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너 폰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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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LIFE_LOGO.png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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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미국의 시사잡지인 라이프에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100인을 선정했다. 순위는 없으며, 만장일치로 선정된 인물은 헨리 포드라이트 형제뿐이다.
제인 애덤스
<사회 개혁가>
무하마드 알리
<권투선수, 인권 운동가>
엘리자베스 아덴
<사업가>
룬 알레지
<방송 경영자>
루이 암스트롱
<재즈 뮤지션>
조지 발란신
<안무가>
존 바딘
<물리학자>
어빙 벌린
<작곡가>
에드워드 버네이스
<홍보 책임자>
레너드 번스타인
<작곡가, 지휘자>
말론 브란도
<배우>
베르너 폰 브라운
<로켓 공학자>
데일 카네기
<작가>
월레스 캐러더스
<발명가, 화학자>
윌리스 하빌랜드 캐리어
<에어컨 발명가>
레이첼 카슨
<작가, 해양생물학자>
빙 크로스비
<가수, 배우>
클래런스 대로
<변호사>
유진 데브스
<노동운동가, 사회주의자>
로버트 더그래프
<포켓북 창업자>
존 듀이
<철학자>
월트 디즈니
<기업가, 애니메이션 제작자>
W. E. B. 듀보이스
<NAACP 설립자>
앨런 덜레스
<CIA 국장>
밥 딜런
<포크 뮤지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물리학자>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시인>
윌리엄 포크너
<소설가>
에이브러햄 플렉스너
<교육자>
헨리 포드
<기업가>
존 포드
<영화감독>
베티 프리댄
<페미니스트 여성 작가>
밀턴 프리드먼
<경제학자>
조지 갤럽
<여론 분석가>
아마데오 지아니니
<은행가>
빌리 그레이엄
<목사>
마사 그레이엄
<댄서, 안무가>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
<영화감독>
조이스 홀
<사업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소설가>
올리버 홈스 주니어
<법학자>
존 에드거 후버
<FBI 초대 국장>
로버트 허친스
<교육자>
헬렌 켈러
<인권 운동가>
잭 케루악
<시인, 작가>
빌리 진 킹
<인권 운동가, 테니스 선수>
마틴 루터 킹
<목사, 인권 운동가>
알프레드 킨제이
<성과학자, 생물학자>
빌렘 콜프
<생명과학자>
레이 크록
<맥도날드 창업자>
에드윈 랜드
<과학자, 발명가>
윌리엄 레빗
<부동산 개발업자>
존 L. 루이스
<노동당 지도자>
찰스 린드버그
<비행기 조종사>
레이먼드 로이
<산업 디자이너>
헨리 루스
<편집자>
더글러스 맥아더
<군인, 정치인>
조지 C. 마셜
<군인, 정치인>
루이스 B. 메이어
<영화 제작자>
클레어 매카델
<패션 디자이너>
조지프 매카시
<변호사, 정치인>
프랭크 맥너마라
<신용카드 발명가>
마거릿 미드
<인류학자>
칼 메닝거
<정신과 의사>
찰스 E. 메릴
<주식 중개인>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
<건축가>
로버트 모세
<공무원>
윌리엄 멀홀랜드
<토목 기사>
에드워드 R. 머로
<종군기자>
랠프 네이더
<소비자 보호가, 환경보호가>
라인홀드 니부어
<윤리학자>
존 폰 노이만
<물리학자, 수학자>
유진 오닐
<극작가, 작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물리학자>
윌리엄 S. 페일리
<방송 경영자>
잭슨 폴록
<화가>
에밀리 포스트
<소설가, 작가>
엘비스 프레슬리
<가수>
재키 로빈슨
<야구선수>
존 데이비슨 록펠러 주니어
<기업가>
리처드 로저스
(로저스 앤 해머스타인)
<뮤지컬 작곡가, 작사가>
윌 로저스
<배우, 작가>
엘리너 루스벨트
<FDR의 아내, 사회운동가>
베이브 루스
<야구선수>
조너스 소크
<소아마비 백신 개발자>
마거릿 생어
<사회운동가>
앨프리드 P. 슬론
<사업가, 산업가>
벤자민 스팍
<소아과 의사>
앨프리드 스티글리츠
<사진작가>
로이 스트라이커
<공무원, 사진작가>
빌 윌슨
<AA 창립자>
앤디 워홀
<화가>
얼 워런
<대법원장>
제임스 듀이 왓슨
<생물학자, 유전학자>
토머스 왓슨 주니어
<사업가, 정치인>
테네시 윌리엄스
<극작가>
월터 윈첼
<신문기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건축가>
라이트 형제
<최초의 비행기 제작자>
말콤 엑스
<인권 운동가>
출처




베르너 폰 브라운
Wernher von Braun

파일:625px-Wernher_von_Braun.jpg

본명
베르너 마그누스 막시밀리안 폰 브라운 남작[1][2]
Wernher Magnus Maximilian Freiherr von Braun
국적
[[독일 제국|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독일 제국
]][[틀:국기|
]][[틀:국기|
]]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바이마르 공화국 → [[나치 독일|

나치 독일
display: none; display: 나치 독일"
행정구
]]
→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출생
1912년 3월 23일
[[프로이센 왕국|
프로이센 왕국
display: none; display: 프로이센 왕국"
행정구
]]
포젠 주 비르지츠
(現 [[폴란드|
폴란드
display: none; display: 폴란드"
행정구
]]
비엘코폴스키에 주 비지스크)
사망
1977년 6월 16일 (향년 65세)
버지니아 주 알렉산드리아
학력
베를린 공과대학교(학석사)
베를린 대학교(박사)
직업
로켓 공학자
업적
V2, 레드스톤 로켓, 주피터 로켓, 새턴 V 로켓
정당


최종계급
슈츠슈타펠 소령 (돌격대지도자)
배우자
마리아 루이제 폰 크비스토르프 (1947년 결혼)
자녀
3명
서명
파일:VonBraun-sig.png

1. 개요
2. 생애
2.1. 초년 이력
2.2. 나치 시절
2.2.1. 나치 시절에 대한 평가
2.3. 종전 - 미국에 투항하다
2.4. 미 육군 소속기
2.5. NASA 재직기
2.6. 이후
3. 평가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V2의 성능은 완벽했다. 엉뚱한 행성에 떨어졌다는 것만 제외하면."

"The rocket worked perfectly, except for landing on the wrong planet."[3]

독일미국로켓 공학자. 로버트 고다드와 함께 로켓 공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나치 독일에서 V2 로켓을 처음 개발하였고, 이후 나치 독일이 패망하자[4] 미국으로 자리를 옮겨 머큐리 계획, 아폴로 계획의 우주개발을 책임졌다. 최초의 실용 로켓인 V2 미사일 개발을 시작으로 인류가 만든 최대의 로켓인 새턴 V 로켓 개발에 이르기까지 폰 브라운은 인류 로켓 개발 역사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생애[편집]



2.1. 초년 이력[편집]


아버지 마그누스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농업장관을 맡았다. 폰 브라운은 지금은 폴란드로 넘어간 프로이센 왕국 포젠주 비르지츠(Wirsitz)에서 태어났다.[5] 비르지츠는 당시 독일 영토였으나,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으로 이곳이 비지스크(Wyrzysk)라는 이름으로 폴란드 제2공화국로 할양되면서[6]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초등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엄격한 아버지와 그 당시 독일 특유의 딱딱한 교육 때문에 처음에는 답답해 했다. 하지만 결국 어머니 덕분에, 또한 로켓을 날리려면 꼭 필요했기에 싫어하는 수학도 공부했다.

소년 시절엔 사촌형과 함께 작은 로켓을 만들어 날리다가 과일 가게의 사과더미에 떨어지는 바람에 그 사과를 다 물어내는가 하면, 궤짝에 화약 추진체를 단 차량을 만들어 사람 많은 도로에서 달리게 하다가 경찰관에게 잡혀 아버지에게 혼나기도 했다. 본격적인 우주덕후가 되는 계기는 전통적으로 14세 생일에 받는 금시계 대신에 어머니가 사 보낸 천체망원경이었다. 이 망원경으로 동기들과 우주를 관측하다가 더 큰 망원경이 있으면 더 잘 관측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교장선생님을 설득해 큰 망원경을 얻어내고[7] 동기들과 함께 돌집을 지어 학교에 자그마한 천문대를 만들기도 했다.

어머니가 사준 망원경을 가지고 우주덕후가 되었고, 이후 우주로 나가겠다는 일념으로 로켓 덕후가 되어 어릴 때부터 우주 여행에 대한 꿈을 키웠다.

1930년 베를린 공과대학에 입학하여 헤르만 오베르트[8]의 제자가 되었다. 1931년에는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9]에서 1학기 동안 공부하기도 했다.

폰 브라운은 김나지움 시절부터 우주비행동호회에 활발히 할동하고 있었고, 여기서 2년간 80여 차례나 로켓을 쏳아 올릴 정도로 열심히 활동했다. 동호회에서 독일 육군 로켓 연구소 소장 발터 도른베르거와 알게 되었다. 폰 브라운은 1932년초 기계공학 학사를 받았고, 폰 브라운을 눈여겨 보고 있던 도른베르거는 폰 브라운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그를 독일 육군 병기국 로켓 연구소에 취직시켰다. 이곳에서도 폰 브라운은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비록 그는 주로 군사 로켓을 연구하게 되었지만 그의 꿈은 여전히 우주여행이었다.

파일:external/www.woolworthsmuseum.co.uk/WernerVonBraun-1944.jpg
발터 도른베르거와 함께.[10]

육군 로켓 연구소에서 폰 브라운과 그의 동료들은 고다드의 로켓을 참고하여 연구를 진행하였으며[11] 입사 1년만인 1933년 A1 로켓 개발에 성공했다.


2.2. 나치 시절[편집]


1933년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나치당이 정권을 잡았고 이후 세상이 바뀌었다.

폰 브라운은 A1 로켓 개발 성공에 힘입어 후속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으며, 1934년 7월 베를린대에서 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스물을 막 넘긴 나이였다.[12] 박사 학위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1934년말 마침내 2.2~3.5km까지 올라가는 A2 로켓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폰 브라운은 동료들과 1935년부터 A3 로켓 개발에 착수했다. 그 무렵 나치당은 민간의 로켓 개발을 금지하였고, 모든 로켓 개발 관련 연구를 육군에서 주관하도록 했다. 1936년부터 나치는 모든 로켓 개발을 국가 기밀로 다루었다. 1937년 발트 해 연안의 페네뮌데에 육군 포병 병과 소속으로 거대한 로켓 실험 단지를 만들어 모든 로켓 관련 실험을 이곳에서 진행하도록 했고 폰 브라운을 신임하던 발터 도른베르거를 지휘관으로 선임하고 이들을 유치하여 로켓 개발을 계속 진행하도록 했다. 1937년 12월 마침내 A3 로켓 개발에 성공했고, 같은 달 폰 브라운은 결국 나치당에 가입했다.

