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초한쟁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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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
西楚

존속기간
기원전 206년 ~ 기원전 202년
위치
중국 남동부
수도
팽성
국성

국가원수
패왕
군주
서초패왕 항우
주요 재상
범증
언어
상고 중국어[1]
문자
전서 (대전체)
종교
중국 토속 종교
종족
중국인[2]
통화
미상
성립 전
진(秦)나라
멸망 후
한(漢)나라
현재 국가
중국

1. 개요
2. 역사
2.1. 분봉 조치
2.2. 유방의 삼진 평정
2.2.1. 전개 과정
2.3.1. 발단
2.3.2. 파란의 대승리
2.3.3. 결과
2.4. 그 이후
3. 역대 군주




1. 개요[편집]


파일:팽성.png
항우의 근거지이자 서초의 수도인 팽성의 위치.

중국 초한쟁패기 한나라유방과 천하를 다툰 항우가 건국한 고대 국가. 수도는 팽성. 공식적으로 초나라의 계승을 표방하였다. 기원전 202년 해하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하고 항우가 자결하며 한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2. 역사[편집]



2.1. 분봉 조치[편집]


초반, 항우가 18제후왕 분봉 결정을 내리자 수많은 제후들의 반발이 있었다. 특히 한왕 유방의 경우, 초의제가 먼저 진나라의 수도 함양에 입성하는 자가 관중왕이 되라 하였는데, 항우는 이를 무시하고 힘으로 유방을 몰아내 서초패왕[3]을 칭했다. 그리고 파촉의 제후로 밀려난 유방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복수를 준비한다.


2.2. 유방의 삼진 평정[편집]


한편 복수할 준비를 마친 유방은 그 동안 양성했던 군사를 바탕으로 항우에게 대적하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206년, 한나라는 관중으로 출병해, 항우가 그 지역에 분봉한 세 왕국, 이른바 삼진(三秦)을 평정했다. 《사기》와 《한서》에서는 이 일을 돌아와 삼진을 평정했다.하여 환정삼진(還定三秦)이라고 일컫는다.


2.2.1. 전개 과정[편집]


처음 한군이 진격할 때 옹나라가 진격을 막아서 유방은 돌아가려 했는데, 당시 알자(謁者) 조연(趙衍)이 다른 길을 찾도록 진언해 지날 수 있었다.

한왕 원년(기원전 206년) 8월, 드디어 한신의 계책에 따라 출병해, 조참을 장군으로 삼고 옹나라의 하변(下辨)현과 고도(故道)현을 습격했다. 한편 옹나라 서(西)현승(丞)이 남하해, 한나라에서 별도로 파견한 장수 번쾌의 군대와 백수에서 만나 번쾌가 서현승을 격파했다. 이후 번쾌의 별군과 옹나라의 경거기(輕車騎) 부대가 옹현 남쪽에서 맞붙어 또 번쾌가 이겼다. 옹나라 왕 장한은 한나라 군대가 고도현을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군을 진창현에서 요격했고, 한군이 이겨 장한은 달아났다. 조참은 태(斄)현을 공격했고, 옹현을 함락한 번쾌도 같이 태현을 공격해 성에 가장 먼저 올라갔다. 이후 호치현에서 다시 양군이 맞붙었는데, 한군은 조참이 장수가 되었고 옹군은 옹왕 외에 옹왕의 아우 장평(章平)의 군대까지 같이 있었다. 이 싸움에서 한군에서는 주발이 가장 활약했고, 옹군이 또 져서 장한은 옹나라의 서울 폐구로 달아났다. 장평 역시 호치 남쪽에서 조참에게 격파당했다. 조참은 호치를 포위해 양향을 획득했고, 삼진의 군대를 양향 동쪽과 고력(高櫟)에서 연이어 격파했다. 그리고 다시 장평이 지키는 호치를 공격하니, 번쾌가 가장 먼저 성에 올라갔고 장평은 달아났으며 호치는 함락됐다. 한나라 왕 유방은 옹나라를 평정하자, 장한이 농성하는 폐구를 포위하는 한편 여러 장수들에게 삼진의 나머지 지역을 석권하게 하고 자신은 함양에 이르렀다. 함양에서 옹나라의 조분(趙賁)과 내사 보(保)를 쳤고, 조참번쾌도 참여했으나 여기에서는 주발이 가장 활약했다. 이후 주발은 북으로 가 칠(漆)현을 치고 장평과 요앙(姚卬)을 쳤고, 서쪽으로 가 견(汧)현을 함락했고, 돌아와서 미(郿)현과 빈양(頻陽)현을 함락했다. 번쾌도 미현을 함락했고, 또 괴리(槐里)현과 유중(柳中)현과 함양현을 함락했다. 조참은 경릉(景陵)을 20여 일 간 지켰는데, 장평이 삼진의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조참을 쳤으나 패퇴했다. 조참은 장군이 돼 폐구를 포위하고, 중위가 돼 유방의 본대에 합류해 임진으로 갔다.

