞으로 보다 성숙된 모습으로 경기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설기현 올림

사과문을 올렸다지만 너무 경솔한 행동이었으며, 설기현 정도의 위치와 나이라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이었다.

2012 시즌에는 여러 경기에서 활약하며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다.#

2012 시즌: 41경기 8골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K리그
40
37
3
7
0
FA컵
1
1
0
1
0
합계
41
38
3
8
0

1.9.2. 2013 시즌[편집]

2013 시즌 인천은 스플릿 A 그룹에 드는 저력을 발휘했지만 설기현 개인 활약은 평범했다.

2013 시즌: 29경기 5골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K리그 클래식
26
21
5
4
0
FA컵
3
2
1
1
0
합계
29
23
6
5
0

1.9.3. 2014 시즌[편집]

2014 시즌은 부상으로 단 7경기만 뛰고 시즌을 마치게 된다.

그리고 2015년 K리그 팬들 모두가 분노하게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2014 시즌: 7경기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K리그 클래식
7
6
1
0
0
합계
7
6
1
0
0

1.10. 현역 은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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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3일 K리그 클래식 개막을 4일 앞둔 시점에서 갑작스럽게 은퇴를 선언하고, 성균관대학교 감독[25]으로 부임한다고 한다. 전지훈련도 동참하고 심지어 이번에는 시즌 새 유니폼 모델까지 맡았기에 부상으로 경기 얼마 안 뛰고 연봉만 받아먹었던 2014년의 모습을 지우고 그래도 올해는 뭔가 기대에 부응해주지 않을까 했던 팬들의 당혹감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황이다. 거기다 인천에는 통역이 없어서 영어를 잘하는 설기현이 외국인 선수와 소통하는 역할을 맡았다. 포항 팬들과 울산 팬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천 팬들 역시 설기현을 크게 비난하고 있다. 설기현에 대한 이미지가 "시즌 개막 직전마다 일을 저지르는 선수"로 낙인찍히게 된 계기. 그리고 감독 겸 선수로 제의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연맹의 반대로 없었던 일로 되었다

파일:external/www.fmkorea.com/947193c9376cc1ce157cc7129579c67e.jpg
설기현의 은퇴에 대한 관중들의 답례.[26]

압권은 SEOL마했던 우리가 호9[27]였네, 레며 다린 개막 실은 뒤통수.

다행히 설기현의 일방적 계약해지이기에 인천 입장에서는 위약금 받으면 끝나는 일이지만, 설기현의 이해할 수 없는 행보로 인천의 1년 계획이 완전 틀어져버렸다. 설기현은 2014년 2년 계약을 맺어 2015 시즌까지 뛰기로 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지난 시즌 끝나고 진작 은퇴를 선언하며 계약을 해지했더라면 설기현에게 줘야 할 남은 1년치 연봉을 진작에 세이브하여 이석현, 박태민, 남준재, 문상윤, 구본상, 이보 중 몇 명은 지켜낼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이석현을 FC 서울에 헐값에 팔아치워버렸던걸 생각하면 더 열받는 상황. 게다가 김도훈 감독은 2015 시즌 케빈과 설기현 투톱 체제를 구상하고 있었기에 설기현이 갑작스레 은퇴해버린 현 시점에서 다른 자원을 억지로 투톱으로 올리거나, 여름 이적 시장이 열리기 전까지 케빈 원톱으로 버텨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28] 또 구단 측에서는 설기현의 은퇴를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그를 선수로 등록했기 때문에 로스터 자리에 그의 자리를 비우게 되었으며, 여기에 설기현이 훈련도 제대로 참여하고 각종 홍보물에 메인모델로 설기현을 두는 등 지난 시즌에 그렇게 먹튀 짓을 했음에도 설기현을 기용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여왔는데, 설기현의 은퇴로 그 홍보물들을 죄다 폐기해야 하는 상황까지 왔다. 때문에 안 그래도 돈없는 인천 유나이티드는 돈을 또 써야 하는 상황이 됐다. 한 마디로 팀에 도움 안 되는 민폐 짓만 저지른 셈.

설기현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나이 든 전력 외 선수가 나갔으니 그 연봉으로 다른 좋은 선수를 잡을 수 있지 않냐는 말을 하는데 위의 이유로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적시장 이미 다 닫혔고 인천은 선수들을 처분했으며 시즌 개막 4일 전인데 설기현에게 위약금 받는게 대체 인천에게 무슨 이득이 된다는 말인가?

이 와중에 대한축구협회에서 관리하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페이스북에서는 '설기현, 당신의 새로운 축구 인생을 응원합니다. 지도자로서 새출발하는 설기현 선수에게 응원 메시지를 보내주세요! 3분을 선정해 설기현 선수 친필 사인 축구화를 드립니다.'라는 멘트를 올려 인천과 포항 팬들을 비롯한 K리그 팬들의 어그로를 제대로 끌었다. 물론 댓글창은 포털 사이트 못지 않게 전쟁이 일어났다.

앞서 각주로 언급된대로 설기현에게는 감독 경력도, 1급(A) 지도자 자격증도 없기 때문에, 성균관대에서 내세운 감독 채용 응시자격과도 맞지 않는다. 이 때문에 성균관대 축구부 내부에서도 반발이 있었다.

