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갑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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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
2. 서양 갑옷의 역사
3. 서양 갑옷의 제조
4. 서양 갑옷의 착용주체
5. 현대의 갑옷 경향
6. 미디어
7. 관련 항목


1. 개요[편집]


서양에서 사용된 갑옷.


2. 서양 갑옷의 역사[편집]



2.1. 고대~십자군 전쟁[편집]


일리아스》의 무대가 되었던 청동기 시대 고대 그리스는 원래 바다 민족의 침공 이전에는 소수의 엘리트 전사가 전쟁을 주도하며, 전차를 타고 싸우는 식이었다. 이때 당시의 갑옷은 마치 드럼통을 연상시키는 청동판 갑옷이었으며, 몸통 전체와 어깨부분을 완전히 가리는 갑옷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가죽제 갑옷이나 방패도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유기질 재료로 만들어진 유물들은 대부분 삭아버려 그 형태를 알 수 없다. 다만 당시의 투구는 남아있는데, 멧돼지의 어금니를 규칙적으로 배열하고 고정시킨 투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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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미케네의 갑옷

바다 민족의 침공 이후 암흑시대를 거쳐 도시국가 폴리스 중심으로 새롭게 탄생한 그리스 문명은 더이상 소수의 영웅과 전차는 사용하지 않았으나, 각 폴리스의 시민들이 청동 방패 호플론을 들고, 청동 흉갑과 투구를 착용하고 질서정연하게 대열을 짜고 싸우는 형태로 변해있었다. 원래는 오른팔과 허벅지, 정강이와 발가락까지 감싸는 파노플리아(완전한 갑주라는 의미)라는 것이 있었으나, 너무 무겁고[1] 장시간의 전투시 체력이 빨리 떨어지는 문제가 지적되어 그리스의 갑옷은 청동제 흉갑과 정강이받이만으로 간소화되었다. 당시는 철기 시대 였지만 철의 경쟁력이 청동보다 크게 뛰어나지 않은 초기 철기 시대라 무기에만 철을 사용하고 갑옷과 방패는 청동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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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7~6세기의 파노플리아 갑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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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5세기경의 스파르타 갑주[2]

이 그리스의 갑옷과 투구 스타일은 폴리스를 떠나 지중해 각지에 정착한 식민폴리스들에 의해 주변 민족에까지 퍼졌으며, 로마도 처음에는 이 그리스식의 갑옷과 무장을 한 군대였다. 명실공히 서양 갑옷의 시작점이라고 할 만한 것이 이 그리스의 갑옷이었다. 나중에는 역시 청동흉갑의 무거움 때문에 흉갑은 리넨 천으로 두껍게 만든 갑옷으로 대체되었으나, 투구와 정강이받이는 여전히 청동제였다. 그리스 아테네의 이피크라테스가 리넨 갑옷을 솜누비 갑옷으로 바꾸고, 청동제 정강이받이를 가죽제로 바꾸는 경량화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지만 접전에서 불리하다는 이유로 리넨 흉갑과 청동제 투구와 정강이받이는 계속해서 유지된다.[3]

로마도 왕정 시대에는 그리스식으로 무장했으나, 점차 삼니움을 비롯한 이탈리아의 라틴 원주민들과의 접전을 통해 그들의 무장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삼니움식의 청동흉갑을 받아들이는 등의 변화가 생겼다. 또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던 켈트족의 공격을 받으면서 당시 켈트족이 사용하던 체인메일갑옷을 도입하는 변화도 겪었다.

이때부터 갑옷을 그리스에서 전래된 로망스 계통과, 켈트족을 비롯한 다양한 이민족들에게서 전래된 바바리안 계통으로 나누는 풍습이 생기게 된다. 그리스식의 청동제 흉갑, 즉 로리카는 무겁다는 이유로 잘 쓰이지 않게 되었으며, 체인메일은 실전에서 찌르기까지 막기 위해 매우 촘촘해서 무게는 엇비슷했지만 통풍이 잘 되고 유연하여 매우 편하다는 이유로 로리카 하마타라고 불리며 로마군의 주력 갑옷이 된다. 다만 스타일은 평범한 메일 셔츠와 조끼, 그리고 그리스 리넨 흉갑의 스타일을 본딴 것이 있었다. 투구도 그리스 양식에서 벗어나 켈트 양식과 라틴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재질은 대체적으로 공화정 때까지는 청동제였지만, 제정 시기에는 대부분 철제로 이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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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군의 트레이드 마크로 여겨지는 철판갑옷, 로리카 세그먼타타에는 훗날의 플레이트 아머와는 달리 보통 철[4]을 썼으므로 그렇게까지 튼튼하지는 않았으나, 그 대신 타격을 휘어지면서 받아낸다고 여겨졌다. 여러 장의 철판으로 구성된 갑옷이었으며 훗날의 플레이트 아머처럼 복잡하고 신체라인에 맞는 곡선을 가지지 못한 일자체형의 갑옷이었다. 로마군의 상징처럼 여겨지지만 약 1세기 정도만 사용되고 다시 로리카 하마타에 그 자리를 내주게 되는데, 불편함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한다. 초기형은 끈을 꿰어 착용했지만, 후기에는 벨트버클과 벨트를 사용하여 빠른 탈착이 가능해졌다.

물고기 비늘처럼 철판을 배열한 스케일 아머에 해당하는 갑옷이 동방으로부터 도입되었으며 이것은 로리카 스쿠마타(lorica squamata)라고 불렸다. 또 동방으로부터 전래된 갑옷으로 작은 철판들을 끈으로 엮어 만드는 찰갑러멜러 아머가 존재했다. 원래 로마군은 팔다리 방어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으나, 팔과 다리 보호용으로 작은 철판을 연결하여 마치 지네 등껍질처럼 생긴 마니카(MANICA)가 있었으며, 로마 군단병에게는 다키아 원정에서 다키아인들의 절단무기 펄스(Falx)에 팔을 보호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사용되었지만, 검투사들은 거의 항상 사용하였고, 파르티아사산조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아 로마도 중장기병을 편성하면서 로마 중장기병들은 이 마니카를 팔과 다리 전체에 착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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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투사, 트라키안과 세쿠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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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중장기병(clibanarius), 3~4세기

로마가 분열된 이후 동로마는 그리스로써의 정체성을 가졌지만 그리스식 갑옷이 부활하지는 않았으며 주력 갑옷은 동방적 색체가 강한 러멜러 아머나 로리카 스쿠마타를 사용하였다. 초기에는 보병들은 로리카 라메라나 로리카 하마타를 착용하였고, 4m를 넘는 긴 장창과 방패, 철제 투구를 착용하였으며 이들을 스쿠타토스로 불렀다. 강력한 중장기병들도 편성되어 있었는데 한시적으로 존재했던 최고의 중장기병인 클리바노포로스는 체인메일 위에 러멜러 아머를 입고, 그 위에 솜을 누빈 패딩 아머(에필로리콘)를 입는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하였다.[5] 스쿠타토스는 나중에는 러멜러 아머를 폐지하고 솜을 두껍게 누빈 패딩 아머로 전환하게 되는데, 이 이유에 관해서는 이설이 있다.[6] 10세기 이후에 등장하는 클리바니온(klibanion)은 가죽 위에 철판을 덧댄 식으로 개량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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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의 스쿠타토스. 프리아셉타 밀리타리아의 기술에 의거