파일:베르너 폰 브라운.jpg

A3 로켓 개발 이후 A5[13]를 거쳐 1942년 마침내 완성형 로켓인 V2(A4) 로켓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1942년 V2 로켓 발사[14]에 성공하였다. V2는 1944년 영국 공격용으로 실전에서 사용되었다.

전쟁 초창기부터 로켓 무기는 실용화 가능성이 제기되었지만 정작 아돌프 히틀러는 시큰둥했다. 그러나 SS장관 하인리히 힘러는 육군 소속인 이 연구소를 무장친위대 소속으로 옮겨서 자신이 공을 독차지하려고 좀 더 많은 예산을 쓸 수 있게 해주겠다며 폰 브라운을 꾀었다. 폰 브라운은 예산이 부족해서 문제가 되는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거절했고, 이후 힘러가 감독하고 있는 게슈타포가 보복으로 폰 브라운을 체포하게 된다. 이유는 폰 브라운이 클라우스 리델, 헬무트 그뢰트룹[15]과의 대화에서 씨바 우주선 연구도 못하고... 전쟁도 망해가고... 하는 푸념을 했는데 SS 보안대의 스파이였던 여성 치과의사가 이걸 패배주의에 젖었다, 즉 사보타주 아니냐고 고발했다.[16] 다행히 당시 군수장관을 맡고 있던 알베르트 슈페어가 개입하여 폰 브라운은 풀려나오게 된다.[17] 이후에도 힘러의 노력은 계속되어 결국 V2 로켓의 실전부대는 SS대장 한스 캄러(Hans Kammler)가 총괄하고 그 예하에 육군과 무장친위대의 미사일 대대가 함께 배속되는 형태로 개편된다. 이 중 육군 대대의 지휘관인 발터 도른베르거는 폰 브라운을 매우 아꼈으며 그 외의 지휘관들도 따로 노는 분위기였다.

제공권을 잃은 독일은 유일한 희망인 V2 로켓을 영국에 계속 발사했으나, 그것은 제공권을 장악한 연합군이 퍼붓는 폭탄의 새발의 피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에 전세를 돌이킬 수 없었다. 폰 브라운은 V2에 이어 미국을 때릴 대륙간 탄도탄인 A9를 개발하려고 했으나, 이미 전세는 그런 걸 개발할 형편이 아니었고, 독일은 결국 항복한다. 폰 브라운은 로켓 개발 기지가 있던 페네뮌데 근처까지 진격한 소련군[18]을 피해 남부로 도피한 후 미군에 항복하였다.


2.2.1. 나치 시절에 대한 평가[편집]


파일:external/taglidotme.files.wordpress.com/peenemunde.jpg
1941년, 페네뮌데 기지에서. 정장을 입은 사람이 폰 브라운.[19]

톰 레어러(Tom Lehrer),[20] Wernher von Braun (나치 시절의 폰 브라운을 풍자하는 노래)
[가사 펼치기·접기]
And what is it that put America in the forefront of the nuclear nations? And what is it that will make it possible to spend twenty billion dollars of your money to put some clown on the moon? Well, it was good old American know how, that's what, as provided by good old Americans like Dr. Wernher von Braun!
Gather 'round while I sing you of Wernher von Braun,
A man whose allegiance
Is ruled by expedience.
Call him a Nazi, he won't even frown,
"Ha, Nazi, Schmazi, " says Wernher von Braun.
Don't say that he's hypocritical,
Say rather that he's apolitical.
"Once the rockets are up, who cares where they come down?
That's not my department, " says Wernher von Braun.
Some have harsh words for this man of renown,
But some think our attitude
Should be one of gratitude,
Like the widows and cripples in old London town,
Who owe their large pensions to Wernher von Braun.
You too may be a big hero,
Once you've learned to count backwards to zero.
"In German oder English I know how to count down,
Und I'm learning Chinese!" says Wernher von Braun.

힘러에게 체포당했다가 풀려난 과정을 보면 폰 브라운은 나치에 탄압당하는 양심적인 과학자인 것도 같지만, 그 실상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체포된 것은 힘러의 개인적 미움을 샀기 때문이므로 반 나치 운동과는 전혀 관계 없는 문제이다. 폰 브라운은 1937년(기록에 따라서는 1932년)에 나치당에 입당했으며, 1940년에는 슈츠슈타펠 장교가 되었다. 심지어 슈츠슈타펠 장교 정복을 입고 하인리히 힘러와 찍은 사진도 남아있다. 훗날 폰 브라운은 자신이 친위대 제복을 입은 것은 그 때가 유일하다고 해명했다. 실제로도 대부분의 사진에서 다른 이들은 제복을 입고 있지만 폰 브라운만 양복을 입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다. 히틀러와 함께 찍힌 사진에서도 군 장교들 사이에서 그만 유일하게 양복을 입고 있는 사진이 대부분이다.

그의 최종 계급은 일반친위대 돌격대지도자[21](SS-Sturmbannführer)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열성적 나치당원이었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폰 브라운은 위의 사항들에 대해서 나치당 가입이나 무장친위대 장교가 된 일 등은 자발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강제된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는 물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변명이겠지만, 무장친위대 제복 문제를 제외하면 그의 변명이 사실과 다르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당시 독일에서는 로켓 기술이 독일 민족의 우수함을 입증하는 프로파간다로서 선전되었기 때문에 나치당이나 무장친위대에서 가입을 강요하는 것은 정황상 별로 어색한 일은 아니며, 힘러 본인이 로켓 개발팀을 장악하는 데 굉장한 욕심을 드러내기도 했으니까. 또한 장교복을 입는 것은 군대에서는 의무사항인 것이 당연하므로 그의 사상을 입증하는 자료가 되기는 어렵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실제로 강요를 받았다는 분명한 증거도 없다.

사실 이런 것들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분명하게 증거가 남아있는 문제가 있는데 바로 V2 생산을 위해서 강제수용소 재소자 수만명을 사실상 노예로 사용한 사실이다. 이 점에서는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없다. V2 제조를 위한 노예 노동에서 2만여 명(다른 자료에서는 1만 2천여 명)이 사망했는데, 이는 V2 공격으로 인한 사망자인 약 7250명을 크게 뛰어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옹호론은 당시 독일에서 노예 노동을 시킨 것은 노동력 부족 때문이었으며[22] 폰 브라운도 그런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노예 노동을 받아들였을 뿐이었다는 것이다. 폰 브라운 스스로도 그러한 변명을 했으며 자신은 한동안 노예 노동이 얼마나 가혹하게 이루어지는지 잘 몰랐고, 알게 된 후에도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V2 공장 역시 직접 방문한 적은 없고[23] 단지 "소문만 들었다"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현재에도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적잖은 연구자들은 이를 반박한다. 폰 브라운 자신이 수용소의 죄수(혹은 포로)들을 노동자로 제공해 달라고 촉구한 편지가 남아 있으며, 기 모랑이라는 강제노역 생존자가 자신을 포함한 노동자들이 사보타주를 했을 때 폰 브라운이 자신에게 25번 채찍질을 할 것을 지시했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이는 폰 브라운이 노예 노동의 가혹함에 대해 별 문제의식이 없었다는 점과 노동자들의 처분에 대해 지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24] 다만 아무리 폰 브라운이라도 노예 노동에 저항하는 태도를 보였을 경우 총살당했을 것이라는 증언도 있다. 실제로 1943년부터 SS보안대가 그를 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정말로 휙 잡아가기도 했으니까. 이 증언을 받아들인다면 그가 노예 노동 상황을 실질적으로 바꿀 수 없었다는 변명은 상당한 설득력을 얻는다. 그러나 그의 편지나 기 모랑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최소한 그는 노예노동을 쓰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된 시점부터는 적극적으로 노예노동을 요구했다는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로켓의 퀄리티에 민감하던 폰 브라운이 비전문가 강제수용자들의 노역으로 만드는 걸 좋아했을지 또한 의문의 여지가 있다. 결국 강제노동에 있어서 더 큰 권한을 가지고 더 많은 수용자들을 끌어모은 쪽은 폰 브라운보다는 발터 도른베르거, 그리고 도른베르거의 상관이자 힘러가 직접 임명한 한스 캠러 SS대장이었을 것이라는 게 이런 의견을 내는 사람들의 추측인데, 사실 이는 폰 브라운을 상당히 정치에 무지한 인물로 여기는 시각이긴 하지만 아예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폰 브라운을 힘러가 직접 SS로 영입했다 해도 폰 브라운은 군사무기보다는 우주발사체에만 관심이 많았으며, 똑같이 로켓을 좋아했지만 국방군 장교 신분이었던 도른베르거가 폰 브라운보다 독일군 돌아가는 행태에도 웬만큼 밝았기 때문에 서류작업부터 상부에의 접대, 기름칠 등의 면에서 폰 브라운을 최대한 챙겨줬고[25], 그 과정에서 강제노동자 동원도 주도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오히려 V2가 중용되던 1944년 하반기의 폰 브라운은 힘러가 스스로 V2 프로그램을 장악하려고 술수를 부려 상당한 스트레스와 언제 쥐도새도 모르게 끌려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실제로 끌려가기도 했고)을 느끼고 있었고, 반면 도른베르거는 히틀러가 뒤늦게 V2를 중용할 때도 그에게 직접 사과를 했을 정도니, 그 시기 V2 총책임자의 위치는 적어도 형식상으로라도 폰 브라운보다는 도른베르거라고 봐야 한다는 말. 즉, 이는 훗날 폰 브라운이 아폴로 계획으로 유명해지자 그에 대한 까임이 늘어나면서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도른베르거나 캠러의 행적까지 폰 브라운의 행적으로 함께 취급되었다는 추론이다.[26]

폰 브라운이 전쟁 범죄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측에서 언급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아르투어(아서) 루돌프(Arthur Rudolph)이다. 루돌프는 폰 브라운과 마찬가지로 나치 독일 VfR에서 일했고, 나중에 미국으로 건너와 NASA에서 새턴 로켓을 만들 때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폰 브라운 아래에 있던 독일 출신 과학자 중 가장 많이 언급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하지만 1980년대초 OSI의 나치 피정복민 강제노동의 진상규명 작업에서 루돌프의 전쟁 범죄 사실이 드러나자 결국 그는 도망치듯 서독으로 떠나야 했다. 폰 브라운이 전쟁 범죄에 적극 가담했다고 주장하는 측은 NASA 시절 폰 브라운의 핵심 측근 중 한명이었던 루돌프의 예를 언급하며 루돌프의 상관인 폰 브라운은 이보다 더한 범죄자이며 폰 브라운이 운좋게 일찍 죽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사실과 다른 것이다. NASA 시절 루돌프가 폰 브라운의 핵심 측근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은 맞지만, 나치 시절 루돌프와 폰 브라운은 서로 다른 조직에 속해 있었다. 일단 나이부터 당시 20대 애송이였던 폰 브라운보다 훨씬 많았던 그는 나치 독일에서는 폰 브라운의 부하가 아니었고, 폰 브라운과 다른 일을 했었다. 루돌프가 단죄 받은 것은 그가 비밀 로켓 공장인 도라-미텔바우 공장의 직접적인 책임자였기 때문이다. 폰 브라운은 도라 공장이 아닌 페네뮌데 연구소에서 일했으며 서로 맡은 일이 달랐다. 물론 폰 브라운도 종종 도라를 방문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돌프와 폰 브라운이 같은 일을 했던 것처럼 말하는 것은 사실과는 많이 다른 것이다.