이 와중에 설기현은 은퇴 기자회견에서 "지도자를 할 것이라면 감독을 먼저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나의 철학을 실현하고 검증받기 위해서는 감독으로 시작해야 한다. 내 경험을 내 팀에 입힐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것이 감독이다. 코치로 시작하면 그런 축구를 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라는 경솔한 발언으로 멋모르고 실드치던 이들마저 떠나보내는 저력을 발휘하였다. 참고로 전남에서 스태프 생활을 시작해서 2013년 포항 스틸러스더블 달성을 이끌며 명감독으로 인정받은 황선홍도 시작은 전남 드래곤즈 2군 코치로 시작해[29] 전남 수석 코치 → 부산 아이파크 감독 → 포항 감독으로 차근차근 시작했다. 현재 K리그 최고의 감독 중 하나인 전북 현대의 감독, 최강희도 코치로 스태프 커리어를 시작했다. 2014년 월드컵에서의 졸전으로 당시 한창 욕을 먹던 홍명보도 어쨌든 먼저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30]

물론 선수 생활 끝나자마자 바로 감독을 맡는 경우가 아예 없는건 아니다. 단적인 예로 한때 프리미어리그에 있었던 미들즈브러의 전 감독이었던 가레스 사우스게이트는 2005-06 시즌까지 현역으로 있다가 현역 은퇴를 하자마자 다음 시즌인 2006-07 시즌부터 감독을 맡았다.[31] 하지만 이 경우는 사우스게이트가 미들즈브러의 주장이자 팀의 중심이었고, 사우스게이트 이전 감독이었던 스티브 맥클라렌 밑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으며 선수 생활을 했는데다 미들스브로 구단에 베테랑 코치들이 많기 때문에[32] 이들이 사우스게이트를 보좌해줘서 가능한 일이었지만[33] 설기현은 지도자 수업을 받은 적도 없고, 감독 생활을 시작할 성균관대와는 어떤 연관도 없다.

하지만 설기현의 경솔한 발언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은퇴식에서 그는 "사실 3년 전부터 은퇴를 생각했다.", "내가 인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인천에는 케빈이라는 좋은 공격수가 있다. 전력 공백은 특별히 없을 것이다", "김도훈 감독님은 너무나 흔쾌히 결정을 해줬다. 사실 서운하기도 한데, 그런 부분이 도움이 됐다"는 등, 본인은 농담이라고 하지만 정작 인천 구단 관계자 및 팬들을 더욱 화나게 하는 발언을 했다. 구단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없으니까 은퇴해도 된다? 여러 팀에서 주전 경쟁을 위해 열심히 뛰고 있는 선수들을 무시하는 발언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케빈이 인천에 오게 되면서 설기현이 더욱 중요해진 것이 인천은 통역사가 없기 때문에 선수단중 영어를 제일 잘하고, 해외 경험이 많은 설기현이 통역사 대리를 해 주고 있었다. 그것도 자기가 자청해서 게다가 케빈은 인터뷰에서 대놓고 벨기에 리그 시절 설기현을 언급했을 정도이다. 은퇴 선언 얼마전 인터뷰에서도 "케빈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도록 최대한 적응을 돕겠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갑자기 은퇴해버린 것이다. 이대로라면 케빈은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팀 멤버들과 같이 뛰어야 한다.[34]

포털 사이트에서는 설기현을 옹호하는 댓글의 의견 대부분이 직장에서 일하는 도중에 더 좋은 제안을 건넨 직장이 있는데 당연히 거절할 수가 있겠냐라며 옹호를 하지만, 애초에 예시가 틀렸다. 그들이 말하는 예는 이적 시장 종료를 며칠 앞두고 이적 의사를 명확히 표시한 선수들에 한해서만 예시가 맞다. 어떤 사람들은 인천 유나이티드 구단이 삽질을 계속 하고 있었으니[35] 설기현도 팀에서의 입지가 불안하니까 은퇴한 게 아니냐고 왜 설기현이 욕 먹냐고 하는데 중요한 것은 설기현의 은퇴 여부가 아니고 설기현의 은퇴 시기다.

설기현이 그동안 잦은 부상으로 인해 몸 상태가 안 좋아 좋은 전력이라고 평가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시기가 너무 안 좋았다. 한참 시즌을 준비해야 하는 2 ~ 3월에 전지 훈련도 꼬박꼬박 참가하고 홍보 모델로도 참여하면서 은퇴에 대해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다가 이적 시장이 다 끝나가고 시즌이 개막하는 시점에 갑자기 은퇴를 하니, 이를 대비하지 못 한 구단으로서는 어이가 없을 수 밖에 없다. 본인이 뛴다고 하여 믿고 다른 선수들을 처분하고 유니폼 모델까지 맡겼는데, 누가 저런 행동을 하는 사람을 당장 은퇴할 사람으로 보겠는가?

거기다 쭉 언급되어 있지만 설기현이 과연 리더십을 지니고 유럽 경험까지 있는 고참 선수는 팀에 당연히 필요하고 그렇기에 유니폼 모델까지 맡겼으며 외국인 선수와의 소통까지 맡고 있었으니 경기를 얼마나 출전하는지와는 무관하게 설기현이 정말로 입지가 불안정한 정도였는지는 의문이 있다. 위에 언급된 대로 인천이 이 시즌 전에 내보낸 선수들과 남아 있는 공격수 현황을 보면 설기현은 분명히 케빈과 함께 공격에서 중요한 롤을 수행해야 할 선수였다. 과연 입지가 불안한 선수였는가?

그의 은퇴에 대해 인천의 한 관계자는 "인천이 기분 좋게 보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싸울 수도 없다. 꽃다발을 전해주기는 하지만 아름다운 이별로 보기는 어렵다"라고 말했고 # 김도훈 역시 시기가 아쉬웠다며 올 시즌 그를 중요 선수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시즌을 앞두고 커다란 공백이 생겼고, 당초 짜놓았던 전력 운용에도 차질이 있다며 케인과 역할 분담을 해줄 대안이 막막해 제로톱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밝혔다.# 한마디로 인천이나 김도훈 감독이나 가겠다고 하니까 배웅은 해주겠는데 결코 좋다고는 말하지 못 하는 상황이다.

