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학부/사회과학대학/경제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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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경제학부
서울大學校 經濟學部
SNU Department of Economics
파일:snueconlogo.png
설립
1946년 10월
학부장
이상승
정원
학부 154명
주소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1 사회과학대학 16동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1 우석경제관 223동



홈페이지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1. 개요
2. 졸업생 진로 분포
3. 역사
4. 신축/재건축
4.1. 우석경제관 223동
4.2. 한국경제혁신센터 16-1동
5. 자치활동



1. 개요[편집]


서울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문으로 연구/교육하는 학부. 학부생 정원은 학번당 154명, 조교수 이상 교수진만 해도 2021년 4월 기준 37명에 달하는 대형 학부이다.


2. 졸업생 진로 분포[편집]


과거 서울대 법대가 사법시험에서 서울대 내에서 가장 많은 합격자 수를 배출했던 것처럼 행정고시에서 서울대 내에서 가장 많은 합격자 수를 배출해내고 있으며, 특히 재경직 합격자 배출에 있어서는 항상 1위를 유지해오고 있다.

법과대학과 사법시험이 폐지된 현재 자교 로스쿨에 진학하는 학생이 가장 많은 학부이기도 하며, 자교 로스쿨 외 다른 학교의 로스쿨에도 많이 진학하는 편이다. 로스쿨 졸업 이후에도 대형로펌과 재판연구원, 판검사 임용 등 다양한 분야에서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

국회의원은, 정부 고위층 관료, 그리고 금융위/기재부 등 경제 관련 부처의 고위 관료에 본과 출신이 많이 포진해있다. 그 외 학계 쪽에서도 본과 출신들이 많이 진출하여 좋은 성과를 내왔다.


3. 역사[편집]


사회대의 타 학과들과 달리 경제학부는 두 계통의 학교가 병합되어 만들어진 학부로, 구제대학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경제학전공)을 한 축으로, 그리고 구제전문학교경성고등상업학교를 다른 한 축으로 한다.


3.1. 경성제국대학[편집]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1926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률학과 경제학강좌
1927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1] 경제학강좌
1928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 경제학1/경제학2/재정학/통계학강좌
1935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 제3류[2]
1945
경성대학 법문학부 경제학과

경성제국대학도쿄제국대학교토제국대학의 법학부와 문학부에 해당하는 법과(法)와 문과(文史哲)가 합쳐진 형태로 도호쿠제국대학, 규슈제국대학다이호쿠제국대학과 동일한 통합학부인 '법문학부'를 두었다. 즉, 작은 법학부로서 법문학부 내의 법학과가 있었는데 도쿄와 교토 제국대학의 법학부[3] 소속 법학과(사법학과)/정치학과(공법학과)/경제학과에 해당하는 강좌(오늘날의 학과에 해당)들이 이 법학과 소속으로 존재했다. 다만 법문학부에는 작은 법학부로서 행정 단위인 법학과만 두었을 뿐, 의학부와 마찬가지로 개별 전공을 설치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1935년부터는 법학과 내부에서 제1류(사법)/제2류(공법)/제3류(경제) 등 3개 계열로 전공구분이 이루어졌다. 바로 이 경성제대 법문학부 법학과의 경제학강좌들(1935년 이후 제3류)이 경제학부의 경성제대측 기원이다.

경성제대 예과 제1회(1924년 입학)이 수료하고 학부 본과에 진학한 1926년 개강하면서 법학과에 경제학강좌(담임교수 시카타 히로시(四方 博)[4])를 두었고, 1928년에는 재정학강좌(담임교수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 鹿之助)[5])와 통계학강좌(담임교수 오우치 다케지(大內 武次)[6]를 개설하면서 경제학강좌도 증설하였다.(제2강좌 담임교수 야마다 후미오(山田文雄)[7]) 이 강좌들에서 개설되는 주요 강의들이 경제원론/경제학사/경제사/화폐금융론1(화폐론)/화폐금융론2(금융론)/재정학/경제정책1(농업정책)/경제정책2(상공정책)/사회정책/통계학 등이었다.[8] 1935년부터 법학과가 전공구분을 실시하면서 법학과 제3류(경제) 전공이 생겨났고 1945년 광복 후 경성대학(서울대학) 법문학부 소속의 경제학과로 독립했다.

1928년 강좌 설치가 완성됨과 동시에 법문학부에는 경제학1강좌 담임교수인 시카다 히로시(四方 博) 교수 주도로 조선경제연구소가 설치되어 조선의 경제사회에 관한 연구를 수행했다. 조선경제연구소는 총독부 통계를 정리하고 해설한 "조선통계총람", 조선은행 등과 분담 집필한 "조선경제연보" 간행 등의 주요 성과물을 내고 실증적 통계적 방법을 바탕으로 조선의 경제 사회를 연구하였다.

