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티 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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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티 와이트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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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에미상 시상식
파일:emmylogo.png
여우주연상 - 코미디 시리즈
제37회
(1986년)


제38회
(1987년)


제39회
(1988년)

제인 커틴
(케이트 & 앨리)

베티 와이트
(더 골든 걸스)


루 머클래너핸
(더 골든 걸스)
여우조연상 - 코미디 시리즈
제26회
(1975년)


제27회
(1976년)


제28회
(1977년)

클로리스 리치먼
(메리 타일러 무어 쇼)

베티 와이트
(메리 타일러 무어 쇼)


베티 와이트
(메리 타일러 무어 쇼)

제27회
(1976년)


제28회
(1977년)


제29회
(1978년)

베티 와이트
(메리 타일러 무어 쇼)

베티 와이트
(메리 타일러 무어 쇼)


메리 케이 플레이스
(메리 하트먼, 메리 하트먼)
게스트 여자배우상 - 코미디 시리즈
제47회
(1996년)


제48회
(1997년)


제49회
(1998년)

신디 로퍼
(매드 어바웃 유)

베티 와이트
(존 라로켓 쇼)


캐럴 버넷
(매드 어바웃 유)

제61회
(2010년)


제62회
(2011년)


제63회
(2012년)

티나 페이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

베티 와이트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


귀네스 팰트로
(글리)






베티 화이트
Betty White


파일:Betty White.jpg

본명
베티 매리언 화이트 러든
Betty Marion White Ludden
출생
1922년 1월 17일
미국 일리노이주 오크 파크
사망
2021년 12월 31일 (향년 99세)
미국 캘리포니아로스앤젤레스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신체
162.5cm
배우자
딕 바커(1945년 결혼~1945년 이혼)
레인 앨런(1947년 결혼~1949년 이혼)
앨런 러든(1963년 결혼~1981년 사별)
학력
베벌리힐스 고등학교 (졸업)
직업
배우, 성우, 코미디언
활동 시기
1939년 ~ 2021년
링크
파일:IMDb 로고.svg

1. 개요
2. 위상
3. 생애
3.1. 사망
4. 출연 작품
4.1. TV 쇼
4.2. 드라마
4.3. 영화
4.4. 애니메이션 영화
4.5. 애니메이션 시리즈
5. 여담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미국의 배우, 성우, 코미디언.


2. 위상[편집]


미국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인물 중 하나로 미국 방송계의 별명이 '텔레비전의 영부인(First Lady of Television)'이다. 텔레비전 방송의 선구자로, 연예 산업에서의 방대한 활동으로 유명했다. 카메라 앞과 뒤에서 통제권을 행사한 최초의 여성들 중 하나였으며, 시트콤을 제작한 최초의 여성들 중 하나였다. 또한 80년이라는 엄청난 기간 동안 일해 기네스 기록까지 세웠다. 제2차 세계 대전부터 활동한 미국 대중문화의 산증인인 원로배우인 셈. 출연작인 전설적인 NBC 드라마 "더 골든 걸스(The Golden Girls)"의 제목에서 따온 미국의 골든 걸(America's golden girl)이란 애칭도 있다.


3. 생애[편집]


1922년 1월 17일 시카고 서쪽의 소도시인 오크 파크(Oak Park)에서 태어나 1살 때 로스앤젤레스 동쪽의 소도시 앨햄브러(Alhambra)로 이사갔고, 대공황 시기인 1929년 로스엔젤레스로 이주한다. 아버지는 광학 라디오(Crystal Radio)를 판매하는 일을 했다.

1939년에 베벌리힐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예계에 진출하여 텔레비전 산업의 초창기였던 당시 실험적으로 방영했던 TV쇼에 동창생과 함께 출연해 레하르 페렌츠의 오페레타 "Die lustige Witwe(유쾌한 미망인)"에 나오는 노래들을 부르며 연예인으로 데뷔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여성 봉사단으로 활약하여 PX 트럭을 운전하기도 했다.

전후에는 영화에 출연하려 했으나 영화사들이 외모를 문제 삼으며 거절하여 라디오 방송으로 옮겼다. 광고방송이나 단역 연기 등 잡일로 시작하여 여러 라디오 방송계에 진출했다.

1949년부터 1953년까지 생방송 토크쇼 "Hollywood on Television"을 진행했다. 공동으로 진행하던 남성 진행자가 쇼를 떠난 뒤 쇼를 홀로 진행했는데, TV 역사상 최초의 토크쇼 단독 여성 진행자로 여겨지고 있다. 이 쇼는 초대 손님과의 대화, 베티 와이트 본인의 노래 공연, 촌극으로 채워졌는데, 이 촌극에 나오던 인물을 기초로 시트콤 "Life with Elizabeth(일리저버스와의 삶)"이 만들어졌다.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출연했다.

