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조편년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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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전(失傳)되어 현재는 존재하지 않음.

번외: 현대 역사서
한국사





1. 개요
2. 내용
3. 현전하는 내용


1. 개요[편집]


本朝編年綱目

〈민지는〉 충숙왕 13년(1326) 죽으니 나이는 79세이며 시호는 문인(文仁)이다. 충렬왕이 일찍이 민지에게 명하여 정가신(鄭可臣)이 찬술한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을 증수(增修)하게 하였는데 나라에 변고가 많았던 까닭에 그것을 완성할 겨를이 없었다. 후에 권보와 함께 교열을 보고 찬술하여 완성하고 『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라고 이름하였다. 호경대왕(虎景大王)으로부터 원종[元王]에 이르기까지 7권으로 나누었고 세계도(世係圖)를 갖추어 올렸다. 또 『본국편년강목(本國編年綱目)』을 찬술하여 위로는 국조(國祖) 문덕대왕(文德大王)에서 시작하여 아래로는 고종(高宗)에서 마쳤는데 책이 무릇 42권이었다.

고려사 제신열전 민지


고려의 문관 민지1317년 저술한 역사서. 1346년에 누락된 부분이 많아서 부원군 이제현 등이 중수했다. '본국편년강목(本國編年綱目)', '편년강목(編年綱目)'으로도 불리며 총 42권으로 구성되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는 사서다.

고려사 고려세계 부분에서 인용된 부분들이 있는 점을 볼 때, 조선 초기[1]까지는 편년강목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본조(本朝)/본국(本國)은 고려를 의미한다.

2. 내용[편집]


태조(고려)의 증조부인 문덕대왕부터 고종(고려) 시기까지의 내용을 다뤘다고 한다.


3. 현전하는 내용[편집]


고려사 고려세계(高麗世系)에서 편년강목을 인용한 기록들이 남아있는데, 다음과 같다.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에서 『벽암록(碧巖錄)』 등의 선록(禪錄)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당 선종(宣宗)의 나이 13세 때 목종(穆宗)이 황제였었는데, 그가 장난삼아 황제의 자리에 올라가 신하들에게 읍(揖)하는 시늉을 하니 목종의 아들인 무종(武宗)이 내심 꺼렸다. 무종이 즉위한 후 선종이 궁중에서 해를 입고 숨이 끊어지려다 살아나, 몰래 궁중을 빠져나와 멀리 달아나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며 온갖 풍상을 다 맛보았다. 염관현(鹽官縣)의 안선사(安禪師)가 용안(龍顔)을 속으로 알아보고 대우하는 것이 특히 후해 염관현에 가장 오래 머물렀다. 또 선종은 일찍이 광왕(光王)이 되었는데 광군(光郡)은 곧 양주(楊州)의 속군(屬郡)이고 염관현은 항주(杭州)의 속현(屬縣)인데 모두 동해(東海: 황해)에 연접하여 상선이 오가는 지방이었다. 〈선종은〉 화를 당할까 두렵고 완전히 몸을 숨기지 못한 것을 걱정한 까닭에 산수를 유람한다는 핑계로 상선을 따라 바다를 건넜다. 이때는 당의 역사가 찬술되지 않아서 당 황실의 일을 자세하게 알 수 없었다. 다만 숙종 선황제(肅宗 宣皇帝) 때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있었음은 들었으나 선종이 난리를 만나 달아났다는 일은 듣지 못하였으니 〈앞의 기록에서는〉 선종 황제를 숙종 선황제라 잘못 적은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세상에 전하기를, “충선왕(忠宣王)이 원(元)에 있을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왕과 교유하였던 어떤 사람이 왕에게 일러 말하기를, ‘일찍이 듣기를 왕의 선조께서 당 숙종에게서 나왔다고 하던데 어디에 근거한 바입니까? 숙종은 어려서부터 일찍이 대궐 문을 나오지 않았고 안록산의 난 때 영무(靈武)에서 즉위하였으니 어느 때에 동쪽으로 와서 아들을 두기에 이르렀겠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크게 부끄러워하며 답하지 못하였는데 민지가 곁에 있으면서 대답하여 말하기를, ‘그것은 우리나라 역사에 잘못 쓰였을 뿐입니다. 숙종이 아니고 선종입니다.’라고 하였다. 학사가 말하기를 ‘선종이라면 오랫동안 외지에서 고생하였으니 아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이하 중략)


〈숙종이〉 한 달을 머무르다가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에는 혹 1년이라고 하였다.】 임신하였다는 것을 깨닫고 헤어지면서 말하길, ‘나는 대당(大唐)의 귀한 가문 사람(貴姓)이오.’라 하고 활과 화살을 주며 말하길, ‘아들을 낳거든 이것을 주시오.’라고 하였다. 과연 아들을 낳아 작제건(作帝建)이라 불렀다. 뒤에 보육을 추존하여 국조 원덕대왕(國祖 元德大王)이라 하고 그의 딸 진의를 정화왕후(貞和王后)라 하였다.


(중략) 그 때가 당 희종(僖宗) 건부(乾符) 3년(876) 4월이었다. 세조가 그의 말을 따라 집을 짓고 살았는데 이 달 위숙왕후(威肅王后)가 임신하여 태조(太祖)를 낳았다.”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에는, “태조의 나이 17세 때 도선(道詵)이 다시 와서 뵙기를 요청하고 말하기를, ‘족하(足下)께서는 백육(百六)의 운에 응하여 천부(天府)의 명허(名墟)에서 탄생하셨으니 3계(三季)의 창생이 그대의 홍제(弘濟)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전쟁에 나가 진을 칠 때 유리한 지형과 적합한 때를 고르는 법, 그리고 산천을 차례대로 제사지내어 신과 통하고 도움을 받는 이치를 알려주었다. 건녕(乾寧) 4년(897) 5월에 세조께서 금성군(金城郡)에서 돌아가시니 영안성(永安城) 강변의 석굴에다 장사하고 이름을 창릉(昌陵)이라 하였으며 위숙왕후를 합장하였다.”라 하였다. 『실록(實錄)』에는, “현종(顯宗) 18년(1027)에 세조의 시호에 원렬(元烈)을, 왕후에게는 혜사(惠思)를 더하여 올렸으며, 고종(高宗) 40년(1253)에는 세조에게 민혜(敏惠)를, 왕후에게는 인평(仁平)을 더하였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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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사는 1451년 편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