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씨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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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속기간187년 ~ 226년
이칭동월(東越)
위치광둥성, 광서성, 베트남 북부
수도교지(交阯)
주요 군주초대 사섭
말대 사휘
언어상고 중국어, 고대 베트남어
종족한족, 월족
성립 이전후한 교주
멸망 후오(삼국시대)
현재 국가중국
베트남

1. 개요
2. 역사
2.1. 성립 이전
2.2. 사섭의 집권
2.3. 멸망
3. 대외관계



1. 개요[편집]


후한 말기 ~ 삼국시대(중국) 초반 중국 남부 교주[1] 일대에 존속했던 세력.

요동 공손씨 정권과는 달리 따로 칭왕하거나 국가를 세우지는 않았으며, 손권에게 신속했으나 사실상 독자 세력에 가까웠다.

별다른 반란없이 교주 일대를 안정적으로 통치했고, 베트남 북부 인프라 구축에도 기여해서 베트남에서 평가가 좋은 편이다. 쩐 왕조는 사섭을 선감가응령무대왕(善感嘉應靈武大王)으로 추존했으며, 베트남인들은 사섭을 사왕(士王)으로 부르는등 높이 평가했다.


2. 역사[편집]



2.1. 성립 이전[편집]


본래 사섭의 가문은 예주(豫州) 노국(魯國) 문양현(汶陽縣)을 본관으로 삼고 있었다. 왕망이 선양을 받아 신나라를 세우면서 사섭의 6대조가 교주로 이주했다. 사섭의 아버지인 사사(士賜)는 일남태수[2]를 역임했는데, 이러한 배경은 사섭의 통치 배경에 영향을 줬다고 추측되고 있다.


2.2. 사섭의 집권[편집]


아버지 사사의 장례를 치르고 187년에 교지태수로 임명되었다.

196년, 교주자사 주부(삼국지)는 이민족에게 살해당하면서 주군이 소란스러워졌다.

이때 교지태수 사섭이 중앙에 자신의 형제들(사일, 사유, 사무)을 태수로 임명해달라고 요청했다. 사일, 사유, 사무는 각각 합포태수, 구진태수, 남해태수로 임명되었고 이 사건으로 사씨 일가는 교주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력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주부의 후임으로 부임한 장진(삼국지)은 부장 구경(區景)에게 피살당한 후, 후한 조정은 사섭을 수남중랑장에 임명하고 교주의 7군을 거느리도록 했다.



2.3. 멸망[편집]


226년 사섭이 항년 90세로 사망하면서 시섭의 3남 사휘가 뒤를 이었고, 오나라는 사휘를 구진태수로 삼았다.

그런데 교지태수에 교위 진시를 임명하고 기존의 교주에서 광주를 분리해 사씨 가문이 아닌 대량과 여대를 교주자사와 광주자사로 임명하는 등 대놓고 사섭 가문의 영역을 삼키려고 들었다.

사씨 일족이 몇 대에 걸쳐 교주에 재훈 은혜를 믿은 [3] 사섭은 스스로 교지태수를 자처해 해구의 병사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과거 사섭이 추천했던 환린은 사휘를 말리면서 신임 교주자사인 대량을 따르자고 청했다가 분노한 사섭에게 맞아죽으면서 교지의 환씨 가문(환치, 환발)과도 몇 달이나 내전을 벌였다가 협정을 맺고 중지하는 일이 일어났다.

환씨 가문과의 내전이 끝나자마자 여대의 동오군이 생각지도 못한 신속한 진군으로 도착하자 사휘는 지레 겁을 먹었다.

여대는 먼저 편지를 보내 사휘를 타이른 다음 사촌 사광을 보내 지금 항복하면 군수 자리는 잃게 되겠지만 다른 걱정은 없을 것이라고 하자 사휘는 형 사지, 동생 사간, 사송 등 형제 여섯 명과 함께 웃옷을 벗어 맨살을 드러내고 항복의 뜻을 나타내면서 영접하니 여대는 사절한 다음에 옷을 입게 했다.

다음날 아침에 여대는 장막을 설치하고, 사휘의 형제 여섯 명에게 들어오게 했는데, 약속을 지키기는 커녕 여대는 조서를 들고 사휘의 죄과를 차례로 진술하고, 그 말에 따라 주위에 있던 자들이 여섯 형제를 모두 끌고 나가 처형하는 극악무도한 행위를 통해 사휘의 머리를 무창에 보내졌다. 후대의 인물은 물론 당대의 인물까지도 여대가 사씨 가문을 몰살한 행위를 비난했다.

사위, 사일, 사광은 용서를 받았으나 몇 년 후 법을 범했다고 주살당하면서 사씨 가문은 대가 끝겨버리고 말았고,


3. 대외관계[편집]



3.1. 유표[편집]


직접적인 충돌 기록은 없으나, 유표는 교주자사 장진의 사망을 틈타 교주에도 영향력을 끼치려고 시도했다.

유표뇌공을 교주자사로 임명해 교주를 차지하게 했는데, 뇌공은 유표를 후원해 창오태수가 된 오거(삼국지)에게 쫓겨났다.

오거는 211년 교주자사 보즐이 부임하자 겉으로는 그에게 복종했으나 딴마음을 품고 있었다. 보즐이 오고가 불복종했다는 이유로 오거를 죽이기로 결심했고, 자신을 낮추면서 회유해 오거가 초대를 받아들이자 기회를 틈타 살해했다.


3.2. 오나라[편집]


사섭이 오나라에 신속했고, 오나라도 사섭이 생존한 시기까지는 사씨 가문의 교주 통치에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섭이 사망한 후 대놓고 교주를 직접 지배하려고 들면서 사휘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여대에게 진압당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3.3. 촉한[편집]


유비 사후 익주 남부에서 일어난 반한의 배후가 사섭과 오나라였다.

익주의 호족 옹개, 수족 수령 고정, 장가 태수 주포 등이 일으킨 남만 반란은 제갈량에게 제압당했고, 사섭이나 오나라도 이들을 부추기기만 하고 돕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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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날 중국 광둥성, 광시좡족자치구, 베트남 북부에 이른다.[2] 교주의 최남단 군현.[3] 사섭의 6대조가 교주 구진군에서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