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키 가즈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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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98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후루타 아츠야
(야쿠르트 스왈로즈)

사사키 가즈히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노구치 시게키
(주니치 드래곤즈)

파일:2001 MLB 올스타전 로고.svg파일:2002 MLB 올스타전 로고.svg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2001
2002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2000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신인왕
카를로스 벨트란
(캔자스시티 로열스)

사사키 가즈히로
(시애틀 매리너스)


스즈키 이치로
(시애틀 매리너스)

시애틀 매리너스 등번호 22번
브라이언 헌터
(1999)

사사키 가즈히로
(2000~2003)


호세 로페즈
(2004~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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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가즈히로
佐々木 主浩 / Kazuhiro Sasaki

출생
1968년 2월 22일 (56세)
국적
[[일본|

일본
display: none; display: 일본"
행정구
]]

출신지
미야기현 센다이시
학력
도호쿠 고등학교(미야기) - 도호쿠 후쿠시 대학교
신체
193cm / 100kg
포지션
마무리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9년 드래프트 1라운드 (요코하마)
소속팀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1990~1999)
시애틀 매리너스 (2000~2003)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2004~2005)


1. 개요
2. 선수 경력
2.3. 다시 요코하마로, 그리고 은퇴
3. 피칭 스타일
4. 수상 내역
5. 연도별 성적
6. 마주 활동
7. 기타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일본프로야구,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약했던 전 프로야구 선수. 일본프로야구 통산 43승 38패 252세이브, 메이저리그 통산 7승 16패 129세이브의 성적을 기록한 마무리 투수로, 이와세 히토키, 다카쓰 신고의 뒤에 위치한 일본 통산 세이브 3위 기록 보유자이다.[1] 미일 통산 총 381세이브를 기록했는데, 이 기록은 이와세 히토키[2]의 뒤를 잇는 2위 기록이다.

또한 32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메이저리그로 진출했음에도 신인왕에 오르는 등 활약을 이어갔고 MLB 아시아인 역대 최다 세이브 기록(129개)도 보유하고 있다.

별명은 '대마신(大魔神)'. 다이에이사의 특촬물 대마신의 주인공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별명이다. 이 별명은 미국에서도 'DAIMAJIN'이라는 명칭으로 이어지게 되고, 후에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의 마무리 투수 야마사키 야스아키가 '작은 대마신'으로 계승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요코하마 베이스타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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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야구팬들에겐 생소할 수 있는 다이요 훼일스 시절의 젊은 사사키의 피칭. 사사키의 주무기인 포크볼도 보인다.

도호쿠 복지대학[3]에서 활약한 뒤 1989년 드래프트에서 다이요 훼일즈에 1순위로 지명받았다.[4]

입단 초기에는 팀의 대투수였던 엔도 카즈히코마무리 투수를 맡고 있어서 중간계투와 땜빵 선발 투수로 뛰었으나, 엔도의 부진으로 91년부터 본격적으로 마무리로 전향하게 된다. 91년 6승 9패 17세이브 평균 자책점 2.00의 좋은 성적을 올리며 92년부터 요코하마의 풀타임 마무리로 뛴다. 93년에는 20세이브 평균자책점 3.27을 올렸지만 팀에서는 200만 엔이 삭감된 연봉을 제시하자 분노하며 자신의 트레이드를 요청하는 사태도 있었지만, 당시 감독이던 곤도의 설득으로 잔류를 하게 된다. 이후로는 94년 부상으로 잠시 마무리를 내려 놓은 것을 제외하고는 계속 요코하마의 특급 마무리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1996 ~ 1998년에는 4년 연속 최우수 구원투수상을 따내고, 1997, 1998년에는 일본프로야구 단일시즌 세이브 기록을 경신(38세이브, 45세이브)하게 된다.이렇듯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최전성기의 중심으로 활약했으며, 1998년 일본시리즈 우승의 주역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활약으로 1998년 센트럴리그 MVP마저 수상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낸다. 이 시기 사사키와 경쟁했던 마무리 투수들로 선동열, 다카쓰 신고, 사사오카 신지[5] 등이 있었지만, 당시 리그에서 가장 압도적인 마무리가 사사키라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1999년 시즌에는 중간에 부상을 당하게 되었고, 그대로 시즌을 마치게 된다. 문제는 부상으로 인해 시즌 중간에 수술을 받게 되자 요코하마 구단은 사사키의 몸상태를 의심하게 되었고, 사사키 또한 구단의 이러한 행보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더욱이 전 해 전성기를 보낸 사사키는 1998시즌 후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고 싶다고 했다가 구단이 만류한 적이 있었고, 1999시즌이 끝나자 FA를 취득한 사사키는 뒤도 안 돌아보고 메이저리그로 떠나게 된다.


