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세스 로열 메리(1897)

덤프버전 :



프린세스 로열 & 헤어우드 백작부인
빅토리아 알렉산드라 앨리스 메리
Mary, Princess Royal and Countess of Harewood

파일:Princess_Mary,_Countess_of_Harewood.jpg}}}
이름
빅토리아 알렉산드라 앨리스 메리
(Victoria Alexandra Alice Mary)
출생
1897년 4월 25일
영국 잉글랜드 노퍽 주 샌드리엄 하우스 요크 코티지
사망
1965년 3월 28일 (향년 67세)
영국 잉글랜드 웨스트요크셔 헤어우드 하우스
신체
키 165cm
배우자
제6대 헤어우드 백작 헨리 래슬스
(1922년 결혼 / 1947년 사망)
자녀
조지, 제럴드
아버지
조지 5세
어머니
테크의 메리
형제
에드워드 8세, 조지 6세, 헨리, 조지,
종교
성공회
서명
파일:Princess Mary PR Signature.svg
1. 개요
2. 작위
3. 생애
4. 가족관계
4.1. 조상
4.2. 자녀



1. 개요[편집]


영국 원저 왕조의 창시자인 조지 5세테크의 메리의 셋째이자 고명딸로, 제 6대 프린세스 로열이다. 에드워드 8세조지 6세의 여동생으로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이기도 하다.

증조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 재임 기간 중에 태어나서, 할아버지 에드워드 7세, 아버지 조지 5세, 오빠 에드워드 8세와 조지 6세, 조카 엘리자베스 2세까지 무려 6명의 국왕을 만났다.[1]

2. 작위[편집]


파일:Coat of Arms of Mary, the Princess Royal and Countess of Harewood.svg
문장


3. 생애[편집]


빅토리아 여왕 재임 시기인 1897년 4월 25일에 요크 공작 조지 왕자요크 공작부인 메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풀네임은 '빅토리아 알렉산드라 앨리스 메리'로 지어졌는데 '빅토리아'는 증조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알렉산드라'는 친할머니 덴마크의 알렉산드라로부터, '앨리스'는 아버지 조지 5세의 작은 고모이자 메리의 고모할머니인 앨리스 공주[2]로부터, '메리'는 어머니인 테크의 메리로부터 따와서 지었다. 6월 7일, 성 마리아 막달레나 교회에서 성공회 유아세례를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 참전 중인 군인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내주는 모금 활동을 펼치기도 하고 직접 간호 교육을 받아 일주일에 2번씩 병원에서 일하기도 했다. 주로 간호와 여성 관련 분야에서 자선 활동과 공무를 했다.

1922년 2월 28일, 제5대 헤어우드 백작의 장남 헨리 래슬스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했다. 조지 5세의 자녀들 가운데 첫 결혼식이었으며, 보그 등 패션 잡지에 최초로 보도된 왕실 결혼식이기도 하다. 엘리자베스 2세의 어머니이자 메리 공주의 친구이기도 한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이 신부 들러리를 섰다. 결혼하고 1년 뒤인 1923년 장남 조지를 낳았고 다음해에 차남 제럴드를 낳았다. 참고로 여자 형제 없이 남자 형제만 5명, 자녀는 아들만 2명, 심지어 손주도 6명 모두 남자이다.

그러나 이 결혼은 당시 왕실을 유지하려던 조지 5세와 메리 왕비가 강제결혼을 시킨 거나 다름없었으며, 정작 결혼하는 당사자인 메리와 헨리는 둘 다 이 결혼을 전혀 원하지 않았고 메리와 사이가 좋았던 큰오빠 에드워드 8세도 적극적으로 반대했다.[3] 언뜻 보면 15살 연하에다 무려 일국의 미녀 공주와 결혼하게 된 헨리가 완전히 땡 잡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 헨리는 부유한 헤어우드 백작의 아들이면서도 조용하고 개인적인 삶을 사는 것을 추구했고, 공주와 결혼하면 왕의 부마이자 왕실 가족의 일원으로서 죽을 때까지 여러 가지 공무를 해야 할 뿐더러 늘상 주목받는 삶을 산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메리와의 결혼을 절대 원하지 않았다.[4] 메리 역시 자신보다 15살이나 많다보니 세대 차이로 인해서 말도 별로 안 통하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조지 5세와 메리 왕비는 자식들이 혼기에 이르자 당연히 결혼하길 원했으나 다 큰 두 아들들인 에드워드 8세조지 6세는 당시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심지어 에드워드 8세는 유부녀와 대놓고 연애하고 있었다.[5] 왕실을 지키고 유지하는데 안간힘을 쓰고 있던 조지 5세와 메리 왕비는 왕가가 국민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고, 당연히 왕자와 왕녀들도 결혼할 나이가 되면 짝을 찾아서 결혼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장남과 차남의 연애질은 조지 5세와 메리 왕비라고 해서 쉽게 해결된 문제가 아니다 보니[6] 결국 가장 말 잘 듣는 자녀였던 메리를 나이는 좀 많아도 귀족이고 사생활 문제도 없는 헨리와 강제로 결혼시킨 것.