대표작 중 하나가 "더 베티 와이트 쇼(The Betty White Show)"이다. 1952년부터 1953년까지 로스엔젤레스 지역방송 KLAC-TV에서 방영되었고 KCOP-TV로 개편된 후인 1954년 전국방송인 NBC에서 방영되었는데, 흑인 탭댄서인 아서 덩컨(Artur Duncan)을 인종차별이 만연한 남부에서 받아들이지 못해서 보이콧이 끊이질 않았고, 결국 1954년 12월 31일에 종영하게 된다. 하지만 1958년과 1977년부터 1978년까지 동명의 방송을 진행하게 된다.

1992년 "골든 걸즈"의 종영 이후, NBC 등 TV 프로그램의 초청 게스트와 영화의 단역으로 활동을 이어가다가 2010년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SNL)에서 처음이자 유일하게 연기하기도 했다. 2015년에는 SNL의 40주년 기념 쇼에 SNL측의 간곡한 요청 끝에 특별 출연했는데 그게 마지막 TV 프로그램 출연이었다.

Scared Straight: Bullying with Betty White - SNL (2010.5.8)


3.1. 사망[편집]


2021년 12월 31일 새벽,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브렌트우드 인근 자택에서 100번째 생일을 불과 몇 주 앞두고[1] 향년 99세를 일기로 갑작스럽게 노환으로 작고했다. 한국 언론보도 가까운 친구이자 공식 에이전트인 제프 위쳐스는 그녀가 "오늘 이른 아침 수면 중에 평화로이 떠났다"고 전했다. 위쳐스는 잡지 인터뷰를 통해 "베티가 100살을 앞두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가 영원히 살 줄 알았다. 나는 그녀를 몹시 그리워할 것이며 그녀가 무척이나 사랑했던 동물 세계도 그럴 것이다. 나는 베티가 죽음을 두려워했던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항상 가장 사랑하는 남편 앨런 러든과 함께 있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시 그와 함께할 것이라고 믿었다"고 말했다.[2] 우연하게도 12월 31일 이날은 "더 베티 와이트 쇼"가 흑인 출연자에 대한 비난 때문에 종영 당한 날이기도 하다.

그녀의 100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대대적인 행사들이 준비 중에 있었다는 점이 안타까움을 더한다. 생일 당일인 1월 17일에는 미국 전역의 900개 극장에서 그녀의 삶을 다룬 영화 "베티 와이트: 방년 100살 — 생일 축하연"[3] 및 파티 현장으로부터의 실시간 영상이 상영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4] 팬들을 위한 영상 편지를 영화에 넣자고 직접 제안하여 12월 20일에 이를 녹화하는 등 베티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100세 생일을 준비해 왔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불과 며칠 전 이루어진 한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이 나이에 이렇게나 건강하고 기분이 좋다니, 나는 정말 운이 좋다. 굉장하다"며 100세를 목전에 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조 바이든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녀는 사랑스러운 숙녀였다"며 유감을 표했다. 또 바이든은 "베티 와이트는 여러 세대의 미국인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그녀는 매우 그리울 문화 아이콘이다. 질과 본인은 이번 새해 전날 그녀의 가족과 그녀를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다."라고 입장을 표했다. 질 바이든도 "베티 와이트를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느냐"며 "그녀의 죽음이 너무 슬프다"고 말했다.

라이언 레이놀즈는 "지금은 세상이 달라 보인다. 그녀는 예상을 뛰어넘는 데에 능숙했다. 그녀는 매우 연로해졌음에도 왠지 그만큼 연로해 보이지 않았다. 보고 싶을 거예요, 베티. 이제 비밀을 알게 되셨네요."라는 트윗을 작성하여 애도를 표했다.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제이미 리 커티스가 추모 인사를 남겼다.#

미군 측에서도 그녀의 사망에 애도를 표했다. 트위터

<토이 스토리 4>(2019)가 유작이다.


4. 출연 작품[편집]



4.1. TV 쇼[편집]


  • 더 베티 와이트 쇼(1952-1954, 1958, 1977-1978)
  • 할리우드 온 텔레비전(1949-1953)


4.2. 드라마[편집]




4.3. 영화[편집]


  • 베티 와이트: 축하연(2022) - 본인
  • 러브 앤 댄싱(2011) - 아이렌
  • 유 어게인(2010) - 할머니 버니
  • 프로포즈(2009) - 할머니, 애니
  • 더 씨드 위시(2005) - 레티
  • 브링 다운 더 하우스(2004) - 미시즈 클라인
  • 스토리 오브 어스(2000) - 릴리언 조단
  • 플래시드(1999) - 돌로레스 브랙커먼 부인
  • 개구쟁이 데니스 2(1998) - 마사 윌슨
  • 애드바이즈 앤 컨센트(1962) - 세네시 배너 애덤스


4.4. 애니메이션 영화[편집]




4.5. 애니메이션 시리즈[편집]




5. 여담[편집]


  • 3번 결혼했지만 자녀는 한 명도 없다. 두 번째 남편과의 이혼 사유도 남편은 아이를 원하는데 베티 와이트는 배우로서의 경력이 끊길까봐 아이를 원치 않았다는 것.

