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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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敞宇[1]
1955년 5월 22일 ~

1. 개요
2. 생애
3. 수상
4. 참고 문헌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화가. 일명 '의수 화가'로 불린다. 호는 금곡, 유빙이며, 종교는 개신교(예장재건)이다.[2]

불의의 사고로 입은 신체 장애를 딛고 30여 년간 화가로 활동해 인간 승리의 표본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동양의 서예와 서양의 크로키를 접목하여 수묵크로키라는 장르의 작업을 하고 있다.


2. 생애[편집]


1955년 상주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그는 일찍이 전기 기술자에 뜻을 품고 영등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뒤이어 경기공업전문대학[3] 전기과를 졸업하고 명지대학교 전기공학과에 편입학하여 졸업했다.# 그 후 전기기사로서 직장생활을 하였고, 그런데 1984년 10월 29일, 기계 점검 중 기계 고장으로 인해 22,900볼트에 감전되는 사고를 당했다. 이로 인해 두 팔이 모두 타 들어가 12번의 절단 수술을 받은 끝에 두 팔 모두 팔꿈치 위 부분까지 잘라내고 의수를 착용해야 했으며, 오른발가락 2개 역시 절단해야 했다.

1년반 동안 병원에서 재활한 뒤 서울 집을 정리해 처가가 있는 전주에서 요양 생활을 했다. 그러던 1988년 2월 1일, 작은 아들이 청소하는 엄마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며 그림 그려달라고 보챘다. 짜증이 난 아내가 "아빠한테 그려달라고 해!"라고 무심코 말하자, 아이는 아빠에게 가서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려본 적도 없고, 두 팔을 모두 잃은 자신에게 그려달라니 당황했지만, 두 팔이 없는 아빠라서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 한 번 그려보자."라고 마음 먹고, 아들 동화책에 나와 있는 새 그림을 보고 따라 그렸다. 이 그림을 본 아들은 물론 아내와 큰 딸까지 새와 똑같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자, 그는 이때부터 화가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4]

그는 여러 미술 학원을 찾아갔지만, 다양한 색으로 표현하기 위한 물감을 짤 손이 없는 사람을 받아줄 수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이에 먹 한 가지로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서예로 방향을 틀기로 하고, 원광대 서예과 여태명 교수를 여러 차례 찾아가 부탁했다. 여태명 교수는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석창우가 "제가 스스로 포기할 때까지만 가르쳐달라"고 하자 받아들였다. 퇴원 후 어느 날, 한 구족화가가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TV를 통해 봤다. 그는 두 팔이 없으면 구족으로 그려야 한다는 편견을 깨고 싶었고, 구족이 아니라 의수를 통해 차별화된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의수로 그리는 작업은 생각했던 것 몇 배 이상으로 힘들었지만, 그는 식사를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온종일 그림 연습에 매달렸다. 그런 그를 지켜본 여태명 교수는 마침내 그를 정식으로 제자로 받아주겠다고 밝혔다.

서예를 3년간 익힌 뒤, 석창우는 1991년 전라북도 서예대전에 작품을 출품해 입선하였다. 대한민국 서예대전, 대한민국현대서예대전 등 1998년까지 수많은 서예공모대전에 지원하여 입선, 특선, 우수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는 서예에만 국한되지 않고 또다른 시도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1999년에 김영자 선생의 누드 크로키 강의를 듣고, 사람의 몸이 새로운 형상으로 꿈틀 거리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아, 그때부터 동양의 서예에 서양의 크로키를 접목시킨 수묵크로키에 도전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붓 대신 연필을 의수에 끼우고, 크로키를 온종일 연습했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부터 운동하는 사람까지 움직이는 모든 것을 짧은 시간 안에 특징을 잡아 그리는 연습을 했다. 연필로 그리는 크로키가 익숙해질 때쯤 붓을 다시 끼웠다. 먹에 묵을 곱게 갈아 붓을 적셨다. 이런 식으로 매일 연습한 끝에, 그만의 수묵크로키 화법을 개발했다.

