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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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용어와 개념 논란
2. 진행 경과
2.1. 배경
2.1.1. 1980년대의 상황
2.1.2. 1990년대의 상황
2.2. 정부 개입
2.3. 결말
3. 김현회의 허위 왜곡 기사와 논란의 종결
4. 평가
4.1. 서울 연고 공동화의 목적과 성격
4.1.1. 중소 도시 연고지 위주 틈새 전략
4.1.1.1. 보론
4.1.2. 반론: 월드컵 유치를 위한 사전작업
4.2. 스몰마켓행의 원인
4.2.1. 3개 구단의 사정
4.3. 결론
5. 일본 유사 사례
5.1. 배경
5.2. J리그의 고민
5.3. 한일 양국 환경 비교
5.4. 일본 사례의 평가
5.5. J리그 도쿄 연고지의 현실과 미래
6. 기타 종목의 사례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파일:4PkTq8P.jpg
"한국 프로축구 30년사" 307페이지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은 서울특별시에 연고를 두고 있는 축구단을 이전하여 연고지를 비운다는[1] 정책으로, 1996년 한국프로축구연맹과 정부(청와대)가 공조하여 서울 연고 축구단이었던 일화 천마(현 성남 FC), 유공 코끼리(현 제주 유나이티드 FC), LG 치타스(현 FC 서울) 3개 구단에게 서울 이외의 도시로 연고지를 이전하도록 강제한 정책을 지칭한다.[2]

당시 한국프로축구연맹은 월드컵 유치를 앞두고 지방 축구 활성화란 명분으로 지금도 일개 구단 단독으로는 실현하기 힘든 서울 시내에 축구전용구장을 건립하면 잔류를 허용한다는 조건을 달고 공동화(空洞化)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1996년 6월 1일 정몽준 축구협회장조차 월드컵 유치가 성공한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서울에서는 축구전용구장 건설이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월드컵> 정몽준 회장 인터뷰

서울 연고 구단들은 이 정책에 합의했으나, 입장을 바꿔 이전하지 않겠다고 밝혔고 청와대가 개입하여 프로축구연맹에 서울 연고 구단들의 이전 지침을 하달을 통해 결국 강제시행을 하였다. 이에 대해 현재 축구관계자들은 구단들이 서울 연고지에서 나갈 수 없다고 반대하자, 서울 연고 구단들과 뜻을 달리하는 축구계[3]가 '구단에 압력을 넣어달라'고 정부에 요청한 것으로 보고 있다.


1.1. 용어와 개념 논란[편집]


한편 반 FC 서울 사이트 유저들이 주축이 되어 한국어 위키백과의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문서를 직접 거론하며 한국어 위키백과에 문서가 생성된 후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이라는 용어와 개념이 축구팬들에게 알려졌다는 내용을 개인 블로그 혹은 인터넷 댓글 등에 기재하면서 퍼트리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사실이다.

서울 공동화, 서울 공동화 선언, 서울 공동화 정책이라는 용어와 정책의 핵심 내용은 2009년 한국어 위키백과 문서 생성은 물론 한국어 위키백과가 아예 없던 시절부터 언론, # # 축구팬 # (가장 많은 서울연고공동화정책 게시물이 남아있을 사커월드가 없어져서 아쉽지만 국내 축구 갤러리에서 공동화 키워드를 넣고 검색하면 개설연도인 2005년부터 줄줄이 검색되고 있다), 그리고 심지어 FIFA 홈페이지를 통해 외국에도 League's Decentralisation Policy # 로 명기되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던 용어와 내용들이다. Decentralisation Policy에서 Decentralisation은 분산화, 지방분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Chunma had to leave Seoul for Cheonan in accordance with the league's decentralisation policy" 이라는 문장에서 문맥상 한국프로축구연맹의 지방으로 분산 시키는 정책에 의해 서울 연고였던 일화 천마는 천안으로 이전했다는 내용이므로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을 영어식으로 가장 가깝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000년대 이전까지 언론에서 해당 정책의 이름이 검색이 안 되니까 없던 정책이란 주장이 있는데 인터넷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1990년대 기사 중 현재 인터넷으로 볼 수 있는 기사는 한정되어 있다. 서울 연고지를 공동화(空洞化) 시킨다는 개념을 풀어 쓴 기사들이 멀쩡히 남아있고 PC통신 하이텔 축구동호회 게시물을 갈무리한 파일에서는 서울 공동화 정책이 검색된다. 인터넷 검색으로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9글자가 검색 안 된다고 그 정책이 나중에 허구로 만들어 붙였다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다.

당시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이라는 용어를 사용 안 했더라도 (아래 한국프로축구연맹 이사회 문건이 첨부되어 있지만 실제 당시 이사회에서 사용 했음. 따라서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말 또한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 후 언론, 축구팬 등등에서 널리 사용되던 용어를 한국프로축구연맹이 2013년 발간한 한국프로축구 30년사에 넣으면서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용어 정립을 공식적으로 완료한 것으로 봐도 되기 때문에 사실 용어의 당대 사용 유무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논점이었다. 비유하자면 일제강점기에 '민족말살정책'이라는 용어가 없었으니 민족말살정책 행위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격이다.

또하나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지방'이라는 용어는 어느 방면의 땅이라는 의미 이외에 서울 이외(以外)의 지역(地域)이란 의미로 사용된다. 즉 지방하면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이런 느낌이 들지만 서울 이외의 지역이면 모두 지방으로 수도권의 수원도 지방이고 안양도 지방이고 부천도 지방인 것이다. 결국 당시 연맹이나 언론의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관련 문헌자료의 지방 분산, 지방 이전 등등의 의미는 지역별 안배 혹은 어떤 지방 도시들에 구단들이 들어서야 전체 프로축구 흥행 시너지 효과가 나올까 이런 생각없이 서울 근처 도시든 가장 먼 제주도든 무조건 서울 연고 구단들이 서울 이외의 도시로만 이전시키는데 급급했다는 것이다. 일례로 1994년 수원시의 LG 접촉 기사에서는 수원시도 지방도시로 소개하고 있으며, 같은 해의 다른 기사에서는 LG 치타스의 지방 경기 장소로 수원, 평택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아래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프로축구연맹 당시 '시, 도 단위로의 분산'을 목표로 언급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2002 월드컵 유치를 위한 사전작업의 성격을 띄고 있었던 이상, 기본적으로는 수도권 외 지방으로의 분산에 큰 비중을 두고 있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2. 진행 경과[편집]



2.1. 배경[편집]


1993년 11월 1일 당시 재임중이던 김영삼 대통령은 아시아 지역에서 개최하기로 FIFA가 내정한 2002년 월드컵 대회를 유치하기를 희망하는 국민적 움직임에 호응하여, 대선공약대로 민간 주도의 대회 유치 활동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약속하였다. # 이에 같은 해 12월 13일 축구협회는 대통령 재가를 거쳐 대회 유치 의사를 발표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접어든다. # 개최 준비 당시 사용한 정보는 주로 1994 미국 월드컵 선정 때의 미국측 자료와 개최 경쟁국이었던 일본의 동향 조사 결과였다. 월드컵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1996년 6월 개최지 결정 전까지 도시 선정 및 해당 도시에 축구전용구장을 건립 계획을 확정할 필요가 있었다. #


2.1.1. 1980년대의 상황[편집]


서울 연고 공동화를 논하기에 앞서서, 당시 한국 프로축구의 미약하기 그지없었던 지역 연고 문제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가 원년부터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등 지역별 거점 대도시에서 홈&어웨이로 경기를 치렀던 데 비해[4] 프로축구는 1983년 연고지를 나눠서 각팀에게 분배를 하고 출범을 하긴 했으나 홈&어웨이 경기를 치르지 못하고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전주, 춘천, 마산, 안동 등 전국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경기를 치르는 투어 시스템 즉 유랑리그로 운영되었다. 이는 주무부처인 체육부가 지역감정 유발을 염려하며 홈경기를 규제했기 때문. 이런 홈경기 규제는 1986시즌까지도 계속되어 1987시즌에서야 처음으로 본격적인 홈&어웨이 제도를 시행할 수 있었다.

지역연고와 관련되어서 "축구는 지역연고를 막았는데, 시작부터 지역연고를 시행한 야구는 뭐냐?"는 질문이 당연히 축구팬들 사이에서 나오고 일부 축구팬들이 주장하는 이른바 정권 차원에서의 프로야구 지원설의 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오히려 전두환이 프로야구엔 관심이 덜했기 때문에가 정답에 가깝다.

야구의 경우 당시 대한야구협회에 몸담고 있던 이용일의 적극적인 설득과 이를 받아들인 이상주 당시 청와대 교육문화수석비서관의 힘이 컸다. 당시 이용일은 "프로구단은 2만불이 넘는 나라여야 여가생활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한국은 2만불이 안된다. 이런 나라에서는 지역연고제가 있어야 프로리그가 성공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이용일은 KBO 초대 사무차장이 되는 이호헌과 함께 기업들 영입하기 위해 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닌 끝에 리그를 구성하고 개최하는 데 성공했다.

반대로 축구계는 갑작스런 프로리그 출범을 시기상조로 여겼다. 있는 실업리그(코리언 혹은 코리안 리그)에 1, 2부 승강제와 1부에 한한 연고지 제도[5]를 정착시킨 후, 1부리그를 서서히 프로화시키려 했다. 심지어 전두환 집권 이전인 1977년부터 논의를 시작해, 1980년에 결정한 사항이다. 그렇기에 축구계는 "정부가 야간경기용 조명을 설치해줘야 프로 출범이 가능하다"며, "추가 투자가 필요없다"며 빨리 프로화하자는 야구계와 상반된 반응을 했다.[6]

1982년 12월까지만 해도 드디어 축구계의 계획대로 되나 했으나...

1983년 2월에야 튀어나온 슈퍼리그 계획안에 밀려 엎어지고 만다. 프로야구에 자극받아 즉흥적으로 나왔다고 언론까지 까댄 계획대로 프로축구는 갑작스럽게 시작된다.

그래도 승강제는 이루어져, 1986년까지는 슈퍼리그와 코리안리그 1부팀의 승강제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지역 연고제는 어디에도 이뤄지지 못했다. 1년 먼저 시작한 프로야구가 우려대로 소위 지역 감정(정확힌 반 전두환 감정)을 마구 부추기는데, 축빠 전두환때문에 급조한 프로화에 지역 연고 개념을 넣을 방법은 없었다 봐도 무방하다.

계획이 튼실했냐와는 별개로 계획이 묵살당한 최순영 축협 회장 겸 할렐루야 구단주는 슈퍼리그에 전혀 애정을 붙히지 못했다. 원년인 1983년에 슈퍼리그 위원회를 해체·흡수시켜 버리고 슈퍼리그 수익의 30%를 떼며 돈벌이 수단으로만 취급했고, 프로리그 원년 우승을 차지한 자신의 구단도 실업팀으로 전환시킨다.

결국 프로축구 위원회가 부활한 1987시즌에야[7] 최초로 홈&어웨이 경기를 치르고, 전구단을 프로화하였다.[8] 그리고 이 해 말에 최순영도 회장직에서 물러난다.

물론 전두환의 애정이 도리어 축구계의 계획을 망쳐버린 것도 맞다. 근데 그렇다고 노를 완전히 던져버렸으니... 축구협회가 뭘 할 수 있었을 리가 없다. 이 정도의 병맛과 무능을 자랑할 뿐이었다.

한가지 더 눈여겨볼 점은 FC 화랑의 존재다. 슈퍼리그 출범 이전 국가대표팀인 화랑팀의 운영은 정말로 FC 국대, FC 코리아 그 자체였다. 1981년 화랑팀은 연간 무려 29경기를 소화했고 이 중 청대, 대학선발, 실업선발과의 경기를 제외해도 무려 24경기였다. 더욱 눈여겨봐야 할 것은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인데, 국가대표가 12일에 걸쳐 대전, 전주, 대구, 부산, 서울 등을 순회하며 경기를 치르는 운영을 보였다. 이게 그나마 화랑팀만 있으니 그렇지 충무팀까지 있던 시절엔 박스컵 한 번 치르면 국가대표가 전국을 돌며 거의 10경기를 치렀다. 이런 전국순회 축구대회라는 틀을 그대로 적용시킨 결과가 1986년 이전의 슈퍼리그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지금에 와서는 프로구단이라면 연고지를 가지고 홈&어웨이 경기를 치러야 한다는 게 상식처럼 박혀있지만, 이제 막 프로리그라는 것을 시작해 본 1980년대 당시에 이런 운영은 가히 혁명적 변화라고 할 만 했다. 그 이전에 한국 사회에서 경험해 본 프로스포츠라는 것은 레슬링이나 권투 같은 개인전 종목 뿐이었고, 그나마 1960년대의 홍콩리그 진출이나, 차범근이나 허정무 등 몇몇 축구 스타들의 유럽 진출 덕에 프로축구라는 게 있다는 걸 아는 수준이었다. 오죽하면 우루과이 클럽팀 이겨놓고 남미 강호 우루과이 꺾었다고 사기치는 판이었다.

이 시기 프로스포츠에 대한 전두환 정부 당국의 인식이 얼마나 주먹구구식이었는지는 프로야구 출범과정만 봐도 알 수 있다. 청와대가 먼저 프로스포츠를 만들자고 축구/야구인을 불러모아놓고는 지역감정 문제를 이유로 지역연고제를 반대한 것이다.

무엇보다 야구인들은 지역 연고제를 지켜낼 논리와 기술이 있었다. "지역 연고제를 한다면 홈구장 시설을 구단주가 돈 들여서 알아서 고칠테니 정부가 지원 안 해줘도 됨"이라 설득하기도, "우리 국민 소득 수준 봤을 때 지역 연고 도입해야 안 망할 걸?" 이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게다가 지역 기반으로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던 고교야구라는, 확실한 근거도 있었다.

물론 축구계의 계획에 이런 정부의 의지는 도리어 방해물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축구인들도 너무 원론에만 머무르고 있었다. 가장 흥하던 컨텐츠인 '화랑'도 전국 순회 제도였으니, 야구와 달리 지역 연고제를 사수할 근거도 없었다. 게다가 전두환은 축빠니 높으신 분들이 프로화에 더 다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축구인이란 놈들은 하라는 프로화는 안 하고, 정부 돈으로 지역감정 일으켜 줄 거 아님 프로화 바로 안 한다는 소리만 하고 있으니 "아 화랑 같은 전국 투어로 빨리빨리 프로리그 만들어." 하고 슈퍼리그를 밀어붙힌 것.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은 지방자치권이 정지된 중앙정부 일변도의 국가였음을 명심하자. 지역연고제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지방정부가 연고지 구단에게 인프라 구축을 비롯한 행정적 지원과 연계가 가능해야 하는데 행정공무원들이 관선단체장으로 임명되고 있던 당시의 지방정부에게는 그러한 권한이 없었다. 사실 축구계의 요구에도 허락 안해주다가 1987년에 급작스럽게 지역연고제와 홈&어웨이 경기가 실현된 이면에는 직선제 개헌 요구를 지방자치제로 무마하려던 5공 정권의 의도가 꽤 크게 작용한 면이 있다.

