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성 이론/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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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발단
3. 가상의 매질 에테르
4.1. 실험과 빛의 매질의 관계
4.2. "에테르는 없다."
5.1. 광속 불변의 원리
5.2. 상대성 원리
5.5. 민코프스키의 시공간(1908)
6.1. 기초 형성(1907 - 1915)
6.1.2. 빛의 굴절(1911)
6.1.3. 경쟁 이론들(1911-1913)
6.1.4. 정적 중력장 이론(1912)
6.1.5. Entwurf 이론(1913 - 1915)
6.2. 초기 발전(1916 - 1925)
6.2.2. 슈바르츠실트 해(1916)
6.2.3. 중력파(1916)
6.2.4. 현대 우주론과 우주상수(1917)
6.2.5. 에딩턴의 관측실험(1919)
6.3. 과도기(1925~1950s)
6.4. 황금기(1955~)
7. 여담


1. 개요[편집]


상대성 이론의 발단부터 발전 과정을 다루는 문서이다.

상대성 이론의 첫 삽은 맥스웰이 떴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아인슈타인 전에도 이미 헨드릭 안톤 로런츠(Hendrik Antoon Lorentz[1])의 로런츠 변환식에서 광속 불변성과 기존 뉴턴 역학의 결함을 암시한 바 있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원리를 명시하고 전자기 현상에 적용되던 로렌츠 변환식을 역학 범위로 확장해석하면서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였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등가원리를 바탕으로 1915년 상대론적으로 중력을 다루는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였으며, 영국의 천문학자 에딩턴은 중력 렌즈 효과 관찰로 그의 이론을 증명하였다.

2. 발단[편집]


특수 상대성 이론 주요 기여자


헨드릭 로런츠
Hendrik A. Lorentz
앙리 푸앵카레
Henri Poincaré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헤르만 민코프스키
Hermann Minkowski
달랑베르디드로가 쓴 백과전서에서 시간을 4번째 차원으로 다루는 시공간의 개념이 처음 나타났다. 당대에는 알지 못했지만 달랑베르의 파동방정식 또한 동시성의 상대성을 비롯한 상대성이론을 내포한 개념이었다.[2]

상대성 이론의 출발점은 19세기 전자기학과 뉴턴 역학의 충돌 문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복잡한 설명은 전부 빼고 설명하자면 19세기의 저명한 과학자 맥스웰의 전자기력(Electromagnetism) 방정식 중에 뉴턴 역학에 위배되는 공식이 발견된 것이다.

빛의 속도가 대표적인 예이다. 뉴턴 역학(Newton Mechanics)의 기본 중 하나인 갈릴레이의 상대성 원리에 따르면 속도 덧셈 공식으로 <math>V=u+v</math>[3]가 성립해야 한다. 그런데 맥스웰 방정식은 위 공식이 성립하지 않았다. 맥스웰 방정식에 따르면 전자기파의 전파속력은 기준계(frame of reference)에 관계 없이 언제나 일정하게 나타났다. 가령 한 기준 좌표 O에서 광속이 초속 30만km로 나타난다 하고, O가 다른 좌표계 O'에 대해 초속 1000 km로 움직인다고 가정하면, 원래 O'에서 본 빛의 속도는 초속 30만 1000 km가 나와야 한다. 그런데 맥스웰 방정식의 도출 결과는 O' 역시 초속 30만 km라는 것.

여기서 과학자들은 아래 시나리오를 생각하였다.
  1. 갈릴레이 변환(뉴턴 역학과 들어맞는 변환식)이 맞고 맥스웰 방정식이 틀렸다.
  2. 갈릴레이 변환이 뉴턴 역학에는 적용되지만 맥스웰 방정식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3. 맥스웰 방정식이 맞고 갈릴레이 변환이 틀렸다. 즉 뉴턴 역학이 틀렸다.

2번은 당연히 어떤 과학자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답이었다. 애초에 물리법칙이란 일부 현상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모든 현상을 아우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기 때문. 더구나 두 자연 현상이 서로 다른 법칙에 따라 따로 논다고 가정하는 것 자체가 설득력이 매우 떨어진 것이었다. 결국 1번과 3번이 남는데, 3번 역시 문제가 남게 된다. 지금껏 모든 역학을 포괄해 왔던 뉴턴 역학이 맞지 않다면 대체 무슨 역학이 존재한단 말인가?

많은 과학자들이 1번 시나리오를 지지하였다. 당연히 몇백년 동안 이어온 관념을 바꾼다는 게 힘들었을 것이다. 더욱이 지금까지 한번도 틀린 적이 없었던 관념이었으므로.[4] 과학자들은 아울러 "맥스웰 방정식 속에 미세한 오류가 있으나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일 뿐"이라는 추측을 하였다. 예를 들자면 빛의 속도는 수시로 변할 수 있는 데, 지구상에서 우리는 30만 km/s에서 ±100km/s 정도의 변화 폭을 인지하지 못 했던 것이라는 식이다.


3. 가상의 매질 에테르[편집]


한편 빛이 파동이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여기서 빛의 매질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떠오르게 된다. 과학자들은 이 가상의 매질을 에테르(aether)라 명명하였다. 전자기학에서 이야기하는 전기장, 자기장 등 모든 전자기 현상은 에테르의 변형을 통해 일어나며, 전자기파는 이러한 에테르의 변형이 파동 형태로 전달된다고 믿었다. 즉 기존의 역학적 파동과 비슷한 모델을 세운 셈이다. 또한 관측자 기준틀이 에테르에 대해 움직이고 있다면 전자기 현상이 달라질 것이라 생각하였다. 단지 우리는 그러한 전자기 현상의 변화(혹은 맥스웰 방정식에 숨은 오차)가 일상생활에서 매우 작아 여태 인지하지 못했을 뿐.

그런데 "에테르가 존재할 것이다"는 추측에 그칠 것이 아니라, 실험으로써 밝혀내어 "존재한다"로 굳힐 필요성이 생겼다. 과학이 언제나 그렇듯이 실험으로 검증해야 설득력이 확고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학적 파동의 매질과는 달리 에테르는 외관상 확인할 길이 전혀 없었다.[5] 그 와중에 광학적 간섭계를 이용하여 에테르의 존재 여부를 밝히기 위한 실험이 행해졌다. 바로 마이컬슨-몰리 실험(Michelson-Morley experiment)이다.


4. 마이컬슨-몰리 실험(1887)[편집]


마이컬슨-몰리 실험은 물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실험이다. 사실 위 발단 단락에서 언급한 1번 시나리오를 지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기보다는 광학적 에테르의 존재 여부를 밝히기 위한 실험이었다. 즉, 빛은 파동이기 때문에 이를 전달하는 매질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이 매질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 실험이었으며, 당시 존재가 실험적으로 증명되지도 않은 이 매질에 에테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실험은 한 광원에서 나온 빛을 반거울로 x,y 축으로 나누어 다시 되돌아오는 시간을 측정하는 장치였다. 에테르가 존재한다면 에테르가 가득 찬 우주 속을 질주하고 있는 지구 위에서 에테르 바람을 맞을 것이며, 실험 장치에는 당연히 빛의 속도가 미세하게 변화하고 시간차가 발생할 것이었다. 빛의 이동거리는 에테르 바람으로 인해 이동 방향에 따라 이론적으로 분명히 차이가 나야한다. (x,y 축으로 나눈 이유가 이것이다.) 그리고 에테르와 실험장치 간의 상대적 운동 방향이 달라진다면 이 시간차(즉 파동의 위상차) 역시 달라질 것이었다. 따라서 지구 공전방향이 달라질 충분히 긴 시간을 두고 실험이 진행되었다.


4.1. 실험과 빛의 매질의 관계[편집]


갈릴레이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어떤 관성 좌표계에서도 물리법칙은 동등하게 적용된다. 즉 대칭성이 적용된다. 즉 기준이 될 만한 대상이 존재하지 않으면 어떤 물체의 고유한 속도를 이야기할 수 없다. 가령 우주공간에서 누군가 움직이고 있다면 우리는 이런 해석을 할 수 있다.
  1. 저 친구가 등속으로 나를 지나치고 나는 가만히 있다.
  2. 저 친구는 가만히 있고 내가 등속으로 움직이고 있다.
  3. 둘 다 움직이고 있다.
이 3개의 해석 중 어느 것이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는지 물리 법칙이든 뭐든 어떻게든 알 수 없다는게 바로 기준틀(reference frame)의 동등성이다.

그런데 파동[6]을 이야기할 때, 파동의 매질이 있다면 파원(source)과 관측자(observer)의 매질에 대한 상대속도를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매질에 대한 상대속도가 도플러 효과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실제로 등속운동을 하는 물체일지라도 매질에 대한 상대속도에 따라 파동의 진동수가 미묘하게 달라진다. 다시 말해 우주 공간에서 등속 운동을 하고 있으면 내가 움직이는지 상대가 움직이는지 알 수 없지만 주변이 공기로 둘러싸여 있고 소리를 내며 움직이면 내가(매질인 공기에 대해) 움직이는지 상대가 움직이는지 알 수 있다![7]

다시 빛으로 돌아가 보자. 만약 빛의 매질이 있다면 위에서 살펴본 역학적 파동과 같이 에테르에 대한 실험 장치(간섭계)의 상대속도가 지구의 공전에 따라 달라질 것이고, 결국 이 변화가 간섭계의 간섭 무늬가 달라질 것이란 결론이 나온다. 만약 이 간섭 무늬가 같다면? 매질의 존재가 부정된다.


4.2. "에테르는 없다."[편집]


하지만 이 실험에서 빛이 간섭무늬 장치에 동일하게 도달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간섭계의 간섭무늬가 지구의 공전방향에 관계없이 같은 무늬로 나온 것이다. 결국 빛의 매질은 없다는 것이 마이컬슨-몰리 실험에서 밝혀졌다. 또한 이 실험을 계기로 빛의 속도는 어떻게 측정하나 일정하다는 결론도 딸려나온다. 이로써 이 실험은 에테르 가설을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는 한편, "뉴턴역학이 옳고 맥스웰 방정식에는 오류가 숨어있다"는 주장을 더 멀리 날려버렸다. 만일 여러분이 이 결과를 마주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실패한 실험 결과에 대해 로런츠는 에테르에 평행한 운동 방향으로 길이 수축이 일어나 에테르 바람의 효과가 측정되지 않는다는 설명을 내놓는다. 이 길이 수축 효과가 바로 당시 물리학자들을 혼란에 빠뜨린 로런츠 변환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로런츠 변환을 이용한 설명에 회의적이었다. 우선 수식으로써 로런츠 변환을 적용한다면 이론상 풀릴지는 몰라도, 그것이 과학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로런츠의 설명은 결국 로런츠 변환식 자체에서 끝나게 된다.

그러다가 20세기가 되어서 창의적인 사고실험으로 상대성 이론을 제시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나타났다. 한 명의 인류의 머릿속으로부터 현대물리가 태동하게 되는, 인류 최고의 지성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8]


4.3. 로런츠-피츠제럴드 수축(1889,1892)[편집]


로런츠 변환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면
파일:595px-Michelson-morley_calculations.svg.png
상쇄간섭이 관찰되지 않은 이유가 빛이 동시에 도달했기 때문이라고 가정했으며 빛이 동시에 도달하기 위해 가로방향의 길이가 줄어들었다는 것이 바로 로런츠-피츠제럴드 수축이다. 로런츠는 여기서 로런츠 변환을 만들었다.


5. 특수 상대성 이론(1905)[편집]



Zur Elektrodynamik bewegter Körper(1905)

현 시점에서 이해되는 맥스웰의 전기동역학(Electrodynamics)이 움직이는 물체에 적용되면 현상에 내재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 비대칭이 발생한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자석과 도체의 전기동역학적 상호작용을 떠올려보자. 여기에서 관측가능한 현상은 오로지 도체와 자석의 상대적 움직임에만 의존한다. 그러나, 관습적 이해로는 두 물체 중 어느 하나, 혹은 다른 하나가 움직이는 두 가지 상황이 확연하게 구분된다. 자석이 움직이고 도체가 정지해 있는 상황에서, 자석 주변에는 특정 에너지 값을 갖는 전기장이 발생하여 도체의 일부가 위치한 곳에 전류가 발생한다. 하지만 자석이 정지해 있고 도체가 움직이는 경우, 자석 주위에 전기장은 발생하지 않는 대신 도체 내부에 어느 에너지에 대응되지 않는 기전력(electromotive force)이 발생한다. 그러나, 두 상황에서 상대적인 움직임이 동일하다면 첫번째 상황에서 전기력에 의해 발생한 것과 동일한 크기, 동일한 과정의 전류가 발생하게 된다.

이와 비슷한 예시들과, "빛의 매질"에 대한 지구의 상대적 움직임을 검출하려는 시도들이 모두 실패한 것을 통해 역학에서뿐만 아니라, 전기동역학에서도 절대 정지(absolute rest)의 개념에 대응되는 일체의 성질을 갖는 현상은 존재하지 않으며, 역학 방정식이 유효한 모든 좌표계에서 동일한 전기동역학과 광학 법칙이 성립할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이는 이미 일차항 수준에서는 증명된 사실이다. 우리는 이 가정(앞으로 상대성 원리라고 부를 것이다.)을 가설로 설정하고, 이에 더하여, 겉보기에 전자와 양립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진공에서 빛이 광원의 운동상태에 관계 없이 언제나 정해진 속도 [math(V)]로 전파된다는 가설을 도입하기로 한다. 이 두 가설은 정지하는 물체에 관한 맥스웰 이론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물체에 관한 간단하고 일관적인 전기동역학에 도달하는 데 충분하다. "에테르"의 도입은 불필요한 것으로 밝혀질 것이며, 이는 이곳에서 시도하려는 개념인 <특별한 성질을 갖는 "절대 정지한 공간"이 도입되지 않을 것이며 전자기 과정이 일어나는 빈 공간의 각 점에 속도 벡터 또한 부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데서 비롯된다.

아인슈타인,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동역학에 대하여"(Zur Elektrodynamik bewegter Körper), 1905[9]


베른의 특허청에서 근무하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광전효과와 브라운 운동에 대한 논문을 제출한 직후) 1905년 6월 30일 물리학 연보(Annalen der Physik)에 그간 논란되던 전기동역학을 "상대성 원리"와 "광속 불변의 원리"라는 두 가지 가정을 통해 재정립하는 30쪽짜리 논문을 제출하였다. 이 논문은 뜨거운 화두였던 로런츠 변환도 어렵지 않게 유도하며, 무엇보다 상대성 원리를 통해 에테르 가설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었다. 이 이론은, 당대의 저명한 물리학자인 막스 플랑크의 주목을 받아 단번에 유명해졌다. 이는 지금의 특수 상대성 이론을 다루는 첫 논문이다.

5.1. 광속 불변의 원리[편집]


광속이 언제나 일정하다는 단서는 원래 맥스웰 방정식에서 도출되는 파동방정식에 있었다. 빛의 정체는 전자기파이고, 전자기파의 진행속도는 어느 좌표계에서 보나 초속 30만km로 동일하다는 (당시로서는) 기상천외한 결과가 나온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매우 당황스러운 현상이었으나, 아인슈타인은 이를 과감하게 원리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특수 상대성 이론은 이 원리와 기존의 뉴턴역학(특히 갈릴레이의 상대성 원리), 그리고 전자기학을 상대적 시간, 상대적 공간 등 새로운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고전물리학의 결함을 바로잡게 된다.


