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오만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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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적 관계
2.1. 이바디파의 오만 정착
2.2. 근세
2.3. 19세기
2.4. 20세기
2.5. 21세기
3.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사우디아라비아오만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사우디와 오만은 언어, 문화, 종교 등에서 공통점이 많은 편이고 양국간의 교류와 협력이 매우 활발한 편이다.


2. 역사적 관계[편집]



2.1. 이바디파의 오만 정착[편집]


아라비아 반도가 7세기에 이슬람교가 발흥한 이후, 아라비아 반도의 주민 대다수가 아랍 토속신앙을 버리고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정통 칼리파 시대 무아위야와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사이에 전쟁에서 알리의 추종자들 중 일부가 알리에게 실망한 것을 계기로 알리의 진영을 이탈하였는데, 이들을 카와리즈파라고 부른다.

무아위야는 알리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칼리파위를 굳혔으며 이슬람 제국은 우마이야 칼리프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카와리즈파는 우마이야 왕조 시대 내내 이단으로 탄압을 받으면서도 세력을 존속하였는데, 우마이야 칼리프조와 압바스 칼리프조 교체기 시기 카와리즈파 중에서 비교적 온건 포지션이던 이바디파가 서기 8세기 무렵 오늘날의 오만 지역으로 이동하여 이맘국을 세운다.

아라비아 반도는 강수량이 적고 사막이 많아 생산력이 낮았던 지역으로 정통 칼리파 시대 이후 성지 메카메디나 그리고 그나마 농사가 가능한 예멘 지방과 일부 항구도시들을 제외하면 사실상 내부변방지대 수준으로 방치되었다. 굳이 아바스 칼리프조에서 아라비아 반도 사막을 넘어 이바디파를 토벌하기도 곤란한 일이었고, 아바스 칼리프조는 이라크 일대에서 일어난 카와라즈파 반란인 잔즈 반란은 적극 토벌하였으나, 오만 일대에 자리잡은 이바디파는 딱히 자신들에게 해코지를 하는 것도 아니라서 토벌하지 않고 방치하였다. 이렇게 이바디파는 중세 오만 일대의 주요 종파로 남았고 이는 오늘날에 이른다.



2.2. 근세[편집]


아라비아 반도는 지금의 사우디에 해당하는 헤자즈 지역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헤자즈 지역은 황무지가 많아 경제적인 가치는 없었지만, 이슬람의 성지 메카메디나가 위치한 지역이라는 상징성이 있었고, 오스만 제국은 정치적인 이유로 많은 적자를 감수하면서까지 이 지역의 통제권을 유지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시아파에 맞선 순니파 종주국의 지배자, 칼리파로의 권위를 내세울 목적으로 메카로 가는 성지순례 루트의 치안을 유지하고 성지순례객들에게 물과 식량을 공급하는 사업을 진행하였다. 다시 말해서 오스만 제국의 헤자즈 지역 지배는 점(메카와 메디나)과 선(성지순례 루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오스만 제국이 아라비아 반도 전역의 베두인들을 모두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스만 제국의 헤자즈 지배는 철저히 간접적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근세 오만 지역의 항구도시들은 포르투갈의 침략을 겪으면서 포르투갈에게 예속당하고, 많은 오만인들이 가톨릭으로 강제개종당했다. 전통적인 무슬림들의 무역 루트가 붕괴되자 오만의 무슬림들은 해적이 되어 인근 해안의 상선이나 어촌들을 약탈하기 시작하는데, 이런 해적들이 네덜란드영국의 지원을 받아[1] 힘을 합치면서 포르투갈을 몰아내고 오만 제국을 세운다. 오만 제국은 영국과 네덜란드, 오스만 제국과 협력을 하면서 교역을 했다. 17세기 말 오스만 제국의 제2차 빈 공방전에서 대패한 이래 국력이 약해진 반면, 오만 제국은 포르투갈이 운영하던 동아프리카 노예 무역 사업을 흡수하여 국력을 신장시키기 시작했다. 오만 제국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말을 수입한 후 아프리카 식민지 영토로 보냈으며, 이렇게 오만의 동아프리카 영토로 보내진 말들은 오만 제국의 기병대를 유지하는데 활용되었다. 오만 제국 기병대의 주 역할은 현지인 흑인들을 공격하여 노예로 납치하는 일이었다.

