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영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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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조직폭력배 두목
,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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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칼
,본정,
하야시
,서대문,
김기환
,왕십리,
김남산
,마포,
정춘식

선우영빈
鮮于永彬[1]


파일:선우영빈.jpg

출생
1909년 7월 25일
평안남도 평양부 부산면 수산동
(現 평양시 룡성구역 룡성1동)
사망
1978년 (향년 69세)
서울특별시
본관
태원 선우씨
직업
조직폭력배, 기업인
학력
주오대학 (졸업)
수훈
철탑산업훈장 수훈

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에서
3.2. 드라마 야인시대
3.3. 개그공화국 코너 죽거나 힘들거나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조직폭력배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대한민국의 기업인.


2. 생애[편집]


1909년 7월 25일 평안남도 평양부 부산면 수산동[2][3][4]#(현 평양시 용성구역 용성1동)에서 태어났으며 일본 주오대학을 졸업하였다. 일본 우익의 원조 도야마 미쓰루[5][6]에게 발탁되어 겐요샤[7]에 들어가 사무라이가 되어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해 낭인들을 한반도, 만주, 중국 등에 보낼 때 한반도 대표로 다시 조선으로 건너와 메이지초(명동)에서 활동하면서 김두한과 대립 이후 김두한과 친분을 맺고 곤경에 처한 김두한을 도와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도야마 같은 일본 제국주의적 성향이 아닌 사무라이를 중시했다. 김두한과 대립 당시 부하가 암수를 썼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패배를 인정하고 자신의 성씨 선우씨 종친회를 지원하는 등에 다른 친일파들과 상반된 활동을 벌인다.

일본이 패망하고 광복을 맞이했을 때 부인과 부하들을 전부 일본으로 보내고 그는 조선에 남아 고향인 평양으로 올라갔으나 남북분단이 되어 북쪽에 공산정권이 세워지게 되자 월남하였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당시 1년 6개월을 받았고[8] 자책한 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내려가 일본삼영무역(日本三永貿易)주식회사를 창립, 사장으로 있으면서 일본과의 무역업에 종사하였다. 이후 휴전 협정이 체결되자 그는 서울국제시장(國際市場)주식회사 부사장으로 취임하였다. 한편 1956년에는 건설산업(建設産業)주식회사[9]를 설립, 경영하면서 1953년부터 1963년까지 한국건설업회(대한건설협회 전신) 이사를 지냈고, 1968년부터 서울 지부장을 역임하고,# 1974년 서울 지하철 건설 공로로 철탑산업훈장을 받는 등# 기업인으로 활동하는 한편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살았다고 하며 1978년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장군의 아들에도 같은 모티브의 인물이 등장하나 허구에 가깝다. 진위 여부는 가릴 수 없지만 김동회는 선우영빈이 하야시라고 불렸다고 하며 자신을 스카웃했다고 말했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3.1. 영화 장군의 아들[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하야시(장군의 아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2. 드라마 야인시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하야시(야인시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3. 개그공화국 코너 죽거나 힘들거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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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 프로그램 개그공화국의 코너 죽거나 힘들거나에서 희극인 나상규가 이 캐릭터를 패러디해 하야시 역을 맡았다.

[1]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나오는 명판에는 하야시 타로(林太郞)라고 나온다.[2] 1896년 평안남도 평양부 부산면 수산동 → 1914년 부군면 통폐합, 평안남도 대동군 부산면 수산리 → 1952년 군면리 대폐합, 평안남도 순안군 용성리 → 1963년 평양시 용성구역 용추동 → 1972년 평양시 용성구역 용추이동 → 현재 평양시 용성구역 용성1동.[3] 태원 선우씨 집성촌이다.[4] 매일신보 1936년 7월 7일자 기사 夜市街를 물드린 大邱의 殺人騷動[5] 일명 두산만(頭山 満). 아시아주의의 대표격인 인물이고, 일본 국가주의자의 상징중 하나이다. 을미사변의 배후이자 경술국치의 뒤에서 활약한 것으로 손꼽히는 겐요샤의 창시자이고, 갑신정변 이후의 김옥균이나 손문을 지원한 인물로도 유명하다.[6] 미디어에는 도호야마 미쓰루로 알려져 있으나, 頭山滿에서 頭山는 토-야마라고 읽는다. 도야마 미츠루가 아끼던 600년 전에 만들어진 칼은 천황이 한때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7] 을미사변을 주도한 단체이다. 패망 후 연합군에 의해서 강제 해산당한다.[8] 그러나 반민특위는 이승만의 방해로 와해되었다.[9] 1956년 선우영빈이 설립한 건설회사로 지금의 명동성당 앞 보림빌딩 자리에 본사를 두고 있었다. 남대문 상동교회 예배당(새로나쇼핑)도 이 회사가 건축했다. 그러나 선우영빈이 사망한 후 1982년 최종 부도 처리, 공중분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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