다 떠나서 설기현 본인 입으로도 갑작스러운 은퇴라고 했고 그 계기는 감독직이라고 밝혔다. 외부에서 더 좋은 제의가 오니까 현 소속팀의 미래는 생각하지 않고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은퇴 시기는 개막 4일 전이다. 이런 판단은 축구계에서도 절대 일반적이고 문제가 없는 행동이라 할 수 없으며, 인천 팬들 입장에서 배신감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참고로 같은 시즌 은퇴 예정자였던 차두리는 시즌을 전부 소화하고 소속팀인 FC 서울에 FA컵 우승을 안겨주며 은퇴했고, 설기현 은퇴 직전까지 같은 팀이었던 이천수는 연봉을 자진삭감하고 팀에 잔류했으며 팀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맡아 인천이 막판까지 상위스플릿 경쟁, FA컵 결승까지 올라가게 만드는데 공헌한 끝에 인천 팬들의 감사를 받으며 은퇴하였다. 선수 생활 내내 트러블 메이커였지만 인천에서만큼은 아름답게 헤어졌으며 그 덕분에 이후 인천 프런트에서도 일했다. 같은 2002 맴버들이 이런 좋은 모습을 남기며 은퇴했기에 더더욱 비교가 되었다.

이후 국가대표팀 은퇴식을 2015년 10월 13일에 있었던 자메이카와의 평가전 하프 타임에 치렀다. 하지만 설기현이 은퇴 과정에서 워낙 대형사고를 쳐놓은지라 "뭐하러 저런 사람에게 은퇴식을 치러주냐?"는 부정적인 의견도 많았고, 실제로 하프 타임에서도 강한 야유가 나오기도 했었다.[36] 그러나 국가대표 은퇴식이기 때문에 명분상으로는 큰 문제가 되지 않기는 하다.


2. 국가대표 경력[편집]




2.1.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편집]


1999 FIFA 월드 유스 챔피언십 나이지리아에도 참가한 유망주였으며, 이후 2000년 1월 23일 뉴질랜드와의 친선경기에서 데뷔하여, 2002년 FIFA 월드컵, 2006년 FIFA 월드컵 등에 참가하였다.


2.1.1.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편집]

1 이운재 · 2 현영민 · 3 최성용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유상철

VC
· 7 김태영 · 8 최태욱
9 설기현 · 10 이영표 · 11 최용수 · 12 김병지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이민성 · 16 차두리
17 윤정환 · 18 황선홍 · 19 안정환 · 20 홍명보

C
· 21 박지성 · 22 송종국 · 23 최은성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1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6677aa; font-size: 0.8em"
감독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거스 히딩크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박항서
스태프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핌 베어벡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정해성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김현태 · 파일:미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압신 고트비


특히, 2002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동국 등을 제치고 설기현을 발탁하였다. 대회 전 히딩크 감독은 설기현만 오면 다 해결된다고 할 정도로 강한 믿음을 보였고, 실제로 부상으로 제 컨디션이 아니었던 독일전 이전까지 붙박이 주전으로 활약한다. 특이한 점은 히딩크는 설기현 하면 흔히 생각되는 크로스 중심의 윙어가 아니라 오히려 당시에는 생소했던 인사이드 포워드에 가깝게 기용하였다.[37]

2002 월드컵을 5일 앞둔 시점에 프랑스와 가진 평가전에서 박지성의 동점골에 이은 역전골을 넣어 이름을 알렸다. 경기 자체는 후반전에 2골을 먹히고 2:3 패배로 끝났지만, 당시 디펜딩 챔피언이자 피파 랭킹 1위였던 프랑스를 상대로 잠시나마 2:1로 리드하는 상황을 만들어내어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파일:external/www.donga.com/200206180447.jpg
16강전인 이탈리아전에서 극적인 동점 골을 넣고 환호하는 모습


2002 월드컵 16강 이탈리아전에서 후반전 종료 직전인 43분에 0:1 상황에서 크리스티안 파누치에게 맞은 공을 그대로 차서 기적같은 동점 골을 넣으면서 경기를 연장전으로 끌고 가, 대한민국의 8강 진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로써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올랐고, 이때가 정점이었다.[38]
특히, 전반 44분 27초 파누치가 헤딩 경합 중 설기현을 팔로 강타하며, 핸드링도 했으나, 주심을 아무런 조치도 안하였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탈리아 선수가 설기현을 폭행 1.jpg}}} ||
파일:이탈리아 선수가 설기현을 폭행 2.gif}}} ||

그리고 8강전 전반 19분 23초[39] 스페인전에서 안정환에게 패스 받을때 명백한 온사이드 였으나, 오프사이드 오심을 당하기도 하였고

파일:2002 스페인전 오프사이드 오심 피해.jpg
파일:2002 스페인전 오프사이드 오심 피해 2.jpg


후반 종료할때 로메로에게 어깨를 밀려 넘어지는 파울을 당했으나 주심은 로메로에게 경고처리도 안하였다.



그리고 승부차기에서 키커로 골을 성공시켰다.