이렇게 부침을 겪은 끝에 간신히 연고지 경기를 시행하는 데 성공한 프로축구였지만, 이후로도 사정은 좋지 못했다. 1987년 부산/경남(대우), 대구/경북(포항제철), 인천/경기(유공), 충청도(럭키금성), 강원도(현대) 으로 구성된 연고지는[9] 연고지 경기 개시 1년 만에 포철은 대구 경기를 포기하고 중소도시 포항을 사실상 도시연고로 삼았고, 1989년 최초의 서울 구단인 일화 천마가 리그에 참가하자 곧바로 럭키금성(1990시즌)과 유공(1991시즌)이 서울로, 현대(1990시즌)가 울산으로 이동하는 등 대대적인 변화를 겪으며 서울 3팀과 동남 해안지역 3팀만 존재하는 불균형한 구도로 재편되었다. 축구계의 숙원이었던 호남팀 창단은 1987년 금호를 주축으로 한 컨소시엄 방식의 창단이 추진되었지만 결국 홍보효과 저조를 이유로 1년만에 무산되는 등 결실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10]


2.1.2. 1990년대의 상황[편집]


여기까지는 그래도 지속적인 신규 구단 창설과 신설되는 연맹 차원의 마케팅 등으로 장기전을 시도할 소지가 있었지만, 곧 또다른 변수가 하나 터진다. 바로 초장에서 언급한 2002 월드컵 유치전이었다. 한 번 놓치면 적어도 30년 이상을 기다려야 할 아시아권 월드컵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초대형 이벤트였고,[11] 일본에 비해 월드컵 전적 하나 빼면 경제력과 인프라, 지방 축구 붐 등 모든 면에서 뒤쳐지는 한국으로서는 단기간에 이를 따라잡을 방도를 찾아야 했다. 이에 따라 프로축구의 지방 분산과 도시연고 설정 및 확립,[12] 1994년 당시 7개 구단이었던 프로축구 리그의 확장 =(목표 12개 구단),[13] 축구전용구장 건립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 #

1995년에 이르면 호남에 2개 구단이 리그에 참가하였고 1996년에는 삼성의 프로축구단 참가가 확정되어 외견상 서울과 경상도 집중화 현상은 일단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하지만 실상을 따지고 들어가 보면 여전히 좋지 않았다. 1994년에야 전북 버팔로가 전주에서 최초의 호남 구단으로 참가했지만 경영난으로 1년 만에 해체[14]되고, 결국 현대그룹이 울산 현대가 있는데도 1995년 전북 현대 다이노스를 창단했으며[15] 뒤이서 제2호남구단으로 창단된 전남 드래곤즈조차 기존 구단을 보유하고 있던 포항제철 산하 구단이었다. 즉 간신히 구축한 호남권 2개 구단이 모두 기존 구단의 위성구단 신세인 상황이었다. 또한 1995년 프로야구가 이미 서울과 전국 5대 광역시[16] + 전북 전주시를 확보하고 있었던 데 반해 프로축구는 서울과 부산을 제외하면 단 한 곳의 광역시 팀도 가지지 못한 상황이었으며, 각 구단 홈 경기장의 잔디 상태나 대관 일정으로 인해 매 구단마다 시즌 몇 경기는 제3의 구장에서 홈경기를 치르는 것이 거의 관행이 되어있었다.

이런 현상이 가장 심각했던 곳은 당연히 동대문 한 곳에 몰린 서울 3구단으로, 전체 51경기 중 19경기를 서울 바깥에서 치러야 했을 정도였다. 자연히 홈경기 시행에도 불구하고 지역연고의 정착은 그 속도가 매우 더뎠으며, 지방의 신규 구단 창단도 생각보다 지지부진했다. 이에 따라 신생 프로축구연맹은 지역연고의 확립을 위해 서울 연고 구단의 지방 분산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한편 수원의 경우 LG에 연고 이전 시 제공할 수 있는 혜택들을 제시하는 등 지방 지자체에서도 지방자치제 시행에 힘입어 축구 구단을 유치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 이러한 움직임에 고무되어 프로축구연맹은 기존 구단, 특히 동대문구장 한 곳에 몰린 서울 3개 구단의 연고 재배치를 추진하게 되었다.

사실 서울 3개 구단의 분산배치는 이보다 전인 1990년에도 한 차례 시도가 있었는데, 이 때의 자율적인 연고 배정 논의는 각 구단이 철저히 자신의 이익을 우선했기 때문에 합의를 보기가 어려웠다.[17] 특히 가장 큰 문제는 서울을 연고로 하고 있는 3개 구단이 서울 동대문운동장을 홈 경기장으로 유지하는 것을 고집했다는 것이다. #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목동은 교통여건이 안 좋았고 잠실은 교통은 좋았지만 7만 수용의 대규모 종합경기장이라 일개 프로구단이 사용하기는 힘든 여건이었다. 축구 국가대표팀도 동대문과 지방 대도시에서 홈경기를 하고 빅게임 위주로만 잠실에서 하던 시대였다. 프로축구 서울연고팀 구장난 거기에 프로야구가 매일 바로 옆 잠실 야구장에서 열리는 것 또한 부담스러웠고 이런 상황에서 관중 동원은 기대 이하였지만 그래도 서울시민들에게 1990년 이래로 매주 주말이면 서울 동대문에서 서울 연고 프로축구단들이 경기를 한다는 이 정도 인식 정도는 쌓아올린 동대문 운동장을 3개 구단 모두 포기하기는 어려웠다. 동대문에서의 이탈에 대해서도 이 정도였는데 서울 밖으로의 이전에 대해서는 말 할 필요도 없었다.


2.2. 정부 개입[편집]


1994년 5월 대한축구협회장 정몽준이 직접 서울 연고 3개 구단 지방 분산 추진을 언급하였고 <인터뷰>-鄭夢準대한축구협회 회장 1994년 7월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출범하여 서울 연고 3개 구단의 지방 분산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프로축구聯,30일 출범

이렇게 프로축구연맹 자체적인 지역연고제 확립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울 3개 구단 사이의 형평성 문제 등으로 구체적인 실행 방안에 대한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자, 1994년 7월 4일 문화체육부가 나서 도시 위주의 연고제 확립과 전용구장 건립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 이로 인해 서울 3개 구단은 서울에 남지 못할 가능성을 대비하여 일화는 성남, 유공은 부천, LG는 서울 또는 수원 등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

정부의 개입으로 힘을 얻은 프로축구연맹은 1995년 2월 13일 이사회에서 1996년 1월 1일자로 서울을 공동구역으로 두고, "연말까지 서울에 축구 전용구장 건립 계획을 수립할 경우 서울 잔류를 허용", "서울에 축구 전용구장 건립할 경우 서울 복귀에 우선권을 부여한다" 등 4가지 조건을 달아 3개 구단을 서울 이외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하였다.# # 3개 구단은 이에 합의하지만, # 그해 10월 서울 연고를 고수하겠다고 밝혔다. 유공은 목동, 일화는 동대문을 홈 경기장으로 주장했고, LG도 형평성 문제를 근거로 서울 연고를 유지할 것을 밝혔다. # 특히 1995년 9월 20일 이사회에서 유공의 경우는 "우리는 서울을 떠날 수가 없다. 정 떠나야 한다면 축구단 운영을 포기해야겠다"는 강경한 자세를 취했다. #

결국 1996년 6월의 월드컵 개최지 발표라는 마감시간을 준수하기 위해서는 정책 시행에 합의한 기한인 1996년 1월 1일 서울 연고지 공동화 준수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프로축구연맹은 청와대에 도움을 요청, 서울 3팀의 연고지 이전 지침을 청와대로부터 하달받아 각 구단에 전달하였으며 연맹 역시 서울 연고 구단들이 계속해서 서울 연고지를 고수할 경우 리그 참가 배제라는 내부 방침을 정하고 강제 시행에 들어갔다. # #


2.3. 결말[편집]


유공이 부천, 일화가 천안으로 연고지를 옮긴 뒤 1996년 4월 27일 마지막으로 LG가 안양으로 연고지를 옮겨 서울 공동화 정책 시행은 완료되었다. # 또한 지역 연고 강화를 위해 모든 구단명에 도시를 명시하도록 재편하였고, 간략히 표시할 때는 도시명 만을 쓰도록 각 언론사에 협조를 요청하였다. #[18]

하지만 새로운 연고지의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안양종합운동장은 1년 동안 보수를 하고서야 겨우 경기를 할 수 있었고, 부천에는 당시 아예 축구를 할 수 있는 경기장이 없어서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서울 목동경기장에서 홈경기를 개최했다. 한 마디로 주소만 안양팀이고 먹고 자고 일하는 곳은 서울. 천안오룡운동장은 조명탑조차 없어서 야간 경기를 하다가 주위가 온통 암흑천지가 되어 경기 진행에 차질이 빚어지자 제비뽑기로 승부를 가리는 촌극이 벌어졌다. 그리고 아프로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1996 시즌(vs. 올랜도 파이러츠 F.C. (RSA))의 홈 경기도 서울에서 치렀다. 운영 또한 마찬가지여서 천안 일화는 1990년대 후반 내내 암흑기를 겪었고 안양은 2003년 후반부터 이미 마음이 떠났는지 킥오프 5분 전에 경기를 취소시키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팬들 상대로의 이벤트도 전면 중단했고 부천은 모기업이 대놓고 박대하면서 팬들의 공분을 샀다. 또한 리그 사무국에서 독단적으로 중립경기라는 명목으로 중요 경기들을 서울에서 치름으로써 잇속을 챙기려 했으나 큰 이익을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각 구단 연고지 팬들의 빈축만을 샀다.

대한축구협회와 한국프로축구연맹은 2002년 월드컵 이후 축구붐을 통해 신규 대기업 구단을 유치하여 서울 연고팀을 만들려고 했지만 KT, 금호, 한화 등 후보 대기업이 모두 창단 의사를 철회하였다.[19] 이에 따라 기존 구단의 연고이전으로 서울 연고 구단을 만드는 것으로 방침을 수정하고 기존 전 구단에게 서울 연고지 이전 신청서를 보냈다. 그러나 모두들 돈 내고 들어가기 싫어서 어떻게 공짜로 입성할 수 없을까 간보다 포기하고 안양 LG부산 아이콘스가 신청을 했다가 부산 아이콘스가 철회를 하여 안양 LG 단독 후보가 되었다. 당시 서울시장이던 이명박도 모기업이 현대산업개발인 부산보다는 LG인 안양 LG 치타스가 더 낫다고 LG의 연고이전을 바랬었고 LG도 다른 구단과 달리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들어가는 걸 택했다. 이후 150억의 서울 입성금 가격을 놓고 난항을 겪다가 서울월드컵경기장 건설비용의 약 4%에 해당하는 75억원을 건설분담금 형태로 프로축구연맹에 지불하였고 2004년 3월 11일 연맹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서울로 연고이전이 승인되었고 FC 서울로 팀명을 변경하였다.

한편 천안 일화는 2000년 성남으로 연고를 다시 옮겼으며, 성남 일화로서 K리그를 한때 지배했음에도 종교적 이유 등 여러 가지 성남 지역 정착에 어려움을 겪다가 2013년 성남시에서 인수하여 연고 정착에 나서고 있다. 부천 SK는 2006년 제주도로 연고이전을 하면서 제주 유나이티드가 되었다. 각 구단이 연고지를 이전하는 과정은 그다지 매끄럽지 못했는데, 상세한 내용은 각 구단 문서에서 기술한다.


3. 김현회의 허위 왜곡 기사와 논란의 종결[편집]


K리그의 반 연고이전 진영은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에 대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은 허위 정책'이라고 주장해왔다.[20] 이로 인해 나무위키는 물론이고 한국어 위키백과등의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관련 문서는 반달과 복구가 반복되는 전쟁터가 되곤 했다. 반 연고이전 진영이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에 대해 허구설을 주장하는 이유는 FC 서울 구단과 FC 서울의 일부 팬들이 이 정책을 토대로 2004년 서울 연고 이전에 대한 정당성(연고복귀)을 주장하기 때문이다.[21]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반 연고이전 진영에서는 동대문 3구단의 지방 이전이 강제가 아닌 각 구단의 자발적인 선택이었다거나 애당초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이전에는 K리그에 연고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등의 주장을 내새우며 FC 서울의 서울 연고 이전을 공격한 것이다.

특히 여기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 1998년 이후 이른바 축구 르네상스 시기 무주공산의 서울지역 축구팬덤을 제대로 흡수하며 서울 연고 공동화의 가장 큰 수혜자로 떠올랐던, 그리고 서울 지역 빅클럽의 탄생으로 인한 팬 유출을 극도로 경계했던 수원 삼성 블루윙즈 팬덤이었다. 오죽하면 이른바 서사개(서울 사는 개랑)라는 비칭이 따로 있을까. 이들은 신규창설구단으로 연고이전 문제에서 자유롭다는 장점을 무기로 서울 출신 3개 구단에 대해 악독할 정도의 패륜몰이를 주도했고, 특히 서울로 복귀한 FC 서울을 리그 공공의 적으로 몰아넣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 2000년대 후반부터는 K리그 전통의 명문구단으로 성장한 전북 현대 팬덤까지 가세하며 이른바 북패몰이는 절정에 달했다.[22]

이런 논란은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에 대한 기사들과 기록들에 의해 반 연고이전 진영측의 논리가 부실해짐에 따라 2016년 이후 진정 국면에 들어갔는데, 물론 FC 서울 팬덤의 노력도 있었지만 우습게도 반K리그 진영의 참전도 한 몫을 했다. 평소 K리그 팬덤의 유럽지상주의와 아마추어리즘, 세금도둑질에 반감을 갖고 있던 이들의 눈에 자비를 수십억씩 지출해가며 서울 빅마켓을 노린 FC 서울의 행보가 그나마 정상적인 프로구단의 모습으로 보였고, 하필 프로야구 제10구단 관련 논란 당시 창단 신청지역에서 수원 삼성, 전북 현대 팬덤이 벌인 각종 무논리 깽판질에 분개한 친야구 반K리그 성향의 유저들이 나름 프로야구와 평화롭게 공존중이던 북팬덤의 주장을 검증하다보니 자연스레 이들의 논리를 입증할 증거들이 무더기로 쏟아진 것이다.

그럼에도 해당 논란이 2017년 희대의 어그로꾼 김현회의 불쏘시개 뒷북 칼럼에 의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김현회는 이 칼럼에서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의 용어와 개념은 FC 서울 팬들이 연고이전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허구로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얘기였는데 현안만 파고드는 언론이 인터넷에서 보고 베끼고 자기 역사도 모르는 한국프로축구연맹이 30년사에 다시 복사해서 베껴넣으면서 정설이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입증할 아무 구체적 근거자료 없이 단정짓고 기술하였다.

결국 참다 못한 FC 서울 측에서는 프로축구연맹 측에 사실관계를 요청하였고 당시 실제 논의과정을 통해 결정된 정책이었음을 공식적으로 재확인 받았고 1995년 당시의 이사회 회의자료를 회신 받았다.

그리고 FC 서울은 홈페이지를 통해, 연맹 이사회 1994년 제7차 회의록 및 1995년 제1차 회의록을 공개하였으며 1995년 1월 12일에 있었던 1994년 제7차 회의록에서 '서울 지역을 공동화(空洞化)하는 원칙이 정해지면'이라는 문구가 확인되었으며, LG, 유공, 일화 3개 구단의 연고권 문제에 대해서도 1995년 1차 회의록에서 서울 지역 연고권이 3개 구단인 것은라는 문구를 통하여 그 연고권이 명확히 입증되었다.

이를 계기로 서울 연고 공동화(空洞化) 정책의 용어와 개념에 대한 논란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파일:김현회허위날조칼럼-FC서울팩트응징.jpg
<프로축구연맹 94년 이사회 제7차 회의 의사록 일부>
파일:프로축구연맹-1995년1월12일-이사회회의록-1.jpg
파일:프로축구연맹-1995년1월12일-이사회회의록-2.jpg
<프로축구연맹 95년 이사회 제1차 회의 의사록 일부>
파일:프로축구연맹-1995년2월13일-이사회회의록-1.jpg
파일:프로축구연맹-1995년2월13일-이사회회의록-2.jpg

이후 김현회는 2018년 7월 樂SOCCER와의 인터뷰에서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다를 수 있지만 나의 논리보다 반박하시는 분들의 논리가 더 타당한 점이 많았던 부분에 대하여 사과드린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김현회 칼럼의 주제이자 논리 핵심은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의 용어와 개념은 FC 서울 팬들이 연고이전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허구로서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얘기였는데, 언론사 기자들이 인터넷에서 보고 베껴서 기사화시키고 자기 역사도 모르는 한국프로축구연맹이 30년사에 다시 복사해서 베껴넣으면서 정설이 되었다"

는 것이었다. 이것이 과연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해석의 차이인지, 아니면 명백한 사실관계의 오류가 드러난 것인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겠다.


