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딜런/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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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2. 어린 시절
3. 1960년대
4. 1970년대
5. 1980년대
6. 1990년대
7. 2000년대
8. 2010년대
9. 2020년대


1. 생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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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Bob Dylan, New York City 1963'}}}

밥 딜런의 커리어는 총 9가지의 시기로 요약할 수 있다. 통기타를 든 신인 뮤지션인 1959년부터 1962년까지의 시기, 저항의 아이콘으로 추앙받은 1962년부터 1964년까지의 시기, 포크를 버리고 일렉트릭 기타를 든 1965년부터 1966년까지의 시기, 오토바이 사고 이후 은둔하며 음악 활동을 한 1967년부터 1973년까지의 시기, 아티스트들과 협연을 하며 투어를 한 1974년부터 1978년까지의 시기, 기독교로 개종하며 가스펠 음악을 한 1979년부터 1981년까지의 시기, 음악적으로 부침을 겪었던 1982년부터 1987년까지의 시기, 네버엔딩 투어를 통해 음악적 재기를 시도한 1988년부터 1996년까지의 시기, 음악적으로 다시 전성기를 맞은 1997년부터 현재까지의 시기로 요약 할 수 있다.


2. 어린 시절[편집]


훗날 자신을 ‘밥 딜런’이라 부른 사내, 로버트 앨런 짐머맨은 1941년 5월 24일 오후 9시 5분[1], 미합중국 미네소타주 덜루스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둘다 유대인이었고, 아버지 에이브러햄은 러시아 제국의 탄압을 피해서 흑해 연안의 항구도시 오데사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조부 지그맨 짐머맨과 조모 안나 짐머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비어트리스 스톤, 통칭 비티는 리투아니아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조부 벤자민과 조모 리파 에델스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밥이 태어난 곳은 미 북부에 넓게 자리 잡은 5대호 중 하나인 슈피리어 호의 바람이 직접 밀어닥치는 곳이었다. 아버지 에이브러햄은 이 도시에 있는 스탠다드 석유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밥이 다섯 살도 되기 전, 병에 걸려 퇴직할 수 밖에 없었다. 동생 데이비드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일가는 친척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 비티의 친족들이 살고 있고 아버지 에이브러햄의 두 형제가 사업을 하고 있던 미네소타주 히빙으로 이주한다. 철강업으로 번성하는 도시였고 주민들이 서로 얼굴을 알고 지내던 지방도시였다. 아버지 에이브러햄은 형제들이 경영하는 전파상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밥 딜런이 사람들에게 노래를 하게된 계기는 일가의 새로운 생활이 이제 막 시작된 그 무렵이었다. 가족들이나 친척들이 모였을 때 동요가 아니라 라디오에서 흐르는 성인 취향의 노래를 당당하게 소화해냈고 주위를 놀라게 했다.

마틴 스콜세지가 감독한 밥 딜런의 다큐멘터리 영화 ‘노 디렉션 홈 : 밥 딜런’에서는 밥은 “열 살 때[2] 이사 온 집에 기타와 레코드 플레이가 달린 라디오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플레이어 턴테이블에는 이전 거주자가 놓고 간 한 장의 레코드가 놓여있었다. 그 레코드에 수록된 ‘Drifting Too Far from the Shore’를 들었을때 충격은 “곡을 듣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진정한 부모는 따로 있는데, 엉뚱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버렸다는 생각도 들었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밥 딜런 인생의 중요한 사건이었다.

음악에 눈뜬 밥 딜런은 열 살 무렵 어머니의 날, 자신이 만든 시를 어머니에게 선사할 정도로 시 창작에도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밥 딜런의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음악적 소양을 심어주기 위해 피아노를 집에 들여놓았던 것은 열두 살 때의 일이었다. 개인 레슨을 위해 교사까지 집으로 모셨으나 정작 레슨을 받은 것은 동생 데이비드 뿐이었다. 밥 딜런은 “내 맘대로 치게 내버려두세요!” 라며 레슨을 극구 거부했다. 하지만 밥 딜런은 어느샌가 독학으로 연주법을 터득한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피아노를 독학 할 무렵, 밥 딜런은 ‘행크 윌리엄스’, ‘행크 스노’, ‘조니 레이’를 좋아하게 되었다.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그들의 음악에 몰입했고 당시 한참 인기를 끌던 페티 코모나 페티 페이지가 아니라, 보통 가수들과는 다른 느낌을 풍기는 독특한 가수들에게 이끌렸다. 어린 시절 라디오에 대한 밥 딜런의 열성은 대단했다. 새벽 2시, 3시까지 라디오에 심취해 있다가, 그 다음 리틀록, 시카고, 루이지애나주에서 발송되는 방송까지 듣게 됐다고 한다. 심야방송을 통해 ‘머디 워터스’, ‘존 리 후커’, ‘지미 리드’, ‘하울링 울프’ 등 흑인들의 블루스 세계에 빠젔다고 한다. 그만큼 어린시절부터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린 시절, 음악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영향을 받았던 것은 오직 음악뿐이었다. 음악만이 진실이었다. 그 무렵 음악과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다.


밥 딜런이 사는 히빙 거리에는 흑인 음악 레코드를 파는 가게가 없었다. 하지만 집에 있는 기타로 라디오에서 들었던 노래들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친구들과 음악 이야기를 나누게 되지만 본인과 비슷한 취향을 가지고 음악을 듣는 친구는 좀처럼 없었고 가까스로 발견해낸 사람이 존 버클린이었다. 버클린은 기타와 테이프레코더도 가지고 있었다. 밥과 버클린은 라디오에서 들었던 곡에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믹스해서 직접 곡을 만들었다. 밥이 피아노와 보컬을 맡았고 버클린은 기타를 쳤다. 버클린에 의하면 잼새션[3]에서 밥이 최초로 만든 곡은 프랑스 여배우 브리짓 바르도를 노래했다고 한다.

1950년대 중반, 밥은 오토바이를 타기 시작했으며 이전보다 훨씬 시끄러운 음악인 로큰롤을 좋아하게 됐다. 또 말론 브란도, 제임스 딘이 출연한 영화에도 빠지기 시작한다. 특히 ‘이유 없는 반항에서 제임스 딘이 연기한 짐 스타크를 좋아했다. 또 당시 최고의 스타였던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에 매료되었고 텔레비전에서 리틀 리처드를 발견한 순간 즉시 좋아하는 가수 리스트에 넣었다고 한다. 피아노를 연주하기보다는 때려부수면서 열창하는 리차드의 스타일을 자기 집 피아노로 흉내내기도 했다고 한다. 또 헤어스타일마저도 리차드처럼 머리 꼭대기를 잔뜩 부풀어 오르게 하는 화려한 스타일로 바꾸었다.

이 당시 자신의 음악 취향과 잘 맞는 랠리 키건을 알게 되었고 생애 첫 밴드 ‘조커즈(JOKERS)’를 결성한다. 이 밴드는.유행하는 곡에 하모니를 넣어 노래하는 일종의코러스 그룹이었다. 여자애들의 반응도 좋아서 트윈 시티즈[4]의 텔레비전 방송 미국 아마추어 쇼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한다. 1956년 여름, 딜런의 밴드 조커즈는 78 회전 다이렉트 컷 레코드[5]를 만든다. 비용은 5달러였고 밥은 피아노를 연주하며 다른 두 사람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밥 딜런 인생의 역사적인 첫 레코딩이었다. 진 빈센트의 ‘비밥 어 룰라’, 더 펭귄스의 ‘Fallen Angel’이 수록되었다. ‘조커즈’는 1958년 봄, 멤버 랠리 키건이 사고를 당할 때까지 존속했다.

‘조커즈’ 활동과 병행해서 밥 딜런은 빌 마리낙, 래리 팻보, 척 나일라 등 세 친구들과 드럼, 베이스, 기타, 피아노로 구성한 ‘더 새도우 블래스터즈(The Shadow Blasters)’를 결성한다. 밥은 리더격으로 피아노와 보컬을 담당한다. 자신이 꿈꾸던 리틀 리차드 스타일의 밴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957년 ‘더 새도우 블래스터즈’는 고등학교 강당에서 개최된 학생 재능 경연 대회에 참가한다. 핑크색 셔츠에 선글라스. 머리 꼭대기를 잔뜩 힘준 헤어스타일의 밥은 선자세 그대로 피아노를 첬다. 하지만 반응은 정말로 안좋았는데 학생들은 단체로 비웃었고 선생들은 전부 얼굴은 찌푸린 채 끝까지 지켜봤다고 한다.‘더 새도우 블래스터즈’는 그 후 주니어 칼리지 축제에도 출연했지만 그것이 마지막 활동이었다. 하지만 밥 딜런의 재능 경연 대회는 학교를 뒤흔들었고 학생들은 밴드활동을 하는 밥의 또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됐고 교내에서 인기도 오른다. 학창시절 밥 딜런은 굉장히 조용한 학생이었다. 교사 본 롤프슨은 “무척 조용하고 내성적이었지만 무척 영리했어요. 아주 점잖았던 걸로 기억해요”라고 당시 딜런을 회상했고 밥에게 사회학을 가르친 찰스 밀러는 “달랐어요. 생각이 있는 아이였죠. 확실히 재능을 보여주었지요. 나중에 ‘Blowin’ in the wind’를 듣고 나니 그 애가 우리 수업에서 사회적 연민을 보인게 기억이 나더군요”라고 말했다.

