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구 독일공사관

덤프버전 : r20210301






파일:독일공사관.png
독일 공사관#. 회동에 있던 시기에 찍은 것이다.
1. 개요
2. 역사
3. 건물
4. 여담



1. 개요[편집]


서울특별시 종로구중구에 있었던 독일 제국의 옛 공사관이다.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파일:독일 제국 국장(1889).png
독일제국 국기
독일제국 국장

2. 역사[편집]


1883년(고종 20년)에 조독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여 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은 독일 정부는 한성에 독일 영사관을 설치했다.

처음에는 지금의 충무로 서울중앙우체국 뒤편인 낙동에 영사관을 두었다. 그러나 건물이 좁고 낡아서 근처의 빈집을 사용하게 해달라고 조선 측에 여러 번 요청했으나 계속 거절당했다.[1]#

파일:박동 독일영사관.png
박동 시절 독일 영사관. 원래 민겸호와 묄렌도르프가 살았던 집이었다.
그러다 1886년(고종 23년) 11월에 지금의 수송동인 박동으로 옮겼다. 박동 영사관 건물은 원래 민겸호가 살았던 집이다. 민겸호는 부정부패를 일삼아 임오군란 때 구식 군인들에게 살해당했다. 그렇게 죽은 사람 집에 아무도 살고 싶어하지 않아 빈 집이었던 곳을 조선 정부에서 청나라의 파견으로 온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에게 하사했다. 그러다 묄렌도르프가 1885년(고종 22년)에 청나라로 돌아가 다시 비어있던 상태에서 독일영사관이 입주했던 것이다.

그런데 몇 년 지나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 독일 회사 세창양행[2]에서 독일영사관 땅이 자신들 소유라고 주장했던 것. 묄렌도르프조선을 떠나면서 세창양행에 땅을 팔았다는 것이다. 이 문제로 1890년(고종 27년)에서 1891년(고종 28년) 사이에 서소문동에 있던 왕립 학교 육영공원 자리로 영사관을 다시 옮겼다.[3]#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일대이다.

파일:서소문동 독일공사관.png
서소문동 시절 독일 영사관#
그런데 독일영사관은 또(...) 자리를 옮겨야했다. 1897년(건양 2년) 이후 고종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 머물면서 그 일대에 관청을 지으려 했는데 독일영사관이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00년(광무 3년) 3월에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독일영사관 땅을 5만 5천원에 매입했고, 대신 회동에 있는 국가 소유의 땅을 함께 주었다. 이에 독일영사관은 회동으로 이전했다. 다만 새로 건물을 짓느라 바로 옮기진 못했고 1902년(광무 6년)에 공사를 끝낸 후에 옮겼다.#
파일:회동 독일공사관.png
회동 시절 독일 공사관##
파일:회동 독일공사관2.png
회동 독일공사관에서 촬영한 북문과 뒷뜰의 모습. 뒤에 숭례문이 보인다.#
1년 뒤인 1903년(광무 7년) 5월에 공사관으로 승격했으나 불과 2년 뒤인 1905년(광무 9년) 11월에 일제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여 한국과 독일국교는 끊겼다. 독일공사관은 다시 영사관이 되었고 1906년(광무 10년)에 다시(...) 돈의문 밖 평동 26번지로 이전했다. 역마살이 끼었나#

파일:평동 독일공사관.png
평동 시절 독일 영사관#
경술국치 이후에도 계속 영사관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고 독일일본적국이 되면서 영사관은 문을 닫았다. 서울[4]의 독일영사관은 바이마르 공화국 성립 이후인 1928년에 다시 생겼으나 예전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광화문통[5], 서소문정[6]을 전전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폐쇄했다. 이후 조선 관련 업무는 중국 다롄에 있는 영사관에서 담당했다. 한국 - 독일 외교관계8.15 광복 이후 10년 뒤인 1955년에야 다시 재개되었다.

회동에 있던 공사관 건물은 대한제국 정부에서 다시 사들여 탁지부 관리들의 구락부로 활용했고, 이후 경성구락부와 남대문세무서에서 사용하다가 1970년 경에 민간 소유로 넘어간 후 헐렸다. 평동에 있던 영사관 건물은 1920년 6월에 조선식산은행에서 6만원을 주고 사들였다.#


3. 건물[편집]




4. 여담[편집]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 문서의 r64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1] 이미 프랑스 정부에서 사용하려 했기 때문이라고.[2] 묄렌도르프의 후원으로 제물포에 진출했고, 이후 각종 근대 문물(군함도!)을 수입하는 창구 역할을 한 회사이다.[3] 육영공원은 전동으로 이전했다.[4] 당시 이름은 경성.[5] 지금의 세종대로.[6] 지금의 서소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