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 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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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후작
Marquis de Sade


파일:attachment/Marquis_de_Sade.jpg

1760년에 그려진 그의 유일한 초상화
본명
도나시앵 알퐁스 프랑수아 드 사드
Donatien Alphonse François de Sade
출생
1740년 6월 2일
프랑스 왕국 파리
사망
1814년 12월 2일 (향년 74세)
부르봉 왕정복고 생 모리스
직업
군인, 작가, 소설가, 철학자, 정치인
참전
7년 전쟁
최종 계급
대위
신분
귀족
학력
루이 르 그랑 중등학교 (1750 ~ 1754)
작위
백작후작
신장
162cm
종교
무종교(무신론)

1. 개요
2. 생애
3. 작품 평가
3.1. 쥐스틴, 또는 미덕의 불행
3.2. 쥘리에트, 혹은 악덕의 번영
4.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사드 후작은 방탕주의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작가, 사상가이다.

가학성애학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원조 중의 원조인 철학자로, 사디즘[1]이라는 용어 자체가 이 사람의 이름에서 나왔다.


2. 생애[편집]


본명은 도나시앵 알퐁스 프랑수아 드 사드(Donatien Alphonse François de Sade). 1740년 6월 2일에 프랑스프로방스 지방에서 명성있는 귀족 가문의 유일한 상속자로 태어났다. 부유하진 않았지만 백작이었다. 1772년 그의 봉지가 후작령으로 격상[2]되었고 1787년 바스티유 투옥 때도 후작명으로 투옥되었다. 그러나 1789년 사드 백작이란 명의로 투옥된 기록이 있으며 1814년 사망시에도 사드 백작으로 기록되었다.

사드는 1750년 루이 르 그랑 중등학교에 입학해 4년간 수학했고, 기병 장교로 입대하여 7년 전쟁에 참전하고 가문의 입김으로 대위까지 진급한 뒤 종전 후 퇴역한다. 같은 해인 1763년, 23세의 나이에 돈 많은 부르주아 가문인 몽트뢰유 집안의 딸과 결혼했는데 장인은 파리고등법원의 총재였고 장모는 상당한 정치수완을 가진 수완가였다. 그는 아내와의 사이에 두 아들 루이 마리와 도나티앵 클로드 아르망, 그리고 딸 마들렌 로르를 두었다.

하지만 사드는 이미 10대 후반부터 난봉꾼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결혼 직후부터 그 특유의 사디즘적 면모를 보여왔으나 귀족이란 신분 덕분에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런 그가 본격적으로 세상에 사디즘으로 그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1768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부활절 사건'이 터지면서 부터이다. '부활절 사건'은 사드가 매춘부 로즈 켈러[3]를 학대한 사건으로써 당시 온 프랑스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사드는 서둘러 피해자와 합의를 보려고 했지만 피해자가 고소하면서 결국 투옥되고 말았다. 이 사건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며 그의 악명을 온 프랑스로 퍼지게 만들었다.

석방 뒤 한동안 자신의 성에서 생활하던 사드는 1772년 여름, 돈을 구하기 위해 방문한 마르세이유에서 매춘부를 상대로 한 최음제 오용으로 살인미수 혐의를 받게 되어 이탈리아로 도피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사실은 이때 애인을 동반했는데 그 애인이 자신의 처제인 로네 수녀였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그는 궐석재판에서 사형선고까지 받는다. 게다가 이 일로 그의 장모는 몹시 격분하였고 또한 보수적인 성격인터라 사드의 행위를 용납할 리가 없었기에 이것이 나중에 사드한테 큰 화근으로 작용하게 된다. 몇 번의 도피 생활 이후 사드는 1774년 부인과 함께 자신의 영지에 칩거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기행은 오히려 악명을 더해갔고 여기에 그의 부인까지 가담하게 된다.[4]

