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룩 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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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룩 실즈
Brooke Shields

파일:브룩 쉴즈.jpg
본명
Brooke Christa Camille Shields
브룩 크리스타 카미유 실즈
출생
1965년 5월 31일 (58세)
미국 뉴욕 주 뉴욕 맨해튼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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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학력
드와이트-앵글우드 스쿨 (졸업) (-1983)
프린스턴 대학교 불어과 (학사) (1983-1987)
직업
배우, 모델
활동
1966년 – 현재
신장
183cm
부모
아버지 프랜시스 알렉산더 실즈(1941년 5월 16일~2003년 4월 25일)
어머니 테리 실즈(1933년 8월 1일~2012년 10월 31일)[1]
배우자
안드레 애거시 (1997년 4월 19일 결혼 ~ 1999년 4월 9일 이혼)
크리스 헨치 (2001년 4월 4일 결혼 ~ 현재)
자녀
장녀 로언 프랜시스 헨치(2003년 5월 15일생)
차녀 그리어 해먼드 헨치(2006년 4월 18일생)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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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미국배우이자 모델.

1980년대 이후 세대들은 브룩 실즈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브룩 실즈는 피비 케이츠, 소피 마르소와 함께 당대 (주로 1970년대생) 국내 남학생들의 책받침에 모셔져 있던 외국인 책받침 여신 중 한 명이었다. 아이돌 그룹이란 개념도 없던 시절 세대들의 해외 아이돌이었다고 보면 이해가 편하다. 당시 학교 근처 브로마이드를 파는 지역에서 이들의 브로마이드를 취급하지 않는다면 브로마이드 가게 맞나 의심해볼 정도였다.

짙은 눈썹과 183cm라는 큰 키, 풍성한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미인이며 아기 때부터 외모로 눈길을 끌었다. 리즈 시절 영화를 한편이라도 감상해본다면 제2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별명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에 한참 슬러프를 겪은 뒤 재도약 중이다.

2. 생애[편집]


아버지는 뉴욕최상류층 집안 출신이고, 어머니는 서민 출신이었다. 부계 쪽으로 도리아 가문, 그리말디 가문, 마호메트 가문, 보르자 가문메디치 가문의 피가 흐르는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브룩 실즈의 친할머니가 이탈리아 공작 영애라 이탈리아 및 기타 유럽 왕실, 귀족의 후손이다. 아버지로부터는 이탈리아, 프랑스, 아일랜드, 영국의 혈통을, 어머니로부터는 독일, 영국,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웨일스의 혈통을 물려받았다. 다만 후술할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부잣집 아가씨로 산 적은 없다시피 하다.

실즈의 부모님은 집안 차이로 시가의 반대에 부딪혔고, 어머니 테리 슈몬이 임신한 걸 알리자 지우라고 돈까지 줬다. 그러나 테리는 약속을 깨고 출산해 혼인 신고를 하면서 테리 실즈가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딸 브룩 실즈가 태어나고 얼마 안 돼 이혼했다. 아버지의 외면 속에 무일푼 어머니 밑에서 집도, 차도 없이 컸다. 그래도 친딸인지라 한달에 한번 아버지를 만나러 갔는데, 그가 다른 상류층 여성과 재혼해 낳은 세 이복 여동생들은 사랑받으며 공주처럼 살고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무척 심란했다고 한다.

첫 데뷔는 11개월 때로 1966년아이보리 비누 선전에 나왔다. 실즈가 태어났을 때부터 배우로 키우려고 결심했던 실즈의 어머니는 없는 살림을 쥐어짜 실즈를 무용학원 등에 보냈다.

실즈는 10살이었던 1975년 플레이보이에서 출판한 책 슈가 앤 스파이스(Sugar and Spice)에 실리게 되는 사진을 찍는다. 잡지 플레이보이와 달리, 최소한 명목상으로는 아름다운 여성들을 싣는다는 미학적 취지를 내세운 화보집이었다. 이 사진들 속에서 실즈는 어깨를 드러낸 채 기름과 반짝이를 묻히고 욕조 안에 서있었다. 문제는 실즈의 어머니는 이게 성적인 의도의 사진이라는 것도, 플레이보이 산하에서 출판될 사진 촬영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휴 헤프너가 교묘한 사기로 미성년자들을 속인 건 실즈가 처음이 아니었다. 헤프너는 플레이보이에 최소 9명의[2] 미성년자들의 화보를 실었는데, 아예 화보마다 대놓고 10대 소녀, 여학생 따위의 제목을 박았다.