5.2. 상대성 원리[편집]


광속 불변성은 로런츠 변환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역학을 예고했지만, 그럼에도 에테르에 대한 표현을 완전히 배제하는 이론은 좀처럼 등장하지 않았다. 로런츠의 이론 역시 에테르에 대한 정지계의 개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푸앵카레는 에테르에 대한 가정이 불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상대성 원리를 재발견하는 취지의 언급을 한 바 있으며,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이론(1905)은 공식적으로 상대성 원리를 새 역학의 가장 중요한 원리로 취급한다. 상대성 원리에 의하면 모든 관성계는 물리적으로 동등하므로 특정 속도를 갖는 에테르란 개념은 유지될 수 없다. 이로써 에테르 가설은 완전히 사라졌고, 상대성 원리는 이론을 매우 단순간결하게 전개할 수 있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플랑크의 공개적 지지 이후 많은 물리학자들의 관심을 받았다. 이후,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상대성 원리의 이름을 따 "상대성 이론(Relativitätstheorie)"이라 불리게 된다.

5.3. 시간 지연길이 수축[편집]


로런츠가 로런츠 변환을 제안하여 광속 불변 문제와 마이컬슨-몰리 실험의 모순을 수식을 통해 해결한 바 있다. 사실 시간 지연과 길이 수축 현상은 로런츠와 피츠제럴드의 설명으로 등장하였는데, 이것의 물리적 의미를 해석해내지는 못하였다. 그러던 것을 아인슈타인이 앞서 언급한 고전물리학과 광속 불변의 원리로써 여러 현상을 설명하게 된다.

시간 지연 현상은 1941년 로시와 홀이 우주방사선에 있는 뮤온의 양을 측정하면서 처음으로 증명된다. 길이 수축 현상은 1938년 아이브스-스틸웰 실험을 통해 확인된다.


5.4. 질량-에너지 동등성(1905)[편집]


질량과 에너지의 정체는 같다는 이 원리는 보통 특수상대론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실제로 아인슈타인은 관련 논문을 3개월 늦게 발표하였다.

질량-에너지 동등성은 질량이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고, 에너지가 질량으로 돌아올 수 있음을 말한다. 대표적인 현상이 핵분열핵융합, 그리고 쌍생성-쌍소멸이다. 1932년 콕크로프트와 월턴이 핵반응에서 나온 입자들의 에너지가 전체 질랑변화와 같다는 것을 보이면서 질량-에너지 동등성이 성립함을 증명한다.


5.5. 민코프스키의 시공간(1908)[편집]


상대성 이론의 역사에서 수학자 헤르만 민코프스키(Hermann Minkowski)의 기여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그의 발견은 상대성이론의 기하학적 이해, 일반상대성이론의 수학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초석을 마련했다.

민코프스키가 발견한 것은 시공간의 계량(metric) 구조, 쉽게 말하자면 기하학적 구조이다. 간단하게 언급하면
좌표공간에서 두 점 사이의 거리는 피타고라스 정리에 따라

[math(d^2=x^2 + y^2 + z^2)]

이라는 공식으로 구할 수 있는데, 이러한 표현은 직교좌표계 사이의 회전변환에 대해 불변이다. 한편 4차원 시간-공간에서는

[math(d^2=c^2dt^2 - dx^2 - dy^2 - dz^2)]

라는 식이 로렌츠 불변이었다. 그렇다면 시공간에서 관성계는 직교좌표계에 해당하고, 로렌츠 변환은 회전변환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math(d^2)]은 바로 시공간 위 두 점 사이의 거리의 제곱이 된다! 이것을 시공간 간격(spacetime interval)이라고 한다. (두 점 사이의 관계에 따라 음수, 양수, 또는 0이 되므로 부호는 필요에 따라 바꿔줘야 한다.) 민코프스키는 이런 사유과정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합쳐서 진정 고유의 기하학이 존재하는 하나의 4차원 공간인 "시공간"으로 다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이용하면 물리법칙은 모두 로렌츠 불변이므로, 이따가 다시 등장하는 좌표계와 무관한 기하학적 양들, 즉 텐서들을 물리법칙에 대응시킬 수 있다. 가장 간단한 예로, 아까 로렌츠 불변이라고 말한 고유 시간은 특정 경로를 잘게 쪼갠 다음, 각 구간에서 두 점 사이의 ‘시공간 간격’의 제곱근(거리 제곱이었으니까)을 모두 더한 것이다. 물체가 [math((0, 0) => (t, tv))]로 직선 상을 운동했다면 고유시간은 [math(\sqrt{c^2t^2-t^2v^2}=c\sqrt{1-\biggl(\dfrac{v}{c}\biggr)^2}t)]가 된다. 시간 단위로 맞추고 싶으면 c로 나누면 된다. 두 점 사이의 거리는 두 점을 잇는 벡터의 크기이기도 하며 당연히 좌표계에 무관한 양이 될 것이다.

이외에 (중력을 제외한) 물질들의 질량, 에너지, 압력 등을 모두 집어넣은 스트레스-에너지 텐서, 전기장과 자기장을 합친 패러데이 텐서 등도 민코프스키의 기초작업에 의해 함께 도입되었다. 결국 나중에 가서는 일반상대론으로 넘어가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하게 되지만, 아인슈타인은 아직 이것들을 다룰 수 있는 수학을 배우지 못한 상태였다. 또한, 일반상대론에서는 좌표변환이 완전히 자유롭지만, 특수상대론에서는 로렌츠변환만 허용되므로 이 때 도입된 텐서들은 관성계에 한정된 꼴이다.


5.6. 아이브스-스틸웰 실험(1938)[편집]


상대론적 도플러 효과를 검증한 실험. 아이브스-스틸웰 실험을 통해 로런츠-피츠제럴드 수축을 유도할 수 있다.

5.7. 하펠-키팅 실험(1971)[편집]


두 제트기에 원자 시계를 싣고 지구를 돌아 시간 지연 현상을 검증한 실험.


6. 일반 상대성 이론(1915)[편집]


일반 상대성 이론은 중력을 설명하는 현대의 물리학 이론이다. 일반 상대성 이론 이전에는 뉴턴의 중력 법칙(1686)이 있었다. 잘 알려진 역제곱 법칙

[math(\displaystyle F = G\frac{m_1m_2}{r^2})]
[1] Lorentz. Ludvig Lorenz라는 과학자와 다르게 이 로렌츠는 t가 있는 로런츠다.[2] Pagano, A., & Pagano, E. V., Eur. Phys. J. H 44, 321–330 (2019)[3] 이것이 갈릴레이 변환식(Galilean transformation). 실제 상대론적 속도 덧셈은 <math>V=\frac{u+v}{1+uv/c^2}</math>[4] 지구 안에서만 산다면 고전적인 뉴턴 역학을 여전히 사용하더라도 큰 오차는 없다. 다만 인공위성이나 원자시계 혹은 우주 관측이라든지, 무엇보다 을 다룰 때는 무시 못 할 오차가 생기므로 그 경우에는 상대성 이론이 필수적이다.[5] 이를테면 소리는 공기, 수면파는 물/바다, 지진파는 지반 등 역학적 파동의 매질은 쉽게 알 수 있다.[6] 빛 또는 역학적 파동[7] ☞내가 가만히 있다면 공기도 같이 가만히 있어야할 것이다. ☞내가 움직이고 있다면 상대적으로 가만히 있는 공기들은 뒤로 움직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구별이 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모순이 없다.[8] 시간을 단순한 측정값으로 보고 사고실험을 벌인 것이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방법이었다. 상황에 따라 시계가 맞지 않는 것을 보고 대부분의 사람은 당연하게도 시간이 맞고 시계가 잘못 측정했다라고 생각하지 시계가 맞고 시간이 어긋났다라고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사실 아인슈타인은 어릴 적부터 사고방식이 묘하게 4차원이었다고 알려져있다.[9] Zur Elektrodynamik bewegter Korper, in Annalen der Physik, Vierte Folge, Volume 17, part 10, pp. 891-921


은 케플러의 법칙에서 유도되었다고 하며, 태양계 내에서 뛰어난 정확도를 보여 200년 넘게 성공적인 중력 모델이 되었다. 영국 수학자 존 애덤스(John Adams)와 프랑스 수학자 르베리에(Le Verrier)는 뉴턴 중력 모델을 기반으로 천왕성의 궤도를 통해 그 외부에 새로운 행성이 있음을 예측하였고, 그 궤도를 수학적으로 계산하였다. 1846년, 그 행성은 실제로 발견되었으며 이 행성이 바로 해왕성이다.
한편 르베리에는 1859년 수성의 근일점이 기존에 알려진 행성 분포, 지구 자전 및 뉴턴 모델로부터 예측되는 것 이상의 세차운동을 보인다는 것을 보고하였다. 알려진 모든 외부 인자를 제거하였을 때 수성은 [math(100)]년에 약 [math(45'')] 만큼의 세차운동을 보이는데, 이는 뉴턴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케플러의 법칙이 말해주듯 뉴턴의 역제곱 중력 법칙에 따르면 공전 궤도는 하나의 타원으로 닫혀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베리에는 이미 천왕성의 궤도로부터 새로운 행성의 존재를 밝혀냈으므로, 수성 또한 그 내부에 새로운 행성이 존재한다고 설명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다. 르베리에는 수학적으로 예측되는 가상의 행성을 도입하여 벌컨(Vulcan)이라 불렀다. 벌컨을 찾으려는 천문학계의 오랜 노력이 있었으나 그 시도는 실패적이었다.

20세기 초 등장한 상대성 이론은 논리적으로 매우 간결하며 고전 역학과 신 역학(당시의 전자기학)을 통합하는 뛰어난 성과를 보여줬으나 중력을 통합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본격적으로 중력 문제가 연구되기 이전, 로런츠나 푸앵카레는 상대성 이론을 기반으로 수성의 근일점 세차운동 현상을 다시 설명하려는 시도를 하였는데, 이는 불완전하였다.

이후,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노르드스트룀(Gunnar Nordström), 아브라함(Max Abraham) 등은 상대성 이론을 기반으로 새로운 중력이론을 제시하는 데 이른다. 이 때 어떤 이론이 더 정확하느냐의 중요한 기준 중 하나가 바로 수성의 근일점 이동 현상에 대한 설명이었다. 이들이 연구한 이론들을 통틀어 상대론적 중력이론이라고 하며, 일반 상대성 이론은 기본적으로 아인슈타인이 1915년 발표한 중력이론을 지칭한다.

먼저, 뉴턴 중력이 상대론적이지 않은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크게 다음 두 가지이다.

1. 운동 방정식의 문제
중력장에 의한 물체의 운동방정식이 상대론적인 고유 시간이 아닌, 고전적인 시간좌표를 사용한다. 로렌츠 변환[10]에 대해서 고유 시간은 불변(로렌츠 불변)이지만, 시간좌표는 변화한다. 따라서 좌표변환을 하면 방정식의 형태가 변화하며, 특수상대성원리에 위배된다.

2. 중력장 방정식의 문제
이 역시 로렌츠 불변이 아니다. 또한 특수상대론은 국소성(인과율)의 지배를 받는다. 모든 물리적 현상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다른 공간에 전달될 수 없는데, 뉴턴 중력의 장방정식은 중력원의 상태 변화가 "즉시" 주변 중력장을 변화시킨다.

상대성 이론은 이처럼 모든 물리현상이 관여되는 시간/공간을 건드리고 물리법칙에 ‘로렌츠 불변’이라는 일종의 제한을 건다. 따라서 상대론에 맞게 기존의 물리이론들을 수정해야 한다. 상대론적 중력이론도 이러한 과정의 일환이었는데, 상식적으로는 기존에 만들어진 방정식의 몇가지 항을 건드는 방식으로 로렌츠 불변이 되도록 하여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중력 역시 처음에는 모두 이렇게 출발했지만 그런 단순한 방법의 수정으로는 실제 중력 현상을 설명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이후 저마다의 방법으로 중력이론을 발전시켜나갔다.

이런 맥락에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당대 여타 상대론적 중력이론에 비해 특이했던 점은, 중력의 전통적인 개념을 포기하고 중력을 완전 새로운 종류의 물리현상으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얻어낸 중력의 새 개념에 근거해 처음부터 새로 방정식을 만든 다음, 고전적 상황에 근사하여 거꾸로 뉴턴의 중력공식을 얻어냈다.

결과적으로, 실험적으로 가장 지지되는 이론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이었으며 일반상대성이론이 물리학의 새로운 표준 중력이론으로 자리잡았다.


6.1. 기초 형성(1907 - 1915)[편집]



6.1.1. 등가 원리(1907)[편집]


중력을 다른 힘과 구별시키는 가장 중요한 성질은 바로 등가 원리(Equivalence principle)로, 자유낙하하는 물체들이 성상에 관계없이 동일한 가속도로 떨어진다는 것은 뉴턴의 역학이 정립되기 전(16세기)부터 실험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갈릴레이가 피사의 사탑에서 수행했다고 알려져 있는 유명한 실험(일화 혹은 전설) 역시 등가 원리를 설명한다. 등가 원리는 관성 질량과 중력 질량의 등가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으며, 이는 1885년 처음 이뤄진 외트뵈시(Eötvös) 실험에서 정밀하게 검증된 바 있다. 물체의 관성질량과 중력질량을 각각 [math(m_i, m_g)]라 하고 가속도를 [math(a)], 중력 가속도를 [math(g)]라 하면 그 관계는 다음과 같다. 이 때, [math(a)]는 각 물체가 중력장에 의해 갖게 되는 가속도이며, [math(g)]는 중력장이 각각의 물체에 부여하는 효과이다.

[math(m_ia = m_gg)]
[math(\Downarrow)]
[math(m_i = m_g)]
(등가 원리 1)
[math(\Leftrightarrow)]
[math(a = g)]
(등가 원리 2)

초창기 연구 단계(1905~1907)에서 아인슈타인은 다른 이론물리학자와 마찬가지로 뉴턴의 중력장 모델을 그대로 확장한 이론을 구상하려 했다. 그러나 이내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접근이 등가 원리와 잘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고전 역학에서는, 수직 중력장에 의한 수직 가속도는 수평 속도에 독립적이지만, 질량-에너지 등가원리([math(E=mc^2)])에 의하면 물체는 초기속도에 의존하여 관성 질량이 늘어나므로 중력 질량이 그에 맞춰져 같이 늘어나지 않으면 이러한 것이 설명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간극을 자연스럽게 설명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등가 원리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돌파구를 마련하였다. 이는 당시 그가 중력 문제와 함께 상대성 원리를 가속계로 확장하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이것을 기존의 고전적 등가 원리, 즉 약한 등가 원리(Weak Equivalence principle; WEP)와 구분하여 아인슈타인 등가원리(Einstein Equivalence principle; EEP)라 부른다. 1907년에 아인슈타인은 EEP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이는 일반 상대성 이론의 서막을 알리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상대성 원리, 즉 물리법칙들이 좌표계의 운동상태에 독립적이라는 가정을 오직 가속하지 않는 기준계에만 적용해왔다. 상대성 원리가 서로에 대해 가속하는 계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

두 계 [math(\Sigma_1)]과 [math(\Sigma_2)]를 생각하여 [math(\Sigma_1)]는 [math(X)]축 방향으로 가속시키고, [math(\gamma)]를 (순간적으로 상수인) 가속도의 크기라고 하자. [math(\Sigma_2)]는 정지해있으나 균일한 중력장에 놓아 모든 물체들이 [math(X)]축 방향으로 [math(-\gamma)]의 가속도를 갖도록 하자.

현재까지의 경험 속에서 우리는 두 계 [math(\Sigma_1)]과 [math(\Sigma_2)]가 어떤 면에서도 서로 다르다고 할 이유가 없으며, 따라서 앞으로의 논의에서 우리는 중력장과 그에 대응되는 기준계의 가속이 완벽하게 물리적으로 동등하다고 가정할 것이다.