당시 밥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자연스럽게 ‘팝 스타가 되겠다’는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밥은 일렉트릭 기타를 사서 코드 워크를 연습했다. 부친을 설득해서 핑크색 포드 자동차 컨버터블은 갖게 되었고, 심지어 대형 오토바이 할리 데이비슨(Harley-Davidson)까지 소유하게 되었다. 이때 오토바이로 종종 사고를 일으켰는데 자기 몸에 아무 일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면, 표정 변화 없이 태연스럽게 그 자리에서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사라젔다고 한다. 이때 첫 여자 친구가 생기는데 핀란드 이민자 ‘에코 헬스트롬’이라는 금발 미소녀였다. 에코는 가죽자켓에 청바지 차림으로 다녔고 그 시절 소녀로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반항적인 스타일이었다. 사귀자마자 밥은 그녀의 음악 취향을 물어봤고 자신과 라디오를 좋아하고 블루스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 중에서는 “주위 사람들이 신기해할 정도로 밥은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여자친구는 에코스타 외에도 존재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노 디렉션 홈 : 밥 딜런’에서 밥은 “사랑 덕분에 내 안의 시인이 눈을 떴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무렵 밥 딜런은 새로운 밴드 ‘더 골든 코드(The Golden Chords)’를 만든다. 드럼과 기타, 그리고 밥 딜런의 피아노로 구성된 트리오였다. 전 밴드였던 더 새도우 블래스터즈 시절보다 한층 더 성장하게 되는데 피아노나 기타로 즉흥연주를 하고 더욱 파워풀하게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했다. 1958년 2월 10일 히빙 고등학교 교장 주최로 교내 집회 당일, 마술과 합창에 이어 더 골든 코드가 등장한다. 밥 딜런은 날뛰면서 피아노를 첬고 노래를 불렀는데 괴성을 지르며 ‘Rock’n Roll Is Here To Stay’를 부르다가 피아노를 페달을 너무 세게 밟아 부러진다. 교장인 K.L. 페더슨은 무대 뒤로 달려나가 마이크를 꺼버렸고 밥 딜런은 그걸 알고도 피아노를 쾅쾅 처댔다고 한다. 더 골든 코드는 그 후 몇번에 걸쳐 무대에 오른다. 1958년 3월 1일에는 현지 디스코 자키가 히트곡을 틀면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파티에 초대받아 연주를 하게 된다. 밥 딜런 인생 최초 음악을 통해 현금을 쥐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밴드활동은 순조로운듯 보였으나, 밥 딜런 이외의 나머지 두 멤버는 라이브를 해나가면서 엘비스 프레슬리 풍의 대중적인 음악을 원했고 자연스럽게 견해차로 해체한다.

1959년 1월 9일, 학교에서 다시 재능경연대회가 열려 밥 딜런은 다시 무대에 오른다. 이때의 밴드는 예전과는 다른 편성으로 기타, 베이스, 여성 코러스 세 사람과 밥 딜런으로 구성됐다. 밴드 이름은 ‘엘스톤 건[6]과 더 록 바퍼스’였다. 아무런 리허설없이 즉흥으로 연주했고 밴드는 이 날에만 노래하고 끝이었다.

이때 당시 밥 딜런의 새로운 음악 우상이 등장했는데 바로 버디 홀리였다. 딜런은 홀리의 순수하고 아이같은 목소리를 따라하기 시작한다. 딜런의 많은 음반들의 특징적 목소리는 버디 홀리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딜런은 1월 31일 덜러스에 공연을 하러온 버디 홀리의 공연을 보기도 했다. 딜런이 그를 본지 사흘후 버디 홀리는 사고로 사망한다.

1959년 6월 밥 딜런은 히빙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네소타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결정한다. 졸업 기념 앨범 사진 아래에 첨부된 ‘장래의 꿈’이라는 코멘트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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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리차드의 동료가 되는 것”


1959년 9월 밥 딜런은 미네소타 대학교에 입학한다. 밥 딜런은 대학 시절에 대해 ‘마이 라이프 인 어 스톨른 모먼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중에 대학교에 갔었지. 내가 한 번도 가진적 없는 사기같은 스칼라쉽.

과학 수업에 들어갔지만 토끼가 죽는 걸 안보려 해서 낙제점을 맞았지.

영어 수업에서는 영어 교사를 묘사하는 시험지에 욕을 써서 쫓겨났고 커뮤니케이션 수업은 매일 전화로 결석을 알려서 낙제했고 스페인어 수업은 잘했지만 그건 아는거였고.

재미 좀 볼까해서 남학생 회관에서 어슬렁거려봤지. 처음에는 거기서 살아도 된다더니 나중엔 나가달라더군.

사우스 다코타 출신 여자애 둘과 방 두칸짜리 아파트에 들에가서 이틀 밤을 살았지.

다리 건너 14번가에, 햄버거와 농구 트레이닝복과 불독 조각상이 있는 서점 위층으로 살러갔지.

내 배를 무릎으로 걷어찬 배우 여자애한테 홀딱 반했지.

그리고 미시시피 강 동쪽 편으로 가게 되었지.

세븐 코너스 바로 남쪽 워싱턴 에비뉴 브리지 밑 압류된 집에서 친구들 한 열 명하고 같이 살았지.

내 대학 생활은 대략 그게 전부야.


그의 아버지는 “밥은 대학생 무리를 대단찮게 생각했어요. 대부분 사기꾼이라고 생각했죠.”라고 말했다. 한 카운슬러가 회상하는 딜런의 대학생활은 “속은 모르겠고, 밤낮없이 드나들고, 보통 넋이 나가있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밥 딜런은 미네소타 대학교의 인문예술 학과에 입학하긴 했어도, 그로부터 몇 달 안 되어 학교는 거의 다니지 않고 대학생들이 주로 시간을 때우던 딩키타운에서 살았다. 전공은 음악, 부전공은 급진적 생활양식으로 커피하우스의 고급 세미나와 신메이킹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대학원 과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당시 동아리 활동도 했었다.

밥 딜런은 바스티유에서 알게 된 여성, 프로 캐스트너로부터 우디 거스리의 음악을 들어본 적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밥 딜런은 그 당시 우디 거스리를 잘 알지 못했다. 프로 캐스트너의 오빠는 우디 거스리의 음반을 가지고 있었고 밥 딜런에게 78회전 SP음반 12장 앞뒤로 수록된 세트를 준다. 이때 밥 딜런은 우디 거스리에게 압도된다. 반면 거스리의 매니아로 변한 밥 딜런을 나무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포크송 레코드 수집가이자 연구자 존 팬캐이크(Jon Pankake)는 “그 상태로 아무리 해봤자 우디 거스리는 될 수 없을걸”이라며 밥 딜런에게 충고하기도 했다.

거스리의 노래를 통해 ‘노래란 삶의 방식을 배우는 것’임을 체감한 밥 딜런은 거스리의 노래에 몰입하면 할수록, 미니애폴리스에서의 생활이 더 이상 머물 가치가 없음을 느꼈고 1960년 12월 밥 딜런은 우디 거스리를 만나러 가겠다고 결심한다. 대학을 그만두고 포크송의 중심지인 뉴욕을 목표로 미니애폴리스를 떠난다. 크리스마스 직전 기타와 슈트케이스 하나만을 달랑 들고 히치하이크로 길을 나선다.


3. 1960년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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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되다.

1961년 1월 밥 딜런은 위스콘신 대학교의 재학생 프레드 언더힐을 알게 된다. 언더힐은 친구인 데이비드 버거와 함께 차를 몰고 뉴욕으로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자신들과 함께 운전을 해줄 나머지 한 사람을 찾고 있었고 밥 딜런은 이 무리에 합류한다. 1961년 1월 24일 세 사람은 맨해튼의 그리니치 빌리지가에 도착한다. 맥두걸 가(Mavdougal Street) ‘카페 와?(Cafe Wha?)’로 세 사람은 직행한다. 마침 누구든지 무대로 올라와서 공연이 가능한 ‘후트내니의 밤’[7]이어서 밥 딜런은 거기서 몇 곡을 부른다.

그리고 며칠 후 밥 딜런은 우상 우디 거스리와 대면한다. 거스리는 뉴저지 주 모리스타운(Morristown)에 있는 그레이스톤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당시 헌팅턴 무도병이라는 희귀병에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밥은 몇 번에 걸쳐 거스리를 찾아갔다. 주말 동안 외출허가를 받은 거스리가 그의 친구 시드셀의 집에 있을 때 만나는 경우도 있었다. 거기에는 거스리의 동료들이 많이 있었는데 피트 시거, 잭 엘리엇 등이 거스리의 주변에 모여 거스리의 곡을 불러줬다고 한다. 밥 딜런은 맨해튼으로부터 버스로 한시간 반, 정류소에서 병원까지 약 1km 거리를 걸어갔고 병원에서 밥이 직접 골라 노래를 부른 적도 있었고 거스리에게서 특정 노래를 요청받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날 밥 딜런은 거스리에게서 미발표 노래나 아직 곡조를 붙이지 않는 시가 자택에 있으므로 그것을 사용해도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코니아일랜드에 있는 거스리의 집을 가지만 이때는 발견을 못했다. 밥 딜런이 우디 거스리의 미발표곡을 부를 일은 그 후에도 없었다. 미발표 작품군은 거스리의 딸 노라에 의해 1998년 빌리 블랙과 윌코가 리코딩해 ‘Mermaid Avenue’라는 앨범을 통해 나온다.

뉴욕에 도착하고 나서 한 달 정도 지났을 무렵, 밥은 포크로어 센터에서 데이브 반 롱크와 우연히 만난다. 밥의 자서전에 의하면 이때 어떻게 하면 게스라이트[8]에서 일할 수 있는지 반 롱크에게 물었다고 한다. 밥이 한 곡을 부르자 반 롱크는 그 날 게스라이트에서 자신이 올라갈 스테이지에 밥 딜런을 깜짝 출연시켜주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반 롱크와 밥은 친밀한 선후배 사이가 된다. 반 롱크의 아내 테리가 밥이 출연할 만한 장소를 물색해주는 부킹 매니저 역할을 담당해준 시기도 있었다. 이 당시 밥은 노래, 기타 테크닉, 곡 해석, 편곡 등을 반 롱크로부터 배웠다. 반 롱크에 의하면 밥 딜런은 “직접 가르치려고 들면 불가능하지만, 나중에 보면 어느 사이엔가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렸다”라고 했다.