한편 서유럽은 로마가 붕괴되고 게르만계 민족들이 지배하게 되는데, 이들이 애용한 갑옷이 바로 체인메일이었다. 로마가 사용한 로리카 하마타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며 이들 독자적인 물건이었다. 군대 전체적으로는 갑옷 착용 비율은 그리 높지 않았으나 갑옷 착용자들은 기병이나 후스칼, 테인 같은 전문 엘리트 직업 군인들이었는데 이들이 애용한 갑옷 중의 하나가 체인메일이었다. 로리카 스쿠마타 등의 영향으로 프랑크 왕국이 스케일 아머를 사용한 바 있기도 한데, 바이킹들의 활약과, 그 연장선상에서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지방에 이주한 노르만족들이 체인메일을 특히 애용하고 서유럽의 군사 문화를 선도하게 됨에 따라 스케일 아머나 러멜러 아머는 점차 서유럽에서 사용되지 않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체인 메일은 반팔에 무릎까지만 가리는 코트 형식이었지만, 1차,2차 십자군 전쟁을 거치면서 손끝과 발끝까지 감싸기 시작하고, 그에 대비해 코트 자락은 계속 짧아진다. 더불어 중동의 뜨거운 햇빛과 추위, 비 등으로부터 몸과 갑옷을 보호하기 위해 서코트(Surcoat)라는 것을 갑옷 위에 입게 된다. 처음에는 단지 실용적 의미로 입었지만, 나중에는 화려한 문장을 넣어 피아식별용 겸 과시용 의류의 의미도 가지게 된다. 투구 또한 처음에는 단지 코가리개(Nasal)만 달린 이른바 노르만 헬름을 사용했지만, 점차 얼굴만 완전히 덮는 과도기적 투구가 되었다가, 마침내 드럼통처럼 생겨 머리 전체를 완전히 방어하는 그레이트 헬름(Great Helm)으로 변화하게 된다. 또 몸통 방어도 과거에는 단지 체인메일에만 의존하거나 심장 근처에만 두겹의 체인메일을 덮었지만, 2차 십자군 전쟁 즈음에는 체인메일 위에 가죽이나 철제 판을 부착한 코트를 한겹 더 입고, 그 위에 서코트를 입는 방어력에 충실한 스타일로 바뀌었다. 또 무릎관절도 원래는 추가적인 방어를 하지 않다가, 패딩을 위에 덧대거나 철판으로 추가 보강을 하는 식으로 변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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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이탈리아를 침공한 노르만 전사들, 11~12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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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기사단의 장비, 116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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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기사단의 장비, 1290년

2.2. 트랜지셔널 아머의 시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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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중반의 무장. 14세기 중반에는 일시적으로 무기와 그레이트 헬름에 쇠사슬을 달아 피탈방지끈으로 활용하는 유행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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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후반의 무장

13세기에는 팔다리 부분의 방어가 더욱 강화되면서 정강이받이인 schynbalds가 등장하고, 어깨에 문장을 그린 사각형 철판인 Ailette을 달아놓게 된다. 13세기 내내 특출난 변화는 없었으나 14세기부터 빠른 변화가 시작된다. 이 시대의 갑옷의 특징은 트랜지셔널 아머를 참조. 14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무릎 보호대와 정강이받이, 팔꿈치 보호대와 상박부, 하박부를 보호하는 Vambrace, Rebrace가 따로따로였지만 14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리벳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부품이 되었으며 관절화가 완료된다. 따라서 무릎이나 팔을 굽혀도 방어구 사이의 틈이 노출되지 않게 된다. 또 14세기 중반까지는 체인메일 두건인 코이프(Coif)를 대체한 베서닛 투구를 착용하고 그 위에 그레이트 헬름을 착용했으며, 마상에서는 그레이트 헬름을 쓰고, 지상전에서는 그레이트 헬름을 벗고 가볍고 시야가 넓은 베서닛 투구만 쓴 채로 전투했지만, 14세기 후반이 되면 그레이트 헬름이 실전에서 퇴출되고 베서닛 투구에 안면 보호구(Visor)를 장착하여 마상에서나 도보에서나 사용하게 된다. 또 이전까지 몸통 방어를 위해 브리건딘이나 코트 오브 플레이트를 사용해왔던 것이 대해 1370년부터 플레이트 흉갑이 등장하여 전체적으로 방어력에서 큰 진전을 얻게 되었으며, 체인메일이 직접적인 방어를 담당하는 부분은 목 부분과 사타구니, 플레이트 판이 가려주지 못하는 팔관절 안쪽 정도로 제한되게 된다.


2.3. 플레이트 아머의 시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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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과 중앙은 밀라노식 갑주. 오른쪽은 15세기 극초반의 극초기형

15세기 극초반에는 14세기 후반의 트랜지셔널 아머의 체인 부분을 모조리 철판으로 바꾼 듯한 매우 불편하고 무거운 플레이트 아머가 등장했으나, 곧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선진적인 양식을 선보이면서 움직임도 편하고 전체가 플레이트로 이루어진 갑옷이 등장하면서 풀 플레이트 아머가 완성된다.

이 시대의 갑옷 디자인의 양대산맥은 밀라노 양식과 고딕 양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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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는 대규모의 갑옷 공업단지가 들어서 디자인과 제작 기술에서 모두 전 유럽을 선도했으며, 밀라노에서 만들어낸 역작이 바로 밀라노 양식 플레이트 아머이다. 대체적으로 강력한 방어력을 추구한 것이 특징으로 안면은 폐쇄형의 Armet투구로 완전히 감싸고, 랜스를 쥐거나 검을 잡는 오른손은 비교적 활동하기 편하게, 말 고삐를 잡는 등 전투에 덜 참여하는 왼손은 보다 완전하게 덮고, 탈착이 가능한 가드브레이스(Guardbrace)와 같은 추가 방어 철판을 장착시켜 랜스돌격에 대응하여 방어력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했다. 전체적으로 둥글둥글한 라인을 가지고 있으며, 15세기에는 고딕식이 높은 인기를 자랑했지만, 고딕식이 16세기에는 유행이 없어지고 생산이 중단된 데 비해 17세기까지 이어지는 서양 갑옷의 계보의 중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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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양식은 밀라노 양식과 함께 15세기 양대산맥을 이룬 방식으로 대체적으로 완전한 방어력보다는 활동성을 추구한 것이 특징이다. 안면은 얼굴 위만 가리는 Sallet투구에 얼굴 아래와 턱, 목을 방어하는 Bevor를 장착했으며, 필요하다면 Bevor가 접혀 입을 노출시키는 것도 가능했으므로 Armet투구에 비해 편리했다. 팔 관절도 이탈리아 식처럼 리벳으로 고정시켜 움직임이 한 방향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끈으로 고정시켜 다양하고 세밀한 움직임에 대응할 수 있었고, 좌우 비대칭인 밀라노 양식과는 달리 좌우 대칭을 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움직임이 보다 편했고 실전지향적이라는 평을 받았으며, 15세기 유럽에서는 영국, 프랑스,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 전역에서 사용되었다.