이 가정은 상대성 원리를 일정하게 병진 가속운동하는 기준계로 확장시킨다. 이 가정의 경험적(heuristic)인 가치는, 균일한 중력장을 (이론적 접근이 어느 정도 가능한) 일정하게 가속하는 기준계로 교체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아인슈타인, "상대성 원리와 그로부터 도출되는 결론들에 대하여" V. 상대성 원리와 중력 (1907)[11]


EEP는 역학의 범위에서는 WEP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단순히 다른 표현이지만, 보다 일반적이고 범용성이 넓으며, 특수 상대성 이론의 영역에서는 중력과 시공간의 관계에 대하여 시사하는 바가 커진다. 아인슈타인은 EEP가 상대성 원리의 확장 문제와 중력의 상대론적 기술 문제를 하나로 묶어준다고 생각하였으며, 이 둘은 당시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에 대해 가장 고민하고 있던 두 가지 문제이기도 했다. 당시의 아인슈타인은 등가 원리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1. (가속 ⇒ 중력) 상대성 원리를 확장할 수 있다. 가속계에 놓인 관찰자는 관성계 안에서 중력을 받고 있다고 해도 문제가 전혀 없으므로, 관찰자는 자신의 운동상태를 전혀 알 수 없게 된다. 이 말은 실험적으로 관성계와 가속계를 구분할 수 없다는 말이나 같다. 즉 실험의 결과를 내놓는 주체인 물리법칙은 어떤 운동상태의 좌표계에서도 동일하게 성립해야 한다.

2. (중력 ⇒ 가속) 중력을 특수상대론을 이용해서 간접적으로 다룰 수 있다. 가속계는 특수상대론을 위치별로 다르게 적용해서 다루면 되는데, 관성계에 놓인 중력장은 가속계에서 얻은 결론들을 그대로 갖다쓰면 되기 때문이다.

당시의 발견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12]

내가 (베른에서) "Jahrbuch der Radioaktivität und Elektronik"(잡지)에 제출할 특수 상대성 이론에 대한 포괄적인 요약을 작성하느라 바빴을 때, 동시에 나는 뉴턴의 중력 이론을 특수 상대성 이론에 맞게 수정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방향은 일부 성과가 있었으나 물리적으로 불안정한 가정을 바탕으로 하였기에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 때 나는 다음과 같이 생애 가장 행복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중력장은 전자기 유도에 의해 만들어지는 전기장과 같이 오직 상대적으로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지붕에서 자유낙하하는 관찰자는 떨어지는 동안 (최소한 순간적으로) 중력장을 느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관찰자가 어떤 물체를 놓으면, 물체는 특정 화학적, 물리적 본성에 관계없이 그에 대해 정지나 등속도 운동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따라서, 관찰자는 자신의 상태를 '정지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의 발전과정에서 제시된 근본 발상과 방법" (Fundamental Ideas and Methods of the Theory of Relativity, Presented in Their Development) (1921)


돌파구는 어느날 갑자기 찾아왔다. 나는 베른의 특허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갑자기 한 생각이 나를 스쳤다: 한 사람이 자유낙하를 한다면, 그는 자신의 무게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이 간단한 사고 실험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것은 나를 중력 이론으로 이끌었다. 나는 생각을 이어나갔다: 떨어지는 사람은 가속한다. 그렇다면 그가 느끼고 판단하는 것은 가속하는 기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는 상대성 이론을 가속하는 기준계로 확장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중력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으리라 느꼈다. 떨어지는 사람이 그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의 기준계에서 지구의 중력장을 상쇄시키는 새로운 중력장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가속하는 기준계에서는, 새로운 중력장이 필요하다.

아인슈타인, "나는 어떻게 상대성 이론을 만들었는가" (How I created the theory of relativity) #



6.1.2. 빛의 굴절(1911)[편집]


한편, EEP를 통해 기존 상대성 이론의 중요한 특징인 광속 불변이 중력장이 있는 경우에도 유지되는지 밝힐 수 있다. 이는 가속계에서 광속 불변이 여전히 성립하느냐는 문제와 같다. 아인슈타인은 이 문제가 상대론적 중력 이론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중력이 있는 환경에서 광속 불변이 깨진다면, 상대성 이론은 중력을 기술하는 데에 명백히 한계가 있는 것이며 중력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이론을 확장해야 한다.

(2) 빛은 파동이므로 고전 중력 이론에서는 빛이 휘지 않는다. 그런데, 만약 광속 불변성이 깨진다면 하위헌스의 원리에 의해 빛이 휘기 때문에 태양을 지나오는 별빛을 관찰함으로써 실험적으로 이론을 검증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이 문제에 대해 1907년 당시에 일차적으로 이론적 설명을 시도하였으나, 급하게 작성해서 그런지 논의가 다소 정리되지 않았다. 또, 예측되는 빛의 굴절량이 너무 작아 실험적 검출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아인슈타인은 중력 문제에 대한 의욕을 잃고 양자 문제에 눈을 돌린다.



프라하의 아인슈타인(1912)
1911년 4월 프라하(Prague) 카렐 대학교(Charles University)의 이론 물리학 정교수로 채용된 아인슈타인은 다시 중력 문제로 돌아온다. 그가 1911년 6월 물리학 연보(Annalen der Physik)에 제출한(9월 출판) 논문(『빛의 진행에 대한 중력의 영향』)은 일반 상대성 이론의 본격적 출발을 알리는 중요한 논문으로 여겨진다. 여기에서 아인슈타인은 에너지가 받는 중력(WEP의 유도), 중력에 의한 빛의 진동수 변화, 시간의 흐름, 빛의 굴절 등 다양한 이슈를 한층 더 선명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이 때의 논리 전개는 (아인슈타인답게) 매우 깔끔하여 도플러 효과를 통해 빛을 다루는 과정은 아직도 교과서에 자주 인용된다. 단, 이 때의 논의는 일차항까지만 고려하였다.

3년 전 출판된 논문에서, 나는 이미 빛의 진행이 중력의 영향을 받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려고 시도하였다. 이제 다시 이 주제로 돌아온 것은 내 기존 논의가 만족스럽지 못한데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분석의 가장 중요한 결과 중 하나가 실험적 검증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특히, 내가 전개하려는 이론은 태양 주변을 지나는 광선은 그 중력장에 의해 굴절을 겪게 됨을 예측한다. 이 때 태양 근처에 고정된 별은 태양으로부터의 각거리가 증가하게 되며, 그 양은 거의 1 각초(arc second)에 이른다.

아인슈타인, "빛의 진행에 대한 중력의 영향 (on the influence of gravitation on the propagation of light)", 1911[13]


이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1) 에너지는 중력을 받는다.
[math(S_2)]에서 [math(h)]만큼 낮은 곳에 위치한 [math(S_1)]로 에너지(복사 형태)를 보내면

가 된다([math(\gamma)]는 중력장의 세기). 이로부터 (2)~(4)가 유도된다.

(2) 빛은 중력에 의해 진동수가 바뀐다. (높이에 따라 시간의 흐름이 달라진다.)

(3) 빛은 중력에 의해 속력이 달라진다.

(4) 별빛은 질량 [math(M)]을 가진 천체 근처(거리 [math(\Delta)])에서 [math(\displaystyle \frac{2GM}{c^2\Delta})]만큼 굴절된다.[14]

특히, (4)에서 아인슈타인은 훗날 에딩턴이 시도했던 개기 일식 실험을 직접 제안하여 자신의 이론의 실험적 검증 방법에 대한 토대를 구축하였다.

... 따라서, 태양을 지나는 광선은 [math(4 \cdot 10^{-6} = 0.83)] 각초에 해당하는 굴절을 겪게 된다. 이것은 광선의 굴절에 의해 태양 중심으로부터 별의 각거리가 증가한 것처럼 보이는 양이다. 태양과 근접한 부분의 하늘에 고정된 별은 개기일식 동안 보이게 되므로, 이 이론의 결과(빛의 굴절)를 경험과 비교할 수 있다. (...) 제시된 논의가 비록 충분치 않거나 심지어 모험처럼 보이더라도, 이곳에서 꺼낸 질문에 천문학자들이 응해주길 절실히 바라고 있다. 어떠한 이론이 되더라도, 우리는 스스로 빛의 진행에 대한 중력장의 영향이 현재 사용되는 장비들로 검출이 가능한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동일 논문)



6.1.3. 경쟁 이론들(1911-1913)[편집]


아인슈타인의 등가 원리 논문은 중력 문제에 관심을 갖던 이론 물리학자들의 주목을 끌어내고, 중력 적색 편이, 태양에 의한 별빛의 왜곡 등 실측 가능한 예측을 제시하여 일부 천문학자들의 관심 또한 얻을 수 있었다.

1911년 11월, 괴팅겐의 아브라함(Max Abraham)은 광속이 중력 퍼텐셜에 의존한다는 아인슈타인의 가설에 주목하여 민코프스키 시공간을 기반으로, 상대성 이론을 기반으로 한 중력장 이론을 빠르게 발표하였으며 이를 통해 아인슈타인의 결론 또한 포함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Abraham(1911)] 그의 이론은 중력을 상대론화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단적으로, 중력장 방정식은 다음과 같다.


[math(\displaystyle \red{-\frac{1}{c^2}\frac{\partial^2 \Phi}{\partial t^2}} + \frac{\partial^2 \Phi}{\partial x^2} + \frac{\partial^2 \Phi}{\partial y^2} + \frac{\partial^2 \Phi}{\partial z^2} = 4\pi G\rho)]

[math(\displaystyle F_t = -\frac{\partial \Phi}{\partial t}, \quad F_x = -\frac{\partial \Phi}{\partial x}, \quad F_y = -\frac{\partial \Phi}{\partial y}, \quad F_z = -\frac{\partial \Phi}{\partial z})]

첫번째 식으로부터 아브라함은 중력의 속도를 광속으로 규정했고, 빛은 횡파이고 중력은 종파라 하였다. (라플라스 연산자를 달랑베르 연산자로 바꾸면 당연히 나오는 결과다.) 또한 빛의 속력은

[math(\displaystyle \frac{1}{2}(c^2 - c_0^2) = \Phi - \Phi_0)]

과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math(\Phi/c^2)]이 매우 작다면 이는 아인슈타인의 공식 [math(c = c_0(1 + \Phi/c^2))]을 유도한다. 다만, 민코프스키 시공간은 전제 자체가 광속 불변의 원리를 기반으로 하는데, 계산 과정에서 임의로 도함수를 취하는 등 아브라함의 이론은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다음 논문에서 아브라함의 이론을 비판한 이후로, 아인슈타인과 아브라함은 상대방의 중력 이론에 대해 강렬한 비판을 주고받았다. 이 과정에서 아브라함은 민코프스키의 시공간 거리를 보다 일반화된 개념으로 확장시키는 등 뜻밖의 수확을 남기기도 하였는데, 이는 물리적 맥락에 따른 해석은 아니었다.[15] 이 때 아브라함의 비평은 상당히 날카로워, 아인슈타인 또한 이 과정에서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한편 핀란드의 노르드스트룀(Gunnar Nordström)은 1912~1913년에 걸쳐 WEP를 반영하지만 ‘모든 점에서’ 광속 불변의 원리가 성립하는 중력이론(아인슈타인의 재해석으로는 "적당한 좌표를 선택하면")을 완성하는 데 성공한다. 이것은 WEP와 광속불변을 만족하는 유일한 중력이론이었다. 1907년 당시 아인슈타인은 계산 끝에 이것이 어렵다고 보고 EEP로 넘어가면서 광속 불변을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특수 상대성 이론과 WEP이 양립할 수 있다는 건 당시로서는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었다. 다만 아인슈타인은 광속 불변보다는 상대성 원리를 보다 근본적인 물리학 원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광속 불변을 위배하는 대신) 상대성 원리를 확장시켜주는 자신의 EEP에 충분한 확신과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이들 경쟁 이론과 끊임없이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자신의 이론을 수정해나갔고, 물론 아브라함과 노르드스트룀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브라함의 이론은 (수학적으로 불안정함에도) 수성의 근일점 문제를 당시 (완성되지 않은) 아인슈타인 이론보다 더 잘 설명하였으며, 중력파의 속력이 광속임을 예측하였다. 노르드스트룀 이론의 경우 아인슈타인이 훨씬 적극적으로 개입했으며 1914년에는 그의 이론을 미분 기하학의 언어로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Einstein and Fokker, 1914[16]) 이 과정에서 유도된 중력장 방정식 [math(R = kT)]은 아인슈타인의 최종 중력장 방정식과 유사하다. (아인슈타인은 이미 1913년 이와 유사한 방정식을 연구하였기에 이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는 없다.)

아인슈타인은 노르드스트룀 이론을 자신의 이론에 대한 가장 유력한 경쟁자로 생각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론에서는 빛이 휘고, 노르드스트룀의 이론에서는 빛이 휘지 않으므로 자신이 제안했던 굴절 실험을 통해 (뉴턴 역학과 더불어) 승부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17]

6.1.4. 정적 중력장 이론(1912)[편집]


아인슈타인은 중력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EEP를 선택하였으며, 가장 먼저 중력에 의한 빛의 굴절을 예측하였다. 하지만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광속 불변의 원리가 동시성의 상대성이나 시간 팽창을 단편적으로 알려줄 수 있지만 관성계의 일반적인 물리적 과정을 다루기 위해 로런츠 변환이 필요하듯이, EEP를 기반으로 중력장이 놓인 관성계를 다루기 위해서 궁극적으로 가속계에 대응하는 좌표 변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물론 로런츠변환이 아니다. 로런츠변환은 광속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1905년 당시 특수 상대론을 다룰 때와 같은 방법론을 적용하여 중력장 환경에서 일어나는 좌표 변환을 구하려고 시도하였다.

1912년 2월, 아인슈타인은 1911년 논문의 후속작(『빛의 속력과 중력장의 정역학』[18])을 발표하여 정적인 [math(x)] 축 방향 중력장에 대한 좌표 변환을 유도하고, 그 안에서 시간과 공간의 기하학적 성질, 물리 방정식들의 변환을 다루었다.