결국 1776년 미성년자 시종들을 상대로 한 음란행위가 폭로되었고 1777년 2월 13일 국왕 루이 16세의 봉인장을[5] 소지한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수감되고 말았다. 사실 이는 수감될 만큼 큰 죄가 아니었지만 사드의 행위를 알게 되어 그를 증오한 장모가 수를 써서 국왕에게 사면 없이 무기한 구금명령을 받아 낸 것이다. 이때문에 그는 1790년 왕정이 무너지고 봉인장의 효력이 상실할 때까지 13년 동안이나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래서 그 기간동안 집필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1789년 7월 즈음엔 사드는 유명한 바스티유 감옥에 있었는데, 일설에 따르면 감옥 밖의 시민들을 향해 간수들이 죄수들을 학살하고 있다며 선동하는 고함을 질러서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의 빌미를 제공했다고도 한다. 다만 사드는 바스티유 감옥이 습격당하기 며칠 전에 다른 곳으로 이송되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다. 그렇게 사드가 이송되고, 바스티유 감옥이 습격당하는 과정에서 소돔 120일의 원고는 실종되며 사후에나 발견되었다. 이렇게 실종된 뒤 여러 수집가 손을 거치며 이리저리 매매되다가 2017년 다시 경매에 나왔는데 프랑스 정부가 프랑스의 중요 국가 문화유산이라는 이유로 경매를 중단시켰다. 국제 시세대로 나랏돈을 주고 구입할 것이라고.# 참고로 사드의 원고는 가격이 한화로 70억 원이 넘는다.

1790년 이후 사드는 정식으로 석방되어 자유를 찾았으나 사실상 빈털터리에 무일푼 신세가 된다. 특히 이때 아내와 이혼을 하였으며 그의 성까지 팔게 되어 머물 집조차 없었다. 그래서 잠시 연예계를 기웃거리며 소설 <쥐스틴>을 익명으로 간행했지만 어떤 작품도 무대에 올리지 못하고 악평만 얻었다. 그래도 이때 여배우 마리 콘스탄스 케스넷을 만났는데 그녀와 사랑에 빠졌고 동거하면서 콘스탄스와 결혼만 하지 않았지 사실상 부부가 되었다.[6] 민주주의자를 자청하면서 공무원에 채용되어 공무에 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인해 1793년 반혁명분자란 죄목으로 또다시 투옥되었고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듬해 테르미도르 반동 덕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다.

이후 그는 생계를 위해 주요 저서들을 실명 혹은 익명으로 간행하지만 생활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드의 사상과 성적 취향을 당시 프랑스 사회가 이해하지 못하고 불경으로 간주하다보니[7] 사드의 저서들은 팔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사드는 저술 활동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했다. 그러나 1801년에 그의 저서들이 불경하다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또다시 음란물 유포 혐의로 투옥되었다.[8] 1804년에는 그의 악명에 진저리가 난 자녀들에 의해 파리 근교의 비세트르 병원(Bicêtre Hospital)[9] 폐쇄병동에 수감되고 말았다. 이 상황에서 원고 일부가 유실된 건 덤.

사드는 이 정신병원에서 병원장이자 정신과 의사인 아비 드 쿨미에 신부[10]와 친해져 그와 친구가 되었는데 쿨미에의 배려와 도움을 받아 저술 활동을 하여 많은 시와 책들을 집필했다. 또한 그와 성향이 맞고 절친한 환자들과 함께 아마추어 극단을 조직해서 공연을 가졌으며, 이는 훗날 페터 바이스의 희곡 마라와 사드(1963)의 소재가 되어 유명해졌다. 하지만 그의 연극을 알게 되어 이를 불경하게 본 나폴레옹이 1809년에 사드의 극단을 강제로 해산시켜버렸고 사드를 독방에 가두며 펜과 종이마저 압수해버려 사드는 그가 좋아하는 저술 활동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나마 친구 쿨미에의 배려로 애인 콘스탄스와 자식들을 정기적으로 만날 수 있었고 이와중에 사드는 샤렌턴의 직원의 딸인 마를레 르클레르크와 친해져 그녀와 애인이 된다.[11] 마를레는 콘스탄스와 함께 사드가 죽는 순간까지 그를 돌봐주었다.

