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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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가마쿠라 시대 초기의 공가이자 당대 일본 최고의 시인인 후지와라노 사다이에가 우쓰노미야 요리쓰나의 의뢰로 오구라의 산장[4] 을 장식하기 위해 아스카 시대 말부터 가마쿠라 시대 초까지 100명의 시인들의 와카를 한 사람에 한 수씩 선별해놓은 것이다. 일명 '오구라 백인일수(小倉百人一首)'라고도 한다.
이 백인일수를 카드에 적어서 하는 카루타가 일본에서 굉장히 유명한 놀이이다.
2. 역사[편집]
백인일수는 와카의 입구이자 도달점이기도 하다.
덴지 천황에서 준토쿠 천황에 이르는 약 550년 동안에 황족·귀족이나 시인들 사이에서 읊어진 와카에서 각각의 뛰어난 와카와 대표적인 와카 한 수를 선별해 연대를 따라 모두 백 명의 와카를 채택한 것이다. 보통 백인일수를 선별한 해를 1235년으로 추정한다. 후지와라노 사다이에가 74세의 나이의 자신의 일기(명월기[5] , 名月記)에 절친이자 시인인 우쓰노미야 요리쓰나(宇都宮頼綱)로부터 교토 사가노[6] 에 있는 별장인 오구라 산장의 창호색지에 넣기 위해 와카 백개를 선정하도록 부탁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사다이에는 그의 주군인 고토바 천황의 유배 이후에, 조용히 과거의 문학과 시를 연구하면서 지냈다. 사다이에는 헤이안 시대의 겐지모노가타리의 교정을 하고 있었으며, 마쿠라노소시 3권본의 서사에 관여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7] 백인일수가 성립한 당시에는 '백인일수'라는 호칭으로 불리지 않았으며, '오구라산장색지와카(小倉山荘色紙和歌)', '사가산장색지와카(嵯峨山荘色紙和歌)' 등으로 칭해졌다. 후지와라 사다이에는 이전에 '백인수가(百人秀歌)'라는 가집도 제작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백인일수의 초고본이자 근원이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백인수가'와 '백인일수'는 97수가 일치한다.[8]
백인일수의 와카가 뽑힌 기준으로는 당대 최고의 와카들도 있지만, 후지와라노 사다이에의 취향이 반영된 와카도 있으며, 혹은 칙찬집이 아닌 만요슈가 선정 대상에서 빠져 있기도 해 여기서 선택된 와카가 그 시인의 대표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다만,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사다이에가 선정한 작품들이 굉장히 탁월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만요슈 이래의 슈카(秀歌, 뛰어난 와카)를 정확하게 이끌어 내어, 선정한것은 후지와라노 사다이에의 역량이라고 볼 수 있다.
'오구라 백인일수'라는 명칭은 후지와라노 사다이에가 교토 사가노 오구라산의 별장에서 병풍에 옮겨 적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리고 있지만, 오구라 백인일수는 모두 '고금집'이나 '신고금집' 등의 '칙찬 와카집(勅撰和歌集)'으로 구성되어 있다. '칙찬 와카집'이란, 당시의 천황의 명으로 편찬된 와카집으로, 전부 21개의 와카집이 있지만, '오구라 백인일수'는, 다음의 10개의 '칙찬 와카집'으로부터, 와카가 선택되었다.
- 고금집(古今集) 24수
- 후찬집(後撰集) 7수
- 습유집 (拾遺集) 11수
- 후습유집 (後拾遺集) 14수
- 금엽집(金葉集) 5수
- 시화집(詩花集) 5수
- 천재집(千載集) 14수
- 신고금집(新古今集) 14수
- 신칙찬집(新勅撰集) 4수
- 속후칙찬집(続後勅撰集) 2수
백인일수 중에는 사랑의 와카[9] 가 43수로 가장 많다. 계절의 노래로는 가을의 와카가 가장 많이 꼽히고 있다.(봄 6수·여름 4수·가을 16수·겨울 6수) 또 아름다운 노래, 정취적인 노래, 인간적인 노래 등이 선정되었다. 이것은 칙찬집의 편성방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보여준 예이다. 다만, 칙찬집과 달리 작품의 균형을 고려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사다이에가 좋아하는 와카가 많이 뽑혔다. 또한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던 후지와라노 사다이에의 명성에 힘입어, 여러 주석서 및 해설서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선정된 작가는 남자 79명(승려 13명 포함), 여자 21명으로 당대 여류문학의 전성시대를 반영하는 면도 있다. 천황과 친왕의 선정에 관해서는, 불우한 생애를 보낸 인물이 많다. 또한 거의 시대순으로 배열된 와카들은 당대 와카들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으며, 당시 일본인들의 자연이나 계절에 대한 감각이나 미의식의 원형, 섬세하고 정교한 표현기교와 언어감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사다이에의 시론에 따라 요염한 시풍이 중시되고, 유려한 시조의 시문이 다수 선택되었다. 또한 권두와 권말에는 덴지 천황, 지토 천황 부녀와 고토바 천황와 준토쿠 천황 부자의 수미상관이 이루어져 있다.