[math(\begin{cases} \displaystyle \xi = x + \frac{ac}{2}t^2 \\ \eta = y \\ \zeta = z \\ \tau = ct \end{cases})][19]
[10] 관성계 간의 (선형)좌표변환[11] A. Einstein, "Über das Relativitätsprinzip und die aus demselben gezogenen Folgerungen.", Jahrbuch der Radioaktivität und Elektronik 4 : 411-462. 독문영문[12] Galina Weinstein, Einstein's Pathway to the Equivalence Principle 1905-1907 (2012) arxiv[13] A. Einstein, "Über den Einfluß der Schwerkraft auf die Asbreitung des Lichtes", Annalen der Physik Volume 340, Issue 10 p. 898-908[14] 1915년에 아인슈타인은 빛의 굴절량을 두 배로 수정했다.[Abraham(1911)] Abraham, Max. 'Zur Theorie der Gravitation'. Physikalische Zeitschrift, 13 (1912)#[15] Galina Weinstein(2012), "Einstein's 1912-1913 struggles with Gravitation Theory": Importance of Static Gravitational Fields Theory #[16] A. Einstein; A. D. Fokker (1914), Die Nordströmsche Gravitationstheorie vom Standpunkt des absoluten Differentialkalküls, Annalen der Physik 44: 321-328[17] Rinat M. Nugayev, "The Genesis of General Relativity: Interaction between Einstein’s, Abraham’s and Nordström’s Research Programmes", Kairos. Journal of Philosophy & Science 19, 2017 #[18] A. Einstein, 『Lichtgeschwindigkeit und Statik des Gravitationsfeldes』, Annalen der Physik 38 : 355-369 #[19] [math(a)]는 상수, [math(c)]는 광속


이 좌표변환에서는 가속방향으로, 혹은 중력장 방향으로 광속 [math(c)]가 유일한 변수가 되는데[20], 그렇다면 [math(c)]가 바로 중력퍼텐셜의 역할을 할 것이다. 이 때 중력장방정식은 [math(c)]를 결정하는 단일 식이 된다. 이는 명백하게 로런츠 변환이 아닌 다른 좌표 변환이다. 따라서, (EEP가 참일 경우) 중력장이 각각의 입자보다는 좌표계의 변환에 관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논문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발견이 있었다. 첫 번째로, 아인슈타인은 등속원운동계에서는 유클리드 기하학이 성립하지 않는다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관성계에서 봤을 때 일정한 각속도로 회전하는 원에 고정된 관찰자(등속원운동계)는, 자신의 운동방향과 수직인 원 반지름은 변하지 않지만 운동방향으로 난 원둘레는 길이수축에 의해, 관성계의 측정값에 비해 길어진 것으로 관측한다. (관성계에서는 회전하는 원둘레의 작은 조각들이 일정한 비율로 길이 수축한다고 보게 된다.) 관성계에서 원주율이 [math(\pi)]이므로, 등속원운동계에서의 원주율은 [math(\pi)]보다 커진다. 비유하자면 원뿔에서 빗변이 원의 반지름, 밑면 둘레가 원의 둘레인 상황이다. (이 경우, 원주율<[math(\pi)])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위 논문에서 등가속계의 좌표변환은 유클리드 기하학을 전제하고 얻어낸 것이었다. 하지만 등속원운동계에서 유클리드 기하학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이상, 등가속계의 경우도 사실 잘못된 전제를 바탕으로 유도된 것일 수도 있었다. 가장 단순한 가속계도 사정이 이러할진데 이후에 보다 일반적인 중력장을 다룰 시점에 이르러서는 기하학이 도대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시간은 과연 어떻게 흐를지 아인슈타인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특수 상대론에서 쓰던 “막대와 시계”로는 도저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인슈타인은 기존의 방법론을 포기하고 새로운 방법론을 찾아야 할 상황에 놓인 것이다.

두번째 발견은 다음과 같다. 기존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막스 플랑크(Max Planck)는 1906년 입자의 해밀토니안

[math(\displaystyle H = -m\sqrt{c^2 - q^2}\quad(q^2 = v_x^{\,2} + v_y^{\,2}+v_z^{\,2}))]
[20] [math(c = c_0 + ax)]


를 발견하였다.[21] (당시 그대로 표기이다.) 이 때, 외부 힘을 받지 않는 입자의 운동 방정식은 [math(\delta \int Hdt = 0)]으로 나타낼 수 있다. (풀면 등속 직선 운동한다는 뜻이다.) 아인슈타인 역시 자신이 구한 중력장 좌표 변환에 대한 물체들의 운동 방정식을 계산하였는데, 그 해밀토니안이 신기하게도 정확히 똑같은 형태를 가졌다. 이는 아인슈타인이 줄곧 추구해온 일반 상대성 원리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보다 일반적인 중력장 상황에서도 운동 방정식을 비슷한 방식으로 기술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플랑크가 구한 방정식에서는 [math(c)]가 상수, 아인슈타인이 구한 방정식에서는 [math(c)]가 중력퍼텐셜에 따른 변수라는 점이 다르다. 하지만 자신이 구한 좌표 변환이 마침 [math(c)] 이외에는 방정식을 건들지 않았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방정식의 형태상 유사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사실 굉장히 운이 좋았다고도 볼 수 있는 상황이다.

한편, [math(Hdt = -m\sqrt{c^2dt^2 - dx^2 - dy^2 - dz^2}\,)]이므로 운동방정식은

[math(\displaystyle \delta \int \sqrt{c^2dt^2 - dx^2 - dy^2 - dz^2} = 0)]
[21] M.Planck, "Das Prinzip der Relativität und die Grundgleichungen der Mechanik", Verhandlungen Deutsche Physikalische Gesellschaft. 8, pp. 136–141. 영문


으로 바꿀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학창 시절의 (가물가물해져가는) 기억 속에서 이 공식이 가우스의 곡면 이론(theory of surface)의 어떤 공식(측지선)과 유사하다는 걸 떠올렸고, 이내 중력을 휘어진 시공간으로 기술해야 한다(혹은 가우스 곡면 이론이 자신의 이론에 유용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아인슈타인은 중력이 시사하는 기하학적 의미에 접근할 수 있었고 단편적이지만 일반 상대성 원리가 적용되는 첫 방정식을 찾아냈다. 많은 성과를 얻었지만, 아직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아이디어를 일반화할 수 있는 수학을 알지 못했다.


6.1.5. Entwurf 이론(1913 - 1915)[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Entwurf 이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12년 8월 아인슈타인은 모교 취리히 연방 공대(ETH Zürich)의 이론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취리히로 돌아간 아인슈타인은 동료 수학자 마르셀 그로스만(marcel grossmann)을 만나 이 문제를 상의하다가, 그로부터 가우스의 곡면 이론을 바탕으로 리만(Riemann), 크리스토펠(Christoffel), 리치(Ricci), 레비치비타(Levi-Civita) 등이 발전시킨 기하학, 소위 절대 미분학(Absolute Differential Calculus)[22]을 소개받는다. 이 이론은 리치, 레비치비타가 1901년 집대성하여 발표한 최신 이론이었다.[23]
미분 기하학은 기본적으로 좌표 변환에 대해 성분이 일정한 규칙으로 변화하여 서로에 대한 선형결합이 불변량이 되는 텐서(Tensor)를 연구하며, 텐서들을 사용하면 공간에 임의로 좌표를 놓더라도 모든 좌표계에서 똑같이 얻을 수 있는 절대적인 양을 도출해낼 수 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좌표 변환에 대한) 성분의 변환 규칙성을 공변성(covariance)이라 한다. 또한, 그 안에서 리만 기하학은 공간 자체의 기하학적 성질, 즉 곡률을 미분 기하학의 방법(텐서)를 이용해 다루는 분야이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중력 이론이 상대성 원리를 일반화하는 일반 상대성이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미분 기하학의 공변성은 이러한 아이디어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여기에 비관성 좌표계에서 공간이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따른다는 이론적 판단 등을 바탕으로, 아인슈타인은 "이거다!" 싶어 그로스만을 끌어들여 리만 기하학을 바탕으로 하는 완전히 새로운 중력 이론을 구상하였다.

그간 어느 수준 이상의 고급 수학(예: 민코프스키 시공간)에 큰 흥미를 보이지 않던 아인슈타인은 갑자기 최첨단 수학인 리만 기하학을 배워야 할 상황에 처했고 그것을 습득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전해진다. 이후에도 (비단 아인슈타인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리만 기하학과 관련하여 여러 오개념에 시달리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요새 저는 중력 문제에 전념하고 있고, 제 한 동료 수학자의 도움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낼 수 있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제 생애 통틀어서 이처럼 무언가에 곤란을 느낀 적은 없었고, 수학에 깊은 경의를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수학의 매우 절묘한 부분들은 지금까지의 제 짧은 생각으로는 순전히 사치라고 여겼던 것들이었습니다! 이 문제에 비하면 본래의 상대성 이론은 아이들 장난에 불과합니다.

아인슈타인이 조머펠트(Arnold Sommerfeld)에게 쓴 편지(1912년 10월 29일)의 일부 #



『일반화된 상대성 이론과
중력 이론의 초안』

1913년 발표된 『일반화된 상대성 이론과 중력 이론의 초안』[24] 혹은 아인슈타인-그로스만 이론(Einstein - Grossmann theory)은 리만 기하학이 접목된 첫 번째 일반 상대성 이론 논문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논문은 두 파트로 나누어져 있으며, 첫 번째 파트는 아인슈타인이 서술한 물리학적 내용이고, 두 번째 파트는 그로스만이 서술한 순수 리만 기하학 내용이다. 이는 리만 기하학이 물리학자들에게 생소할 것을 고려한 부분이다.

새로운 중력 이론의 기본적인 개념은 다음과 같다.

(1) 4차원 시공간을 도입하며 물리적 과정을 표현하기 위한 좌표계는 이 안에서 자유롭게 잡을 수 있다.

(2) 모든 물리량은 텐서로 표현된다.

(3) 중력장은 메트릭 (대칭) 텐서(Metric tensor) [math(\boldsymbol{g_{\mu\nu}})]의 10개의 성분으로 표현된다.

이미 민코프스키는 특수 상대성 이론을 두 점 사이의 거리가

[math(d\tau^2 = c^2dt^2 - dx^2 - dy^2 - dz^2)]
[22] 현재의 미분 기하학[23] Ricci, G. and Levi-Civita, T. (1901) Methodes de Calcul Differentiel Absolu et Leurs Applications. Mathematische Annalen, 54.[24] 『Entwurf einer verallgemeinerten Relativitätstheorie und einer Theorie der Gravitation』; I. Physikalischer Teil von Albert Einstein. II. Mathemathischer Teil von Marzel Großmann. Teubner, 1913독문


으로 표현되는 가상의 4차원 공간 위에서 다룰 수 있음을 보였다. 중력이 있는 경우에도, EEP에 의하면 적어도 각각의 점 근방에서는 적당한 좌표를 선택하여 (자유 낙하 좌표계) 특수 상대성 이론이 성립하도록 할 수 있으므로 각각의 점에서 적당한 좌표를 잡으면 두 점 사이의 거리가 위와 같이 표현되는 4차원 시공간을 도입한다.

1912년 논문의 회전하는 원판이 보여주듯, 일반적인 중력장을 다룰 때에는 시간과 공간의 성질을 (관성계에서처럼)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다. 시간의 흐름은 각각의 점에서 달라지며 공간은 비유클리드 기하를 따른다. 따라서 특정 운동상태에 대응되는 좌표계를 굳이 구하지 않고 4차원 시공간 위에 자유롭게 4차원 좌표를 잡을 수 있도록 한다. 이 때, 좌표의 물리적 의미는 각 점에서 측정의 기준이 되는 좌표계, 즉 관성계와의 변환 관계로 결정된다.

또한 텐서의 선형결합은 좌표변환에 대한 불변량을 만드며, 이들을 조합한 물리 방정식을 만들 경우 그 표현은 (좌표 변환에 대하여) 고정되므로 일반 상대성 원리의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예를 들어, 물질 과정을 나타내는 물리량은 (반변) 텐서 [math(\displaystyle \Theta^{\mu\nu} = \rho \frac{dx^{\mu}}{d\tau}\frac{dx^{\nu}}{d\tau})]로 표현된다. 이 텐서는 Minkowski(1907), Abraham(1909), Laue(1911) 등이 도입하였다. wikiversity

이 논문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메트릭 텐서[25]의 도입이다. 메트릭 텐서는 각 공간에서 정의되어 두 벡터의 내적을 계산해주는 연산자이며, 공간의 기하학적 성질을 규명하는 핵심 열쇠이다. 민코프스키가 도입했던 시공간 거리는 특수한 메트릭 텐서로 다시 표현할 수 있다. 즉, 시공간 거리

[math(d\tau^2 = c^2dt^2 - dx^2 - dy^2 - dz^2)]
[25] 당시 아인슈타인은 "공변 근본 텐서(kovarianten Fundamentaltensor)"라고 불렀다.



[math(\displaystyle (\eta_{\mu\nu}) = \begin{pmatrix} c^2&0&0&0 \\ 0&-1&0&0 \\ 0&0&-1&0 \\ 0&0&0&-1 \end{pmatrix})]


에 대하여 [math(d\tau^2 = \sum_{\mu\nu}\eta_{\mu\nu}dx^{\mu}dx^{\nu})] 라 표현할 수 있다. 이제 일반적인 좌표변환을 고려하면 [math(\eta_{\mu\nu})]는 (민코프스키 메트릭을 기준으로)

[math(\displaystyle (g_{\mu\nu}) = \begin{pmatrix} g_{00}&g_{01}&g_{02}&g_{03} \\ g_{10}&g_{11}&g_{12}&g_{13} \\ g_{20}&g_{21}&g_{22}&g_{23} \\ g_{30}&g_{31}&g_{32}&g_{33} \end{pmatrix})]


로 일반화되어야 한다([math(d\tau^2 = \sum_{\mu\nu}g_{\mu\nu}dx^{\mu}dx^{\nu})]). 이 때, EEP를 고려하면 [math(g_{\mu\nu})] 각각의 성분은 중력장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이 영감을 얻었던 특수 상대성 이론의 운동 방정식

[math(\displaystyle \delta \int \sqrt{c^2dt^2 - dx^2 - dy^2 - dz^2} = 0)]


은, [math(c)]가 변수인 경우에도 동일한 표현을 갖는다. 이제 일반적인 좌표 변환을 가정하면 이 식은

[math(\begin{cases} \displaystyle \delta \left\{\int ds \right\} = 0 \\ \\ \displaystyle ds^2 = \sum_{\mu\nu} g_{\mu\nu}dx^{\mu}dx^{\nu} \end{cases})]


로 일반화되며, 이러한 일반적인 좌표계에서 자유 입자는 등속 직선 운동이 아닌 곡선 운동을 한다. 각 좌표계에 대한 운동 궤적을 지정하는 것은 좌표계에 따라 달라지는 메트릭 텐서의 성분 [math(g_{\mu\nu})]이며, EEP에서는 좌표계의 운동 상태가 바로 중력장과 대응되므로, 10개의 [math(g_{\mu\nu})]는 중력장을 정의한다.

마지막으로, 어떤 중력 이론이 완성되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물질에 의해 중력장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결정하는 중력장 방정식이 필요하다. 이 논문은 새로운 중력장 방정식이 어떤 형태를 띠어야하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잘 제시하고 있다. 즉, 일반 상대성 이론에 따른 중력장 방정식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함을 명시하였다.
(1) [math(g_{\mu\nu})]를 결정한다.

(2) 푸아송 방정식 [math(\nabla^2 \phi = 4\pi G\rho)]를 일반화한다.

(3) 즉, [math(g_{\mu\nu})]의 미분 연산자로부터 얻어지는 2차 텐서 [math(\Gamma_{\mu\nu})]에 대하여

란 형태를 띠어야 한다. (푸아송 방정식의 형태를 감안하면 2차 미분방정식이어야 한다.)

이 때, 메트릭 텐서의 미분으로 이루어진 텐서는 공간의 곡률을 표현하므로 중력이 시공간의 곡률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제시된 추론은 모두 적절하고, 실제로 최종 방정식과 유사한 식을 이 때 이미 발견하고 연구하였으나 뉴턴 중력의 유도에 실패하였으며, 아인슈타인과 그로스만은 올바른 방정식이 아니라 판단하여 그 방정식을 제외하였다. 아인슈타인은 이후 구멍 논변(Hole argument)이라는 것을 도입하여 중력장 방정식이 완전한 공변성을 가질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는, 공변성을 선형 변환으로 제한하여 중력장 방정식을 제시하였다. 이 때의 중력장 방정식은 선형 변환에 대해 불변인 스칼라를 한정한 후 그것을 변분하여 유도한 것이었다. 이 때의 과도기적 이론을 논문의 이름을 따 Entwurf 이론(초안 이론)이라고 부른다. Entwurf 이론이 현재의 일반 상대성 이론과 다른 구체적인 점은 Entwurf 이론 문서 참고.