2.2. 시애틀 매리너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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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세라는 적지않은 나이에 시애틀 매리너스의 마무리 투수가 된 그는[6] 약물 시대였던 2000년 첫 해 신인으로서 37세이브를 올려 당시 역대 신인 최다 세이브를 기록하며[7] AL 신인왕[8]과 매리너스 구단 MVP를 수상하게 된다.

파일:8EF8DD10-B08F-4935-9A83-8B1C25CA3661.jpg

그리고 스즈키 이치로가 동료로 합류한 2001년에도 뛰어난 활약을 이어가 4월에 이주의 선수 선정, 올스타전에서도 마무리 투수로 등판하며 아시아인 최초로 올스타전 세이브를 기록한다. 또한 당시 구단 신기록인 45세이브[9]를 달성했으며 천하의 마리아노 리베라와 세이브왕 경쟁을 펼쳤지만 5개 차이로 밀려 세이브왕을 놓치게 된다.

2002년에도 37세이브를 거두며 대마신의 명성을 이어나갔다. 당시 해설진이 아서 로즈[10], 제프 넬슨[11]과 함께 묶어 '뉴 내스티 보이즈'[12]라고 칭할 정도.

무엇보다도 근 10여년 간 마무리 투수 문제로 골치를 앓았던[13] 시애틀 입장에서 혜성처럼 나타난 사사키의 존재는 정말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특히 당시는 대약물 시대의 한가운데로서 미칠듯한 타고투저를 보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정규시즌 퍼포먼스로 2001년 시애틀이 MLB 단일시즌 최다승인 116승을 올리는데 큰 공을 세우며[14] 시애틀의 수호신으로 군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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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약물시대로서 타자들이 미쳐 날뛰며 메이저리그에서 유래없는 타고투저 전성기를 보내있을 시기에 마무리 투수라는 한계에도 불과하고 당당히 AL MVP 19위에 이름을 올렸다는 점에서 당시 그의 활약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메이저리그 역대 최다승인 116승의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는 사사키

그러나 2002시즌 후반기부터 팔꿈치를 다치는 등 고생했고, 그 해에 블론세이브도 차츰 기록하면서 조금씩 불안감이 쌓이기 시작했다. 2003년에 팔꿈치 연골 제거 수술을 받고 재활에 성공했으나, 이번에 닥쳐온 건 오른쪽 허리 통증. 그리고 복귀하여 또 어느 정도 던지다가 6월에 호텔에서 가방 싸다 넘어져서 오른쪽 옆구리 부상. 어찌어찌 돌아오긴 했지만 팀의 마무리 자리는 이미 동료 일본인 투수인 하세가와 시게토시가 잘 메워주고 있었고, 그렇게 남은 시즌을 중간계투로 보내게 된다. 결국 더이상 예전처럼 활약하기는 힘들거같다고 생각한 사사키는 2003시즌 이후 남은 계약과 돈을 자진해서 포기하고, 일본으로 복귀하게 된다.

파일:203F3ED3-500F-49A9-929A-7604D6B926D6.jpg
스즈키 이치로와의 올스타전에서...