플레이보이로부터 촬영을 의뢰 받았던 사진가 개리 그로스[3]는 촬영비로 450달러[4]를 받았는데 이때 찍은 실즈의 사진 프린팅을 계속 팔아대며 더 큰 부가가치를 창출했다.[5] 이 사진들을 찍게 한 걸 후회한 실즈의 어머니는 1981년 그로스가 실즈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며 소송을 걸었고 잠정 금지를 받아내기도 했지만 1983년 법원은 "변태가 아니라면 이 사진들을 성적으로 바라볼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결국 그로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로스는 죽을 때까지 실즈의 사진들을 인화해 팔아먹었다. 이베이에서 팔다가 걸려서 정지를 먹기도 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 리처드 프린스[6]라는 사진작가가 이 사진을 재촬영한 사진이 기존 저작권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종의 예술품으로 여겨지고 있다. 심지어 제목은 <Spiritual America>. 1923년 사진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7]거세마의 성기가 잘린 밑둥을 근접 촬영한 사진 제목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그로스는 프린스가 자신의 저작권을 침해했다며 고소했는데 2년 뒤 패소했다. 그래도 프린스는 그로스와의 소송에 다시 휘말리는 걸 피하려고 1992년에 휘트니 미술관에 전시할 땐 그로스의 권리 일부를 인정하는 형태로 2,000달러를 사용료로 줬다.

이렇게 실즈의 사진을 찍은 사진 <Spiritual America>는 이후 프린스의 대표작이 되어 2007년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은 아예 프린스의 회고전 이름 자체를 Spiritual America라고 지었다. 2009년 테이트 모던은 "Pop Life"라는 전시회를 열면서 이 사진을 포함 시켰다가 런던 경찰국에서 외설죄에 걸릴 수 있다고[8] 경고하자 내린 바 있다.

실즈는 1976년 처음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12살이었던 1977년 소녀 매춘부 역할을 맡은 <프리티 베이비>(1978)를 찍어 연기력 면에서 호평을 받았다. 그런데 이 영화가 아동성매매를 비판하려는 의도로 제작되었다고 해명을 했지만, 이 역시 12살 미성년자 아동을 발가벗겨 성적 대상화하려는 변명거리에 불과한 게 아닌가 하는 윤리적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9] 해당 촬영을 승인했던 실즈의 어머니도 비난의 대상이다.

한편 실즈는 최근 인터뷰에서 이같은 상황은 양육을 전혀 보조하지 않고 가난 속에 자신을 버려둔 아버지의 잘못이 크며, 연예계 활동은 두 모녀가 먹고 살 유일한 수단이었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알코올 의존증 등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업계에서 나쁜 짓을 당하지 않게 24시간 촬영장을 감시하며 철저히 보호했다고 옹호하기까지 했다.

실즈는 14살의 나이에 보그지의 표지모델을 하기도 했다.

파일:vogue1980-brooke-shields_.jpg


15살 때는 캘빈 클라인 진 광고 시리즈에 나왔는데 실즈와 실즈의 어머니는 책 속의 문구를 인용하는 등 지적인 광고가 될 거라는 설명을 듣고 광고를 계약했다고 하며, 대부분의 촬영은 실제로 어느 정도 그렇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중 한 편에 '캘빈 클라인 진과 나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 라는 이중적이고 자극적인 문구가 들어갔고, 외설시비가 붙어 금지를 먹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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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빈 클라인 측에서는 당연히 이런 화제성을 노리고 광고를 만든 것인데 문제는 매스컴의 공격을 15살에 불과한 실즈가 감당해야했다는 점이다. 실즈는 인터뷰나 토크쇼에서 이 광고의 선정적인 문구에 대해 해명을 해야 했고 고작 중고생 나이의 소녀에겐 꽤나 가혹한 일이었다. 실즈의 광고에 대한 회상 광고를 담당한 사진작가 리처드 아베돈은 평소 촬영장엔 자신과 실즈 빼곤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곤 했고, 해당 편의 촬영은 실즈 측에 아무런 사전 고지 없이 현장에서 즉석 진행되었다고 한다.

