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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士仁/傅士仁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4. 이름 논란
5. 미디어 믹스



1. 개요[편집]


후한 말, 삼국시대의 인물. 자는 군의(君義). 유주 광양군 사람으로 형주 공방전 당시 오에 투항했다. 위와 오에서도 조롱을 받았다고 한다.


2. 정사[편집]


관우 수하의 부하 장수로 형주 공방전 당시 관우가 북상하기 직전 미방과 함께 선봉이 되었다. 관우전에는 관우가 그들을 업신여겼고 관우가 출군한 이래 미방, 사인은 군수물자를 공급했으나 그를 돕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아 관우가 ‘돌아가면 응당 죄를 다스릴 것’이라 하니, 미방과 사인은 모두 두려움을 품고 불안해했기에 손권의 꾀임에 영접했다고만 나오는데 여몽전을 보면 내역이 조금 다르다.

여몽전에는 여몽이 관우의 부재를 틈타 형주에 쳐들어오자 처음에는 사인이 공안에서 막아 지키니 여몽이 우번에게 명해 그를 설득하게 했는데 오히려 사인이 이를 만나기를 거부했다. 단순히 반역자의 이미지라고 보기엔 애매한 부분이고 분명 사인 역시 처음에는 수비를 맡아 성을 지키려고 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여기에 우번이 '우리가 왔는데 척후도 없고 봉화도 오르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그 쪽에 이미 배신자가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지 않소? 어차피 여몽 장군이 남군에서 육로를 끊어놓아 여기서 버텨봐야 그대의 가족만 망할뿐, 싸워도 살길이 없을것이니 항복하시오'라고 협박 편지를 보내니 사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투항했다고 한다. 우번은 사인의 투항 이후 이는 휼병[1]이니 사인은 남군으로 데려가고 공안에 병력을 주둔시켜야 한다고 했고 여몽은 그 말을 따랐다. 이후 기록에서는 미방이 사인을 보자마자 항복했다고 하는데 오록에는 손권과 내통한 주체가 군수물자 다 태워먹고 관우에게 질책을 들어 두려움을 품은 미방으로만 묘사되어 있다. 그러니까 같은 꾀임이라도 사인은 어쩔 수 없이 항복한 거고 미방은 대놓고 항복할 생각을 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2] 어쨌든 이후 형주를 잃은 관우는 갈 곳 없는 상태에서 맥성을 나섰다가 잡혀서 처형된다.

결론적으로는 어쨌든 미방과 사인 둘 다 배신자긴 하지만, 남겨진 정사의 기록으로 본다면 연의와는 반대로 실제로는 미방보다 조금은 충성심 면에서 나은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미방은 항복할지 말지 끝까지 갈등하는 연의와는 다르게, 항복 전부터 이미 손권과 내통했다는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

이후 그나마 기록이 존재하는 미방과는 달리 사인이 어떻게 되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쩌리 취급 받다 죽었을지, 적당히 부를 누리다 죽었을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다.


3. 연의[편집]


우번과 친구라서 우번이 쉽게 투항시켰다고 하지만 사인은 유주 광양군 사람[3]이고 우번은 양주 회계군 여요현 사람이다. 유주는 북방이고 양주는 남방에서도 구석에 있는 곳인데 이렇게 북쪽과 남쪽 사람이 그렇게 쉽게 교류했을 가능성이 적어 보인다. 어쨌든 저항없이 쉽게 항복한 것만으로도 더럽게 욕을 처먹을 판에 스스로 발벗고 나서서 미방을 항복하게 설득했다. 다만 이건 연의에서의 이야기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후일 유비극대노하여 무려 70~75만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이릉에 쳐들어왔을 때, 유비군의 기세가 흉흉하여 오나라가 위태위태하자 겁을 먹었는데 때마침 미방이 "다시 유비에게로 돌아가자"고 권유하자 그말에 넘어갔다. 사실 사인은 유비에게 돌아가봤자 죽을것이라는 불안감은 가지고 있었지만 미방의 내 여동생은 촉제(유비)의 부인이었고 (여동생의 친아들은 아니지만) 아두(유선) 태자는 내 조카니 용서해 줄 것이다 라는 한 마디에 마음을 돌렸다.[4] 그러나 용서받기에는 지은 죄가 너무나도 무거웠기에[5] 유비는 당연하게도 이들이 돌아오자마자 처형했다. 그러나 이는 연의 한정으로, 정사에는 그가 이릉대전 당시에 유비에게 처형당했단 기록은 커녕, 항복했단 기록도 없다.

연의에서는 미방과 함께 쌍으로 배신자로 미움을 받는 인물이지만 여몽전을 감안하면 오히려 진짜 배신자인 미방 때문에 덩달아서 동급 취급 받는 장수라고 볼 여지가 있다.


4. 이름 논란[편집]


《정사 삼국지》 <관우전>에는 부사인(傅士仁)으로 기록되었고 《삼국지연의》도 이를 따랐지만, 정사 전체적으로는 사인으로 쓴 용례가 더 많아 현대에 나온 역사서적들은 거의 사인으로 쓴다.

다만 호삼성은 사인을 칭할 때 부라고 불러 호삼성은 부사인이 이름이라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지집해》를 보면 역사학자들도 이를 가지고 논의한 것을 볼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

부씨는 실존하는 성으로, 동시대의 부융, 부첨 부자 등이 대표적이다. 남성 세 글자 이름도 있기는 했다. 예를 들어 장의거, 주불의, 주만세 등. 여성 이름으로는 왕원희, 보연사, 손노반, 전혜해, 위화존 등 많다.


5. 미디어 믹스[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사인(삼국지)/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譎兵, 기만술에 의한 군사행동[2] 게다가 미방이 그 이전부터 내통을 했다면 애시당초 사인의 항복 역시 미방의 지분이 있었다는 의미이다.[3] 이 출신지 때문에 사인이 유비군의 초창기 일원 중 하나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유비도 유주 출신에 거병한 곳도 유주이기 때문에. 사실 초창기 멤버면 더욱더 그가 항복 시 눈물까지 흘린게 더 개연성이 생기는 것도 있고 말이다.[4] 그리고 여기서 언급은 안되지만 미방의 형이자 개국공신 중 한 명인 미축을 봐서라도 둘을 용서해줄거라고 생각했을수도있다.[5] 군수물자를 태워먹은 것만해도 중죄인데 거기다 병량보급마저도 제대로 안 했고 심지어는 이에 대한 처벌을 받는 것이 두려워 오나라로 항복했기 때문에 관우와 관평마저 사망, 이로 인해 형주까지 오나라 영토가 되어 버린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용서받을수가 없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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