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톨트 브레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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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톨트 브레히트
Bertolt Brecht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ertolt-Brecht.jpg

본명
오이겐 베르톨트 프리드리히 브레히트
Eugen Berthold Friedrich Brecht
출생
1898년 2월 10일
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아우크스부르크
사망
1956년 8월 14일 (향년 58세)
독일민주공화국 동베를린
국적
[[독일 제국|

독일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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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독일국 → [[나치 독일|

나치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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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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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동독 국기.svg 독일민주공화국
직업
극작가, 연극연출가, 시인
학력
뮌헨 대학교 (의학부 / 비졸업, 1917년 입학)
정당

[[무소속|
무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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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우자
마리안 초프 (1922년 ~ 1927년, 이혼)
헬렌 바이겔 (1930년 결혼)
자녀
4명
사상
마르크스주의, 공산주의[2]
종교
무종교(무신론)
서명
파일:베르톨트 브레히트 서명.svg

1. 개요
2. 생애
3. 작품 세계
3.1. 철학적 영향력
4. 애증의 대상, 동독
5. 작품
5.1. 픽션
5.2. 연극
5.3. 시
5.4. 노래(가사)
5.5. 이론서
6. 여담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독일극작가연극연출가이며 시인으로도 활동했었다. 독일문학계에서는 절대 빠질 수 없는 이름이며 독일문학을 넘어 그야말로 세계 연극계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사람이다. 그가 남긴 무수한 작품들은 그가 떠난 지금도 여전히 연구대상이며 무대에 올려지고 있으며, 그의 극작론은 연극계를 넘어 다른 학문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이다.


2. 생애[편집]


독일 바이에른 왕국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출생했다. 1차대전에 징집되지 않으려고 뮌헨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했지만 결국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에 병원에서 의무병으로 1달간 근무하였다. 1922년 <밤의 북소리>로 클라이스트 상을 수상하였으며, 1928년 연극 <서푼짜리 오페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브레히트는 일찍이 정치적으로 좌파 성향을 띄고 있었는데, 초기에는 무정부주의적 경향을 보였으나, 1920년대 후반부터는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여 자신의 사상을 작품에 이입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은 실질적으로는 그의 동료들과 공동으로 집필한 작품이 굉장히 많다. 그 예로 <서푼짜리 오페라>의 각본은 거의 대부분 그의 여비서였던 엘리자베스 하우프트만이 영국인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를 번역한 것을 메인 텍스트로 삼은 것이어서 후에 하우프트만이 공동 저자로 인정되었다. (당시 브레히트는 영어를 할 줄 몰랐다.)

1933년 나치스가 독일 정권을 장악하고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구실로 대대적인 정치적 탄압을 전개하자 브레히트는 덴마크로 망명하여 정치적 의식을 드러내는 시를 쓰는 한편, 연극 <제3제국의 공포와 빈곤>,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등을 썼다.

이후, 1941년 핀란드를 거쳐[3] 미국으로 망명해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며 할리우드 영화 시나리오를 썼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는 미국의 매카시즘 때문에 스위스로 떠나 <안티고네>와 <파리 코뮌의 나날>을 쓰고, 연극론에 대한 개설서 <소사고 원리>를 집필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동독의 동베를린으로 가 자신의 작품들을 연출하면서 후배 연극인을 양성하였다. 모스크바에서 스탈린 평화상을 수상하였으며, 동독에서도 여전히 체제를 풍자하고 비판하는 작품을 남겼다.

브레히트는 사회주의를 연극 작품에 접목시킨 좌파 극작가로도 유명하지만, 시인으로도 유명하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1492년> 등이 유명하다. 휴머니즘 속에서 현실의 폭력성을 비판하고 전쟁을 고발하는 내용이 많다.

3. 작품 세계[편집]


'소격효과(Verfremdungseffekt)'라는 기법으로 극작계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소격효과는 '생소화 효과', '낯설게하기 효과'로도 알려져 있다. Verfremdung이라는 단어의 철학 번역어가 그 유명한 소외다. 인간소외 현상의 소외. 이런 입장을 따르면 브레히트의 연극이나 시에 관객이 감정이입을 하게 되면 독자는 작가의 의도를 잘못 해석한 셈이다. 읽는 내내, 그리고 읽고 나서도 껄끄러운 불편함이 남아서 현실비판하기 시작해야 한다.

