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 FIFA 월드컵 스위스/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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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경기
3. 서독은 어떻게 대어를 낚았나
3.1. 토너먼트 대진 방식의 허점 활용
3.2. 날씨
4. 여담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Das Wunder von Bern

스위스 베른슈타디온 방크도르프에서 1954년 7월 4일에 열린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결승전. 절대적 열세라고 평가받은 서독이 당시 세계 최강이었으며, '무적의 마자르 군단'이라고 불리우며 우승 후보로 꼽혔던 헝가리를 3:2로 꺾었다. 2차 대전 패배 이후 실의에 잠겨 있던 독일인들에게 크나큰 환희를 안겨준 경기이며 독일에서는 지금도 "베른의 기적"(Das Wunder von Bern/The Miracle of Bern)이라고 부른다. 심지어, 2003년에는 이 경기를 소재로 하는[1] 동명의 영화가 독일에서 개봉하였는데 당시 이 영화의 시사회에 당시 총리였던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참석했을 정도였으니 이 경기가 현대 독일인들의 기억 속에 얼마나 자리잡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라고 할 수 있다.


2. 경기[편집]


경기장
방크도르프슈타디온
베른 - 스위스
경기일
1954년 7월 4일
국 가
헝가리
독일
득 점
2
3
득점자
페렌츠 푸스카스 (6')
치보르 졸탄 (8')
막스 모를로크 (10')
헬무트 란 (18', 84')

라인업
번호
이름
비고
라인업
번호
이름
선발
1
줄러 그로시치
GK
선발
1
토니 투레크
GK
2
부잔스키 예뇌

7
요제프 포지팔
3
로란트 줄러
10
베르너 리프리히

4
런토스 미하이

3
베르너 콜마이어
5
요세프 보직

6
호르스트 에켈
6
저커리아시 요제프

8
칼 마이
11
치보르 졸탄
파일:득점 아이콘.svg
13
막스 모를로크
파일:득점 아이콘.svg
9
히데그쿠티 난도르

16
프리츠 발터
주장
20
토트 미하이

12
헬무트 란
파일:득점 아이콘.svg 파일:득점 아이콘.svg
8
산도르 코츠시스

15
오트마어 발터[2]
10
페렌츠 푸스카스
주장
파일:득점 아이콘.svg
20
한스 셰퍼


당대 최강팀 헝가리답게 페렌츠 푸스카스가 경기 시작 6분 만에 선제골을 득점한 데 이어 치보르 졸탄은 2분 후에 서독 골키퍼 투렉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놓치지 않고[3] 헝가리의 2번째 득점을 성공, 리드를 늘리며 그렇게 경기는 헝가리 쪽으로 기울었다.

승리의 여신이 헝가리에 미소를 지을 찰나, 집념의 서독은 포기하지 않고 전반 10분과 18분 각각 막스 모를로크헬무트 란의 득점으로 경기를 재빨리 원점으로 되돌렸다. 2:2 동점을 이룬 상황에서 전반전은 더 이상의 추가 득점 없이 끝냈다. 후반전, 헝가리는 다시 리드를 잡기 위해 파상공세를 퍼부었으나, 서독의 수비에 막히며 번번히 무산되었고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했던 투렉은 속죄라도 하듯이 환상적인 선방을 연달아 보여주며 헝가리의 추가 득점을 막아냈다. 그리고 경기 종료 6분을 남겨놓고, 헬무트 란이 기가 막힌 중거리 슈팅으로 팀의 3번째 득점을 뽑아내었다. 헝가리는 동점을 만들기 위해 파상공세를 일으켰고, 경기 종료 2분을 남겨놓고 경기를 다시 동점으로 만드는 듯 보였으나 오프사이드가 선언됐다. 그렇게 경기는 서독의 우승으로 끝나며 헝가리의 무패 기록을 종식시켰고, 축구 역사상 최대의 이변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3. 서독은 어떻게 대어를 낚았나[편집]



3.1. 토너먼트 대진 방식의 허점 활용[편집]


사실 서독과 헝가리는 조별리그에서 이미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서독은 헝가리에게 3:8로 졌다. 이 때문에 제프 헤어베어거 서독 감독은 분노한 자국 팬들로부터 돌까지 맞는 굴욕을 겪었다. 물론 비난 편지도 한가득 받았는데 대표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헤어베어거 씨. 당장 밧줄로 목을 매어 죽되 밧줄은 재활용해야하니 돌려주시길" 영화 베른의 기적에도 이 편지가 소개되었다.