1980년 <블루 라군>에 출연했는데, 15살 미성년자임에도 엄청난 수위의 노출과 적나라한 성관계 묘사가 나왔다.[10] 1981년 6월 실즈가 찍은 보건복지부 금연 캠페인들이 갑자기 폐기됐을 때 실즈는 자신이 금연 캠페인에 적합한 인물임을 주장하기 위해 미 하원 분과위원회 청문회에 나갔는데, 이 과정에서 이 영화의 베드신엔 자신보다 나이가 더 많은 대역이 나왔다고 증언했다.

미 의회가 보건복지부를 조사하기 위해 청문회를 연 이유는 실즈가 섹스 심벌이라 10대의 롤모델로는 적합하지 않아서 캠페인을 접었다는 보건복지부의 말은 그저 핑계에 불과하고 실은 담배회사들이 보건복지부에 로비를 했기 때문이라는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즉 이 청문회는 의회에서 보건복지부의 비리 여부를 파헤치려는 자리였고, 실즈는 잠시 지나가는 참고인에 불과했을 뿐 중심인물이 아니었다.

미국 폐 협회[11]도 이 청문회에 나와 보건복지부를 추궁했는데, 이 협회는 나중에 보건복지부의 허락을 받아 해당 촬영분을 재활용해 배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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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Endless Love라는 주제가만 유명한 동명의 영화 <끝없는 사랑>에 출연했다. 흥행엔 성공했지만 실즈는 이 영화로 제1회 골든 라즈베리 최악의 여우주연상 수상자가 되었다. 여담이지만 이 영화에서도 노출 관련은 대역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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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배경인 TV영화 <템프테이션(Wet Gold)>은 1984년 첫 방영 당시 미국 지상파 방송 밤 9시-11시 시간대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때까지가 실즈의 전성기였다. 실즈는 이후 1983년 여느 신입생들과 같은 경로를 통해 명문 프린스턴 대학에 진학해 로망스어군, 특히 프랑스어를 중점적으로 전공하고 1987년에 우등 학위를 받으며 졸업했다. 연예인 특례입학이라는 루머는 한국의 윗세대에서만 퍼져있는 악의적 소문으로 전혀 사실이 아니며, 그런 입학 과정이 존재하지도 않고, 현재까지도 유명 연예인 중에 프린스턴을 졸업한 여성은 실즈가 거의 유일하다.[12] 입학원서를 낼 때부터 실즈가 아이비리그 대학 아무 곳이나 들어갈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게 이미 기정사실이었기 때문에 합격 발표가 나기 전부터 프린스턴 교내 잡지에서 설레발을 치며 실즈와 잠자리 가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실어 편집장들이 잘릴 정도였다.

실즈는 대학에 집중하기 위해 아예 재학 내내 연예 활동을 거의 중단했었다. 다만 교양과목을 다양하게 듣지 않고 본인의 흥미에 편중해 수강했기 때문에, 졸업하면서 신문 칼럼에서 이를 지적 당한 적은 있다. 교양은 전인교육을 목적으로 하므로 원 의도에 따르자면 다양한 분야를 조금씩 전부 섭렵해야 하는데, 실즈는 그 취지를 벗어나 자신의 취향에 맞는 과목만 들었기 때문이다. 역시 거의 유일한 프린스턴 출신 유명 남성 연예인인 대배우 제임스 스튜어트의 조언에 따라 그가 활동했던 유서 깊은 연극 동아리 트라이앵글 클럽[13]에 들어가서 활동하기도 했다.