어깨 부분을 전체적으로 다 가려주는 폴드런(Pouldron)이 사용된 점이 차이이다. 다만 폴드런은 무겁고 팔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경향이 있어 14세기부터 사용된 스파울더(Spaulder)를 사용하고, 노출되는 겨드랑이 부분은 베사주(besagew)라는 작은 원형판을 달아 보강하는 방식을 주로 사용하였다.

일반 보병들은 위와 같은 풀 슈트는 갖추지 못하였지만, 체인메일이나 목 가리개(Bevor)를 제외한 Sallet 투구만을 착용하고, 흉갑은 가슴 가리개만을 착용하였다. 암 하네스(Arm Harness)나 레그 하네스(Leg Harness)를 착용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15세기에는 갑옷을 보는 관념 자체도 변화하게 되는데 14세기까지는 체인메일을 주된 갑옷으로 보고 플레이트 흉갑이나 다른 부품들은 체인메일을 보완하는 용도로 보았지만 15세기부터는 체인메일이 팔 안쪽이나 사타구니처럼 완전히 가리기 어려운 부분을 보조적으로 방어하는 용도로 전락하고 플레이트 부품들이 갑옷의 주된 요소로 인식된다. 더불어 이전 시대까지 갑옷 밑에 받쳐입는 용도로 주로 사용된 누비옷인 갬비슨 대신, 튼튼한 직물로 짠 옷인 아밍 더블렛(Arming Doublet)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체인메일은 충격을 완화하는 능력이 없어 솜이나 천을 누빈 갬비슨으로 충격 완화 능력을 추가해야만 했지만, 플레이트 아머는 자체적으로 충격을 완화할 수 있으므로 튼튼한 군용 상의인 아밍 더블렛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체인메일은 과거처럼 따로 쓰는 게 아니라 이 아밍 더블렛에 장착했는데, 14세기처럼 체인메일로 몸 전체를 가리지 않고 겨드랑이와 팔 안쪽만 가리는 Mail Voider, 사타구니를 가리는 스커트 부분만을 아밍 더블렛에 끈으로 고정해서 장착하게 되어 있어서 꼭 필요한 부분만 장착이 가능해 무게가 크게 늘어나지 않으면서도 약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

15세기는 사실상 서양 갑옷의 완성기라고 할 수 있는데, 17세기까지 쓰인 갑옷들은 모두 이 시대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고, 이때 완성된 기술들이 19세기까지 갑옷 제조의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열처리 기술의 발달로 1.5mm~2mm정도의 얇은 두께에서 최대한 높은 방어력을 끌어낼 수 있었고, 디자인의 선진화로 전신을 플레이트화시키면서도 움직임을 최대한 고려할 수 있었다. 중탄소강을 가열한 후 식혀 연하게 만들고, 이것을 가공하여 갑옷 모양대로 성형한 다음 열처리를 가해 강한 성질을 부여하는 냉단법도 벨기에의 갑주사들을 통해 개발되어, 일일이 열을 가한 다음에 단조를 해야 했던 과거의 열단법과 비교해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또 갑옷 생산도 공장에서 철저하게 분업화되어 매우 효율적인 생산이 가능하였다.


2.4. 16세기 전반[편집]


16세기는 15세기와는 전혀 다른 전장환경이 등장했다. 바로 6m의 장창인 파이크로 짠 방진에 더해, 화승총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이른바 파이크&샷이라 불리는 콤비 플레이를 수행하는 테르시오(Tercio)전법이 등장했다. 더불어 전쟁에서 보병의 비율이 크게 늘어나고, 기병은 랜스돌격의 위력이 감소됨에 따라 전쟁의 주역의 자리를 내주어 다시 전쟁의 중심이 기사에서 보병으로 옯겨가던 시대이기도 했다.

16세기 갑옷의 가장 큰 변화라면 역시 화승총의 보급으로 인한 방탄갑옷의 활성화에 있다. 15세기까지만 해도 위력이 낮은 한드곤네(Handgonne)뿐으로 한발 정도라면 버틸 수도 있었지만 화승총은 위력과 정확도가 매우 높아졌으며 보병과 기병을 가리지 않고 이 화승총이 최대의 위협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따라서 화승총을 막아내는 것이 중요했는데, 과거 2mm정도에 열처리를 완료한 철판 정도면 충분했던 것이 총알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2mm이상의 두께가 필요해졌다. 거기에 갑옷 수요층이 크게 늘어났으므로, 과거와 같은 열처리 작업을 완료한 갑옷은 잘 만들지 않게 되고, 생산하기 편하게 강철이 아닌 일반 철(Iron)을 이용하여 갑옷을 만드는 대신, 3mm이상의 두꺼운 두께를 가지게 하도록 만들었다. 당시 총알은 납 구슬이었으므로 명중시 탄체 변형이 심했는데, 오히려 연한 일반 철은 두께만 두껍다면 적당히 휘어지면서 운동에너지를 흡수하고, 탄체는 그 과정에서 변형되어 분산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총탄을 막아낼 수 있었다. 물론 청동 총알을 사용하면 어렵지 않게 관통할 수 있었지만 그런 총알은 잘 사용되지 않았다.[7]

더불어 갑옷의 장식에서도 15세기까지는 갑옷 표면에 돌출된 선(Fluting)을 내어 장식적 효과와 구조강도의 향상을 노렸지만, 중동에서 산성용액을 이용한 에칭기법이 들어옴에 따라 표면에 산으로 부식시켜 복잡한 문양을 내는 것이 가능해졌으며, 손이 많이 가는 플루팅 기법은 빠르게 사라졌다. 플루팅 작업법

15세기까지 큰 유행을 한 고딕식 갑옷은 이유를 특정할 수 없으나 16세기 초에는 이미 생산이 크게 줄어들어 16세기 갑옷의 대세는 단연 밀라노 식 갑옷이었으며, 기병들도 고딕식의 셀릿 투구를 착용하지 않고 밀라노 식의 폐쇄형 투구인 아멧 투구를 주로 착용하였다. 16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중세 기사와 큰 차이가 없는 풀 하네스를 착용하고 랜스돌격을 가했으나, 16세기 후반이 되면 더이상 중세 기사를 연상케 하는 풀 하네스 착용은 보기 어렵게 된다.