서사극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내려온 기존 극작기법에 반기를 들고 나온 것이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연극을 감상할 때의 보통의 태도(연극 무대에 대한 공감, 주인공에 대한 동화, 대리만족 등)들을 부정한다. 대신 연극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낯설게' '관찰하는' 연극을 보여준다. 때문에 관객들 입장에서는 극의 진행을 예상할 수 없어 굉장히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으며 감성적인 관람보다는 이성적이며 생각하고 판단하는 관람을 작가가 주문한다. 예술은 자본주의가 현실에서 주체를 소외시키는 것에 대항해야 한다. 즉 현실을 위한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에 감정이입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서 현실을 이성적으로 직시하게 만들어야 한다. 연극은 관객을 몰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모순을 드러냄으로써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관객이 현실을 다시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너를 속이는 현실에 감정이입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연극을 통해 관객이 현실에서 소외되어 있으며 자신이 현실에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 연극이 관객을 몰입시키지 않고 소외시키도록 한다. 관객은 현실에 소외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연극을 통해 감정이입에 실패하고 소외당하면서 깨닫게 된다.

아래는 소격효과를 반영하는 예들이다.
  • 브레히트는 초기작에서부터 무대에 이런 현수막을 걸었다고 한다. "그렇게 낭만주의적인 얼빠진 눈으로 바라보지 마시오!"
  • 브레히트의 희곡에는 장편의 현실비판적 노래들이 갑작스레 끼어드는 경우가 많다. 극의 줄거리와 크게 상관도 없으면서 갑자기 현실비판에 들어가기 때문에 몰입을 오히려 방해해버리는데, 이는 소격효과를 위해 의도적으로 장치된 것이다.
  • 연출을 맡을 당시 배우들에게도 등장인물에 감정이입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그래서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의 초연 후 대히트를 쳤을 때 배우가 억척어멈에 감정이입하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하여 판권을 회수하고 동베를린에서 초연 시 브레히트의 아내이자 여배우인 헬레네 바이겔(Helene Weigel)이 억척어멈 역으로 재공연하였다. 브레히트에 따르면 연극을 볼 때 그 인물에 대해 관객이 느끼는 답답한 감정에 이입해야 한다. 보는 내내 답답하고 화가 나는 등장인물인 억척어멈 역을 맡은 배우는 그 억척어멈이 실제로 느꼈을 감정인 굳센 의지와 억척스러움, 어떻게든 나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감정을 표현하면 안 된다. 또 이렇게 연기해서 관객에게 억척어멈이라는 인물을 동정하게 하면 안 된다. 억척어멈이 하는 행동을 보면서 화를 내고 그러면서 전쟁을 벌이는 현실을 비판하게 되는 관객에 감정이입해서 답답해하고 화를 내면서 연기해야 한다. 그래서 억척어멈을 연기하는 배우는 "이 놈의 세상 전쟁나든 말든 어떻게든 나하고 가족들만 잘 살면되지"라는 내용의 대사를 하면서도, "이 미련한 인간아, 전쟁나면 네 가족도 죽고 너도 죽는거야."라고 억척어멈을 비판하고 답답해 하는 입장에서 연기해야 한다. 아이구 브레히트 이놈아 배우들 정신분열 걸리겠다
때문에 브레히트가 30년대 '망명문학(Exileliteratur)'의 기수로서 다분히 사회비판적인 작품을 내놓을 수 있던 것은 그의 연극이론에서부터 이미 보이고 있었다. 다음 그의 말은 그가 연극을 통해 무엇을 추구했으며, 그가 만든 결과물들이 의미하는 것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희곡작가이다. 나는 내가 본 것을 알리고자 한다. 인간시장에서 나는 보았다. 인신매매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나는, 희곡작가인 나는 그런 것을 알리고자 한다."

생소화 효과는 연극계 뿐만 아니라 관련 인문학에서도 종종 인용이 된다. 심지어는 연극학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역사교육이론에서도 역사 해석과 역사적 사고 증진 등의 방법으로 논의될 정도이니 이 정도면 한 획을 그었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나무위키에서도 자주 나오는 용어인 제4의 벽 역시 브레히트가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최초는 아니다)

이러한 그의 작품세계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독일어권 작가는 '막스 프리슈(Max Frisch)'나 이른바 '희비극'으로 알려진 '프리드리히 뒤렌마트(Friedrich Duerrenmatt)' 등을 꼽을 수 있다. 브레히트 바로 다음 세대 독일어권 연극계를 잡았던 작가들이다. 참고로 이 두 사람은 모두 스위스인이다.


