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묘국자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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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중국 베이징시에 위치한 박물관. 이름 그대로 베이징의 문묘로, 원나라부터 청나라까지 중국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작용하였으며 동시에 우리나라의 성균관에 대응하는 건물이다.[3] 9단8묘 중 가장 먼저 지어졌다. 본래 공묘와 국자감은 사실상 하나의 건물군이고 당시에도 하나의 건축물로 인식하였으며 현재도 하나의 박물관이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는 따로따로 지정되었다.
2. 역사[편집]
1306년에 원 성종시기 공묘(孔庙)와 국자감(国子监)이 건축되었다. 이듬해에는 공자를 배향하고 동시에 공자에게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圣文宣王)이라는 시호를 올렸으며, 원 문종이 황실규약으로 이를 공식화하고 공묘에 누각 4개를 건축하고는 원나라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운영했다. 그러다가 명나라가 건국되어 수도가 난징으로 바뀌면서 버려졌으나, 영락제가 베이징으로 천도하면서 반쯤 폐허가 된 원나라의 공묘 및 국자감을 수리하여 다시 명나라의 교육기관으로 사용하였다. 현재 남은 공묘 및 국자감의 건축물들은 대부분 영락제가 중건한 건물들이다. 이후 가정제가 공묘제례를 개혁하고 공묘 맨 뒤에 공자, 안자, 증자, 자사자, 맹자의 아버지를 모신 숭성사(崇圣祠)를 건축했다.
대성전 가운데 공자를 그 좌우에 4성을 모시고, 공문십철, 송조육현, 동국십팔현을 모시는 한국과는 위패 배치가 다르다. 증자가 사성으로 높혀지면서 전손사(자장)을 십철에 추가했음은 똑같지만, 청나라 때 공문십이철로 유약과 송나라의 주희(주자)를 추가하였다. 또 한국에서는 해방 후 동서무의 중국역대제현 94명의 위패를 매안했으나, 중국 공묘에서는 아직 156명의 위패를 동서무에 모신다. 여기에는 순황(순자), 왕수인, 육구연처럼 성리학에서는 이단시되거나 위진남북조 시설 위진에서 종사한 왕숙, 두예, 마융, 하휴, 왕필 등이도 그대로 있다.
1737년, 건륭제가 기와를 유리기와로 교체하였고, 1906년 광서제가 공묘의 규모를 더 크게 키우기 위한 공사를 시작했다. 이 공사는 중화민국 시기인 1915년까지 지속되었고 1928년,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일반 시민들도 유학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면서 당연히 유학공부는 중단되었고, 이 건물은 수도박물관으로 쓰이다가 수도박물관이 새 건물로 이사가면서 현재는 베이징시 소속의 유학박물관으로 사용된다.
3. 건축물[편집]
3.1. 공묘[편집]
3.2. 국자감[편집]
3.3. 관광 정보[편집]
베이징 지하철 2호선, 5호선 융허궁역에서 진입하면 된다. 입장료는 30위안으로, 당연히 두 건축 다 포함한 가격이다.
4. 전근대시대 동아시아의 사당 목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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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애초에 둘 다 유학기관인 문묘이기 때문에 당연한거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