6.1.6. 중력장 방정식(1915)[편집]


아인슈타인의 Entwurf 이론은 수학적으로 직관적이지 않으며, 오류가 많았다. 1915년 3월 미분 기하학을 정리한 수학자 레비치비타(Levi-civita)가 아인슈타인에게 편지를 보내 중력장 방정식의 수학적 오류를 지목하였으며, 7월에는 그의 기하학적 중력 이론에 관심을 갖던 수학자 힐베르트의 초빙으로 괴팅겐 대학에서 자신의 이론을 강연한 것을 계기로 힐베르트와 몇가지 비판적 논의를 나누었다. 아인슈타인은 결국 10월에 이르러 자신의 중력장 방정식에 대해 확신을 완전히 잃고 방정식을 폐기했다. 3년 간의 수고를 허사로 보내버린 아인슈타인은 크게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후일 자신의 기존 중력장 방정식이 잘못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915년 11월 28일 Alnord Sommerfeld에게 쓴 편지의 일부. #)

  • 중력장 방정식은 일정하게 회전하는 좌표계를 허용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이 미분 기하학을 도입하는 계기를 제공한 회전 원판 좌표계(정적 중력장 이론 문단 참고)가 자신의 이론에 맞지 않은 것이다.

  • 수성의 근일점 이동을 측정값인 100년에 45″가 아닌 18″로 예측했다.

  • 방정식을 유도하는 해밀턴 함수를 특정했던 조건에 오류가 있었다. 이 때문에 중력장 방정식은 근거를 잃어버렸다.

아인슈타인은 물리적으로도, 수학적으로도 자신의 접근 방법에 근본적으로 오류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중력 이론의 공변성을 제한하는 부분인데, 물리적으로 아인슈타인은 이 부분을 구멍 논변으로 정당화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는 공변성의 의미를 혼동하여 좌표계를 메트릭 텐서와 분리하여 생각하고 있었음을 파악했고, 이것을 즉시 포기하였다.[26] 한편, Entwurf 이론에 제기된 수학적 비판들을 통해 아인슈타인은 제한된 공변성을 가진 함수를 만드는 것이 힘들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애초에, 아인슈타인은 그로스만과의 공동 연구 당시 공변성에 제한을 두지 않았었다. 이제 그는 거리낌없이 "일반" 공변성으로 다시 돌아와, 그로스만과 연구할 때 처음 얻었던 (리만 텐서 기반) 중력장 방정식을 다시 꺼내들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당시 중력장 방정식을 포기한 원인을 재검토하고, 이 부분에 집중하여 대대적으로 자신의 이론을 수정하였다. (사실, 그로스만과 연구할 때의 초기버전으로 롤백한 것이다.)

운명의 1915년 11월, 아인슈타인은 베를린의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Prussian Academy of Sciences)에서 수정된 중력이론을 강의할 자리를 갖게 된다. 이것을 기회로 삼아 아인슈타인은 한달간 강의를 병행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마저 완성하는 데 전념했다. 강의는 주당 1회씩 총 4차례(4/11/18/25일)에 걸쳐서 이루어졌으며, 각 주차의 강의(논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최근 몇 해 동안 나는 상대성 원리가 균일하지 않은 운동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전제로 일반 상대성 이론의 기초를 세우는 데에 집중하였다. 나는 합리적으로 표현된 일반 상대성 원리를 만족시키는 유일한 중력 법칙을 찾았다고 믿었으며, 이 해법이 정확하다는 사실을 작년 "Sitzungsberichte"에 제출한 논문[27]

에서 보이려고 하였다.

새로운 비판을 통해, 나는 이 사실을 제시되었던 방법으로 일절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게 그렇게 보인 것은 잘못된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나는 내가 유도했던 장 방정식에 대한 믿음을 잃었으며, 가능성을 제한할 수 있는 보다 자연스러운 방법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는 장 방정식이 보다 일반적인 공변성을 가져야 한다는 요구로 되돌아왔으며, 이는 3년 전 내 친구 그로스만과 함께 작업하였을 때 무거운 마음으로 포기한 것이었다. 사실, 우리는 그 때 이 문제의 해법에 거의 가까웠으며, 이는 다음에 제시될 것이다.

(...) 이를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 매력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가우스, 리만, 리치, 레비치비타가 세운 일반미분학(절대미분학)의 진정한 승리를 선언하기 때문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하여" 서문

1주차 - Zur Allgemeinen Relativitätstheorie (1915.11.04)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하여>
[28]
아인슈타인의 1주차 강연(논문)은 Entwurf 이론의 중력장 방정식과 관련된 잘못된 논리를 전부 수정하고, 보다 일반적인 공변성을 다시 가정하겠다는 선언으로부터 시작된다. 다만, 이 논문에서도 아인슈타인은 완전히 일반적인 공변성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으며 좌표 변환 행렬의 행렬식이 언제나 [math(1)]이라는 좌표 조건을 걸었다. 하지만 Entwurf 이론과 이 때의 이론이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Entwurf 이론은 공변성을 제한을 둔 상태에서 방정식에 들어갈 텐서를 탐색했다면 이 때는 일단 공변적인 텐서로 방정식을 만든 다음 편의 혹은 필요에 따라 공변성을 제한한 것이었다.
[ 자세한 내용 ]

Entwurf 이론의 내용을 보고 오는 것이 좋다.

아인슈타인이 새로 부여한 좌표 조건에 의하면 좌표 변환 행렬의 행렬식이 [math(1)]이므로 다양한 양이 스칼라가 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math(\sqrt{-g})]가 스칼라가 된다는 것이다. 미소 부피 [math(d\tau)]는 그 자체로 스칼라이며 [math(\displaystyle \Gamma^{s}_{s\tau} = \frac{1}{2}g^{s\alpha}\frac{\partial g_{s\alpha}}{\partial x^{t}} = \frac{\partial(\ln \sqrt{-g})}{\partial x^{t}})]는 공변벡터이다. 그리고 텐서 밀도 [math(\mathfrak{T}_{\mu\nu})]는 그냥 [math(T_{\mu\nu})]로 쓰면 된다. ([math(\sqrt{-g})]를 곱할 필요가 없다.)

아인슈타인은 Entwurf 이론에서 물질이 중력에 대하여 받는 영향을 표현하기 위해 텐서 밀도를 이용하여

[math(\displaystyle \frac{\partial \mathfrak{T}^{\nu}_{\sigma}}{\partial x^{\nu}} = \frac{1}{2}g^{\tau\mu}\frac{\partial g_{\mu\nu}}{\partial x^{\sigma}}\mathfrak{T}^{\nu}_{\tau})]


를 유도하고, [math(\displaystyle \Gamma^{\tau}_{\sigma\nu} = \frac{1}{2}g^{\tau\mu}\frac{\partial g_{\mu\nu}}{\partial x^{\sigma}})]를 중력장의 성분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는 중력장의 자연스러운 정의가 아니며 중력장 방정식을 못찾아 3년을 소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인슈타인은 이 실수를 논문에서 "치명적인 편견"(verhängnisvolles Vorurteil)이었다고 표현하였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중력장의 정의를 바꾸어

[math(\displaystyle \Gamma^{\tau}_{\sigma\nu} = -\begin{Bmatrix} \sigma\nu \\ \tau \end{Bmatrix})]


라 두었다. 우변의 기호는 지금의 크리스토펠 기호이다. 음수 부호를 붙인 이유는, 측지선 방정식을

[math(\displaystyle \frac{d^2x^{\tau}}{ds^2} = \Gamma^{\tau}_{\mu\nu}\frac{dx^{\mu}}{ds}\frac{dx^{\nu}}{ds})]


와 같이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 문단에서는 계속 아인슈타인의 표기를 존중하여 음수 부호를 붙일 것이므로 유의한다. 이러한 정의는, 중력과 미분 기하학의 연결을 매우 간단하게 만들어주었다. 새로운 중력장의 정의는 다음과 같이 물질에 대한 중력장의 영향을 일괄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

[math(\displaystyle \frac{d^2x^{\tau}}{ds^2} = \Gamma^{\tau}_{\mu\nu}\frac{dx^{\mu}}{ds}\frac{dx^{\nu}}{ds})]

[math(\displaystyle \frac{\partial T^{\alpha}_{\sigma}}{\partial x^{\alpha}} = -\Gamma^{\alpha}_{\sigma\beta}T^{\beta}_{\alpha})]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중력장 방정식의 문제이다. 지금의 리치텐서 [math(G_{im})][1]

[math(G_{im} = R_{im} + S_{im})]

[math(\displaystyle R_{im} = \frac{\partial \Gamma^{l}_{im}}{\partial x^l} + \Gamma^{\rho}_{il}\Gamma^{l}_{\rho m},\quad S_{im} = - \frac{\partial \Gamma^{l}_{il}}{\partial x^m} - \Gamma^{\rho}_{im}\Gamma^{l}_{\rho l})]


인데, 여기에서 [math(\displaystyle \Gamma^{i}_{il})]이 공변 벡터이므로 [math(S_{im} = -\nabla_{m}\Gamma^{l}_{il})]이며, (아인슈타인이 한정한 좌표범위에서) 텐서이다. 따라서 [math(R_{im})] 또한 텐서인데, 여기에서 아인슈타인은

[math(\displaystyle R_{\mu\nu} = \frac{\partial \Gamma^{l}_{\mu\nu}}{\partial x^l} + \Gamma^{\rho}_{\mu l}\Gamma^{l}_{\rho \nu} = -\varkappa \,T_{\mu\nu})]


이라는 중력장 방정식을 제시하였다. 아인슈타인은 드디어 그로스만과의 연구 초기에 검토했던 리만 텐서를 되살렸다. 이 방정식은 최종 형태에 매우 근접하며 뉴턴 법칙을 잘 유도하지만(그 내용은 3주차에 소개), 완벽하지 않은 형태였다. 에너지 보존법칙을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에너지 보존법칙 [math(\displaystyle \frac{\partial T^{\alpha}_{\sigma}}{\partial x^{\nu}} = -\Gamma^{\alpha}_{\sigma\beta}T^{\beta}_{\alpha})]을 위 식에 적용하면

[math(\displaystyle \frac{\partial^2g^{\alpha\beta}}{\partial x^{\alpha}\partial x^{\beta}} - g^{\sigma\tau}\Gamma^{\alpha}_{\sigma\beta}\Gamma^{\beta}_{\tau\alpha} = 0)]

[math(\displaystyle \frac{\partial}{\partial x^{\alpha}}\left(g^{\alpha\beta} \frac{\partial(\ln \sqrt{-g}\,)}{\partial x^{\beta}}\right) = - \varkappa\,T^{\sigma}_{\sigma})]


을 얻는다. 첫번째 식으로부터 [math(g_{\mu\nu})]에 관한 좌표 조건을 얻고, 특히 두 번째 식으로부터 [math(\sqrt{-g} = 1)]이 되도록 놓을 수 없다는 결론을 얻는다. ([math(T^{\sigma}_{\sigma} ≠ 0)]이기 때문이다.) 이 때, [math(S_{\mu\nu} = 0)]이라고 둘 수도 없으므로 [math(G_{\mu\nu} ≠ R_{\mu\nu})]이다.

결론적으로, 이 때의 방정식은 완전한 일반 공변성을 갖지 못한다. 이 오류는 Entwurf 이론에서는 구멍 논변이라는 물리학적 고찰에 의해 필연적인 것이었지만 이 때의 아인슈타인은 구멍 논변을 버렸기에 불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이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일시적으로 방정식이 좌표에 주는 제약이라고 결론을 내렸으나, 다음 주차에서 아인슈타인은 이 방정식이 일반 공변 방정식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제안하였다.

2주차 - Zur Allgemeinen Relativitätstheorie (Nachtrag) (1915.11.11)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하여(추가)>
[29]
1주차 강연이 끝난 직후 아인슈타인은 그 사이에 떠올린 아이디어를 2주차 강의에 급하게 끼워넣었다. 그 아이디어는 바로 자신의 방정식이 일반 공변성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만드는 방편이었다. 요약하자면, [math(T = \sum_{\mu\nu} g^{\mu\nu}T_{\mu\nu} = 0)]이라는 조건을 추가하면 된다.
[ 자세한 내용 ]
1주차의 마지막 조건 방정식

[math(\displaystyle \frac{\partial^2g^{\alpha\beta}}{\partial x^{\alpha}\partial x^{\beta}} - g^{\sigma\tau}\Gamma^{\alpha}_{\sigma\beta}\Gamma^{\beta}_{\tau\alpha} = 0)]

[math(\displaystyle \frac{\partial}{\partial x^{\alpha}}\left(g^{\alpha\beta} \frac{\partial(\ln \sqrt{-g}\,)}{\partial x^{\beta}}\right) = - \varkappa\,T^{\sigma}_{\sigma})]


에서부터 시작한다. 원래는 [math(T ≠ 0)]이었으므로 두 번째 식에 의해 [math(\sqrt{-g} = 1)]이라 둘 수 없다. 하지만 [math(T = 0)]이라면, 즉 물질이 아예 없는 진공이나, 전자기장에만 한정한다면 그것이 가능해진다. 이 때 중요한 것은 [math(G_{\mu\nu} = R_{\mu\nu} + S_{\mu\nu})]에서 [math(S_{\mu\nu})]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즉

[math(\displaystyle G_{\mu\nu} = R_{\mu\nu} + S_{\mu\nu} = -\varkappa\,T_{\mu\nu})]


라 놓고, [math(\sqrt{-g} = 1)]이라는 조건을 걸면 [math(S_{\mu\nu} = 0)]이므로 1주차에서 얻은 방정식이 유도된다. 따라서, [math(\sqrt{-g} = 1)]이라는 조건 하에 (1주차의) 중력장 방정식은 완전히 일반 공변적인 방정식과 같다.

아인슈타인은 이 때부터 좌표 조건을 좌표 변환 행렬식이 1인 것으로부터 [math(\sqrt{-g}=1)]로 바꾸었다. 이는 특수 상대성 이론의 로렌츠 변환이나 Entwurf 이론의 선형 변환, 그리고 직전의 변환 조건처럼 좌표 변환에 의존한 좌표 조건이 아니다. 또한, 이 조건은 1주차 때처럼 수학적으로 강제되는 조건이 아니며, 완전히 편의상의 이유로만 선택되는 속성의 것이었다. [math(\sqrt{-g} = 1)]은 1916년 전반기까지 아인슈타인의 좌표 조건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아인슈타인은 처음으로 "완전히" 공변적인 방정식, 혹은 그 방법론(완전 공변 방정식을 세운 후 [math(\sqrt{-g} = 1)]로 좌표 제한)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아인슈타인이 일반 공변성을 완전히 확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math(T=0)]이라는 부가 조건을 필요로 했다. 실제로, 이 조건은 진공 상태에 전자기장만 있는 경우에만 성립하고, 물질이 있는 경우는 고려할 수가 없다. 이 경우, 푸아송 방정식의 밀도와 에너지 텐서를 대응시킬 수가 없어 비례 상수 [math(\varkappa)]를 계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 조건을 정당화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 원리가 물질에 가하는 조건이 아닐까 하는 과격한 가설을 제안하였고 실제로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2주 뒤 이 가설은 흐지부지되었다.

이처럼, 아인슈타인은 최초로 자신의 이론에서 일반 공변 방정식을 찾아내고, 이는 이후 일반 공변성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구하여 이 방정식을 뛰어넘는 원동력이 되었다. 어쨌거나 [math(T = 0)]은 매우 제한적인 조건이었고, 방정식은 여전히 현재의 것과 달랐다. 이것을 해소하기 위해서 아인슈타인에게는 보다 많은 고민과 계산이 필요하였다.