3.1. 철학적 영향력[편집]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저에게 무한한 충격을 주었던 것은 바로 브레히트가 연극에서 일으킨 혁명과 맑스가 철학에서 일으킨 혁명 사이의 일종의 유사성입니다. 사람들은 브레히트는 철학자가 아니었다고 말할 것이고, 철학교수들은 브레히트에게서 철학적 가르침들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그는 철학책을 쓰지 않았고, 그는 하나의 철학적 체계를 주조하지도 않았으며, 철학적·이론적 담론들을 취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브레히트는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은 철학에 대해 순진(naïf)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철학교수들은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브레히트는 맑스가 이룩한 철학적 혁명의 본질적인 것을 매우 잘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본질을 실천적으로, 그러니까 이론적 담론이 아니라 제가 그의 연극적 실천이라고 부를 것 안에서 이해했습니다. 브레히트는 결코 연극적 실천에 대해 말하지 않고, 언제나 연극적 기술(technique) 안의 변화들에 대해 말합니다. 그는 마치 오직 기술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벌거벗은 기술 그 자체란 없습니다. 하나의 기술은 언제나 하나의 실천에 삽입되어 있고, 언제나 어떤 하나의(une) 실천의 기술입니다. 브레히트가 연극적 기술에서 이룩한 혁명"들"은 연극적 실천에서 이룩한 어떤 혁명의 효과들로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브레히트의 텍스트들 속에서 매우 분명합니다. 그가 도입한 연극적 기술의 개혁들은 언제나 전체적인 연출(mise en scène) 개념에 연결되어 있고, 이 연출이라는 개념은 주체(sujet)라는 개념에 연결되어 있고, 이 주체라는 개념은 무대-관객, 배우-관객의 관계라는 개념에 연결되어 있고, 이 무대-관객, 배우-관객의 관계라는 개념은 연극-역사의 관계라는 개념에 연결되어 있고, 이 연극-역사의 관계라는 개념은 어떤 철학적 개념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용어들은 브레히트의 기술적 개혁들이 연극적 실천에서 일어난 혁명의 효과들로서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루이 알튀세르,「브레히트와 맑스에 대하여」(1968, 서종현 옮김) 中


4. 애증의 대상, 동독[편집]


앞서 언급하였듯이 브레히트는 망명생활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서독과 동독, 두 개의 독일 중 사회주의 진영에 있던 독일민주공화국을 선택했다. 브레히트 외에도 아나 제거스(독일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소설가, '일곱번째 십자가'로 알려져있음) 등 다수의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독일 땅에 세워진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로써 독일민주공화국을 선택했다. 20세기 초중반부터 자유주의 우파 국가들은 공산주의를 배제시키기 위해 당시에는 제3의 물결이란 이름으로 떠오르던 파시즘을 공공연히 용인하거나 밀어주기도 했었는데, 파블로 피카소같은 예술계 지식인들이 앞장 서서 이러한 기조에 반대해 사회주의 노선의 조직들을 택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역시 나치 집권 이전부터 독일 공산당 등 좌파 정치 운동을 지지하고, 이에 관여해온 급진적 좌파였던만큼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한 독일민주공화국을 선택한 것이다.

독일민주공화국은 동독을 선택한 브레히트에게 연극계 스타로써 그에 걸맞는 대접을 해주었다.

브레히트에게는 당시 베를린의 최고 극장 중 하나인 '베를린 앙상블'이 주어지는 등 작품활동을 위한 환경에 있어 독일민주공화국 당국의 전폭적 지원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동독 당국의 문학계와 예술계에 대한 검열을 냉소하고 조롱했다. 브레히트는 독일민주공화국 체제와 더 나아가 소련 스탈린 체제에 대해서 그 문제점을 공공연히 풍자했다. 특히 1953년 동독 봉기의 진압을 지지했지만 정부에도 실망하여 공공연히 정부를 비판했고 조롱했다. 정부가 보기에 인민이 못마땅하다면 정부가 인민을 해산해야하지 않겠느냐며 조롱조로 공공연히 정부를 비판한 것이다[4].

하지만 독일민주공화국과 그 후원자인 소련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반공주의자로 전향하거나 독일연방공화국을 지지하진 않았다. 어쨌든 자유주의 세력들에 의해 파시스트 세력들이 자라나고, 그 결과가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점을 똑똑히 알고 있던 그에겐 독일민주공화국과 그 후원자인 소련이 서방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으며 독일연방공화국과 그 후원국들의 자본주의도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다. 만약 브레히트가 서독에 살았다고 해도 당시 네오나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 하던 독일연방공화국도 곱게 봤을 리가 없다.