4. 평가[편집]


시장의 평가와 현실을 무시하고 정권의 힘을 빌어 연맹이 정책을 밀어붙인 결과 프로스포츠 입장에서는 가장 적극적으로 덤벼들어야 할, 사람과 돈이 몰린 최대 시장인 서울에서 연고 구단이 없게 되는 사태가 초래되었다. 1990년대 말부터 K리그 붐이 발생하여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 절정에 달하였는데, 이 시기에 서울에서 K리그 붐을 일으키지 못한 것은 소탐대실이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2004년 안양 LG가 다시 서울로 연고지 이전을 하여 현재의 FC 서울이 되면서 서울 공동화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원래 유공과 일화를 응원하던 서울 팬이나, 안양, 부천, 천안 등 각 구단이 애착을 갖고 선택한 것이 아니었던 도시의 축구팬들은 연고 구단을 타의에 의해 빼앗긴 상실감을 맛보게 되었다.[23]

결과적으로 현재 K리그의 문제인 최대시장 서울에 걸맞지 않은 흥행 부진, 연고의식 부재와 이른바 패륜으로 칭해지는 구단 정통성 문제, 이로 인한 축구팬들 간의 상호 반목 등 수많은 문제점들이 바로 이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한편으로는 1983~1986년 순회리그 체제에 이어, 또다시 프로축구가 얼마나 근본이 취약하고 정치논리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상황인지를 다시 한 번 입증했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은 배가된다.

여기서 서울 연고 공동화의 '실패'를 논하기 위해 몇가지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4.1. 서울 연고 공동화의 목적과 성격[편집]


첫째, 과연 서울 연고 공동화의 목적과 성격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4.1.1. 중소 도시 연고지 위주 틈새 전략[편집]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을 추진했던 고위 축구행정가들이 속사정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 한 프로야구와의 정면대결은 피하고 중소도시 스몰마켓으로만 숨어들어가는 근시안적인 행정이라는 시각이 정설이다. 1998년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주최한 공청회에서 서울 연고 공동화의 결과를 두고 프로야구 연고지를 피해 중소도시 연고지를 공략하는 틈새 전략이라고 자화자찬하는 발표가 이를 뒷받침하며 사실상 한국프로축구연맹의 공식 입장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이런 공청회에 초청된 외부 인사의 발표는 사실 주최측의 입맛에 맞게 즉, 짜고 치는 고스톱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또한 이런 발표에 대해당시 한국프로축구연맹의 공식적인 반론 역시 없었다. 또한 김종환 스포츠 마케팅 박사[24]갑툭튀로 이런 발표 하나 남기고 사라진 인물이 아닌 선수 출신으로 축구계 각종 컨설팅을 비롯 최근까지도 대한축구협회 임원 명단에 등재되어 있다.2009년 축구협회 임원 명단, 2017년축구협회 임원 명단

파일:K리그-중소도시연고지틈새전략.jpg

여담이지만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당시와 무려 2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한국 축구계에는 대도시보다는 지방 중소도시가 축구 열기가 훨씬 높고 그렇기 때문에 중소도시를 연고로 하는 구단들이 많이 생겨야 흥행할 수 있다는 근거없는 환상이 남아있다. 지방 중소도시는 축구 좋아하는 주민들만 전입받고 대도시는 야구 등 축구보다 다른 종목 좋아하는 주민들만 전입을 받는 것도 아닌데 정말 아무 과학적인 통계자료도 없고 그냥 막연하게 축구계 스스로 축구는 대도시에서는 인기 없고 지방 중소도시, 특히 프로야구 연고지 연고지와 안 겹치는 중소도시에서나 인기 있다는 이런 불리한 프레임을 만드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파일:한국축구계-지방중소도시-환상.jpg



4.1.1.1. 보론[편집]

서울에서 중립경기를 개최한 것은 1996년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시행 이후 1998년부터이고 대전 창단도 서울 연고 공동화 1년 후 등 반론에서 근거로 서술한 축구계의 대도시 빅마켓 지향 움직임의 대부분은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이후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은 1994년부터 논의가 시작되어 1995년 2월 결정이 되고 1996년에 시행이 되었던 사건으로 즉 정책이 결정된 1995년 2월 시점에 있어서 축구 행정가들의 연고지 정책 지향점이 중요한 것인데 1996년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시행 이후 축구계에서 대도시 빅마켓을 지향하는 일련의 움직임이 있었으니 거꾸로 소급해서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이 축구계의 중소도시 스몰마켓 지향 움직임이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 존재한다.

특히 1995년 2월 시점과 무려 5년이나 시간적 격차가 존재하는 2000년 2월 현대산업개발의 부산 대우 로얄즈 인수를 근거로 들면서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의 이면에 축구계의 중소도시 스몰마켓 움직임이 큰 설득력 없다고 하는 대목은 어불성설이다.

지금 이 논리는 예를들어 어떤 칼럼니스트가 1994년에서 1996년까지 보수 시각의 칼럼들을 많이 기고했고(1995년과 1996년 사이 전북/전주, 전남/광양, 안양, 수원, 부천, 천안 이렇게 중소도시 연고지 구단이 대거 등장) 당연히 이 시기에 이 사람은 명백히 보수 성향에 가까웠지만 1997년부터 진보 시각의 칼럼을 몇개 썼더니(1997년에 대전 연고 구단이 들어오고 대도시 연고지 구단 창단 움직임이 일어남) 소급되어서 과거 행적까지 세탁되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즉 보수였다가 진보가 된 사람도 있고 진보였다가 보수가 된 사람도 있으며, 다른 비유를 들자면 국가 경제 정책에서도 중소기업 진흥 정책을 시행하다가 대기업 진흥 정책 혹은 경공업 진흥 정책을 시행하다가 중공업 진흥 정책으로 바꾸는 것도 가능하듯이 아직 프로축구 초창기라고 할 수 있는 시절 연고지 정책 방향을 중소도시 스몰마켓 위주로 하다가 그 후 아닌 것 같다고 판단하고 다시 대도시 빅마켓 위주로 바꿀 수도 충분히 있는 것이다.

또한 프로축구연맹 공청회에서 당시에 프로야구의 대도시 위주 연고지를 피해 중소도시 위주 틈새전략의 연고지 정책을 시행했다는 발표까지 남아 있는 상황에서 이를 뒤짚는 당시 축구 행정가의 반증이 나온 것도 아닌 마당에 정책 이후의 대도시 연고지 지향 움직임이라는 정황에 껴맞추어서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이 중소도시 위주 틈새전략과 무관하다고 단정하는 것은 자유로운 추론이 가능한 나무위키지만 무리가 있다.

1996년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이후 프로축구연맹의 대도시 빅마켓 연고지 지향 움직임은 1996시즌 시점 9개 구단의 연고지가 부산, 울산, 포항, 안양, 수원, 부천, 전북(전주), 전남(광양), 천안 이렇게 부산 이외에 중소도시 위주로 재편되면서 이런 기형적인 연고지 구조에 대한 자각으로 나온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아래와 같이 일반 축구팬들 조차 당시 연고지 구조에 대해 프로야구가 지역 대표성을 가진 대도시에 연고를 두고 있는데 비해 프로축구는 중소도시 위주로 연고지가 재편되어 인기가 없다고 신문사에 편지까지 보내어 비판하는 상황인데 아무리 한국 축구행정가들의 수준이 떨어지더라도 중소도시 위주 기형적인 연고지 구조에 대한 자각과 이를 토대로 연고지 전략을 수정 하는 것이 크게 무리라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프로축구 저변확대 위해 연고지 대도시 중심돼야, 대도시연고 프로팀 구성 축구활성화 위한 지름길, 인구많고 시설좋은 대도시에서 경기를 갖고

반론의 도입부에 있는 마스터 플랜도 사실 실체가 별로 없고, 만약 있었다고 쳐도 3S정책에 축빠 대통령이 지원해준다면 그 플랜을 일치단결하여 신속하게 진행하는게 정상이라는 비판이 많다. 정 안된다면 프로화를 늦추기라도 했어야 한다. 그러나 프로축구는 프로 둘에 아마 셋이라는 처참한 구성을 지역 연고도 없이 전 국토 순회 경기라는 매우 나쁜 형태로 시작했다. 이는 마스터 플랜같은 게 사실상 없거나 실현 불가능 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4.1.2. 반론: 월드컵 유치를 위한 사전작업[편집]


초장부터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듯이, 애초에 서울 연고 공동화로 불리는 프로축구의 지방 분산은 월드컵 유치전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의 일환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당연히 월드컵 유치전에서 점수를 얻기 위해서는 프로구단 분산의 목적지가 지방 주요 월드컵 개최후보지일 수밖에 없다.

위의 프로축구연맹 창설 기사에서 '일화, 유공, LG가 동대문과 목동구장에 몰려있는 등 지역적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각 시,도로 분산시키고 공설운동장을 임대, 전용구장으로 활용하는 문제를 적극 추진할 계획이다.'라고 언급하고 있어, 당시 분산 대상의 단위를 (광역)시, 도 단위로 상정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1995년 당시 15곳에 달하는 개최 후보지가 광역시, 준광역시급 대도시들만 있는 것은 아니며 비수도권 지방도시들만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대놓고 이전 대상지역의 자격을 적시하지 못했을 뿐이다. 전자는 대표적으로 목포, 서귀포, 강릉, 청원, 천안 등. 이미 프로축구단이 있는 도시까지 포함하면 전주, 포항도 들어간다. 당시 청주시는 유치 신청을 하지 않았고 청원군이 참가했으며 현재 오송역 인근인 궁평리에 구장을 건설할 계획이었다. 후자는 인천, 수원 등. 실제로 축구계 차원에서 월드컵 유치전을 미끼로 내걸고 축구단 유치 혹은 창단을 독려하던 움직임도 있었고,[25] 그 대상지역은 하나같이 지방 광역시 혹은 도소재지급 중견도시들이었다. 대표적으로 아래에서 언급할 대전과 창원의 서울 구단 유치움직임, 대구시의 쌍용 접촉, 대전의 10구단 창단 등이 있다.[26] 그러나 천안을 제외하면 월드컵 유치 희망 도시들 중 어느 곳도 서울 구단을 유치하는 데 실패했고, 대전 이외에 광역시나 주요 대도시에서의 추가 창단 또한 없었다.

이걸로도 모자라 아예 경기장 운영비는 물론이고 건설비까지 프로축구를 통해 해결하려는 모습까지 보였는데, 실제로 서울월드컵경기장의 건설비는 아예 대놓고 프로구단에게 떠넘기려 했고, 수원월드컵경기장 건설비도 원래는 삼성그룹에서 부담할 예정이었다.[27] 프로구단의 지방분산이 얼마나 노골적으로 월드컵 유치 활동과 직결되어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일화가 내려간 천안을 비롯해 서울을 제외한 그 어느 도시에서도 프로구단 모기업의 출자로 축구전용구장이 건설되는 일은 없었다. 심지어 현대가가 담당하던 울산과 전주에서도.[28] 결국 광주와 대구는 인구와 영향력, 상징성 등을 이유로 유치권을 따낸 뒤에 종합운동장으로 변경할 것을 고려한 월드컵 경기장을 지었다.

서울 연고 공동화가 정말 중소도시 흥행을 추구한 것이라면 당연히 연맹이나 축구계의 어딘가에서는 공개적으로 중소도시 흥행론을 들고 나와 여론몰이를 추진해야 했겠지만, 정작 1995년까지만 해도 언론이고 어디고 간에 중소도시를 중심으로 흥행을 꾀한다는 소리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축구계의 관심은 오직 연고지 개편을 월드컵 유치로 연결하는데에만 집중되어 있었고, 심지어 신규 창단구단과 연고지가 겹치면 기존구단 이전에 우선권을 부여한다는 방침까지 공개적으로 제시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3개 구단이 연고지를 옮긴 후인 1996년부터 갑자기 유럽축구나 J리그의 중소도시 흥행사례가 소개되더니,# # 급기야 1998년 공청회에서는 위에서 소개된 김종환의 중소도시 틈새시장론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현실로 나타난 서울 구단들의 중소도시행과 위와 같은 스몰마켓행에 대한 자화자찬은 신생 프로연맹을 비롯한 축구계의 전반적인 행정능력 부족과 이미 왜곡될 대로 왜곡되어 있던 프로축구의 구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보듯이 서울 연고 공동화에 대한 기존 서울 구단들의 반발은 강렬했고, 축구계는 이를 조정할 힘이 없어 결국 청와대의 힘까지 빌려와야 했던 것이 당시 상황이었다. 여기에 수도권 내 유력 월드컵 개최후보지=이전 후보지였던 수원마저 신구단 삼성의 몫으로 돌아간 상황에서, 축구협회와 프로연맹의 힘으로는 결국 3구단을 일단 서울에서 나가도록 하는 것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이런 엉망진창 결과를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포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당시 상황이었고, 결국 농구나 배구도 아닌 축구에서 틈새전략론이라는 희대의 괴이론이 등장했다. 애초에 중소도시 틈새전략이라면서 5대 광역시인 대전이 들어간 시점에서 앞뒤가 안 맞는 소리다.

게다가 저 문제의 공청회 당시 김종환은 '외부 전문가'로 초청되어 온 것이지 축협이나 연맹 측 인사로 참가한 것도 아니다.(위에서 언급했듯 선수 출신이기는 하지만.)[29] 정작 서울 중립경기 개최가 결정된 것이 바로 저 1998년 프로축구 공청회였다. 위에서는 김종환의 스몰마켓론에 대해 연맹이 별 반박이 없었다고 주장하는데, 스몰마켓론이 제기된 그 자리에서 서울 중립경기가 결정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반박이 된 셈이다. 이후 이른바 축구논객들이 이 틈새전략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확산되어 오늘날 리그 내 행정가들에게까지 침투한 면은 있으나 1996년 당시 연맹의 목표설정 여부와는 분명히 구분지을 필요가 있다.[30]

사실 협회와 연맹이 마냥 뻣뻣하게 굴 수만은 없었던 것이, 1987년 김종부 파동 당시 현대 측에서 대놓고 해체를 선언해 리그가 문 닫을 뻔 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시 협회나 연맹이 제대로 구단들에 대한 구속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면 단순히 서울에서 쫓아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월드컵 유치 신청도시 등을 목적지로 명시했겠지만, 프로축구를 위해 지난 10여년간 뭐 하나 해 준 게 없는 협회와 연맹에게 그런 권위 따위는 없었고, 그런 이들이 월드컵 유치를 위해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희생을 구단들이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타협점이 이런 어중간한 수도권 중소도시행이었던 것. 사실 여기서 대차게 까이는 안양, 부천도 최종후보명단에 못 들어가서 그렇지 일단은 월드컵 유치 신청도시 중 하나였고#, 이를 위해 실제로 부천에는 중앙정부 차원의 경기장 신축 계획도 잡아놨다.#

말이야 호기롭게 리그 참가 배제 운운했지만, 월드컵 유치전을 위해 구단들을 지방으로 분산시키려는 마당에 3구단 중 하나가 해체 파동이라도 일으킨다면 축구계로서는 수습할 도리가 없었고,[31] 천만다행으로 월드컵 유치에 성공했으니 망정이지 이렇게 구단들을 장기말 취급 해놓고 월드컵 유치 실패하기라도 했으면 그 후폭풍은 지금 우리가 보는 K리그의 난맥상과는 궤를 달리 했을 것이다.