밥 딜런은 적극적으로 노래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았고 선배 가수나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활동하는 사람들과 교류가 높아진다. 당시는 재즈의 인기가 시들어지고 포크 가수가 많이 늘어났다. 여러 커피하우스, 라이브하우스에서 매주 누구든 즉석에서 자유롭게 참여 가능한 후트내니가 개최되었다. 그 당시 아마추어 포크가수들은 유창한 코러스나 청아한 노래들을 선보였는데 밥 딜런은 거스리 류의 거친 방식을 취한 특이한 존재였다. 애초에 그 당시 밥 딜런은 “우디 거스리의 족적을 따라 미국 내 여기저기를 전전하다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다”고 자기소개했다. 이 당시 이질적인 존재였던 딜런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밥 딜런의 애호가들이 점점 생겨난다.

그리니치 빌리지의 유명한 라이브하우스 ‘거디스 포크 시티’에서도 매주 월요일 밤 마이크가 일반인들에게 개방됐고 밥 딜런은 자주 그곳에 다니며 노래를 부른다. 반 롱크나 톰 팩스톤, 더 클랜시 브라더스 등 선배거물 가수들이 밥 딜런의 노래를 듣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여러 명의 지인들을 얻게 되는데 밥의 인기가 점점 늘어나면서 밥 딜런을 일반인에게 개방하는 날만이 아니라 포크 시티의 정식 무대에 출연시키자는 여론도 높아진다. 가게 주인인 마이크 포코(Mike Porco)마저도 밥 딜런을 눈여겨봤고 뉴욕에 도착한지 겨우 2개월 만인 1961년 3월, 포코는 밥에게 2주간 출연을 제안한다. 블루스 가수 존 리 후커가 나오기 바로 직전에 무대였다. 그 당시 밥 딜런은 뮤지션 조합에도 등록하지 않은 상태일뿐더러 음주점포 출연용 허가증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만 21세도 안 넘었기 때문에 부모님의 동의서도 필요했다. 그때 가게 주인 포코가 보호자로 나서주며 조합등록비용 46달러까지 부담해 줬다.

1961년 4월 11일 밥 딜런은 포크 시티의 무대에 선다. 2주간 무대에 선 까닭에 블루스 가수 존 리 후커와도 친해진다. 이때 불렀던 무대 레퍼토리는 우디 거스리의 곡 외에 반 롱크가 편곡한 ‘House of the Rising Sun’이나 자작곡 ‘Song to Woody’가 포함되어 있었다. 5월 6일에는 코네티컷 주 브랜보드에 열린 인디언 네트 포크 페스티벌에도 출연한다. 같은 달 미나애폴리스로 귀성하고 친구들을 만나며 노래를 부른다. 전 여자친구였던 보니 피처(Bonis Beecher)가 이때의 밥의 노래를 25곡 녹음했다.

그리고 다시 그리니치 빌리지로 돌아와 활동을 하는데 이때 가수만이 아니라 코미디언도 그리니치 빌리지 카페에 출연했는데 빌 코스비, 리처드 브라이어, 우디 앨런, 존 리버스, 레니 브루스, 후에 개명을 한 ‘피터 폴 앤 매리’의 일원으로 유명해진 노엘 폰 스투키 등이 있었다. 밥의 초기 자작곡 ‘Talking Bear Mountain Picnic Massacre Blues’의 바탕이 되었던 신문 기사를 밥에게 건넨 사람도 스투키였다. 또한 스투키는 밥의 능력을 가장 먼저 주목한 사람 중 하나였다.

게스라이트, 포크시티를 거점으로 밥은 적극적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에릭 본 슈미트, 렌 챈들러, 폴 클레이튼, 루크 에스큐, 할 워터즈, 존 윈, 루크 파우스트 등 수많은 재능 있는 인사들과 교류를 하게 된다. 그 즈음인 1961년 7월 29일 밥은 어퍼 웨스트 사이드의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진행된 12시간 실황중계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다. 방송국 WRVR-FM 주최로 그리니치 빌리디 포크계의 주요 가수들이 차례로 노래하는 기획이었다. 무대를 내려온 밥 딜런은 17세 수지 로톨로와 2년간 사귀게 된다. 수지는 10대 전반부터 각종 항의 운동에 참가한 여성이었고 포크송과 가깝게 지냈다. 이때부터 친구들이나 지원자들 집에서 전전하길 그만두고 처음으로 집을 빌린다. 수지는 밥 딜런에게 많은 영향을 줬는데 예술을 지향한 수지 덕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두 사람이 만난 지 2개월 후, 1961년 9월 29일 밥 딜런의 인생을 바꿀 사건이 일어난다. 뉴욕타임즈지에 포크 시티에서의 밥 딜런의 무대를 절찬하는 평론가 로버트 셸턴 평이 게재된다.

거디스 포크 시티에 포크 음악에 새 얼굴이 출현했다. 비록 겨우 스무 살이지만 밥 딜런은 요 몇 달 새 맨해튼 카바레에서 연주한 스타일리스트 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다.

합창단 소년과 비트닉 사이의 어딘가를 떠올리게 하는 딜런씨는 천사 같은 얼굴과, 허클베리 핀의 검은 코듀로이 모자로 일부 가려진 대걸레 같은 더벅머리를 지녔다. 그의 옷은 어쩌면 재단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기타나 하모니카, 피아노를 연주하고 새로운 곡들은 기억도 못 할 만큼 빨리 작곡하는 그가 터질듯한 재능의 소유자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딜런씨의 목소리는 예쁜 것과 정반대다. 그는 뒤편 현관에서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사색에 빠져 있는 남부 노동자의 거친 아름다움을 의식적으로 포착하려 한다. 모든 외피와 내피들이 그의 음표 위에 남아 있었고, 그의 노래에는 타는 듯한 강렬함이 배어 있다.

(중략)

포크에 대한 딜런 씨의 고도로 개인적인 접근법은 여전히 진화 중이다. 그는 스펀지처럼 영향력들을 빨아들여왔다. 이따금 그가 의도하는 극적 효과는 과녁을 벗어나 멜로드라마가 되고, 그의 스타일라이제이션은 도를 넘어 자연스러움을 잃고 위태롭게 기우뚱한다. 그렇지만 모든 이의 취향에 맞지 않는다 해도, 젊음 때문에 더욱 주목할만한 그의 음악 만들기는 독창성과 영감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딜런 씨는 자신의 선조들과 출생지에 관해 모호함은 보이지만, 그가 어디로 왔느냐보다는 어디로 갈 것인가가 더욱 중요하다. 그는 곧장 위로 갈듯하다.

― 밥 딜런. 눈에 띄는 스타일리스트’, 로버트 셸턴


신문에는 모자를 쓰고 타이를 매고 큰 기타를 든 딜런의 러프한 사진이 7센티미터가량의 공간을 차지했다. 이 칼럼을 통해 밥 딜런은 엄청나게 인지도가 상승한다. 그의 후원자였던 음악가들과 밴 로크는 “무척, 무척 좋은 일”이라고 말했고 팻과 톰 클랜시 형제는 “바비는 재능이 많아요. 멀리 갈 자격이 있어요”라고 평했다. 딜런은 금요일 밤 포크시티에 나타났는데 칼럼을 보고 밥 딜런을 보려고 찾아온 엄청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 무렵 밥에게 커다란 선물이 찾아온다. 밥의 표현에 따르자면 “인생이 송두리째 뒤바뀌려 했다”. 로버트 셸턴의 호평 덕분에 컬럼비아 레코드의 거물 프로듀서 존 해먼드(John Hammond)가 밥에게 흥미를 나타낸다. 9월 말 컬럼비아 레코드사 소속의 캐롤린 헤스터의 리코딩에 밥이 하모니카 연주가로 참가한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됐고 그때 리코딩 프로듀서가 해먼드였다. 이때 딜런은 평론가 로버트 셸턴에게 이 일을 언급한다.

이 이야기는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는데요. 아까 존 해먼드를 만났는데 그 사람이 나더러 컬럼비아하고 5년짜리 계약을 하재요. 그렇지만 제발, 비밀로 해줘요. 월요일이나 되어야 확실해지거든요. 심지어 내 노래도 안 들어보고 서명을 하래요! 하지만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요. 셸턴. 컬럼비아의 어떤 윗대가리가 엎어버릴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 진짜로 미팅이 성사될 것 같아요.


그리고 얼마 뒤 1961년 10월 26일, 밥 딜런은 컬림비아 레코드사와 정식계약을 맺는다. 이때의 소식은 당연히 포크 시티에도 퍼지는데 딜런은 질투를 받기 시작한다. 심지어 그의 뉴욕타임스 평과 그의 컬럼비아 계약 양측에 경악한 미네아폴리스의 포크서클에도 반향이 일었다.

정식 계약 9일 후, 이지 영의 기획으로 카네기 리사이틀 홀에서 밥 딜런은 첫 솔로 콘서트를 개최한다. 이 콘서트 프로그램에 싣기 위해 이지 영은 밥에게 활동 경력, 성장 과정 질문 리스트를 만들어 보냈다. 밥은 그에 대해 이렇게 답변했다.

미네소타 태생으로 뉴멕시코에서 성장. 미시시피에서 거주하다 아이오와, 사우스다코타, 켄자스를 거쳐 열네 살 때 카니벌 밴드의 피아니스트로 일한 후 시카고의 길거리 가수 그레이라는 사내로부터 블루스를 배웠다.[9]


계약 후 딜런의 데뷔 앨범 ‘Bob Dylan’은 즉시 리코딩을 시작한다. 녹음은 1961년 11월 20일과 22일, 겨우 이틀이었다. 경비는 402달러가 들었다. 가지고 있던 레퍼토리를 바탕으로 직접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 당초부터 상정되어 있었다. 거스리의 곡들은 녹음을 마쳤지만 결국 수록되지 못했다. 녹음은 정말로 빨리 끝났지만, 1962년 3월 19일에야 출시한다. 관료주의로 인한 이 긴 기다림은 딜런을 매우 불편하게 했다. 1961년 말 엄청난 모멘텀을 느끼고 있던 딜런에게 그 다섯 달간의 답보 상태는 가혹한 안티클라이맥스였다고 한다. 앨범 커버는 풋내기 청년스러웠지만 노래와 연주는 대담한 연주로 가득했다. 심지어 수지의 사랑에 빠져있을 때였는데도 죽음과 슬픔에 관한 노래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우디 거스리의 헌정곡 ‘Song to Woody’도 이 앨범에 들어가 있다. 음반은 일부에서는 호평받았지만 반응은 미미했고 이 앨범이 많이 팔리기 시작한것은 밥 딜런이 슈퍼스타로 자리매김한 2년이나 지난 후 였다. 컬럼비아 지역에서는 밥 딜런을 “존 해먼드의 실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만큼 밥의 전망을 밝게 본 사람은 소수였다.

