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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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고대사
3. 중세사
3.2. 오스만 제국 시대
4. 양차 세계대전
8. 현재


1. 개요[편집]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역사를 다루는 문서이다.


2. 고대사[편집]


고대에는 일리리아(Illyria), 혹은 달마티아(Dalmatia)라고 불렸으며, 로마 제국의 속주로 편입되었다. 이 땅에는 독자적인 일리리아 민족이 살았는데 아드리아해에서 해적업을 하던 민족이었다고는 전한다. 4세기 후반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리되면서 서로마 제국에 편입되었지만 서로마가 통치 능력을 잃으면서 동고트족이 대거 이주, 정착하였다.

3. 중세사[편집]


이후 6세기 동로마 제국에 편입되었으나 7세기 이후 슬라브족이 대거 이주, 슬라브계의 크로아티아 공국의 통치를 받았다. 9~10세기경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후에 헝가리의 정복이 있어 보스니아 공작령이 세워졌다. 그러나 이 지역은 보고밀파를 중심으로 한 사실상 자치국가가 성립되었으며 이때문에 헝가리에서 재차 보스니아 십자군을 일으켜 침공해오기도 했으나 몽골제국의 헝가리 침공으로 위기를 넘기고 상당한 기간 자치를 누렸다. 이후 여러 개의 소국들로 쪼개졌으며 줄곧 크로아티아세르비아 양자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

3.1. 보스니아 왕국[편집]


그러다가 1377년에 공식적으로 보스니아 왕국이 건국되었고 헝가리 왕국이 약화되고 세르비아 제국이 분열된 틈을 타 영토를 넓혔다. 하지만 1391년, 트브르트코 1세가 죽은 후 그 역시 분열했으며 서부는 흐르보예 부크치치, 동부는 산달 흐라니치 장군이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1448년, 산달의 후계자인 스테판 부크치치 코사차는 나폴리 왕국을 주군으로 모시며 왕 칭호를 버리고 스스로 '헤르체그', 즉 대장군이라 칭하였다. 이후로 그의 영토는 헤르체고비나라 불리게 되었다.

3.2. 오스만 제국 시대[편집]


보스니아 역사가 요동치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터키인이 발칸 반도로 밀려들면서부터였다. 1463년 보스니아를 정복한 오스만 제국은 이 지역의 보스니아인들에게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강요하고 한편으로는 많은 무슬림을 이주시켰다. 보스니아 지역에는 당시에 이단 기독교 취급을 받던 보고밀파[1]가 대세였으나, 오스만 제국 시기에 보고밀파 신도들은 17세기를 거치며 거의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오늘날 세르보크로아트어를 사용하는 세 민족이 각자의 정체성을 종교에 따라 확립한 것도 이 시기이다. 보스니아 왕국 시절까진 가톨릭 신자이든 정교회 신자이든 하나의 보스니아인이라는 개념이 강했으나 오스만 제국의 압박과 생활상의 편의 및 실리 도모를 위해 보스니아인 중 일부가 이슬람으로 개종했는데 이들이 바로 영어식 표현인 '보스니악(Bosniaks)'으로도 지칭되는 '보슈냐크인(Bošnjaci)'이다. 가톨릭를 신봉하는 보스니아인은 가톨릭 국가였던 크로아티아에서, 정교회를 신봉하는 보스니아인은 정교회 국가였던 세르비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면서 이때부터 하나의 보스니아인은 종교에 따라 갈라지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같은 무슬림이었던 보슈냐크계를 우대하고 가톨릭/정교회 등 기독교를 믿는 크로아티아계와 세르비아계를 차별하였으나 정작 해당 지역을 1855년 여행한 프랑스인 외교관에 의하면 보스니아인들은 서로 종교가 달라도 사이좋게 잘 어울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유고 전쟁 때 세르비아계가 혈통상으로는 동일한 보슈냐크계를 조직적으로 학살하는 참상이 일어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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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 시대에 이슬람으로 개종한 보슈냐크인들을 그린 그림들.

4. 양차 세계대전[편집]


이후 19세기 중반까지 보스니아는 별다른 문제없이 오스만의 통치를 받았으나, 1878년 베를린 회의의 결정에 따라 지역 전체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관리 하에 편입되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이 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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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르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2][출처]

1908년,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의 사전양해를 얻어 보스니아를 합병하자 세르비아가 격렬히 반발했고, 당시의 삼국 동맹-삼국 협상의 경쟁 구도와 대립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결국 1914년,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헝제국 제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세르비아계 테러 조직인 검은 손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은 불을 뿜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18년, 보스니아 지역은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에 병합되었고, 이후에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개칭하게 된다. 그러나 민족적, 종교적으로 상이한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결속력이 떨어졌고, 결국 제2차 세계 대전 중 전쟁터가 되었다. 이때 보스니아의 험악한 지형은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끈 공산 게릴라가 활동하는 공간을 제공해 주었다.

5.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편집]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하면서 크로아티아 독립국에 영토가 속해 있었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이었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국민해방을 위한 반파시스트 국가평의회(ZAVNOBiH)'의 주도하에 별도의 공화국으로 승격되어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편입되었고, 이 때부터 사라예보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역할을 하며 성장하였다.