하여간 수도권이든 지방이든 구단들을 쫓아낸 뒤에, 서울 시장은 어떻게 하느냐? 다 필요없고 월드컵만 유치하면 서울은 그 막대한 시장성+월드컵 버프를 토대로 언제든지 신구장 낀 신구단을 만들 수 있을테니 별 걱정 없었다. 실제로도 1988년에 서울 연고를 개방하자마자 바로 일화가 창단하기도 했고, 서울도 광역시도 아닌 일반 도시에 불과한 수원에 무려 삼성이라는 굴지의 대기업이 신규 창단하고 대구시가 쌍용과 활발히 접촉할 정도로 월드컵 유치전으로 달아올랐던 1995년 당시 축구계를 둘러싼 분위기는 일견 나쁘지 않았으니. 유공과 LG의 서울 위성도시 이전을 방조한 것도 이렇게 서울 시장에 목을 멘다면 언젠가 서울 전용구장을 건설하고 서울에 복귀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실제로 공동화 추진 당시만 해도 수원은 삼성그룹이 전용구장 건설을 진행중이기도 했으니 월드컵만 성사되면 서울 신구장에 투자가 들어올거라는 예상이 아주 무리는 아니기도 했고, LG는 좀 많이 깎기는 했어도 결국 돈 내고 서울 돌아왔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간에 결과적으로 대상 구단들은 지방 대도시로의 이전도, 서울 잔류를 위한 신규 구장 건설도 아닌 서울 인근의 중소도시로 이전하였고, 서울에는 1989년 일화 창단 이후 2015년 서울 이랜드 FC가 참가하기 전까지 단 하나의 신규 구단 창단이 없었다. 연맹은 나름대로 이전 대상지역 전용구장 건설계획 공증을 통한 시한부 서울 잔류를 타협안으로 제시했지만 오히려 구단들은 아직 경기장이 건설 중이던 부천을 제외하고 즉각 서울을 떠나버렸다. 이미 연맹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32] 1996년 천안으로 이전했던 일화는 1999년 대구시로부터 오퍼를 받기도 했지만 성남행을 택했다.[33] 결국 서울 연고 공동화가 K리그의 스몰마켓행을 촉발한 트리거 역할을 하였다.


4.2. 스몰마켓행의 원인[편집]


둘째, 그렇다면 저 3구단들은 서울에서 쫒겨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기왕이면 연고팀이 없는 지방의 대도시가 그나마 나을텐데 왜 이런 행보를 택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구단들 입장에서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정이었다. 위에서도 언급되어 있지만 이미 1991년에도 서울 3개 구단은 동대문운동장을 고집했는데 목동운동장은 당시까지 목동을 포함한 서울 서남권 교통여건이나 소비능력이 워낙 별로였고,[34] 잠실운동장은 7만 수용의 대형 경기장으로 국가대표팀 역시 빅게임 정도나 사용하는 경기장으로 당시 프로축구단들이 사용하기에는 너무난 큰 대형 경기장이었다. 이런 핸디캡 외에 잠실주경기장은 바로 옆 잠실야구장에서 프로야구가 매일 열리던 것 또한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즉 경기장까지 딱 붙어서 직접적으로 프로야구와 비교될 수 있는 경쟁을 회피하는 분위기도 한몫 있었고 서울에서도 이 정도인데 지방 대도시에서 10년이 넘게 기반을 다져온 프로야구와의 정면대결을 프로축구단들이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굳이 더 말 할 필요가 있을까?

단순히 프로야구의 역사만 따져서 "고작 10년 차이에 뭐 그렇게 호들갑이야?"라고만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 이전에 이미 지역별로 다져진 고교야구의 인기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군산상고 야구부의 황금사자기 우승으로 호남권에 야구 열풍이 분 1972년을 기점으로 하면 지방에서 야구와 축구의 인기는 이미 20년이 넘는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35] 반면 축구계는 이런 지역별 인기요소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후에 SK가 바로 옆의 인천을 놔두고 굳이 서귀포로 내려간 것이나 호남 구단을 호남 최대도시인 광주가 아니라 전주라는 애매한 지역에 창단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36]


4.2.1. 3개 구단의 사정[편집]


여기서 3개 구단 모기업의 사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 LG: 그나마 셋 중에서는 충청, 경남 등에 지방 연고도 어느정도 있는 팀이고,[37] 실제로 대전과 창원에서 적극적으로 오퍼를 넣었지만, 이미 한 번 지방(충청도)에서 시작해봤다가 답이 없어서 서울 연고 풀리자마자 바로 올라왔던 구단인데 다시 구태여 지방으로 내려갈 이유가 없었다. 사실 기업 연고를 고려할 때, 충청도로 내려간다면 명목상 연고는 대전이지만 청주에 어느정도 비중을 둘 수밖에 없는 꽤 어중간한 입장이었고, 그렇다고 청주로 이전하자니 새로 지어질 경기장 위치가 청주시내는 고사하고 아예 청원군 땅, 그것도 조치원 코앞인 오송이라 정말로 견적이 안나왔다. 바로 옆동네인 천안에 일화의 이전이 이미 결정된 상황에서 안그래도 좁아터진 충청도 파이를 나눠먹는 것도 부담이었다.[38] 다른 선택지인 창원은 도시 규모 자체도 성에 차지 않는데다가,[39] 그 마창진 마켓의 절반은 마산아재로 대표되는 강성 야구팬덤에, 광역권으로 넓혀봐도 부산의 대우 로얄즈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으니 쉽게 택하기 어려운 선택지였다. 참고로 대전과 창원은 LG에 앞서서 유공, 일화에게도 추파를 던져봤는데 연고가 있는 LG가 이럴 정도였으니 다른 두 구단은 볼 것도 없었다. 게다가 LG는 형식적으로나마 공동화정책을 피해갈 수 있는 수단이었던 구단 돈으로 서울 내 전용구장 건설을 위해 도봉구에 부지를 알아보는 등 마지막까지 서울 잔류를 도모했고 LG산전 공장이 위치한 안양으로 이전한 뒤 이후 거금 75억을 쏟아붓고 서울로 복귀할 정도로 서울 연고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 유공(선경): 애초에 그룹 오너부터가 수도권(수원) 출신에, 그룹 전체로 봐도 울산의 정유공장 정도를 제외하면 지방에 연고가 아예 없었는데 하필 울산은 이미 현대가 차지한 지역. 실제로 SK그룹의 스포츠단은 축구단이 제주로 가기 전까지는 드물게 수도권에 몰려있었다. 서울/농구-부천/축구-인천/야구로 이어지는 경인라인 현재는 청주, 서산 등 충청권에 생산거점이 제법 있지만 이것들은 2010년대 들어서야 서산공장 신축, 하이닉스 인수 등을 통해 구축된 것이다. 그래도 5대 광역시였고 자신들이 잠시 연고지 삼았던 인천이 있긴 했지만 검토한 흔적조차 안 보이는 걸 보면 정말 어지간히 인천시 행정이든 숭의경기장 환경이든 학을 뗀 모양이다. 결국 당시까지 운동장이 없었던 부천을 택함으로서 그나마 한시적으로 서울에 위치한 목동종합운동장을 사용하는 이득을 보기는 했다.

  • 일화: 초기 한정으로 셋 중에서는 그나마 연맹 생각대로 경기도를 벗어나긴 했다. 처음 내려간 천안은 천안·아산의 선문대,[40] 청원 일화공장 등 통일교가 어느정도 기반을 다져놓은 지역이었고, 천안시도 수도권에서 가깝다는 특성으로 빠르게 성장하는 지역이었다. 그런데 그런 천안에서조차 지자체가 약속을 파토내면서 종교적 특수성 때문에 어딜 가든 좋은 소리 듣기도 힘든 일화는 그나마 시장성이 큰 수도권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대구시에서 오퍼가 왔다고는 하지만 통일교가 대구에 제대로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종교세가 약한 지역이어도 모자를 판에 대구는 전통적으로 불교세가 엄청나게 강한 지역이다. 호남은 알 사람 다 아는 기독교 강세지역인데 말 할 것도 없다. 다만 일화의 경우 창단 당시부터 서울 성수동 뚝섬경마장 부지를 매입해 15만명 규모의 축구전용경기장을 건립한다는 의사를 내비쳤으나# 1996년 천안으로 연고지를 옮길때까지 진척되지 않았다.

이웃한 프로야구도 처음 출범할때나 지금이나 지역연고 요건을 꽤 깐깐하게 따진다는 것을 생각하면[41] '서울 연고 공동화'라고 통칭되는 프로축구의 지방 분산 프로젝트는 차마 정책이라는 표현이 민망한 수준의 허술한 일처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연맹이 이 3개 구단에게 어떠한 반대급부를 제시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당시 기준으로 천억이 족히 들어가는 전용구장을 짓고 서울에 남든가, 아니면 지방으로 가든가 하는 선택지 뿐. 프로야구조차 경기장 건설 시 지자체와 나눠서 비용을 부담하는 게 보통이라 모기업이 부담액은 잘해봐야 300~400억 수준에 불과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당시 최소 천억 넘게 들여 전용구장을 기업에서 알아서 짓든지 아니면 나가라는 소리는 그저 폭거에 불과하다.[42] 그나마 서울월드컵경기장이 완공된 이후 전액도 아니고 축구협회 부담분만 지불하고 입성이 가능해졌을 때에도 이 금액은 무려 250억원에 달했다. 이후 이명박 당시 서울특별시장이 100억원 탕감을 선언하고 2개 구단 입성을 전제로 반값 할인에 들어가 75억으로 인하되어 그나마 GS그룹이 서울로 복귀하긴 했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이미 리그에 참가중인 구단이라 75억으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이다. 2007년 내셔널리그를 제패하고 승격 명령을 받은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가 서울로 이전하여 K리그로 승격할 시 필요한 비용은 가입금과 축구발전기금을 합쳐 무려 95억으로 예상되기도 했으니 서울에 신규구단이 창단되지 않은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43]

게다가 대구, 광주 등은 기존 구단도 일찌감치 포기하거나(포항), 그나마 추진되던 창단도 홍보효과가 없다며 어그러지고(금호 창단계획) 간신히 창단된 구단은 영세기업으로 파산(전북 버팔로)한 지역이 아니었던가? 특히나 포항제철은 대구와 광주 두 도시를 모두 포기하고 자신들의 사업장이 있는 포항과 광양이라는 중소도시로 거점으로 택했다.[44] 그런 곳에 서울을 벗어나, 그것도 별 연고도 없는 지방 가서 자리를 잡으라는 요구에 누가 동의할까? 그 결과 결국 3개 구단은 서울로의 권토중래를 기약하며 서울 접경 지자체에 눌러앉아 기존 서울 팬덤을 유지하는 쪽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대한민국 특유의 미쳐 돌아가는 인구밀도 때문에 100만 밑으로는 대도시 취급도 안해줘서 그렇지, 안양과 부천 둘 다 당시에 50만을 넘겨 지방자치법상 명백한 대도시의 반열에 들어있었고, 동일 생활권으로 묶이는 인접지역[45]을 합치면 90만이 넘는 도시권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으니 이들 구단들도 나름대로는 고심해서 이전대상지를 고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축구단에 마음이 떠난 SK나 종교구단이라는 특수성이 너무나 부정적인 방향으로 강하게 작용한 일화는 그 팬덤을 효과적으로 유지하는 데 실패했고, 서울 이전의 기회만 보던 LG만이 성공했을 뿐이다.

서울 연고 공동화가 터진 1995~1996년은 1997년 외환 위기 직전 한국 경제의 거품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로 재벌들은 공격적인 투자와 문어발식 사업확장에 매진하던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다.[46] 그런 상황에서 LG와 선경이라는 재계의 두 거물그룹이 프로축구단의 지방 이전을 포기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그만큼 지방에서 프로축구와 프로야구의 흥행 격차가 겉잡을 수 없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는 신바람야구를 내세운 LG 트윈스를 선두로 해서 최초로 500만 관중을 넘어섰던 프로야구의 제1차 전성기였다. 이런 프로야구조차 1990년대 말부터 박찬호, 선동열, 이종범 등의 해외 진출로 인기가 줄어들자 쌍방울과 해태가 2000년 사라지고(해태는 매각되긴 했지만) 삼성이 2001년 서울 이전을 추진하며 파동을 일으켰을 정도로 지방 마켓 자체가 형편없었는데 거기에 프로축구까지 끼어들 공간이 보이는 게 이상했다. 이런 상황에 대한 직시는 고사하고 어떤 큰 그림도 없이 구단들에게 희생만을 강요하며 리그의 판 자체를 엉망으로 만들고 종목 간 격차를 더욱 악화시킨 서울 연고 공동화는 논의의 여지가 없는 비판의 대상이다.


4.3. 결론[편집]


서울 연고 공동화는 이와 같이 원년부터 프로축구를 자립적인 컨텐츠가 아니라 그저 돈벌이 수단, 국가대표의 상비군 리그 정도로 취급해 왔던 한국 축구의 고질적인 국대중심주의[47], 그 국대중심주의를 만든 정치 논리[48], 그러한 구조 속에서 성장은 고사하고 답보, 혹은 퇴보일변도를 걸어왔던 축구계의 행정 및 마케팅 능력, 수도권 등 특정지역에 대한 뿌리깊은 국가적 편중현상 등의 여러 문제점이 월드컵 유치에 대한 욕망[49]과 결합하여 나타난 대재앙이었다. 스몰마켓 지향성만으로 이 사태를 간단하게 말해버리고 넘어가는 것은 이런 문제점들을 덮어버릴 위험성이 크다.

이 사건이 특히 비난받아 마땅한 이유는 연맹의 역할론에 있다. 프로축구는 출범 직후부터 슈퍼리그 위원회가 사라지고 축협의 병맛 행정으로 인해 이래저래 고통받아 오다가 1994년에서야 간신히 연맹을 되찾았다. 프로축구계가 그토록 연맹 부활을 외쳤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자신들을 대변해 줄 기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연맹의 존재 의의는 리그 구성원들의 이익 대변과 극대화, 이해관계 조정에 있으며, 특히 1990년대 당시 프로축구와 같은 프랜차이즈 시스템의 리그에서는 더더욱 이런 역할이 중요하다. 기실 1990년대 이전에 이미 포철이 포항으로, 현대가 울산으로 기어들어가는 등 리그 주축 구단들이 대도시 연고를 알아서 포기하고 각자의 생산거점에 웅거하게 된 것도 구단들의 이익을 조정하고 행정적 뒷받침을 해 줄 리그 사무국의 부재가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즉 완전한 프렌차이즈 시스템도, 그렇다고 완전한 개방형 리그도,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어영부영 흘러왔던 것이 1990년대 초반까지 프로축구의 현실이었고, 따라서 연맹의 재창설은 그간 기형화 된 리그를 정상화하는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10여년만에 되찾은 연맹이 맨 처음 한 일은 전체 구단의 절반을 멀쩡한 연고지에서 추방하는 것이었다. 이런 리그 운영은 전세계를 통틀어도 찾기가 힘들다. 구단들이 이런 행보를 보일 줄은 몰랐다고 항변할 수도 있지만 그런 가능성을 진단하고 정책을 만들라고 행정가가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협회나 연맹으로서는 월드컵이라는 최우선 목표를 위해 소를 희생했다고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막가파식 정책을 통해 이들이 서울에서 내쫓은 3개 구단은 지방 축구붐의 형성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어이없게도 서울 프로구단을 유치한 천안시는 월드컵 개최도시에서 탈락하고 프로구단을 만들지 못한 광역시들이 개최권을 따내면서 서울 연고 공동화는 그나마 월드컵 유치전을 위한 사전작업이라는 최소한의 역할조차 완수하지 못한 꼴이 되고 말았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3개 구단 이전지역과 월드컵 표 대결 과정을 보면 굳이 연고지를 분산시키지 않았어도 공동유치는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월드컵 개최지와 관련하여 변명을 하자면 단독유치가 아닌 공동유치가 되면서 엉망이 된 측면이 있긴 하다. 단독 유치의 경우 최대 12개 도시에서 개최하며 이 경우 서울 + 6대 광역시 + 제주 + 전주 + 수원[50] 정도를 깔아놓고 2개 도시를 프로축구붐과 관련하여 배분할 여지가 있었다.[51] 이것이 공동유치가 되면서 국내 개최도시 수가 급감했고, 그나마 한일 양국이 합심해서 징징댄 끝에 8개 도시에서 10개 도시로 확대한 것이 우리가 아는 2002월드컵 개최도시들.[52] 하지만 저 구단들을 광역시로 유인 못 한 시점에서 이미 연맹의 1패다. 연맹이 드래프트권 같은 인센티브를 제시하고 지방 대도시들과 활발하게 접촉하면서 행정적 유인책을 마련해도 단 하나의 구단이라도 광역시로 이전을 할까 말까 한 판국에 이런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고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했으니. 아니면 정말 과감하게 프로구단 유치 못한 광역시(대구, 광주, 인천) 중 하나를 배제해버리든가 해야 했지만 정부를 끌어들인 마당에 광역시 표를 떨구는 짓을 정부가 가만 놔둘 리도 없었다.