결국 독방에 갇힌지 5년만인 1814년 12월 2일에 사드는 이 정신병원에서 74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평생을 핍박받는 삶을 살았지만 평균 수명이 짦았던 시대에 상당히 장수했다. 이때 그는 무덤 위에 여러 과실수를 심어 무덤의 흔적조차 없애 줄 것을 당부하며 “사람들의 뇌리로부터 나에 대한 기억이 깨끗이 사라지는 게 더없이 기쁠 따름이다.”란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세월이 갈수록 더 큰 악명을 얻을 뿐이었다.[12] 그가 죽은 후 자손들은 그를 부끄러워하여 오랫동안 사드 후작이라는 작위를 쓰지 않았다. 하지만 사드가 재평가되면서 근래부터 그의 작위를 다시 쓰기 시작하였다. 또한 그의 저서들도 프랑스의 파리 문학박물관에 전시되었는데 프랑스 큐레이터들이 사드의 저서들을 보고는 감탄할 정도였다. 기사

3. 작품 평가[편집]


사드의 소설은 무려 230년 전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시점에서 봐도 충격적인 전개가 굉장히 많은데 실제로 이 분야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보면서 선인의 지혜에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포르노에 가까운 내용과는 대조적으로 자유주의, 유물론, 무신론, 아나키즘적 요소도 있어 20세기 들어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정신분석학자들에게서 예술적, 학술적 평가를 받아 지금에 이른다. 이 외에도 '인간의 사악함에 대한 묘사를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의 극한을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언급되곤 한다. 그 예가 <쥐스틴>으로 이 소설에서 선인들은 겁탈당하고 모욕당하지만 조금만 악에 치우쳤던 쥐스틴의 언니는 오히려 인생이 활짝 펴서 선행이 가능한 상태가 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문화 이론이나 문학 창작을 배우고 있다면 그의 이름은 꼭 한 번씩은 만나게 된다.

가장 정상적인 작품으로 <사제와 죽어가는 이의 대화>가 있다. 그의 초기 작품이자 습작에 가까운 작품인데 내용도 엄하지 않으면서 사드의 사상이 잘 드러났다.

사드의 작품은 어느 나라에서건 한 번쯤은 '외설 시비로 법정에까지 오른다'는 징크스 같은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 나라의 문화적 토양과 성숙성을 가늠하는 데에도 그의 이름은 늘 언급된다. 2012년 9월 19일 우리나라에서 음란성을 이유로 판매금지 가처분을 받았으나, 훗날 다시 복간되었다.

참고로 영국 출신의 아웃사이더의 저자인 콜린 윌슨은 사드의 중2병을 제대로 까버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쾌락에도 수확체감의 법칙이 성립되니 병신 소리는 말라'는 교훈 되겠다. 근데 정작 사드는 자신의 작품만이 아니라 생활상 자체가 이러했으니 중2병보다는 차라리 정신병이 어울린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입만 산 애송이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

움베르토 에코는 패러디 작품 모음집인 Misreading에서 '고전 작품들을 현대의 출판사들이 본다면...' 하는 내용의 작품을 썼었는데 거기서 출판사는 사드 후작의 작품을 "처음 펼친 곳에선 철학 얘기가 나오고 2번째도 그렇다가 3번째로 펼쳤을 때나 섹스가 나왔다. 독자들이 원하는 건 섹스지 철학이 아니다"라면서 퇴짜를 놓는다.

래디컬 페미니즘의 거두 안드레아 드워킨(A. Dworkin)은 자신의 저서 "포르노그래피: 여자를 소유하는 남자들"에서 사드를 음란물과 자신의 삶을 일체화한 인물로써 후대의 남성 문인들과 전기 작가들에게 추앙받고 있다고 맹공격했다. 반면 같은 급진적 계보에 속하는 시몬 드 보부아르의 경우는 사드의 삶에는 질색하면서도 그의 문학적 공헌에는 호평했다.

정신의학이나 BDSM 계열에서는 사드의 성향에 대한 재평가 작업도 이루어지고 있다. 사드 후작이 사디즘의 어원이 되었지만 그의 소설이나 실제 일화를 분석하면 단순히 편향된 새디스트로만 볼 수 없는 면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그의 직계 후손인 자비에르 드 사드(2010년 타계)와 티보 드 사드 또한 사드 후작에 대한 재평가 작업과 사드 후작의 라코스테 성의 복구작업을 위해 노력 중이다. 피에르 가르뎅이 이 성을 매입했다고 한다.

워크룸 프레스는 번역가 성귀수가 "필생의 기획"으로 내놓은 사드 전집 한국어 완역계획을 받아들여 2014년부터 전집을 출간했는데 1권 <사제와 죽어가는 이의 대화>를 2014년 12월에 출간한 후 3년 넘게 책이 안 나왔다. 그래서 다들 안 팔려서 엎어졌다고 생각했는데... 2018년 7월, 약 3년 8개월만에 시리즈 2권 소돔의 120일이 출간되었다.