훗날 인터뷰에서 만 22세에 첫 섹스를 했다고 밝혔는데,[14] 상대는 프린스턴 동기이자 TV시리즈 슈퍼맨의 주연이던 딘 케인. 이 당시 마이클 잭슨과 공개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마이클 잭슨과 굉장히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이 둘은 비슷한 시기에 연예계에서 전성기를 보냈고,[15] 유년기에 극성 부모 밑에서 일하느라 어린 시절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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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보그지 표지

프린스턴 진학 직전에 촬영을 끝냈던 <사하라>는 흥행에 대실패했고, 프린스턴 졸업 후 현장에 복귀한 뒤에도 예전만한 위상을 되찾을 수가 없었다. 실즈의 팬이던 사우디아라비아 왕족의 사위가 투자해 진행된 <브랜다 스타>(1991)는 제작사의 사정이 얽혀 개봉도 못하다가 나중에 몇몇 극장에서 상영하여 1,600만 달러 제작비 대비 약 8만 달러 수익에 그쳤다. 2차 시장에서도 최악의 평가를 받아 골든 라즈베리의 여러 부문 후보에 올랐다. 한국에서는 1992년 초, SBS 초기 외화로 더빙 방영하고 <애니메이터>라는 제목으로 비디오가 나오기도 했다. 1989년에 실즈가 카메오로 나온 <캐논볼 3>도 거기서 거기였다.

실즈의 섹시한 이미지를 섹스어필하려는 배역 제의가 많았는데, 실즈는 자신의 이미지가 그쪽으로 굳어질까봐 계속 거절했고, 그러다보니 영화계에서 출연할 기회가 점점 뜸해진 것.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계속 연예계 활동을 한지라 이미지 소모가 너무 많았던 탓도 있다. 전형적인 아역 배우 딜레마다. 그래도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90년대에도 계속 중규모 영화를 찍었고, 유명 TV 드라마에 조연 혹은 게스트 스타로 출연했다. 1996년에는 성인이 되고 난 후 처음 롤링 스톤지 표지에 누드로 등장한 바 있다. 1996년에서 2000년까지 4시즌 방영된 NBC 시트콤 "Suddenly Susan"에서 주연을 맡았다.

실즈의 제2의 전성기는 오히려 더 나이가 들어서였다. 물론 한창때인 1980년대 초반만큼의 인기는 아니지만, 연기력도 향상돼 인기 드라마 "립스틱 정글(2008-09)"에서 주연급으로 활약해 미국 시청자들 사이에서 다시 익숙한 얼굴이 되었다. 한창 미모의 시기를 슬럼프로 보내고 나이가 들어 연기력으로 재승부에 성공한 비슷한 사례들로 제니퍼 코넬리, 다이앤 레인 등이 있다.

첫째를 낳고 산후우울증으로 고생했는데, 2005년 자서전 "Down Came the Rain: My Journey Through Postpartum Depression"을 통해 이를 공개한 뒤 톰 크루즈로부터 왜 무책임하게 우울증약을 먹는다는 사실을 대중에 알려서 우울증약을 홍보하냐며, 그 때문에 경력이 망가진 거라는 비난을 받았다. 톰 크루즈는 사이언톨로지 교리를 내세우며 비타민 섭취와 운동으로 해결하라는 황당한 조언을 했다. 실즈는 어머니로서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기 위해 우울증약을 먹어 우울증을 다스리는 게 뭐가 문제냐고 반박하며 뉴욕타임즈에 기고문까지 실어 크루즈를 비판했다. 이 사건은 톰 크루즈의 사이비 신도 이미지에 쐐기를 박는 계기가 되었다. 톰 크루즈는 나중에 실즈에게 개인적으로 사과했다.

남편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산후우울증은 나았고 둘째 때는 같은 일을 겪지 않았다고 한다.

2021년 넷플릭스에서 로맨틱 코미디 <크리스마스 캐슬> 주연을 맡았는데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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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최근엔 나이에 비해 관리가 잘 된 느낌이 주목을 받아 패션광고와 화보 촬영을 자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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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타[편집]




  • 1988년에 한국에 한국계 코미디언 자니 윤, 유명한 코미디언 밥 호프와 함께 올림픽 기념 공연 겸 주한미군 위문을 위해 방한한 적이 있다. 자니 윤과 꽤 친하다고. 이때 자니 윤과 듀엣으로 노래를 불렀는데, 노래 실력은 외모에 못 미쳤다는게 중론.[17] 올림픽 개막 3개월 전에 일화의 음료 브랜드인 맥콜의 단독 협찬으로 쇼를 개최했으며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조용필도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이 쇼는 KBS에서 녹화하여 5월 15일 방영했기 때문에 브룩 쉴즈와 같은 대형 해외스타가 한국 쇼에 출연한 드문 사례가 되었다.자니윤 웰컴쇼 출연영상


  • 1997년에 테니스 스타인 안드레 애거시와 결혼한 후 2년 만에 아이 없이 이혼했고(동거는 1993년부터 시작), 현재는 TV 작가인 크리스 헨치(Chris Henchy)와 부부이고, 두 이 있다.

