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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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서일 장군.jpg

초명
서정학(徐正學)
본명
서기학(徐夔學)
이명
서희세(徐希世), 서학포(徐學圃), 서활동(徐活動)
자 / 호
희서(熙瑞) / 백포(白圃)
본관
이천 서씨[1]
출생
1881년 2월 26일
함경도 경원도호부 의동면 삼리김희동[2]
(現 함경북도 경원군 유다섬리)
사망
1921년 9월 28일[3] (향년 41세)
중화민국 길림성 밀산현 쾌상봉 벽리
(現 중국 헤이룽장성 지시시 미산시)
묘소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화룡시 용성진 청호촌
대종교 삼종사 묘역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 위패-43호
직업
독립운동가, 군인
소속
북로군정서
종교
대종교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1881년 2월 26일 함경도 경원도호부 의동면 삼리김희동(現 함경북도 경원군 유다섬리)에서 아버지 서재운(徐在云, 1860. 1. 15 ~ ?)과 어머니 경주 변씨(慶州 邊氏, 1860 ~ ?. 9. 24) 사이에서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채병권(蔡秉權)의 딸 평강 채씨(1875. 1. 10 ~ ?)와 결혼해 슬하에 아들 서윤제(徐允濟)와 딸 서죽청(徐竹靑, 1904. 1. 19 ~ ?) 등 1남 2녀를 두었다.

일찍이 경성군에서 함일학교(咸一學校) 사범속성과를 졸업했고,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중화민국으로 망명해 나철을 만나 대종교에 입교했다. 1911년 3월 길림성 왕청설치국(汪淸設治局)[4]에서 대종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해 무장독립투쟁에 가담했고, 이듬해인 1912년에는 왕청현에 청일학교(靑一學校)와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설립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대한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했으며, 그해 5월 중광단을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개편한 뒤 8월에는 그 산하에 대한군정회(大韓軍政會)라는 무장조직을 설치해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그해 10월에는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를 통합하여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로 개칭했다가 1919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협의하에 대한군정부를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개칭해 총재에 취임했다. 대외적으로는 서로군정서와 구분해 북로군정서라는 명칭을 주로 썼고, 이후 이범석·김좌진 등과 함께 청산리 전투를 비롯한 여러 무장투쟁에 참여했다. 무장투쟁 조직에 '서일'이라는 이름이 있다면 무조건 그가 총재일 정도로 그 위상은 대단했다. 또한 1920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할인 간북북부총판부(墾北北部總辦部) 총판에 임명되었으며, 1920년 12월 대한독립군단이 조직되었을 때 총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이후 만주에서 활동이 어려워지자 대한독립군단을 이끌고 소련으로 근거지를 옮기려 했으나, 자유시 참변에 휘말려 청년 사병들이 다수 희생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1921년 9월 28일 길림성 밀산현(密山縣) 쾌상봉(快上峯) 벽리 산골짜기의 소나무숲에서 스스로 호흡을 멈추는 폐기법(閉氣法)으로 자결하여 생을 마쳤다. 그의 유해는 그해 10월 9일 수습되어 길림성 연길도(延吉道) 화룡현 삼도구(三道溝) 청파호(靑坡湖)[5]에 안장되었다.

무장투쟁의 지도자로 능력뿐만 아니라 철학에도 뛰어나 대종교 교리도 정리하여 "오대종지강연(五大宗旨講演)", "삼일신고강의(三一神誥講義)", "회삼경(會三經)" 등의 저술을 남겼고 대종교 3대 교주로 유력하였으나 교단을 지키는 것보다 나라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며 투쟁 노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74년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무후선열 위패가 봉안되었다.


3. 여담[편집]


  • 독립기념관 내 "조국 광복을 위하여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라는 어록비가 세워져 있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 1982년 KBS 드라마 <우둥불>에서는 배우 이동주가 연기했다.

  • 1983년 개봉한 영화 <일송정 푸른 솔은>에서는 배우 박암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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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경공파(良景公派)-함흥 문중 36세 학(學) 항렬.[2] 1914년 이후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김희동 254번지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었다.[3] 음력 8월 27일.[4]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왕청현. 왕청설치국은 1912년 왕청현으로 승격되었다.[5]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화룡시 용성진(龍城鎭) 청호촌(淸湖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