승려이자 시인이었던 돈아(1289~1372년)의 저서 '정아초(井蛙抄)'의 발문에 있는 서술이 '백인일수'에 대해 기술한 자료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자료에는 사다이에가 저술한 가론서 등의 소개에 이어서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또한 사가야마장의 장지문에 상고 이래의 가선 백 명의 가짜 그림을 그려 넣고 각각 한 수씩의 노래를 곁들여 부른 것이다……
여기서 '사가야마장'이란 사다이에가 사가노에 자리 잡은 산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장지문'은 현대의 후스마이며 '가짜그림'은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 유행한 사실적 초상화를 가리키는데, 이른바 가선화라고 불리며 여기에 그려진 시인 한사람 한사람에 그림을 와카의 첨부한 것을 미닫이에 붙인것이다. 사다이에가 작성할 당시에는 그림이 없었지만, 후대에는 그림과 함께 시를 적어둔 백인일수가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시인의 그림과 함께 시를 적어두는 것은 이미 헤이안 시대에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36가선그림(三十六歌仙)'이다. 당시에 이 가선 그림과 시인의 와카가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이런 사회적 배경이 백인일수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또 '백명의'라고 적혀 있기 때문에, '백인일수'의 탄생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기술된 것이다. 현재 알려진 '백인일수' 자료 중에서 가장 오래된 시인과 와카를 열거한 책은 위에 말한 돈아의 증손인 요효(堯孝)가 1445년에 서사한 것인데, 이에 앞서 1406년에 후지와라 미츠모토(藤原満基)라는 인물이 베켜서 썼다는 백인일수의 주석서가 있다. 이 책의 기술에 대해서는 의문시하는 의견도 있지만, 사실이라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백인일수 관련 책이 된다. '백인일수'와 그 별명인 '오구라산장색지와카(山荘色紙和歌)'라는 명칭이 보이는 것으로는 가장 빠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책이 주석서라는 점에서 백인일수는 그 이전에 널리 읽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인일수와 관련된 문화 중에서 가장 유명한것은 역시 '카루타'다. 카루타의 시작은 헤이안 시대에 놀이 '카이아와세(貝合わせ)'라고 알려져 있다. '카이아와세'는 두 마리의 조개를 둘로 나누어 그 한 쪽을 찾는 단순한 놀이지만, 이윽고 궁중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조개에 노래나 그림을 그리며 놀게 된다. 이것은 '우타아이'라고 해서 여러 조개를 곁들여 와카를 짓고 그 와카를 서로 경쟁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와 비슷한 그림을 맞추는 '가이오이(貝おおい)'라는 놀이가 발전하여 '가이(歌貝)'로 발전하게 된다. '가이'에서는 조개의 형상을 한 패가 윗구, 아랫구 모두 100장이 있는데, 현재의 '카루타 잡기'와 같이 아랫구 패를 늘어놓고 윗구를 읊어서 아랫구를 짓는다는 것이다.
역사가 계속되면서 센고쿠 시대 무렵이 되면 백인일수로 '카루타'로 놀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궁중이라든가 다이묘의 부인들 사이에서 행해져 카루타가 귀족들의 연간 행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 시대의 '카루타'는 아직 서민들 사이에서는 생소한 것이었지만, 에도 시대에 들어와서 목판화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카루타'를 도입함으로써 서민들 사이에 서서히 확산되어 갔다. 이후 마침내 '민용 오구라 백인일수(民用小倉百人一首)' 등이 출판되어 겐로쿠 시대부터 일반 서민들 사이에도 확산되어 '와카 카루타(和歌かるた)'라고 하면 '오구라 백인일수'를 가리키게 되어 서민에게도 친숙하게 되었다.