데뷔 앨범에 두 곡 밖에 자작곡을 담을 수 없었지만 밥 딜런은 창작열을 불태웠다. 밥 딜런은 프로듀서 헤먼드가 준 로버트 존슨의 1930년대 중반의 음원에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됐다. 밥 딜런은 존슨의 노래를 몰입해서 들었고 가사를 필사하며 그 구조와 내용을 분석했다. 밥 딜런은 존슨이 만든 노래를 통해 정교한 기술과 본능적인 영감의 결합을 발견해낸다.

그때 만약 로버트 존슨을 듣지 않았더라면, 수많은 시들이 내 내면에 갇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문자로 바꿀 수 있는 자유와 용기를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라는 표현까지 쓰며 로버트 존슨에게 엄청난 영향을 받게 된다. 밥은 1962년 무대에서 존슨의 ‘Kind Hearted Woman’를 부른다. 비공식적으로 녹음 기록이 있다.

당시 포크송의 주류는 잘 가다듬고, 명확하게 곡의 근거를 제시하고, 새롭게 집어넣은 부분이 어디인가를 듣는 사람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것과는 크게 상이한 데뷔 앨범을 만든 밥 딜런이 자작곡을 만든다는 소식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된다. 당시 직접 작사, 작곡해서 노래하는 포크 뮤지션은 아직 소수에 불과했다. 기성의 곡들에 독자적인 필치를 가미해서 노래하는 쪽이 주류였다.

1962년 2월 피트 시거의 알마넥 싱어즈 시절 동료였던 아그네스 시스 커닝햄과 그의 남편 고든 프라즌이 포크를 전파하기 위한 잡지 ‘Brodside’를 창간한다. 그 창간호에 극우 반공 단체 '존 버치 소사이어티'를 비꼰 밥 딜런의 자작곡 ‘Talkin' John Birch Paranoid Blues’의 가사가 게재된다. 처음으로 딜런의 작품이 인쇄물이 실렸던 것이다.

밥은 그 무렵 이미 미시시피주의 흑인 청년 에멧 루이스 틸 살인사건을 제재로 한 ‘The Death Of Emmett Till’, 클랜시 브라더즈의 멜로디에 가사를 12소절까지 단 ‘Rambling, Gambling Willie’, 냉전 체제에 대한 강박관념을 노래로 만든 ‘Let Me Die in My Footsteps’ 등의 곡들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곡들에는 인종평등회의나 인권운동에 참가했던 여자친구 수지의 영향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1962년 이후 밥 딜런은 자작곡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내가 부르고 싶은 타입의 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자서전에서 언급한다. 1963년 봄에는 수지가 제작 조수로 일한 음악극 ‘Brecht on brecht’를 보고 커트 웨일과 베르톨트 브레히트에게 충격을 받는다. 밥은 그들의 작품을 “가사의 형식이나 운문(Verse)간의 자유로운 관계, 그 음악적인 구조, 효과적인 멜로디 패턴에 관한 상식적인 무시. 그러한 것들이 이 노래를 참신하고 첨단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라고 평했다.

데뷔 앨범의 반응이 신통치 않자 1962년 4월 다음 앨범의 리코딩을 위해 밥을 스튜디오를 부른다. 이 시기는 밥 딜런이 Blowin' in the Wind를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이 노래의 멜로디는 ‘No more auction block’을 바탕하고 있다. 밥은 훗날 ‘이 곡에는 흑인 영가와 일맥상통하는 감정이 흐르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때까지 특정 사항이나 인물을 제재로 하여 토피컬송 중심으로 작곡하던 밥이 스스로의 심정을 바탕으로 만든 첫 작품이었다. 밥이 개스라이트에서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직후, 1962년 5월 잡지 ‘Brodside’ 제6호에 이 노래의 가사가 게재되었다. 순식간에 워싱턴 스퀘어 파크의 청년 가수들 사이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이 노래의 매력을 느낀 포크업계 매니지업 종사자 앨버트 그로스맨은 딜런은 접근하고 설득 끝에 밥은 1962년 8월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한다.



1963년 3월 Live On TV

프로듀서 해먼드는 두 번째 앨범은 데뷔 앨범과는 다른 제작 방식을 택했다. 기타를 치면서 단 시간에 녹음하는 것이 아니라 밥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방식이었다. 리코딩은 1962년 4월 24일부터 1963년 4월 24일까지 간헐적으로 8회에 걸쳐 진행됐다. 리코딩 스튜디오에 보조역으로 녹음 등에 개별참가하는 세션맨들이 모인 것도 세 번이나 됐다. 밥이 다른 뮤지션과 어떻게 교류하는지 헤먼드는 지켜봤다. 앨범은 데뷔 앨범과 마찬가지로 기타를 직접 치며 노래하는 곡들을 중심으로 정리되어 ‘The Freewheelin' Bob Dylan’이란 제목으로 1963년 5월 27일 발매된다.

겨울날 그리니치 빌리지를 걷는 수지와 밥의 다정한 사진이 앨범 재킷을 장식한 ‘The Freewheelin' Bob Dylan’ 서서히 화제가 되어 빌보드 앨범 차트 22위를 기록한다. 순위에도 들어가지 않았던 데뷔 앨범과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런 가운데 매니지먼트 그로스먼은 히트 싱글을 만들기를 노리고 있었다. 그룹 피터 폴 앨 메리에게 밥 딜런의 노래 Blowin' in the Wind을 부르게 한다. 당시 빌보드 차트 1위는 사카모토 큐의 ‘위를 보고 걷자’가 3주 연속 1위에 올랐다. 폴 앨 메리의 ‘Blowin' in the Wind’는 잰 앤 딘의 ‘Surf city’, 엘비스 프레슬리의 ‘Devil in Disguise’, 더 서파리스의 ‘wipe out’과 경쟁을 벌이며 1963년 8월 17일자 빌보드 차트에서 2위를 차지한다. 앨범 판매량은 이미 100만장을 넘었다.

딜런의 매니지먼트 그리스먼은 유명한 TV 프로그램인 ‘에드 설리번 쇼’에 1963년 5월 12일 일요일 밤 딜런의 출연 예약을 잡았다. 그 프로그램은 딜런 같은 저항과 동일시되는 가수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중적인 프로그램이었다. 최종 리허설 때 딜런을 늘 그렇듯 대충 주워 입은 차림새로 나왔다. 딜런은 설리번과 티비 프로듀서 앞에서 ‘Talkin' John Birch Paranoid Blues’를 불렀다. 그러나 최종 리허설 직후 CBS 텔레비전 프로그램 편집자인 스토 펠프스가 그 노래는 쓸 수 없다고 통보하고 이 소식을 들은 그로스먼과 딜런은 분개한다. 에드 설리번은 딜런에게 다른 노래를 바꾸겠냐고 묻는다. 딜런은 한 바퀴 돈 후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 노래를 못 부르게 하면 아무 노래도 안 부를 겁니다.” 그리고 스튜디오를 쿵쿵 거리고 나갔다고 한다. 언론들은 일제히 CBS를 비난했다. 뉴욕 포스트는 “그건 잘못된 결정이었다.”라고 말했고 해리엇 밴 혼은 “CBS 상층부는 우리 시대의 심각한 도덕적 이슈들에 대해 경직되고 편협한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딜런이 부를 예정이었던 검열당한 노래는 외설도 중상모략도 담고 있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일은 점점 커졌고 딜런은 연방통신위원회에 공개 조사를 요구했으나 청문회는 열리지 않았다. 딜런은 실제로 설리번 쇼 파행 이전엔 녹화된 텔레비전 방송엔 출연했지만 그것은 5월 말에야나 가서 방송되었다. 딜런의 첫 텔레비전 경험은 12월 BBC였다. 그 다음번 출연은 뉴욕 WBRW 방송사 자유의 노래 쇼였다. 그 후 수많은 텔레비전 출연 제의를 받았지만 다 거절했다. 딜런은 오로지 최적의 조건에서의 올바른 쇼를 원했다.

1963년 5월 18일, 밥 딜런은 캘리포니아의 몬트레이에서 열린 포크 페스티벌에 출연하여 조안 바에즈와 처음으로 공연한다. 다음 달인 6월 피트 시거 등과 함께 미시시피 주 그린우드에서 개최된 ‘전미 학생 비폭력 조정위원회’가 주최하는 ‘선거인등록 집회’에 출연한다. 공민권 운동의 최전선이었던 남부에서의 첫 공연이었다. 밥 딜런은 거기서 경관의 감시, 백인 집단의 압력 속에서 이유 없이 살인의 희생자가 된 메드거 에버스를 그린 ‘Only a Pawn in Their Game’을 부른다. 같은 달 26일부터 28일에 걸쳐 개최된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도 밥을 출연한다. 그 페스티벌에는 바에즈도 출연했다. 수지도 밥과 동행했지만 바에즈가 “이것은 옛날에 끝난 연애를 노래한 곡입니다”라고 코멘트를 한 뒤 밥 딜런의 노래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을 부르기 시작하자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울음을 터뜨리며 회장을 뛰쳐나갔다. 밥은 그 여름 내내 바에즈의 전미 투어에도 동행했다. 그 무렵 The Freewheelin' Bob Dylan의 판매량도 호조를 누리며 밥 딜런은 미국 전역에 걸쳐 주목 받는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1963년 워싱턴 대행진에 참가한 밥 딜런과 조안 바에즈

1963년 8월 28일 밥은 바에즈와 함께 워싱턴 대행진에 참가한다. 정치집회, 데모에 참가하는 일은 전혀없었던 밥 딜런에게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집회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I Have a dream” 연설로 유명한 그 집회다. 밥은 바에즈와 함께 ‘Only a Pawn in Their Game’, ‘Blowin' in the Wind’을 부른다. 이때는 텔레비전으로 중계되기도 해서 밥 딜런의 인지도를 대폭 증가 시켰고 밥 딜런이 사회적, 정치적 제언을 노래로 만드는 리더인 것처럼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된다.