2.1.2. 2006 FIFA 월드컵 독일[편집]

1 이운재

C
· 2 김영철 · 3 김동진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김진규 · 7 박지성 · 8 김두현
9 안정환 · 10 박주영 · 11 설기현 · 12 이영표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백지훈 · 16 정경호
17 이호 · 18 김상식 · 19 조재진 · 20 김용대 · 21 김영광 · 22 송종국 · 23 조원희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1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250E77; font-size: 0.8em"
감독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딕 아드보카트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핌 베어벡
스태프
파일:미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압신 고트비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홍명보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정기동
[각주]



파일:external/042ae47c476680d9782b024879be333d8d2847e67dfc1ae7e7442ef3fe0e9c36.jpg
2006 독일 월드컵에서 앙리와 유니폼을 교환하는 모습

2006년 FIFA 월드컵에서 프랑스전 후반에 크로스 패스를 날려 공이 조재진 머리에 닿았고 그 공은 결국 박지성의 발에 맞아 천금 같은 동점골을 기록하며, 프랑스에게 무승부 승점 1점을 얻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오른발을 많이 썼지만 양발이 두루 능숙해서 어느 발로도 중거리슛이나 세트피스 처리가 가능했다.


2.1.3. 이후[편집]

허정무 감독 체제에서도 꾸준히 기용되며 사실상 2010 월드컵에도 출전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2010년 3월에 인대파열 부상을 입은 후 월드컵 복귀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그리고 그 예상대로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하고 이후 국가대표 경력이 마감되었다. 사실 사람들이 체감을 못하지만 2010 월드컵에는 부상으로 빠진 설기현과 기행으로 빠진 이천수의 부재도 아쉬운 점이 있었다.[40]

3. 기록[편집]



3.1. 대회 기록[편집]







3.2. 개인 수상 기록[편집]


  • 발롱도르 후보: 2002[41]
  • 자황컵 체육대상 남자 최우수상: 2002


3.3. 수훈[편집]




3.4. 통산 성적[편집]



3.4.1. 국가대표[편집]

연령
출전

U-17
0
0
U-20
12
7
U-23
24
10
A대표
82
19
종합
118
36


4. 플레이 스타일[편집]




빠른 스피드, 유럽 선수들과 대등한 몸싸움이 가능한 피지컬, 정교한 크로스 3박자를 갖춘 양발잡이 측면 공격수로 한국 축구에서 상당히 드문 스타일의 선수다. 대부분은 앞의 셋 중 하나가 부족하며, 역대 한국 선수들 중에서도 그 셋을 모두 갖춘건 고정운손흥민 정도뿐이었지만, 고정운은 유럽 선수들을 상대로 피지컬에서 우위를 둘 정도는 아니었다. 설기현보다 EPL에 조금 더 빨리 입성했던 박지성이영표가 부족한 피지컬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서도 보기드문 스타일로 경쟁력을 갖춰서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했다면, 설기현은 매우 전형적인 플레이스타일로도 동양인이 피지컬에서 밀리지 않고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양발잡이에 피지컬과 스피드가 좋아 EPL에서도 공격포인트를 쌓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손흥민과 장점이 비슷하나, 국가대표에서 설기현과 같은 위치에다가 설기현의 주요 업적이던 프리미어리그 선수랭킹에서도 수시로 1위를 찍는 명백한 상위호환인 손흥민이 존재하기 때문에 후대에 와서는 2002년 대표팀 중 사람들이 잘 모르는 편이다.

2002년 월드컵 당시 주전을 놓고 경쟁하던 부평고 듀오 이천수최태욱은 스피드와 크로스는 좋았으나 170 초반의 단신이라 몸싸움이 안됐고, 설기현 이상의 스피드와 몸싸움으로 유럽 선수들을 압도할 수 있었던 차두리는 크로스가 부정확하고 골결정력도 부족했다. 그래서 히딩크는 유럽 선수들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으며 측면을 흔들어 줄 수 있는 설기현을 월드컵 무대에서 주전으로 기용하고 이천수차두리, 최태욱은 상황에 맞춰 백업으로 활용했다.[42] 히딩크는 설기현을 두고 "한국에서 유일하게 외국 선수들과의 몸싸움을 이겨내고 크로스를 올려줄 수 있는 선수"로 평했다. 2001년 대표팀이 공격수 부재에 시달렸을 때도 담담하게 "설기현만 오면 다 해결된다"는 답변을 남겼으며, 실제로 설기현 이후 대표팀에선 이 3박자를 갖춘 측면 공격수가 완전히 사라졌다.

특히 크로스를 평하자면 고정운 이후 대표팀에서 가장 정확한 크로스를 올리는 선수였다. 정확도는 물론이려니와 속도가 빨랐고, 각도 예리했다. 양발 잡이라 좌우도 가리지 않았으며, 정지상태에서 올리는 크로스 뿐 아니라 러닝 크로스도 한국에선 독보적이었다. 2023년 현재에도 설기현에 근접한 레벨의 크로스를 올리는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는 찾기 힘들며, 2002세대 이후 선수들이 런닝크로스는 커녕, 최성국(1983)이나 김민우(축구선수)처럼 오픈 찬스에서도 황당한 수준의 크로스를 올리는 일이 빈번했던 한국축구의 사정상, 한국 국대 역사에서 최고의 크로스 능력을 가진 선수를 논할 때 설기현은 반드시 거론되는 선수 중 하나이다. 2006년 독일 월드컵 프랑스전 박지성의 동점골 과정에서 올린 러닝 크로스가 좋은 예시인데, 무려 전성기의 에릭 아비달을 순간적으로 돌파해버리고[43] 파포스트로 크게 러닝 크로스를 올렸다. 이 크로스의 속도가 무척 빨랐던 데다 크게 휘어졌던 탓에 조재진을 마크하던 라이트백 윌리 사뇰이 낙하지점을 제대로 잡지 못해 조재진에게 쉽게 헤더를 허용했고, 가운데로 박지성이 순간적으로 쇄도해 밀어넣을 수 있었다.