한왕 2년(기원전 206년) 10월 유방은 섬현에 이르렀고, 마침 진여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잃은 상산왕 장이를 받아들였다.

8월, 관영은 새나라의 서울 약양(櫟陽)을 공격해 함락시켰고, 새나라 왕 사마흔은 항복했다. 한나라는 새나라를 없애고 그 영토에 하상군과 위남군을 설치했다. 관영은 이후 폐구 포위에도 합류했으나, 얼마 못 가 유방의 본대에 합류했다. 8월, 정복(丁復)이 별군을 이끌고 주진(朱軫)이 기병대를 이끌고 적나라를 치니, 적나라 왕 동예도 항복했다. 한나라는 적나라를 없애고 그 땅에 적나라 분봉 이전처럼 상군을 설치했다.

11월, 한나라 기도위 근흡이 옹나라의 농서에서 장평을 격파하고, 농서 6현을 평정했다. 12월, 한나라 장군·농서도위 역상이 옹나라의 북지군과 상군을 함락했다. 역상은 오지(烏氏)[5]에서 옹나라 장군을 무찔렀고, 순읍(栒邑)에서는 주유(周類)의 군대를, 이양(泥陽)에서는 소장(蘇駔)의 군대를 격파했다.

한왕 2년(기원전 205년) 정월에는 장평을 사로잡았다.

승상 소하는 파촉을 안정시키고 식량을 공급했다.

최종적으로 옹나라가 멸망한 것은 4월 팽성대전에서 한나라가 패배한 이후로, 약양으로 돌아온 유방은 6월 폐구를 수공으로 함락했다. 이 수공에서는 번쾌의 공이 으뜸이었다. 이때 장한은 자결했다.


2.3. 팽성대전[편집]



2.3.1. 발단[편집]


당시 부하 한신의 지휘로 관중 지방의 3왕을 쓰러뜨린 한왕 유방은 각지의 9제후왕들을 불러 모아 60만에 이르는 군사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치기위한 종장이 되었다. 한편 항우는 제나라를 공격하다가 성양에서 뜻밖의 난관에 부딪혀 고전하였다.

유방이 군사를 일으킬 무렵 초왕 항우는 자신의 눈에 거슬리던 제나라를 공격하고 그 잔당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유방은 그 사이에 60만 대군을 이끌고 초의 수도 팽성을 기습 공격했다. 팽성을 지키던 장수 팽월은 항복했으며 다른 초나라 장수들은 성에서 진귀한 재보와 항씨 족중, 미녀 등을 모두 이끌고 제나라로 도망쳤고 그로 인해 팽성은 쉽게 유방에게 함락된다.