10월 밥 딜런은 ‘뉴스위크’의 기자 안드레아 스베드베리(Andrea Svedberg’의 취재를 받는다. 밥 딜런 측은 앨범의 프로모션으로 취재에 응했으나 스베드베리는 밥 딜런이 애매하게 감췄던 출신지나 가족에 대해 폭로하는 취재를 진행했고 노골적으로 딜런을 궁지로 몰아넣어서 오만하게 인터뷰에 임했다. 험악한 인터뷰는 악의적인 기사로 이어졌고 밥 딜런은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지조 없이 날조한 미네소타 중산층 젊은이가 되어 있었다. 이것으로 인해 그는 부모님과 동생과 몇년과 인터뷰를 끊었고 매니지먼트 그리스먼은 언론에 대한 편집증적인 불신도 커졌다. 또한 뉴스위크도 오명을 입었고 음악가와 미디어의 고문 같은 관계의 시대가 이때부터 형성됐다. 이 사건은 밥에 대한 주목도가 얼마나 높아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밥은 스베드버리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세 번째 앨범 ’The Times They Are a-Changin’의 안쪽 재킷과 앨범을 싼 종이에 장편시 ‘11개의 개설의 의한 묘비명’을 실었다. 그 안에서 밥은 ‘진실을 제대로 답변할 수 없다는 소문이 돌아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협박 비슷한 대화를 적어 넣은 뒤, ‘당신은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멸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변덕스러움에는 타협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한다. 이 사건은 밥 딜런이 매스컴에 대한 불신이 증폭되는 발단이 된다.

앨범이 대성공하며 세상의 추세에 의해 밥 딜런은 사회파 포크 싱어송라이터의 리더격이 되었다. 1년 전과의 취급이 완전히 달라져있었다. 밥 딜런은 자신의 음악을 받아들여주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에 기뻐했다. 그러나 사회운동에 대한 참가를 촉진하기 위한 노래가 아니었음은 분명했다. 사회적인 사건, 부정이나 차별에 관한 갑론을박이나 온갖 인간들의 군상, 인간들의 부조리한 행동이나 사고를 노래의 소재로 삼는 일은 있었지만 이미 밥 딜런은 개별적인 사항을 직접 전달하는 노래를 만들어내는 일에는 멀어져 가고 있었다.

세 번째 앨범 ’The Times They Are a-Changin'는 1963년 8월과 10월, 총 6회의 리코딩을 통해 23곡이 완성되었다. 이번에도 모두 밥의 기타와 보컬과 하모니카만으로 이루어졌다. 프로듀서는 전작의 마지막 세션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톰 윌슨[10]이 역임했다. 존경하는 우디 거스리의 앨범 ‘Woody Guthrie Sings Folk Songs’을 모방한 재킷 사진이었고 전작이나 데뷔 앨범과는 다른 심각하고 침울한 표정이었다. 이 앨범은 자신의 이전 작품들을 한참 앞지르는 시사가요들을 선보였다. ‘해티 캐롤’, ‘온리 어 폰’, ‘홀리스 브라운’은 뉴스 기사들에 자극받아 쓴 노래들이었지만, 자신감으로 넘쳤던 딜런은 더 큰 비전과 더 큰 보편성으로 좀 더 복잡한 이야기들을 가득 채웠다. 이 앨범은 현재는 높은 평가를 받는 걸작 앨범이지만 발매 당시에는 평가가 엇갈렸다.

1963년 10월 26일 카네기 홀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었고 장내는 만원이었다. 밥은 부모님들을 초대했고 콘서트의 청중들은 이미 포크 애호가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로 폭이 넓어졌다. 콘서트가 끝나고 분장실은 밥을 보기 위해 밀려든 사람들로 가득 찼고 밥이 탄 차의 지붕이나 유리창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했다.

높아진 인기와 사회적 영향력으로 긴급시민자유회의(ECLC)는 ‘시민의 자유 획득을 위한 투쟁에 혁혁한 공헌이 인정된 인물’로 1963년도 토마스 페인 상을 수여한다. 이때 당시 밥 딜런은 너무 긴장해서 술을 너무 마셨고 술에 취한 채로 수상 연설을 한다.

머리카락이 부족한 노인들은 길을 양보해야 합니다. 나를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머리카락이 없습니다. 무척 불쾌합니다. 검은색도 흰색도 오른쪽도 왼쪽도 없습니다. 위도 아래도, 아래는 땅과 거의 맞닿을 정도로 수렁입니다. 정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기어올라 보려고 합니다. 나는 좌익의 수하가 아니며 혼자 서고 혼자 걷는 음유시인입니다. 묘기를 부리는 바다표범이 아니란 말입니다.


장내는 소란스러워졌고 많은 참가자들이 밥 딜런에게 분노하다. 애당초 밥에게는 스스로 사회파, 활동가라는 의식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급시민자유회의 사람들은 밥을 사회파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상을 수여했다. 연배의 활동가들은 노골적으로 밥을 젊은 세대의 대변인으로 활동하는 것을 기대했고 그것은 밥의 노래가 구세대 좌익들에게 평가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밥 딜런은 긴급시민자유회의에 상을 거부하지도 않고 면전에 모욕을 주었다.

바에즈와 동행했던 1963년 여름부터 가을까지의 콘서트 투어 도중, 바에즈 자택에 체재했을 때에 하루 종일 무엇을 쓰는 것에 열중했고 이때 장편의 산문들을 썼는데 훗날 출판되는 밥 딜런의 첫 소설 ‘타란튤라’의 바탕이 됐다는 설도 있다. 백인에 의한 흑인 차별을 묘사한 ‘The Lonesome Death of Hattie Carroll’[11]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이때부터 정갈하고 억제를 통해 시적 정취가 넘치는 작풍을 쓰기 시작한다.

미국 내 각지를 순회공연이 끝나고 뉴욕을 돌아오고 수지 로톨로와 완전히 이별한다. 이때의 상심이 그 후 노래에도 반영된다. 1964년 5월 7일에는 런던으로 발길을 재촉하여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개최된 콘서트를 성공시켰다. 영국에서도 밥 딜런 붐이 일어나는데 1집 ‘Bob Dylan’, 2집 ‘The Freewheelin’ Bob Dylan’도 영국에서 좋은 평을 얻어 높은 판매량을 기록한다. 이 런던 체재 중 밥 딜런은 존 레논에게서 “콘서트에 가고 싶었다”라는 전보를 받았다고 한다.

이 영국 투어 직후 1964년 6월 9일 밤, 6시간 만에 4번째 앨범 전곡을 순식간에 녹음한다. 앨범명은 ‘Another Side of Bob Dylan’. 이 앨범에는 그동안 밥 딜런이 지금까지 사회적인 이슈를 담은 노래가 한 곡도 없다. 러브송, 특히 여성과의 관계에 대해 부른 작품도 적지 않았다.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블루스, 토킹 블루스를 과거에는 없던 난폭한 스타일로 불렀다. ‘Ballad in plain d’는 수지와의 결별을 은유가 아닌 노골적으로 노래한 노래다. 가벼운 노래는 적으나 여태까지의 이상으로 친근한 멜로디를 가진 곡들이 많다. 이 앨범을 듣고 여태까지 밥 딜런을 ‘저항가수’로만 인식한 일부 포크팬들은 ‘밥 딜런이 과거를 부정해버렸다!’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앨범에 수록된 My Back Pages라는 노래의 후렴구가 아, 그땐 내가 너무 늙어버렸지, 지금의 난 훨씬 젊다구였으니.

앨범은 1964년 8월 8일 발매한다. 이때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참여하는데 밥은 “사회는 경고를 필요로 하고 그것을 발하는 것은 젊은이였습니다. 세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밥 딜런’입니다.[12]"라는 소개를 받으며 올라간다. 노래는 ‘Another Side of Bob Dylan’의 수록곡 위주를 부르게 되는데 무대의 평은 좋지 않았다. 기존과는 매우 다른 앨범으로 포크 평론가들도 당황하게 한다. 이 해 여름에는 밥 딜런의 인생의 중요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컨트리 음악의 거장 조니 캐쉬, 당대 최고의 밴드 비틀즈였다. 참고로 비틀즈는 ‘The Freewheelin' Bob Dylan’을 듣고 딜런의 팬이 되었다.

‘Another Side of Bob Dylan’의 리코딩으로부터 반년 후 1965년 1월 중순, 다음 앨범용 리콘딩 세션이 진행된다. 이번엔 직접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른 게 아니라 스튜디오에 드럼, 베이스, 기타, 키보드의 실력자들을 모았다. 이때 밥 딜런은 매일같이 완성되는 곡들을 빨리 녹음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는데 곡조, 머릿속에서 분출되는 언어들의 비트가 자기 혼자 기타나 피아노를 치면서 만들어내는 사운드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다큐멘터리 ‘노 디렉션 홈: 밥 딜런’안에서 밥은 이 무렵 이렇게 말한다.