결혼 이후에도 메리 부부가 엄청나게 불행하다고 소문이 대놓고 자자했을 정도로 둘의 결혼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메리는 부모처럼 의무에 충실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아무리 불행한 결혼 생활이어도 이혼따위는 절대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의무적으로 아들 둘을 낳고 또 남편과 함께 나름 타협점을 찾았는지, 메리의 장남 조지는 후에 부모에 대해서 "어린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 부모가 매우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우정과 같은 취미로 함께 조화를 이루면서 살았다."라고 회고했다.

1965년 3월 28일 아들, 손자들과 헤어우드 하우스에서 산책하는 도중에 치명적인 심장마비가 와서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장례식은 비공개 가족장으로 진행됐으며,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추모예배가 열렸다.


4. 가족관계[편집]



4.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프린세스 로열 메리
(Mary, Princess Royal)
조지 5세
(George V)
에드워드 7세
(Edward VII)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작 앨버트 공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
(Princess Alexandra of Denmark)
크리스티안 9세
(Christian IX)
헤센카셀의 루이제
(Princess Louise of Hesse-Kassel)
테크의 메리
(Princess Mary of Teck)
테크 공작 프란츠
(Francis, Duke of Teck)
뷔르템베르크의 알렉산더 공작
(Duke Alexander of Württemberg)
키스레데 여백작
레데이 클라우디아
( Countess Claudine Rhédey von Kis-Rhéde)
케임브리지의 메리 애들레이드 공녀
(Princess Mary Adelaide of Cambridge)
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푸스 왕자
(Prince Adolphus, Duke of Cambridge)
헤센카셀의 아우구스타
(Princess Augusta of Hesse-Kassel)


4.2.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제7대 헤어우드 백작 조지 래슬스
(George Lascelles, 7th Earl of Harewood)
1923년 2월 7일
2011년 7월 11일 (88세)
마리온 슈타인
슬하 3남

패트리샤 터크웰
슬하 1남
2남
제럴드 래슬스
(Gerald Lascelles)
1924년 8월 21일
1998년 2월 27일 (73세)
안젤라 다우딩
슬하 1남
엘리자베스 콜링우드
슬하 1남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으며 손주들도 모두 남자다. 그런데 이 아들과 손자들이 이혼 및 재혼을 반복하며 사생아도 여러 명을 낳았기 때문에 메리 공주의 가계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상당히 복잡한 편이다. 오죽하면 사생아의 사생아라는 가계라고 할 정도.[7]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2 07:29:01에 나무위키 프린세스 로열 메리(1897)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바로 밑 남동생 글로스터 공작 헨리도 마찬가지이다.[2] 앨리스 공주는 메리가 태어나기 한참 전인 1878년 12월 14일에 사망했다. 공교롭게도 메리와 앨리스가 태어난 날은 4월 25일로 같다. 즉, 메리는 자신의 고모할머니와 생일이 똑같은 것.[3] 에드워드 8세는 결혼 적령기가 되었다고 해서 의무적으로 자신과 비슷한 신분의 상대와 정략결혼하는 것을 극혐하는 양반이었으며, 유부녀들과 광란의 나이트 라이프를 즐기느라 월리스 심프슨와 결혼할 때 요즘 기준으로도 만혼이었다. 게다가 "나는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 없이는 왕의 책무를 다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로 시작하는 세기의 연설을 끝으로 미련없이 퇴위할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걸 당연시했다. 그런 와중에 사랑하는 여동생이 부모의 압력에 못 이겨 15살이나 연상인 남자와 강제결혼하게 생겼는데 그걸 환영할 리가 없다.[4] 메리의 친구이자 훗날 올케가 되는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도 비슷한 이유로 조지 6세의 청혼을 두 번이나 거절했었다.[5] 원래 예전부터 영국의 왕족과 귀족 남성들은 유부녀성애자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으로 유부녀를 선호했는데, 이는 유부녀가 부담없어서라고. 오늘날에도 변치 않아서 찰스 3세만 해도 총각 시절에 대외적으로는 미혼 여친을 두었어도 뒤에서는 카밀라를 포함한 여러 유부녀 첩을 두었다.[6] 그래도 조지 6세는 조지 5세와 메리 왕비가 당시 연애 중이던 호주 출신의 유부녀 실라 러프버러하고 헤어질 것을 종용하자 망설임 없이 헤어졌다.[7] 혼외출산이 너무 흔해진 오늘날 서구권의 기준으로는 전혀 문제가 될 게 없는 가계도지만, 하필 공주의 직계 후손이자 엄연히 상류층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다. 아무리 서구권이라도 상류층은 여전히 결혼 후 출산을 하고 그걸 당연하게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