제나라를 공격하던 항우는 도망쳐 오던 자신의 부하들에게 격분하고 정공, 정도에서 용저와 항타를 불러 유방을 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항우는 단지 강동에서 징집한 3만 강동 자제의 군사가 전부였지만 유방은 60만 대군이었다. 그러나 항우는 천리길을 달려 조용히 와서, 술에 취해 흥청거리느라 적병의 공격에도 대응을 못하고 있던 유방의 군사를 궤멸시켰다.

이외에도 호릉에서는 번쾌가 3만의 군대를, 팽성 외성인 소성에서는 조참, 관영, 위표가 10만 군사를 이끌고 지키고 있었고 북쪽에 군사 10만을 풀어놓고 동쪽에 약탈하러간 군사가 10만이 크게 넘고 팽성 수비 병력은 10만을 약간 넘어섰다.


2.3.2. 파란의 대승리[편집]


성양을 공격하던 항우는 노현(魯縣)[4]을 지나 호릉(胡陵)[5]을 거쳐 새벽 무렵에는 팽성의 서쪽인 소현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곳에서부터 계속해서 동쪽으로 진격하면서, 눈에 보이는 한군을 개미 잡아 죽이듯이 박살내었다.

마침내 항우의 군대는 팽성에 이르렀고, 정오가 될 즈음에는 한군을 완전히 개박살내버렸다. 완전히 혼란 상태에 빠진 한군은 동쪽으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달아났고, 팽성의 동쪽에 있는 곡수(穀水)와 사수(泗水) 부근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항우는 이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무참하게 짓밞아 버렸고, 이 싸움으로 한군 10만 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동쪽이 아닌 남쪽으로 달아난 한군도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영벽(靈壁)[6]에 이르기까지 초군은 한군을 사냥감처럼 추격하였고, 이 과정에서 셀 수도 없는 한군이 무참하게 짓이겨졌다. 게다가 영벽 동쪽에 있는 수수(睢水) 강안에 이르자, 완전히 몰린 한군의 병사들은 아예 수수에 몸을 던지는 병사들까지 있었다. 이 싸움으로 또 다시 한군 10만 명이 죽었다. 그리고 수수는 죽은 한군의 시체로 흐르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


2.3.3. 결과[편집]


하지만 도주에 성공한 유방은 형양에서 대기중이던 여택의 군사와 합류해 방어선을 구축했고, 동시에 삐딱선을 타고 있던 영포를 부채질해 반란을 일으키도록 만들어 항우가 추격보다 본토 방어를 우선하게 함으로써 추격의 기세를 느슨하게 만들었다. 그러는 사이 사방으로 흩어졌던 한군이 형양으로 몰려들어 안읍 전투에서 초나라 추격군을 대파했고, 영포가 완전히 쫓겨나기까지의 반년 간 항우에게로 이반한 위표 등의 제후와 장수들을 짓밟아놓고 형양에 우주방어 태세를 갖춰놓았다.


2.4. 그 이후[편집]


팽성대전에서 한나라를 멸할 절호의 기회를 놓친 항우는 이후로 다시는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유방은 형양과 성고에서 대항하고, 관중의 곡창지대를 바탕으로 항전하니 계속해서 초나라는 수세에 몰렸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가 결국 해하 전투에서 패배, 패왕 항우는 죽음을 맞이하며 초나라는 5년간의 짧은 역사를 끝내고 멸망한다.


3. 역대 군주[편집]


대수
묘호
시호
작위
이름
출생
사망
재위기간
1대
없음
없음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
(項羽)
기원전 232년 3월 29일
기원전 202년 12월
기원전 207년 ~ 기원전 202년

[1] 그리고 초어와 오어.[2] 초족과 화하족과 오월족으로 추정.[3] 이때 항우는 서쪽 관중에 있었으며 이후 동쪽 팽성으로 간다.[4] 현재 산동성 곡부시(曲阜市) 경내. 춘추전국시대 노(魯)나라의 수도이자 공자가 태어난 곳으로 유명하다.[5] 산동성 위타이현.[6] 지금의 안휘성 숙현(宿縣) 서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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