여기다 브레히트가 품고 있던 스탈린주의-소련 중심 관리 체제에 대한 불만은 68 혁명과 프라하의 봄에서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때문에 그 이전에 사망한 브레히트가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기는 어려웠다. 심지어 헝가리 혁명(1956년 10월) 조차, 브레히트 사망 이후에 일어난 일로서, 서유럽 공산당들이 소련 공산주의와 노선을 달리하기 전이다.

5. 작품[편집]


그가 지은 작품에는 큰 특징이 있는데, 작품의 무대가 대부분 독일 밖이라는 것이다.


5.1. 픽션[편집]


  • Geschichten vom Herrn Keuner(코이너씨의 이야기)


5.2. 연극[편집]


브레히트의 연극에 입문하고자 하는 사람은 임한순 교수의 <브레히트 희곡선집 1, 2권>을 추천한다. 작품 해설도 붙어 있고 과거 판본에 비해 번역도 깔끔하다. 단, 학술서로 분류돼서인지 가격은 좀 세다. 많은 작품이 유명하지만, 당대에 가장 인기 있었고 현재에도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은 '서 푼짜리 오페라',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 '갈릴레이의 생애', 사천의 선인이다.

국내에 대본이 번역되어 있거나 잘 알려진 작품은 굵은 글씨로 표시.
  • Baal(바알) 1918(작성), 1923(연출)
  • Trommeln in der Nacht(한밤의 북소리) 1918–20, 1922
  • Der Bettler oder Der tote Hund 1919/?
  • Die Kleinbürgerhochzeit 1919, 1926
  • Er treibt einen Teufel aus 1919/?
  • Lux in Tenebris 1919/?
  • Der Fischzug 1919?/?
  • Mysterien eines Friseursalons(연극) 1923
  • Im Dickicht der Städte 1921–24, 1923
  • Leben Eduards des Zweiten von England(잉글랜드에드워드 2세의 생애) 1924/1924
  • Der Untergang des Egoisten Johnann Fatzer 1926–30/1974
  • Mann ist Mann(인간은 인간이다) 1924–26/1926
  • Das Elefantenkalb 1924–26/1926
  • Mahagonny-Songspiel 1927/1927
  • Die Dreigroschenoper(서 푼짜리 오페라) 1928/1928[5]
  • Der Ozeanflug 1928–29/1929
  • Badener Lehrstück vom Einverständnis 1929/1929
  • Happy End 1929/1929
  • Aufstieg und Fall der Stadt Mahagonny(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 1927–29/1930
  • Der Jasager; Der Neinsager(예, 아니오) 1929–30/1930–? - 국내 번역명은 '동의자와 거부자'. 원어 그대로 번역하면 '"예"라고 대답하는 사람,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사람'. 브레히트의 교육극 이론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내용도 상징적이고 무대 장치도 연극 연습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간단히 구성되어 있다. 계단이나 절벽을 표현하는 데서 그냥 상자 몇 개만 배치하라고 되어 있다.
  • Die Maßnahme 1930/1930
  • Die heilige Johanna der Schlachthöfe(도살장의 성 요한나) 1929–31/1959
  • Die Ausnahme und die Regel 1930/1938
  • Die Mutter(어머니) 1930–31/1932
  • Kuhle Wampe(쿨레 밤페) 1931/1932 - 영화로도 제작됐으나, 과격한 선동을 시사하는 내용 때문에 유럽 각지에서 상영 금지 조치를 당했다.
  • Die sieben Todsünden der Kleinbürger 1933/1933
  • Dreigroschenroman(서 푼짜리 오페라), 1934
  • Die Rundköpfe und die Spitzköpfe(둥근 머리와 뾰족 머리) 1931–34/1936
  • Die Horatier und die Kuriatier 1933–34/1958
  • Furcht und Elend des Dritten Reiches(제 3제국의 공포와 참상) 1935–38/1938
  • Die Gewehre der Frau Carrar(카라르 부인의 소총)1937/1937 - 국내 번역명 <까라 부인의 소총>
  • Leben des Galilei(갈릴레이의 생애) 1937–39/1943 - 가끔 언급되는 '영웅이 없는 사회가 불행한 것이 아니라 영웅을 필요로 하는 사회가 불행한 것이다'라는 명언의 원 출처.[6]
  • Was kostet das Eisen? 1939/1939
  • Dansen 1939/?
  • Mutter Courage und ihre Kinder(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1938–39/1941 - 30년 전쟁 당시 전쟁터를 오가는 한 장사꾼 가족의 인생을 다룬 연극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위험성을 예고한 작품.
  • Das Verhör des Lukullus(루쿨루스의 재판) 1938–39/1940
  • Die Judith von Shimoda 1940
  • Herr Puntila und sein Knecht Matti(푼틸라 씨와 그의 하인 마티) 1940/1948
  • Der gute Mensch von Sezuan(사천의 선인) 1939–42/1943 - 중국 쓰촨성을 배경으로 한 연극으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성찰을 유도한다.
  • Der aufhaltsame Aufstieg des Arturo Ui(아르투로 우이의 저지할 수 있는 상승) 1941/1958[7]- 나치 독일, 정확히 말하면 힌덴부르크 공이 물러난 이후 아돌프 히틀러나치당이 세력을 세우고 히틀러가 총통이 되며, 오스트리아와 합방하는 때까지의 일을 그대로 풍자한 작품이다. 아포칼립틱한 시카고의 채소 시장과 그 뒤를 장악하는 뒷골목 세계를 배경으로 삼았으며, 아돌프 히틀러, 파울 요제프 괴벨스, 헤르만 괴링 등 주된 나치당 당수/당원들, 당대 독일, 오스트리아의 정치권 인물들은 연극 내에서 대부분 가상 인물로 치환되어 있다. 영국에서 연극을 공부하는 고등학생들이 학기말 연극으로 올리는 주 작품 중 하나이기도 하다.
  • Hangmen Also Die! 1942/1943
  • Die Gesichte der Simone Machard 1942–43/1957
  • The Duchess of Malfi 1943/1943
  • Schweyk im Zweiten Weltkrieg(제 2차 세계대전의 츠바이크) 1941–43/1957
  • Der kaukasische Kreidekreis(코카서스의 백묵원) 1943–45/1948 - 브레히트 후기의 대표작. 한 아이를 놓고 두 여성이 자신의 아이라고 우기자 재판관이 백묵(분필)으로 그린 원을 기준으로 아이를 반으로 갈라 나누어 가지게 했다는 유명한 설화에서 모티브를 얻은 연극이다.
  • Die Antigone des Sophokles 1947/1948
  • Die Tage der Commune 1948–49/1956
  • Der Hofmeister 1950/1950
  • Die Verurteilung des Lukullus 1938–39/1951
  • Herrnburger Bericht 1951/1951
  • Coriolan 1951–53/1962
  • Der Prozess der Jeanne D'Arc zu Rouen, 1431 1952/1952
  • Turandot oder Der Kongreß der Weißwäscher 1953–54/1969
  • Don Juan 1952/1954
  • Pauken und Trompeten 1955/1955