이처럼 백인일수 카루타는 17세기 전반에 상류 무가사회에서 여성들이 즐기던 놀이를 기초로 교토에서 고안되어 겐로쿠 이후에 유희(遊戯)로 전국에 널리 보급되었다. 이 놀이에 동참하면서 서민들은 왕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당시 일본의 문화가 무엇인지 배우게 되었다. 또한 에도 시대의 교육에서는 서당의 선생이 백인일수의 와카를 읊어보거나 써 보여 주고 글씨 쓰기를 익힐 때의 교재로 삼기도 했다. 고전 만담인 '치하야부루(千早振る)', '스토쿠인(崇徳院)' 등을 보면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도 내용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패에 그려진 천황, 황족, 공경, 시인들의 그림 모습을 보면 자신이 어떤 문화 전통의 사회에서 태어나 자랐는지를 비주얼로도 쉽게 알 수 있게 되었다.
백인일수는 도쿠가와 시대 초기부터 최근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본 시의 기초지식이 되었다.
이렇게 백인일수는 표준어도 TV나 라디오도 없는 시대에 문예 작품을 통해 언어나 문화를 온 일본인들에게 공유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이 백인일수의 역사는 매우 오래 되었지만, '오구라 백인일수'가 설날의 전통놀이로 각 가정에서도 행해지게 된 것은 훨씬 후인 안세이(1855년~1860년) 때부터라고 한다.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서는 메이지 정부가 도덕 교육의 수단으로서 '이로하 카로타(いろはかるた)'를 중시한 적도 있어, 백인일수 카로타의 유행에는 한때 하락세가 생겼던 시기도 있다. 그러나 메이지 30년대(1897년 ~ 1906년)에 쿠로이와 루이코(黒岩涙香)가 부흥시킨[11] 경기 카루타가 시작되자 다시 인기를 끌게 되어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다.[12]
백인일수는 정월 이외에도 간단하게 놀 수 있는 실내 게임으로서 사랑받고 있으며, 일본의 고전이나 역사의 풍경을 배우는 데에도 익숙하고, 친밀한 자료가 되고 있다. 백인일수의 와카는 대부분 만들어진 시기가 천 년이 넘은 작품들이라, 지금은 쓰지 않는 고어나 어려운 궁중 표현이 많아 현대역이 매끄럽지 않다. 하지만 많은 연구를 통해 대부분 현대역이 완료된 상태다. 향가와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하면 쉽다.[13] 현재에도 백인일수는 일본인들에게 가장 인지도 있고, 유명한 고전 작품 중 하나다. 700종이나 되는 수많은 주석서와 교양용 도서가 계속 출판되고 있고, 학교 교육에서는 고전입문서로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일본의 중학교, 고등학교에서는 고전 문학의 입문으로 학생들에게 백인일수를 소개하고, 문법의 적당한 입문서로서 교과서[14] 에서도 볼 수 있으며, 이를 암기하고 테스트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15] 서예에서도 백인일수의 와카는 초서체(草仮名)의 연습 과제로서 사용된다. 백인일수는 시인 한 명에 한 수의 노래를 매치한 것으로 중세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교양 교육의 입문 텍스트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일본의 시가문학사를 알아가는 수단이자 또는 정월의 놀이로서, 더 나아가서는 카루타 경기대회로서 자리잡고 있다.
또한 현재에도 백인일수에 대한 연구가 다방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노래 해석과 시어에 대한 내용 및 백인일수의 판본 연구 그리고 편자의 의식과 노래 선별에 관한 연구가 집중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또한 오구라 백인일수를 단순한 슈카센(秀歌撰)으로서 보지 않고, 후지와라노 사다이에가 "어떤 의미"를 숨기기 위해서 선택한 가집이라고 생각하여, 자연 과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해 오구라 백인일수의 '수수께끼'를 풀려고 하는 학자도 있으며, 한수마다 면밀하게 재검토를 해 다른 해석을 하며 새로운 백인일수상을 그려내는 학자도 있다.
3. 백인일수 목록[편집]
4. 여담[편집]
- 백인수(百人首)라고 부르기도 한다.