소설 작품으로 소돔의 120일(Les 120 Journées de Sodome, ou l'Ecole du libertinage)이 유명하다.

3.1. 쥐스틴, 또는 미덕의 불행[편집]


수도원에서 교육받은 쥐스틴과 쥘리에트는 부모님의 유산을 나눠갖고 헤어지게 된다. 쥐스틴은 '내면의 미덕에 충실한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지만 그녀가 도덕적인 행동을 할 때마다 항상 불행만이 따라다닌다. 가는 데마다 온갖 험한 꼴을 다 당하고 결국 온갖 누명 끝에 사형선고까지 받게 되지만 극적으로 상봉한 자매 쥘리에트와 만나게 되어 사형을 면한다. 하지만 부자가 된 언니를 만나 이제서야 인생을 피나 싶더니 얼마 뒤 한밤중에 벼락을 맞고 사망한다.

2010년 한국의 '열린책들'에서 미덕의 불운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159번.

그리고 2011년 11월 한국 동서문화사에서 그 언니 쥘리에트의 이야기를 다룬 악덕의 번영이 출간 예정이다. 미덕의 불행의 도입부는 쥘리에트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녀의 번영(?) 과정이 살짝 언급된다. 쥘리에트는 높으신 분들과 적당히 즐기다가 이를 동앗줄 삼아 상류계층으로 올라간다. 결국은 쥐스틴의 비참한 죽음을 보고서 수녀원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마무리되지만.

라스 폰 트리에멜랑콜리아에 등장하는 저스틴은 여기서 따온 것이다.


3.2. 쥘리에트, 혹은 악덕의 번영[편집]


쥐스틴에서는 여동생이 벼락맞아 숨진 걸 보고 수녀원에 들어가 엄격한 품행으로 이름높아진다고 마무리되었지만, 도리어 쥘리에트에서는 여동생 쥐스틴이 벼락을 맞도록 유도한 뒤 수녀는커녕 더한 악덕으로 빠져든다고 결말지어진다. 전반적으로 야설이고, 중간중간 휴식처로 철학 얘기도 나온다.

국내 번역본은 동서문화사판 밖에 없는데 중역본에 발췌역이라 번역서로서 가치가 없다. 현재로선 성귀수의 사드 전집에 기대해볼 수 밖에 없는데 2020년까지 겨우 2권 나왔고 한권 나오는데 3년 넘게 걸리는 진행속도의 이 전집에서 악덕의 번영은 7번째로 기획되어 있다... 성귀수가 중간에 급사하거나 안 팔려서 엎어지지 않아도 10년 이상 걸린다는 결론이 나온다.

일본에서는 채털리 사건과 함께 출판의 자유를 상징하며 자유권에 대한 기본권을 다루는 헌법 파트에서 대명사처럼 다루어지는 책이다. 전후인 1959년 악덕의 번영을 일본어로 번역한 소설가 시부사와 타츠히코(澁澤龍彦)와 출판사 사장 이시이 쿄지(石井恭二)가 해당 소설에 등장하는 묘사가 음란하다는 이유로 외설죄로 기소되었기 때문이다. 1심에서 외설죄 판례에 비추어 필수적인 범죄 구성요건을 만족하지 못했다고 해서 무죄가 되었으나, 이후 검찰의 항소로 진행된 2심에서는 외설이 인정되었고 벌금 10만 엔에 처해졌다. 결국 이 사건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뜨거운 감자가 되어 최고재판소(대법원)의 대법정(전원합의체)까지 가게 되었는데, 재판관 13명 가운데 5명이 반대의견을 냈으나 결국 유죄가 인정되었다. 이는 1950-60년대 일본의 검열 실태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으로, 창작물에 대한 외설 문제가 검열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약 30년 뒤 한국에서 일어난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 음란물 지정 및 탄압 사건과도 비슷하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1967년 피터 브룩 감독으로 마라, 사드라는 영화가 나왔다. 페터 바이스가 각본을 쓴 동명의 연극을 영화로 각색한 것으로 사드가 정신병원에서 환자들에게 연극을 지도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토대로, 사드의 연출 아래 연기 지도를 받은 정신병자들이 장 폴 마라의 죽음을 재현하는 일종의 사이코드라마 형식을 띤다. 1996년 기네스 기비 감독의 영화 사드는 선정적인 장면은 물론 사드의 소설을 읽고 그대로 따라하는, 사디즘에 물든 미치광이 추종자들이 나오는 얘기다.