16세기는 화승총의 완성과 보급, 파이크와 화승총의 연계 플레이를 주로 기병의 돌격을 거의 저지해내는 테르시오전법이 보급되어 기병과 갑옷의 쇠퇴가 시작된 시기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15세기에 등장한 냉단법 기술과 분업화가 절정을 이루어 일반 보병들도 총탄을 방어하는 뮤니션 그레이드 갑옷을 사서 입는 것이 가능해진 시대였으며, 특히 파이크를 들고 전열을 형성할 때에는 신병이 후방으로, 고참이 전방에 나섰으며 고참병들은 오랜 기간 근무하여 번 돈으로 갑옷과 투구를 사서 착용하였고, 이러한 병사들을 코르셀렛(corselet)이라고 불렀으며, 단어의 의미는 흉갑을 가리키는 것이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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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크 창병이 착용한 파이크맨 아머. 말에 타지 않으므로 사타구니까지 완전히 가리는 것이 특징이다. 투구나 암 하네스 등은 사정이나 취향에 따라 다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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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하프 아머(Half Armour) Armet과 같은 폐쇄형 투구가 붙는 경우도 있다. 16세기의 데미랜서(Demi-lancer)나 중장 파이크병인 코르셀렛(Corselet), 지휘관 등이 착용했다.

이런 갑옷을 착용한 고참병들은 갑옷의 방어력과 숙련된 기량으로 창들이 떼로 난무하는 파이크 방진끼리의 백병전에서 장시간 전투하는 것이 가능하였으나, 도보병으로써 행군을 해야만 했으므로 하체를 방어하는 레그 하네스는 착용하지 않았으며, 아무리 중무장해도 상체만을 완전히 덮었을 뿐 하체는 전혀 착용하지 않았다. 이렇게 상체를 완전히 덮은 갑옷은 특별히 하프 아머(Half Armour)라고 불렀으며, 보병과 기병이 두루 사용하였다. 보병의 경우 하프 아머를 완전히 갖춰입는 경우도 많지 않았고 대부분은 흉갑에 허벅지를 보호하는 태싯(Tasset), 목을 보호하는 고짓(Gorget), 그리고 투구를 착용하는 정도로, 팔도 잘 보호하지 않았다.

16세기에도 역시 새로운 투구의 양식이 등장하는데 모리용(Morion)과 버거넷(Burgernet)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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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용은 전 유럽에서 쓰이던 케틀헷(Kettlehat)의 재해석을 통해 등장한 디자인으로, 특히 프랑스의 샤펠 드 페르(Chapel de Fer)의 영향을 받아 등장한 것이다. 케틀햇은 단순한 원형의 모자 모양도 있었지만 보다 나은 방어를 위해 타원형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었는데, 그것이 더욱 발전한 것이 모리용이다. 모리용은 쓰기만 해도 머리 측면과 귀까지 완전히 보호가 되었고, 전방 시야도 잘 확보되며 챙으로 인해 맞고 미끄러지는 칼이 얼굴을 그을 걱정도 없었다. 16세기에는 보병과 경기병에 이르기까지 매우 일반적으로 쓰였으며 17세기 초까지 계속해서 쓰이게 된다. 일본에도 수입되어 남만투구(南蠻兜:난반가부토)라는 이름으로 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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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거넷(Burgonet)은 16세기 말에 등장하여 17세기에 주로 사용된 투구인데, 이 경우는 고대 로마투구의 디자인을 계승한 것이며 모리용이 가려주지 못하던 뒤통수와 목 일부까지 완전히 가려주었다. 별도로 목과 안면을 가려주는 부품(Wrapper)은 탈착이 가능하다. 17세기가 되면 모리용을 퇴출시키고 버거넷이 주로 사용되는데, 실제 성능이나 위력 문제보다는 디자인의 호불호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다. 모리용처럼 기병용과 보병용으로 두루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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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용으로는 이슬람세력인 오스만 투르크의 시샤크(Shishak)투구의 영향을 받아 등장한 지젝(Zischagge)투구가 등장했는데, 러시아-폴란드-독일을 거쳐 서유럽에 전파되어 파펜하임 투구(Pappenheimer)나 랍스터 테일즈 포트(Robster tales pot)라는 이름으로 쓰이며 17세기 기병용 투구의 베스트셀러가 된다.


2.5. 16세기 중반~17세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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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중반부터 풀 슈트는 스타일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16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15세기까지의 영향이 남아있어 상부 흉갑과 다리 갑옷이 따로 분리되어 있었지만, 16세기 중반부터는 레그 하네스가 흉갑의 토셋(Tasset)부분에 연결되는 식으로 상하체 갑옷이 일체화된 것이다.

더불어 과거처럼 갑옷을 입기 전에 아밍 더블렛(Arming Doublet)과 같은 전용 내갑의(內甲衣)를 착용하는 경향이 사라졌으며, 평상복 위에 그대로 착용하는 경향이 발생하였는데, 이것은 아밍 더블렛의 끈과 구멍에 갑옷의 부품들을 연결하여 움직임을 편하게 하고 무게를 분산하는 것과, 화살이나 폴암에 의해 갑옷이 손상될 경우 2차 피해를 막아주던 역할이 화기의 발달[9]과 백병전 비율의 저하로 쓸데없는 노력으로 판명되면서 갑옷 전체를 보조 의류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로 연결함으로써 보다 효율적인 착용을 꾀한 것으로 보인다.

또 기병이 Armet과 같은 폐쇄형 투구만을 착용하는 경향이 사라졌으며, 모리용이나 버거넷과 같은 개방형 투구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16세기에는 풀 슈트를 착용했어도 모리용을 쓰고 있는 경우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16세기 말부터는 과거의 갬비슨을 대체하여 새롭게 버프 코트가 등장하였는데, 보병과 기병을 가리지 않고 적절하고 가벼운 전장 방호복으로써 17세기 내내 큰 인기를 얻었다. 생선 기름에 재워 그늘에서 말린 이 소가죽 갑옷은 조끼, 코트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도검의 베기를 막아내고 원거리에서 발사된 권총탄과 둔기의 충격을 어느 정도 막아줄 수 있으면서도 무게는 3kg정도로 적당했기 때문에 큰 인기를 얻었으며, 퀴레시어나 아퀘버시어와 같은 총기병들이 갑옷 밑에 입는 보조 갑옷으로도 많이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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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파펜하임 기병대의 퀴레시어

16세기 말부터 등장한 총기병(Reiter)는 위그노 전쟁에서 랜스를 들고 돌격하는 창기병들에 대해 권총 사격으로 우위를 차지하게 됨에 따라 기병의 주력이 되었으며, 17세기 초반에는 또다시 2종류로 나뉘어져 풀 슈트를 착용하고 권총을 주로 사용하는 기병을 퀴레시어(Cuirassier), 버프 코트위에 방탄흉갑과 투구만을 착용하고 카빈총을 사용하는 기병을 카라비너(carabiner)혹은 아르케버시어(Arqebusier)로 호칭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퀴레시어 대다수가 버프 코트위에 방탄흉갑에 방탄투구를 착용하는 실정[10]이었으며, 아르케버시어는 버프 코트만 입고 돌아다니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고 전해진다. 또 이 기병들의 투구로 지젝투구가 압도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것도 17세기부터이다.