폰 브라운이 적극적으로 전쟁 범죄에 가담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보는 사람들은 베르너 폰 브라운의 동생 마그누스 폰 브라운(Magnus von Braun)에 주목한다. 폰 브라운이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미국에 투항할 때 찍힌 사진에서 폰 브라운 바로 옆에 있는 인물이 바로 마그누스 폰 브라운이었다. 마그누스(미국 시절에는 맥(Mac)이라는 영어식 이름을 주로 사용했다)는 어린 시절부터 형을 따라다니며 로켓을 만들어 왔다. 화공 엔지니어였던 마그누스는 형 베르너의 액체 로켓 개발에 핵심 인물이었으며, 나치 독일 페네뮌데 연구소부터 미국 뉴멕시코 캠프, 육군 연구소, NASA 기간 내내 형의 수족과도 같은 인생을 살아왔다. 1980년대 OSI는 마그누스의 나치 시절 행적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고들었지만 마그누스에 대한 별다른 전쟁 범죄 혐의를 찾지 못했다. 마그누스는 사실상 추방당한 아르투어 루돌프와 달리 늘그막까지 크라이슬러 임원으로 일하며 미국에서 평화롭게 사망했다.

폰 브라운의 나치 시절 행각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여러 단체에 의해 많은 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졌다. 특히 V2 로켓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영국 기관과 언론들은 폰 브라운을 단죄하고자 눈에 불을 켜고 그의 나치 시절의 전쟁 범죄 여부를 캐내기 위해 수십년 동안 이잡듯이 조사해 왔다. 현재까지 많은 연구자들은 그가 적극적으로 나치 권력층에 접근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이는 그의 사상 때문이 아니라 로켓 개발에 드는 돈을 국가로부터 지원받기 위해서(즉 스폰서 낚아보려고)라는 데서 의견을 같이하는 편이다. 나치 정권이 로켓 개발을 지원하기 전에는 민간 연구자들이 자비로 로켓을 개발하고 있었으며 군사용으로 로켓을 개발한다는 발상에 상당한 거부감을 나타냈지만, 당시에는 국방 예산이 아니면 사실상 로켓 연구와 같은 대규모의 연구를 진행하기란 불가능했다.[27] 사실 이는 냉전 시대에도 마찬가지였고, 냉전 시대에 미국과 소련에서 로켓 연구 예산이 배정된 것도 상당부분 군사적 목적 때문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물론 돈 때문에 그랬다고 하더라도 나치 협력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면죄부가 되지 않겠지만.


2.3. 종전 - 미국에 투항하다[편집]


2차대전 말기 미국과 소련은 모두 V2 로켓 기술과 폰 브라운을 원하고 있었다.[28] 양국은 독일의 로켓 기술과 폰 브라운을 얻기 위해 비밀리에 노력했다. 한편 폰 브라운과 측근들 역시 패망이 가까워 오면서 자신들의 거취를 고민하게 되었는데, 미국 쪽으로 투항하기로 결심으로 굳혔다. 소련군은 폰 브라운의 로켓 연구소인 "페네뮌데"의 점령을 위해 기갑부대를 보내 로켓 생산 공장을 점령해서[29] 제조 중이던 수백 기 분량의 반제품과 부품을 입수했다. 한편 폰 브라운과 그의 동료 과학자들은 친위대 감시에서 탈출해서[30] 자발적으로 미군을 찾아가 항복했다.[31] 심문 과정에서 폰 브라운은 과학자들로 구성된 미군 심문관들에게 자신의 연구 경력을 순순히 상세하게 진술했다. 당시 폰 브라운을 심문했던 한 과학자는 폰 브라운의 다음과 같은 진술이 인상적있다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우주여행이 꿈이었다. 스물두 살 때 제대로 된 첫 번째 로켓을 만들었는데, 무려 1800m나 솟아 올랐다. 이것이 군의 관심 대상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군은 나에게로 다가와 나를 위한 실험실과 발사대 등 모든 시설을 만들어 줬다. 1939년 아돌프 히틀러가 우리 연구소를 방문했다."


미군에 투항한 직후 폰 브라운의 사진을 보면 왼팔에 깁스를 하고 있는데, 당시 미군은 폰 브라운이 일부러 깁스를 한 것으로 의심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폰 브라운은 전쟁 말기에 타고가던 차가 큰 사고를 당했고 팔의 부상도 매우 심각했었다. 다행히 팔은 나중에 완전히 회복되었다.

이때 폰 브라운이 데리고 미국에 투항한 인원은 과학자 132명 그리고 그들의 가족 300여 명에 달했다. 투항 과정에서도 폰 브라운은 자신의 중요성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에 미군 앞에서 다리를 꼬고 여유로운 자세로 협상했다. 폰 브라운의 요구 조건은 그의 팀 132명 전원과 그들의 가족을 한명도 빠짐없이 모두 수용해 줄 것이었다. 사실 미국은 이렇게 많은 인원을 데려갈 생각은 없었고, 폰 브라운과 그 밑의 핵심 인물 몇 명 정도만 데려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폰 브라운은 132명 전원을 받아주지 않으면 차라리 소련쪽으로 접촉해 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미국은 폰 브라운의 요구를 받아들여 132명 전원을 수용했다.

페네뮌데는 원래 소련군 점령 지구였으나, 미군은 독일이 항복하자마자 재빨리 이곳에 와서 수십 기를 가져간다. 뒤늦게 이곳에 도착한 소련군은 남아있던 훨씬 많은 제품을 챙기게 된다.[32]

다른 분야는 몰라도 로켓기술에 있어서는 독일은 미국과 소련을 압도하고 있었다. V2 플랜트를 조사한 미군의 보고서는 독일의 로켓 기술이 미국보다 적어도 25년 앞서 있다고 평가했고[33], 소련군에 종군했던 소련 과학자의 회고에 의하면 소련 전체에 한 대밖에 없던 오실로스코프가 소련군이 접수한 독일의 로켓연구소에는 한 곳에만 여러 대 있었다고 한다. V2 기술을 획득한 이후 이전의 미소가 독자적으로 연구하던 로켓은 모두 쓸모가 없어졌고[34], 이후 나온 소련의 R-1, R-2, 그리고 미국의 레드스톤 로켓은 모두 V2의 파생형에 불과했다.


2.4. 미 육군 소속기[편집]


미국은 이런 로켓 천재를 감옥에 보낼 생각은 전혀 없었고, 미국으로 데려와서 신무기를 제조하게 하였다. 그래서 독일이 패망한 지 약 한 달 만인 1945년 6월 20일 그와 그의 팀을 미국으로 데려왔다. 페이퍼클립 작전으로 수많은 나치 독일 출신 과학자들을 미국으로 데려왔지만 그중에서도 폰 브라운과 그의 팀 중 127명이 제1 선발대로 미국에 도착했다.

미국은 폰 브라운과 그 동료들을 멕시코와의 국경지대에 있는 뉴멕시코 사막의 포트 블리스 미군 기지로 데려와 이곳에 정착시켰다. 1950년 헌츠빌로 이주할 때까지 그들은 여기서 일하게 되었다. 훗날 브라운은 뉴멕시코는 정말 정붙이기 힘든 곳이었다고 털어 놨다. 현재 포트 블리스 기지는 한국의 평택 미군 기지처럼 쾌적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긴 하지만 1945년 당시는 정말 사막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막사들만 지어진 곳이었다. 처음에 그들은 미 전쟁부 특별 고용자 신분으로 1년 계약직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반쯤 포로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과학자들에 대한 미국의 보수와 대우는 좋았고, 이들의 대다수는 나중에 미국에 정착, 귀화하게 된다.

당시 미국에서 독일인에 대한 감정이 나빴기 때문에 그들이 처음 뉴욕에 도착했을 때, 독일에서 온 교향악단 단원 행세를 해야 했고, 뉴멕시코에 이주해서 그들은 한동안 스위스인으로 행세하였다. 하지만 정부가 나치 독일 과학자들을 미국으로 데려왔다는 소문이 언론을 통해 미국내에 퍼지기 시작하고 이에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러자 미 정부는 언론을 통해 이 사실을 인정했지만 이들은 나치의 강압으로 어쩔 수 없이 협력한 것이라고 변호했다. 이들의 탈출 과정을 영웅적으로 묘사해서 미국인들이 이들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여론을 바꾸었다.

그러나 패전국 나치 독일 출신이었기 때문에 1957년 스푸트니크 쇼크 때까지 폰 브라운 팀은 미국의 로켓 및 인공위성 계획 등에서 배제되거나 2선으로 밀리면서 한동안 기회를 잡지 못했다. 특히 1950년까지 5년간 폰 브라운과 그의 팀에게는 아무런 일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 5년 동안 기껏해야 독일에서 만들었던 V2를 미국에서 다시 제작하여 미국에 자신들이 가짜는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 정도였다. 미국은 독일에서 가져온 열차 300량 분량의 V2 로켓 부품들을 각 군 연구소, 항공사, 대학 연구소 등 군/민간 연구소에 뿌리면서 연구 개발에 사용하도록 했고 폰 브라운 팀은 미국인들에게 V2의 설계도와 원리를 설명하고, 미국인들이 설계도를 바탕으로 V2를 제작하여 발사해보는 것을 도와주는 역할을 주로 했다. 1940년대 후반 미국의 각 연구소에서 쏘아올린 V2만 70여대가 되었다. 이후 미 당국은 폰 브라운 팀을 로켓 개발에서 배제시키고, 10여개에 달하는 군/민간 우주항공연구소에서 미국인들 스스로 각자 로켓을 연구개발하도록 독려했다.