  • 젊어서부터 진보적인 가치관의 소유자였다. 로스엔젤레스 동물원의 후원자로 활동하는 등 동물 복지에 힘쓰기도 했는데 원래는 시에라네바다 산맥으로 가족여행을 떠난 후 산림 감시원이 되려 했으나 1930년대 당시엔 여성이 할 수 없는 일이어서 연예인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한다.

  • 유색인종 인권에도 긍정적이었는데, 위에서 설명했듯이 1954년 NBC를 통해 더 베티 와이트 쇼를 전국 방영으로 확대했을 때 그녀의 쇼에 흑인 탭 댄서인 아서 덩컨을 출연시켜 남부 지역의 비판에 직면했다. 그럼에도 베티 와이트는 그에게 방송 시간을 더 줬고, 그녀의 쇼는 그 후 취소되었다. 트위터 또한 동성애자들의 동성결혼도 존중하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녀 세대의 노인들은 보수적일거라는 편견이 있지만, 지식인이나 예술인들은 진보적인 가치관을 가진 경우가 많다.

  • 극도로 상업적인 미국의 대중문화 스타에게 그닥 우호적이지 않은 여러 영연방 국가의 TV 방송국에서도 위와 같은 다양한 인권 운동과 동물 보호 활동의 족적을 크게 인정해 사후 그녀를 기리는 특별 프로그램을 2022년 초 공중파로 방영하기도 했다.

  • 감독 제임스 L. 브룩스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1997)에서 어머니 역을 해달라고 제안했지만, 해당 영화의 개에 대한 대우 때문에 하지 않았다.

  • 무려 1922년생으로 만 99세까지 장수하며 미국의 최고 원로급 연예인으로 대접 받았다. 말런 브랜도, 폴 뉴먼, 제임스 딘, 찰턴 헤스턴, 오드리 헵번, 엘리자베스 테일러, 자니 카슨 등보다 일찍 태어났고, 생년이 같은 유명인으로는 주디 갈런드, 스탠 리, 톰 피니, 크리스토퍼 리, 폴 스코필드 등이 있다.[5] 또한 한국의 송해보다 일찍 태어나 일찍 데뷔했다.

  • 초창기 시트콤 중에 '일리저버스와의 삶'이 있긴 하나 이름 베티(Betty)는 일리저버스(Elizabeth)의 애칭이 아니라 본명이다. 이름도 비슷하고 90살 넘게 장수했다는 점 때문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엮는 경우도 있다. #

  • 미국 연예계의 최고참이지만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꽤 낮다. 국내에 알려진 영화나 드라마가 많이 부족해서 그런 듯. 이 문서도 그녀가 별세한 2021년 12월 31일 다음날인 2022년 1월 1일에 처음 만들어졌다. 헌데 싸이와 함께 강남스타일을 춘 적이 있다! # 당시 국내언론 반응

  • 농구선수 샤킬 오닐이 2011년 8월에 청혼을 해서 뺨싸다구를 날린 적이 있다. 베티 와이트 왈 청혼을 하기엔 너무 늙었다고. 당시 샤킬 오닐은 이혼 후 여러 여성과 바람을 피운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번 사건은 진심인지 장난인지 알 수 없다. #


6. 관련 문서[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30 13:55:41에 나무위키 베티 화이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생일을 17일 앞두고, 그리고 새해를 딱 하루 앞둔 시점이었다![2] 베티 와이트가 부스터샷을 맞았다는 내용의 허위적 글이 온라인 상에서 확산되며 백신 때문에 죽은 거 아니냐는 루머도 있었다. 하지만 제프 위쳐스는 "베티는 질병을 앓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앓고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12월 28일에 부스터 샷을 맞았으며 부작용을 겪었다고 한다. 그녀는 결코 부스터 샷을 맞은 적이 없다"고 말하며 코로나 백신과 관련하여 그녀의 죽음을 정치화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나아가 "내가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자연적인 원인(에 의한 사망)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침대에서 자는 도중 사망했다. 그게 전부"라며 부스터샷 접종 관련 논란을 일축했다.[3] Betty White: 100 Years Young — A Birthday Celebration[4] 다만 그녀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약간의 수정을 거쳐 예정대로 상영하기로 결정되었다. 제목은 "베티 와이트: 축하연(Betty White: A Celebration)"으로 수정되었다.[5] 1922년 1월 17일생이어서 다섯 명보다 일찍 태어나 늦게 사망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