5.3. 시[편집]


희곡이 서사극인 것처럼 시도 서사시이기 때문에 서정적인 것이 매우 드물다.
  • An die Nachgeborenen(후손들에게)
  • Die Lösung(해결 방법) - 1953년 동베를린에서 발생한 봉기를 군대가 무력으로 진압한 것에 대해 항의하는 시다. 당시 브레히트는 동독 국가원수 발터 울브리히트에게 항의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 Erinnerung an die Marie.A(마리아에 대한 추억) - 브레히트의 보기 드문 서정시다. 영화 타인의 삶에도 이 시가 등장한다. 노래로도 존재한다.
  • Ich, der Überlebende(살아남은 자의 슬픔) - 시집 제목이기도 하다.
  • Legende vom toten Soldaten(죽은 병사의 전설)(1918) - 브레히트가 처음 쓴 시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사람들을 무차별 징집한 루덴도르프 장군을 규탄하기 위해 쓴 시다. 당시 브레히트는 군대에서 의무병으로 복무했다.
  • Morgens und abends zu lesen(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 그의 작품치고 드문 서정시를 넘어 거의 연애시 수준이다. 그야말로 짧고 굵은 작품.
  • Schlechte Zeit für Lyrik(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 시집제목이기도 하다.
  • Ulm 1592(1592년 울름)
    • Fragen eines lesenden Arbeiters(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 Lied am schwarzen Samstag(검은 토요일에 부르는 노래): 브레히트의 작품 중에 드물게 서정적인 작품
  • DIE SECHZEHNJÄHRIGE WEIßNÄHERIN EMMA RIES VOR DEM UNTERSUCHUNGSRICHTER(16세의 봉제공 엠마 리스가 예심판사 앞에서)[8]

16세의 봉제공 엠마 리스가

Als die sechzehnjährige Weißnäherin Emma Ries

체르노비치에서 예심판사 앞에 섰을 때

In Czernowitz vor dem Untersuchungsrichter stand

그녀는 요구받았다.