미국에서 아무런 임무도 주어지지 않은 채 지루한 시간을 보내던 폰 브라운은 미국 관계자에게 소련은 로켓 개발에 한창이라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소련으로 갈 걸 그랬다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이 발언은 관계자를 자극해 미국도 적극적으로 로켓 개발을 추진하게 하려는 의도의 발언이었다. 이처럼 미국이 폰 브라운 팀을 미국으로 데려와 보호한 것이 그들을 써먹기 보다 일단 소련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한 목적이 더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독일 페네뮌데 로켓 기지를 점령하여 독일 V2 기술자들과 부품, 설비를 모조리 긁어 소련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핵심 인력은 대체로 폰 브라운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핵심 과학자는 헬무트 그뢰트룹 등 소수만 소련으로 넘어갔고, 소련이 데려간 근 5천명의 인력 대부분은 V2의 제조 직공들이었다.[35] 그뢰트룹 등은 폰 브라운과 사이가 나빴고 미국이 아닌 소련을 택했다. 그래도 소련이 데려간 독일인 중에서 개발급 과학자는 약 170명이나 되었다. 소련은 이들 독일 과학자들에게 V2의 설계도를 그리게 하고, V2를 소련 과학자들에게 설명하도록 했으며, 독일에서 뜯어온 V2 부품 및 생산설비를 이용해 제조 직공들에게 V2를 생산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소련도 V2를 복제 생산하여 발사하는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북유럽에서는 유령 로켓 소동까지 벌어졌다. 특히 당시 소련에는 유도제어기술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서 V2를 복제 생산하고도 로켓을 날리지 못할 뻔했다. 그런데 소련으로 넘어간 독일 과학자 중에 V2의 유도제어장치 개발 총책임자인 헬무트 그뢰트룹이 있고, 그를 통해 소련은 유도제어장치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소련은 그뢰트룹에게 유도제어기술을 배운 과학자들을 데리고 1950년 유도제어기술 연구소를 만들었고, 이후 소련도 독자적으로 로켓 유도장치를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헬무트 그뢰트룹이 미국으로 가지 않고 소련으로 넘어온 이유에 대해 소련도 무척 의아해 했다고 하는데, 폰 브라운과 사이가 무척 나빴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또 그뢰트룹은 처음에 좋은 연봉을 주겠다는 소련의 말을 믿었는데, 실제로 소련은 독일 과학기술자들에게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사용했다. 일급 과학자들에게는 약속했던 것도 있고 해서 실제로 소련 과학자들보다 높은 급료와 당시 좋은 주택을 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그들의 자유를 빼았았고 감금, 협박 등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래서 독일 과학자들은 섬에 지어진 안락한 저택에 감금되어 외부와 단절된 채 일해야 했다. 그뢰트룹이 거주 이전의 자유를 달라고 하자 소련 당국은 섬에서 지내기 싫으면 우랄 산맥으로 거쳐를 옮겨주겠다고 답했다. 어쨌든 소련 역시 독일 과학자들 덕분에 로켓을 만들 수 있었다. 만약 헬무트 크뢰트룹이 소련으로 넘어가지 않았다면 소련이 V2 부품과 설계도를 다 입수했는데도 유도장치를 개발하지 못해서 V2를 날리지 못할 뻔했고, 소련의 로켓 기술은 몇년 뒤쳐졌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폰 브라운은 1947년 미국 정부의 허가를 받아 연합군의 군정 하에 있던 독일 바이에른으로 돌아가 외사촌 마리아와 결혼식을 올렸고 직후 아내와 부모님을 모시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소련이 1949년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고, 1950년 한국 전쟁이 터지자 폰 브라운팀에게도 일감이 하나 주어졌다. 소련과 중공이 개입한 한국 전쟁이 터지자 미국 정부도 소련의 위협에 대비하여 당장 미사일을 개발할 필요를 느꼈다. 이미 육해공군 연구소나 칼텍 등에서 폰 브라운의 V2를 바탕으로 로켓/미사일을 연구하고 있었지만 너무나 지지부진했던 것. 결국 자국인들의 힘만으로 독자적으로 로켓을 개발하려 했던 미국은 계획을 바꾸어 폰 브라운 팀을 써먹기로 결정했다.

1950년 하반기 미 육군은 폰 브라운 팀과 그들의 가족들을 메마른 뉴멕시코 기지에서 그들의 고향인 독일과 같은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쾌적한 자연을 가진 앨라배마 주 헌츠빌로 이주시켰다. 이곳에는 미 육군 레드스톤 병기창이 있었는데, 이곳에 폰 브라운 팀을 위한 새로운 로켓 개발 연구소가 세워졌고, 폰 브라운 팀에게 단거리 탄도 미사일을 개발하라는 오더가 떨어졌다. 그리하여 개발하게 된 것이 레드스톤 로켓/마사일이었다. 1952년 V2 로켓을 발전시킨 레드스톤 설계가 끝났고 실물 제작에 들어가 1953년 시험 발사에 성공, 실전 배치가 시작되었다. 레드스톤 미사일은 미국 최초의 핵 탄도 미사일이었다. 폰 브라운 팀이 이렇게 빨리 새로운 로켓을 개발하게 된 것은 이미 그들의 머릿 속에 어느 정도 선행 연구가 진행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폰 브라운은 나치 독일 시절 대서양 넘어 미국까지 도달할 수 있는 로켓을 개발해 보라는 지시를 받고 이를 구상하고 있었다. V2의 사거리를 획기적으로 늘리기 위해 폰 브라운은 다단 로켓이라는 개념을 고안했고, 이를 가지고 페네뮌데 연구소는 실제로 개념 설계 단계까지 갔었다. 하지만 전쟁의 승패는 이미 기울었고 다단 로켓을 만들 예산과 기간이 주어지지 않아 이는 개념 구상 정도에 그쳤다. 미국에서 폰 브라운 팀이 레드스톤 로켓 개발을 3년이 채 안되는 짧은 시간에 해낸 것은 그 덕분이었다.

한편 소련에서도 독일 과학자들을 통해 폰 브라운이 독일에서 개발하던 다단 로켓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코롤료프 등 소련 과학자들은 미국보다 먼저 다단 로켓인 R-2를 개발하게 되었다.

1952년 헌츠빌의 폰 브라운 팀은 미 육군 로켓 개발팀(Army's rocket development team)으로 승격되었다.

아울러 폰 브라운은 50년대 초부터 미래의 우주 여행, 우주선, 로켓 등의 아이디어를 담은 대중 과학 서적들을 저술하여 출간했다. 1951년에는 화성 탐사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고, 1952년부터는 자신이 구상한 우주정거장, 우주왕복선, 달 탐사선 등을 대중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한 글을 과학 잡지에 발표하거나 책으로 출간했다. 폰 브라운은 대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컬러 그림을 다수 삽입했다. 이에 대해 미국 과학자들은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미국 대중들에게는 의외로 큰 반향을 얻었다. 폰 브라운의 책에 매료된 사람 중에는 월트 디즈니도 있었다. 월트 디즈니는 폰 브라운에게 다규멘터리를 제작하자고 제의했고, 우주 여행을 주제로 한 여러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브라운은 프로그램 감수를 맡았고, 본인이 직접 프로그램 시리즈 출연하여 설명하기도 했다. 그의 영어 악센트는 매우 딱딱했지만 우주 여행이라는 매혹적인 주제를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알기 쉽게 설명했다. 나아가 월트 디즈니는 디즈니랜드에 우주 여행을 테마로 한 테마파크를 조성했고, 여기에도 디즈니는 폰 브라운에게 자문을 구했고, 심지어 폰 브라운을 광고에 출연시키도 했다. 책과 영상물을 통해 브라운은 자신이 그동안 구상해 왔던 다양한 우주 여행 아이디어들을 쏟아냈다.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를 비롯한 수십년 후의 SF 영화에서 등장한 수많은 장면의 모티브들이 폰 브라운과 디즈니의 다큐멘터리에 이미 등장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우주와 우주 여행을 소재로 하는 SF소설들이 미국 등 서구에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에도 폰 브라운의 창의력 넘치는 저작물과 다큐멘터리가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매체를 통해 브라운들은 대중들에게 우주개발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나아가 정치인들이 우주 개발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기를 바랬다.

헌츠빌에서 폰 브라운과 그의 팀은 훨씬 더 좋아진 연구조건에서 연구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으나, 미국의 공군 만능주의자들이 탄도 미사일의 효용성을 낮게 보았으며, 폰 브라운 팀 이외에 육해공 각군과 민간 연구소에서 각각 독립적으로 로켓 개발을 진행하는 등 소련보다 로켓 개발 추진이 미흡했다. 당시 미국은 육/해/공군/해안경비대에, 기상청에, 각 대기업, 대학 등 독자적으로 로켓을 개발하는 기관이 20곳이 넘었다. 이들 사이에 협력이나 정보 공유는 전혀 없었다. 이런 막장 상황은 결국 스푸트니크 쇼크로 이어진다. 또한 미국에서는 독일인에 대한 감정이 나빴다는 점 때문에 은근히 견제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한편 1955년 4월 폰 브라운은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다.

아래에도 나오듯 당시 소련은 극비리에 미친듯이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었지만, 미국은 이를 잘 알지 못하고 있었고, 미국은 자국의 강력한 공군력에 어느정도 안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도 로켓 개발에 완전히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55년 지구물리학계 과학자들이 다가오는 1957년을 국제지구물리관측년으로 지정했고, 이에 미국은 국제지구물리관측년을 기념하기 위한 인공위성을 발사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국의 각 군 로켓 연구소들이 인공위성 발사에 입찰했다. 폰 브라운은 레드스톤 미사일을 개량한 주피터-C 로켓을 활용한 ‘오비터 계획’을 내놓았다. 해군은 '뱅가드' 계획을, 공군은 '월드 시리즈' 계획을 내놓았다. 해군의 뱅가드나 공군의 월드 시리즈는 이제 막 설계를 시작했지만, 육군의 폰 브라운 팀은 이미 2년전에 레드스톤 미사일을 개발완료하여 이미 실전 배치가 된 상태였고, 인공위성을 쏘아올리기 위해서는 레드스톤 미사일의 탄두 낙하 속도에다가 10%만 더 높이면 되었다. 1957년까지 2년 밖에 안남은 상황에서 해군과 공군의 계획은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였고, 육군 폰 브라운 팀의 제안이 채택될 것이 매우 유력하게 점쳐졌지만, 미국 정부의 최종 선택은 해군의 뱅가드 계획이었다.

육군이 제안한 주피터-C 로켓은 미 정부의 인공위성 계획에 낙점되지 못했지만 미 육군은 기왕 설계한 주피터-C 로켓을 실제로 생산하여 1956년부터 실전배치했다. 아울러 주피터-C 로켓이 실전 배치될 즈음 폰 브라운이 이끌던 미 육군 로켓 개발팀(Army's rocket development team)을 확대 개편되어 ABMS(미 육군 탄도 미사일청, Army Ballistic Missile Agency)이 창설되었고, 폰 브라운은 개발 및 운영 총책임자가 되었다.

당시 폰 브라운은 로켓에 미온적인 미국 정부 때문에 이렇게 비교적 한가하게 지내고 있었지만, 소련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1950년대 초 소련 수뇌부는 기껏 원자폭탄을 개발했는데, 이걸 어떻게 미국에 떨어뜨릴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폭격기에 직접 실어서 떨어뜨려야 했는데, 미국의 공군력 및 대공 방어를 뚫고 미국 본토에 핵폭탄을 떨어뜨리는데 성공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소련의 핵공격을 막기 위해 대대적으로 공군을 강화했고, 소련과 미국의 공군력 격차는 갈수록 커졌다. 결국 소련 수뇌부는 소련의 국력으로는 미국의 공군력을 따라잡는 것이 불가능하는 현실을 인정했고, 공군력의 불균형을 일거에 뒤집을 수 있는 대륙간 탄도 미사일 개발에 착수하기로 결정했다. 1953년 소련 당국은 코롤료프가 책임자로 있는 OKB-1[36] 로켓 연구소에 사거리 8,000km, 단두 중량 5,500kg의 탄도 미사일 개발을 지시했다. 8,000km는 시베리아에서 미 본토까지의 거리이며, 5,500kg은 1953년 10월 소련이 핵실험에 막 성공한 최신 건식 수소폭탄의 중량에 10% 정도 버퍼를 더한 것이었다.