3주차 - Erklärung der Perihelbewegung des Merkur aus der allgemeinen Relativitätstheorie (1915.11.18)
<일반 상대성 이론에 따른 수성 근일점 운동의 설명>
[30]
이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1주차에 얻은 중력장 방정식에 적절한 근사를 적용하여 0차 근사로 특수 상대성 이론(민코프스키 시공간), 1차 근사로 뉴턴의 중력 공식과 빛의 굴절량을 설명하였으며 2차 근사로 수성의 근일점 운동을 설명하였다. 빛의 굴절량은 이 때 기존의 [math(0.85'')]에서 [math(1.7'')], 즉 두 배로 수정되었으며 수성의 근일점 운동량은 [math(43'')]로 계산되었다. 방정식의 이러한 구조는 일반 상대성 이론이
는 것을 보여준다. 이 방정식은 비록 완성된 형태는 아니지만 Entwurf 이론보다 훨씬 중력 법칙을 잘 설명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며, 특히 당대 중력 이론의 숙제였던 수성의 근일점 문제를 처음으로 해결하여 노르드스트룀/아브라함의 이론 등 당대의 경쟁이론에 대한 분명한 강점을 보여주었다. 이는 아인슈타인이 여러 Ad hoc에 가까운 조건을 걸어가면서 방정식을 유지했던 이유를 잘 보여준다. 이 성과로 인해, 일반 상대성 이론은 주변 물리학자들의 관심을 더욱 크게 끌 수 있었으며 카를 슈바르츠실트 역시 이 논문에 영향을 받아 슈바르츠실트 해를 계산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4주차 - Die Feldgleichungen der Gravitation (1915.11.25)
<중력의 장방정식>
[31]
드디어, 아인슈타인은 최종적인 중력장 방정식을 발표하였다. 이 방정식은 기존에 제안된 방정식들과 달리 에너지 보존법칙과 충돌하지 않아 추가적인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며, 수학적으로 완전한 일반 공변성을 얻을 수 있었다. 3주차에서는 진공 조건에 국한되어 방정식이 사용되었으며 수정된 방정식은 진공 조건에서는
이 되어 기존 방정식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3주차의 결론은 이 논문으로 영향을 받지 않았다.
}}}
이 식은 현재의 중력장 방정식과 동치이다.
이처럼 중력장 방정식의 형태를 완성시키는 것을 마지막으로, 4주간 이루어진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 강연은 마무리되었다. 동시에 아인슈타인은 2주차에 세웠던 가설, 즉 일반 상대성 원리가 특수 상대성 이론으로 구축된 물질 세계에 새로운 법칙을 부여한다는 추측을 포기하고 일반 상대성 원리는 특수 상대성 이론에 아무런 제약을 가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것으로, 우리는 드디어 일반 상대성 이론의 논리적 구조를 완성하였다. 가장 일반화된 형태의 상대성 원리(시공간 좌표계를 물리적으로 무의미한 매개변수로 만든다.)는 매우 특징적인 중력이론에 대한 설득력 있는 요구로 이어지며, 이는 수성의 근일점 이동 역시 설명할 수 있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중력의 장방정식" 맺음말


중력장 방정식이 완성됨으로써 아인슈타인 중력이론, 즉 일반 상대성 이론의 이론적 기반 역시 완성되었다. 완성된 일반 상대성 이론이 말해주듯, 리만 기하학과 중력은 일대일 대응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놀라운 연관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이론을 직접 개척하는 입장으로서 물리학과 수학이 이렇게 간결하게 연결된다는 것을 이론이 완성되기 전부터 알 수는 없었고, 수학적인 구조보다는 일반 상대성 원리(공변성)가 뉴턴의 중력 이론으로 수렴한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다보니 연구 과정에서 기존 물리학의 개념에 사로잡혀 종종 수식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다. 이로 인한 결과물이 바로 Entwurf 이론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Entwurf 이론을 통해 아인슈타인이 제시한 물리적 고찰(메트릭 텐서, 구멍 논변, 에너지 보존 법칙 등)들은 이후 일반 상대성 이론이 물리적으로 확고한 이론이 되는 데에 발판의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Entwurf 이론에서 쌓여가던 오류들을 되돌리는 데에는 아인슈타인 본인의 노력뿐만 아니라 레비치비타, 힐베르트 등 수학자들과 노르드스트룀, 아브라함 등 경쟁 물리학자들의 직접적, 혹은 간접적 도움이 있었고, 이들의 비판을 아인슈타인이 결코 순순히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나 끝내 그 중 올바르다 생각한 비판들을 수용하고, 판을 갈아엎고 수학에 보다 크게 비중을 둔 결과 일반 상대성 이론을 완성할 수 있었다. 물론, 새로운 방정식이 물리적으로도 훨씬 정확하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의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수학적으로 명료할 뿐만 아니라, 고전 역학의 문제(수성의 근일점 현상)를 너무나도 깔끔하게 해결하였다. 몇 달동안 아인슈타인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기쁜 감정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이 이론은 비할 데 없이 아름답다"(Die Theorie ist von unvergleichlicher Schönheit) (To Heinrich Zangger, 1915.11.26 #)

"지난 한달은 생애 가장 자극적이면서도 힘든 시간이었으나, 가장 성공적인 시간이었다"(Aber ich hatte im letzten Monat eine der aufregendsten, anstrengendsten Zeiten meines Lebens, allerdings auch der erfolgreichsten.) (To Alnord Sommerfeld, 1915.11.28 #)

"'일반 공변성'이라는 가장 대담한 꿈이 실현되었다"(Die kühnsten Träume sind nun in Erfüllung gegangen. Allgemeine Kovarianz.) (To Michele Besso, 1915.12.10 #)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중력 이론을 구성하는 핵심 원리와 수학적 기초, 그리고 중력 현상에의 적용에 대해 정리하여 이듬해 물리학 연보에 『일반 상대성 이론의 기초』(Die Grundlage der allgemeinen Relativitätstheorie)[32]란 이름으로 제출하였다. 여기에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과 그 기여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일반 상대성 이론의 기초』

다음의 이론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상대성 이론"이라 불리는 이론의 가장 광범위한 일반화를 이룬다. 나는 후자를 (전자와 구별하여) "특수 상대성 이론"이라 부를 것이다. 이 이론은 잘 알려져 있으리라 생각한다. 상대성 이론의 일반화는 상당부분 공간 좌표와 시간 좌표의 형식적 동등성을 처음 인지한 수학자인 민코프스키에 의해 가능했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 필요한 수학적 도구는 이미 "절대 미분학"(absoluten Differentialkalkül)에 구비되어 있었다. 이 학문은 가우스, 리만, 크리스토펠의 비유클리드 다양체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리치와 레비치비타가 체계화한 것으로, 이미 이론 물리학의 문제들에 활용되어 왔었다. 이 논문의 B 파트에서 나는 필요한 모든 수학적 도구를 소개하였고, 최대한 간단하고 명료하게 제시하여 이 논문을 이해하기 위해 특별한 수학 문헌 공부가 필요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마지막으로, 내 친구, 수학자 그로스만에게 감사하고 싶다. 그는 내가 적절한 수학 문헌을 공부하는 수고를 덜어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중력장 방정식을 찾는 데 도움을 주었다.

아인슈타인(1916), 『일반 상대성 이론의 기초』(Die Grundlage der allgemeinen Relativitätstheorie) 서문


이 책은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교과서로 보면 된다. 이론을 만든 아인슈타인 본인의 본래 의도를 엿볼 수 있으며 아인슈타인답게 이해하기 쉽고 철학적인 내용과 섞여 "재밌게" 쓰여있어서 참고할 만하다. 다만 논란이 되는 마흐의 원리나 잘못된 액션 등 당시까지 아직 교정되지 않은 오류가 몇 군데 있다. 구성은 다음과 같다.

(A) 상대성 원리에 대한 인식론적 고찰과 그 일반화, 공간의 비유클리드성, 공변성의 의미, 물질 분포가 관성을 결정한다는 마흐의 원리 등 물리-철학적 내용

(B) 리만 기하학의 전반적인 소개

(C) 리만 기하학을 바탕으로 한 중력장 이론

(D) 완전 유체, 전자기력 등 물질 현상에 관한 이론

(E) 중력 현상에의 적용(뉴턴 이론, 빛의 굴절, 수성의 근일점 이동)

이후, 아인슈타인이 수년간에 걸쳐서 일궈낸 토대를 바탕으로 수많은 수학자, 이론과학자, 실험과학자들이 달려들어 나름의 기여들을 하면서 이론은 점차 선명해지고, 풍부해졌다.


6.2. 초기 발전(1916 - 1925)[편집]



6.2.1. 힐베르트 액션(1915-1916)[편집]


일반 상대성 이론의 초기 발전에는 수학자들의 기여가 컸다. 아인슈타인이 도입한 미분 기하학은 당시 물리학계에서 전면적으로 도입된 적이 없었기에 수준을 따라가는 데에 대체로 시간이 걸렸다. (에렌페스트, 로런츠 등과 당시 주고 받은 편지를 보면 대부분 아인슈타인의 논문 중 이해가 안가는 부분에 대해 상의하고 있다.) 그러나 힐베르트를 시작으로 헤르만 바일, 펠릭스 클라인 등 괴팅겐 수학자들은 일반 상대성 이론에 필요한 수학을 당연히 아인슈타인보다 잘 알고 있었고, 이들은 아인슈타인 이론이 보여주는 물리학과 수학의 절묘한 연결에 매혹되면서도 주요 허점을 곧장 파악하여 아인슈타인이 이론을 수정하는 데에 적잖은 도움을 주었다. 이론이 완성된 이후에도, 이들은 최상의 지식을 기반으로 1925년까지 적극적으로 이론의 구조적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수학자 다비드 힐베르트는 괴팅겐 대학의 대표 수학자로서 1900년 발표된 23가지 문제에서 확인할 수 있듯 물리학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1915년 여름 아인슈타인의 1914년 논문[Einstein(1914)]을 읽고는 강한 흥미를 느껴 아인슈타인에게 괴팅겐 대학에서 그의 이론에 대해 전반적인 강연을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아인슈타인은 1915년 6월 28일부터 7월 5일까지 괴팅겐 대학에 초청되어 볼프스켈 재단이 후원하는 볼프스켈 강연(Wolfskehl lecture)을 하게 되었고[33], 이 자리에서 괴팅겐 수학자들에게 그의 중력 이론(총 6일, 2시간 강의)을 강의했다. 소위 괴팅겐 학파가 일반 상대성 이론을 본격적으로 접한 건 이 시점부터로, 힐베르트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매우 인상 깊게 생각했고, 아인슈타인 역시 힐베르트에게 강한 호감을 표했으며, 자신이 있던 베를린보다 괴팅겐이 적어도 일반 상대성 이론 문제에 있어서는 훨씬 좋은 학풍을 갖고 있다고 평했다.#[34]
사실, 베를린에서 아인슈타인은 Entwurf 이론에 잠재하는 문제들(에너지 문제, 공변성 문제)에 대해 깊게 상의할 만한 사람을 찾지 못해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나마 1915년 3월 이탈리아에서 레비치비타(Levi-civita)가 아인슈타인의 제한된 공변성에 대한 증명에 지적을 해온 것이 전부였다.(이는 아인슈타인에게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기에 어찌어찌 공격을 방어하면서도 전전긍긍한 상태였다.) 괴팅겐에서의 일주일은 그에게 있어서 정체된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힐베르트와의 토론 끝에 11월에 이론을 뜯어고치고 일반 상대성 이론을 완성한 것은 상술한 대로이다.

이 때 일반 상대성 이론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고(아인슈타인은 완성되었다고 생각했지만), 특히 에너지 보존 문제에 있어서 논란이 있었다. 또한 당대의 최신 수학이었던 미분 기하학을 물리학자로서 독학하여 아인슈타인이 보인 현란한 수식들은 괴팅겐 수학자의 눈높이에서 봤을 때 어리숙해 보였고 힐베르트는 내심 아인슈타인과 다른 방법으로 이론을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힐베르트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 기본 골격(메트릭 텐서, 중력의 기하학적 기술)만 취하고 나머지 골격은 미에(Gustav Mie)의 전자기 이론을 보태어 자신만의 방법으로 재구축하기로 결심한다. 그가 집중적으로 해결하려 한 것은 에너지 보존 법칙과 관련한 문제로, 이것과 아인슈타인의 공변성 제한 문제와 통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에너지 문제는 이후 아인슈타인과 힐베르트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이론을 완성하면서 아인슈타인, 힐베르트, 펠릭스 클라인, 에미 뇌터 등이 1918년까지 가장 격렬하게 논쟁하는 주제가 된다. 1918년에 에미 뇌터는 두 접근 방법이 거의 유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인슈타인과 힐베르트는 1915년 11월 내내 이론의 완성을 위해 경주를 하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11월 4일, 11일, 18일, 25일 4차례에 걸쳐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에서 수정된 중력 이론, 즉 일반 상대성 이론을 강연하면서 중력장 방정식을 계속해서 수정했고, 25일 중력장 방정식을 완성함으로써 일을 마무리지었다. 한편 힐베르트는 20일 자신의 이론을 괴팅겐 대학에서의 강연을 통해 동료 학자들에게 제시하고 "물리학의 기초"(Die Grundlagen der Physik)라는 이름의 논문으로 출판하였다.[35] 두 이론의 접근 방법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이 중력에 관한 이론임을 무엇보다 우선시했고, 자신의 이론 체계가 실제로 중력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구체적인 중력장 방정식을 도입하고, 그것을 푸는 방법에 집중하였다. 그의 네 차례 논문 중 가장 중요한 대목은 자신의 이론이 특수 상대성 이론과 뉴턴의 중력 법칙을 일반화하며, 수성의 근일점 운동을 해결한다는 것이었다. 중력장 방정식의 완성도 분명 중요하지만, 아인슈타인이 스스로 지적했듯 중력장 방정식의 수정은 중력 문제에 대한 접근법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한편, 아인슈타인은 11월 4일 강연에서 자신의 이론의 라그랑지언을 다음 형태로 제안하였다.

[math(\mathfrak{L} = g^{\sigma\tau}\Gamma^{\alpha}_{\sigma\beta}\Gamma^{\beta}_{\tau\alpha})]

[math(\displaystyle I = \int(\mathfrak{L} - kg^{\mu\nu}T_{\mu\nu})d\tau)]
[26] 아인슈타인의 아이디어는 게이지 고정 문제와 유사하다.[27] A. Einstein (1914), 『Die formale Grundlage der allgemeinen Relativitätstheorie』, Sitzungsberichte der Königlich Preuß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en (Berlin), Seite 1030-1085.[28] 독문 영문[29] 독문 영문[30] 독문 영문[31] 독문 영문[32] A. Einstein, 『Die Grundlage der allgemeinen Relativitätstheorie』, Annalen der Physik 49: 769-822 독문영문[Einstein(1914)] A. Einstein, "Die formale Grundlage der allgemeinen Relativitätstheorie", Königlich Preußische Akademie der Wissenschaften (Berlin). Sitzungsberichte (1914) : 1030–1085. #[33] 강연의 일부를 필기한 자료가 남아있다. #[34] Berlin is no match for Göttingen, as far as the liveliness of academic interest is concerned, in this field at least.[35] Die Grundlagen der Physik. 1915.11.20(Erste Mitteilung.) D. Hilbert, Nachrichten von der Gesellschaft der Wissenschaften zu Göttingen, Mathematisch-Physikalische Klasse (1915) page 395-408


여기서 [math(d\tau = \mathrm{d}^4x)]이고, [math(\sqrt{-g})]는 좌표 변환 행렬식을 [math(1)]이라 두어 숨겨져 있다. 중력항 라그랑지언을 먼저 살펴보자. 아인슈타인은 당시 공변성을 한정한 상태에서 라그랑지언을 도입하였고 방정식이 완성된 형태와 달랐다. 이러한 선택에 대해서는, 이 라그랑지언은 맥스웰 방정식의 라그랑지언(장의 제곱)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며 두번째로 일반적인 라그랑지언이 변분하는 함수와 그 일계 미분만을 포함한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라그랑지언은 메트릭 텐서의 특성상 적당한 좌표 선택에 따라 지울 수 있기 때문에 불완전하다. 아인슈타인은 11일 완전한 공변성을 확보하고 25일 중력장 방정식을 수정하면서, 라그랑지언 또한 수정해야 함을 깨달았을 것이나, 3월 "일반 상대성 이론의 기초"가 발표되는 시점까지, 그는 이 부분을 수정하지 않았다. (이 때 끼워넣으려 했던 라그랑지언 관련 초고가 발견되었으나, 그는 그것을 삽입하지 않았다.[36]) 다만 물질항 부분([math(g^{\mu\nu}T_{\mu\nu})]를 라그랑지언이라 둔 것) 또한 오류가 있었기에, 이 부분을 "기초"에서 보다 자세하게 해설하였다.