피지컬도 한국 기준으론 스피드, 경합능력 모두 최상급이었고 유럽에서도 경쟁력이 있는 신체 조건이었으며, 키도 187cm의 장신이라 공중볼도 상당히 잘 따냈다. 이 강력한 헤더는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에서 뛸 시 크로스능력과 함께 대표적인 장점이었으며, [44]이러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약팀들을 상대할 때는 최전방 스트라이커로도 뛰었다. 왼쪽 윙포워드가 주포지션이었지만 양발 모두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어 오른쪽 윙 포워드로도 종종 뛰었고 클럽에서는 중앙 공격형미드필더로 시즌을 소화한 적도 있다.

단점은 둔탁한 볼터치와 떨어지는 축구지능. 그가 대표팀 생활 내내 지적받은 골 결정력 부족이나 패스 정확도 부족은 둔탁한 볼터치에 기인한다. 건장한 신체를 바탕으로 한 슈팅파워는 좋았으나 볼을 부드럽게 다루는 능력이 부족하니 공이 뜨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실제로 2002년 월드컵 당시 미국전에서 완벽한 찬스를 세 번이나 날려먹고 포르투갈 전에서는 후반 막판에 1대1 찬스도 말아먹는 바람에, 이탈리아전에서 동점골을 넣기 전까지 설기현은 정말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또한 박지성만큼의 축구지능을 가진 선수는 아니었기 때문에 공간 창출력이 부족해 다른 공격수들과의 연계 플레이가 약했다.

100m를 11초대에 주파할 정도로 주력은 빠른 편이지만,[45] 큰 키와 우람한 체격으로 인해 골문에서의 민첩성은 조금 떨어졌었다. 치고 달리는 것은 잘한데 막상 돌파 후 골문 앞에서의 최종 마무리의 섬세함이 아쉬운 편.[46]

결론적으로 설기현은 빠른 스피드와 양발에서 나오는 정확한 크로스, 강력한 피지컬을 보유한 대신 터치가 좋지 않고 골결정력과 축구지능은 떨어지는 편이었다. 따라서 이런 특성들 때문에 클래식 윙어의 역할, 라인파고 크로스가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설기현을 밑에둔 감독들도 설기현을 측면으로 기용하려 하고 그가 원하던 대로 중앙 공격수로 기용하려 하지 않았다. [47] 연계능력이나 공간창출 능력이 떨어지는 선수를 중앙에 세우면 효율이 떨어지는데다 스피드와 크로스는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후술할 내용과 같이 본인이 이 장점을 살리기보다 다른 포지션을 선호했다.

K리그에서의 행적이 좋지 않다보니 자주 비하당하지만 상당히 훌륭한 실력과 업적을 남긴 선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팬들이 저평가를 하게 되는 원인은 설기현이 심각한 외골수라는 것이며, 설기현의 최대 단점으로 커리어 내내 그를 깎아먹었다. 자기 생각과 고집에 빠져 지도자들과 잘 소통을 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자꾸 중앙 공격수로 뛰려는 황소고집을 부리는 것인데, 레딩에서도 이 때문에 스티브 코펠 감독과 갈등이 생겨 결국 이적하게 되었다.[48][49] 풀럼에서도 본인이 말하길 자기가 생각해도 하면 안되는 실수를 감독에게 해 사이가 틀어졌다고 말했기도 했다. 박지성은 설기현을 말할때 "기현이 형이 선수로서 잉글랜드에 있을 때 감독들이 좀 더 기현이 형을 믿고 계속해서 꾸준하게 출전 기회만 주어졌다면 다른 어떤 선수보다 가장 높은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을 정도의 선수다." 라고 했는데 지도자와의 트러블은 가장 가까이에서 본 동료들조차 가장 아쉬운 단점인듯.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이 고집 때문에 K리그에서는 이적할 때마다 팬들과도 척을 지고 이적을 하니 여론마저 악화되었다.

포지션 고집도 심한데 도전정신이 부족하다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로 주전 보장에 집착하였으며,[50] 이해가 되지 않을정도로 실력에 비해 너무 낮은 수준의 팀만 고집한 것도 문제였다. 대표적으로 2002-03 시즌 설기현은 RSC 안데를레흐트[51]에서 최고의 시즌을 보냈었는데, 월드컵에서의 활약에 유럽 무대에서의 활약까지 덧붙여 발롱도르 50인 후보까지 올랐을 정도였다. 이 시기 토트넘, 첼시 등 EPL과 라리가의 상위권팀에서 영입을 희망했을 정도 였음에도 이적하지 않았으며, 04-05 시즌 당시 벨기에를 떠날때도 에버튼이나 웨스트햄에서 관심을 보였다. 그럼에도 설기현이 선택한 팀은 엉뚱하게도 그 해 챔피언쉽으로 강등되었던 울버햄튼이었다.[52] 풀럼을 떠날 때도 분데스리가의 여러 팀에서도 관심을 보였지만 설기현이 선택한 곳은 황당하게도 중동의 팀인 알 힐랄이었다.[53][54]

물론 어떤 팀을 선택할지는 선수의 자유이고 주전으로 나오지도 못 할 높은 레벨의 팀을 고집하는 것도 안 좋지만, 설기현은 본인의 수준에 비해 너무 낮은 팀만을 골랐고, 이런 선택들로 본인의 전성기와 기회들을 약팀에서 날려버린 것은 아쉬운 점.울버햄튼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이 시절의 챔피언쉽 리그는 아주 전통적인 영국식 킥 앤 러쉬 위주로, 단순 피지컬만 보자면 EPL 보다도 거친 면이 있었다. 이런 선수들 상대로도 설기현은 피지컬에서 우위를 점하며 드리블로 둘, 셋을 뚫어내고 크로스를 올릴 정도였으니, 승격 0순위 팀이었음에도 팬들이나 동료 선수 조차 이 정도의 선수가 왜 2부에 왔는지 이해를 못할 정도였다. 이적한 팀들의 수준이 낮았기에 쉽게 주전이 가능했지만, 전성기에 한 단계 높은 도전을 하지 않은 점이 아쉬움이 남는다.