소련의 코롤료프, 글루시코, 그리고 독일 출신의 그뢰트룹 등의 로켓 공학자들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며 엄청난 속도로 로켓 개발을 진행했다. 코롤료프와 글루시코는 이미 굴라그에 끌려가서 이빨을 뽑히고 턱뼈가 부러지고 심장병, 괴혈병 등에 걸렸다가 겨우 목숨을 건져 돌아온 바 있었고, 그뢰트룹 등 독일 출신 과학자들은 외딴 곳에 감금당한 채 로켓을 설계하고 있었다. 그들은 V2로부터 얻은 기술을 발전시켜 장거리 탄도 미사일 개발을 진행했는데 당시 대륙간 탄도 미사일 개발에 국운을 걸었던 소련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돈지랄을 해가며 매달 한대 꼴로 로켓을 발사대에 올려 문제가 발견되면 고치고 다시 쏘고 실패하면 또 고치고 또 발사하고를 반복하며 개발을 진행했고 1957년 마침내 세계 최초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인 R-7 발사에 성공했다.[37] R-7 개발 직후 소련은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 올려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서방 시민들은 소련의 기술력과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핵미사일의 공포에 경악했다.


2.5. NASA 재직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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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5월 19일 케네디 대통령과.

물론 미국도 소련이 독일 페네뮌데 로켓 연구 센터를 점령하여 V2 완제품과 부품, 생산 설비, 그리고 독일 로켓 기술자들을 확보하여 이를 철저히 분석하여 로켓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독일의 핵심 과학자들을 대부분 미국으로 데려왔기 때문에 소련의 로켓 개발 가능성을 과소평가하고 있었고, 공군력 증대에만 힘쓰고 있었다. 소련은 철처히 비밀리에 로켓 개발을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소련이 핵무기를 탑재한 대륙간 탄도 미사일 개발을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1950년 후반 미국에서는 육해공군이 독자적으로 로켓을 개발하고 있었다. 해군은 '뱅가드'라고 하는 로켓을, 공군은 '에어로비 하이', 육군은 '레드스톤'이라 불리던 로켓을 독자 개발하며 서로 자기들이 로켓 연구를 주도하겠다며 벼르고 있었다. 미국은 1955년, 다가오는 1957년 국제지구물리학관측년을 맞아 인공위성을 쏳아올리겠다고 공표했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육해공군이 각각 제출한 인공위성 발사 계획 제안서 중에서 해군의 뱅가드를 선택했다. 당시 해군의 힘이 그만큼 강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육군 우주개발부가 독일 투항자 출신(폰 브라운 팀)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독일 출신이 아닌 순수 미국인들에 의해 개발된 로켓을 발사시키고 싶어했던 이유가 작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해군의 뱅가드 계획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 1957년 4월 소련이 세계최초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인 R-7 로켓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R-7은 발사에는 성공했지만 실제로 대륙간을 날아가기에는 아직 턱없이 사거리가 부족한 상태이긴 했다. 어쨌거나 이러한 소련의 발표에 미국과 서방은 충격을 받았지만 동시에 소련의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다는 반응도 적지 않았고, 실제로도 소련은 이후에도 R-7 로켓을 안정화시키기 위한 추가적인 실험을 수차례 더 실시하고서야 초기에 계획했던 성능을 달성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소련이 미사일을 개발했다고 하니 여론이 들끓었지만, 뱅가드의 개발은 예정보다 지체되고 있었다. 이에 미국 정부는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뱅가드 개발 현황을 부풀려서 언론에 공표하기로 했다.

한편 소련은 미국이 1957년 연말에 발사가 예정된 뱅가드로 호들갑 떨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을 기회로 삼기로 했다. 소련은 선수를 치기로 했고, 이제 막 개발된 R-7 로켓을 이용하여 1957년 10월 4일,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전세계에 엄청난 충격과 파장을 주었다. 이를 스푸트니크 쇼크라고 부른다. 스푸트니크를 발사하는데 쓰인 R-7 로켓은 세계최초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이었고 미국을 포함한 서방 전역이 소련의 핵미사일 공격에 사실상 무방비로 노출되었음 뜻했다.

한편 그동안 달 탐험은 물론이고 어떻게 하면 화성에 갔다 올 수 있을지를 고민해왔지만 개발은 커녕 기껏해야 디즈니와 만든 다큐멘터리에서 자신의 구상한 방법을 모형으로 시뮬레이션하는 데 그치고 있었던 폰 브라운은 스푸트니크 1호의 성공을 보자 배가 아팠지만 한편으로 자신에게도 기회가 왔음을 직감했다. 그리하여 스푸트니크 사태 직후 그는 미국 국방부에 추력 6.7 MN을 가진 거대 로켓을 개발해야 한다는 계획안을 제출했다. 탐사선을 태양계 다른 곳으로 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무지 막지한 능력을 가진 로켓이다. 물론 폰 브라운이 펜타곤에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사람을 달까지 태워보낼 수 있는 로켓이었다.

폰 브라운의 계획에 대해 펜타곤에서는 갑론을박이 있었다. 일단 군사적으로는 불필요한 로켓이었다. 하지만 스푸트니크 쇼크 직후에 미국 전체가 패닉에 빠져 있었고 미군 수뇌부 역시 뭔가를 하긴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1958년 미 국방부는 브라운이 제안한 초대형 로켓 개발을 승인했다. 이것이 바로 새턴 로켓이었다. 다만 새턴이라는 이름이 정식으로 붙여진 것은 1959년으로, 주피터(= 목성) 로켓 보다 한 단계 나아간 로켓(새턴 = 토성)이라는 의미였다.

한편 소련은 스푸트니크 1호로 인한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소련은 불과 한달만인 11월 3일 개를 태운 스푸트니크 2호를 우주로 쏘아 올렸다. 충격 속에 미국은 허둥지둥 해군이 개발하던 뱅가드의 개발을 급히 마무리하여 발사했다. 스푸트니크 1호 발사 2개월 만인 1957년 12월 6일 미국은 요란을 떨며 뱅가드 발사 장면을 전세계에 생중계를 했으나, 발사 2초 만에 폭발하며 세계적으로 개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미국의 충격과 절망은 두 배로 커졌다. 미국과 경쟁하던 소련의 서기장인 니키타 흐루쇼프가 뱅가드(전위부대)가 아니라 리어가드(후위부대)라고 부르자며 조롱한 것은 물론이고 미국 내에서도 실패에 대한 비난이 상당했으며, 한 언론의 표제 제목은 "Oh, Flopnik"[38]

뱅가드가 실패하자 결국 폰 브라운에게 기회가 넘어왔다. 육군 병기창에 예비로 보관 중이던 주피터-C 로켓을 꺼내와 아이오와대 연구진이 급히 개발한 14kg짜리 자그마한 인공위성 익스플로러 1호를 실어서 1958년 1월 31일 발사하는데 성공했고, 이로써 미국은 간신히 체면치례했다. 또 익스플로러1호는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강력한 방사능 띠인 반 앨런대를 발견하여 과학 발전에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사실 미국이 진작에 폰 브라운팀에게 기회를 줬다면 폰 브라운팀은 인공위성을 쏘아올릴 수 있었다. 익스플로러 1호를 발사한 주피터-C 로켓은 인공위성을 위해 별도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 육군이 실전 배치하고 예비로 몇대 더 만들어 보관하고 있던 미사일을 꺼내와 그냥 쏘아올린 것이었다.

1958년 7월 미국은 그동안 육해공군과 NACA(국가 항공 자문위원회, National Advisory Committee for Aeronautics)[39] 등 여러 기관들이 따로따로 실행하던 우주 개발을 통합하여 NASA를 설립했다. 이 과정에도 미국 국방부의 삽질과 해군과 육군, 공군의 알력다툼이 관련되어 있다. 일단 능력을 우선으로 브라운을 총 책임자로 앉히게 되었지만 해군 쪽에서는 육군이 공을 독점하는 게 싫어 과학자들을 모아 NASA라는 기구로 모으는 것에 찬성했던 것이다. 그래서 원래 있었던 기관인 NACA에다가 육해공군의 로켓관련 부서를 통합하는 식으로 NASA의 출범이 이뤄졌다.

NASA의 핵심인 발사체(로켓) 개발 부문은 당연히 폰 브라운과 그의 팀이 맡게 되었다. 1959년 폰 브라운과 그의 팀의 NASA로 이관은 진작에 결정되었지만,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그건은 폰 브라운 팀이 겨우 펜타곤에서 허락받아 육군에서 개발하고 있던 새턴 로켓 개발이 NASA로 이관되면서 폐기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군, 공군의 로켓 개발 계획도 다 올스톱되었으니. 하지만 폰 브라운은 NASA 통합 과정에서 군 수뇌부 측에 자신의 꿈꿔온 거대 로켓, 즉 새턴 로켓 개발을 허가해 줘야 NASA에 합류하겠다고 버텼다. 결국 1년이 넘게 지리하게 설득과 협의 끝에 1960년 7월 폰 브라운은 NASA에서 새턴 로켓 개발을 허가받았고 그의 팀은 NASA로의 이적이 완료되었다. 브라운의 그의 팀이 일하는 헌츠빌의 레드스톤 병기창(Redstone Arsenal)의 육군 탄도 미사일 개발청은 NASA 산하 마셜 우주 비행 센터(Marshall Space Flight Center)로 개칭되었다. NASA가 설립되기 오래 전부터 이미 달 착륙은 물론이고 화성 착륙을 실현시키기 위해 수없이 많은 아이디어를 구상해왔던 폰 브라운은 마셜 우주 비행 센터가 출범하자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비록 폰 브라운은 명목상 NASA의 총책임자는 아니었고 이는 폰 브라운 자신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어차피 나치 독일에서도 명목상 그보다 상급자들이 있었다. 그보다 폰 브라운이 자신이 꿈꿔왔던 달 (그리고 화성) 여행을 실현하는 것과 그를 위한 거대 로켓을 개발할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래서 그는 초대형 로켓인 새턴 로켓의 개발 여부를 재승인받는데 사활을 걸었던 것.