”더 이상, 혼자 해나갈 생각은 없었다. 소규모 밴드가 있는 편이 노래의 힘을 보다 잘 끌어낼 수가 있다고 생각을 했다. 일렉트릭으로 연주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꼭 현대풍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무렵 옛날 타입의 음악이라 생각되던 컨트릭 뮤직도 일렉트릭 계통의 악기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튜디오에 들어간 딜런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에 반응한 연주를 참가자 전원이 그 자리에서 계속 만들어간다. 사전 설명이 아주 조금 있었을 뿐이었다. 곡조에 대한 밥 딜런의 희망사항도 적었다. 처음 시작할 때 카운트를 세지 않는 곡들도 있었는데 밥이 기타를 두 소절이나 네 소절 치며 모두 황급히 그에 맞춰간다는 식이 대부분이었다. 제각각 밥의 음악을 듣고 자신만의 연주를 보여줬다. 참가자 중 한 사람이었던 브루스 랭호른은 그때를 “마치 텔레파시가 통하는 느낌이었다”고 회상했다. 이런 형식의 음악은 팝 업계에서도, 포크 세계어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밥 딜런이 본능을 통해 방출한 음악은 겉으로 보이는 장르를 파괴했다. 직접 기타를 치면서 부르는 두 곡을 포함한 전 11곡이 오버 더빙 편집도 없이 한 장의 앨범에 수록된다.

앨범 제목은 ‘Bringing It All Back Home’. 1965년 3월 22일 발매된다. 이 앨범은 빌보드 차트 6위, UK 차트 1위를 기록하며 대히트를 쳤고 평론가들에게 극찬을 받는다. 그로부터 약 3주 후 밴드 버즈가 밥 싱글 ‘Mr, Tambourin Man’을 커버한다. 이 노래는 1966년 6월 26일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한다.

앨범 발매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1965년 6월 15일, 밥 딜런은 새 앨범을 작업하기 위해 리코딩 세션을 개시한다. 드럼에는 바비 그레그, 베이스에 러스 새버커스, 피아노와 오르간의 폴 크리핀, 그리고 기타에 마이클 블룸필드가 참가한다. 15일에는 세 곡을 시험 삼아 연주했다. 그중에 ‘라 밤바’같은 코드 진행의 왈츠 곡도 있었다. 이 날은 어렴풋한 형태에서 그 원형 같은 것이 완성되려던 참이었다. 다음 날인 16일 밥은 그 곡에만 집중한다. 충동적으로 내뱉는 것처럼 가사를 적었더니 노트 20페이지 분량의 긴 이야기가 가사로 만들어졌고 그것을 곡으로 완성시킨다고 말한다. 이 노래는 바로 역사상 최고의 노래 중 하나라고 평가받는 ‘Like a Rolling Stone’이다.

밥은 이 노래를 싱글 음반으로 발매할 것을, 리코딩이 완료되는 순간 희망했다. 그러나 컬럼비아 레코드는 난색을 표했는데 이유는 6분은 너무 길다고 영업부, 홍보부가 모두 반대했다.[13] 컬럼비아 측은 ‘뭘 노래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니 다시 녹음해’라고 요구한다.

결국 발매가 보류되는데 이 곡의 테스트 음반은 오피스 서랍에 한동안 방치되었다. 그러던 것이 얼마 후 사무실이 이사를 가게 되자 신곡의 악보 담당 코디네이터 컨시다인은 우연히 다시 그 음반을 발견한다. 그는 그 음반을 뉴욕의 인기 디스코 ‘아더스’에 가지고 가서 DJ에게 부탁해 시험 삼아 틀어보라고 한다. 손님들은 그 노래에 춤을 추기 시작했고 그날 밤 이 노래는 몇 번이나 리퀘스트를 받는다. 그 DJ와 그 가게에 있던 라디오 방송국 디렉터가 다음날 컬럼비아 레코드에게 ‘Like a Rolling Stone’을 달라고 요청한다. 결국 1965년 7월 20일 긴급 발매가 결정된다. 선전 문구는 “6분짜리 싱글이라고? 아무렴 어때 밥 딜런을 6분 동안이나 들을 수 있는걸”이었다. 이 곡은 비틀즈의 ‘Help!’와 같이 빌보드 차트를 진입하고 1965년 9월 빌보드 차트 2위를 기록한다.

1965년 7월 25일, Like a Rolling Stone을 처음으로 공개한 공개적인 석상인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연주하고 발표한다. 전날인 7월 24일 앨런 로맥스가 주최자였던 블루스 워크숍에 밥의 친구 마이클 블룸필드가 소속되어 있는 ‘폴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가 출연했다. 그때 로맥스는 그들을 “중산 계급 출신 백인 애송이들의 블루스 밴드로 수상쩍은 자들이니 조심하도록”이라며 소개했고 이에 대해 밴드의 매니저 담당을 맡기로 했던 밥의 매니저 그로스맨은 격노한다. 이 광경을 본 밥 딜런은 다음 날 갑자기 무대를 블룸필드를 중심으로 일렉트릭 세트로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평론가들은 비아냥거렸던 로맥스의 대응에 밥 딜런은 포크 교조주의자에 대한 혐오가 용솟음친 날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어쿠스틱 연주를 기대했던 관객들은 그야말로 경악을 한다. 그 당시 포크 팬들은 포크가수란 포크 부흥의 정신과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밥의 행동을 배신으로 간주했다. 물론 밥을 호응하는 관객들도 있었는데 당시 객석을 바라보고 있던 동료 뮤지션 마리아 물다우르는 “관객들은 3분의 1 정도가 야유를 보냈다”라고 느꼈다고 한다. 무대 뒤에서는 “이건 포크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파와 “이것이 젊은이들이 바라는 것이니 변화를 받아들여라”라고 주장하는 파가 격론을 벌였고 밥 딜런은 당시 객석으로부터 “이래도 네가 동료냐!”라는 비난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밥 딜런은 “그때의 반응은 연주했던 곡이나 귀에 들리고 있던 곡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라고 느꼈다고 한다.

뉴포트 페스티벌 4일 후, 밥은 새로운 앨범을 위한 리코딩을 재개한다. 프로듀서는 밥 존스톤으로 바뀐다. 그중에는 객석에 비난에 응하여 “나를 동료라고 부르다니,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라고 노래하며 보수적인 포크계를 강하게 비판한 “Positively 4th Street’란 곡도 있었다. 리코딩은 8월 4일까지 계속됐고 월말에 앨범을 발표한다. 앨범명은 ‘Highway 61 Revisited’. 마이클 블룸필드가 활약했고 로큰롤과 블루스가 약동하는, 가사도 연주도 공격적인 앨범이었다. 전작보다 더 명료한 앙상블 사운드를 가져서, 개별 악기들과 그 위의 목소리가 더욱 명료했다. 앨범은 극찬을 받았고 밥 딜런을 대표하는 최고의 명반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다.

높아진 인기로 인해 밥 딜런이 본인 커리어 최장/최대 투어를 개최한다. 1965년 9월부터 1966년 3월까지 미국과 캐나다를 순회하며 도합 50회 무대를 소화한다. 무대는 전반이 밥의 솔로, 후반이 밴드 주도의 일렉트릭 세트라는 구성이었다. 투어 자체는 밥의 희망이었지만 2부 구성은 매니저 그로스맨의 제안이었다. 투어에 앞서 준비를 겸해 8월 28일에는 뉴욕 포레스트힐 테니스 스타디움, 9월 3일에는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볼에서 콘서트를 개최한다. 콘서트는 매진됐으나 포레스트힐에서는 야유가 극심했고 반대로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열광적인 성원을 얻었다고 한다. 밥은 장기 투어를 뒷받침해 줄 밴드를 찾고 있었고 더 호크스가 낙점됐다. 이 투어는 ‘더 밴드’와의 인연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이 투어 도중 아주 잠깐 동안의 휴일인 1965년 11월 22일, 밥 딜런은 사라 로운즈와 극비리에 결혼식을 올린다. 식에 참석한 사람은 매니저 그로스맨과 사라의 가정부뿐이었다. 다음 해 1월 6일에는 두 사람 사이에 첫아이 제스 바이런 딜런이 태어난다.

투어가 장기간에 걸쳐 있었기 때문에 밥은 이동하는 사이에 시간을 내서 그룹 더 호크스와 다음 싱글이나 앨범용 리코딩에 착수한다. 녹음장소는 주로 뉴욕이었지만 로스앤젤레스에서도 녹음이 시도되었다. 프로듀서 밥 존스톤은 자신의 고향 내슈빌에서 녹음을 해보자고 제안했지만 밥 딜런은 뉴욕을 주 녹음장소로 염두에 두었기에 이 제안을 거절했다. 그런 상황에서 1966년 2월 중순, 밥과 더 호크스가 남부에서 투어를 돌 예정임을 알게 된 존스톤은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과 함께 찰리 맥코이, 케네스 버트레이, 헨리 스체렉키, 웨인 모스, 허거스 피스 로빈슨, 제리 게네디, 조 사우스 등 당시 내슈빌의 내로라하는 세션맨들을 불러 모았다. 4일간 다섯 곡이 녹음되었다. 곡을 쓰고 녹음하는 작업은 밥이 스튜디오에 들어오고 나서 시작됐고 밥이 곡을 다 쓸 때까지 세션 뮤지션들은 트럼프를 치며 기다리고 한 곡을 다 쓰면 녹음을 한다. 녹음이 끝나면 뮤지션들은 다시 트럼프를 하고 밥은 다시 곡을 만드는 방식이었다. 밥이 곡을 완성하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뮤지션에게 들려주고 일부만을 파악한 채 녹음에 들어간다. 연주는 밥의 손짓이나 호흡을 보면서 진행됐는데 딜런은 뮤지션의 즉흥성을 중시했다. 앨범은 첫 주요 록 사이클을 완성하는 대표적 컬렉션이었다. 그때까지 녹음했던 딜런의 음반들 중 가장 많은 녹음시간이 소요된 음반이기도 했다. 예비 작업은 1965년 크리스마스 이전에 시작되었고, 이후 간헐적으로 겨울 내내 이어졌다. 음반에는 뚜렷한 사운드가 있었는데, 이것은 후에 앨범인 ‘Street-Legal’에서 재창조하게된다. 그는 그 소리를 “그 가느다란, 그 거친 수은 사운드”라고 표현했다. 앨범의 제목은 ‘Blonde on Blonde, 1966년 5월 16일 발매된다. 이 앨범 역시 극찬을 받았다. 팝으로서의 유연함과 번뜩이는 영감이 가득 찬 서정성이 서로 즉흥적으로 혼합되어 있고 포크, 컨트리, 블루스, R&B, 그중 뭔가 하나의 장르 속에 가둬두려고 하면 뭔가가 결정적으로 넘쳐 나오는 신선한 작품이었다. 당시의 유행과 완전히 거리가 먼 음악이기도 했다. 이 앨범은 후에 밥 딜런을 대표하는 최고의 명반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다. 싱글 ‘Rainy Day Women ♯12 & 35’은 앨범이 발매된지 1개월 후 빌보드 차트 2위를 기록한다. 앨범 판매량도 호조를 보였는데 2매 1세트의 LP로서는 경이로운 성적이었다.