- 오늘날 일본에서 '백인일수'라 하면 '오구라 백인일수'를 가리키는데, 후지와라노 사다이에가 엮은 백인일수 이후 많은 백인일수가 생겨났다. 1483년 당시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사가 선정한 '신백인일수(新百人一首)' 외에도 1800년경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후찬백인일수(後撰百人一首)', 무사들 만의 와카를 선택한 '무거백인일수(武家百人一首)', 여성만의 '여백인일수(女百人一首)' 등도 있고, 에도 시대에는 '조오시백수(蔵笥百首)'라는 반교육적인 것도 만들어졌다. 다만, 오구라 백인일수의 유명세에 묻혀서 인지도가 없다.
- 오구라 백인일수가 완성된 것은 1235년 5월 27일로 추정하는데, 오늘날 일본에서 5월 27일은 '백인일수의 날(百人一首の日)'로 지정되어 있다.
- 2021년 일본에서 '백인일수 와카 인기 투표'를 했다. 1위는 아리와라노 나리히라의 시, 2위는 야마베노 아카히토의 시, 3위는 오노노 코마치의 시, 4위는 다이라노 가네모리의 시, 5위는 지토 덴노의 시였다.#
- 오구라 백인일수와 관련된 와카 문법 및 작가들의 인물 관련과 시대 배경, 역사·문화·습관풍토 등 그 지식을 폭넓게 묻는 검정 시험인 '오구라 검정'도 있다.#
- 오구라 백인일수를 테마로 한 공익재단 '오구라 백인일수 문화재단'도 있다. 이곳에서 만든 기념관인 '사가아라시야마 문화관'은 교토의 관광명소 중 하나다. 이 문화관은 닌텐도의 사장이었던 야마우치 히로시의 재산으로 만든것이며, 미야모토 시게루가 프로듀스했다. 2012년의 리뉴얼 후에는, 백인일수의 박물관으로서의 요소를 확장했다. 그와 동시에 닌텐도 관계자가 없어져, 교토 상공회의소의 지분이 커졌다.
- 백인일수의 노래가 옆에 오는 노래끼리 상하좌우에 어떤 공통어를 포함하는 형태로 결합돼 종 10수, 가로 10수의 틀 안에 나열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백인일수 연구가 하야시 나오미치가 주장한 설이다. 줄지어 늘어놓은 100수의 노래와 노래를 이어주는 맞춤말을 그림으로 바꾸면 아름다운 경치가 떠오른다고 해서 '가직물설(歌織物説)'이라고 한다.
- 다카라즈카 가극단은 창단 당시 극단원의 예명은 백인일수에서 따오기도 했다.
- 일본 문학의 유명한 작품이기 때문에 영어권에서도 상당히 많은 번역본이 있다. 백인일수는 1866년의 영어로 최초 번역됐으며[20] , 영어로 번역된 최초의 일본 문학 작품이기도 하다. 2018년 영어권의 출판사 펭귄 클래식에서도 번역됐다.#
5. 창작물에서[편집]
- 금색야차: 메이지 시대의 문호 오자키 고요(尾崎紅葉)의 소설이다. 메이지 30년부터 요미우리 신문에 연재가 시작된 이 소설의 첫머리에 당시 엄청나게 흥했던 백인일수 카르타를 설명하고 있다.
- 동급생: 영화 도중 쿠사카베가 백인일수 1번을 웅얼거리는 장면이 나온다. 시 뒷부분이 기억이안나 더듬을때 사죠가 뒷부분을 읊어준다.
- 마리아님이 보고 계셔: 4권에 실린 에피소드 <1월 1일>에서 사치코의 집에 놀러간 등장인물들이 백인일수 놀이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 마지스카 학원 시리즈: 시즌 1, 2에 등장한 인물인 쵸고쿠 (아키모토 사야카 분) 라는 캐릭터가 자신과 결투를 벌인 상대에게 이기게 되면 백인일수의 카드를 던지며 하이쿠를 외우면서 사라진다.
- 맛의 달인: 72권의 <실수투성이> 에피소드에서 쿠리타 유우코의 조카(오빠의 의붓딸) 시즈카가 백인일수 대회에 출전하여 우승까지 했지만, 실수로 우승 트로피를 망가뜨리는 바람에 괴로워하는 모습이 나온다.
- 백성귀족: 4권 48화 <실내의 놀이> 에피소드에서 등장한다. 홋카이도식 룰은 두 번째 구절만 듣고 카드를 쳐낸다고. 이 에피소드서 술에 취한 아버지 친구분이 작가와 형제들에게 자신을 이긴다면 세뱃돈 두배를 주겠다고 말하자 술에 취해서 못 잡을거라고 봐 봉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구절을 듣자마자 날쎄게 치는 아버지 친구를 보고 그 때 작가는 취권을 봤다고...