또 같은 2000년에 나온 브누아 자코 감독의 <사드>와 필립 카우프만 감독의 영화 퀼스가 있다. 퀼스는 한국의 OCN에서도 자막 방영했던 적이 있다. 배우는 제프리 러시.[13] 이밖에도 케이트 윈슬렛이나 호아킨 피닉스, 마이클 케인 등 은근히 네임드 배우들이 많이 나온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단두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는 광경을 지켜보고 난 뒤에 샤랑통 정신병원에 감금된 사드가 온갖 음란소설을 써서 바깥에 보내고 이를 당시 높으신 분들은 골칫거리로 생각하는데 이를 교정한다는 명목으로 쿨미어라는 젊은 신부가[14] 파견되어 사드와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아마 감독의 의도는 사드를 당시의 검열과 탄압에 맞서 표현의 자유를 추구한 시대를 앞서 간 선구자 정도로 그리려고 한 듯하다. 음란물 말고 성경도 문학적이니 한 번 읽어보라며 신부가 내민 성경더럽다는 듯이 침을 뱉고 집어던지면서 "나는 신을 증오해. 자기 아들도 매달았는데 나한테는 더할 거 아냐?"라며 고함친다거나, 작중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글을 계속 쓰려고 하는데 펜을 빼앗았더니 닭뼈를 와인에 찍어 휴지에 쓴다거나, 결국 알몸으로 지하실에 갇혀서 자기 대소변을 찍어서 벽에 글을 쓰기까지 하는 것을 보면 징하다 못해 경탄스럽기까지 하다.

퀼스 작중 쿨미어 신부(호아킨 피닉스 분)의 이상과 현실 속에서 괴리를 느끼면서 차츰 미쳐가는 장면 묘사가 볼만하다. 국가도 포기하다시피한 사드를 갱생시키라는 사제의 명을 받고 선의로 대하면 통하게 되어 있다고 믿고 사드를 달래보려 하지만 사드가 그걸 들을 리가 있나. 동시에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뻔히 보이는 정신병원 소속 하녀(케이트 윈슬렛 분)를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멀리하면서 자기를 기만하는 와중에 고통을 느끼지만 결국 그녀가 죽어가면서 자기를 사랑하냐고 물을 때도 끝내 이성으로써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못한다. 교정 치료 중[15]인 환자들을 대할 때 보면 꼭 "어때, 불 지르는 것보다 더 낫지?" 식으로 물어보며 다니는 등 은근히 자기만족이 눈에 보인다.

영화 아가씨에는 사드풍의 가상 작품 '채찍은 말한다'를 낭독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낭독하는 내용과, 설정상 여주인공의 이름이 '공작부인 쥘리에트'로 나오는 것을 볼 때 <쥘리에트, 악덕의 번영>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으로 추정.

황준호 작가가 네이버에 연재한 웹툰인 악연에서 사드 후작의 철학이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잠시 소개되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인간은 세상에 아무런 이유 없이, 우연으로 태어났다. 그러니 인간들이 모두 죽더라도 세상은 아무런 눈물도 흘리지 않고 관심도 없다. 또한 인간의 영혼이나 사후세계 같은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울러 도덕이나 윤리 또한 모두 거짓말이다. 그런 것들은 지배층들이 피지배층들을 속이기 위해 만들어낸 사기이자 거짓말이다. 지배층들은 결코 도덕적으로 살지 않는다. 그들이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가? 그것은 자신들만 쾌락을 독점하기 위해서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행동은 바로 쾌락뿐이다."