마지막 FC 코리아로 일컬어지는 2002 월드컵 이후로 프로축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2004년 사임한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은 14개월간 필드훈련시간이 72시간에 불과하다고 투덜댄 바 있으며 2007년에는 핌 베어벡 국대 감독이 국가대표 차출을 두고 K-리그(당시 표기)와 마찰을 빚다가 중도 사임하는 등 축구계의 국대 지상주의 기조는 다소 완화된 듯 했다. 그러나 2010 월드컵 이후 국대 축구의 하향세 속에 2011년 정점을 찍었던 K리그도 7시즌 째 기나긴 동반 하락을 겪으면서 국가대표에 대한 K리그의 종속성은 오히려 두드러지고 있으며, 국가대표에 대한 K리그 선수들의 조기소집도 만연한 상태다.


5. 일본 유사 사례[편집]



5.1. 배경[편집]


'세계화'와 '지방화'가 모토였던 김영삼 정부는 지방자치제도와 스포츠를 연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며, 이웃한 일본은 YS정부가 벤치마킹하기 좋은 상황이기도 했다. 문민정부가 월드컵에 목을 멨던 이유 중 하나도 지방에서의 대규모 국제행사를 통해 낙후된 지방 인프라를 재건하고 지방 균형발전을 촉진할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었다.[53] 그렇기 때문에 스포츠와는 별 관련이 없는 내무부(현 행정안전부)에서도 스포츠를 통한 지역 활성화 방안을 제시하는 등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을 집행함에 있어 정부차원에서 일본의 사례를 벤치마킹했다고 보여지는 정황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 포함 수뇌부 역시 1993 J리그 출범 개막식에 일본축구협회 초청으로 참관을 하였고 이 후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 J리그를 예의주시하였고 1994년 포항축구전용구장에서 개최된 포항과 유공과의 개막전 행사를 J리그 원년 개막전 행사를 본따라 레이저쇼를 선보였다. 그 후 1994년도부터 계속해서 대한축구협회 이후 한국프로축구 연맹 출범 후 서울 연고 3개 구단의 지방 분산을 추진한다는 소식들이 계속 보도되었다. 스포츠에"地自制(지자제) 바람" (1994년 4월 15일), 문체부·협회 활성화대책 국민열망 업고 정책지원'잰걸음' (1994년 7월 15일), 프로축구聯,30일 출범 (1994년 7월 20일)

특히 1994년 미국 월드컵 직전인 5월 30일 정몽준 회장이 직접 서울 연고 구단의 지방 분산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인터뷰>-鄭夢準대한축구협회 회장 (1994년 5월 30일)

1993년 J리그가 출범할 당시 한국의 서울종합운동장에 비견되는 도쿄국립경기장에 대해서는 연고권이 인정되지 않았는데, 이는 이곳이 말 그대로 국립 경기장이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는 왜 국립경기장에 연고권이 인정되지 않는지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데, 한국에서 흔히 도쿄국립경기장에 대응한다고 여기는 서울올림픽주경기장은 국립이 아닌 서울시립이다. 즉 건설과 소유주체가 엄연히 서울특별시청이며 관리도 서울특별시 체육시설관리사업소가 맡는다.[54] 서울 지금은 철거된 동대문운동장이나 목동종합운동장도 마찬가지다. 반면 도쿄국립경기장은 말 그대로 국립으로서 건설성에서 건설하고 문부과학성 산하의 일본 스포츠 진흥센터에서 소유하고 있다. 즉 엄밀히 말해자면 대한민국에는 도쿄국립경기장에 대응하는 국립 레벨의 경기장이 없다. 일본 스포츠 진흥센터에서 소유한 국립경기장은 카스미가오카 육상경기장 외에 치치부노미야 럭비장, 국립요요기경기장 체육관이 있는데 농구리그에서 쓰고 있는 요요기 제2체육관을 제외하고는 국내리그의 특정 구단에게 임대되지 않고 있다. 치치부노미야 럭비장은 2015년 창단한 '선울프' 구단에서 홈으로 쓰고 있지만 이 구단은 일본 럭비 리그가 아닌 국제리그 '슈퍼럭비'에 참가하는 사실상의 일본 대표팀이다.

대신 도쿄 국립경기장이 아닌 다른 도쿄도 내 축구장이라면 도쿄도 혹은 각 지자체와 협약을 맺고 연고 구단을 창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동안 도쿄를 연고로 한 구단은 창설되지 않았는데, 이는 도쿄 연고가 필요 없기 때문이 아니라 도쿄도 내에 J리그 규정[55]을 만족하는 구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례로 미츠비시 자동차 공업 축구부(현 우라와 레즈)는 에도가와구 육상경기장을 증축해 홈 경기장으로 삼으려 했으나 총 7천명(...)에 불과한 수용능력을 확대할 방안이 없어서 무산되었다. 1999년 J2리그에 참가한 FC 도쿄가 2년간 사용한 코마자와 올림픽공원 육상경기장이 2만명 이상 수용 가능했으나 여긴 야간조명이 없어서 FC 도쿄도 홈구장으로 삼아놓고 고작 2경기(!)만 치르고 나머지는 대부분 국립경기장에서 홈 일정을 소화하는 판국이었다.[56] 이처럼 수도 도쿄에도 제대로 된 축구경기장 하나 없던 것이 당대 일본 축구 하드웨어 인프라의 현실이었고[57], 이런 현실을 타개하고자 일본 축구계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프로젝트가 프로리그인 J리그의 창설과 2002년 월드컵이었다. 괜히 도쿄에서 월드컵을 못 열고 사이타마까지 가야 했던 게 아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J리그는 창설 후 도쿄 스타디움이 개장하는 2001년까지 수 년 동안 도쿄 연고팀 없이 일단 전구단이 돌아가면서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중립경기를 개최하는 형태로 시즌을 진행하게 되었다. 여기에 J리그 초창기 외국인 노장 스타 플레이어를 대거 영입하는 등의 투자에 힘입어 과정이야 어찌됐든 도쿄 연고가 없이 시작한 J리그는 도쿄 이외 도시권에 뿌리를 내리면서 나름 탄탄한 입지를 구축했고, 당시까지만 해도 프로야구는 일본에게 배우지만 프로축구는 우리가 먼저 시작했지라는 우월감에 도취되어 있던 한국프로축구연맹은 삽시간에 자신들을 추월한 일본 프로축구의 현상에 자극을 받아 이를 벤치마킹하게 되었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사실 근거 사례고 뭐고 간에, 일단 월드컵 유치권을 놓고 경쟁하는 상황에서 무려 5년(1989년 조직위 발족)을 앞서간 경쟁상대인 일본 사례를 벤치마킹하는 것은 안그래도 후발주자로 단 2년의 시간밖에 남지 않은 한국에 있어서는 거의 유일한 선택지였다. 즉 일단 일본과의 점수차이를 어떻게든 줄여놓는 데 집중한 것.


5.2. J리그의 고민[편집]


J리그 출범 당시 일본 축구계의 고민은 프로야구와의 대결, 그리고 신생 리그의 안정화였다. 하지만 프로야구와의 대결에 있어서는 후발주자로서 단숨에 이를 뛰어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프로야구와 달리 대기업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지역연계를 강화하여 승부를 보려 했다.

프로야구와의 대결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당시 심각했던 프로야구의 불균형을 J리그가 답습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즉 일본 전체를 석권할 정도로 강대한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킨키권 패왕인 한신 타이거스의 인기 앞에 타 구단들이 흥행과 재정 면에서 어려움을 겪던[58][59] 선례를 반면교사로 삼아, 대놓고 J리그의 교진을 노리던 요미우리 축구단[60] 등의 야망을 견제하고 프로야구에 비해 후발주자인 J리그 구단들이 안정적으로 프로리그에 안착하도록 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던 것이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당시 J리그 연맹 회장이었던 카와부치 사부로의 "J리그에 교진은 필요없다"(リーグに巨人はいらない)는 일갈이다.

한국의 축구팬들은 이 부분, 즉 J리그 연맹과 요미우리의 대립이라는 부분을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 권역을 벗어난 전국적 인기라는 게 정확히 어떤건지 잘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도쿄에서 400km나 떨어진 시가현의 시골동네에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범경기 포스터가 붙어있을 정도다.[61]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NPB는 교진이 40%, 한신이 10%로 둘이 합쳐 절반을 독식하고 나머지를 10개 구단이 갈라먹는(...) 초불균형의 기형적 구조였다.#[62] 이건 한국에서 지방 출신 이주민들이 서울이나 수도권에서 자기 고향팀 응원하는 것과는 궤를 달리한다. 다시 말해 J리그 구단들은 설령 자기 동네에 딱히 프로야구단이 없다 해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경쟁해야 했다.[63]

좁은 국토에 구단들이 강원도 한 곳 빼고 오밀조밀하게 모여있고 지방 구분의 역사가 오래되었으며 각 프랜차이즈의 영역이 확실한 KBO 리그와 달리, 일본 프로야구는 수도권, 칸사이, 츄쿄, 츄고쿠 이외에 프랜차이즈가 확실하게 정착한 지방이 많지 않고, 12개 구단으로 모두 커버하기에는 국토가 넓어 공백지가 크다. J리그가 출범한 1991년 당시 일본 프로야구는 도쿄-수도권에 6개팀(요미우리, 니혼햄, 야쿠르트, 세이부, 요코하마, 지바 롯데), 오사카 권역에 3개팀(한신, 오릭스, 긴테츠)이 있는 상황이라 대다수 지방 도시에는 프로야구 연고 팀이 없었고 특히 사이타마 이북에는 아예 야구단이 전무했다. 이 시점에서 수도권과 오사카 권역을 빼고 프로야구 팀을 가진 곳은 후쿠오카, 히로시마, 나고야 뿐이었고 그나마도 후쿠오카는 프로야구단이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아(1989년 오사카에서 이전) 아직 연고 정착이 불완전한 상황이었다.[64] 이런 공백지 출신들이 수도권으로 상경하면 그냥 교진 보는 것이고 지방에서도 이왕이면 가장 잘하고 인기있는 교진이라는 정서가 형성되는 것이다.[65] 그런데 여기서 요미우리가 아예 축구판 교진, 수도 메가클럽을 만들어 야구와 마찬가지로 전국구 마케팅에 나선다면 J리그 연맹 입장에서 이보다 골때리는 상황도 없다.

이게 특히 문제가 되는 이유는 프로야구는 그나마 반세기의 역사를 통해 다져진 팬덤 덕분에 다소의 부침이 있어도 극복할 수 있고 실제로 요미우리가 리그 출범을 주도했으니 그 특수한 지위를 인정할 명분이 있지만, 프로축구는 여러 대기업들이 함께 참여해 출범하니 요미우리의 특수 지위는 누구도 용납할 수 없을 뿐더러 이러한 주도권 다툼으로 인해 기업들이 빠져나가버리거나 구단이 자주 연고지를 옮겨다니거나 한다면 안그래도 후발주자인 신생 축구리그의 성공은 머나먼 꿈이 되기 때문이다. 성공 여부도 사치스러운 이야기고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요미우리에 대한 견제장치 마련 여부에 리그가 제대로 출범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걸려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서울 연고 공동화와 함께 K리그에서 받아들인 기업명칭 사용 금지 역시 J리그 사무국이 요미우리(+몇몇 기업)와의 치열한 대립 끝에 관철시킨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리그 사무국이 발벗고 나서서 후의 요요기 제2체육관처럼 리그 구단의 국립경기장 입주를 주선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5.3. 한일 양국 환경 비교[편집]


여기서 한국과 일본의 프로축구 출범 당시 환경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 일본 축구는 비록 프로화는 한국에 비해 10여년 가량 늦었지만, 이미 나름대로 프로화를 위한 기본 토대를 갖춰놓은 상태였다. 사회인 축구리그인 JSL(일본 사커 리그)[66]가 이미 1972년부터 1부-2부 승강제를 시행할 정도로 상당한 외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참가 구단들의 면면도 일반 클럽팀이었던 고후, 교토 시코를 제외하면 모두 비금융권 기업팀에 전 구단 지역연고제를 시행하고 있었을 정도로 내부 구성도 사회인 리그 치고는 탄탄한 편이었다. 그 결과 J리그 초창기의 10개 구단은 모두 JSL에서 넘어왔다. 반면 한국 실업축구는 1982년까지도 실업리그에 비금융·비군경 기업팀은 포철, 대우, 현대가 전부였고,[67] 프로팀 창단을 준비중이던 유공을 합해도 네 곳에 불과했으며, 이후로도 실업팀 출신으로 프로무대에 입성하는 비 지자체팀은 고양 Hi FC충주 험멜(...) 뿐이었다. (현재 고양과 충주 2팀 다 해체했다.) 심지어 실업축구가 기껏 승강제와 지역연고제를 시행하려던 찰나에 급작스럽게 슈퍼리그를 만들어 이런 제도화를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만드는 엉망진창 행정도 서슴치 않았다. 바꿔 말하자면 한국 축구계가 그나마 자랑으로 삼았던 빠른 프로화는 일본이 10년 전에 이룩해놓은 중간 단계 다 건너뛴 유사 프로화라고 깔 수도 있다.