1980년 티토 대통령 사후에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은 각 공화국의 출신 정치인들이 1년에 대통령직을 맡는 집단지도체제로 개헌하고[3] 각 구성국에 지방 자치와 의회 건설을 허용하는 등의 유화책을 실시되었다. 그래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에도 의회가 생겼다.

6. 동유럽 혁명 ~ 보스니아 전쟁 전야[편집]


1989년 동유럽 혁명으로 인해 유고슬라비아에도 민주화 열풍이 불어닥쳤다. 각 구성국 내에서 민주화 요구가 잇따르자 당시 연방 공화국의 실권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민주화 조치 중 하나로 각 국가별 의회를 세우게 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 국회.

말은 사회주의 공화국이지만 1990년 자유 총선에 의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민주화됐고, 1990년 총선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산당은 12.9%를 득표, 무려 제5당으로 굴러떨어지며(...) 여당 지위를 잃었다. 그러나 1990년부터 1992년에는 법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보스니아에는 여당이 없었는데, 보슈냐크계,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일부 소수정당 등이 자기네들이 정권을 차지해야 한다며 타협을 거부하여 대통령, 총리를 찾지 못했다. 1990년 선거를 해놓고도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를 대통령으로 간주하고 독립을 선언한 것은 1992년 4월 1일까지 가서나 가능했다.

자유 의회가 구성되면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민족주의 열풍에 휘말려 엄청난 정치 갈등을 맞게 된다. 세르비아계를 이끌던 라도반 카라지치1992년 독립 선언 이전인 1991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 국회 연설에서 보슈냐크인 민족주의 지도자인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를 상대로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할 생각하지 마라. 만약 독립을 선언하면 무슬림들은 전면적으로 제거당할 것"이라며 국회에서 대놓고 폭언을 퍼부었다.[4] 결국 저 연설 6개월 후 진짜 보스니아 전쟁이 터진다.

7. 보스니아 전쟁[편집]



90년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공중분해, 연방을 이루고 있던 옆나라인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의 독립선언과 성공에 자극을 받아 보슈냐크계 주민과 크로아티아계 주민이 협력하여 1992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인구의 약 30%를 차지하는 세르비아계가 격렬히 반발, 분리독립반대 무장투쟁에 돌입하자 유고 연방의 종주국인 세르비아가 내전에 개입하였다.

1992년 2월 29일부터 3월 1일까지 이틀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전역에서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하는 독립 국민투표를 시행하였다. 국민투표는 보슈냐크인크로아티아인[5]들이 압도적으로 찬성하는 분위기였기에 가결될 가능성이 컸고, 라도반 카라지치가 이끄는 세르비아계는 독립 국민투표를 인정할 수 없다며 보이콧했다. 3월 1일까지 진행된 국민투표의 투표율은 63.73%였고 유효표 중 찬성은 99.71%에 달하여 독립 국민투표는 가결됐다. 세르비아계가 보이콧을 한 상황에서 이 국민투표는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의 거의 전부가 독립을 원한다는 증거가 됐다.

1992년 4월 1일 이슬람계를 대표하여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사라예보에서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건국을 선언하였다. 이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뒤질세라 1992년 4월 6일 라도반 카라지치는 사라예보 남동쪽에 있는 세르비아 접경지 팔레(Pale)에서 세르비아의 지원을 얻어 사실상 괴뢰국스릅스카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이미 직전년도인 1991년 보스니아 국회에서 카라지치가 "무슬림놈들 독립 선언하면 다 죽을 줄 알아라."라고 협박하는 지경이었고, 1991년 연말부터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보슈냐크인들이 서로 집단구타를 하는 등 폭력사태가 빈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2년 4월 이제트베고비치와 카라지치의 건국 선언이 이뤄지자 보슈냐크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 폭탄, 지뢰를 끌고 나오며 전쟁을 개시했다.

아무런 전쟁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6]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전쟁이 갑자기 발생하게 된 원인은 유고 연방군 및 세르비아 민병대에게 신나게 털리던 크로아티아가 유고 연방군의 대공세를 다른 쪽으로 돌리기 위해 보스니아 전쟁을 조장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전쟁초기 세르비아 민병대는 거의 양민학살급으로 보슈냐크계와 크로아티아계를 쓸어버렸다. 세르비아계 주민의 무장투쟁과 민간인 학살은 1945년 이후 약 반세기 만의 인종말살전쟁으로 비화되면서 국제적 파문을 일으켰지만, 별로 건질 것이 없는 보스니아 전쟁에 미국과 서구 국가들은 굼뜬 반응만을 보여주면서 비극은 확산되었다. 이는 국제사회가 인의도덕보다 냉정한 실리에 움직이는 정세라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더욱이 '인도적'이라는 이름을 걸고 내전에 직접 개입해 병력은 파병하고 지나치게 '인도적'이라는 명분에 목을 매면서 중립을 지켜 사태악화에 일조하는 무능함까지 보여주었다.