17세기 전반에는 이러한 갑옷 양식이 유지되었지만, 17세기 중반을 지나 30년전쟁이 끝날 즈음에는 16세기를 지배한 테르시오전법과 파이크 자체가 존립을 위협받게 되는데, 야전용 경포의 보급으로 인한 보병화력의 총체적인 증가로 기병이 17세기 전반처럼 방진을 총격으로 붕괴까지 몰아넣기는 커녕 심각한 소모를 당하게 되었다는 점과, 16세기와는 달리 방진끼리 충돌하기보다는 거리를 둔 채 총격전만 죽어라 하던 경향 때문과, 랜스돌격이 사라졌으므로 파이크 창병끼리의 교전과 기병 돌격에 저항하는 것을 염두에 둔 파이크병의 갑옷 착용의 의의가 줄어들었다는 점 때문에 갑옷 착용비율은 크게 줄어들게 된다.

17세기 후반이 되면 풀 슈트는 잘 사용되지 않게 되며, 갑옷은 공성전시 최전방에서 참호를 파는 병사들에게 지급되어 보호용으로 쓰이거나, 퀴레시어들이 입고 다니며 기병끼리의 전투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착용하였다. 그 외에는 고관대작들이 초상화를 그릴 때 장식용으로 착용하고 그리는 경우가 많았다. 실전주력에서는 완전히 밀려났으며, 18세기에 들어설 즈음에는 어떤 보병도 갑옷을 착용하지 않게 된다.


2.6. 18세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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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후반~19세기의 프랑스 퀴레시어 기병의 복장

18세기는 장창이 완전히 폐지되고 총검수석총이 일반화되었으며, 기병의 가치가 많이 낮아진 시점이었다. 따라서 17세기 중반까지 높은 활약을 보인 퀴레시어 흉갑기병도 18세기에 들어서는 단지 명예칭호와 다름아닌 존재였으며, 흉갑기병으로 편제되어 있어도 실제는 갑옷을 걸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이는 19세기 초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전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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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프랑스 퀴레시어 아머 세트

이때는 퀴레시어 아머라고 해도 흉갑 한벌과 투구 정도만 착용했으며, 투구는 생략되는 경우도 많았다. 더이상 기병에게 보병전열에 정면으로 도전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으므로 갑옷의 두께는 최소 3mm이상이던 17세기에 비해 2mm정도로 얇아졌으며, 기병간의 전투에서 기병이 사용하는 권총탄을 원거리에서 방어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따라서 보병이 사용하는 대형의 수석식 총을 방어할 수 없었다.

기병들끼리의 백병전에서도 특별한 우위를 차지할 수 없었는데, 분명히 몸통은 철제 흉갑으로 방어되어 검은 물론 창도 들어가지 않지만, 하복부와 다리, 팔과 얼굴은 노출된 그대로였고, 기병간의 전투에서 이러한 부분을 베이는 것 또한 명백한 치명상에 해당했다. 특히 손목이나 허벅지에는 동맥이 지나가므로 깊게 베이면 죽은 것과 다름없었다. 거기에 기병이 질주하면서 베는 세이버는 매우 깊고 치명적인 절상을 아주 쉽게 내었기 때문에 몸통만 방어한다고 실질적인 우위에 서기도 힘들었다. 따라서 흉갑을 입음으로써 짋어지게 되는 무게와 불편함에 비해 얻는 것이 적었다. 또 나폴레옹 시대에 들어 새롭게 등장한 창기병과의 대결에서도 기병돌격에서 창에 몸이 꿰뚫리는 것은 확실하게 막았지만,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낙마해버리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에 비해 경기병이 사용하던 두꺼운 외투는 가벼우면서도 움직임을 크게 제한하지 않고, 베기 공격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저항을 해 주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갑옷 대용으로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흉갑 자체는 별다른 전술적 이득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흉갑기병의 이름을 가지고 있어도 프로이센군의 흉갑기병처럼 투구도 갑옷도 착용하지 않거나, 오스트리아의 흉갑기병처럼 흉갑과 투구를 쓰지만 등은 보호하지 않는 식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초, 나폴레옹에 의해 흉갑기병에 대한 인식은 변화를 맞게 된다. 나폴레옹은 흉갑기병이 실전에서 특별한 위력을 가지지는 못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흉갑을 착용함으로써 얻게 되는 심리적 안정감과, 그에 따른 저돌적인 공격 정신을 주목했다. 또 이러한 심리적 효과와 더불어 덩치 큰 군마와 기병으로 구성되는 중기병(重騎兵)개념이 결합된다면 전장에서의 전투에서 매우 큰 시너지 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에, 18세기 내내 경시되던 흉갑을 등까지 덮게 하고 투구를 착용시키고 직선형 세이버를 쥐어 기병간의 전투에서 우위를 차지하도록 하였으며, 나폴레옹의 흉갑기병들은 전쟁 내내 저돌적인 공격력과 용기로 명성이 대단하였으며, 훗날 영국군도 이들을 본따 흉갑기병을 창설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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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갑옷은 실질적인 위력은 대단치 않았지만, 심리적인 역할을 했다는 데에서 그 가치가 있었던 셈이다.

3. 서양 갑옷의 제조[편집]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쓰인 청동제 갑옷은 형틀을 만들고 청동 물을 부어 대략적인 형태를 떠낸 다음, 판금작업으로 세부 디테일을 강조하고 마무리 작업을 하는 식으로 만들었다. 흉갑과 투구 모두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정강이받이는 처음에는 원통을 절반으로 잘라 놓은 듯한 모습으로 끈으로 묶어 고정했지만, 기술이 발달하면서 사용자의 정강이를 찍어낸 다음 거기에 청동물을 부어 완벽한 맞춤형 정강이받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했다. 이 시대가 되면 끈의 도움 없이 살짝 벌려서 끼우고 다시 닫으면 완전한 고정이 이루어졌다.

