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학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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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여담
4.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군인, 정치가. 사회안전상, 인민보안상을 십여년간 역임한 김정일의 심복이다.

2. 생애[편집]


1918년 10월 17일 평안남도 평원에서 출생했다. 어릴 적에 빨치산 부대에 입단하여 소년 전령으로 활동했다고 하며 그 유명한 고난의 행군에도 참여했다. 해방 후 소련 유학을 떠났으며 그 중간에 중앙당 정치학교와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원을 수료했다고도 알려졌다. 1948년 중앙호위대원을 거쳐 1950년 6월 인민군 46연대장으로 임명되어 6.25 전쟁에 참전했다. 1951년에 8사단 81연대장에 임명되었다. 종전 후인 1958년 5월 소장으로 진급, 3사단장에 임명되었으며 1960년에 군사정전위 위원을 지냈다. 1961년 조선로동당 제4차 당대회가 열리자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내각사무국 호위처 처장을 거쳐 1962년 5월 중장으로 진급, 민족보위성 정치안전국 국장을 지냈다.

1967년 12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법제위원을 겸했으며 1968년에 안전호위처 사령관, 1970년에 사회안전성 부상에 임명되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재선되었다. 사회안전부로 개명된 사회안전부 부부장으로 이동했으며 인민경비대 사령관(1973)을 거쳐 1978년에 인민무력부 부부장을 지냈다. 이렇듯 승진가도를 밟아온 그는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 겸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81년에 상장, 1985년 대장으로 진급했다. 1982년 3월, 전창철 장의위원,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 1984년 3월에는 김일 장의위원, 4월에 오백룡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2년 4월 2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133명의 다른 북한 엘리트들과 함께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수훈받았다.

1985년 4월 13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오극렬, 김두남, 리을설, 주도일, 김봉률, 김광진, 리두익과 함께 대장으로 진급, 10월 1일, 정치국-중앙인민위원회 연합회의에서 알코올 중독으로 경질된 리철봉의 뒤를 이어 사회안전부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1985년 시점에서 정치국 위원에서 해임된 것으로 추정된다. 1984년 오백룡 장의위원 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정치국 위원 서열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1986년 4월 김좌혁 장의위원 때는 정치국 위원 해임이 확인된다. 통일부 자료에는 1985년 10월에 정치국 위원에서 해임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1985년에 작성된 소련 외교문서에는 백학림이 사회안전부장에 임명되었을 때 현직 정치국 위원이라고 언급되었기 때문에 아마도 1986년 2월, 6기 11중전회에서 정치국 위원에서 해임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해 보인다.

1986년 4월 김좌혁 장의위원, 1987년 8월, 리진수박영순 장의위원,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8년 10월 13일,. 칠순기념 공화국영웅 칭호, 금별메달,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1992년 4월 20일, 당중앙위원회, 당중앙군사위원회, 국방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의 공동 정령에 따라 최광, 리을설, 주도일, 최인덕, 리두익, 김봉률, 김광진과 함께 조선인민군 차수로 진급, 1992년 4월 23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오진우, 최광, 김철만, 전문섭, 리을설, 주도일, 리두익, 최인덕, 황순희, 태병렬, 김룡연, 최용진, 리종산과 함께 공화국 2중영웅이 되었다. 최고인민회의 법제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으며 1992년 7월, 방학세 장의위원,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 1994년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5년 7월. 김봉률 장의위원, 1997년 2월 최광김광진 장의위원을 지냈다. 북한의 선전에 다르면 김일성 사후 사회안전부 건물에 김일성 동상을 설치하는 사업을 벌이며 다 늙어서도 김정일에게 계속 아부했는데, 경례도 잘 안될 정도로 늙은 백학림이 직접 영접보고를 하겠다고 한참이나 연습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고를 치기도 했는데 1989년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기념으로 평양시 서성구역 연못동에 사회안전부 극장을 짓게 되었는데, 김정일이 그 건물에 만수대예술단을 입주시켰다. 이에 샘이 난 백학림이 김일성의 만수대예술단 현지지도 때 극장을 뺏겼다고 징징대다가 옆에 있던 김정일이 "부장영감, 의견이 있으면 내게 말했어야지. 수령님께 먼저 말을 하면 어떻게 하는가?"라고 고래고래 화를 낸 다음에 그 자리에서 만수대예술단을 극장에서 빼버렸다고 한다.

어쨌거나 후빨이 헛되지 않아 1997년 4월 13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리을설과 함께 로력영웅 칭호,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1998년 9월, 10기 최고인민회의가 열리면서 김정일의 권력 중추인 국방위원회에 들어갔다. 김정일 시대의 주요 대숙청인 심화조 사건 때 이를 주도한 사회안전부장이었지만 이미 다 늙어서 정치에 거의 손을 대지 않는 인물이었고 그 휘하의 채문덕 등이 설치는 상황이라서 이후 채문덕 등이 숙청당할 때도 별 일은 없었다. 1998년 12월, 전문섭 장의위원, 1999년 9월, 리종옥 장의위원을 지냈다. 2000년 4월, 최고인민회의 10기 3차 회의에서 하도 악명을 뒤집어 쓴 사회안전부가 인민보안성으로 개편되면서 인민보안상에 유임되었다. 하지만 고령의 나이가 문제가 되어 2003년 7월 1일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최룡수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했다. 2003년 8월, 최고인민회의 11기 대의원에는 재선되었으나 국방위원회에서는 은퇴하게 된다. 사망 시점에는 중앙위원회 위원,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직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2005년 러시아 연방으로부터 대조국전쟁 승리 60주년 메달을 받는 등 최후의 영광을 누리고 2006년 10월 5일에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중앙위원회와 중앙군사위원회가 연명으로 그의 부고를 알렸으며 조선중앙통신은 그를 당의 충직한 혁명전사로 일컬으며 "오랜기간 인민군대와 인민보안기관의 책임적인 직책에서 당의 선군혁명영도를 받들고 사회주의 제도를 수호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했다"라고 칭송했다. 하지만 명색에 항일 빨치산 1세대인데 장의위원회 구성도 안되는 등 뭔가 좀 기묘한 대접을 받다가 갔다. 심화조 사건이 문제가 아닐까 추정된다. 어쨌거나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안치되었다.

그러다가 나름 재평가가 됐는지 김정은 시대에 들어선 백학림의 생애를 기리는 소개편집물들이 제작되어 배포되기 시작했다.

3. 여담[편집]


백학림의 아내 진영화 역시 6.25 전쟁에 참전한 노병으로 김정은 시대에도 살아있어 북한 선전물에 출연하고 있다.

고영환의 말에 따르면 사회안전부장 시절에 이미 노망이 들어서 같은 말 하고 또 하고 몇분 간단히 말한다고 해놓고 몇시간을 헛소리를 하는 등 맛이 간 상태였다고 한다.

4. 참고문헌[편집]


  • 통일부 정보분석국, 북한의 주요인물 2005(서울: 통일부,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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