유명 졸업생으로는 개교 초창기부터 미야케 교수의 수제자로서 학부 졸업 후 동대학원 경제연구실 조수를 지낸 박문규(예과 2회) 등이 있고,[9] 법학과 제3류로 전공구분 시행 이후 졸업생[명단참조]에는 한국은행 외국부장, 부총재(1958~1961)[10]를 역임한 김기엽(예과 11회)[11] 등이 있으나, 마르크스 경제학이 주류를 이루었던 제국대학 경제학과의 특성상 상당수 졸업생들이 월북하여 전해지는 자료가 소략하다.

경성제대 법문학부 법학과의 전반적 이수 규정은 항목 참조. 경제학 전공(법학과 제3류)의 이수 규정은 다음과 같았다.
  • 전공필수 19단위
    • 헌법/민법1~4/상법1~3/정치학/재정학/경제원론/경제사/화폐금융론1 또는 2/경제정책/사회정책/통계학/강독연습 1단위/연습 또는 특강 1단위
  • 선택과목 다음 과목 중 8단위
    • 행정법/민법5/상법4/형법/사회법/국제공법/국제사법/법철학/동양법제사 또는 서양법제사/정치학사/정치사/외교사/경제학사/화폐금융론(단, 전공필수과목에서 이수한 것은 제외)/연습 또는 특강 1단위


3.2. 경성고등상업학교[편집]


경성고등상업학교
1907
동양협회전문학교 경성분교[12]
1915
동양협회식민전문학교 경성분교
1918
동양협회경성전문학교 고등상업과
1920
경성고등상업학교(사립)[13]
1922
경성고등상업학교(관립)
1944
경성경제전문학교[14]
1946
경성경제대학 학부
경성경제대학 예과
경성경제대학 전문부

조선총독부 소관의 관립 구제전문학교경성고등상업학교일본어 위키백과는 동양협회전문학교[15] 경성분교(1907년)[16]를 전신으로 한다. 본교가 1915년 동양협회식민전문학교로 개칭하고 1917년 대만상공학교를 설치한 후 1918년 대학령 반포에 따라 사립대학 설립이 가능해지자 '척식대학(타쿠쇼쿠대학)으로 개칭할 때, 동양협회 경성전문학교로 독립하면서 고등상업과를 설치했다.

하지만 구제대학타쿠쇼쿠대학 설립에 돈을 쏟아붓느라 재정난에 빠진 재단은 경성까지 챙길 여력이 없었고, 결국 경성전문학교는 동양협회의 요청에 따라 1920년 조선총독부, 조선은행, 남만주철도 3자가 출자해 설립한 재단법인으로 인수되어 해당 재단법인 소속의 사립 경성고등상업학교로 개편됐다. 그리고 제2차 조선교육령을 반포한 조선총독부가 조선은행남만주철도의 지분을 인수하면서 1922년 3월 관립전문학교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경성고등상업학교는 1925년 최초의 조선인 학생 입학을 받았고 일제강점기 내내 10% 수준에 불과한 극악의 조선인 학생 비율을 보였다.[17] 1939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재단법인 우석학원)측과 계약을 체결하여 경성여의전 재단에 기존 학교 부지와 건물을 넘기고, 대신 종암동 신규 부지에 신축해준 신교사로 이전하였으며, 1940년 6월 이를 인수하였다.

태평양전쟁 와중에 문과 계열 구제전문학교의 통폐합 조치에 따라 경성법학전문학교와 병합되어 1944년 6월 경성경제전문학교로 축소되었으나 광복 후 경성고상으로 복귀하였으며, 이후 경성경제대학를 칭하며 기존 구제전문학교 과정은 전문부로 남기고, 예과학부(본과)를 만들어 대학으로 승격을 준비 중이었다. 그러나 국대안에 따라 구제대학으로 승격은 좌절되고, 국립서울대학교 소속 상과대학으로 통합되었다.

다음은 1941년도 경성고등상업학교의 교과과정이다.