설기현이 안더를레흐트 선수시절 전성기를 맞이 했을때 허정무[55]는 설기현은 아직 부족한 선수라고 지적하긴 하였다. 볼터치 및 축구 지능 등의 이유로 인한 것 같은데 허정무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하기에는 허정무도 국가대표 감독 당시 즐겨 쓴 선수다. 부상 때문에 2010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했을 뿐.
[1] 청소년 대표 시절 1999 FIFA 월드 유스 챔피언십 나이지리아에 참가하였다.[2] 참고로 이 때 이상일이 KSK 베베런에 입단했으며, 설기현과 이상일은 한국 선수 중 최초로 벨기에 1부 리그에서 뛴 선수가 됐다.[3] 리그 10골,컵 대회 1골.[4] 1981~82시즌부터 분데스리가에서 5시즌 연속 10골 이상을 넣었다.[5] 이후 박주영(2010-11 시즌, 프랑스에서 리그 12골)과 손흥민(항목 참고. 여러번 이뤄냈다.), 석현준 (15~16시즌 포르투갈에서 리그 9골, 컵대회 2골), 권창훈 (17~18시즌 프랑스에서 리그 11골), 황의조(20-21 시즌 프랑스에서 리그 12골로 아시아 선수 최다골, 21-22 시즌 리그 10골까지 두 시즌 연속 리그 10골)가 유럽 리그에서 한 시즌 10골 이상을 기록했다. 그런데 스포츠서울은 설기현을 제외하고 석현준을 4번째 유럽 진출 선수 시즌 10골 달성이라고 기사를 냈다가 비난을 받았다.[6] 참고로 이 경기는 MBC에서 공중파 생중계를 편성하였을 정도로 관심과 기대가 높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갑작스런 뉴스특보로 인해 중계방송은 취소되었는데, 갑자기 무슨 뉴스특보인가 의아하다면 경기 날짜를 다시 한 번 확인하자.[7] 로얄 앤트워프는 설기현을 이적시킨 뒤, 03-04시즌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둥팡줘를 임대하면서 그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보기 좋게 2부리그 강등당하고 만다. 그리고 2015년까지도 줄곧 2부리그인 Belgian Second Division 신세이다.2020년 현재는 1부리그 소속이다.[8] 왼쪽 측면에서 절묘한 발기술로 앞에 있던 수비수 한 명을 벗겨낸 뒤 파포스트에 있던 레온 코트의 머리에 연결했다.[9] 악명높은 밀월 팬들은 설기현에게 인종차별적 야유를 퍼부었으나 정의구현을 당했다.[10] 트랜스퍼마크트에는 어시스트 수가 누락되어있으나 기사를 발굴해보면 4개의 어시스트를 했음을 알 수 있다. # [11] 그러나 프란코프스키는 울버햄튼에서 단 한 골도 넣지 못했다. 월드컵 예선에서 폴란드의 최다득점자로 활약했으나 울버햄튼에서의 부진과 함께 리버풀에서 주전 경쟁에서 밀린 예지 두데크 골키퍼와 함께 최종엔트리에서 제외되었다.[12] 6위 크리스탈 팰리스에 승점 8점이나 모자랐다.[13] 에인세는 후반 25분 교체되었는데 이때까지 개막전부터 보로의 레프트백 훌리오 아르카를 교체시킨 뒤, 2R 빌라의 제이로이드 새뮤얼, 5R 데이비드 언즈워스를 교체시켰다.[14] 이 골은 BBC에서 선정한 '06-07 EPL Goal of this season'에서 18위에 올랐다.[15] 저건 좋지 않은 고집이었다는 평가가 많은데 당시 레딩의 최전방 공격수 자리에는 케빈 도일이 확고하게 버티고 있었고 도일의 파트너로 르로이 리타와 저 둘의 백업 공격수로 셰인 롱과 데이브 킷슨도 괜찮은 활약을 하고 있었던 상황으로 최전방 공격수는 이미 포화 상태였기 때문이다. 저런 상황이다보니 윙어로 뛰었으니 레딩의 주축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이었으며 만일 설기현이 최전방 공격수를 뛰었다면 얼마 안가 주전 경쟁에서 밀렸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16] FA컵 경기에서 교체되어 나가는데 코펠 감독의 악수를 거절하여 논란이 되었다.[17] 훗날 밝힌바에 의하면 호지슨 감독에 대한 감정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고 한다. 본인이 왜 선발로 뛸 수 없는지 설명을 잘 해줬고, 이적하고 싶다면 본인이 알아봐 주겠다고 하는 등 최소한의 호의는 보였다고 한다.[18] 황진성이 킬패스를 찔러줬고 일대일 찬스에서 골키퍼까지 제쳐진 완벽한 빈 골문을 두고 허공에 공을 찼다. 저게 들어갔으면 2:0으로 앞서가는 경기였고 후반 막판 골을 먹어도 2:1로 연장까지 갈 수 있었다.[19] 12월쯤 감독 피셜 재계약 확신 인터뷰가 있는 거 보면 팀과 팬에게 재계약 한다고 한뒤 겨울 전지훈련에서 갑자기 마음이 바뀐 듯.[20] 설기현의 집에선 생일을 음력을 기준으로 삼는다고 하는데 포항 선수진들이 열어준 파티는 양력이 기준이었다. 즉 본의 아니게 생일파티를 두 번 연 셈. 그래서 황선홍 감독은 음력 생일에 이미 선물을 주었기 때문에 선물을 주지 않았다고.[21] 유럽 시절부터 감독과 드잡이질 많이 하는 선수였다. 