내전은 초반에 보슈냐크계와 크로아티아계가 연합해 세르비아계에 대항하는 구조였다. 아주 잠깐 크로아티아계가 보슈냐크계에 전쟁을 선포하기는 했으나 본국인 크로아티아가 세르비아계 민병대와 유고 연방군에 영혼까지 털리느냐 마느냐의 상황에 처해있었던 데다 세르비아계가 보스니아에서 무슬림계와 크로아티아계를 박멸하느냐 마느냐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금세 화해하고[7] 세르비아계에 대항했다. 그러나 NATO군이 직접 개입하기 전까지 세르비아계 민병대와 유고 연방군에게 처절할 정도로 발렸다. 그나마 박멸당하지 않았던 이유는 UN평화유지군 및 NATO가 민간인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반격을 시작한 것은 국제사회의 비난에 어쩔 수 없이 NATO가 보슈냐크계, 크로아티아계를 적극 지원하기 시작한 이후였다.

결국 갈등이 수습되지 않고 계속 커지자 보다못한 미국이 나서서 무력중재에 돌입했다. 먼저 세르비아계 민병대의 주요거점에 집중폭격을 가해 크로아티아계, 무슬림계가 세르비아계 민병대와 유고 연방군에 반격을 할 수 있게 도와 전세를 바꾼후, 러시아, 독일 등을 끼워넣어 구색을 맞춘 UN의 조정을 거쳐 1995년 데이턴 협정에 따라 휴전 및 내전종식이 합의되었다. 이에 따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은 해체되고 보스니아계 무슬림의 공화국과 세르비아계의 스릅스카 공화국 등 2개 공화국으로 구성된 연방 공화제가 국체(國體)로 선택되었으나, 옆나라인 신(新) 유고슬라비아의 정치상황이 요동칠 때마다 보스니아 정국도 불안해졌다.

사실 데이턴 협정의 핵심내용은 '이 협정을 어긴 놈은 미국과 NATO가 아주 영혼까지 부숴버릴거야'라는 협박이다. 협정조인 자체가 미국에서, 그것도 아주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분쟁 당사자들이 조인한 것이다. 그래서 그 후 충분히 내전이 재발할 수 있는 상황이 여러차례 있었지만 내전이 재발하지 않고 불안정한 상태에서 국가의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8. 현재[편집]


신 유고 연방이 밀로셰비치 통치를 지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이어 세르비아몬테네그로로 찢어지면서 보스니아도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는듯 보이나, 주변국에 비하면 경제 사정은 몹시 열악하고 세르비아계의 인종학살에 따른 인도적 재판과 복구, 뒷처리 문제도 국가적 과제로 남아있다.

참고로 유럽에서 20세기 역사를 두고 종종하는 농담이 "1차대전 이후 모든게 완전히 바뀌었지만 보스니아가 세르비아 땅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았다"이다. 민족주의 내세워서 학살 일으킨 세르비아의 자업자득이다.

일부 세르비아 극우는 차별받는 세르비아인 권익을 위해서 행동했다고 주장하지만 티토 생전에도 정재계와 군경의 요직은 대부분 세르비아인이 차지하였고 오히려 티토의 노력에도 세르비아계를 제외한 타 민족이 차별당하는 게 유고슬라비아의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는 티토 사후 타 민족을 더욱 차별하고 자치권도 박탈하였으며 이는 유고 연방의 분열을 가져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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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니교의 영향을 받아 이 세상은 구약의 악한 신이 창조했고, 천국은 신약의 선한 신이 창조했다는 세계관을 가졌다.[2] 왼쪽의 나폴레옹 모자처럼 생긴 모자를 쓴 사람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 오른쪽의 왕관을 쓴 사람은 불가리아 왕국 국왕인 페르디난트 1세이다. 아래쪽의 팔짱을 끼고 못마땅한 표정을 한 사람은 오스만 제국 황제인 압뒬하미트 2세.[출처] http://en.wikipedia.org/wiki/Bosnian_crisis[3] 하지만 이것이 유고 연방이 분열되는 악영향을 초래했다.[4] 이에 이제트베고비치는 카라지치의 폭언에 "세르비아인들을 제외한 누구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당시 신유고 연방 수립 이전)의 국민으로 살고 싶어하지 않으며 너희가 아무리 무슬림들을 죽여도 무슬림 사회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라고 일갈했다.[5] 프라뇨 투지만의 지원을 받았다.[6] 개전 당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는 정규군이 없었다! 그래서 보스니아가 제대로 된 정규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ARBiH)'을 창설하기 전까지는 민병대나 준군사조직 등으로 버텼다.[7] 하지만 화해하고 나서도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한테 관리지역을 넘겨주는데 1년 6개월이나 걸렸다. 그 와중에 크로아티아의 지원을 받은 해안 일대에 살던 보슈냐크인 무슬림들은 프라뇨 투지만이 이끄는 크로아티아군에 의해 학살을 당했다. 그래서 보슈냐크인들은 뒤통수 오지게 때린 프라뇨 투지만 전 크로아티아 대통령을 싫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