체인메일은 로리카 하마타의 경우 청동과 철이 사용되었으며, 이후에는 계속해서 철이 사용되었고 강철은 사용되지 않았다. 우선 다양한 크기의 구멍을 낸 금속판 사이로 불균일한 철사를 당겨 통과시킴으로써 철사의 지름을 일정하게 맞추고, 원하는 내부 지름과 동일한 직경의 철제 혹은 목봉에 철사를 끼우고 손잡이로 돌리면 마치 꽈배기처럼 봉을 감싸게 된다. 이것을 일정한 패턴에 따라 자르는데 일직선으로 자르면 실전용으로 부적합한 Butted mail이 되므로 링의 양 끝단이 서로 겹치도록 자른다. 겹쳐지는 끝단을 망치와 전용 도구로 때리면 납작하게 뭉개지게 되는데, 이 부분에 전용 끌로 구멍을 내고 리벳을 박아 Reveted ring을 만든다. 리벳을 박아 고정한 링과 아직 리벳을 박지 않은 링을 1:1로 준비한 다음 엮어 나가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엮었을 때 가장 튼튼하고 견고한 Flat ring은 리벳링과 동일한 제조법으로 만들되 겹쳐지는 끝단뿐만이 아니라 링 전체를 망치와 전용 도구로 납작하게 만들었다. 다른 공정은 리벳티드 링과 같다. 현대에서는 금형으로 쉽게 양산이 가능하다.

14세기 이전에는 Solid Ring이라는 것을 Reveted ring과 조합해서 체인메일을 만들기도 했는데, 솔리드링이란 리벳으로 따로 연결하거나 하지 않고 처음부터 일체로 만들어진 링으로써 철판을 전용 도구로 따내거나 잘라낸 링을 고열로 용접해서 하나의 일체화된 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방어력은 가장 뛰어났으나 제조가 번거롭고 가격이 높아 14세기 이후에는 체계화된 리벳링 생산체제에 밀려 사라졌다. 그러나 현대 공업기술의 관점에서는 금형으로 펑펑 뚫어내면 되므로 모든 링 중에서 가장 생산이 쉬우며, 현대의 솔리드링 메일 아머는 리벳티드 메일 아머의 1/2가격이다.

로리카 스쿠마타와 같은 스케일 아머는 비늘 한장한장의 두께가 0.5mm정도로 얇았으며, 대규모 공장에서 수작업으로 제조하였다. 한장의 마스터피스를 기준삼아 철판 혹은 청동판에 대량으로 표시를 하고, 외곽 선에 맞추어 잘라낸 다음 구멍 표시에 맞춰 망치와 끌로 구멍을 뚫었다. 그 다음은 가공시 생긴 찌꺼기(Burr)를 회전 숫돌에 문질러 제거하고, 세부 마무리를 끝낸 뒤 철제의 경우 녹방지를 위해 주석 도금을 하기도 하였다. 그 다음은 조립부서에 넘겨 끈이나 사슬, 가죽판에 리벳고정을 하는 식으로 조립하여 완성하였다. 완전 수작업이다 보니 구멍의 위치나 판의 크기가 조금씩 다 틀렸는데, 현대 갑옷계에서는 프레스나 NCT로 대량생산이 가능하며 구멍의 위치와 판의 크기를 100% 다 맞출 수 있다.

플레이트 아머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제조했다.(15세기 기준)

  1. 탄소강판을 달궜다가 공기중에서 천천히 식혀(풀림가공) 연하게 만든다.
  2. 준비된 옷본(Super Sheet)를 대고 철판에 철필로 자를 선과 뚫을 부분을 표시.
  3. 표시된 대로 자르고 정으로 구멍을 뚫은 후 구멍의 찌꺼기(Burr)를 다듬는다.
  4. 곡면가공을 개시한다. 매우 다양한 금형과 목형, 망치들을 사용한다.
  5. 대략적인 형태가 잡히면 세부 가공에 들어간다.(Plain Edgeing 등...)
  6. 재열처리를 개시하여 갑옷을 다시 튼튼하게 만든다.
  7. 표면 연마를 개시한다. 이 과정에서 단조 자국이나 열처리로 인한 산화피막 등 제조 과정의 흠이 소멸.
  8. 연결부에 경첩이나 버클, 가죽벨트 등을 리벳으로 연결.
  9. 출고.

프랑스의 현대 갑주사의 유튜브 채널. 플레이트 아머의 제조 과정을 현대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4. 서양 갑옷의 착용주체[편집]


바다 민족의 침공 이전의 미노스 문명, 미케네 문명 등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 갑옷은 일부 영웅들에게나 소지가 가능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일반 보병들은 8자 형태의 전신을 가리는 가죽 방패[11]를 사용하였다는 것이 확인되나, 갑옷을 착용했다는 것을 실증할 수 없다.

바다 민족의 침공 이후 암흑시대를 거쳐 재건된 그리스 문명은 과거와 같은 영웅시대가 아니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군복무를 하는 방식이었으며, 시민들은 자기 돈으로 갑옷과 무기를 마련해야만 했다. 이것은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하나의 동일한 문화였는데, 초창기의 왕정, 공화정 말기까지의 로마 제국도 마찬가지였다. 무장을 갖출 수 있는 재력을 바탕으로 시민병이 편제되었으며, 가장 비싼 기병은 귀족들이 맡고, 무장을 갖출 수 있는 수준에 따라 제1클라시스(Clasess)에서 제5클라시스까지 편제가 나뉘어졌으며, 11000아스 이하의 재력을 가진 무산자(proletarius)와 외국인, 여자, 노인과 아이들은 군역이 면제되었다.

공화정에 들어 이루어진 군제 개혁 이후로도 이러한 전통은 유지되었으며 젋고 가난한 병사들은 사각형의 흉판만을 입고 투창과 방패로 무장한 하스타티(Hastati), 비교적 나이를 먹고 재산이 안정된 중장년층은 로리카 하마타와 투구를 착용하고 투창, 방패, 검으로 무장한 프린키페스(principes), 최고참들은 프린키페스와 무장은 같되 투창 대신 장창으로 무장한 트리아리이(triarii)로 나뉘어졌다.

공화정 말기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에 의해 혁신된 군사 제도에 의해 시민병 체제가 사라지고 직업군인 체제로 개편되었는데 현실적으로 대농장의 경영과 지주에 의한 자본 집중, 무산자 계급의 확산으로 과거의 군사편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개혁된 것이었다. 이 시기에는 누구든 자유롭게 입대할 수 있었으며, 무기와 갑옷은 더이상 사가는 것이 아니라 국영 무기공장에서 생산하여 지급하는 것이었다. 물론 무기와 갑옷값은 월급에서 떼였다.

로마 멸망 이후 동로마 제국에서는 징집병과 테마(군관구)의 둔전병은 스스로 무기와 갑옷을 마련해서 정기적으로 점호를 받아야만 했다. 타그마타(중앙군)은 무장을 지급받을 수 있었으며 직업 군인들로 이루어져 강력한 전투력을 자랑하였다.