이 당시 밥 딜런과 더 호크스는 영국에서 투어를 하는 중이었다. 3월 말 북미 투어를 마친 후 4월 9일 호놀룰루를 시작으로 5월 27일 런던의 로열 앨버트 홀까지, 오스트레일리아, 스웨덴, 덴마크, 아일랜드, 프랑스, 영국 등에서 총 24회의 공연을 한다. 9개월이라는 장기투어가 끝나고 밥은 자신의 이미지에 대해 언급한다.

”어느 순간부터 나에 대해 어떤 왜곡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것은 음악 이외의 사람들이었다. 나를 ‘시대의 대변인’이라든가 ‘무슨 무슨 양심’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생겨났다. 무슨 말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해가 안 되었다. 노래를 위해서라면 어떤 라벨이 붙여져도 상관없다. 하지만 공격을 받고 질문공세를 당하고 그에 대해 답변해야만 하는 상황이 너무 싫어졌다.”


당시 밥 딜런의 영국 투어를 중심으로 촬영해왔던 필름 ‘Eat the Document’란 제목으로 텔레비전 방영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으나 밥 딜런 자신이 필름 편집에 달려들었기 때문에 계획 자체가 좌절될뻔했다 그 무렵 밥 딜런이 처음으로 쓴 소설 ‘타란튤라’도 출판 계획이 틀어졌다. 내용이 난해했고 교정 작업 중 느닷없이 밥이 전면 교정을 제안한다. 출판사 맥밀란은 1966년 8월 말 출판을 앞두고 프로모션 계획까지 진행하던 상황이었다. 이미 “TARANTULA, Bob Dylan?”이라고 적힌 쇼핑백이 1만개나 팔린 상태였다. 맥밀란은 밥에게 개정 작업을 2주 이내로 완료해달라고 부탁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후술할 오토바이 사고까지 겹치며 타란튤라는 6년 뒤인 1971년 5월에야 간행된다. 이때 차기 투어까지 진행하게 되는데 1966년 8월부터 미 대륙 전역을 순회하며 연주하는 투어였다. 도합 총 64회였다.

그러나 1966년 7월 27일, 그날 밥 딜런은 이전부터 타고 다니던 오토바이, 트라이엄프 500을 타고 뉴욕 교외의 베어스빌에 있는 매니저 그로스맨 저택을 출발했다. 오토바이를 수리해달라고 가져다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갑자기 전도된 밥은 오토바이로부터 튕겨져 나왔다. 뒤따라오던 아내 사라가 밥을 싣고 병원으로 데려간다. 이 사고에 대한 언론들의 추측은 멈출 줄을 몰랐다. “밥 딜런 중태”, “의식불명”, “목 골절로 위독, 재기불능?” 온갖 찌라시들이 판을 쳤고 한참 지나 척추 몇 대에 금이 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결국 밥은 무기한 활동 정지를 발표한다. 투어도 출판도 영화 방영, 신작 녹음까지 모두 백지로 돌아갔다. “그 상태로 계속 내달렸다면 얼마 안가 죽었겠지”라고 당시를 되돌아보며 밥은 말했다. 목에 깁스를 하고 초음파 치료를 받거나 등의 통증을 호소하며 수영을 했다는 증언도 있다. 1966년 10월 컬럼비아 레코드사는 내년 3월까지 밥의 활동은 없다고 발표한다. 이 당시 요양 중이던 밥을 병문안해준 이는 긴즈버그나 펜베이커 등 극소수의 친구들뿐이었다.

사고가 난 지 몇 개월 후 더 호크스 구성원들과 밥 딜런은 1967년 2월부터 그 해 가을에 걸쳐 30여개의 곡을 써내려갔다. 6월부터는 당시 호크스와 모였던 빅 핑크 지하실에서 2트랙 테이프 레코더가 들어와 그동안 썼던 곡들을 녹음할 수 있게 된다. 녹음은 빅 핑크에서만이 아니라 밥의 자택, 친구 클래런스 슈미트의 집에서도 진행된다. 녹음한 총 테이크 수만 150개였다고 전해진다. 민간 전승곡의 가사가 지닌 신비스러움에 주목한 곡들도 포함된다. 이렇게 빅 펑크 지하실을 중심으로 녹음되어나온 기록물들 중에서 24곡이 선택되어 1975년 6월에 The Basement Tapes로 정식발매를 하게된다. 이전까지는 유출된 곡들이 수록된 해적판들이 돌아다녔다. 이 앨범은 다양성, 활력, 풍부함 그리고 시기에 구애받지 않은 적절함으로 엄청난 호평을 얻었다. 빌리지 보이스의 간판 평론가 로버트 크리스트가우는 “1975년 최고의 음반, 1967년에 나왔어도 그 해 최고의 음반”, 워싱턴포스트지는 “딜런은 현대 미국 팝 음악이 낳은 단 한 사람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로 인정받아야 한다.”라고 극찬했다.

당시 1967년 여름은 베트남 전쟁으로 다양한 뮤지션들이 목소리를 높이던 시기였고 재니스 조플린, 지미 헨드릭스 같은 기라성같은 뮤지션들이 등장했다. 히피사이키델릭이 미국음악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보이던 시기이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비틀즈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이 전 세계 음악씬에 충격을 줬고 핑크 플로이드, 롤링 스톤스가 등장하며 음악씬이 변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딜런은 이러한 변화와는 전혀 무관한 은둔자적인 생활을 보냈다. 그때의 심정을 ‘자서전’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실은 오로지 경쟁뿐인 사회에서 뛰쳐나가고 싶었다. 아이들이 태어났기 때문에 삶이 변했고 나는 주위 사람들이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로부터 멀리 벗어났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사고방식을 조정하고 타인의 책망하는 것을 중단하는 일이었다. 자신을 단련하여 성장하며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야 했다. 매스컴은 자신들이 내린 판단을 간단하게는 취하할 수 없었고 나는 그 상태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내 손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갈아엎어 사람들의 나에 대한 인식을 고쳐나가야 했다.”


밥이 은둔해 있을 동안 컬럼비아 레코드사는 1967년 3월 밥 딜런의 유명한 10곡을 골라 베스트앨범 ‘Bob Dylan's Greatest Hits’를 발매한다. 이 앨범은 예상 밖의 대히트를 거두며 밥 딜런 최고 판매량 앨범이 된다. 밥은 1967년 7월 컬럼비아 레코드사와 재계약을 체결한다. 컬럼비아는 최고의 대우를 해주기로 약속했고 밥은 새로 4장의 앨범을 녹음하는 것이 의무 사항이었다.

밥 딜런은 컬럼비아와의 재계약 후 내는 첫 작품, 1967년 12월 27일 발매된 ‘John Wesley Harding’을 발매한다. 당시 현란한 사운드를 구사하는 사이키델릭 록과는 정 반대의 소리를 담은 앨범이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밥 존스톤이 프로듀서를 맡았고, 녹음은 내슈빌에서 진행되었다. 밥이 기타와 하모니카를 연주하고, 반주는 베이스에 찰리 맥코이, 드럼에 케네스 버트레이가 맡았다. 수록곡 모두 이미 작곡이 끝났기에 9시간 만에 녹음을 완료했다. Blonde on Blonde로 내슈빌의 분위기에 친숙해졌고 담담한 노랫소리와 환희가 엷고 넓게 배어져 있는 앨범이었다. 딜런은 이 앨범에서 멜로디 라인과 꼭 필요한 반주로만 이루어진 포크-컨트리의 단순성을 지향했다. 이 앨범 역시 평단에게서 극찬을 받았고 상업적으로도 히트를 친다. 홍보를 하지 않았는데도 첫 주에만 25만장이라는 경이로운 판매고를 기록했다. 혹자는 이 앨범을 “최초의 성경적 록 음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68년 1월 20일 드디어 사고 후 처음으로 공식 무대에 선다. 그 전년도인 1967년 10월 3일 사망한 포크의 전설 우디 거스리를 추도하는 콘서트였다. 컨트리풍 정장을 입고 더 호크스에서 더 밴드로 이름을 바꾼 그룹과 함께 거스리의 곡 중 세 곡을 노래했다. 공연 마지막에 출연자 전원이 함께 부른 합창곡도 참여한다. 같은 해 6월 5일, 아버지 에이브러햄이 심장마비로 타계한다.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랜만에 귀향을 하게된다. 같은 달 아들 사무엘이 태어난다. 그 전년도에 딸 안나가 태어났고 밥은 그렇게 네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

1969년 4월 세 번째로 내슈빌에서 녹음한 앨범 ‘Nashville Skyline’을 발표한다. 앨범 재킷 사진은 밥이 웃고 있는 사진을 썼는데 이 사진 자체는 램블링 잭 엘리엇의 앨범에 대한 패러디이다. 앨범에는 대중적이고 목가적인 곡들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 앨범을 듣고 딜런의 팬들은 놀라게 되는데 밥이 기존과 전혀 다른 목소리인 거칠고 탁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이 앨범으로 ‘컨트리 음악의 딜런’으로 이미지 변신을 성공하며 앨범도 성공을 거둔다. 이 앨범은 컨트리의 거장 조니 캐쉬와 듀엣을 한 ‘Girl from the North Country’도 수록되어 있다. 밥과 캐쉬는 그 후 듀엣 앨범까지 녹음하려 했으나 무산된다. 이 당시 ‘조니 캐쉬 쇼’도 출연한다. 1969년 9월 20일 멜로디 메이커가 조사한 국제 팝 설문조사 결과 딜런은 국제적 남성 가수 1위를 차지하기도 한다.