Wurde sie aufgefordert,

왜 혁명을 호소하는 삐라를 뿌렸는가

zu erklären, warum Sie Flugblätter verteilt hatte, in denen Zu Revolution aufgerufen wurde,

그 이유를 대라고

worauf Zuchthaus steht.

이에 답하고 나서, 그녀는 일어서더니 노래하기 시작했다.

Als Antwort stand sie auf und sang

인터내셔널가를.

Die Internationale.

예심판사가 고개를 내저으며 제지하자

Als der Untersuchungsrichter den Kopf schüttelte

그녀가 외쳤다

Schrie sie ihn an:

“기립하시오! 이것이 바로 인터내셔널이오!"

"Aufstehen! Das Ist die Internationale!"[9]

[10]


5.4. 노래(가사)[편집]


초기에는 쿠르트 바일(Kurt Weil)과 합작하여 곡을 만들었으나, 바일과 결별한 이후에는 한스 아이슬러와 합작하였다. 그가 만든 대부분의 노래는 연극의 삽입곡이나 민중가요, 노동 운동가로 쓰였다.


5.5. 이론서[편집]


  • The Modern Theatre is the Epic Theatre (1930)
  • Der Dreigroschenprozess (1931; 1932)
  • The Book of Changes
  • The Street Scene (1938; 1950)
  • The Popular and the Realistic (1938; 1958)
  • Short Description of a New Technique of Acting which Produces an Alienation Effect (1940; 1951)
  • "Kleines Organon für das Theater" (1948; 1949)
  • Dialogue aus dem Messingkauf 1963년 출판


6. 여담[편집]


  • 철학자 발터 벤야민과 친분이 있었다. 벤야민의 사후 브레히트는 벤야민을 기리는 시를 쓰기도 했다.

7.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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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 거주 시기에 반미국위원회의 조사를 받았는데, 이때 공산당에 가입한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실제로도 가입하지 않았지만 공산주의를 지지했다.[2] 마르크스-레닌주의, 현실사회주의를 비판했으나 동시에 프랑크푸르트 학파 등 수정주의적 신마르크스주의 운동에도 비판적인 레닌주의자였다.[3] 그런데 이 인간, 겨울전쟁 때는 핀란드는 망해도 싸다 그랬다. 비단 브레히트 뿐만이 아니라 스페인 내전 국제여단 참전용사 등 당대 핀란드 밖의 좌파들이 대개 그랬다.[4] '해결 방법'의 내용[5] 그의 최고작. 유명한 노래 '칼잡이 맥'이 포함된 유명한 연극이다.[6] 정확히는 극중 갈릴레이가 권력에 굴복(?)하자 제자가 실망하여 '영웅이 없는 나라는 불행하다'고 이야기하고 이에 갈릴레이가 '영웅을 필요로 하는 나라가 불행한 것이다'이라고 답하는 장면이 있다.[7] 참고로 후기 판본에서는 그냥 "아르투로 우이의 상승"으로만 표기하기도 한다. 이유는 간단한데 아르투로 우이의 상승은 결국 못 막았으니까.[8] Brecht, Bertold Gesammelte Werke Band 9, Frankfurt am Main : Suhrkamp, 1967, page 546에 수록됨.[9] 이른바 "16세의 봉제공 엠마 리스가 체르노비치에서 예심판사 앞에 섰을 때 그녀는 요구 받았다. 왜 혁명을 선동하는 삐라를 뿌렸냐(고) (그 이유를 대라고). 이에 대답하고 나서 그녀는 (일어서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에) (예심)판사가 손을 내저으며 저지하자 (혹은 제지하려고하자) 그녀는 목소리를(혹은 그녀의 목소리는) 더욱더 (큰 소리로) 매섭게 매섭게 외쳤다. 기립하시오. 기립하시오.(혹은 당신도 일어서서 부르시오 혹은 기립하시오 당신도) 이것이 바로(혹은 이것은) 인터내셔널이오."로 구전된 내용이다. 한국 운동권에서 인터내셔널가를 선창하기 전에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10] 정작 독일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시라고 한다. 링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