반면 힐베르트는 중력 자체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고 변분 원리에 따라 이론의 수학적 구조를 안정화시키고 물리적 이슈에 대해서는 통일장 이론에 가깝게 접근하여 에너지 보존법칙을 매개로 하여 아인슈타인의 공변성 문제를 해결하고 전자기 방정식을 유도하려 하였다.
구체적으로 힐베르트는 물질을 미에의 이론에 따른 전자기 과정에 한정하고, 중력장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따라 메트릭 텐서로 기술하되 모든 방정식은 일반 공변성을 띤다고 가정하였다. 이로부터 먼저 일반 공변적인 중력장 방정식을 만든다. 여기에 아인슈타인이 구멍논변을 통해 지적했던 인과율을 보존하기 위해 4차원 좌표를 한정하는 방정식 4개를 더 삽입하였다. 다시 말해, 물리 방정식들을 기술하는 통상 4차원 좌표인 세계변수(Weltparameter ;world parameter) [math(w_s)]와, 실제 시간과 공간에 해당하는 변수(시공간 좌표)를 분리하여, 이 변수를 만드는 방정식을 에너지 원리라는 이름으로 도입하였다. 그런데 힐베르트가 도입한 에너지에는 중력장과 전자기장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에너지 법칙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4차원 좌표가 제한되고, 전자기 방정식이 자동으로 유도된다는 것이 힐베르트의 생각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아인슈타인이 11월 11일 갑자기 도입했던 [math(T = 0)] 조건은 힐베르트의 관심사, 즉 중력 문제로부터 전자기 방정식을 유도하는 것에 대해 일시적으로 관심을 가지면서 떠올린 아이디어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1925년 통일장 이론에 손대기 전까지는 대체로 중력과 전자기의 관계에 큰 관심이 없었으며, 당장 2주 후인 11월 25일 방정식이 완전해지면서 이 조건을 망설임 없이 버렸다.

힐베르트의 에너지 원리는 원론적으로 아인슈타인이 생각한 구멍 논변의 보다 세련된 버전이라고 볼 수 있으나, 힐베르트의 방법은 방정식의 일반 공변성을 분리하여 보았다는 점에서 중대한 차이가 있다. 즉, 아인슈타인은 Entwurf이론에서 먼저 공변 범위를 선형 변환으로 제한하고 그 위에서 라그랑지언과 중력장 방정식을 만들었다면, 힐베르트는 먼저 일반 공변적인 라그랑지언을 도입한 후 그 위에 공변성 제한을 가하였다.

힐베르트에게 있어서 중력장 방정식은 부차적 문제로 논문에서는 가볍게 넘기고 있으나, 여기에서 그가 제안한 액션은 잘 알려진대로 현재 아인슈타인-힐베르트 액션(Einstein-Hilbert action) 또는 힐베르트 액션(Hilbert action)이라고 부르는 것과 동일하다.

[math(\displaystyle \int H \sqrt{g} d\omega, \quad H = K + L)]

[math(\displaystyle [\sqrt{g}K]_{\mu\nu} = \sqrt{g}\left(K_{\mu\nu} - \frac{1}{2}Kg_{\mu\nu}\right))]
[36] Appendix. Formulation of the Theory on the Basis of a Variational Principle#


여기에서 [math(K = g^{\mu\nu}K_{\mu\nu})]는 지금의 리치 스칼라이다.

힐베르트는 라그랑지언의 일반 공변성을 가정함으로써 훨씬 단순한 논의로도 옳은 답을 내놓을 수 있었다. 이러한 접근법의 차이는, 힐베르트가 보다 빠르게 올바른 액션을 찾아내는 결과를 낳았다. 힐베르트는 (세계 변수에 대한) 액션의 일반 공변성을 먼저 가정함으로써 올바른 액션을 처음으로 유도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는 제한된 공변성 위에서 라그랑지언과 방정식을 세웠던 아인슈타인의 Entwurf 이론과 확연히 다른 부분이다. 힐베르트가 공변성을 부정했다고 하더라도, 힐베르트는 이후 에너지 원리만 버리면 되었지만 아인슈타인은 공변성을 확장하면서 Entwurf 이론의 상당부분을 완전히 갈아엎어야 했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갑자기 11월 25일 마지막 논문에서 좌표 조건에 관한 문제를 모두 버리고 일반 공변성만을 남겼으며 힐베르트 또한 이후 3월에 논문을 출판하는 과정에서 인과율 논의를 전부 버리면서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힐베르트는 1916년 말 두번째 논문을 출판하면서 공변성을 제한하지 않고 에너지 문제를 다루게 된다. 그러나 힐베르트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문제, 즉 전자기와 중력의 통합은 모든 고전적 통일장 이론이 그렇듯 결국 처참히 실패로 끝났고 더이상 언급이 되지는 않는다. 현재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 기준으로 힐베르트가 남긴 유산은 힐베르트 액션, 그리고 최초로 축약된 비앙키 항등식을 유도하고, 뇌터 정리의 일부를 (뇌터보다 빨리) 도입했다는 데에 있다.


역사적 논란
일반 상대성 이론은 인류 지성사에 있어서 20세기 최고의 단일 업적 가운데 하나이며, 그것을 함축하는 장 방정식을 누가 가장 먼저 완성했는지는 당연히 강한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슈의 성격상 스캔들/흥미 본위로 접근하는 개인이나 학자들이 많았고, 이 때문에 힐베르트의 기하학에 대한 관심과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한 수학자들의 기여 등 보다 거대하고 중요한 맥락이 무시되는 경우가 많았다. (영문 위키 문서 General_relativity_priority_dispute도 선후관계에 대해서만 집중하며 보다 깊은 맥락은 다루지 않는다.) 이러한 맥락을 보고 싶다면 [Corry(2004)][Renn&Stachel(2007)] 등을 참고.

해당 논란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자면, 각자의 장 방정식 논문이 발표된 날짜는 아인슈타인이 25일, 힐베르트가 20일이기 때문에 수학적 구조의 완성은 힐베르트가 5일 빠른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1997년 힐베르트가 작성한 논문의 초본(12월 6일 자)이 발견된 후 앞뒤 정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앞서 언급한 내용들은 모두 이 초본의 내용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힐베르트는 적어도 12월 6일까지 방정식의 공변성을 원론적으로 제한하고 있었으며, 일반 상대성 이론에 완전한 일반 공변성을 부여한 것은 확실히 아인슈타인이 앞선 것이다. 또한 아인슈타인은 물질계를 완전히 일반적으로 다루었으나, 힐베르트는 물질을 전자기 과정으로 한정하였다. 마지막으로 힐베르트의 논문 초본에서는 액션만 등장하고, 방정식 형태는 등장하지 않는다.[37][38] (이 문제는 문서가 발견된 뒤에도 국지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데, 각 인물의 팬덤에서 각자 시나리오를 쓰는 수준으로 가고 있어서 영원히 안 끝날 가능성이 높다.)

이 문제는 실제로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아인슈타인은 18일 받아본 힐베르트의 논문(아마도 앞서 언급된 초본.)을 보고서는, 힐베르트에게 자신의 지분을 강조하는 등 넌지시 불쾌감을 표했고[39] 나중에는 힐베르트가 자신의 이론에 편승하려 한다("nostrify") 혹은 지분을 요구한다고 친구에게 불평하는 등 사이가 악화되었다. 이는 힐베르트의 논문이 자신의 이론(메트릭 텐서와 리만 텐서의 사용)과 거의 일치하는 주장을 하면서도 (아인슈타인을 3년 간 가장 힘들게 했던) 중력의 물리학적 고려는 일체 없고 무엇보다 아인슈타인의 그간 기여에 대해 "아인슈타인의 거대한 문제"라고만 가볍게 언급한 것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는 힐베르트가 아인슈타인과 독립적으로 이론을 완성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후 힐베르트는 출판하기 전에 논문을 대대적으로 수정하면서 아인슈타인이 불쾌해 할 부분을 줄이기 위해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의 역할을 강조하는 문구를 여기저기에 끼워넣었고, 이후에도 일반 상대성 이론을 아인슈타인의 이론이라 불렀다. 아인슈타인 역시 오랜 관계(그들은 정치적으로도 -반전 주의- 입장을 같이하는 등 맞는 면이 많았다.)를 끝내고 싶지 않아 그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12월 20일 힐베르트에게 화해를 청했고, 그들의 관계는 다시 이전으로 회복했다.

최근 들어 우리 사이에는 무언가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습니다만, 나는 그 이유를 더 이상 파고들고 싶지 않습니다. 난 그에 대한 괴로운 감정에 맞서왔으며, 이제, 말끔히 해냈습니다.

난 이제 당신에 대해 다시 순수하게 다정한 마음으로 생각하며, 당신도 내게 똑같은 것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객관적으로, 이 초라한 세상에서 탄생한 두 진실된 동료가 서로에게 즐거움을 선사하지 않는다는 건 부끄러운 일일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이 힐베르트에게 보낸 편지, 1915년 12월 20일 #


결과적인 중력 미분 방정식은, 나의 생각에 아인슈타인이 최근 제기한 '일반 상대성(Allgemeinen Relativität)'이라는 장대한 이론(großzügigen Theorie)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힐베르트, "물리학의 기초"(Die Grundlagen der Physik) 출판본의 일부

아인슈타인은 이듬해 5월 경 변분법을 바탕으로 방정식을 다시 제시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40] 힐베르트의 접근법에 대해 검토하면서 힐베르트와 다시금 학술적 교류를 할 기회가 생겼다. 이 때 아인슈타인은 힐베르트의 방법을 그닥 좋아하지는 않았으나[41], 자신이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부분에 대해 힐베르트에게 솔직하게 물어보고 깊게 논의할 수 있었다.[42][43]


6.2.2. 슈바르츠실트 해(1916)[편집]


괴팅겐의 카를 슈바르츠실트(Schwarzschild)는 1915년 11월 18일의 3주차 논문(수성의 근일점 운동을 해결한 논문)을 보고서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에 흥미를 느꼈으나, 그의 근사적 접근법(과 그 계산)에 의문을 품고 다시 계산하여 얼마 지나지 않은 12월 22일, 슈바르츠실트는 중력장방정식의 첫 번째 “엄밀 해”를 아인슈타인에게 보여줬다. 이것이 바로 슈바르츠실트 해이다.

[math(\displaystyle ds^2 = \left(1-\frac{r}{R}\right)dt^2 - \frac{dR^2}{1-\frac{r}{R}} - R^2(d\theta^2 + \sin^2\theta d\phi^2))]
[Corry(2004)] Leo corry, "David Hilbert and the Axiomatization of Physics (1898–1918): From Grundlagen der Geometrie to Grundlagen der Physik"[Renn&Stachel(2007)] Jürgen Renn & John Stachel, "Hilbert's foundation of physics. From a theory of everything to a constituent of general relativity"[37] Leo Corry, Jürgen Renn, John Stachel: "Belated Decision in the Hilbert-Einstein Priority Dispute", SCIENCE, Vol. 278: 1270-1273 (Nov. 14, 1997)#[38] 1915년 12월 6일자 논문 초본. #[39] "문제는 [math(g_{\mu\nu})]에 대한 일반 공변 방정식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리만 텐서의 도움으로 쉽게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이 방정식이 뉴턴 법칙의 간단하고 자연스러운 일반화임을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40] 1915년 11월 논문은 좌표를 한정했고 변분법이 완전하지 않았기에 이 부분을 보충할 필요가 있었다.[41] To 에렌페스트, 1916.5.24. 참고. 힐베르트의 방법이 "불필요하게 물질을 ("미에의 전자기 이론"에) 한정하고, 복잡하고, 과정을 숨긴다(슈퍼맨처럼 보이려 한다(...))"라고 불평하였다.[42] 힐베르트와의 5월 교류 편지들.[43] Was Einstein the first to discover general relativity? By Daniel Kennefick (March 09, 2020) 참고.


아인슈타인은 크게 놀라면서 그를 한껏 띄워줬는데, 일반상대론의 중력장방정식은 비선형 편미분방정식으로 매우 다루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직 완전히 검증되지 않은 자신의 이론에 직접 커다란 기여를 해준 사람에 대한 호의이기도 했다.) 그런데 슈바르츠실트는 제1차 세계대전의 독일-러시아 간의 전쟁에서 군인으로 참전중이었기에, 아인슈타인이 대신 논문을 써줬다.

그 문제에 대한 유일성을 증명하는 당신의 계산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곧 출판할 수 있기를 빕니다! 질점 문제에 대한 엄밀한 접근이 그토록 간단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

나는 이론에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다. 뉴턴 이론에 근사된다는 사실은 자명하지 않으며, 아직 충분히 확실하지는 않지만 근일점 이동과 선 이동(linienverschiebung; 적색 편이?)을 설명한다는 점이 더욱 기쁩니다. 이제 빛의 굴절 문제가 가장 흥미롭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슈바르츠실트에게 답장한 편지 (1915.12.29.)


안타깝게도 슈바르츠실트는 전장에서 생긴 천포창으로 이듬해 5월 11일 사망하였고, 같은 날 논문도 발표된다. 아인슈타인은 1916년 6월 29일 베를린에서 열린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 학술대회에서 그에 대한 추도사를 읽었다.


6.2.3. 중력파(1916)[편집]


중력파(Gravitational wave)는 중력 복사(Gravitational radiation)의 다른 말로, 전자기 복사(전자기파)와 대응된다. 일반 상대성 이론이 발표되기 이전에는, 헤비사이드(1893), 푸앵카레(1905)가 중력파 개념에 대한 언급을 한 바 있다. 물론 이 때 중력파는 시공간 곡률에 관해 대한 것이 아니라, 전자기파에 대응되는 중력 복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 특수 상대성 이론에 맞춰 중력 이론이 정립된다면 라플라스 연산자가 달랑베르 연산자(파동 연산자)로 바뀌므로 중력 복사가 무조건 있어야 한다는 등의 상식적 접근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중력파에 대한 이론적 접근은 아인슈타인의 1916년 중력파 논문에서 처음 등장한다. [44] 행성의 궤도를 설명하는 데에는 슈바르츠실트 해처럼 중력의 세기에는 제한이 없지만 정적인 해가 유용하다면, 파동을 설명하려면 매우 작은 세기를 가정하되 정적 조건을 빼야 한다. 아인슈타인은 중력장을 선형근사하여 달랑베르 연산자 형태의 선형 중력장 방정식을 유도하고 그 안에서 중력파 이론을 다루었다.


6.2.4. 현대 우주론과 우주상수(1917)[편집]


현대 우주론은 아인슈타인이 중력장 방정식의 경계 문제를 다루면서 탄생했다. 1917년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 이론의 우주론적 고찰』[45]라는 논문을 출판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뉴턴 중력의 경계값 문제와 비교하여 우주론적 관점에서 자신의 중력장 방정식이 어떻게 수정되어야 할지, 그리고 이 때 우주가 어떤 모델을 갖게 될지 논하였다. 아인슈타인은 여기에서 균일한 곡률을 지닌 정적 우주 모델을 제시하였다. 이 우주는 4차원 공의 표면과 같은 공간 구조를 가지며 유한하다.