포르투갈 해양제국이 몰락하자 오만 제국은 포르투갈이 모잠비크에서 벌이던 노예 무역 사업을 흡수하여 동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납치하여 세계 각지에 수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흑인 인구가 아라비아 반도로 대거 유입되었다.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 인구 중 흑인 인구의 비중이 상당한 수준인데, 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바로 오만 제국이 노예 무역을 하던 시기 사우디아라비아의 유입된 흑인들의 후손이다.


2.3. 19세기[편집]


헤자즈네지드 지역에 와하브파가 유행하면서 아라비아 반도의 종교지형이 급변하게 되었다. 다만 이바디파는 순니파들과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온건 성향이 강했고, 이바디파를 믿는 오만인들과 와하브파를 믿는 여타 베두인들은 같은 아랍인이라는 문화적 동질성도 있고 해서 종파 차이에도 불구 갈등이 적었다. 이러한 연유로 와하브파는 이바디파 대신에 이란의 시아 12이맘파를 주적으로 삼고 잦은 시아파와 잦은 무력충돌을 벌였다.[2] 다른 한편으로 19세기 초반에서 중반까지 당시의 오만 제국의 국력과 부는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와하브파 신도들 입장에서도 오만 제국은 결코 함부로 공격할 만큼 만만한 대상은 아니었다. 또한 아라비아 반도들의 베두인들은 말을 오만 제국의 아프리카 영토로 말을 수출하면서 많은 수입을 올리는 상황이었기 때문에(오만 제국의 동아프리카 식민지는 파리 때문에 자체적으로 말을 사육하기 어려운 환경이었고, 군마 한 마리는 흑인 노예 20~50명 정도의 가격에 거래되었다.) 오만 제국을 어설프게 잘못 공격하면 물주를 공격하는 팀킬이 되는 수가 있었다.

오만 제국은 세력이 강했던 시절에는 수도를 잔지바르로 옮길 정도였지만, 영국의 견제를 받으면서 몰락하였다. 오만은 1892년부로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2.4. 20세기[편집]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면서 사우디 지역은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영국의 지배는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졌고 이후에 양국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뒤에 수교했다. 그리고 OPEC의 회원국들이 되었다.


2.5. 21세기[편집]


양국은 이슬람 협력기구, 아랍 연맹, 걸프 협력회의의 회원국들이다. 양국은 언어, 문화, 종교 등에서 공통점이 많다보니 교류와 협력을 자주 하고 있다. 사우디와 오만은 이슬람교가 국교이지만, 종파에서 사우디가 순니파에 속하는 반면, 오만은 이바디파에 속한다는 점에서 차이점도 큰 편이다. 오만은 매년 메카에 가서 성지순례를 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양국간에는 긴밀히 협력하고 있지만, 전술했다시피 종파간 차이가 커서 오만도 사우디와는 일부 갈등이 존재하는 경우가 있다. 게다가 사우디가 와하비즘과 관련된 문제가 발생되고 있는 반면, 오만은 사우디와 달리 이바디파를 믿고 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극단주의를 막고 있다.

2021년 7월 11일에 오만의 하이삼 빈 타리크 알사이드가 사우디를 처음으로 방문해 경제협력을 논의하기로 했다.#


3.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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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항해시대 당시 네덜란드는 포르투갈과 아시아 식민지를 놓고 경쟁하는 사이라서 이이제이 차원에서 포르투갈인들과 전쟁을 벌이는 무슬림들을 많이 도와주곤 했다.[2] 와하브파 신도들은 1801년에 시아파의 성지인 이라크 카르발라를 공격하여 약 5천여 명 가량의 시아파 신도들을 우상숭배자라고 학살하였던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