그가 3년반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그것도 스테로이드 시대의 전성기였던 당시 시애틀에서 기록한 129세이브는 현재까지도 시애틀 매리너스의 프랜차이즈 기록으로 남아있으며 2017년 시애틀 타임즈가 뽑은 시애틀 매리너스의 위대한 선수 역대 19위[15]에 선정되었다.#

파일:47DDFACD-E93E-4B22-BDCF-378725ABAF31.jpg

사사키가 메이저리그에서 남긴 또하나의 기록이 있다면 바로 스트라이크 낫아웃으로 1이닝 4탈삼진을 기록해보기도 하였다.#


2.3. 다시 요코하마로, 그리고 은퇴[편집]


2004년 사사키는 당시 일본프로야구 내국인 선수 역대 최고 연봉인 6억 5천만 엔에 친정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돌아온다. 첫 해에는 떨어진 구위를 포크볼과 안정된 제구로 메우면서 그럭저럭 성적을 냈지만, 후반기부터 힘이 빠지게 되었고 2군을 들락날락하게 되면서 19세이브로 시즌을 마감. 2005년에는 전설의 250세이브[16]를 달성했지만, 부상으로 9경기 등판에 그치면서 결국 대마신은 2005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요코하마 최고의 레전드이기는 하지만 냉정히 말해 요코하마 2기는 마쓰자카 다이스케 이전까지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악의 먹튀라 해도 할 말이 없다.

이후 후임으로 마무리 투수를 맡게 된 선수가 일본프로야구 최고구속 기록 보유자였던 마크 크룬이다.[17]


3. 피칭 스타일[편집]



4. 수상 내역[편집]


수상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아메리칸 리그 신인상 (2000)
파일:MLB 로고.svg 올스타 2회 (2001, 2002)

5. 연도별 성적[편집]



5.1. NPB[편집]


역대 기록 (NPB)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ERA+
WAR
1990
타이요
16
2
4
2
-
47⅔
5.85
49
10
30
0
44
1.657
69
-0.6
1991
58
6
9
17
-
117
2.00
72
7
51
4
137
1.051
152
3.3
1992
요코하마
53
12
6
21
-
87⅔
2.46
47
6
39
1
135
0.981
200
3.5
1993
53
3
6
20
-
55
3.27
35
6
21
2
84
1.018
156
1.8
1994
31
3
1
10
-
46
2.15
27
5
15
0
59
0.913
145
1.1
1995
47
7
2
32
-
56⅔
1.75
30
5
17
0
78
0.829
200
2.4
1996
39
4
3
25
-
49⅔
2.90
37
6
16
1
80
1.067
172
1.8
1997
49
3
0
38
-
60
0.90
25
6
17
1
99
0.700
250
3.1
1998
51
1
1
45
-
56
0.64
32
1
13
1
78
0.804
370
3.5
1999
23
1
1
19
-
23⅓
1.93
19
1
6
0
34
1.071
286
1.3
2004
25
1
2
19
-
22⅔
3.18
18
4
3
0
18
0.926
102
0.3
2005
9
0
3
4
0
6
9.00
11
2
2
0
5
2.167
69
-0.2
NPB 통산
(12시즌)
439
43
38
252
0
627⅔
2.41
402
59
230
10
851
1.007
159
21.6

5.2. MLB[편집]


역대 기록 (MLB)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ERA+
fWAR
bWAR
2000
SEA
63
2
5
37
0
62⅔
3.16
42
10
31
2
78
1.165
146
0.6
1.3
2001
69
0
1
45
0
66⅔
3.24
48
6
11
4
62
0.885
128
1.6
1.1
2002
61
4
5
37
0
60⅔
2.52
44
6
20
2
72
1.055
169
1.5
1.2
2003
35
1
2
10
0
33⅓
4.05
31
2
15
1
29
1.380
107
0.4
0.1
MLB 통산
(4시즌)
228
7
16
129
0
223⅓
3.14
165
24
77
9
242
1.084
138
4.1
3.7

6. 마주 활동[편집]


  • 은퇴 후에 경마 마주로 활동하고 있다. 요코하마 2기 시절에 선배의 추천으로 경마를 접한 후 푹 빠져 2006년에 미스터 포크라는 지방 소속 말을 구입하며 마주 데뷔를 했다.