그런 문화가 생소했던 한국 언론에서 왜 그렇게 감독하고 싸우냐고 묻자 유럽은 다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야 한다고 답하곤 했다. 물론 당시나 이후나 아시아계 선수들은 유럽에서 입지가 확고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자기 주장은 해야 밥그릇은 챙길 수 있지만, 역으로 입지가 확고하지 않은 선수가 외골수로 싸워대기만 하면 좋은 결과 받기는 어렵다.[22] 이후 나이가 들며 폼이 떨어진 인천에서는 최전방에서 뛰었는데, 골 득점보단 포스트플레이와 사이드로 빠진 후 자신의 장기인 크로스를 올려주는 역할을 맡았다.[23] 여러모로 볼거리가 많은 경기였는데 그 중 하나가 경기 시작 전 포항팬들이 철조망에 붙인 "설기현 선수에 대한 피해보상비 청구서(아래 짤방에 나온)"와 홈 경기 서산 개최에 따른 울산 팬들의 울산 구단 디스 현수막 등.[24] 비록 울산은 전북에게 합산스코어 4:2로 패배해 준우승에 그치나, 설기현 덕에 따낸 이 챔피언스 리그 티켓으로 1년 뒤 K리그 유일무이의 대기록,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무패 우승에 성공한다.[25] 지도자 1급 자격증이 없어서 올해 내로 딴다고 했지만 감독 모집 공고에 지원도 하지 않았으면 지원 조건에도 맞지 않다.#[26] 3월 7일 있었던 2015 시즌 K리그 클래식 개막전, 광주 FC와의 경기 중에 걸려있던 걸개들이다.[27] 인천에서 설기현의 등번호가 9번이었다.[28] 그나마 지난 시즌에 포텐을 터뜨린 진성욱이 있긴 하나, 아직은 한참 어린 선수이고, 여러 가지를 잘 하는 선수이긴 하지만 체력적인 면에서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무작정 주전으로 쓰기도 애매하다. 실제로 지난 시즌엔 디오고와 계속해서 주전 경쟁을 해야 했다. 또한 부상으로 초반에 어쩔 수 없는 결장을 하는데 이럴 경우 사실상 주전급 공격수는 케빈밖에 없다.[29] 게다가 그 와중에 해외 연수까지 다녀왔다.[30] 물론 홍명보는 자격에 맞지 않는 라이센스를 가지고 국가대표 코치를 맡았기에 논란이 있었다.[31] 물론 이 당시 지도자 자격증이 없어서 말썽이 있기는 했다. 1년 만에 따내기는 했지만...[32] 이 당시 사우스게이트 감독이 코치들 커피 심부름하는 장면도 자주 보였다(...).[33] 결정적으로 미들스브로는 사우스게이트가 감독이 된 뒤 조나단 우드게이트를 임대하고 로베르트 후트를 영입해 사우스게이트의 포지션인 중앙 수비 보강에 성공했다. 후트야 말할 것도 없고, 우드게이트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부상을 달고 와 초반에 경기를 뛰지 못했으나, 매우 좋은 활약을 보이며 결국 완전 영입 협상에도 성공했다. 이게 다 사우스게이트가 갑자기 은퇴한 것이 아니라 미리 은퇴를 이야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34] 설기현은 통역가가 아니므로 인천이 통역가를 구해야 하는 것이 맞다고 하는데 물론 원론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이 역시도 설기현이 미리 은퇴만 통보했다면 시즌 개막 전에 미리 통역을 구했을 일이다. 그럼에도 본인이 자청해서 케빈 적응까지 도와주겠다고 한 것이 설기현이다.[35] 김봉길 해임, 이임생 감독 임명 실패, 이석현을 매우 싼 값으로 FC 서울로 이적시킨 것 등.[36]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직관을 갔었던 사람들이 증언한 것이다.[37] 그래서 황선홍 자리에도 넣어봤으나 실패했고 오히려 이 실험에서는 안정환이 오히려 좋은 모습을 보여 중앙 공격수 플랜B를 담당하게 된다. 32강 조별리그에서 황선홍의 부상으로 거의 안정환이 선발로 뛰게 된다. 원래 주전은 황선홍이었다.[38] 사실 이 경기 전까지는 굉장히 찬스를 놓친 장면이 많았다. 비록 많은 찬스들을 만들 수 있던 것도 설기현이 유럽 선수들 상대로도 밀리지 않던 피지컬을 가지고 있던데다가 히딩크도 그 점을 적극 활용하였기 때문이지만, 골결정력은 다소 아쉬웠고 특히 비겼던 미국전에서 많은 찬스를 놓친 것 때문에 여론이 안 좋았다. 하지만 저 골로 그동안의 부진을 만회하는 소중한 골이었고, 더 나아가서 안정환의 미안함을 상쇄해 주는 중요한 골이었다. 안정환이 PK를 놓치고 멘탈붕괴 수준으로 흔들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 골로 인해 안정환이 연장전에서 평생 잊을수 없는 골든골을 넣었다.[39] 리플레이 장면이라 전반 19분 34초라고 나온다.[40] 설기현과 이천수도 있었으면 8강 진출도 충분히 가능 했다란 평가도 나온다.[41] 대한민국 최초[42] 2002 월드컵은 특이하게 미국전을 제외한 6경기가 유럽팀이었다. 폴란드,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터키. 미국도 남미나 아프리카보다는 유럽 스타일에 가깝다.