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셰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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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스키토폴리스 유적

1. 개요
2. 지리
3. 지명
4. 역사
4.1. 중세
4.2. 근대


1. 개요[편집]


영어 : Beth Shan(벧산), Beisan(베이산)
아랍어 : بيسان
히브리어 : בֵּית שְׁאָן

이스라엘 북동부의 도시. 벧산, 베이산 등으로도 불린다. 갈릴리 지방 남부에 위치한다. 이집트에서 사해를 넘어 다마스쿠스, 메소포타미아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현재도 동쪽 5km 지점에 요단강요르단과의 국경이 있어 군사적으로 중요하다. 역사적으로는 고대의 스키토폴리스로, 시리아 남부의 데카폴리스 중 하나였다. 시가지 북쪽의 언덕과 그 기슭에 유적이 잘 남아있다. 인구는 약 1만 9천명이다.

2. 지리[편집]


갈릴리 남방 22㎞ 지점의 길보아 산 동쪽 기슭의 벧산은 고고학에 따르면 무려 기원전 50세기 전부터 시작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태초의 시점이다. 요단 강과 하롯 강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하여 예로부터 전략적 요충지였다. 최초의 정착민들은 하롯 강의 남쪽에서 자리잡은 것으로 보여진다.

고대에는 수풀이 우거진 지역으로 지금도 땅이 기름지고 물이 풍부하며, 사람이 자리잡은 이후로 강을 따라 자연스레 도로가 생겨 주변에서 가장 왕래가 편리한 지역으로 발전한다.

3. 지명[편집]


벧(Beth)은 '~집' 이라는 뜻으로, 벧산은 안락(Shan)의 집이다. 그러므로 베들레헴은 떡(Lehem) 집, 벧엘은 하느님(El)의 집, 벧세메스 태양(Shemesh)의 집, 벧세다 어부(Saida)의 집, 베데스다는 은혜(Esda)의 집 등으로 표현된다.

4.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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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벧산은 가나안을 통치하던 고대 이집트 왕국의 행정 중심지였다. 이스라엘 왕정 시대에는 초대 왕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이 죽임을 당한 가슴 아픈 역사를 지닌 땅이며 후에 다윗이 점령한 뒤부터 이스라엘에 포함되었다. 이스라엘 분열 이후 벧산은 북 이스라엘에 속했고, 로마 시대에는 니사 스키토폴리스(Nysa-Scythopolis)로 불렸다. 당시 스키타이인들이 흘려들어 살고있었는데 그들은 포도주 신인 디오니소스를 숭배했으며, 디오니소스가 자신의 유모인 니사(Nysa)를 벧산에 매장했다고 믿었다. 이후 비잔틴 시대에는 벧산 외곽에 성벽이 건설되었으며 수도원과 교회가 들어섰다. 640년 이슬람 제국령이 된 후 바이산이라 불렸고, 749년 1월 갈릴리 지진으로 크게 황폐해졌다.

4.1. 중세[편집]


파일:베이산.jpg
십자군 시기 성채

그렇게 폐허로 남아있다 십자군 시대에 다시 주목을 받아 1099년에 탕크레디(Tancred)에 의해 점령되어 베산 (Bessan)이라 명명되었다. 갈릴리 지방과 가까운 위치에도 불구하고 갈릴레아 공작령에 귀속되지 않고 1101 ~ 1120년간 예루살렘 왕실의 직할령으로 남았다. 우트레메르의 혈통(Lignages d'Outremer)이라는 책에 의하면 첫번째 베산의 영주는 로버트 드 베튄(Robert III de Béthune)의 어린 아들 아담(Adam)이다.

베튄 가문은 예루살렘 왕국의 왕가인 플랑드르 가문과 친밀했고, 자연스럽게 로버트의 막대 아들은 베산의 영주가 될 수 있었다. 그 이후 아담은 가문의 이름을 베산으로 정했고, 아담 드 베산(Adam de Bessan)으로 알려졌다. 십자군은 옛 로마 극장 옆에 작은 성채를 세웠으나, 1183년 살라딘에게 파괴되었다. 이후 아이유브 왕조령이 되었고, 1260년 인근 평원에서 아인 잘루트 전투가 벌어졌다.

4.2. 근대[편집]


맘루크 왕조 ~ 오스만 제국기 베이산은 다마스쿠스카이로를 잇는 역참이었다. 주민들은 대부분의 순니 무슬림과 소수의 유대인으로 구성되었다. 농업에 유리했음에도 작은 마을로 유지되던 베이산은 20세기 초엽 히자즈 철도의 팔레스타인 지선이 지나가며 중흥하여 인구가 2천으로 늘었다. 1936년 팔레스타인 대반란 당시 베이산은 주요 반군 거점 중 하나였다. 1945년 기준 2만 5천의 인구 중 1만 7천이 무슬림, 8천이 유대인, 7백이 기독교도였다. 그럼에도 1947년 팔레스타인 분할안에서 베이산은 유대 국가로 귀속되었다. 이에 아랍 민병대가 저항했으나, 1948년 영국의 위임통치가 끝나기 불과 3일 전에 유대 민병대가 점령하였다. 이후 기존 아랍 주민들은 요르단으로 망명하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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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랍 기독교 주민들도 나사렛으로 향하여 현재 주민의 절대 다수는 유대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