서유럽을 장악한 게르만계 민족들은 자유민 징집 체제였으며 일반 자유민 징집병(Fyrd)은 무장을 겨우 마련할 뿐 갑옷과 같은 중장비는 마련할 수 없었다. 갑옷과 투구까지 마련할 수 있는 것은 정예 병력이자 재산을 가진 테인(Thegn) 정도였는데, 이들도 갑옷까지 다 갖춘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귀족(Edelmaenner)과 왕의 궁정에서 숙식하는 본격 직업군인인 후스칼(Huscarl)정도가 갑옷을 모두 갖추고 있는 정도였다.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는 비싼 기병을 편제하기 위해 최초로 봉건제와 기사를 편성했는데, 이들은 물론 갑옷을 갖추고 있었다. 체인 메일로 유명한 바이킹전사들도 갑옷을 갖춘 것은 왕이나 귀족, 부유한 전사 정도였으며, 전장에서 노획한 갑옷을 입는 경우도 있었다. 실전에서는 배에서는 갑옷을 입었지만, 내리면 무겁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오히려 갑옷을 벗고 출진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봉건제가 정착된 서유럽에서는 철갑옷을 착용할 수 있는 것은 재력이 있는 도시민 징집병(Sergent), 직업군인인 맨엣암즈(Man-at-Arms), 봉건제 하의 기사들, 용병들 정도였다. 도시민 징집병은 서전트라고 불리며 군역 의무를 졌으며, 기사들보다는 갑옷 착용 수준이 덜했으며 기사들에게는 신뢰받지 못하는 병력으로 주로 후방 근무를 맡았고 돈을 내고 병역을 면제받는 일도 많았다. 맨앳암즈는 기사와 동일하거나 그에 준하는 무장을 갖추었으며 기사처럼 중장기병, 중장보병 만능으로 활약하였다. 용병들은 그 수준의 차이가 천차만별이라 개인 사정에 따라 갬비슨같은 누비갑옷을 입는가 하면 드물게 기사에 준하는 수준의 무장을 갖춘 경우도 있었다. 갬비슨은 평범한 농민들도 충분히 갖출 수 있는 갑옷으로써 중세시대에는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축에 속했다.

근세 시대에 들어서는 갑옷 제조기술의 발전으로 강철갑옷의 착용자가 크게 늘어나게 되며, 봉건적 기사에서 기병으로 개념이 옯겨가고, 대규모의 용병들이 전쟁에 크게 참여하면서 갑옷 수요층도 늘게 된다. 16세기에 들어서 기병은 전통적인 랜스 중장기병인 젱다르메/랜서(Lancer), 랜서와 임무영역은 동일하되 정강이받이를 제외하고 개방형 투구를 착용하기도 하는 데미랜서(Demi-lancer), 경장비를 착용한 라이트 호스(light horse:영국 한정), 랜스차징보다는 권총을 장비하고 기동전을 벌이는 아르셰(Arche)[12]등 갑옷 착용의 범위와 수준도 종류에 따라 다양했다.

보병은 지휘관이나 중장 파이크병(Corselet)이 갑옷을 착용하였으며, 굳이 코르셀렛이 아니더라도 흉갑이나 투구 정도를 착용한 창병들도 많았다. 총병은 갑옷을 입지 않았다. 16세기 중후반 이후에는 데미랜서 수준의 무장에 랜스 대신 권총으로 사격하며 싸우는 퀴레시어와 카빈총을 사용하는 아르케버시어로 나뉘게 되며, 이들은 모두 갑옷을 착용하였으나 대다수의 아르케버시어는 철갑옷 대신 버프 코트만으로 끝내는 경우가 많았다. 러시아폴란드에서는 중산층이 기병으로 징집되었으며 이들을 셰프니케/판세르니(Pancerni)라고 불렀고, 체인메일 코트와 중동에서 유래한 사슬 투구를 착용하였고 짧은 기병창과 활 또는 화승총으로 전투하였으며 서유럽의 아르케버시어와 비슷한 위치를 차지했다. 폴란드에서는 데미랜서 수준의 무장을 갖추고 6m를 넘는 거대한 랜스를 사용하는 후싸르 기병이 있었는데 파이크 전열과 정면으로 싸워 격파할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18~19세기에는 오직 퀴레시어 흉갑기병만이 갑옷을 착용했다.


5. 현대의 갑옷 경향[편집]


현대에도 서양 갑옷이 생산되며 활발히 판매되고는 있고 실전용은 아니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

갑옷이 실전에서 물러난 뒤에는 박물관 등지에서 실제 유물의 손상을 우려하거나, 개인이 복제품을 소장하려는 여러 이유로 전시용 복제품을 필요로 할 때 소량 생산되는 정도였다. 리인액트와 같은 민간 취미가 활성화되기 이전에 신규 생산된 갑옷은 거의 다 이런 용도였다. 보여주기용이므로 재현 수준은 뛰어나지만 방어력이나 내구성은 낮은 편인 것들이 많은데, 가공의 편의성을 위해 연한 마일드 스틸(연철)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13]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며, 종목을 불문하고 현대 아머러 거의 모두가 마일드 스틸을 사용하여 갑옷을 만든다. 그러다 보니 중세 규격의 두께로는 중세 갑옷 수준의 방어력을 낼 수가 없기 때문에 장식용이나 코스튬용이 아닌 SCA나 Live Steel과 같은 실제 치고받는 용도에는 2mm 이상의 매우 두꺼운 두께의 마일드 스틸을 사용한다. 이 정도가 되어야 실제 몽둥이와 날 없는 진검으로 치고받는 과격한 싸움에서 착용자를 보호해 줄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도 부족하다는 [14] 의견에 따라 현대에는 마일드 스틸을 넘어 수압 프레스로 제조하고 용접해서 만드는 12 gauge(2.65mm) 두께의 스테인리스 스틸 제품들이 판매되기도 한다. 당연히 매우 무겁다. 역사적인 Armet투구가 2~3kg 정도인데, 이런 방식으로 나온 투구는 6kg를 가볍게 넘길 정도. 게다가 보호를 위해 역사적 디자인에 추가적인 방어책을 덧대다 보니 고증은 안드로메다로 보내는 경우가 흔하다.

물론 중세 수준의 무게와 방어력을 요구하는 수요가 있었으며 이들을 위해 나온 것이 스프링 스틸 아머였다. 탄성을 가진 스프링 강판을 단조해서 갑옷으로 형성한 것인데 가공이 미친 듯이 어렵다 보니 두께는 0.98mm 정도가 한계였고 [15] 가격은 마일드 스틸 갑옷보다 2배 가까이 비쌌다. 때문에 수요가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중세시대의 열처리를 수행하면 완벽한 강도를 얻을 수 있었지만, 중세시대의 제작기술은 다 끊어진 상태에서 문헌과 실제 작업, 기술 교류로 재창조해낸 것이나 다름없는 터라 얇은 철판을 적당하게 열처리하는 노하우를 가지고 있을 턱이 없었다. [16] 대다수의 아머러들도 굳이 이런 리스크를 감수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별다른 발전이 없었다.