  • 필수과목 - 수신, 일본학, 국사[일본사], 국어[일본어], 지나어[중국어], 영어, 상업통론, 은행 및 금융론, 화폐 및 외환론, 교통론, 보험총론 및 해상보험론, 상업부기 및 은행부기, 원가계산, 회계학, 상업수학, 상품학, 상업지리, 상업문, 상업실천, 상업사, 주산, 경제원론, 통계학, 동양경제사정, 상업정책, 공업정책, 대륙경제정책, 재정학, 법학통론, 민법, 상법, 물리화학, 수학, 체조

  • 선택과목 - 신탁론, 해운, 육운 및 공운, 상품실험, 배급조직론, 물가론, 거래소론, 세관 및 창고론, 협동조합론, 상업경제서강독, 경제학사, 경기변동론, 경제통계론, 농업정책, 세계근세사, 중국최근사, 중국사회사정, 중국화폐금융론, 경제심리학, 사회학, 공학, 상사관계법, 국제법 및 어학


3.3. 통합과 발전[편집]


서울대학교
1946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
1955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상학과 무역학전공
1959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무역학과
1975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학과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무역학과
1985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학과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국제경제학과[18]
1995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학부[19]

부산고등수산학교(1941)와 대구농업전문학교(1944)를 제외한 모든 관립 구제전문학교경성제국대학과 통합하여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시스템과 같이 거대한 국립대학교 체계를 창설한다는 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에 따라 1946년 경성대학 법문학부 경제학과와 경성경제대학이 합쳐져 서울대 상과대학을 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구제중학교(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진학이 가능했던 구제전문학교(3년제[20])와 달리 예과(3년제)와 본과 법문학부(3년제[21]) 도합 6년 과정을 마치고 학사 칭호를 받았던 제국대학측에서는 격이 떨어지는 구제전문학교와의 통합이라는 국대안에 극렬하게 반발했고 대부분의 교수와 학생들은 경성제대의 적통이라 여겨진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로 옮기면서 상과대학으로의 통합을 거부했다.[22] 법과대학 구성시에도 유사한 상황이 벌어진 바 있었는데(참조), 이는 경성법전이 사실상 그대로 계승된 법과대학과 마찬가지로 경성고상의 인적/물적 연속성이 상과대학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다만 소수나마 경성제대 예과를 신입학하여 수료하고 경성제대와 경성대학을 거쳐 상과대학 졸업장을 받은 동문과 경성제대 예과 출신 중에서도 상과대학으로 진학한 동문이 존재하는데 문리과대학과 법과대학이 서로 이들을 자교 동창으로 규정하고 있는 반면 경제학부가 속해있었던 상과대학 동창회는 이들을 명단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 정기준 명예교수(경제학과 18회 졸업)에 의해 지적되어[23] 2019년 발행된 서울상대동창회70년사에서는 이를 보완하고 있다.[24]

1975년 관악캠퍼스 종합화 당시 경제학과는 무역학과와 함께 상과대학을 버리고 사회과학대학에 합류하였고, 1985년 무역학과에서 개칭된 국제경제학과와 1995년 합병하면서 경제학부가 되었다. 그리하여 현재는 서울대학교 문과 단일학부/학과 중에서 입학 정원이 가장 많은 학과로, 사회대 전체 정원의 42%에 달한다. 원래는 서울대 문과에서 법학과와 경영학과에 이어 세 번째로 정원이 많은 학부였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에 경영대 학부 정원 중 일부가 경영전문대학원(MBA) 정원으로 옮겨져서 그만큼 경영대 학부 정원이 감소하고[25], 법대 학부는 로스쿨 설치와 함께 사라지면서 서울대 문과에서 학부 정원이 제일 많은 학과가 된 것이다.[26] 이런 과정을 거친 결과 2010년대 이후로 학부 정원"내" 입학생 인원은 경제학부(154명)가 경영대(135명)보다 19명 더 많게 되었다. 하지만 기회균등전형과 외국학교전형 등 정원"외" 입학 배정 인원은 여전히 경영대가 더 많고 매년 전과생 티오 등도 경영대가 더 많아서[27], 4학년때쯤 되면 양 과의 재적 학생 숫자가 비슷해진다. 어쨌든 이로써 서울대는 서울 소재 대학들 중에서 정원내 입학 정원이 경영학부보다 경제학부가 더 많은 사실상 유일한 대학이 되었다.