  • 기업 카르텔 체제의 일본 프로야구는 언론사(요미우리)가 창단을 주도하다보니 2선급 기업체[68]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일류급 대기업의 참가는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창단 이전까지는 철저히 차단되었다.[69] 그러니 창단 요건만 갖추면 별 제재 없이 팀을 만들 수 있는 프로축구는 대기업들에게 아주 매력적인 아이템이었고, 기업명 사용을 규제함으로서 당장은 축구단 이름을 통한 구단 홍보가 힘들다 하더라도 기업들의 프로리그 참여를 충분히 유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반대로 한국에서는 프로야구가 이미 출범 준비단계부터 대기업 끌어들이려고 안간힘을 썼고, 실제로 초반의 난맥상을 극복하고 한화(1986년)[70], 럭키금성(1990년), 현대(1996년),[71] SK(2000년)가 속속 프로야구에 합류하고 리그 출범 당시만 해도 10위권에서 오르내리락 하는 쩌리그룹이던 롯데는 영등포역 민자역사를 짓고 대한민국 아줌마들을 사로잡은 국내 선두권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등 대기업들이 굳이 프로축구에 큰 돈을 쏟아부을 이유가 갈수록 없어지는 상황이었다.[72]

  • 일본의 프로축구 출범은 단순히 프로축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프로축구 출범-(월드컵 진출)-월드컵 개최-국내 축구 인프라 개선과 유소년 육성-일본 축구의 장기적 성장으로 이어지는 10년 이상의 대규모 플랜이었다. 월드컵 유치위가 언제 조직되었는지 보자. 1989년이다.. 프로 출범 3년 전에 월드컵 유치위가 먼저 가동되었고, 월드컵 유치 플랜과 두 바퀴를 이루어 시작된 것이 J리그였다. 이런 배경을 알면 도쿄에 왜 프로팀이 없었는지 알 수 있다. 도쿄는 애초에 월드컵 개최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73] 하필 버블 끝판에 유치를 시작해서....[74] 즉 일본 축구계로서는 월드컵을 유치할 계획도 없고, 유치할 수도 없는 도쿄, 그것도 크기만 한 국립경기장을 기반으로 하는 메가클럽이 나타나 리그 질서를 교란하는 것보다 월드컵 개최 후보지에 구단을 배분해 인프라 구축 여건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더불어서 J리그가 정말로 도쿄에 구단을 안 만든 것도 아니다. 다만 이들의 구장 확보에 어려움이 있었을 뿐이지.

프로축구 연고지 배분과 월드컵 개최를 연계한다는 의도 자체는 한국도 비슷했지만, 그 시행 방식과 논의 과정, 그리고 결정적으로 실행 여건은 천지차이였다. 실제로 J리그는 출범 당시부터 무려 10개 팀이 참여했던 반면 K리그는 1996년 수원 삼성 창단으로 간신히 야구와 동일한 8개 팀 체제를 갖춘 상황이었고, 그나마도 호남의 2개 구단은 기존 구단의 위성구단 신세였다. 게다가 J리그는 원래 8팀으로 시작하려던 것을 참가 열기가 워낙 높아 10팀으로 확장한 것이었고, 처음 참가신청팀은 무려 20개에 달했다. 이런 기본 조건은 살펴보지 않고(혹은 무시하고) 도쿄 국립경기장 연고 규제를 곧바로 도쿄 연고 공동화로 치환해 서울 연고 공동화로 연결시키고, 거기에 더해 기업들의 리그 참여조차 충분하지 않은 것은 물론 주요 대기업들이 죄다 경쟁리그인 야구에 손을 댄 상황에서 연고 정착을 명분으로 기업 명칭 사용규제까지 저질렀으니 리그가 순탄하게 굴러가는 것이 이상한 상황이었다. 어설프게 서울 연고 구단을 죄다 쫓아내버린 결과, 서울은 까딱 잘못했으면 도쿄 꼴이 날 뻔 했다. 인천: 아쉽다[75]

또한 한국의 K리그 팬덤에서는 J리그의 초창기 성공을 단순히 프로야구를 피해 '중소도시 중심'으로 운영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수도 도쿄 연고지 구단들이 듣보화되어 생긴 오해다. 대한민국의 대구, 부산, 인천, 대전의 위상과 비슷한 오사카 (파나소닉 -감바 오사카 엄밀히 말하면 오사카부), 요코하마(닛산-요코하마 마리노스, 전일공수항공-요코하마플루겔스, 히로시마(마쓰다자동차-산프레체히로시마), 나고야(도요타-나고야그램퍼스) 등 대기업이 운영하는 대도시 연고지 구단이 원년 멤버10개팀 중 절반 이상 참여했던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중소도시 중심이라는 이미지가 박힌 것은 일본에서도 시골 깡촌으로 불리는 인구 10만도 안 되는 가시마 연고의 앤틀러스가 한때 J리그 가입 승인조차 못 받을 뻔한 역경을 딛고 당시 전 구단 중 최초로 축구전용구장을 짓고 성공적으로 안착하자 J리그 연맹을 위시 일본에서 J리그의 지역밀착 성공 신화로 대대적으로 홍보했기 때문이다.[76]

일본은 한국의 2.5배에 달하는 인구와 막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많은 지방 도시권이 발달해 있는 점도 살펴봐야 하는데 리그 출범 당시인 1993년 J리그 구단은 있으나 NPB 구단은 없었던 정령지정도시는 삿포로, 센다이, 카와사키, 쿄토, 코베, 키타큐슈로 6곳이나 되었고, 이후로 정령지정도시가 된 사이타마, 쿠마모토, 시즈오카, 니가타, 오카야마, 사카이, 하마마츠, 사가미하라까지 합하면 무려 14곳이나 된다.[77] 한국으로 치면 프로야구 구단이 없는 광역시 혹은 광역시급 도시가 10개가 넘게 존재한다는 이야기로[78][79] 애초에 한국과는 전혀 상황이 다름을 알 수 있다.


5.4. 일본 사례의 평가[편집]


결론적으로 1992년 당시 J리그는 J리그 규정을 만족하는 경기장이 도쿄 내에 없었고, 월드컵 유치를 위한 사전정지작업이라는 측면에서도 도쿄, 특히 국립경기장 연고 구단은 아무런 필요가 없었다. 여기에 프로야구의 요미우리와 같은 슈퍼 클럽의 출현이 초창기 리그 확립에 득보다는 실이 많을 것으로 판단하여 굳이 무리해서 도쿄 연고팀을 만들지 않은 것이다. J리그의 초창기 인기는 도쿄 연고지 구단의 존재 유무와는 아무 상관없이 신장개업빨, 지코 등 해외 슈퍼스타, 일본 대표팀의 선전으로 인한 축구에 대한 관심 증대 등으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였던 것으로 도쿄 연고 구단 있었으면 J리그 흥행이 저조했을 텐데 도쿄 연고 구단이 없어서 J리그 흥행이 잘 되었던 것은 전혀 아니며, 오히려 이 거품이 꺼진 1990년대 후반의 J리그는 1998 월드컵 붐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정작 J리그는 국립경기장 연고 구단만 없을뿐이지 매주 전 구단이 돌아가면서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중립 경기를 치르기도 했고, FC 도쿄가 국립경기장을 임시 연고지로 쓰는 등 국립경기장을 활발히 활용하여 J리그에 대한 인기를 적절히 유지했다..

사실 일본 축구계의 국립경기장 사용방식은 딱히 특이한 것도 아니다. 국가 중심구장에 프로구단의 연고지 지정을 막고 국가대표나 협회 주관 대회에서만 중립구장으로 사용하는 이런 운영방식은 다름이 아니라 웸블리 스타디움이나 스타드 드 프랑스에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트랙도 깔려 있다는 점, 홈구장이 공사중인 구단이 임시로 사용했다는 점까지 생각하면 영락없이 舊웸블리다. 다만 수도 내에서 이 중심구장 이외에 프로경기를 치를 만한 구장이 없었을 뿐. 그리고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이미 도쿄도 내 축구전용구장에 대한 논의도 시작되고 있었다.

물론 도쿄가 월드컵 유치 여력이 있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메가클럽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해도 다른 곳도 아니고 도쿄이니만큼 사이타마 저리가라 수준의 월드컵 흥행을 기대할 수 있을 테니 한국이 뒤늦게 무서운 속도로 추격해오는 마당에 현실적 요구를 외면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마 복수의 구단을 투입해서라도 웸블리나 스타드 드 프랑스와 같은 8만석 규모의 초대형 축구전용구장을 지었을 수도 있다. 다만 버블의 끝자락에서조차 도쿄 시내에 신구장 짓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고, 땅값도 무지막지하게 비싸서 이런 모든 가능성이 원천 차단되었을 뿐이다.수도 연고지 프로팀은 흥행의 보중수표

한편 결과적으로 J리그 사무국이 우승과 인기를 주도하는 슈퍼클럽을 인위적으로 막고자 했던 것이 맞다면 우승은 가시마라는 시골 연고팀이 독주를 하고 있고 인기는 도쿄 인근 연고의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가 독주를 하고 있으니 크게 성공을 보지 못했다고 할 수도 있다. 사실 분데스리가는 바이에른 뮌헨, 라리가는 레알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 이렇게 특정 몇몇 구단들이 우승과 인기를 독점하는 것은 전세계 프로축구를 비롯 프로스포츠에서 일반적인 현상이며 하물며 비슷한 점수대로 입학하는 대학교에서도 학생들이 입학시와 졸업시 격차가 벌어지는 것처럼 우열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세상 이치다. 그래서 아무리 인위적으로 우열을 막으려고 해도 모든 팀이 비슷한 수준의 인구, 교통, 경제력을 갖춘 연고지를 얻을 수는 없다.

하지만 위에서도 말했듯이 J리그는 프로야구와 경쟁해야 하는 후발주자라는 특성상 자금력 좋은 대기업을 대거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승부를 보았고, 전국구 메가클럽으로서의 야욕을 불태우는 요미우리를 견제하지 않으면 리그의 영속성조차 담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장 리그 출범 이후 5년도 안되어 거품이 꺼지면서 침체기를 겪었던 것이 J리그였는데, 이 시기에 특정 메가클럽의 우월적 지위 앞에 구성원들이 대거 이탈하거나 하는 사태라도 벌어졌다면 프로야구처럼 양대리그로 이탈 구단들을 흡수할 방도도 마땅치 않은 프로축구 특성상 심각한 위기가 찾아왔을 것이다.


5.5. J리그 도쿄 연고지의 현실과 미래[편집]


문제는 K리그가 J리그 사례를 벤치마킹한다며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을 밀어붙이던 1996년, 이미 일본에서는 도쿄 신구장 건립과 베르디 카와사키의 신구장 이전이 추진되고 있었다는 것이다.[80] 애초에 도쿄도 연고 공동화가 아닌 도쿄 국립경기장 연고 규제라는 어정쩡한 형태의 규제가 시행되었던데서 이미 J리그 측에서도 도쿄 연고의 잠재력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다만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른 이후(혹은 월드컵의 성공 개최를 위한 인프라 구축이 마무리 된 이후) 리그 전체가 균형있게 안착하기 전까지만 거대 수도 구단의 독점을 한시적으로 유예하자는 의도였음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즉 J리그 사례에 대한 기본적인 검토조차 없이 밀어붙인 병크 중의 병크였던 것이 이 사태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역시 서울 복귀 단서조항이 있으니 마찬가지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15,000명 수용 가능한 구장의 존재와 축구 전용구장 건립은 퀘스트 수행 난이도가 천지차이를 넘어선다. FC 서울의 서울 복귀 당시 상암구장 건설비 분담 문제를 놓고 어떤 진통이 있었는지 위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음미해보자.

이후 도쿄가스를 모태로 한 FC 도쿄가 1999년 J리그로 승격, 2001년에는 베르디 가와사키가 연고를 이전해 도쿄 베르디가 되어 도쿄 더비가 이루어졌다. 두 팀 모두 2001년 건립된 아지노모토 스타디움[81], 즉 도쿄 스타디움을 홈구장으로 쓰고 있으며, 도쿄 국립경기장을 비워놓는 건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하지만 베르디는 요미우리라는 거대 스폰서를 잃으면서 전력이 약화되어 2부리그인 J2에 쳐박혀 있고 FC 도쿄는 사실 모기업에서 J리그 진출을 반대했었기 때문에 지금도 막대한 투자는 불가능한 구단으로 계속해서 1부리그의 만년 중위권팀으로 오사카부 연고의 감바 오사카세레소 오사카가 AFC 챔스에 진출하면서 오사카와 도쿄의 축구 인기가 완전히 역전되었다.

한편 2016 12월 29일 일본 정부에서 2020 년 도쿄 올림픽 주경기장인 신국립 경기장을 올림픽 이후 축구 J리그 등 특정 클럽의 본거지로 하는 방침을 정하였고 그 후보로 가시마 앤틀러스와 FC도쿄를 거론하였다. 당시 정부 관계자는 "J리그 클럽이 도쿄 23 구내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향후 축구계의 발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며 J리그가 일본 최대 빅마켓인 도쿄 연고지를 사실상 활용 못 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구장 사용료가 지나치게 비싼 까닭에 클럽이 고정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2023년 1월 카츠시카구에서 도쿄 23구 최초 축구전용구장을 건설하는 방침을 정하며 도쿄 연고에도 숨통이 트일 가능성이 생겼다.


6. 기타 종목의 사례[편집]


프로 농구 리그 한국프로농구를 운영하는 한국농구연맹의 경우도 "수도 공동화 정책"을 추진해서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서울을 연고로 한 프로 구단이 없었다. 그러다 2001년 수도 공동화 정책을 폐기했고 서울을 연고로 할 수 있게 되자 청주시를 연고로 하고 있던 SK 나이츠수원시를 연고로 하고 있던 삼성 썬더스가 연고 이전해 서울을 홈으로 쓰게 되었다.