2008년까지만 해도 이런 처지가 대세였지만, 2009년부터는 중세시대의 합리적인 무게와 방어력까지 재현하고자 하는 수요층도 늘어남에 따라 일부 아머리에서는 전통적인 냉단 열처리법을 재현해냈으며, 강도를 흉내내기 위한 침탄 열처리를 수행하는 곳도 있었다.

현대의 갑옷 생산자는 맞춤 생산을 주로 하는 소규모의 아머러들과 원사이즈로 대량생산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들로 나뉘는데, 퀄리티와 품질은 전자가 압도적으로 높지만 생산 속도가 느리고 [17] 가격이 비싸다. 대량생산 업체는 주로 리인액터를 대상으로 하여 생산이 용이한 코스튬용 갑옷을 주로 내놓는 편이었으나, 2008년부터 인도의 GDFB라는 업체가 SCA와 같은 실사용 유저를 겨냥한 양산형 갑옷들을 내놓기도 했다.


6. 미디어[편집]




  • 토탈 워: 로마2 : 고대 로마 초기의 로리카 하마타부터 전성기의 로리카 세그멘타타까지 볼 수 있다.



  • 토탈 워 사가: 트로이 : 미케네 문명의 유물과 일리아스의 묘사대로 고급 병종들은 청동 판금 갑옷과 뼈 투구, 소가죽이나 청동 방패를 사용한다. 중급 병종들은 가죽 갑옷정도만 사용하며 일반인 징집병들은 갑옷이 없다.


7. 관련 항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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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동은 철보다 비중이 높아 더 무겁다.[2] 흔히 사용하는 스파르타라는 명칭은 스파르타의 지배층만이 거주하던 수도의 이름이고 스파르타의 정식 국명은 '라케다이몬'이었다. 방패에 그려진 람다(Λ)는 라케다이몬의 이니셜.[3] 물론 단순 경량화는 아니고, 창의 길이를 기존의 2m 가량에서 3~3.5m 가량으로 늘려 근접전을 방지하려는 시도였다.[4] 탄소가 함유된 강철과 대비되는 것.[5] 이설로 몸통은 라멜러인 클리바니온으로 보호하고, 남은 부분을 메일 토시나, 메일을 덧댄 스커트로 메꿨다는 견해도 있다.[6] 동로마 제국의 경제사정이 꾸준히 악화되었으므로 비싼 로리카 라메라를 소지하도록 하는 데 큰 경제적 부담이 되어서 전환했다는 설과, 긴 창과 방패를 가지고 밀집대형으로 싸우므로 중장 갑옷이 큰 의미가 없고 무겁기만 해서 전환했다는 설이 있다. 기타 라멜라를 입도록 기술한 것(레오 6세의 탁티카)은 FM이고, 그냥 패딩아머만 입는 것은(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의 프리아셉타 밀리타리아) 현실 반영이라는 설도 있다.[7] 당시의 흑색 화약은 폭발시 매우 빨리 연소하므로 집중적인 힘이 단시간에만 작용하여 결과적으로 총탄의 속도가 느렸다. 따라서 무거운 총알의 질량으로 위력을 보충해야 했으므로 기본 11mm정도로 구경이 매우 컸으며, 납은 금속 중에서 비중이 높으므로 총알에 쓰인 것이다. 물론 쉽게 변형되어 상처를 심하게 내는 것과, 녹는점이 낮아 쉽게 녹여서 총알을 만들어 쓸 수 있다는 것도 이유가 되었다. 그에 비해 청동탄은 가공이 어렵기도 했지만, 탄체 변형이 적으므로 운동에너지가 집중되어 갑옷은 관통할 수 있었으나 반대로 신체에 상처를 입히는 부위가 적어 일격에 제압하지 못하거나 부상이 깊지 않아 치료를 받아 살아날 확률이 높았으므로 납 이외의 재질은 잘 쓰이지 않았다.[8] 여성용 의류인 코르셋이 바로 이 코르셀렛에서 유래한 단어이다.[9] 아밍 더블렛 좀 입는다고 피해를 줄여줄 만한 수준의 위력이 아니었으며, 그럴 바에는 철판을 두껍게 하는 것이 맞는 선택이었다. 또 당시의 평상복이라고 해도 셔츠 한장 수준이 아니라 여러 옷을 입는 정도였으므로 어느 정도의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보아야 한다.[10] 첫째 이유는 갑옷의 가격이 비싸서였지만, 암 하네스도 실전에서 효과가 별로 없다면서 빼고 나가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암 하네스는 방탄능력이 없었으므로 피탄시 별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며, 매우 무거워지기 때문에 잘 선호하지 않았다고 한다. 퀴레시어 아머의 풀 슈트라고 해도 방탄능력이 있는 부분은 흉갑과 투구 정도였다.[11] 일리아스에서는 소가죽 방패를 사용했다고 한다.[12] 프랑스에서 경기병을 부르던 말. 뜻은 궁수(Archer)이다.[13] 마일드 스틸은 탄소 함유량 0.2% 이하의 저탄소강을 의미한다. 사실상 보통 철(Iron)과 비교해도 별반 나을 것이 없는 종류. 충격에 매우 약해서 쉽게 변형되기 때문에 가공성은 좋아서 현대 아머러들이 주로 사용하는 재질이다. 양덕후들이 롱보우vs갑옷 실험을 해보고서는 관통 인증샷을 올리는 경우가 매우 많은데 사실 그 갑옷들 대부분이 매우 얇거나(1.2mm 이하) 거의 다 마일드 스틸 제라 의미가 없었다.[14] SCA나 Live Steel사진을 보면 2mm 정도의 두꺼운 갑옷과 투구인데도 칼이나 도끼에 맞아 눈에 띄게 손상된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15] 집안에다 중세식 망치와 금형 정도만 준비해놓은 가내수공업 수준의 아머러들에게 그 이상의 스프링 스틸은 도저히 건드릴 수 없는 강도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달궈서 가공하면 열풀림이 발생해 스프링 탄성이 소멸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열단법도 사용할 수 없었다. 0.98mm도 두꺼운 편이고 0.5mm 정도의 두께도 흔하다.[16] 얇은 철판은 고열을 가하기만 하면 마른오징어처럼 쪼그라들거나 퍽 주저앉아 버린다.[17] 풀 슈트를 주문하면 1년 뒤에나 받는다. 업자 사정에 따라 몇 개월 후에나 제작을 시작하는 경우는 비일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