4. 신축/재건축[편집]



4.1. 우석경제관 223동[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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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생 숫자만도 사회과학대학의 절반 가까이 되는 대형 학부에 전통의 서울대 인기학부라서 원래도 연구실/강의실이 모자란 상태였는데, 문과의 상경계 선호현상으로 인해 타 학과/학부에서 오는 전과생과 자유전공학부의 전공선택, 복수전공•부전공 기타 제2전공 등으로 미시경제이론•거시경제이론 등 전공필수 과목은 초안지를 제외한 수강신청 정원만 200명이 넘어가는 사태가 발생하여 대형강의실을 구하기 위해 사회과학대학 강의가 주로 이루어지는 16동과 83동 뿐 아니라 심지어 舊28동 자연과학대학 건물의 대형강의실을 이용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공간 부족의 심각성으로 인해 경제학부 건물을 신축하겠다는 계획이 2016년 12월 대학 본부에서 승인되고 동문들의 모금, 특히 경제학과 17회 선배인 영원무역 성기학 회장의 기부금 쾌척으로 관악캠퍼스 순환도로변의 보건대학원 길 건너편에 지하1층~지상5층 1800평 규모의 우석경제관[28](223동) 신축이 확정되었다(대학신문 참조). 강의실과 연구실, 경제학도서관이 입주할 우석경제관은 2017년 11월 착공하였으며 2021년 7월 준공 예정이다. 2020년 대한민국 교육부 선정 올해의 교육시설 우수상을 수상했다.
파일:useokeconbuilding1.jpg
파일:useokeconbuilding.jpg


4.2. 한국경제혁신센터 16-1동[편집]


파일:AA.18561332.1.jpg

2018년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의 국가경제연구국(NBER)을 본 따 한국경제혁신센터를 서울대학교에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2019년 예산에 반영했고, 서울대에서는 경제학부 모금을 통해 자체 발전기금을 추가 투입하여 당초 우석경제관 인근에 그와 비슷한 규모의 한국경제혁신센터를 건설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런데 실시 설계 전 검토 중 신축 부지로 계획했던 우석경제관 바로 옆 부지 지하에 관악캠퍼스의 주전력관이 매설되어있어 이를 이설하기 위한 공사 비용만도 100억 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되었고, 경제학부는 대학 본부와 협의 끝에 기존 사회과학대학 16동과 연결되어있는 사회과학도서관 16-1동을 재건축하면서 아고라 부지에 한국경제혁신센터를 증축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파일:snueconkepb.jpg


5. 자치활동[편집]


공식적인 경제학부 자치회는 없으나 현재 "경제학부 서포터즈"라는 동아리가 그와 유사한 역할을 맡고 있다. 다만 2017학번부터 사회과학계열 광역 선발제가 완전히 폐지되고 2002년 이전처럼 과별 선발체제로 돌아감에 따라서 경제학부생은 경제/불꽃, 경제/비, 경제/시반, 이 세 반에만 배정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세 반을 중심으로 단합이 되어 차후 경제학부 자치회가 생겨날 가능성은 있다.