프로배구 V-리그의 경우, 2005~2009년 동안 서울 연고 구단이 없었고 서울 올림픽공원 제2체육관에서 중립 경기를 가졌다. 2009년 장충체육관을 홈구장으로 서울 우리캐피탈 드림식스가 창단되었고 인천 GS칼텍스가 장충으로 연고 이전하면서 서울에 남녀두팀이 자리를 잡았다. 다만 이후 서울 연고 구단이 없었던 적이 있었는데 장충체육관 리모델링 공사로 2012~2015년 동안은 경기장이 없다는 이유로 서울 연고가 불가능해져 드림식스가 아산시, GS칼텍스가 구미시평택시를 잠시 이용하였고 공사가 끝난 2015년부터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여자농구 WKBL은 서울 연고 구단이 없다. 대신 구단경기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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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동화(空洞化, 빌 공 空). 사회등지에서 쓰이는 도심공동화의 공동화가 이 단어이다. 여러 팀이 서울 연고지를 함께 쓴다는 '공동화(共同化)'가 아니다.[2] 리그베다 위키 시절 서울연고공동화정 정책 자발성 vs 강제성 토론 결과 참고. 당시 토론 내용 링크는 현재 나무위키 토론창에 올라와 있다.[3] 당시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유치를 위해 정부와 자주 교류를 하고 있었다.[4] 프로스포츠를 본격적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은 1981년 청와대 비서관회의였는데, 야구계는 지역감정문제를 우려하는 청와대를 설득해서 지역연고제를 출범전에 아예 못박고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프로야구도 원년 시즌에는 완전한 지역 연고제가 아니었다. 제도의 문제나 정서의 문제는 아니고 인프라 구축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다. 1982년 세계선수권 대회 대비를 위한 공사 때문에 삼미 슈퍼스타즈가 춘천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홈 경기를 떠돌며 치른 것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나머지 구단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단적인 예로, 박철순의 연승 행진이 22연승에서 끊긴 롯데 자이언츠와의 잠실 경기는 롯데가 홈팀 자격이었다.[5] 뉴스에도 "외국의 프로축구처럼" 연고지 제도를 실행한댔지, 프로화를 한다는 내용은 없다.[6] 이용일은 전두환이 기업주들을 물어와서 그들에게 고향팀을 맡기면, 야간 조명 등의 시설 투자도 그들이 알아서 할 것이라 여겼고, 그 예상도 들어맞았다. 야구계는 청와대가 부어준 물에 노를 잘 저었고, 축구계는 그렇지 못한 것.[7] 한국프로축구연맹으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그마저도 초대부터 4대까지 정몽준이 총재를 해서 축구협회로부터 독립된 연맹이 맞았는지 의심스럽다.[8] 실업팀으로 남을 팀들은 다 코리안리그로 보내고, 승강 연결고리도 끊고, 독립리그로 변화를 주었다. 코리안리그 승강제의 원래 목표였던 프로-세미프로-아마추어 승강 체제 확립은 몇 번의 실패 끝에 2010년대에야 완성하여, 2021년에야 첫 발을 디딘 상태다.[9] 대략 슈퍼리그 출범 당시 연고지를 기본으로 짜여진 것 같지만, 당시 재계서열 1위인 현대가 강원도라는 스몰마켓을 연고지로 하고 있고, 가장 빅마켓인 서울 연고지가 공동(共同)구역으로 묶여 있었는데, 서울이 전구단의 공동(共同)연고지라는 것은 서울 연고 구단은 없다(空洞)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이때를 서울 연고 공동화 제1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흥행과는 거리가 있는 연고지 배정이었다. 1984년 서울종합운동장 주경기장이 개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에 야간 경기 시설을 갖춘 제대로 된 천연잔디 축구장이라는게 전국에 사실상 동대문운동장 등 몇 개 없던 시절이라 국가대표조차 동대문 잔디에서 뛰어보는게 소원이었을 정도였다. 효창운동장은 예나 지금이나 아마축구로 번잡했던 데다가 인조잔디 때문에 프로 경기를 치르기에는 부적합했고, 목동운동장은 1989년에야 개장했다.[10] 금호그룹 자체가 프로 스포츠단 창단에 그다지 열의가 없었던 점도 컸다. 2000년이 돼서야 여자 프로농구(인천 금호생명 팰컨스, 이후 산업은행으로 넘어가 구리 KDB생명 위너스가 되었으며 OK저축은행의 위탁 운영을 거쳐 부산 BNK 썸이 되면서 전신 시절의 역사가 말소되었다.)에 뛰어들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손을 뗐다.[11] 한일 월드컵 20년 뒤에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가 개최되기는 하지만, 동아시아인 한국과 일본과는 달리 서아시아에 개최되는데다가 돈으로 개최권 샀다는 사실이 이미 확실한 터라 한일 월드컵 유치를 놓쳤더라면 월드컵이 대한민국에서 개최되기까지는 한일 월드컵 이후 빨라야 30년은 걸렸을 것이다.[12] 이전까지는 모두 광역연고였다.[13] 월드컵 유치한다고 해서 들여다 봤더니 특정 지역에만 팀들이 몰려있는 국가라면 좋은 인상을 줄 수 없다. 비어있는 대도시를 보면 이 나라는 축구를 별로 안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좀 더 실무적으로 보자면 월드컵은 올림픽과 달리 전국에 걸쳐 막대한 인프라를 조성해야 하는데, 이런 인프라를 건설·유지하려면 지방도시에서 광범위하고 균형 잡힌 축구 붐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게다가 월드컵이 무슨 자선사업도 아니고 티켓 팔아서 돈벌어야 하는 대회인데 당연히 국민들의 축구열기가 중요한 평가 항목일 수 밖에 없고 그 척도 중 하나가 프로축구 리그의 흥행이다.[14] 전북 버팔로는 전북 현대 모터스에 인수된 게 아니라 그냥 해체했다. 전북 현대는 버팔로 출신 선수들을 흡수했지만 순수 신규 창단 형식이었으니 둘은 별개로 취급된다.[15] 정확히는 전북 다이노스를 현대자동차의 하청업체를 통해 후원했다. 1997년부터 공식적으로 전북 현대 다이노스로 출범.[16] 아직 울산은 광역시가 되기 전이므로 모든 특별시, 광역시에 프로야구팀이 1개 이상 존재하고 있던 것[17] 기사를 통해 1990년 2월 대한축구협회에 통합되었던 프로축구연맹이 재독립하기 전 발생했던 갈등을 엿볼 수 있으며, 이에는 호남팀 창단 등 구단 연고에 대한 이슈도 포함되어 있다.[18] 프로 후발주자인 한국 농구와 배구 역시 이것을 답습했는데, 연고 정착에 실패하고 그걸 억지로라도 만회한다는 명목으로 구단 명칭에 지역명을 끼워넣었다는 점이 모두 동일하다. 특히 천안은 축구와 배구 두 종목에서 피해를 봤는데, 제비뽑기 승부라는 흑역사로 인해 천안시 지자체에는 동정의 여지가 없더라도 천안 거주 스포츠 팬들은 무고한 희생자가 되었다. 프로농구의 경우 SK 나이츠와 삼성 썬더스가 각각 청주와 수원에서 서울로 연고를 이전했고, 프로배구는 남자부의 경우 우리캐피탈이 신규 창단하면서 서울을 연고지로 삼았고, 여자부의 GS칼텍스가 인천에서 연고를 이전했다. 공교롭게도 타 종목에서도 SK와 GS 팀이 연고이전을 했다.[19] KT는 민영화가 된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공기업의 이미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고 (이는 2020년대에 들어서도 마찬가지고 앞으로도 공기업 이미지가 사라질 가능성은 없다. 소규모 읍면 지역의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가 왜 KT에 의존하는지를 생각하면.) 금호는 위 각주에서 언급했듯이 프로스포츠팀 운영에 열의가 없었다. 한화야 뭐 야구(한화 이글스, 북일고)에 집중하고 있으니..... 북일고는 21세기 이후에는 아예 자사고로 전환되어 한화그룹의 집중 케어를 받고 있다.[20] 일명 패륜논쟁[21] 또한 이는 안양 LG 치타스 또한 연고이전을 통해 만들어진 구단이라는 의미도 지닌다. 그런데 웃긴 사실은 서울 연고 공동화가 실재하거나 말거나 LG는 꼼짝없는 연고이전 구단이 맞다는 것이다. 그것도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오히려 강제이전도 아니고 구단의 자발적 이전이라는 것인데 그럼 더더욱 안양 LG 자체가 이른바 패륜구단으로 까여야 한다.[22] 우습게도 역시 연고를 강원도에서 울산으로 이전한 울산 현대에 대해서는 어떠한 패륜 논쟁도 제시되지 않았다. 이들이 패륜 논쟁에 엮인 것은 한참 후인 2011년 이른바 서산 사건 때문.[23] 이후 부천과 안양은 프로축구단을 만들었고 천안은 준프로구단이 프로리그에 가입했다. 이것에 대한 이야기는 각각 부천 FC 1995FC 안양, 천안 시티 FC 참고.[24]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원흉 중 하나로 꼽힌 김종 전 차관의 동생이다.[25] 만약 월드컵 유치가 성공한다면 곧바로 개최도시 선정전으로 넘어가는데, 여기서 축구붐 조성현황, 구체적으로는 해당지역의 프로축구경기 개최횟수 및 평균관중수 등이 주요 점검대상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월드컵 유치에 욕심이 있는 지자체라면 가능하면 1996년, 늦어도 1997년까지는 프로구단을 창단 혹은 유치할 필요가 있었다.[26] 나산 중심의 10구단 창단이 어그러진 후에는 지역 중견기업이었던 계룡건설 중심의 컨소시엄 체제로 전환되었다.[27] 총 1,550억을 투자하려던 삼성그룹은 IMF로 발을 뺐고,# 결국 수원시가 시민 모금까지 진행하면서 자체 예산으로 떠안게 되었다. 이는 이후 프로야구 10구단 유치전을 기점으로 빅버드 이용에 대한 혜택을 요구하는 삼성과 발빼놓고 뭔 소리냐는 수원시의 대립으로 이어진다.[28] 공동화 이전에 구장을 건설한 포항, 광양 제외. 그리고 이들 도시들은 결국 월드컵을 유치하지 못했다. 유치했다고 해도 포항과 광양의 전용구장은 월드컵 경기를 치를 기준(최소 4만 명)에 미치지 못하므로 새 구장을 지을 수밖에 없었지만.[29] 사실 공청회에 섭외되는 외부전문가들의 역할은 '주최측의 논리를 대변해준다'기보다는 '주최측에게 필요한 논리를 개발해준다'는 쪽에 가깝다. 즉 김종환이 '연맹의 입장인 스몰마켓론을 대신 발표해줬다'기보다는, '연맹에게 필요한 논리로 스몰마켓론을 개발해주고 연맹이 이를 사후 채택했다'는 쪽이 좀 더 합리적이다. 스몰마켓론이 정말 공동화 추진 당시 연맹의 공식 입장이었다면 애초에 김종환이 아니라 연맹이 발표했어야 할 일이다.[30] 사실 이런 틈새전략론 침투의 사례로 많이 거론되는 이 기사는 프런트 행정가들이 아니라 시장이 한 얘기다. 프런트는 프런트대로 현실 인식이 전혀 안 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31] 물론 축구계 입장에서는 전국가적 관심사인 월드컵 유치전이 한창인 마당에 어느 기업이 감히 월드컵 유치 - 그것도 무려 일본과의 대결 - 를 망친 매국노의 낙인+월드컵 유치 성공했을 때의 불이익을 감수하고 해체파동 같은 걸 벌일 수는 있겠느냐는 계산이 있었고, 실제로 유공은 축구단 포기까지 천명했지만 끝내 탈퇴하지는 않았다.[32] 심지어 일화는 천안시로부터 오룡경기장의 전용구장 전환을 약속받아# 5년 유예가 가능했음에도 그냥 서울에서 떠났다.[33] 다만 링크 기사는 강릉 이전을 추진한다는 것이 주 내용이다.[34] 목동지구는 1991년 당시까지만 해도 미분양이 속출했고 상업지구 조성도 안 되어있는 상태였다. 1993년에서야 본격적으로 목동 상권 조성이 시작되었을 정도니 프로구단이 여기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에 가까웠다. 아이러니하게도 입장을 바꿔 목동에 들어가겠다는 SK를 내쫓아버린 1996년에 지하철이 개통되었다.[35] KBO 리그가 출범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한 것은 처음부터 지방구단들을 야구 명문고 OB팀 개념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야구팬들은 해태는 광주일고+군산상고 연합, 롯데는 부산고+경남고 연합, 삼성은 경북고+대구상고 연합팀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고교야구의 인기가 그대로 프로야구로 이어진 것이고, 프로축구가 결국 자유계약을 포기하고 드래프트제를 도입한 이면에도 아직 클럽 유스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은 당시 상황에서 이런 연고지 구단의 강제성 있는 지명제도가 있어야 지역연고가 활성화될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4대 지방팀들 중 한화 이글스는 유독 소재지인 대전에 이렇다 할 야구 명문고가 없고 천안 북일고, 청주 세광고를 중심으로 하는 어정쩡한 체제에 대전 자체가 근대 들어 쌩 허허벌판에 이주민들이 모여들어 형성된 도시였던지라 충청권 연고를 독식하고도 3대 지방팀에 비해 유독 한화 팬덤이 저평가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물론 OB의 대전 연고로 인한 약간의 시차 문제도 있지만) 인천이야 말 할 것도 없고.[36] 전주는 호남 지역에서 야구세가 약한 동네다. 전주고등학교 야구부도 한 번 없어졌다가 군산상고발 야구열풍으로 간신히 부활했을 정도. 보다 야구 세가 약한 호남 주요 도시라면 익산이나 목포가 있지만 도시 규모가 너무 작고.[37] 청주에 LG화학, LG산전(현 LS산전) 공장이 있기 때문에 충청도 연고 시절의 럭키금성은 청주에서 경기를 꽤 치렀다. 경남은 두 공동 창업주의 고향이며 창원에 LG 공장이 있었다. 그래서 KBL창원 LG 세이커스V-리그구미 LIG손해보험 그레이터스팀이 만들어진 것도 이러한 연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MBC 청룡이 LG 트윈스로 바뀔 당시 이미 삼성, 롯데가 영남권 연고 구단으로 있는데 왜 영남 출신 기업이 또 들어오느냐며 반발한 사람들도 있었다.[38]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도 메인 연고는 인구 150만의 대전이지만 실제로는 충청권 전체, 특히 천안과 청주 등 충청권 주요 도시들을 정서적인 광역연고지로 틀어쥐고 있기 때문에 지금 보이는 인기를 유지하는 것이다. KIA 타이거즈도 매한가지.[39] 예나 지금이나 마창진 인구를 합치면 100만을 넘기긴 하지만, 당시 130만 가까운 인구에 바로 옆에는 50만 청주까지 있는 대전도 걷어찬 마당에 마창진 100만이 눈에 들어오겠는가?[40] 현재는 아산캠퍼스가 메인이지만 초창기만 해도 천안의 성화신학교가 메인이었다.[41] 주로 기업 창업주의 고향이나 주요 사업장을 근거로 지역을 배분했다. 서울은 여러팀이 원했으나 창립안을 내고 매스컴의 도움이 필요한것을 잘 알던 MBC가 메인이다 보니 연고지를 획득하였고, 두산 박용곤 회장의 고향도 서울이라 한 팀 더 들어갈 수 있었다. 해태의 광주, 삼성그룹 발상지 대구, 울산 출신 롯데 신격호 회장을 이유로 부산이 정해졌다.(사실 롯데도 출범 이전에 서울 연고지를 원했으나 그럴꺼면 럭키그룹에게 자리를 준다라며 눌러버린 덕분에 부산으로 내려가긴 했다) 이후 SK는 최씨 집안이 수원 출신이라 원래 수원 창단을 준비했다가 현대 유니콘스의 야반도주로 인천 연고가 비자 인천·경기 연고를 명목으로 인천에 창단할 수 있었고, 해태 타이거즈가 무너진 뒤 인수할 기업을 찾던 중 현대자동차그룹의 기아 광주공장과 맞아 떨어져서 자연스럽게 인수가 가능했고(설사 광주에 현기차그룹 공장이 없어도 당시 상황은 일단 인수해주면 감지덕지한 상황이었다.), 10구단 유치에 참가했던 부영그룹은 무주리조트를 근거로 전북 전주 창단을 추진했고 KT는 공기업이였던 역사가 있기에 자연스럽게 수도권 지역 그것도 자리가 빈 수원에 창단을 할 수 있었고, MBC조차 서울 민간방송부터 시작한 역사가 있으니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지역연고와 아무 관련 없이 창단된 구단은 삼미 슈퍼스타즈, 청보 핀토스뿐이고, 이것이 과거 인천 야구가 그렇게 허약했던 한 원인이기도 했다.(그러나 당시 참가 기업을 찾지못한 상황에서 삼미에게 참가해준것만으로 고마워야할 상황이었다) 그래서 2020년 현재 프로야구 10개 구단 중에서 지역연고와 관계없이 창단된 구단은 서비스 기업인 NC 다이노스 뿐이다.