어쨌든 폰 브라운은 NASA 전체의 명목상 총책임자는 아니었지만 여러 전문가들과 관련 서적이 한결같이 말하듯 그는 NASA에서 가장 절대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책임 범위는 발사체 개발이었지만, 실제 아폴로 계획의 모든 중요한 단계에서 사실상 최종 결정권자나 마찬가지 역할을 했다. NASA 초기의 총책임자였던 브레이너드 홈스는 폰 브라운의 권위를 상당히 존중하였으며, 모든 의사 결정 과정에서 폰 브라운의 동의와 지지를 얻어내는 것에 최대한 집중했다. 대부분의 중요한 회의는 마지막에 폰 브라운이 자신의 생각과 결정을 말하는 것으로 끝났다. 폰 브라운의 결정이 NASA의 결정이 되었고, 때문에 회의에서 폰 브라운은 실질적으로 NASA의 최종 의사 결정권자와 같은 역할을 했다. 이러한 판도는 홈스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마련해 준 것이기도 했다.[40] 하지만 홈스와 폰 브라운의 견해는 일치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폰 브라운은 많은 비용을 들여서라도 완벽하게 만들기를 원했지만 과학자이기 앞서 자신의 정치적인 위치를 중시했던 홈스는 목표를 달성하면서도 예산을 가능하면 줄여서 정치인들의 마음에 들길 원하고 있었다. 이렇게 지향점이 달랐지만 둘은 현명하게 타협하며 진행했다. 홈스는 본인이 총책임자이지만 폰 브라운의 동의가 없다면 사실상 아무것도 추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때문에 폰 브라운에게 오히려 더 큰 책임 범위, 즉 로켓 개발을 넘어서 아폴로 계획 전반에 그가 참여하도록 하면서 폰 브라운을 만족시켰고, 대신 세부적인 사항에서 보다 예산이 적게 드는 방법에 폰 브라운이 동의하도록 꾸준히 설득해 나갔다.

한편 우주개발 분야에서 소련과 경쟁에서 뒤쳐저 있던 미국은 소련을 추월하는 것이 시급했지만 미국 정치 지도자들은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NASA 설립 초창기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재선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고, 차기에는 누가 대통령이 될지 불확실했다. 그렇게 어영부영 1959년과 1960년이 흘러갔고, 1960년말 40대의 젊은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1년 1월 최연소로 미국 대통령이 된 케네디는 혈기 왕성했지만 아직은 경험이 부족하여 취임하자마자 쿠바 침공 사태의 실패를 겪는 등 좌충우돌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1961년 4월 12일 소련은 최초의 유인 유주선에 유리 가가린를 태워 올리는데 성공함으로써 전세계를 다시 한번 충격에 빠뜨렸다. 특히 미국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케네디 대통령은 우주 프로그램을 담당하던 린든 존슨 부통령과 긴급히 의논했고 소련을 확실히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부터 알아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때 미국에서 우주개발 계획을 어떻게 추진해야 할지에 대해 명확한 플랜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폰 브라운 뿐이었다. 당시 우주개발 계획을 주도하던 소련과 미국은 인공 위성 발사, 동물 발사, 유인 우주선 발사, 다인승 우주선 발사, 여성 우주인 발사, 우주 유영 등 그때그때 새로운 과제를 만들고 이를 실현하는 식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폰 브라운은 이런 작은 단계를 뛰어넘어 달에 갔다와야 한다는 명확한 큰 비전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위해 필요한 과정과 우주선의 스펙, 구조, 디자인 등도 명확히 계획하고 있었다.

유리 가가린 사태 직후 케네디 대통령과 회의를 가진 후 존슨 부통령은 NASA에 소련을 확실하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요청했고, 며칠 후인 4월 29일 폰 브라운은 존슨 부통령에게 자세한 편지를 썼다. 이 편지에서 브라운은 미국의 우주 개발의 최종 목표는 달에 갔다 오는 것이 되어야 하며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를 상세히 설명했다. 폰 브라운은 무인 탐사 등 다른 방법은 소련에게 확실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지만, 인간을 달에 보냈다가 귀환시키는 것은 미국이 확실히 승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형 로켓 개발에서 확실한 기술적 우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인 탐사가 아닌 유인 달탐사에서 미국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며, 1967년에서 68년 사이에 실현이 가능할 것이라고 답장했다. 사실 아폴로 11호는 69년 7월에 달에 갔다왔지만, 중간에 아폴로 1호 화재 사건으로 인한 우주선 방재시설 재설계로 인한 1년간의 계획 지연이 없었다면 실제로 1968년에 달에 갔다 올 수도 있었을 지도 모른다.

브라운의 답장을 받은 존슨 부통령과 케네디 대통령은 이에 대해 논의했고, 5월 5일 미국도 앨런 셰퍼드를 우주로 보내는데 성공했다. 이때 미국 국민들의 열렬한 반응을 확인한 케네디 대통령은 며칠 후 곧바로 헌츠빌의 마셜 우주비행 센터를 방문했다. 케네디 대통령의 방문을 맞아 폰 브라운은 마셜 우주 비행 센터에 새턴 및 아폴로 모형을 만들어 케네디 대통령 앞에서 멋진 프리젠테이션을 했고 현재까지 진행된 대형 로켓 엔진 즉 F-1 엔진의 개발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다. 헌츠빌을 방문하고 워싱턴으로 돌아간 케네디 대통령은 며칠 후인 1961년 5월 25일, 마침내 의회 연설에서 10년 안에 인간이 달에 갔다오겠다는 연설을 하여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로서 미국 우주 개발의 목표는 확정되었다.

달착륙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중요한 과제가 두 가지 있었다. 거대한 발사체를 개발하는 것, 달 착륙을 위한 랑데부 및 도킹 등 우주상의 비행 기술 습득이 그것이었다. 브라운은 이를 위해 투트랙 전략을 사용하였다. 발사체 개발과 비행 기술 습득을 위한 계획을 병행한 것이다. 그리하여 새턴 로켓 개발과 제미니 계획을 동시에 진행하였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과제였던 달착륙선과 아폴로 사령선 본체의 개발도 순차적으로 병행해 나가게 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는 3인의 우주인과 달착륙선을 달까지 보내기 위해 엄청난 추진력을 가진 로켓의 개발이 필요했다. 소련이 유인 달착륙에 실패한 것은 무엇보다도 거대 발사체의 개발에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케네디 대통령이 달에 갔다 오겠다고 연설하기 전 이미 폰 브라운은 미 국방부와 NASA에 여러가지 제안서를 제출하여 대형 발사체인 새턴 로켓을 개발해오고 있었지만 펜타곤과 NASA는 기껏해야 궤도용 로켓 및 장거리 대륙간 탄도 미사일 정도로만 한정지었고 그래서 개발되던 것이 F-1 엔진 두 개를 묶은 새턴 C-3나 새턴 1 로켓이었다.

그러다가 케네디 대통령이 60년대 안에 소련보다 먼저 유인 우주선을 달에 보냈다가 귀환시킨다는 목표를 발표하자 폰 브라운은 평생 꿈꿔오던 꿈을 실현시킬 기회를 얻게 되었다. 폰 브라운은 로켓 개발 관련 주요 진척 사항을 케네디 대통령에게 직접 서면으로 알렸다. 케네디 대통령과 존슨 부통령은 주기적으로 헌츠빌의 마셜 우주비행 센터를 방문하여 진척 상황을 살폈다.

폰 브라운은 케네디 대통령의 유인 달탐사 계획 발표가 있은 후 즉시 달까지 인간을 보낼 거대한 추력을 가진 로켓 계획을 시작했고, 1962년 1월 10일, NASA는 1단부에 F-1 엔진 5개를 클러스터링한 새턴 V 로켓 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사실 폰 브라운은 오래 전부터 화성 탐험을 꿈꿔왔고 이를 위해 혼자서 계속 거대 발사체의 개발에 대해 구상하고 있었다. 그덕분에 대형 로켓 엔진 개발 계획이 매우 빠르게 진행된 것이었다.

이후 1962년 9월 라이스대에서 케네디 대통령의 그 유명한 "go to the moon" 연설에서 케네디 대통령은 거대한 F-1 로켓 다섯개를 합친 새턴 로켓을 개발하여 60년대 안으로 달에 갔다 올 것이라고 직접 말했다. 실제로 케네디 대통령이 의회에서 처음 달에 갔다오겠다고 말한지 1년만에 폰 브라운은 새턴 V 로켓과 이를 위한 F-1 엔진 연구를 상당히 빠른 속도로 개발을 진행하고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의 라이스대 연설이 있은지 수 개월 후인 1963년는 이미 F-1 로켓 엔진의 테스트가 성공 단계에 이르렀다. 사실 폰 브라운팀이 개발한 F-1 엔진과 이를 탑재한 새턴 V 로켓이 인간을 달에 보내고도 남는 과할 정도의 추진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화성까지 보내고자 했던 폰 브라운의 기대가 반영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41] F-1 엔진이 성공적으로 개발되자 곧바로 F-1 엔진을 클러스터링한 새턴 V 로켓의 본격 개발에 착수했다. 그 사이에 제미니 계획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인간을 달로 보내기 위한 비행기술이 습득되었다. 또한 제미니 계획 중 닐 암스트롱이라는 뛰어난 파일럿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폴로 계획이 계속 순항한 것은 아니었다. 새로 설계된 아폴로 사령선 테스트 중 화재사고가 발생해 우주인 3명이 숨지는 참사가 일어났다. 순직한 우주인들을 기리기 위해 아폴로 1호로 명명된 이 화재 사건으로 아폴로 계획은 1년 이상 늦춰지는 차질을 빚게 되었다.

그 외에도 새턴 V 로켓 개발 마지막 단계에서 포고 현상[42]이 나타나 이를 잡기 위해 꽤나 애를 먹었다. 포고 현상은 예전부터 미국, 소련을 막론하고 로켓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지만 그동안 개발된 로켓들은 새턴에 비하면 매우 작은 로켓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전 로켓들과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로켓이었던 새턴 V 로켓에서 포고 문제는 꽤나 성가신 문제였다. 로켓을 재설계하는 것은 시간상 불가능했고, 제한된 조건에서 연료 비율, 압력, 분사량 등을 바꿔가면서 이를 해결해 보려고 했다. 결국 포고를 완전히 잡지는 못했지만 로켓을 운영하는데는 전혀 무리 없는 수준으로 낮추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위에 언급되었듯이 새턴 V 로켓이 달에 갔다오고도 남는 충분한 출력을 가지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엔진 출력의 여유가 충분했기 때문에 일부 엔진의 출력을 대폭 줄이는 대신 다른 엔진의 출력이나 연소 시간을 증가시켜서 포고를 줄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비행 계획이 계속 틀어지게 되었지만 임기응변에 강한 폰 브라운과 NASA가 이를 수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몇가지 장애물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대단한 추진력의 폰 브라운은 놀라운 임기 응변을 발휘했다. 아폴로 사령선 재설계 문제 외에도 착륙선 개발이 계획보다 약간 늦어지면서 일정의 차질이 생길 뻔했지만 폰 브라운은 사령선 없이 무인으로 새턴 V 로켓을 테스트한 후 다른 중간테스트를 생략하고 1968년 겨울 곧바로 인간을 달까지 선회시키는 아폴로 8호 계획을 과감하게 밀어부쳐 성공시켰다. 비록 당시에는 미친 짓이라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동안 지구궤도를 벗어나 본적이 없었던 인간이 처음으로 지구를 떠나 달을 돌고 오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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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7월 16일, 아폴로 11호 발사에 성공한 뒤 관제탑에서.
왼쪽 세 번째 사람부터 찰스 W. 매슈스, 베르너 폰 브라운(쌍안경을 목에 건 사람), 조지 뮐러, 새뮤얼 필립스 중장.#
이후 남은 계획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마침내 1969년 아폴로 11호를 달에 안착시켰다. 닐 암스트롱은 '한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 된' 발자국을 남겼다. 이 순간은 인류가 우주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었고, 미국으로서는 당시 최대의 정적, 소련의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로 인해 떨어진 자존심을 다시 세우게 되었다. 이 순간은 폰 브라운의 생애에서 최고의 순간이었다. 이를 통해 폰 브라운은 미국에서 각광을 받았다.[43]


2.6. 이후[편집]


폰 브라운의 궁극적인 꿈은 달 착륙을 넘어선 화성 착륙에 있었다. 폰 브라운이 달 착륙에 필요하고도 남는 거대 로켓 엔진인 F-1을 개발한 것도 궁극적으로는 화성에 갔다오기 위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폰 브라운은 달 착륙이 성공하면 그 다음 단계는 화성 착륙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처음부터 화성 착륙 계획을 염두에 두고 달 착륙 계획을 진행시켰다. 폰 브라운은 새턴 로켓을 개발하면서 동시에 이를 확대한 버전인 노바 로켓을 구상하고 있었다. 노바 로켓은 1단부에 F-1 엔진 여덟개를 달고 있는 3단 로켓으로 새턴 V 로켓과 전반적으로 유사한 구조지만 화성까지 사람을 보낼 수 있도록 출력을 대폭 강화한 것이었다.

