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서울

덤프버전 :

파일:다른 뜻 아이콘.sv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박성훈 감독, 봉태규 주연의 한국영화에 대한 내용은 썬데이 서울 문서
썬데이 서울번 문단을
썬데이 서울# 부분을
, 록밴드 중식이가 부른 노래에 대한 내용은 Sunday Seoul 문서
Sunday Seoul번 문단을
#s-번 문단을
Sunday Seoul#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 개요
2. 역사
3. 여담


1. 개요[편집]


파일:attachment/sdseoul1.jpg
1990년 10월 14일 제1130호의 표지. 표지의 모델은 김혜수이다.

어둠의 색깔은 총천연색이다.

나는 너무 빨리 까졌다.

여섯 살 때 좀도둑질을 해 봤고

전주 남부시장통 지하다방 레지 누나의 종아리가

지금도 기억난다.

나는 그때 미취학 아동이었다.

바른생활 책이나 월말고사 우등상보다

현란한 싸구려 화보가 나를 성장시켰음을 고백한다.

부르는 소리도 없었는데

나는 왜 접근금지인 세상을 꿈꾸었을까.

아무도 가보지 못한 세상

깊은 구멍으로만 존재하는 세상이

왜 내 生을 상기시켰을까.

선데이 서울.

내 生에 총천연색 욕망을 칠해놓고

그것이 어둠임을 가르쳐주었다.

한때 내 經이었던.

- 황규관의 시 <선데이 서울>

1968년 9월 22일 창간하여 1991년 12월 29일 제1192호를 끝으로 폐간된 서울신문[1]의 성인용 주간 잡지다. 당시 이러한 황색 잡지의 대명사 격으로도 쓰일 정도의 네임밸류가 있었다. 당시 서울신문이 공보처의 감독을 받던 관영 언론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정부에서 간접적으로 성인잡지를 펴낸 셈이다.


2. 역사[편집]


선데이 서울의 편집 계획서
2)편집의 방향
1. 가급적 비 정치적인 교양 내지 오락 위주의 주간지로 한다.
2. 표지는 일본의 각 주간지와 같이 비 시사성의 표지로 한다.
3. 내객 기사의 편집에 있어서는 가벼우면서도 유익한 독자 위주의 사건 실화들을 겸하여 싣는다.
4. 정치적인 것은 가급적 정책 면을 피하고 '정계 야화'나 '인물 평'으로 한정시킨다.

파일:선데이서울 창간호.jpg
파일:선데이서울 최종호.jpg
1968년 9월 22일 창간호[2]
1991년 12월 29일 종간호[3]

1968년 창간 당시 선데이 서울은 80쪽에 싼 가격인 20원으로 팔려 창간 때부터 돌풍을 일으켰다. 원래 5만 부를 찍으려다가 6만 부를 찍었는데 두 시간 만에 동이 나 버렸다. 당시 태평로 서울신문사 사옥 앞에 선데이 서울을 사려는 가판 소년들[4] 때문에 현관문 유리가 깨지는 소동이 일어났다.

이후 선데이 서울의 인기는 더욱 치솟아 1975년에 월 1억 원의 수익을 올려 서울신문의 재정에 보탬이 되었고, 특히 1978년 신년호는 23만 부의 판매 기록을 돌파했으며, 지면도 창간 때보다 52쪽을 더해 132쪽으로 늘어났다. 사실 이 잡지 이전에 1964년에 한국일보가 창간한 주간지 <주간한국>[5]이 있었고, 선데이 서울이 나온 뒤에도 경쟁 업체인 경향신문이 <주간경향(1968년 창간)>, 중앙일보가 <주간중앙(창간년 동일)>, 한국일보가 <주간여성(1969년 창간)>을 내기도 했지만 선데이 서울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1988년 3월에 선데이 서울은 지령 1천 호를 맞이하였는데 이때까지 나온 표지 모델은 무려 8백여 명이었다. 초창기에는 직장 단위로 선발 대회를 열어 은행을 비롯한 일반 직장에서 소문난 미녀를 모델로 썼으며 이들은 훗날 모임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사회가 급변하였다. 우선 1987년 6월 항쟁 이후 언론기본법의 폐지로 신문과 잡지 발행이 자유로워지면서 경쟁매체들이 급속히 늘어났다. 또한 스포츠 신문이 언론자유화 조치의 영향을 받아 앞다투어 지면을 늘리며 주간지의 영역을 침투했다. 또한 동시기에 VTR이 대중화되면서 각종 성인영화들이 주간잡지들을 밀어내면서 선데이 서울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결국 1991년 12월 호를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폐간의 배경에 대해 <서울신문 100년사>는 "언론사가 언제까지 시대 착오적인 황색 매체를 고집할 것이냐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거나 노골적인 항의의 움직임을 보였다"고 전했다.


3. 여담[편집]


당시 중/고등학생들이 몰래 보다가 걸려서 혼나는 사례가 많았다. 특히 학교의 폐지수집일에는 이 잡지의 공개적 거래가 성행하기도.

1970년대 초까지는 연예인이 아닌 일반인 여성이 표지모델로 등장했다. 위 창간호의 모델도 당시 조흥은행의 창구 직원인 19살의 이영임씨로, 1949년 전라남도 광주시(현 광주광역시) 출생이며 인천 선화여상을 졸업 후 갓 입사해 창구일을 배우던 시절이다. 채널A의 '백일섭의 그때 그 사람'에서 이분의 근황을 추적했으나 워낙 오래 전에 근무했던 분이라 근무기록을 찾을 수 없어 실패했다. #

2020년 2월부터 이마트가 이벤트의 일종으로 서울신문과 1년간 라이선스 협약을 맺고 같은 제목의 잡지를 발간하고 있다. 기존 월간 정보지였던 '월간 가격'을 계승한다.

배우 김윤지의 어머니가 결혼 전 선데이 서울의 모델일을 했다고 한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3 06:57:15에 나무위키 선데이 서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잡지 출판사업은 1999년 스포츠서울21로 넘어갔다가, 2002년 매거진플러스로 또 독립됐다.[2] 표지모델은 연예인이나 직업모델이 아니며 평범한 은행 직원으로, 그 해 “미스 조흥은행”으로 뽑혔던 이영임 씨라고 한다.[3] 표지 모델은 고현정.[4] 소위 “신문팔이” 소년으로, 당시에는 청소년들이 신문이나 주간지 등을 들고 다니며 판매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5] 이 잡지는 한국 최초의 시사종합주간지로서, 황색 주간지와는 성격을 달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