  • 그러다 친분이 있는 마주를 통해 암말인 할와 스위트를 만난 후 한 눈에 반해서 할와 스위트의 산구를 총 6마리 구매하고 중앙경마 마주 자격도 얻었다. 그 중에서 비르시나, 슈발 그랑, 비블로스가 가장 높은 등급인 G1 대회를 우승한 덕분에 한 마리도 가지기 힘든 G1 우승마를 세 마리나 소유하게 되었다.[18]

  • 참고로 전용 승부복은 어드마이어 관명을 쓰는 콘도 리이치의 승부복 디자인과 거의 흡사한데, 이는 마주를 시작할 때 콘도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19]

  • 할와 스위트 산구들이 데뷔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별명인 마인(마진)을 관명으로 썼으나 재혼 상대인 에모토 카나코가 기존 관명을 쓰지 말고 뷔(ヴ)를 써보라고 권유했고 그러한 권유에 따라 뷔가 들어가도록 이름을 짓게 되었다. 그 결과 무려 3마리나 중상 승리, 그것도 G1 우승를 쟁취하는 대박을 치면서 그 후부터 사사키 소유마들은 뷔가 들어가도록 이름을 짓고 있다.

  • 과거 자신을 프로야구 게임에 데이터화하는 것[20]에 거부감을 드러낸 바 있었기에, 경마를 모티브로 한 게임들에서도 사사키 본인의 소유마들은 등장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행회로가 돈 적이 있었다. 허나 이런 불행회로가 무색하게 사이게임즈가 사사키가 보유한 슈발 그랑, 비르시나, 비블로스의 라이센스를 모두 일시에 획득하는 데 성공해, 이들 삼남매자매가 우마무스메 3기우마무스메 게임판에 공식으로 실장되었다.

7. 기타[편집]


  • 홍진호 만큼이나 2와 관련이 많은 선수였다.
    • 출생시각이 222일 오후 222
    • 헤이세이 2년에 22살이 됨
    • 고향인 미야기현의 시외국번이 022
    • 등번호 22[21]
    • 장녀의 출생 시간이 222
    • 베이스타즈 사무실 주소가 2쵸메 22
    • 22경기 연속 세이브(일본 기록)[22]
    • 미일 통산 세이브 기록 2
    • 은퇴후 소유한 경주마 비르시나의 성적이 암말 트리플 크라운 경주 3연속 2[23], 중상(대상) 경주 5경기 연속 2착을 기록하다가 빅토리아 마일 경주 2연패


마쓰자카: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선배님들은 왜 완투를 못하나요?허세

사사키: 바깥쪽 꽉찬 150km 직구로 홈런 맞으면 그런 소리 못한다.그리고 말은 씨가 되었다.


  • 메이저리그 타자들의 수준과 그런 리그에서 살아남은 비결도 소개한 적이 있다.

파일:attachment/사사키 가즈히로/2011-03-23_23;11;01.jpg
파일:attachment/사사키 가즈히로/2011-03-23_23;11;4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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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사사키 가즈히로/2011-03-23_23;12;14.jpg
파일:attachment/사사키 가즈히로/2011-03-23_23;12;30.jpg
동양인 타자들은 인내심이 좋고 메이저리그 타자들은 변화구에 잘 속는다는 국내 전문가들을 디스하는 대마신

  • 2011년 LG 트윈스의 스프링캠프에서 인스트럭터로 초빙되기도 했다.