사실 조별 예선 헝가리전에 내보낸 서독 스쿼드는 사실상 2군이었다. 헤어베어거 감독은 팀의 주전 7명을 이 경기에 내보내지 않았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는데, 2군을 내보내서 서독 대표팀의 진짜 전력을 숨기는 효과도 있었지만 더욱 중요한 이유는 이 대회의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토너먼트 대진 방식 때문이었다.

경기
대진표
경기
대진표
경기
대진표
A
8강 1경기
1조 1위 VS 2조 1위
E
4강 1경기
A 승자 VS B 승자
G
결승
E 승자 VS F 승자
B
8강 2경기
3조 1위 VS 4조 1위
-
C
8강 3경기
1조 2위 VS 2조 2위
F
4강 2경기
C 승자 VS D 승자
D
8강 4경기
3조 2위 VS 4조 2위
H
3위 결정전
E 패자 VS F 패자

위의 대진표가 바로 이 대회에서 쓰인 대진표인데, 이 대진표는 현재 일반적으로 쓰이는 대진표와는 달리 각 조의 1위 팀들이 한쪽에, 그리고 각 조의 2위 팀들이 다른 한쪽에 쏠려 있다. 즉 조 1위 4팀이 결승 티켓 1장을 놓고 싸우고 조 2위 4팀이 결승 티켓 1장을 놓고 싸우는 꼴이 되는데, 일반적으로 강팀들이 조 1위로 토너먼트에 진출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조별리그에서 1위를 하는 것이 2위를 하는 것보다 오히려 불리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4] 실제로 2조를 1위로 통과한 헝가리는 8강에서 1조 1위 브라질을 만나 경기 도중 난투극이 일어나는 혈투를 벌였고, 4강에서도 3조를 1위로 통과한 디펜딩 챔피언 우루과이를 만나 접전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헝가리는 연장혈투로 인한 체력 소모는 물론이고 선수들이 부상을 입는 등의 출혈이 있었다.

반면 서독의 헤어베어거 감독은 애초부터 조 1위를 해봤자 오히려 손해라는 것을 미리 파악하고 헝가리전에 일부러 2군을 내보내 지게 만들어 서독이 조 2위로 토너먼트에 진출하도록 했고, 그 결과 서독은 8강에서 1조 2위 유고슬라비아를 만나 2:0으로 이기고 4강에서 3조 2위 오스트리아를 만나 6:1로 이기는 꿀대진을 거쳐 무난하게 결승전에 진출해 헝가리보다 체력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3.2. 날씨[편집]


당시 경기가 열린 방크도르프슈타디온에는 비가 엄청나게 왔다. 이를 안 헤어베어거 감독은 만세를 불렀다는 후문이 있다. 서독 대표팀은 용품 후원사 아디다스가 제작한 당시로써는 최첨단 축구화를 신고 있었는데 바로 스터드나사로 고정하는 축구화였다. 비가 많이 와 질척해진 피치를 보고 서독 선수들은 비 오는 날 전용인 긴 스터드로 축구화 밑을 모두 교체했고 미끄러질까봐 조심하던 헝가리 선수들과 다르게 서독 선수들은 제 기량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었다.


3.3. 제프 헤르베르거[편집]


제프 헤르베르거헝가리의 전력에 감탄하면서도 그들을 2년여간 분석하며 언젠가 그들과 맞붙었을 때 서독이 노릴 수 있는 약점을 계속 찾았고 결국 결론이 나왔다. 헝가리의 수비, 그리고 히데그쿠티 난도르.

먼저 헤르베르거는 조별 예선에서 비록 8골을 허용하긴 했지만 서독도 3골을 넣었으니 그들의 수비진이 결코 무적이 아님을 선수들에게 계속 상기시켰다.

당시나 지금이나 축구 수비 전술의 기본은 지역 방어이다. 당시엔 지금처럼 팀의 상황이나 전술에 따라 포메이션이 유동적이지 않고 거의 모든 팀이 W-M 포메이션을 사용했었다. 매직 마자르 역시 포지션상 가장 위에서 골을 넣는데 주력해야 할 센터 포워드 히데그쿠티 난도르가 있었고 그 밑에 인사이드 포워드 듀오 푸슈카시 페렌츠코치시 샨도르가 밑에서 히데그쿠티가 골을 넣도록 지원하는 것이 당시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히데그쿠티는 폴스 나인처럼 미드필더진까지 내려가서 공격을 진두지휘했고 이러면 히데그쿠티를 담당하는 수비수들은 히데그쿠티를 따라 올라가거나 기존 수비 호흡에 균열이 나게 된다. 헝가리는 그 틈을 푸슈카시와 코치시가 도륙내는 변칙적인 전술을 사용해 재미를 보고 있었다. 제프 헤르베르거는 이를 간파하고 호르스트 에켈에게 히데그쿠티의 맨마킹을 맡겼다. 히데그쿠티를 막으면 푸슈카시, 코치시에게도 공이 덜 가므로 공이 없는 공격수의 위력 역시 줄어들게 된다.