1969년 7월 아폴로 11호가 달 착륙에 성공하자 전세계가 열광했고, 직후 폰 브라운은 미리 만들어 놓은 유인 화성 착륙 계획서를 언론에 배포했다. 이 계획서에서 폰 브라운은 1982년을 화성 착륙 시점으로 잡았다. 이와 관련된 1969년 8월 4일자 중앙일보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82년엔 화성착륙

하지만 대중들은 베트남 전쟁 종전 문제, 그리고 에드워드 케네디의 차파퀴딕 스캔들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미국의 경제는 베트남 전쟁을 위한 막대한 군비 지출로 하향세를 보였고, 소련과의 달착륙 경쟁에서 승리한 이후 대중과 정치권의 관심이 떨어지면서 우주 개발 예산은 크게 삭감되었다. 화성 유인탐사를 계획하고 있던 폰 브라운은 이것이 취소되어 매우 실망했다.

또 아폴로 프로그램 당시 NASA 총책임자였던 조지 로우(George Low)가 폰 브라운 박사가 너무 인기와 화제를 모으는 것을 질투하여 푸대접을 했다는 얘기가 있다. 실제로 폰 브라운은 조지 로우가 총책임자로 있던 NASA 본부의 형편없는 대우로 수치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는 결국 폰 브라운이 NASA를 떠나게 된 주 원인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훗날 매체를 통해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에서는 조지 로우를 비난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하지만 조지 로우 측은 이를 반박했다.

결국 1972년 폰 브라운은 나사를 떠나 항공기 관련 군수업체인 페어차일드사의 부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췌장암이 발견되어 1975년 은퇴했고 항암 치료를 받다가 1977년 65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3. 평가[편집]


고다드가 현대적인 로켓을 만들어내기는 했지만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던 로켓 과학을 브라운은 공학의 경지로 끌어올려 이를 실용화했으며 (본인이 원한건 아니었지만) 무기화하기까지 한 인물로서 이 분야에서 그가 미친 영향은 매우 거대하다.

미국과 소련의 첫 발사체들이 모두 그의 V2의 파생형 내지 역설계 물건인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중국도 1950년대 소련의 R-2를 수입해서 복제하면서 미사일 기술을 축적했는데, R-2도 V2에 연료용량을 확장시킨 업그레이드 버전일 뿐이니, 현재 우주 3강국의 로켓 모두가 그의 기술을 원천으로 하는 셈이다.

굉장히 상상력이 풍부해서 1930년대 이미 SDI, MD와 비슷한 우주무기를 구상했을 정도였다. 궤도에 거울을 장착한 여러 위성을 띄워놓고 이들이 반사시키는 태양광을 지면의 한 곳에 모아서 모두 불태워버리는 무기를 상상했다.

그런데 현대 독일에서는 평가가 상당히 나쁜 편이다. 아무래도 그가 나치에 적극 협력했고 친위대에 복무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며 V2 같은 흉악한 무기를 만들어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게 만든 장본인인 데다가, 그가 이룬 우주 개발과 달 착륙이라는 위대한 성취가 조국인 독일이 아닌 미국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여러모로 독일인들은 폰 브라운에 대해 복잡한 감정이 교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도 그에게 그리 관대한 편은 아니었다. 아폴로 계획을 총지휘한 관리자이자 천재 로켓 과학자였던 그가 아니었다면 달 경쟁에서 이기지 못 했을 것이라는 설이 정설이고,[44]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 공학자로 단연 첫 손에 꼽힐 만한 인물이지만, 타국 출신, 그것도 나치 출신 과학자라는 멍에는 결국 그를 위인의 반열에까지는 오르지 못하게 했다. 달 착륙, 미국 최초의 유인 우주 비행 등의 영예는 닐 암스트롱, 존 글렌과 같은 조종사들에게 돌아갔다. 현대 로켓의 모든 기본을 완성했음에도 나사 내의 여러 연구 센터들 가운데 고다드의 이름을 딴 센터가 있지만 브라운의 이름을 딴 연구 센터는 전무할 정도다.

그래도 그의 NASA 우주 로켓 연구소가 있었던 앨라배마주 헌츠빌에서는 여러 기관에서 그의 이름을 기리고 있다. 그가 설립을 도운 앨라바마대학 헌츠빌 캠퍼스(University of Alabama in Huntsville)의 리서치 빌딩 이름이 Von Braun Research Hall이라 명명되었다. 또 Von Braun Center라는 이름의 대형 콘서트장 및 실내체육관, 그의 박물관이 헌츠빌에 있다. 또 헌츠빌시의 로켓 우주 소사이티에는 Von Braun Astronomical Society이라는 이름이 붙었다.[45] 이 외에도 헌츠빌시 곳곳에서 폰 브라운을 기념하거나 찬사를 보내고 있다.

또 아폴로 11호 발사 성공 후 1970년 헌츠빌에 개장한 미국 우주 로켓 센터(U.S. Space & Rocket Center)는 미국의 로켓 및 우주 과학 성과에 대한 방대한 전시물이 있는데, 당연히 아폴로와 새턴 V 로켓이 중심이 되어 그 전신인 주피터, 레드스톤 로켓, 제미니, 머큐리 등이 전시되어 있어 과장해서 말하면 폰 브라운의 개인 전시관에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심지어 폰 브라운의 일생을 다룬 개인 전시관도 있다. 물론 80년대에 폰 브라운과는 무관한 우주왕복선 관련 전시물이 추가되기도 했다.

또 그의 모국인 독일에서도 도로명 등의 지명으로 그의 이름이 사용된 곳이 10여군데나 된다고 한다. 그의 모교인 베를린 공과대학교에서는 1963년 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1979년 바이에른주에 그의 이름을 딴 공과 김나지움이 생겼지만 본인의 나치 전력과 나치 문제에 민감한 나라인 만큼 몇차례 논란 끝에 결국 2014년 교명에서 폰 브라운의 이름을 제거했다.

공학계에서의 업적이 업적이니 만큼 평생 12개의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4. 관련 문서[편집]


  • 로버트 고다드: 폰 브라운의 액체 연료 로켓 연구에 큰 기반을 제공한 인물. 정작 모국에서는 찬밥 신세였지만...
  • 세르게이 코롤료프
  • V2: 나치 시절의 대표작.
  • 새턴 V 로켓: 폰 브라운 일생의 역작이라 할 수 있는, 인류를 달에 보낸 로켓.
  • 우주 경쟁
  • 발터 도른베르거: 독일 시절의 후견인인 엔지니어. 전범 혐의를 받고 영국에서 재판 후 수감되었다가 미국으로 넘어갔다.
  • 록 스미스: 플라네테스의 등장인물. 작중에서 개발하고 있는 우주선의 이름이 폰 브라운 호인 것도 그렇고, 자신의 꿈을 위해 다른 것을 눈감아 버리는 점 등[46], 폰 브라운에게서 어느 정도 모티브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 위르겐 폴러: 물리학자로서 페이퍼클립 작전 때문에 구사일생하고 아폴로 계획에 도움을 준 것을 보면 모티브인 것 같다.
  • 페이퍼클립 작전

