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도(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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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선유도




1. 개요
2. 상세
3. 교통



1. 개요[편집]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에 있는 섬.


2. 상세[편집]


전라북도 군산시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섬으로 선유대교를 통해서 무녀도를 갈 수 있으며, 장자대교를 통해서 대장도와 장자도를 갈 수 있고 중심 지역은 선유도 본섬이다. 외형상으로는 두 섬이 물 위로 모래톱이 드러난 사주로 연결된 형태이다.

의외로 역사의 현장이었는데, 고려도경의 저자 서긍이 국신사[1] 대표로 고려를 방문했을때 고려조정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영접한곳이 바로 이곳 선유도 망주봉이다.[2] 영접단의 대표는 그 유명한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서긍의 고려도경이 한국 역사서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해보면 한민족 역사를 구성하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 두 사람이 만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서긍이 돌아갈때는 풍랑을 만나 이곳에서만 20여일을 묶었다.[3] 서긍이 묶은 장소는 망주봉 동쪽 객관터로 추정된다.

서긍의 기록에 의하면 오룡묘라는 사당이 있다고 했는데, 이 오룡묘는 지금도 내려오고 있는 전통 사당이다. 다만 건축물은 다 현대와서 지어진것이며, 원래 안에 삼신할매 탱화나 제기 같은 전통 유물들과 전설이 서린 청기와 등이 있었는데 광복 전후로 전부 도난당했다고 한다. 그 외에 자복사라는 작은 암자가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선유도 망주봉에는 왕의 임시 거주지인 행궁까지 있었는데, 무려 이름도 숭산행궁이었다. 숭산은 고려의 주산이라 할 수 있는 송악산을 달리 부르는 말이기도 했는데, 고려에서 망주봉을 얼마나 신성시 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다만 실제 왕이 행차한 경우는 없었는데 전근대 시절 항로는 매우 위험하고 고되었기에 왕이 배를 타고 장거리를 이동하는 경우는 전시가 아닌 한 없었기도 했고 행궁은 본래 전쟁이 일어나거나 왕이 순시할때를 대비해 미리 지어놓는 건축물이라 행궁이라 지어놓고 한번도 행차하지 않은것은 흔한 경우였다.[4] 또한 고려는 풍수지리를 매우 신봉하여 길지라고 여겨지는 터에 사찰이나 행궁을 지어 좋은 기운을 얻고자 하였는데 이 행궁 역시 그러한 용도였을 확률이 높다.

"군산"이라는 명칭의 유래가 된 곳이기도 하다. 좁은 섬에 사람이 모여있는것이 마치 산처럼 보인다고 하여 군산도라 불렸는데 고려시대부터 이미 군산진이 설치되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으며, 조선 태조때 까지도 금강과 만경강을 따라 내륙에 침입하는 왜구를 방어하고자 만호영이 설치되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조선 초기 이후 혼란스러웠던 북방이 안정되고 중국의 중심지가 화남에서 화북으로 이동하면서 육로와 산둥성-화성 항로가 발달 되고, 호남지방을 경유하는 항로들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한다. 또한 태종때 시행된 공도정책으로 인해 섬을 수호할 필요가 없게되자 세종 때 옥구군 북면 진포(현 군산)로 이전하면서 이름도 같이 가져갔다.

이후 군산도였던 이 섬의 이름은 고군산 이라는 명칭을 부여받았고 선유도로 다시 명칭이 바뀐다. 고군산이라는 명칭은 그후 군산일대의 섬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그 뜻이 확대되었다

벼랑에 배를 감출만한곳이 있어 풍랑을 만나면 예로부터 이곳에서 순풍을 기다렸다고 하며, 약 17세기경까지만 해도 왕릉으로 전해지는 제법 규모가 있는 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를 이웃고을 수령이 와서 도굴해갔는데 금은기명이 많이 나왔다고 하며, 수령은 주민들에게 고발 당하고 처벌이 두려워 도망쳤다고 한다.[5] 이 왕릉을 찾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애석하게도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고 한다. 풍수지리적으로 추측컨데 선유도 전월마을과 남악 마을 중간지점 남쪽 기슭[6] 혹은 선유도 통계마을 뒤편 남쪽 기슭 중단부[7]로 추정한다. 무덤의 주인은 아마도 삼별초에 가담한 고려 왕족이 아니었겠나 추측한다. [8]

이렇게 역사적인 현장 한 가운데에 있었다 보니 여타의 섬들 치고는 유물들이 상당히 많은편에 속한다.

현존하는 수묵화 중 가장 오래된것으로 추정되는 독화로사도가 이곳 군산도 망주봉을 그린것이다.

농수산물 생산이 성한 편으로 , 보리, 고구마, 고추, 마늘, 주꾸미, 꼴뚜기, 멸치, 양식도 성한 편이다.

관광 목적으로 간다면 섬 내 물가가 생각 외로 비싼 편이니 필요한 물품은 육지에서 싸게 싸게 조달해서 가는 게 좋다.

선유도해수욕장 바로 앞에는 주차장이 없고 제법 떨어진 곳에 주차장들이 있다. 대여용 2 ~ 3인용 이륜차, 둔버기, 전기바이크 등이 많이 있다.

3. 교통[편집]


연륙교가 없던 때는 3개 섬으로 분리된 곳으로 지금은 3개 섬에 2017년 12월 28일 연륙교 개통 이후 하나의 섬을 이뤘다.[9]

배는 군산항 1부두에서 승선할 수 있는데, 페리 요금이 편도 13,500 ~ 16,500원으로 비싼 편이며, 소요시간은 약 1시간 남짓. 비싸게 배를 타고 기껏 선유도에 갔더니 가까운 곳에서 보이는 새만금 방조제를 바라보면 기대치에 비하여 신비감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든다.

새만금 방조제 신시도 구간을 차로 지나갈 때 바다를 바라보면 육안으로 보이는 큰 섬이 선유도와 무녀도다.

2016년 7월 신시도무녀도 간 연륙교가 개통되었고, 이후 군산 버스 99가 선유도해수욕장 앞에 정차해 교통이 편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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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 예종의 사망을 애도하고 인종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사신단이었으며 배가 8척이 동원됐을만큼 큰 규모였다.[2] 본래 전근대시절 바닷길은 매우 위험하고 힘든여정이라 사신단같이 중요한 임무를 띈 경우에는 육로로 이동하는것이 관행이었으나 당시에는 거란과 여진의 힘이 커지면서 송과 고려의 육로길이 끊긴 상태여서 부득이하게 항로를 이용했다.[3] 14일을 묶여있다가 출발했는데 날씨가 안좋아 다시 되돌아왔다.[4] 왕이 행차해서 아무곳에서나 잘 수도 없거니와 대규모 수행원들을 수용할만한 민가도 없기 때문에 미리미리 지어 놓는것이다. 또한 행궁은 피난시 조정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5] 『신증동국여지승람』망경현 산천조[6] 1980년대까지만 해도 도굴된 고분의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7] 주민들이 증언하길 본래 대형고분군이 있었다고 한다.[8] 서긍항로와 군산도 영접 - 국립전주박물관[9] 날씨가 좋은 주말의 경우 일방통행 지역에 차량을 세우는 등의 상황이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