그 외에도 에이스 푸슈카시 페렌츠를 제어하는 역할은 베르너 리브리히에게 맡겼다. 공격적인 하프백 보지크 요제프가 본래 있어야 할 자리를 비우면 그 틈을 노리도록 지시했다. 그 임무는 한스 샤퍼에게 1순위로 부여되었다.

헤르베르거가 준비한 이 전술은 대성공을 거뒀다.


3.4. 후에 밝혀진 안 좋은 실상[편집]


하프타임[5]에 서독 대표팀 선수들에게 메스암페타민을 먹였다는 사실이 나중에 공개되었다. 당시 독일 선수들은 비타민C 인 줄 알고 먹었다고 했는데, 대부분은 알고 먹었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 당시 결승에 뛰었던 헝가리 선수들의 인터뷰에 따르면 경기 당시 서독 선수들의 눈이 풀려있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서독 선수들은 월드컵이 끝나고 장기간 휴가를 떠났다고 한다. 참조

당시에는 금지약물 규정이 없었고, 1963년 금지 약물 규정이 생겼으며, 암페타민 계열은 1968년부터 금지되었다. 따라서 당시에는 이러한 약물을 복용하더라도 규정상 별 문제가 없기는 했다. 다만 규정상 불법이 아시었을지언정 해명 당시 당당하게 메스암페타민을 복용했다고 시인하지 않고 비타민인줄 알고 먹었다고 얼버무린것을 보면 당시 시대상으로 봐도 절대 떳떳한 행위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1952 오슬로 동계 올림픽에서 덴마크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들의 라커룸에서 암페타민이 든 다량의 봉지와 주사 앰플이 발견되어 많은 선수들이 약물을 복용하고 있음이 언론을 통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심지어 1960 로마 올림픽에서는 사이클 선수 크누드 에네마르크 옌센이 경기 도중 쓰러져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해 전세계적으로 충격을 주었는데, 부검 결과 암페타민의 과다 복용으로 인한 체열 상승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에도 1960년대에 암페타민 과도 복용으로 선수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1968년부터 암페타민 계열은 금지 약물로 지정되었다.

4. 여담[편집]


  • 나치 독일의 패망 이후 독일의 노래에서 3절만이 국가로 지정되었고 1절과 2절은 금기시되었는데, 경기를 관전하던 독일 관중들이 너무도 감격한 나머지 일제히 벌떡 일어서서 1절인 Deutschland über alles를 합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경기를 라디오로 중계하던 스위스 방송사는 급히 기계를 꺼서 방송을 중단시켰다고 한다.
  • 2003년에 같은 제목을 가진 영화가 독일에서 만들어져 독일에서만 600만이 넘는 관객들이 보는 흥행 대박을 거둬들였다. 극 중에서 한국이 헝가리에 0:9로 깨졌다는 것은 글로 간략하게 나온다.
  •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은 그 이후로 차츰차츰 추락하기 시작하다가 현재는 유럽에서도 3류 수준으로나 평가받는 약체팀이 되면서 이 시기는 그들의 마지막 리즈 시절로 남게 되었다.
  • 여기서 헝가리가 다음 대회에서 완전히 몰락했으므로 만약 헝가리가 서독을 이기고 우승했더라면 월드컵 디펜딩 챔피언 징크스가 적용된 나라 중 하나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 현지시간으로 2021년 12월 3일 경기에서 뛰었던 前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호르스트 에켈이 89세로 별세하면서 출전한 모든 선수들이 고인이 되었다.


5. 관련 문서[편집]


[1] 물론 이 경기만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2차 대전 이후 소련군 포로 출신의 아버지와 공산주의자가 되어 동독으로 넘어간 큰아들,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 방황하는 막내아들 등 한 가정의 갈등과 상처가 월드컵 우승을 통해 어떻게 해소되는지를 다루는 영화이다.[2] 이름을 봐서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프리츠 발터의 친동생이다.[3] 슬라이딩 쇄도를 해서 공을 낚아채려다가 너무 멀리 미끄러져서 공을 놓쳤다(...).[4] 이렇게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대진표가 만들어진 데에는 당시 월드컵 본선 진출국들 중에선 상대적으로 약체에 속했던 개최국 스위스가 자신들은 조 1위보다는 조 2위로 토너먼트에 진출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의도적으로 개최국인 자신들에게 유리한 대진 방식을 만들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5] 위의 점수표에도 나와있지만 그 시점에선 2:2 동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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