  • 프리미어 12 준결승 한일전의 일본 중계에서 캐스터가 시도때도 없이 찾는 '사사키 상'이 이 분이다. 당시 해당 경기에서 해설을 맡았다. 정대현의 투구를 보고 칭찬한 건 덤. 당신이 나가서 던져줘요

  • 2017년부터 일본 슈퍼 GT에 출전중인 엑설런스 포르쉐 팀 KTR의 총감독을 맡아서 활동하고 있다.

  • 2000년 코무로 테츠야의 프로듀스를 받아 'break new ground'라는 CD 싱글을 낸 적이 있다. 2년 전인 1998년 사사키가 globe의 요코하마 스타디움 공연 때 잠깐 무대에 오른 적이 있는데, 이때 코무로가 사사키에게 요코하마가 우승하면 곡을 써주겠다고 약속한 것이 계기였다. 그 후 진짜로 요코하마가 우승했고, MLB로 이적하는 사사키를 위해 정말로 곡을 써준 것. 곡 자체는 오리콘 100위 안에도 못 들었을 정도로 묻혔고 [24] 중고 매물조차 찾아보기 힘든 희귀 음반이 되었다. 코무로가 은퇴한 후에 발표된 베스트 앨범 "TETSUYA KOMURO ARCHIVES EX"에 수록되었고, 이 앨범은 한국 음원 사이트에서도 서비스되고 있다.

파일:E4BA8BC4-2A75-42AA-994B-3AFBA867CCD7.jpg
  • 2019 도쿄돔에서 열린 시애틀과 오클랜드의 개막전 경기에서 첫 시구를 했다. 공을 받은 포수 역시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뛰었던 조지마 겐지. 참고로 가운데 인물은 야구 역사상 최고의 리드오프인 리키 핸더슨.

  • 현역시절 은근 사생활에 뒷소문도 많았고 첫번째 부인과도 안 좋게 이혼한 것으로 유명하다. 1991년에 전 아이돌 가수 시미즈 카오리[25]랑 결혼해 애가 둘이나 있던 상태였으나, 2004년에 쇼프로에서 눈이 맞은 13살 연하의 배우 에노모토 카나코를 임신시켜 결국 2005년에 이혼 당하고 에노모토랑 재혼. 사생활도 그렇고 부인도 사사키의 고향인 센다이에 카레집을 열어 사실상 은퇴했기에 현장복귀는 힘들지 않나 하는 시각이 많다.

  • 통산성적 자체는 메이저리그 진출도 했었고 말년을 제외하면 타자친화구장인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올린 성적인 것을 감안해도 아주 뛰어난 성적인데 하필 노모 히데오, 후루타 아츠야, 신조 츠요시, 마에다 토모노리, 시오자키 테츠야, 사사오카 신지, 요다 츠요시, 코미야마 사토루를 비롯한 드래프트 동기들이 워낙 쟁쟁해서인지[26] 은근 저평가당하기도 한다.