- 심쿵! 프리큐어 14화: 경기 카루타로 하는 에피소드이다. 특히 이라가 제대로 자코츄을 컨트롤을 하지 못하는 모습이 보인다.
- 초역 백인일수 우타코이: 백인일수의 등장인물의 에피소드를 각색하여 애니화한 작품이다.
- BLOOD-C: 에피소드의 제목들을 백인일수의 시구에서 따왔다.
- RIDDLE JOKER: 등장인물들의 성(姓)을 백인일수의 작자들의 이름에서 따왔다.
6. 외부 링크[편집]
- 일본어 원본: 이 사이트에서 각 와카에 대하여 단어마다 현대 일본어로 된 해설을 볼 수 있다.
- 백인일수 한국어 번역서: 중앙대학교 임찬수 일본어문학 교수가 번역한 한국 최초의 백인일수 번역서이자 해설서.[22] 절판됐다가 2021년 개정판이 나왔다.
- 백인일수 영어 번역본: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번역했다.
7. 관련 문서[편집]
8. 둘러보기[편집]
[1] 'One Hundred People, One Poem'이라고 부르기도 한다.[2] 일본에서는 음독으로 '후지와라노 테이카'라고 불리는 경우가 더 많다.[3] 당대의 뛰어난 와카(秀歌, 슈카)를 정리한 것이다. 영어로 앤솔러지라고 부른다.[4] 헤이안 시대 당시에는 귀족이나 황족들이 산속에 별장을 짓고 휴양을 다녔는데, 그러한 곳을 산장 또는 시어에서는 산리(山里)라고 한다.[5] 18세부터 74세까지 56년에 걸쳐 자신의 인생을 기록한 일기다. 천문학 기록도 남아있다. 그래서 역사서, 과학적 기록으로서도 자료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받는다.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6] 현재의 교토부 교토시 우쿄구 사가[7] 또한 후지와라노 사다이에는 와카 형식의 가장 위대한 거장 중 한 명으로 여겨지는 당대 최고의 시인이다.[8] 다만, 백인수가는 3수가 다르고 1수가 더 많아 총 101수의 와카가 있다.[9] 대부분 사랑의 쓰라림을 한탄한 '비연가(悲恋歌)'이다.[10] 왼쪽은 오노노 고마치, 오른쪽은 기센 법사.[11] 메이지 37년(1904년)에 현재의 표준 카루타를 고안해, 2월에 만조보(萬朝報)가 주최하는 제1회 공식 카루타 대회를 도쿄에서 열었다. 메이지 45년(1912년)에는 오사카의 나미바나 클럽에서, 제1회 카루타 전국 대회가 개최되었다.[12] 한때 쇼와 시대의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오구라 백인일수의 카루타회는 비난받았고 대신 에도 막부 말기의 지사를 많이 딴 국수주의적인 '애국백인일수(愛国百人一首)'가 사용되기도 했다.[13] 향가와 백인일수, 즉 와카의 다른 점은 표기나 표현, 어휘나 문법, 규칙을 떠나서 양의 존재다. 향가는 기껏해야 20수가 채 되지 않아 전반적인 맥락 연구가 어렵다. 과거 진성여왕이 만요슈나 고킨와카슈와 같은 성격인 삼대목을 편찬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는 현존하지 않는다.[14]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도 배운다.#[15] 백인일수를 소재로 한 만화 치하야후루에서도 나온다.[16] 와카의 57577 음수율에 맞춘 번역이다. 아래 표에 있는 번역은 중앙대학교 임찬수 교수의 번역인데, 이 영상과는 번역이 다르다. 영상 제작자가 임찬수 교수의 번역과는 다르게 57577 음수율을 맞추는 것에 신경썼기 때문.[17] 중앙대학교 임찬수 교수의 번역[18] 이 시는 한 말에 두 개 이상의 의미가 있는 일본 특유의 중의적(=가케코토바)가 많기 때문에 두 가지의 의미로 번역된다. 자세한 것은 오노노 코마치 문서 참조.[19] 위의 무라사키 시키부의 딸.[20] 백인일수의 최초의 영역본은 1866년 프레데릭 빅터 디킨스(Frederick Victor Dickins)가 번역했다.[21] 제목 자체가 백인일수 17번 시에서 유래했다.[22] 백인일수 와카들의 창작 배경 및 해석들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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