악연에서


위의 인물을 모티브로 해서 만든 캐릭터는 바니타스의 수기의 사드 후작과 그의 일족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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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흔히 변태 성범죄로 대표되는 행위인 묶어놓고 촛농으로 화상을 입히거나 때리면서 하는 성폭행의 원조가 이 사람이다. 귀족임에도 성폭행을 하도 해서 결국 강간죄로 징역도 몇년 살았다. 당시 길에서 몸을 팔던 가난한 여성에게 자기 집을 청소하면 돈을 주겠다고 속여 집 안으로 유인한 뒤 납치감금하여 변태적으로 성폭행을 했고 이후 계속된 감금 중 빈틈을 봐서 집을 탈출하는데 성공한 피해자가 관청에 신고하여 사드가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2] 귀족은 가장 높은 계급인 공작-후작-백작-자작-남작-준남작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오등작 참고.[3] 정확히는 집이 망해서 길에서 떠돌던 부랑자인데, 나중에 사드가 몸파는 여자였다고 주장했다. 사건 자체가 상해와 성폭행이므로 그 자체와 무관한 부분인 피해자가 과거에 실제로 몸을 팔았는지 아닌지는 정확한 증거는 없다. 사드는 성매매를 요구한 게 아니라 집을 청소하면 돈을 주겠다고 유혹해서 성폭행했다.[4] 님편이 매춘부를 학대하고 자기 동생하고 바람났는데도 오히려 이 기행에 가담했다는걸 보면, 그 부인도 제정신은 아니었던 모양이다.[5] 봉인장은 그게 나온 대상의 처벌 수위를 전적으로 왕이 결정했다.[6] 6살난 아들을 둔 여배우로 남편에게 버림받고 홀로 아들을 키우고 있었는데 사드의 성적 취향과 사상을 잘 이해했기에 사드가 평생을 사랑하게 된 여성이다. 특히 콘스탄스도 사드를 진심으로 사랑했는데 사드가 돈을 벌지 못해도 그에게 생활비를 대어주었고 그가 교도소랑 정신병원에 투옥되었을 때도 친척임을 자청하며 사드가 감금된 정신병원의 주변에 거주하면서 자주 면회를 와서 사드의 편의를 봐줄 정도였다.[7] 성해방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당시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던 사형제의 나쁜점을 비판하며 사형제를 반대하는 파격적인 주장을 하였기에 당시 사회가 더욱 이해를 못했다.[8] 무엇보다 나폴레옹이 사드를 재판도 없이 투옥시켜버리면서, 사드의 투옥은 당시의 기준으로도 불법인데다 가혹한 조치였다. 게다가 나중에 사드의 극단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독방에 가두며 저술 활동까지 금지시킨 것도 명백한 사상탄압이자 국가폭력이었다. 나폴레옹 본인부터가 여성을 밝히는 호색한이면서 정작 사드를 정신병자로 취급하고, 음란물 유포 혐의로 투옥하여 학대한 것은 명백한 악행이기에 현재도 나폴레옹이 저지른 실책만큼 비판받는다.[9] 지금도 운영중인 병원이다.[10] 프랑스의 성직자이자 정신과 의사로, 정신과를 전공하지 않았지만 따뜻하고 배려심이 많은 성격이라서 인망이 좋았기에 정신병원의 병원장이 되었다. 당시 학대와 강제노역이 흔하게 일어났던 정신병원들과 달리 환자들에 대한 배려와 상담, 심리 치료를 통해 많은 정신질환 환자들을 치료해낸 최고의 정신과 의사였다. 특히 쿨미에는 사드와 면담하면서 그가 뛰어난 작가이며 진보적인 사상을 가졌고 성적 취향이 특이할뿐이지 정신병이 아니며 오히려 성에 극도로 폐쇄적인 프랑스 정부와 사회가 정신병자로 몰아 병원에 가두었음을 알고는 그를 안타까워하여 사드의 편의를 봐주었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사드를 학대할 때 사드의 편에 서서 변호해주었고 사드가 독방에 수감되었을 때도 편의를 봐주며 애인들과 자녀들을 만나게 해주는 배려를 한다.[11] 이때 마를레는 14살이었는데 사드와 성관계까지 할 정도로 친해졌다.[12] 사디즘이란 용어가 완전히 정착된 이상 인류 역사에서 그의 이름이 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13] 킹스 스피치에서 언어치료사 라이오넬을 맡았다.[14] 다만 실제 쿨미어는 사드와 처음 만났을 때 나이가 60세였다.[15] 예를 들어 방화 충동으로 들어온 환자에게 그림을 그리게 한다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