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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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사키가 이 기록을 세울 당시에는 사사키가 1위였다. 다카쓰, 이와세가 이를 차례로 갱신하였다.[2] 2018년 은퇴를 선언하였으며, 통산 407세이브를 기록했다. 사사키와는 달리 NPB에서만 뛰며 세운 기록이다.[3] 당시 1년 후배로 사이토 타카시야노 아키히로가, 2년 후배로 카네모토 토모아키가 있었다. 참고로 야노는 사사키와 같은 해에 태어났지만 사사키가 빠른 생일이라 1년 먼저 대학에 입학했고, 카네모토도 역시 사사키와 같은 해에 태어났지만 카네모토는 재수로 사사키보다 2년 늦게 대학에 입학했다.[4] 89년 드래프트는 여러모로 전설로 회자되는 드래프트인데, 일단 8개구단 1지명을 받은 노모 히데오가 있었고, 야쿠르트의 명포수 후루타 아츠야가 2순위에 있었다. 그 외에도 신조 츠요시, 마에다 토모노리, 시오자키 테츠야, 사사오카 신지 등 대선수들이 다수 뽑혔다.[5] 이쪽은 소속 구단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투수진 뎁스 문제로 인해 선발과 마무리를 자주 오갔다.[6] 시애틀 매리너스 입단 기자회견에서, 시애틀 매리너스의 구단주이자 닌텐도의 사장이었던 야마우치 히로시는 그에게 '메이저리그의 피카츄가 되기를 바란다' 라는 말을 남겼다.[7] 2011년 크레이그 킴브럴이 46세이브로 경신[8] 1984년 앨빈 데이비스이후 16년만의 시애틀 소속의 신인왕이다. [9] 2018년 에드윈 디아즈가 57세이브로 경신했다.[10] 68이닝 1.71 31홀드[11] 65이닝 2.76 26홀드[12] 1990년 월드 시리즈 우승의 주역인 신시내티 레즈의 불펜투수 놈 찰튼, 랍 디블, 랜디 마이어스를 '내스티 보이즈'(Nasty Boys)라고 일컬었다.[13] 보스턴의 마무리 히스클리프 슬로컴을 얻으려 유망주 데릭 로우제이슨 베리텍을 내주는 희대의 조공 트레이드를 한 적도 있었다.[14] 여담으로 시애틀의 116승 달성 경기에서 사사키가 마지막으로 아웃을 잡은 선수가 전년도까지 팀 동료였던 알렉스 로드리게스였다.[15] 마무리 투수 중에서는 1위[16] 명구회 가입요건. 물론 사사키는 이미 메이저리그에서 세이브가 있어서 가입했지만 250 세이브 자체가 일본에서 대단한 기록으로 통한다. 마치 한국에서 활동하다가 일본에서 한일통산 2000안타를 친 선수가 한국에 돌아와 한국리그에서의 2000안타를 달성한 것과 같은 것. [17] 2021년 현재 이 기록 보유자는 티아고 비에이라다.[18] 1년에 만마리 이상 태어나는 일본 경주마 중에서 G1 우승마의 비율은 0.1% 가량임을 감안하면 상상 이상의 대박이 터졌다고 할 수 있다.[19] 스시집에서 우연히 콘도와 만났는데, 이때 이미 지방에서 마주로 데뷔한 데다 같은 할와 스위트의 팬이었던지라 마주로서 의기투합했고, 이때 콘도가 "기왕이면 중앙에서 마주를 해야지"라며 말도 한마리 넘겨줬다고 한다.[20] 자신이 등장한 야구게임인 파워 프로 시리즈를 굉장히 불쾌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21] 그래서 입단하고 나서 신문에 헤이세이 2년(1990년) 2월 22일에 22세 생일을 맞이한 등번호 22번의 사사키 선수...라는 스포츠 뉴스 기사도 있었다고 한다. 황신이 매우 좋아합니다[22] 22경기 연속으로 세이브 상황에서 등판했다는 뜻이다. 메이저리그와 달리 세이브와 무관한 등판이 있는 경우에도 기록이 끊긴다.[23] 무려 일본 최초 기록이다. 이때 비르시나에게 3연패를 안기고 암말 3관에 오른 상대가 이후 G1 7승 및 JRA 현창마까지 오르는 역대급 명마 젠틸돈나였던지라 대진운이 너무 나빴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상황. 여담이지만 비르시나의 동기 세대에는 숫말쪽에서도 희대의 기행마 겸 명마로 유명한 골드 십저스터웨이, 페노메노 등 유독 강한 말들이 많이 배출되던 해이기도 했다.[24] 당시 코무로 붐이 꺼진 상태기도 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사사키의 곡은 이벤트성으로 제작된 곡이라 음반 유통량 자체가 적었다. 코무로 붐 당시에도 이런 식의 이벤트성 곡은 성적이 좋지 못했다.[25] SNK의 게임 사이코 솔저의 테마곡을 불렀다.[26] 사사키를 비롯해 MLB에 진출한 선수들이 노모, 신조, 코미야마의 4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