학생들에게 서울대 경제학부 문구가 박힌 후드집업을 무료로 나눠주는데, 그 어딘지 모르게 캐주얼한 디자인 덕분에 좀 험하게 다뤄도 걱정이 없어서 편하게 입고다니는 학생들이 좀 있다. 그런데 이 옷이 이준구 교수가 경제학 교과서 판 돈으로 사서 기부했더라는 소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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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26년 법문학부 개교 당시 설치된 법률학과와 정치학과가 1927년 법학과로 통합.[2] 법학과를 제1류(사법학전공), 제2류(공법학•정치학전공), 제3류(경제학전공)로 전공구분 개시.[3] 1919년에 법학부 경제학과가 경제학부로 독립함에 따라 법학부+경제학부[4] 1924~1926년간 조선총독부 재외연구원 자격으로 영국•미국 연수를 다녀와서 1926년 교수 부임.[5] 1927년 경성제대 교수에 보임되고 1928년 법문학부 재정학강좌 담임교수로 임명된 상태에서 1929~1931년 2년간 해외연수를 다녀와서 1931년부터 다시 수업 담당. 그의 해외연수 기간 동안 재정학강좌 담임교수는 스즈키 다케오(鈴木 武雄)가 직무대리하였으며 1934년 이재유 사건으로 체포 구속되어 실형을 선고 받아 복역하면서 면직되고 재정학강좌 담임교수는 오다 타다오(小田 忠夫)가 맡게 됨.[6] 1926~1928년 2년간 프랑스•독일•영국•미국 해외연수 후 1928년 부임[7] 1926~1928년간 영국•독일•미국 해외연수 후 1928년 부임. 1930년 5월 도쿄제국대학 교수로 전임되어 1931년부터 경제학/재정학/통계학 교수들이 돌아가면서 겸임하다가 1931~1933년 해당 강좌를 담당한 바 있는 조교수 스즈키 다케오가 1935년 담임교수 자리에 앉았다.[8] 일본제국시대 제국대학의(도쿄제국대학, 교토제국대학에 한정된 이야기가 모든 제국대학이 비슷한 실정이었다고) 경제학 강좌들은 상당수가 마르크스경제학에 경도되어있었는데,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의 경우도 재정학강좌 담임교수인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 鹿之助)가 학내 마르크스주의 학생조직을 지도하고 이재유 사건에 연루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3년의 징역을 살았고(참조), 미야케와 함께 법문학부 경제연구회 지도교수를 맡았던 경제학제2강좌 담임교수 스즈키 다케오(鈴木 武雄) 또한 강의를 온통 마르크스 이론의 소개와 해설로 메웠다고 한다. (출처) 김용직,「김태준 평전」, 일지사, 2007. 97쪽. 파일:koeconrespection.png[9] 제1회 입학생인 유진오 역시 미야케 교수의 경제학 강의를 듣고 박문규를 비롯해 리강국, 최용달 등과 경제연구회를 결성해 활동한 바 있으며, 리강국과 최용달 역시 미야케 교수 수업을 들으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명단참조] 파일:1619009095267.jpg[10] 제3대 김진형 총재 사임으로 1960.5.11~1960.6.1간 총재직무를 대행. #[11] 1934년 예과 11회로 입학했으나 신병으로 1학년 유급하여 예과 12회와 함께 1938년 예과 수료 및 법문학부 진학, 1941년 법학과 졸업.[12] 1900년 가쓰라 타로가 설립한 대만협회학교의 후신이다. 경성분교는 동양협회전문학교 조선어과 3학년생이 파견되어 설립되었다. 현재, 타쿠쇼쿠대학.[13] 행정과 폐지[14] 태평양전쟁 와중에 문과 계열 구제전문학교의 통폐합 조치에 따라 경성법학전문학교와 병합되어 경성경제전문학교가 되었다.[15] 1898년 발족한 대만협회가 1900년 설치한 대만협회학교가 1904년 전문학교령에 의거 대만협회전문학교로 승격되고, 1907년 동양협회전문학교로 개칭.[16] 본교의 조선어과 3학년 학생들이 파견되었다.[17] 고등상업학교 졸업자의 공급이 수요에 미달했기 때문에 일본에서도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경성고상의 유명 동문으로 박두병이 있다.[일본사] [일본어] [중국어] [18] 학과명을 무역학과에서 국제경제학과로 변경.[19] 경제학과와 국제경제학과가 통합하여 경제학"부"가 되었다.[20] 의학전문학교는 4년제[21] 의학부만 4년제[22] 서울상대同窓會七十年史 : 1949-2019(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총동창회, 윤제철 편). 파일:1619009082656.jpg[23] '상과대학은 어떻게 제1회 졸업생을 낼 수 있었나?', "서울상대총동창회보 향상의탑" 제165호(2018.12.1)[24] 서울상대同窓會七十年史 : 1949-2019(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총동창회, 윤제철 편). 파일:1619009095267.jpg 파일:1619009093114.jpg[25] 90년대에 수도권 인구 억제 정책의 일환으로 도입된 수도권 대학 정원규제법 때문에 수도권 소재 각 대학들의 총 정원은 늘릴 수 없게 되어있다. 그래서 어느 대학의 어떤 인원을 늘리거나 새로 만들려면 대신 그만큼의 다른 어떤 인원을 자체적으로 줄여서 총정원은 증가하지 않도록 유지시켜야 한다[26] 참고로, 경영대가 자체적으로 학부 정원을 MBA쪽으로 돌려서 줄어들게 된 2000년대 후반의 감축 이전에도, 김대중 정부때인 2000년경에 BK21 지원 조건으로 대학원 중심의 학교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교육부의 요구에 따라 서울대 전체 학부 정원이 20% 가량 줄어들었고, 이후 노무현 정권에서 들고나온 서울대 폐지론에 대한 절충안으로 2005년에 서울대 전체 학부 정원을 20% 가량 또다시 줄인 바 있다. 그러나 이 두 경우는 서울대의 모든 학과들을 다 같이 일률적으로 줄인 것이기 때문에 학과간의 정원 순위는 변함이 없었다. 반면 2000년대 후반의 경우는 경영대 총원 쿼터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경영대 내의 MBA과정 신설 및 증원을 위해 경영대 내부적으로 경영대 학부 정원만 줄였기 때문에 학과간 학부 입학 정원 순위가 바뀌게 된 것이다.[27] 이는 일종의 행정적인 미비 내지 착오로 인한 결과로 보인다. 입학 정원이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원외 선발인원과 전과 티오 등은 그에 맞춰서 조정하지 않고 그냥 예전 그대로로 놨둬서 이렇게 정원내 선발인원 순위와는 차이가 나는 괴리가 생긴 것. 즉 학교 행정직원들의 귀차니즘의 결과다.[28] 성기학 회장의 부친의 호를 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