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틸 에릭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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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ertil Ericsson.jpg
이름
칼 베르틸 에릭손
Karl Bertil Ericsson
출생
1908년 11월 6일
사망
2002년 8월 18일 (향년 93세)
국적
파일:스웨덴 국기.svg 스웨덴
출신지
팔룬
포지션
센터 포워드
신체조건
178cm
소속팀
팔루 IK (?-1932)
AIK 포트볼 (1932)
산드비켄스 IF (1933~1944)
쿠비켄보리 IF (1944~1946)
국가대표
10경기 10골 (스웨덴 / 1933~1937)

1. 개요
2. 생애[1]
3. 뒷이야기
4. 수상
4.1. 클럽



1. 개요[편집]


스웨덴의 전 축구 선수. AIK 포트볼과 산드비켄스 IF에서 활동했다.


2. 생애[2][편집]


에릭손은 그의 고향팀인 팔루 IK(Falu IK)에서 축구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우메오(Umeå)의 I20 보병연대에서 군생활을 마치고 스톡홀름에서 훈련을 받게 되었는데 그 때 AIK 포트볼에 입단하게 되었다. AIK는 에릭손이 입단한 그 해에 알스벤스칸 우승을 차지했지만 에릭손은 부상으로 출전 기회를 많이 갖지 못했다. 그는 1월에 입단했지만 9월이 되어서야 알스벤스칸 데뷔 경기를 치렀고 IFK 예테보리를 상대로 6대1 대승에 공헌했다.

그 이후에도 2경기밖에 더 출전을 못하던 에릭손은 1932년 크리스마스에 고향으로 돌아갔고 1933년 초, 산드비켄스 IK(Sandvikens IK)로 이적하게 되었다. 산드비켄스에서 주전으로 도약한 에릭손은 이탈리아 월드컵 지역예선 에스토니아전에서 대표팀 데뷔전을 치렀다. 이 경기에서 스웨덴은 에스토니아를 6대2로 꺾었는데 에릭손은 이 경기에서 2골을 넣어 강력한 임팩트를 남겼다. 하지만 월드컵 본선 엔트리에 그의 자리는 없었다.

에릭손은 월드컵에 참가하지 못한 아쉬움을 덴마크를 상대로 풀어냈다. 1934년 6월 17일의 경기에서 에릭손은 덴마크를 상대로 4골을 폭발시키며 스웨덴의 5대3 승리를 이끌었다. 이후 에릭손은 1936년 올림픽에 참가하긴 했지만 스웨덴은 일본에 2대3으로 패배하는 이변의 희생양이 되었다. 에릭손은 이 경기에서도 벤치를 지켰다.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흐름은 비슷했다. 에릭손은 지역예선에는 출전했지만 프랑스에 초대받지는 못했다. 그는 블로굴트에서 총 10경기 출전, 10골을 기록했다.

1944년까지 에릭손은 산드비켄스에서 211경기 출전, 132골을 득점했고 쿠비켄보리 IF(Kubikenborgs IF)에서 선수 생활을 정리했다. 은퇴 이후에도 에릭손은 쿠비켄보리 구단 스태프로 재직했다.


3. 뒷이야기[편집]


  • 다른 1930년대의 많은 축구 선수들처럼 에릭손도 투잡을 했다. AIK 포트볼에서 뛸 때 에릭손은 보험회사에서 일을 했다. 대부분의 커리어를 보낸 산드비켄스 IF에 입단한 이유도 산드비켄에 일자리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 1936-37 시즌 개막전에서 에릭손은 IFK 예테보리를 상대로 경기 시작 5초 만에 득점에 성공했다.
  • 2001년, 에릭손은 의외의 인터뷰어를 만나게 되는데 바로 일본 방송국이었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베를린 올림픽에서의 일본 대표팀 성공에 관해 인터뷰했다. 그리고 일본으로부터 월드컵에 초대받기도 했지만 에릭손이 거절했다.


4. 수상[편집]



4.1. 클럽[편집]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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