[42] 월드컵 경기장 중에 가장 싸게 지은 전주월드컵경기장이 그 당시에 1,300억이 들었다. 전주성은 4만석이 넘으니 좀 작게 지으면 되지 않냐고? 애초에 서울에 전용구장을 요구한 이유가 무엇일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월드컵 주경기장을 프로구단에게 떠넘기겠다는 속셈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규모 줄인다고 사업비가 획기적으로 줄어드는 것도 아닌 것이, 가변석 빼면 3만석도 안 되는 제주월드컵경기장도 전주에 맞먹는 비용이 들어갔다. 제주도 특성상 물류비가 높게 잡히는 점을 고려해도 상당한 지출이다.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니고 서울이다. 서울의 부동산 가격을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데다 그것도 부동산 거품이 극심했던 IMF 외환위기 직전이다. 지금 있는 서울월드컵경기장도 난지도 쓰레기 매립지 특수성(정확히 말하면 서울월드컵경기장이 위치한 곳은 쓰레기 매립지 자리가 아니었지만)이 없었으면 거기에 못 지었다.[43] 덧붙이자면 현대미포조선도 승격팀이라 축구발전기금을 10억원으로 깎아준것이지 신생팀은 축구발전기금을 30억이나 내야 했다. 즉 서울에 완전 신생팀을 창단하려면 가입금+축구발전기금+상암분담금 합쳐 무려 115억이 필요했다. 이정도면 SK가 프로야구단 만드는데 든 126억과 비교해서 별 차이도 안나는데, 이 돈내고 서울 들어가서 프로축구팀 만들 구단은 없다.[44] 이걸 자기들 사업장만 생각한 행보라고 비판할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자신들의 사업장 소재지가 아니고서야 직할시고 뭐고 굴러갈수가 없는 상황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특히 광양제철에 경기장을 짓고 프로팀 창단이 된걸 보면 애초에 사업장이 없었다면 전남팀은 창단 자체를 안했을 것이다.[45] 안양(59만)-군포(23만)-의왕(11만), 부천(78만)-시흥(13만). 이 당시 시흥은 시화지구나 연성지구가 개발되기 전이라 대부분의 인구가 북시흥 지역에 몰려있었다.[46] 한보그룹, 대우그룹, 쌍용그룹, 기아, 해태그룹, 한라그룹 등 외환위기 전후로 망한 재벌들을 보면 이때 모두 수조원대의 분식회계로 손실을 감추고 있었다. 그만큼 당시는 지금은 손해더라도 몇년 뒤에는 전부 회수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재벌들이 미친듯이 돈을 퍼붓던 묻지마 투자의 시대였다. 이런 때에도 프로축구단은 돈도 안되고, 홍보효과도 없다면서 사방에서 까이는 신세였던 것이다.[47] 여기서 자립적이라는 것은 경제적 자립이 아니라 국가대표와 별개로 독립적인 운영이 보장되는지 여부를 말한다. 1990년대까지 대한민국의 경제력으로 프로스포츠의 경제적 자립은 어려웠고 국민소득 3만달러를 눈앞에 둔 지금도 실현까지는 거리가 있는 상태다. 단,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 우승 이후 다시금 돌아온 야구 인기에 힘입어서 모기업 없이 스폰서과 입장 수입만으로도 운영이 가능하다는 것을 넥센 히어로즈가 증명하긴 했다. 더구나 히어로즈는 이장석과 경영진이 계속 회삿돈을 빼가는 상황에서도 수년간 운영했다. 다만 현 키움 히어로즈의 흑자 전환은 몇년 되지 않았고 모기업이 없어 광고 유치와 입장권 등으로 수익 구조를 만들어야 하는 이상 타 대기업 팀들에 비해 항상 긴축재정으로 운영해 선수단 복지가 프로팀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다. 다른 대기업팀들의 경우 여전히 모기업 지원금없이 운영할 수가 없는 전적으로 모기업에 의존하는 구조다. 또한 홍보효과도 인기에 비해 높지 않은 편이며 프로야구가 창설한 당시와 현재를 비교했을때 당시도 그랬지만 현재 구단을 운영하는 대기업들은 국민들이라면 누구나 알 정도의 인지도를 가진 기업들이라 홍보효과는커녕 구단에서 사고를 치면 그 악영향이 고스란히 모기업으로 돌아가 야구단 운영에 회의적인 의견이 많다. 거기에 삼성, 기아, LG, SK 등 글로벌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해 국내에서 연간 몇백억씩 써가며 운영하는 것에 대해 홍보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며 실제로 SK는 2021년 SK 와이번스를 매각하며 야구판에서 손털고 나갔다.[48] FC 화랑이 사실상 클럽마냥 운영된 사례도 있지만, 독재정권으로서는 국제교류가 활발한 축구라는 종목에 있어서 국내 리그보다는 국대 경기를 통한 국가의식의 고취가 우선이었다. 그리고 축구계는 오랜 시간동안 정권이 내려주는 국대에 대한 지원 속에 취해있었고, 고교야구가 방송3사(KBS, MBC, TBC)가 과열경쟁을 벌일 정도의 인기 컨텐츠로 성장하며 중앙집권 역사가 천년이 넘는 나라에서 지역연고의식을 뿌리내리는 동안 국내 축구리그는 학원축구와 성인축구 모두 후일의 프로리그 출범을 위한 지역 기반을 형성하지 못했다. 그 결과 프로축구의 출범에 있어서도 정부 지원부터 요구했다가 퇴짜를 맞는 참변을 당했고, 자신들의 요구(지역연고제)가 정권의 요구(지역감정 억제)와 배치되는 순간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는 처지에 직면했다.[49] 탐욕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물론 경제력 면에서 일본이 당시 한국보다 앞서긴 했지만, 당시 일본의 축구 인프라도 한국에 비해 딱히 우월한 건 아니었고 월드컵 진출 경력으로 가면 고개도 못 들 형편이었기 때문. 만약 도하의 기적이 없이 1994년 월드컵에 일본이 진출하고 한국이 탈락했다면 한국 축구의 역사는 어마어마하게 달라졌을 것이다.[50] 제주는 지역안배 차원, 전주와 수원은 프로구단 연고지역.[51] 이 경우 전통의 축구 도시 포항과 일화를 유치한 천안이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월드컵 개최도시에서 탈락한 포항지역의 반발은 엄청났다. 개최도시에 선정이 됐다고 해도 위쪽 각주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스틸야드의 규격이 한참 못 미쳐 월드컵 경기를 위한 경기장을 별도로 지어야 하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52] 그나마도 +2에 해당되는 수원과 전주는 국고 필요없이 지자체 예산으로 짓겠다고 약속한 끝에 개최도시에 들어갈 수 있었다.[53] 실제로 2002 월드컵2002 부산 아시안게임은 처음으로 서울 외 도시에서 치러진 국제 체육기구 주관 대회였다.[54]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잠실실내체육관, 잠실수영장 등 서울종합운동장 내 다른 시설들도 마찬가지다. 단, 잠실학생체육관서울특별시교육청이 관리한다.[55] J1리그 15,000명, J2리그 10,000명 수용[56] 일본의 지역이기주의는 꽤나 심각한데 멀쩡한 전철 건설계획도 상권 위축된다며 중단시킬 정도다. 경기장 야간조명에 대해서도 관람객 유입으로 인한 거주환경 악화를 이유로 반대, 무산시키는 경우가 다반사다.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가 사용하다가 결국 야간조명을 못 달고 포기한 후지이데라 야구장이 대표적.[57] 참고로 이 규정대로면 1996년 기준으로 서울에서는 동대문운동장서울올림픽주경기장, 목동종합운동장, 효창운동장이 모두 부합한다! 이뭐병[58] 당장 1980년대 이후로도 난카이 호크스(오사카 → 후쿠오카), 롯데 마린즈(카와사키 → 치바)의 연고 이동이 있었다. 또한 킨키권의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한큐 브레이브스, 도쿄의 닛폰햄 파이터즈처럼 분명 흥행이 되어야 할 대도시권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거대 구단의 그늘에 가려 흥행과 재정 면에서 어려움을 겪던 구단들도 여럿 있었다. 후자의 3개 구단 중 킨테츠는 해체되었고, 한큐는 오릭스에 구단이 매각되었으며, 닛폰햄은 결국 토쿄를 떠나 삿포로로 이전했다.[59] 요미우리의 패왕적 지위로 인한 폐해는 이걸로 끝이 아니다. 당장 일본 양대리그의 출범부터가 요미우리의 이른바 '벳쇼 빼내기'라 불리는 선수 강탈사건을 계기로 기존 구단들의 반발심이 폭발해 벌어졌을 정도다. 또한 요미우리의 입지가 워낙 불균형적으로 높기 때문에 프로야구 흥행 자체가 요미우리의 성적에 많이 휘둘린다. 오죽하면 한신 타이거스는 리그 분할 당시에 "교진놈들 꼴보기는 싫은데 파리그로 가면 교진이랑 못 붙잖아?(=흥행이 안 되잖아?) 우린 남는다!"며 세리그에 남았을 정도다.[60] 베르디 카와사키를 거쳐 현 도쿄 베르디로 J리그 참가.[61] 참고로 시가현은 분류상 칸사이에 들어간다. 그런데도 칸사이 패왕이라는 한신이나 오사카 팀인 오릭스 안 보고 교진 볼 정도니 다른 지역들도 말 다했다.[62] 최근에는 조금 나아져서 츄오조사사의 2020년 조사 기준으로 교진이 25%, 한신이 10% 수준까지 내려왔지만 교진-한신의 압도적인 1-2위 구도는 여전하다.#[63] KBO 리그2017년 3월 여론조사를 보면 롯데-기아-삼성이 팬덤 절반을 차지하지만 한 팀 성적 안 좋다고 리그 전체 흥행이 폭망하는 수준은 아니다.[64] 호크스는 후쿠오카로 이전한 이후 내내 죽을 쑨 탓에 한때는 오히려 사이타마로 옮긴 라이온즈 팬덤이 호크스 팬덤을 능가할 지경이었다.[65] 수도권에서 교진을 견제해 줄 라이벌 구단이 도통 못 큰 탓도 크다. 그런데 애초에 요미우리가 대놓고 야구판에서 꼰대짓하니 바로 코앞에서 뭐 클 수가 있어야지....[66] 1965~1992년. 1992~1998년 재팬풋볼리그(구JFL)를 거쳐 현재 4부리그 일본풋볼리그(신JFL)로 개편.[67] 이게 특히 문제가 되는 이유는 1. 다른 실업구단들의 구성이 죄다 국영기업, 은행, 군팀이었고 2. 현행법상 금융사는 본업과 관련되지 않은 업종의 계열사 법인체를 보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현행 한국 내셔널리그의 프로 하부리그 및 승강제 편입을 어렵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당장 내셔널리그 소속 팀들의 면면이 어떤 지부터 찾아 보자.(내셔널리그가 2019년을 끝으로 해체되어 새로 재편한 K3리그에 배치된 뒤에도 이런 문제 때문에 승강제 편입이 안 되고 있다.) 프로야구는 이런 원칙에 근거해 금융사 구단 창단이 철저히 금지되어 있고 잘해야 키움 히어로즈처럼 메인 스폰서만 가능한데 프로축구만 금융사 구단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그래서 하나은행이 대전 시티즌을 인수한 뒤에 축구단 유지에만 필요한 별도 재단을 만들어야 했다.) 정 하고 싶으면 법을 고치든가, K리그프로배구처럼 구단의 법인화를 요구하지 않는 세미프로로 전환되면 된다. 하지만 금융사의 겸업금지는 금산분리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가까운 시일 내에 아마도 현 정권 내에서는 실현이 불가능한 문제다. 세미프로화는 그만큼 리그 규모의 축소와 수준저하가 수반되고.[68] 철도회사(한큐, 한신, 킨테츠, 니시테츠, 난카이, 코쿠테츠, 세이부 등등), 어업회사(다이요), 영화사(도에이, 쇼치쿠), 같은 언론사(주니치, 산케이, 마이니치, 니시닛폰), 식품회사(야쿠르트, 니혼햄, 롯데), 유통회사(다이에) 등. 물론 이런 여러 기업들이 매번 리그 구성원들의 환영을 받으며 참가했다는 소리는 아니다. 심지어 마이니치의 참가로 벌어진 갈등은 일본야구연맹을 해체시켰고, 직후 벌어진 벳쇼 빼내기 사건과 맞물려 양대리그 분할의 도화선이 되었을 정도다.[69] 일본 프로야구가 화려한 외형과는 달리 요미우리, 한신, 주니치를 제외하고는 구단이 수없이 이리저리 바뀐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한큐나 난카이 같은 구단은 그야말로 구단주 눈에 흙이 들어가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팔았다.[70] 재단 학교인 북일고등학교에 야구부를 창단해 강팀으로 만드는 등 언제라도 프로야구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하필 프로야구 출범 직전인 1981년에 창업주 김종희 회장이 사망해 김승연 회장 체제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었던 터라 참가가 늦어졌다.[71] 특히 현대는 프로야구 참가 직전엔 현대 피닉스를 창단하고 제2리그 창설을 모색할 정도로 프로야구에 참가하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다.[72] 참고로 이 참가기업들의 면면을 보면 흔히 K리그 팬덤에서 주장하는 프로야구의 무슨 빨로 인한 성장이 헛소리임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럭키금성이 프로야구에 참가하기 직전인 1989년 당시 참가 기업들을 보면 프로야구의 이른바 5대 재벌은 고작 삼성 하나(!)에 불과한데 반해(그래서 실제로 대삼성이 이딴 쩌리들이랑 같이 놀아야겠냐고 투덜거리기도 했다) 프로축구에는 대우, 현대, 럭키금성의 3개 기업이 참가했으며, 10대 재벌까지 확장해봐도 프로축구는 5대재벌 바로 다음 자리를 차지하는 선경이 있지만 프로야구는 10대재벌의 말석에 위치한 한화, 롯데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런 대재벌들에게 아무 매리트도 제공하지 못한 채 폭삭 망해버리고 무슨 탓만 늘어놓는 것이 현재 대한민국 축구계의 현실이다.[73] 도쿄는 유치신청 자체를 안 했다. 뚝섬이나 난지도라도 남아있던 서울과 달리 도저히 월드컵 경기장을 지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국립경기장은 아주 당연히 FIFA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다.[74] 그래도 역설적으로 버블의 끝판이라 그나마 J리그가 출범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75] 서울이 월드컵 경기장을 짓지 못할 경우 한국 측 월드컵 메인구장은 인천문학경기장이 될 예정이었다.[76]카시마 앤틀러스도 실제로는 인구 30만도 안되는 이바라키 동남부 카미스도시권으로 장사가 되는 게 아니라 도쿄 수도권 팬들이 먹여살리고 있고, 지금도 틈만 나면 도쿄 이전을 노리고 있다..[77] 이 중 삿포로는 닛폰햄이 2004년 이전했고, 여기에 나오지 않은 치바에 프로야구단인 롯데 마린즈가 이전한 것은 J리그 출범 직전인 1992년이었다.[78] 한국에서 일본의 정령지정도시 지정 기준(통상 인구 80만, 행정구역 통폐합 시 70만)에 부합하는 곳은 부산, 인천, 대구, 대전, 광주, 울산, 수원, 창원, 성남, 고양, 용인, 부천, 청주이며 이 중에서 KBO리그 팀이 없는 도시는 울산, 성남, 고양, 용인, 부천, 청주의 5곳이다. 그나마 울산은 롯데 자이언츠가, 청주는 한화 이글스가 제2연고지로 삼고 있어 순수하게 무연고지인 도시는 3곳 뿐이다. K리그 최후의 자존심인 전주도 여기 못 들어간다(...)[79] 그나마 조금 현실적인 행정구역 통폐합 방안이나 인구가 폭증하는 도시까지 끌어모아보자면 통합전주시(전주-완주), 통합양주시(의정부-양주-동두천), 통합남양주시(남양주-구리), 통합여순광시(여수-순천-광양), 통합천안아산시(천안-아산), 화성시 정도가 있다. 합하면 10곳으로 일본의 13곳과 얼추 비슷해보이지만 일본과는 다른 것이 이 4+6개 도시들 중에서도 무려 7곳이 수도권 위성도시이며 행정중심기능이 있는 도시는 광역시인 울산을 제외하면 전주 하나밖에 없다. 경기북도 생기면 하나 늘어난다 반면 일본은 13곳 중 카와사키, 사이타마, 사가미하라를 제외한 10곳이 비수도권이며, 카와사키, 사가미하라, 키타큐슈, 사카이, 하마마츠를 제외한 8곳이 현청소재지로 지역의 행정 중심지이다. 결정적으로 이런식으로 행정구역 통합해서 정령지정도시 되려는 동네는 일본 내에 수십곳이 우글거리고 있다.[80] 1994년 사업주체인 제3섹터 '무사시노의숲 스타디움 주식회사(武蔵野の森スタジアム株式会社)'이 설립, 1998년 '도쿄 스타디움' 사업 인가, 2000년 준공, 2001년 개장.[81] 심지어 이 아지노모토 스타디움은 도쿄 23구에서의 교통 접근성 상당히 불편한 편이다. 토비타큐역이 있긴 있는데 케이오 전철의 배차간격이 개판으로 악명높아서 서포터들도 불편을 호소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