  • 한국 음식을 좋아해서 뉴욕 한아름마트에 들른다는 기사가 났으나# 이는 이명박 정부 시절 영부인 김윤옥 여사가 "한식세계화"를 위한다며 3억 2천만 원으로 섭외한 가짜 연출 사진이었다. 뒷얘기가 밝혀진 뒤 잘못된 예산 집행으로 비판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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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3년에 알베르 공과 함께 공개적으로 이벤트성 테니스 경기를 딱 한 번 가진 이후 둘이 사귄다는 얘기가 돈 적이 있는데 그저 루머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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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황 나루히토는 영국 유학 시절 실즈의 커다란 포스터를 기숙사 벽에 붙여놓았는데, 방 사진이 영국 타블로이드 지에 실리는 바람에 실즈의 팬이라는 게 알려진 바 있다. 몇 달 뒤 프린스턴에 방문했을 때 그곳 학생이던 실즈와 만나 10분간 대화를 나눴다. 이후 1990년 11월 실즈는 해리 윈스턴 탄생 100주기 기념 200캐럿 짜리 티아라의 모델을 서기 위해 방일한 적이 있는데 나루히토가 실즈를 리무진에 태워 궁에 데려와 한 시간 가량 대화를 나눴다는 소문이 있다.

  • 이후 한 외국 기자가 나루히토에게 "실즈에게 청혼할 생각은 없냐"고 묻자, 나루히토는 "저는 외국인과 결혼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18] 나루히토는 1986년부터 반해있던 외교관 오와다 마사코와 1993년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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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즈의 매니저이기도 했다.#[2] 신상명세가 전부 확인된 경우.[3] Gary Grosse.[4] 2023년 1월 가치로 320만 원 가량이다.[5] 재판 과정에서 이런 짓이 합법적으로 가능하도록 계약서에 갖은 속임수 문구를 넣어뒀다는 게 밝혀졌다.[6] Richard Prince.[7] Alfred Stieglitz. 1864 – 1946.[8] 사진의 수위와는 별개로 원본 사진은 아동성애 목적임이 분명하다.[9] 특히 이 경우는 지금도 성범죄를 고발한다며 해당 여배우에게 신체를 노출시켜 성 상품화하고 있는 영화계의 이중잣대가 자행되고 있다.[10] 여담이지만 피비 케이츠가 주연한 <파라다이스>(1982)가 스토리가 비슷하며 역시 미성년자 연인간의 성관계를 묘사해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11] American Lung Association.[12]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루머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프린스턴이 실즈를 억지로 데려와 누릴 수 있던 이득은 전무했다. 실즈는 거의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에게 버림 받아 집안 빽도 없었고, 당시 본의 아니게 여러 논란의 중심이었던 섹스 심벌이라 프린스턴의 이미지에 악영향을 끼치면 끼쳤지 도움이 될 수 있는 인물도 전혀 아니었다. 위에 나와있듯이 또래 롤 모델로 부적합하다는 말을 무려 보건복지부가 공개적으로 발표할 정도였다.[13] Triangle Club.[14] 실즈는 괜한 얘기를 한 것 같다고 나중에 후회했다.[15] 둘다 1980년대 초에 전성기였다. 다만 실즈의 전성기가 더 짧다. 잭슨은 1990년대 중후반까지이고, 실즈는 1980년대 후반까지였다.[16] 옆은 남자주인공으로 나온 캐리 얼웨즈.[17] 가수라기보다는 그냥 노래 그럭저럭 하는 일반인의 목소리다. 물론 브룩 쉴즈는 어디까지나 가수가 아니라 배우다.[18] 실즈 입장에선 아쉬울게 없는 입장일 뿐더러 혈통의 순수성을 중시하는 궁내청에서도 반대했을 것이고, 애초에 동양권이라 혼혈 황손을 본다는건 국민 정서에 맞지 않는 이유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