아인슈타인 우주
Einstein Universe

이 논문은 최초의 일반 상대성 이론 기반 우주론 논문으로써 뉴턴이 제시한 우주 원리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의 적용, 최초의 현대적 우주 모델 제시, 우주 상수의 도입 등 여러 의의가 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제시한 정적 모델은 정작 수학적으로 안정적이지 않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곡률이 균일한 공간은 일반적으로 역동적인 해를 갖는다. 이후 프리드만, 르메트르 등이 좀 더 발전된 역동적 우주 모델을 제안하는 등 현대 우주론은 일반 상대성 이론과 함께 서서히 발전하였다.


6.2.5. 에딩턴의 관측실험(1919)[편집]


아인슈타인은 1911년 그의 논문 『빛의 진행에 대한 중력의 영향』에서 자신의 예측(중력에 의한 빛의 굴절 현상)을 검증하기 위해 개기일식을 활용할 수 있다고 제안하였다. 사실, 특수 상대성 이론도 과학계에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은 시점에 그것으로 중력 이론을 다루겠다고 나서는 건 무모한 도전으로 보였고, 심지어 아인슈타인은 이제 막 교수직을 얻은 신참이었기에 자신의 그러한 처지를 잘 알고 있었으며, 자신의 요청에 응할 사람이 나타나길 간절히 바라고, 적극적으로 구해다녔다.

독일 천문학자 프로인틀리히(Erwin Freundlich)가 이에 응하였다. 1911년과 1912년에 그는 미국 천문학자 페린(Charles Perrine)에게 개기일식 실험을 요청하였고, 그는 받아들였다. 아인슈타인은 그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기대감에 부풀었다. 첫번째 시도는 1912년 10월 10일 브라질에서 일어나는 일식을 노렸으나, 이는 우천으로 실패하였으며 1914년 8월 21일 일식을 활용하려는 두번째 시도 역시 구름 때문에 실패하였다. 아인슈타인은 김이 새고 말았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에게 이 두 번의 실패는 엄청난 행운으로 돌아왔다. 1915년 말 새로 만든 중력장 방정식을 이용해 굴절값을 다시 계산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기존 계산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이는 기존의 계산이 공간의 곡률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빛의 굴절 공식을 기존의 두 배인

[math(\displaystyle \frac{4GM}{c^2\Delta})]
[44] Albert Einstein (1916). Näherungsweise Integration der Feldgleichungen der Gravitation. Königlich Preußische Akademie der Wissenschaften (Berlin). Sitzungsberichte. #[45] A. einstein (1917), "Kosmologische Betrachtungen zur allgemeinen Relativitätstheorie", Sitzungsberichte der Königlich Preuß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en (Berlin), Seite 142-152.


로 고쳤으며, 태양에 의한 별빛의 각거리 이동량을 [math(1.7'')]로 수정하였다.

만약, 1912년과 1914년 관측 실험이 성공했다면 아인슈타인 이론은 틀린 것으로 판정났을 것이다. 적어도, 이는 (빛이 입자라고 가정하였을 때) 뉴턴 중력이 예측하는 값과 동일하여 실험적으로 구분이 불가능했다. 실험적 증거를 중시한 아인슈타인은 이 때 의욕이 크게 꺾였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으며 일반 상대성 이론의 검증은 1919년 영국 천문학자 에딩턴(Eddington)의 몫으로 넘어갔다.


파일:1919_eclipse__iau1907c_.jpg

소브랄(Sobral)에서 4인치 대물경으로 촬영된 일식 사진
(Dyson, Eddington & Davidson, 1920)[46]

기본적인 실험 구조는 (아인슈타인이 제안한 방식대로)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것으로 예측되는 시점에 태양이 지나가는 위치의 별들을 몇 개월 전 미리 밤하늘에서 촬영한 뒤,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날 그것을 다시 촬영하여 별들의 이동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1919년의 일식을 고른 이유는 (제1차 세계대전 탓이기도 하지만) 그 때 태양 근처에 있는 별이 히아데스 성단(Hyades cluster)으로 비교적 밝았기 때문이었다.

다이슨은 연구팀을 둘로 나누어 1919년 5월 29일 일식 날 (에딩턴이 소속되었던) 캠브리지 천문대(Cambridge Observatory) 팀은 프린시페 섬에서, 그리니치 천문대(Greenwich Observatory) 팀은 소브랄에서 사진을 촬영하도록 지시하였다. 당시 촬영된 건판은 소브랄 팀의 4인치 대물경(4-inch object glass)과 천체사진용 대물경(astrographic object glass)으로 촬영된 것(각각 8장과 19장), 프린시페 팀이 촬영한 것(16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분석 결과, <4인치 대물경>은 일반 상대성 이론의 예측과 가까웠으며, <프린시페 팀>은 중간, <천체사진용 대물경>은 고전 역학의 예측과 가까웠다. 그러나 사진의 질을 고려하면 <4인치 대물경>이 가장 선명하였으며, <프린시페 팀>은 대부분 구름에 가려져 선명도가 떨어졌다. <천체사진용 대물경>은 중간에 초점이 흔들려서 사진이 심하게 왜곡되어버려 분석에서 배제되었다. 다이슨 관측팀은 오차를 고려하여 <4인치 대물경>에 가장 비중을 두었고, 최종적으로 일반 상대성 이론이 더 실험값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이 과정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소수) 의견이 지속적으로 나왔으나, 결국 1979년 개선된 장비로 건판을 재검증한 결과 에딩턴의 분석이 옳았던 것으로 최종 판정되었다. 이에 따르면, <4인치 대물경>의 경우 기존과 큰 차이가 없었으나([math(1.98'' \pm 0.18'')][math(1.90'' \pm 0.11'')]) <천체사진용 대물경>은 수치가 크게 달라져 [math(0.93'')](큰 오차)에서 [math(1.55'' \pm 0.34'')]로 수정되었다. 오차를 고려하여 둘을 종합하면 [math(1.87'' \pm 0.13'')]로, 이는 아인슈타인의 예측값([math(1.75'')])에 가까운 수치이다.[47]

파일:Dyson, Eddington, Diagram 2..png
관측된 별의 각거리 이동량은 얇은 선으로 정리되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값은 굵은 선, 뉴턴의 이론값은 점선이다.
(Dyson, Eddington & Davidson, 1920)

이 관측 결과는 1919년 11월 6월 런던에서 열린 왕립 학회(Royal Society)와 왕립 천문 학회(Royal Astronomical Society) 간의 커뮤니케이션에서 검토되었고, 공식적으로 아인슈타인 이론의 승리를 인정하였다.

이제 나는 이 중대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논의를 촉구한다. 만약 이 결과가 오로지 중력에 의해 빛이 꺾이는 것만을 보여준다면, 그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사실, 뉴턴은 이미 그의 "광학(Optics)"의 첫 질문에서 동일한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의 예측은 아마도 현재 값의 절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결과는 고립된 것이 아니며, 물리학의 가장 근본적인 개념에 영향을 끼치는 과학적 발상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대륙의 일부이다. (...) 이것은 뉴턴 이후 우리가 중력 이론과 관련하여 얻은 가장 중요한 결과이다. (...)

아인슈타인과 뉴턴의 중력 법칙의 차이는 특수한 경우에서만 발생한다. 아인슈타인 이론에 대한 진정한 관심사는 그 결과보다는 그것을 얻는 방법에 있다. 그의 이론이 옳다면 이것은 우리에게 중력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아인슈타인의 추론이 옳다는 것이 앞으로도 유지된다면 - 이미, 수성의 세차운동과 지금의 일식과 관련한 매우 혹독한 두 시험을 통과하였다 - 이는 인간 사유(Human Thought) 사상 최고의 성취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 이론의 약점은 수식이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불변량 이론(theory of invariants)과 변분학(calculus of variations)에 대한 상당 수준의 지식이 있지 않는 이상 어느 누구도 이 새로운 중력 법칙을 이해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조지프 존 톰슨(J.J.Thomson), 왕립 학회 42대 회장(1915~1920)의 평가[48]


과학계는 말 그대로 뒤집어졌다. 고전 물리학을 상징하는 뉴턴의 이론의 마지막 온기를 담은 중력마저 새로운 물리학에 의해 대체된 셈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 사건은 그간 물리학을 지배했던 영국의 뉴턴이 자신이 몸담았던 영국의 왕립 학회에서 독일의 아인슈타인에게 왕좌를 물려준다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여 제 1차 세계대전 직후 크게 상처입은 양국에 화해 및 평화의 메시지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1919년 11월 7일
런던 타임즈 기사
1919년 11월 10일
뉴욕 타임즈 기사

파일:images_medium_fg3.jpg


파일:Einstein_theory_triumphs.png

과학의 혁명.
우주의 새로운 이론.
뉴턴의 학설이 무너지다.
빛은 하늘에서 모두 삐딱하다
아인슈타인 이론이 승리하다
12명의 현자를 위한 책

뉴욕 타임즈 기사의 마지막 문구는, 당시 왕립 학회장이던 톰슨의 평가처럼 일반 상대성 이론이 그만큼 물리학계 내에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이론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이듬해에 당시 아인슈타인과 함께 상대성 이론을 창시한 물리학자로 알려진 로런츠가 전체 상대성 이론에 대해 저술한 해설서의 서두에는 이런 언급이 있다.

(출판사 서문)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이해하는 사람이 전세계에 12명을 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대성 이론에 관하여 격렬하게 토론이 오가는 이 주제의 정보에 대한 지속적인 요청이 있다는 건 사실이다. (...)

(저자 서문) 11월 6일 런던에서 열린 왕립 학회에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박사의 "상대성 이론"을 인정한 것은 대서양 양안의 과학계를 충격에 빠트렸다. 아인슈타인 박사가 그의 이론을 제기한 것은 거의 15년 전이다. 현재 그의 이론에 대한 관심이 재개된 것은, 최근 태양 근처를 통과하는 광선의 경로가 영향을 받는지 확인하기 위해 5월 말의 개기일식 때에 수행된 관측 보고서에서 그의 이론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

로런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The Einstein Theory of Relativity), 1920 wikisource


Abraham Pais가 쓴 유명한 아인슈타인 평전 "Subtle is the Lord"에서는 아인슈타인이 당시 소식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증언하였다.

1919년 가을, 한 학생과의 토론 중에 아인슈타인은 태양에 의한 빛의 굴절이 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 따른 예측과 일치한다고 자신에게 알린 전보를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그 학생은 아인슈타인에게 실험이 실패했다면 어떻게 말했을 건지 물어보았고,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랬다면 나는 에딩턴 경을 위로했을 것입니다. 이론은 맞으니까요." (Da könnt’ mir halt der Liebe Gott leid tun. Die Theorie stimmt doch.)

Abraham Pais, "Subtle is the Lord, The Science and Life of Albert Einstein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1982]), p. 30"


6.3. 과도기(1925~1950s)[편집]


1919년 폭발적으로 증가한 관심은 얼마가지 않았다. 일반 상대성 이론의 난해함, 복잡함, 그리고 낮은 활용도로 인해 물리학계의 주목은 순식간에 가라앉는다.[49] 물론, 이 시기에도 중요한 발전들이 있었으며 특히 수학자들을 비롯한 이론가들의 기여가 컸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시간과 공간에 대하여 철학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매우 컸으며, 근원적인 질문을 자극하는 우주에 대해 이론적으로 다루는 유일한 통로였다. 1934년에는 중성자별(neutron star), 1939년에는 블랙홀(black hole)에 대한 이론적 근거가 마련되었으며, 1929년에는 허블 법칙이 관측적으로 입증되는 등 일반 상대성 이론의 발전에 있어 뼈와 살이 되는 부분들이었다.

그러나, 양자역학에 비해 관심도가 떨어지는 건 사실이었으며 일반 상대성 이론은 거의 완벽히 물리학의 비주류로 밀려난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주로 뉴턴 법칙의 예측에 대한 "사소한" 오차의 교정에 활용되는 데에 머물렀다. 사회적 여건이 갖춰지고, 관측 기술이 충분히 발달하고, 일반 상대성 이론이 수많은 물리학자, 수학자, 천문학자들에 의해 충분히 발전할 때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6.4. 황금기(1955~)[편집]


이 시기에 겹쳐진 여러가지 과학적, 기술적, 사회적 요인들은 일반 상대성 이론에 소위 황금기(Kip thorne) 또는 르네상스(Clifford Will)라 불리는 재전성기를 가져다 주었다. 이 전성기는 초창기(1919~)처럼 특정 사건이 가져다 준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었으며, 일반 상대성 이론이 현대 물리학을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게 만들어주었다. 이러한 경향은 현재진행형이다.

발단은, 1955년 베른에서 상대성 이론 5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 소위 상대론자(Relativist)라 불리는 (마이너한) 상대성 이론 전문 연구가들이 처음으로 모여 국제적인 컨퍼런스를 연 것이다. 당연히 이 자리에 아인슈타인도 초대되었지만, 불행히도 아인슈타인은 컨퍼런스 몇 개월 전 사망하였다. 이는 그들에게 "아인슈타인의 유산을 우리가 이어나가야 한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물론, 더 중요한 건 이 자리가 전세계에 뿔뿔이 흩어져서 개인적으로 연구하던 상대성 이론 전문가들이 처음으로 모여 성과와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첫 번째 계기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간 그들이 연구했던 성과들이 한 데 모이고, 그간의 발전을 정리하고 다학제적으로 연구를 발전시킬 수 있는 하나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이다.

1950년대 후반 ~ 1960년대 초 발견된 퀘이사(Quasar) 혹은 준항성전파원(Quasi-Stellar radio source)의 기묘한 성질은 그들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퀘이사는 예측되는 표면적 대비 매우 강한 전파를 방출하여 그간 다뤄졌던 어떠한 천체도 이러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 이는 곧 연구자들에게 "블랙홀"이라는 이름을 떠오르게 해주었다. 하지만 일반 상대성 이론은 그간 축적된 천체 물리학의 성과들을 반영할 만큼 활발한 연구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여서(먼지 투성이 책을 다시 꺼내든 것과 같다.) 중력 붕괴, 특이점에 대한 연구를 다시 진행해야 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일반 상대성 이론은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이후, 1968년 처음 보고된 펄사(pulsar)는 중성자별임이 명백했고, 1972년 발견된 쌍성 펄사에 대한 연구는 중력파로 이어졌다. 펄사는 지금도 일반 상대성 이론을 비롯한 모든 중력 이론에 대한 최적의 실험실 역할을 하고 있다. 블랙홀 역시, 1960년대에 보고된 백조자리 X-1을 통해 간접적으로 증명되는 데에 이른다. 1965년 발견된 우주배경복사(CMB) 역시 우주론과 함께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는 데에 기여하였다.[50]


7.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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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F.W.Dyson, A.S.Eddington & C.Davidson, 1920, "A Determination of the Deflection of Light by the Sun's Gravitational Field, from Observations Made at the Total Eclipse of May 29, 1919", Phil.Trans.R.Soc.Lond.A1920 220#[47] G. M. Harvey, ‘Gravitational deflection of light: a re-examination of the observations of the solar eclipse of 1919’, Observatory 99, 195 (1979). #[48] The Observatory, A Monthly review of astronomy. Vol.42, No.545. p. 394 (1919.11.) #[49] 실제로 뉴턴의 이론을 대체했을 뿐, 여전히 일상생활이나 공학에선 뉴턴 역학을 포함한 고전역학의 편의성 때문에 뉴턴의 것들이 상대성 이론 이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50] Alexander Blum, "The Renaissance of relativity" (october 13, 2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