그 후 석창우는 전설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98년 첫 번째 전시전을 연 것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개인전 46회(해외 전시회 12회), 그룹전 270여 회, 시연 200회(해외 45회) 등 수많은 전시 활동을 벌였다. 특히 스포츠를 소재로 한 서예 크로키를 많이 그렸다. 초기엔 정적이고 단순한 포즈만을 그렸으나,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 은메달리스트 미셸 콴 피겨 스케이팅 선수의 경기를 본 후 동적인 장면을 표현하고 싶다고 마음 먹었다고 한다. 2002 월드컵을 기념하여 '축구'를 그리기도 했고, 김연아 선수의 트리플 악셀 점프를 수묵크로키로 담은 작품을 그리기도 했다.#2011년 평창동계올림픽 실사단 앞에서의 퍼포먼스로 평창 올림픽 개체에 기여하고 2014년 소치 패럴림픽 동계 올림픽폐막식 퍼포먼스에서 장애인 올림팍 5개 종목을 서예 크로키로 그려내 전 세계에 큰 감동을 안기기도 했다.# 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 폐막식에서도 수묵 크로키로 사람의 형상을 그린 뒤 '하나된 열정'이라고 한글로 적은 후 평창 올림픽 스타디움에 던져 보내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렇듯 '제1호 의수화가'로써 '수묵크로키'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그는 평단의 찬사를 받았고, 대중의 관심 역시 한 몸에 받았다. 1998년 8월 9일 EBS 라디오 - '사랑의 한 가족'에 출연한 것을 시작으로, SBS 스타킹, KBS 강연 100도C, BBC 월드뉴스(#) 등 수많은 뉴스 및 다큐 프로에 출연해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또한 1999년 9월 11일 명지대학총장으로부터 '자랑스러운 명지인 상'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무수한 상을 수상하였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수묵 실력을 갈고 닦는데 매진하였다. 이리하여 2014년 도전한국인운동본부로부터 서예 크로키 대한민국 최고 기록 보유자로 선정되었다.

한편, 개신교 신자인 그는 2015년 1월 31일 서예로 성경을 필사하기로 결심했다. 매일 4~5시간 두루마기 화선지에 한 자씩 집필하였는데,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오자가 나오기 때문에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었고, 에너지 소모가 막대했다. 하지만 목표를 성취하는 즐거움이 더 크다고 여겼기에 계속 했다. 2021년 6년 7개월만에 개신교 성경에 이어 가톨릭 성경도 필사하였다.

2021년 현재, 개인전 46회 (미국 3회, 독일 2회, 중국 4회, 프랑스 2회, 영국 1회 등 해외 전 12회 포함), 그룹전 270여회 (제8회 취리히 아트페어 등 37회의 해외 초대전 포함)를 전시하였고, 초중고 교과서 11종에 그의 작품이 게재되었다.#


3. 수상[편집]


  • 1999년 9월 11일 자랑스러운 명지인 상 수상(명지대학총장)
  • 2008년 10월 23일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대상(문화체육관광부 장관)
  • 2011년 7월 15일 자랑스런 한국장애인상(자랑스런 장애인상위원회)
  • 2012년 4월 28일 2011년을 빛낸 도전한국인상(도전한국인 운동본부)
  • 2012년 12월 13일 사단법인 국민성공시대에서 2012년 대한민국 신창조인대상 수상
  • 2013년 6월 15일 제1회 대한민국 예술, 문화인대상 미술부분 수상(대한민국 예술문화인 시상위원회)
  • 2014년 7월 10일 서예크로키로 대한민국최고기록보유자로 선정(도전한국인운동본부)


4. 참고 문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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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예를 배울 무렵 개명한 이름이다. 개명 전 이름은 석순기(石舜基)였다.[2] 신당동 재건동산교회 안수집사.[3]서울과학기술대학교의 전신. 당시에는 지금의 아현산업정보학교 자리에 있었다.[4] 이때 그린 새 그림은 현재까지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