[1] 'von Braun(폰 브라운)'이 성이다. von은 독일 귀족 가문의 성씨 앞에 붙는 전치사. von도 성에 포함되며, 퍼스트 네임을 제외하고 성만 부를 때 von을 함께 부르는 것이 원칙이다. 이는 독일 뿐만 아니라 유럽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여서 프랑스 귀족의 '드'(예: 샤를 드골), 스페인 귀족의 '데', 이탈리아 귀족의 '디' 등이 다 성에 포함한다. 폰 브라운도 서구에서는 von Braun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존 폰노이만도 비슷한 경우이다. 이때 von의 v는 문장 맨 앞에 올 때나 성을 모두 대문자로 쓸 때 외에는 소문자로 쓰는 것이 원칙이다. 베르너 폰 브라운은 미국에 귀화할 때 von Braun을 그대로 성씨로 사용했다. (귀화 증명서 링크)[2]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브라운'으로 표기해야 하지만 폰 브라운은 오랫동안 국내에서 '폰 브라운'으로 표기한 기간이 기므로 관용을 존중하여 폰 브라운으로 띄어 표기한다.[3]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V2가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영국을 폭격하는 무기로 사용된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말이다. 이상주의자였던 본인은 로켓으로 우주에 가는 것을 상상했지만 히틀러가 이것을 무기로 사용했다는 점을 안타까워했다.[4] 윗 말과 비슷하게 그의 연구 목적은 전쟁에 쓰일 미사일을 만드는 게 아니었다. 미사일을 만든 건 히틀러의 명령을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 그러나 그는 나치가 유대인 및 전쟁 포로들을 강제 동원하며 자신의 연구를 지원하는 것을 알고도 묵인했다.[5] 3형제 중 차남이었다. 형 지기스문트는 독일에 남아 외교관으로 활동했고, 동생 마그누스는 V2 개발에 관여했다가 둘째형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크라이슬러에서 일했다.[6] 사실 비지스크라는 이름이 원래 이름이고, 비르지츠라는 이름은 독일인들이 부르는 이름에 불과했다. 거기다가 비지스크는 폴란드인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던 도시여서 1918년 대폴란드 봉기 당시에 빠르게 폴란드 봉기군들이 장악한 도시들 중 하나였기 때문에 뭐가 되든 간에 폴란드에 할양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거기다가 1772년 제1차 폴란드 분할 이전까지 역사적으로 독일과 관련이 없었던 폴란드의 영토이기도 했고.[7] 꽤 비싼 물건이지만 건물을 직접 짓겠다는 브라운의 열의에 설득되어 구매했다.[8] 독일에서 최초로 로켓을 연구하고 이의 가능성을 대중서적으로 펴내 독일에 로켓 붐을 일으킨 사람이다. 그의 활약 덕분에 독일에는 로켓덕후들이 엄청나게 생겨났다.[9] 아인슈타인도 여기 출신이다.[10] 사실상 이 두 사람의 머릿속에서 NASA 유인 우주 프로그램의 큰 틀이 잡힌 셈이다.[11] 여기에 대해서 고다드는 노획된 V2를 면밀히 분석한 끝에 자신의 기술을 훔쳤다고 판단하였으며 브라운도 고다드의 로켓이 자신의 로켓 개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건 인정했다.[12] 그와 우주비행 동아리를 섭외하기 위해 육군 로켓개발단장이자 베를린 대학 교수(발터 도른베르거를 지도하기도 한)였던 카를 베커 대령(1940년 사망)이 박사학위를 거하게 쐈다.[13] V2(A4)의 축소형 시험모델[14] 이때 브라운은 로켓 역사상 처음으로 전자 두뇌를 로켓에 이식하는 데에 성공한다. 에니악이 완성된 것이 1946년이니 그거보다 훨씬 원시적인 물건이었지만 정확성을 높이기에는 충분했다. 참고로 V1, V2의 V는 독일어로 보복병기(Vergeltungswaffe)의 약자로, 히틀러가 선전선동 목적으로 붙인 이름이며 V1의 정식명칭은 피젤러(Fieseler) Fi 103이고 V2의 정식명칭은 A4.[15] 유도장치 엔지니어로, 전후 개발자급 엔지니어들 중에선 드물게 소련에 항복한다.[16] 굳이 합리적으로 이유를 붙이자면 '로켓을 발사하는 척 하면서 폭탄을 터트린다'라고 볼 수 있겠으나…대개 이런 시기엔 당연히 이유 따위 필요없고 반역죄 하나면 숙청이 가능했다. 공산권 국가에서 허구한 날 반동분자(=과거로 회귀하려는 세력=공산정권에 반대) 소리 하는 이유가 바로 이거다.[17] 당시 힘러도 일종의 위협을 가한 것일 뿐 브라운을 죽이려는 생각까지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때문에 브라운이 예전부터 몸 담고 있던 우주비행협회는 이 때문에 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브라운은 이를 계기로 더욱 로켓 개발에 몰두했다.[18]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제2벨라루스 전선군이었다.[19] 다른 인물들은 발터 도른베르거,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일원) 등이다.[20] 1928년생 미국 유대인 가수·음악가이다. 폰 브라운은 이 노래를 듣고 기분 나빠하긴 했지만, 고소라든지 다른 것으로 나서지 않았다.[21] 소령[22] 사실 노동력이 심하게 부족한 상황이 아니라면 V2와 같은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정밀 무기를 만드는데 일반적인 노동자가 아닌 노예를 선호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폰 브라운이 노동자들에게 자기 돈으로 임금을 주어야 하는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23] 페네뮌데가 영국군의 공습으로 개발살나고 생산시설이 여러 곳으로 떠돌던, 그러면서도 히틀러가 뒤늦게 V2의 가치를 인정하고 닥달을 할 적에는 폰 브라운도 지금 이런 거 만들어봐야 의미없다고 여겼다고.[24] 기 모랑은 그 채찍질이 폰 브라운 자신의 나치즘 판타지DEEP♂DARK♂FANTASIES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그가 폰 브라운의 심리상태를 통찰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25] 실제로 도른베르거는 폰 브라운을 대신하여 V2에 관심을 갖게 된 아돌프 히틀러와도 자주 만나며 이런저런 보고를 하고 그 히틀러에게 감사편지를 받기도 했다.[26] 도른베르거는 엔지니어라 해도 엄연히 국방군 소장 신분이었기 때문에 강제노역 문제를 결국 피해가지 못했고, 항복 후 곧장 미국으로 간 폰 브라운과 달리 영국에서 2년간 복역한 뒤 미국으로 간다. 캠러는 종전 직전 실종되었다.[27] 그 이전에도 폰 브라운은 체신청 등에 접근해서 로켓 연구비를 지원받으려고 시도한 일이 있지만, 이런 다른 기관들은 제대로 로켓 연구를 지원할 수 있을 정도의 예산이 없었다. 물론 편지를 로켓으로 쏴서 다른 지역으로 신속하게 배달한다는 아이디어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꼭 예산이 없어서만은 아니겠지만.[28] 정작 미국은 로버트 고다드가 로켓을 이미 개발했는데 별 신경도 안 쓰다가 V2를 보고 그제서야 로켓의 가치를 깨달았다. 브라운의 V2는 고다드의 로켓에게 큰 영감을 얻어 설계되었다. 물론 고다드의 로켓은 기술적으로 매우 조잡한 것이었다. V2는 고다드의 로켓과는 차원이 다른 훨씬 정교한 제어 기술이 적용되어 있었고, 성능 또한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었다.[29] 1943년 영국군이 페네뮌데를 폭격한 후, V2의 제조공장은 지하화되어 노르트하우젠에에 세워졌는데(이 시기부터 강제노동도 본격화), 이 공장은 소련군이 이미 진주한 지역이어서 미군에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이곳에 남아 있던 공작기계와 반제품들을 모두 소련군이 가져간 탓에 폰 브라운은 미국으로 건너간 후 초기 개발에 어려움을 겪었다. 생산에 필요한 기계 중 미국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던지라.[30] 히틀러에게 절대 충성하는 광신적인 친위대원들은 전쟁 말기 연합군에 유용하게 쓰일 거라고 예상되는 지식인과 기술인력들을 무차별 처형했다. 폰 브라운과 그 동료 과학자들은 처형 직전에 탈출했으며, (친위대원들은 미군에게 걸리면 사형감이었으니) 그들에게 사복을 주고 서로 건드리지 않기로 타협을 했다고도 한다.[31] 사실 미국에 투항한 이유는 영국보다 더욱 좋은 대접(연봉)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다고 훗날 밝혔다. 당시 미국은 소련과 함께 양대 강대국으로 떠오르고 있던 시절이기 때문에 이들 중 미국을 선택했다.[32] 도른베르거와 폰 브라운이 넘긴 자료는 이외에도 각종 자료, 영상 필름, 부분품 등 화물열차로 341칸 분량이나 되었다. 이것들은 열차편으로 벨기에의 앤트워프 항구로 운반되어 배에 실어 미국으로 가져갔다.[33] 당시 육군항공대 소속으로 칼텍에 설치되어 있던 제트추진연구소(JPL)에서 망명한 유대계 헝가리인 과학자 테오도르 폰카르만의 주도하게 연구를 하고 있었고, 이렇게 해서 나온 게 프라이빗(이등병)-코퍼럴(상등병) 지대지미사일이다. 그러다가 독일기술이 도입되자 미국에서 자체 연구하던 것은 모두 엎어졌다. 이 제트 추진 연구소는 현재 나사 소속으로 여러 우주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34] 뱅가드와 같은 토종 미국산 로켓은 결국 백주에 실패했다. 다만 이렇게 미국 또는 소련이 독자적으로 로켓을 연구하면서 양성된 인재들은 독일의 기술력과 합쳐져서 후에 우주 기술의 약진을 이끈다.[35] 그래서 폰 브라운을 포함한 독일인 기술자들은 저 말을 듣고는 소련의 로켓 기술을 얕보게 되었지만, 이후 스푸트니크로 뒤통수를 맞게 된다.[36] 현 러시아 에네르기아의 전신[37] R-7은 V2보다 복잡한 구조일 뿐더러 코롤료프 크로스라고 부르는 엔진 클러스터링 기술같은 코롤료프의 독창성도 많이 들어간 것으로서, 단순히 V2를 베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코롤료프 크로스가 굳이 필요했는지에 대해서는 소련의 로켓 개발팀에서도 많은 논쟁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코롤료프의 라이벌로 유명한 발레리 글루시코가 이에 반대하며 항의했었다. 이 크로스 구조로 인해 기계적 구조와 배관, 그리고 제어 장치 설계가 훨씬 복잡해졌고 이로 인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 반론이었다. 실제로 R-7 로켓은 수 많은 발사 실패와 시행 착오 후에 정상 운용을 할 수 있었다. 결국 R-7이 성공하긴 했지만 크로스 구조가 아닌 다단의 심플한 구조로 설계했다면 초기의 시행 착오를 훨씬 줄일 수 있었다는 것이 글루시코 등의 의견이었다. 어쨌거나 최종 결정권자는 코롤료프였기에 반론은 묵살되었다.[38] flop(자빠지다)+nik(스푸트니크의 nik)를 합성하여 만든 말로, 2초 만에 주저 앉은 자국의 로켓을 조소한 것.[39] 1908년 설립되어 주로 국가적으로 항공기술을 연구하는 기관이었다. 그래서 미국의 항공산업이 꼭 민간업체가 이끈 것은 아니고 초기에는 국가적인 지원이 있었다.[40] 하지만 이후 총책임자인 조지 로우는 폰 브라운이 너무 인기를 얻는 것을 시기하여 그를 푸대접했고, 폰 브라운은 훗날 조지 로우에게 큰 모욕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것이 나중에 폰 브라운이 NASA를 떠나게 된 이유라고 언급되고 있다.[41] 폰 브라운이 아폴로 계획 초기 단계에서 제안한 새턴 로켓의 제안서에는 F-1 엔진을 5개 결합한 새턴 V(당시 새턴 C5) 이외에 F-5 엔진을 8개 결합한 새턴 C-8, 노바 로켓도 제안 되었다.[42] 포고 현상은 연소불안정의 한 종류로, 로켓의 가속운동이 추진제 공급에 주기적인 영향을 주고 엔진 추력 역시 주기적으로 변하며, 때때로 이로 인한 진동이 로켓의 구조적 진동과 맞물려 공진, 로켓의 축을 따라 형성되는 반복적인 진동[43] 이에 반해 소련에서 폰 브라운의 역할을 하던 세르게이 코롤료프는 존재 자체가 국가비밀이었고, 1967년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대중에 알려졌다. 소련은 소유즈 우주선을 달까지 보낼 수 있는 출력을 가진 대형로켓 N-1을 개발했으나 발사 테스트에서 연속적으로 폭발하면서 계속 계획이 지연(이 중에는 유인 우주 로켓을 발사하는 테스트도 포함)되었고 그 사이에 미국이 아폴로 11호 달착륙을 성공시키자 완전히 포기했다. 사실 소련의 우주개발은 세르게이 코롤료프가 죽고 난 이후 계속 지지부진했다.[44] 아폴로 계획 총책임자 새뮤얼 필립스 중장은 그가 아니었다면 자기 생애에 미국인이 달에 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45] 소련의 라이벌, 세르게이 코롤료프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고 모스크바 주의 코롤료프 시, 에네르기아 사의 풀네임 등을 통해 여전히 그의 이름이 기념되고 있기 때문에 비교되는 것도 있다. 물론 코롤료프는 폰 브라운과 달리 평생 소련에 헌신했던 소련 출신의 과학자니까 폰 브라운처럼 업적에 비해 푸대접받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만.[46] 물론 록 스미스의 경우는 조금 더 사이코패스 내지는 소시오패스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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