[43] 1대1 상황에서 살짝 간을 보다 오른발을 뻗어 순간적으로 아비달의 리듬을 뺏고 바로 간결한 시저스로 가속을 붙였다[44] 여담으로 은퇴한 지금은 이따끔씩 방송에 나올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엄청난 수트빨을 자랑한다. 단순히 키만 큰것이 아니라 어깨와 덩치가 엄청나고 비율도 좋다.[45] 2002년 체력테스트 당시 12초 7을 기록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 당시 설기현은 부상 중이었다.[46] 그를 비하하는 가장 대표적인 별명이 설거북이었는데 사실 이건 오명에 가깝다. 주력이 빠르다는 서술이 자주 되어 있듯이 187cm의 선수치고는 그렇게 느린 편은 아니었는데 덩치가 크다 보니 느려보이기도 했고 골대 앞에서 어기적 거리는 모습이 자주 보여 당시 축구를 잘 모르거나 국가대표 축구선수라면 일단 까고보는 팬들에게 붙은 잘못된 별명. 여담으로 피파 온라인 4에서 설기현의 스피드 능력치가 낮은 편인데 안정환이 이를 보고 이영표보다 설기현이 달리기가 빨랐다면서 잘못 나왔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47] 2002월드컵에서는 준수한 포스트 플레이와 훌륭한 돌파를 보여주며 인사이드 포워드로써의 역할도 잘 해냈다. 다만 설기현이 뛸 당시에는 인사이드 포워드의 대표주자인 호날두와 로번도 각각 클래식 윙어처럼 오른쪽, 왼쪽에서 더 많이 뛰었던 만큼 윙어가 중앙 공격수의 역할을 동시에 한다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고 킥앤러시 스타일인 영국의 중하위권 팀 감독에게 히딩크 처럼 새로운 전술을 요구하는 것도 어찌보면 무리였다. [48] 당시 레딩에는 케빈 도일, 데이브 킷슨, 르로이 리타, 셰인 롱 등 이미 1군 공격수로 쓸 만한 선수가 네 명으로 시즌을 다 꾸릴만 했고 정확한 크로스, 빠른 스피드, 돌파력을 지닌 설기현은 오히려 오른쪽 윙어 쪽이 경쟁하기 더 쉬운 편이었다. 특히 레딩의 주전 공격수 케빈 도일과 르로이 리타 투톱은 EPL 승격 전 05/06 시즌 챔피언십에서 두명 다 챔피언십은 첫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케빈 도일은 45경기 18골, 리타는 26경기 11골로 두자릿수 득점을 할 정도였는데 그에 비해 설기현은 주로 윙어로 기용된 걸 감안하여도 챔피언십의 울버햄튼에서 04/05시즌 37경기 4골, 05/06 시즌 32경기 4골로 2시즌 동안 69경기 8골에 그쳤었다. 그러니 이미 저 네 명이 있는데 정확한 크로스, 빠른 스피드, 돌파력은 좋으나 볼 터치와 골 결정력이 좋지 않은 설기현을 저 선수들을 제끼고 굳이 공격수로 쓸 이유는 사실상 없었다. 사실상 편하게 주전으로 출장 할 수 있는 기회를 자기 스스로 내쳐 버리고 팀을 이적하며 커리어가 완전히 꼬여버린 것.[49] 이 문제는 한 때 시오 월콧도 겪었던 문제인데 아스날 입단 후 중앙 공격수로 뛰기를 원했던 월콧은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생각한 건지 16-17 시즌부터 벵거를 설득하여 오른쪽 윙어로 정착하는 데 성공했다.[50] 풀럼 시절엔 출장 경기 보장 조건 계약까지 있었다.[51] 지금도 그렇지만 벨기에 리그 최다 우승팀이기도 하고 당시 축구게임의 챔피언스리그에서 벨기에리그를 대표하는 팀이자 당시 히딩크호에서 단 둘 뿐인 유럽파였기에 2002WC 이전 국내에서는 후에 비교되었던 에레디비지에의 페예노르트는 커녕 아약스나 PSV도 가볍게 누르는 인지도를 지녔었다.[52] 물론 울버햄튼은 강등 되었음에도 선수 이탈이 거의 없었기에 당해 승격 0순위이기도 했다. 그런데 결국 05/06 시즌에 승격하지 못 했다.[53] 분데스리가가 지금같은 위상을 가지던 시절이 아니었더라도 당연히 알 힐랄보다 훨씬 수준 높은 팀들이 있는 세계 최상위 리그 중 하나다.[54] 유럽리그는 계속 발전하고 있고 자본이 집중되고 있다.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애매한 팀의 애매한 위치의 선수는 생각보다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한다. 헌데 설기현이 뛰던 시절을 생각하면 레딩에서는 그야말로 애매한 팀의 애매한 위치의 선수였고 풀햄은 재정적으로 좋은 팀이긴 하지만, 설기현의 위치상 생각보다 EPL에서 돈을 많이 벌지 못했을 수 있다. 울버햄튼은 당시 2부리그 소속이였으니 말할 것도 없고, 분데스리가는 특히 재정적인 면에서 당시의 EPL보다 많이 떨어지니 알 힐랄은 아마도 금전적인 이적이었을 것이다.[55] 허정무의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선수 보는 안목이 정말 좋다. 다만 전술에 있어서는 의문을 표하는 사람이 많지만, 비슷한 나이대의 국내 지도자들 중에선 전술 이해도가 높았던 사람이 허정무다. 허정무 입장에선 축구지능이 좀 만 더 높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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