1969년 4월부터는 새로운 앨범을 작업하게 된다. 이 앨범은 오리지널 노래뿐만이 아니라 커버곡도 녹음하게 되는데 그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 앨범이 바로 ‘Self Portrait’이다. 밥 딜런은 계속해서 본인의 이미지를 변화시킨다. 이 당시 밥은 “생각이 난 것은 뭐든지 벽에 내동댕이치고, 벽에 들러붙은 것을 모두 발표한다. 벽에 들러붙지 않았던 것들을 다 긁어모아 그것 역시 모두 발표한다”라는 생각하고 ‘Self Portrait’를 발표한다. 나아가 이 앨범은 밥이 여태까지 들어왔던 20세기 전반의 포크송, 블루스와 동시대에 청취하고 연주되던 촌스러운 컨트리 송, 가스펠 등을 다시금 학습하여 체득한 옛날 음악에 대한 오랜 흥미와 이해가 투영되었다. ‘Self Portrait’는 은둔 생활 후의 성과라는 측면이 있었고 ‘Self Portrait(자화상)=최근 3년간의 나의 흥미’인 메시지도 있었다. 1970년 6월 8일 ‘Self Portrait’는 발매되자마자 각 매체의 혹평을 받았다. 더 이상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밥의 마음을 평론가들은 이해하지 않으려 했다. 평론가들 중에는 이해할 필요조차 없다고 어거지로 논평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평단의 혹평과 달리 앨범 판매량은 호조를 기록했고 미국, 영국 차트 모두 정상을 차지한다.


4. 1970년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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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못지 않은 전성기.

1970년 5월 상순부터 뉴욕에서 녹음이 재개된다. 프로듀서 존스톤은 ‘Self Portrait’에서의 세션에서 좋은 느낌을 감지했고 새로운 앨범에서도 같은 세션을 쓴다. 새롭게 만든 곡들과 맥클리시 희곡용으로 쓴 곡들 중 몇 곡을 레코딩한다. 알 쿠퍼, 데이비드 브롬버그, 찰리 대니일스, 거기에 밥 딜런이라는 단촐한 편성이었다. 그런 시기에 비틀즈 멤버 조지 해리슨이 밥 딜런을 방문한다. 밥 딜런은 해리슨이 가세한 세션도 녹음하고 앨범을 만들어가면서 앨범의 전체맥락을 집어간다.[14] 1970년 10월 21일 ‘New Moring’이라는 제목으로 앨범이 발매된다. 목소리는 다시 ‘John Wesley Harding’ 시절의 스타일로 돌아왔다. 음악은 블루스, 컨트리, 가스펠, 재즈 시 등 다양한 종류를 담아냈다. 오랜만에 밥의 시를 들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밥의 팬들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감성적이고 활기가 결여됐다는 부정적 평가도 있었으나 과거의 밥이 돌아왔다며 절찬하는 평가가 다수였다. 밥은 양쪽 모두 좋은 징조라고 받아들이며 “이 앨범이 미국을 얽매고 있는 것들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며, 현 상태를 위협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은 분명했다.”라고 말한다. 판매량은 역시 호조를 보였고 UK 차트에서 1위를 기록한다. 밥은 이때 열린 우드스톡 음악 예술 축제, 알타몬트 무료 콘서트, 그 어떤 반전 록 이벤트에도, 참가는커녕 구경도 안 간다. 자연스럽게 이 시점부터 밥을 둘러싼 미디어의 기만과 선동도 사라진다. 1970년 4월 매니저 그로스맨과의 매니지먼트 계약이 만료되고 밥은 계약을 갱신하지 않는다. 음악 출판 업무, 매니지먼트 관리는 밥 딜런의 스태프가 인계받는다.

싱글 ‘Watching the River Flow’가 발매된 지 2개월 정도 후인 1971년 8월 1일 밥은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조지 해리슨이 개최한 방글라데시 구제 콘서트에 출연한다. 무려 2년 만에 오르는 무대였고 인도적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자선 공연이었다. 여기에서 리언 러셀의 베이스, 조지의 기타, 링고 스타의 탬버린이라는 반주와 함께 어쿠스틱 기타와 하모니카로 다섯 곡을 불렀다. 밥은 하모니카 홀더를 늘어뜨리고 데님으로 된 자켓을 입었다.

1971년 11월에는 1960년대 후반의 대표곡들과 새로운 녹음, 신곡 등을 포함한 6개의 앨범 미수록곡도 수록한 두 장 세트의 LP ‘Bob Dylan's Greatest Hits Vol. II’가 발표된다. 앨범 재킨은 방글라데시 콘서트 때의 밥의 사진이 사용된다. ‘Tommorow is a long time’도 수록되는데 이 곡은 엘비스 프레슬리가 커버한 유일한 밥 딜런의 노래다. 앨범은 전작 베스트앨범과 마찬가지로 대히트한다. 같은 해 또다시 가스펠 풍의 저항 싱글을 발표한다. 캘리포니아 주 샌퀀튼 교도소에서 일어나 죄수 살해 사건을 테마로 한 ‘George Jackson’이란 곡이었다. 섣달 그믐날 더 밴드의 새해맞이 라이브에 게스트로도 출연해 파워풀한 라이브를 선보이기도 한다. 이때의 공연은 더 밴드의 ‘Rock of Ages’의 보너스 트랙으로 수록되어 있다.

1972년에는 앨런 긴즈버그의 세션에 참가하기도 하고 엘비스 프레슬리그레이트풀 데드의 콘서트를 보러 다니며 지낸다. 11월에는 샘 패킨파 감독의 서부극 ‘관계의 종말’에 배우로도 출연하며 음악도 본인이 맡는다. 사운드트랙도 밥 딜런이 맡게 되는데 훗날 수많은 커버송을 양산한 Knockin' on Heaven's Door이 이 영화에 나온다.

1973년 7월에는 사운드트랙 음반 ‘Pat Garrett and Billy the Kid’, 같은 해 11월 16일 ‘Self Portrait’의 아웃테이크집이라 말할 수 있는 ‘Dylan’이 발매된다. ‘Can’t Help Falling in Love’, ‘A Fool Such as I’. ‘Big Yellow Raxi’ 등 유명한 명곡, 유명한 커버를 포함한 앨범이었다. 이 앨범은 밥의 전 앨범을 통틀어 가장 혹평을 받고 있는 앨범이며 컬럼비아 레코드사와의 계약 종료 정리 작업과 관련된 발매였고 밥이 이 앨범에 대해 언급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밥 딜런은 이 앨범 이후 컬럼비아사가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이유로 재계약을 거부한다.

이때 신생 회사인 어사일럼 레코드사에서 더 밴드와 앨범을 만들고 전미 투어를 하면서 라이브 앨범을 내놓으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한다. 어사일럼의 오너 데이비드 게펜은 더 밴드의 로버트슨과 친해진 후 밥에게 한 제안이었다. 이 제안에는 유명한 프로모터 빌 그레햄도 참여한다. 밥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1974년 1월 3일부터 투어 일정이 시작됐고 이 투어는 앨범이 제작되기 전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1973년 여름부터 녹음은 계속된다. 앨범은 ‘Planet Waves’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1974년 1월 17일 발매된다. 투어중에 앨범이 발매되었는데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한다. 이 앨범은 팝 컨트리 색채가 전혀 없고 밥을 듣는 사람을 고무시키는 것처럼 노래한다. 투어는 대형 스타디움 위주로 이루어졌다. 약 40일 동안 21개의 도시에서 40회의 공연을 했다. 구성은 우선 밥과 더 밴드의 무대, 이어 더 밴드의 단독 무대, 밥이 어쿠스틱 기타를 치면서 노래하고 나서 더 밴드가 다시 등장, 마지막에는 밥과 더 밴드가 함께 막이 내릴 때까지 공연을 하는 형식이었다. 라이브 앨범은 투어 최종일인 로스앤젤레스 공연 연주를 주축으로 제작되어 ‘Before the Flood’라는 타이틀로 1974년 6월 20일 발매된다. 1965년~1966년 투어와 거의 비슷한 멤버들로 구성된 투어였지만 밥 딜런이 포크록을 시도한 후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고 덕분에 야유하는 관객들은 없었다. 하지만 밥 딜런은 훗날 이 투어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밥 딜런을, 내 백 밴드(the band)는 더 밴드를 연기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 투어에서 우리들이 받았던 가장 큰 칭찬은 ‘믿기 어려운 에너지다’란 것이었다. 그 말을 들으며 구토가 나올 것 같았다. 우리들은 기대에 응했다. 무의미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15]


1966년 이후 가정이 밥 딜런의 중심이었지만 1974년에는 투어가 그의 중심으로 전환되었고 이는 곧 아내 사라와 결별하는 계기가 된다. 투어 전년도에 밥은 캘리포니아로 이사했고 광대한 토지를 구입한 후 개축에 개축을 거듭했다. 공사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경에 다다르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사라와 대립하는 일만 커진다. 1974년 봄, 서로의 감각이 크게 엇갈리는데 밥이 노먼 레벤이라는 화가에게 그림을 사사한 일이 발단이 되었다. 레벤은 밥에게 그리는 것의 원리를 추상적이며 인상적으로 가르쳤다. 그의 방식은 이러했다. 밥 앞에 화병을 놓고 30초 정도 지나면 그것의 밥의 눈앞에 치운다. 그러고 화병을 그리라고 밥에게 명령하고 밥은 그리기 시작했으나 화병에 대해 무엇 하나 떠올릴 수 없었다고 한다. 밥은 2개월간 레벤에게 그림을 배웠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 사라에게 레벤한테 배운 것들을 설명한다. 그러나 사라는 이를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밥이 이야기를 해도 사라에게 통하지 않게 된다. 밥은 몇 년 후 “우리들의 결혼생활이 파탄 나기 시작했던 것은 그 무렵부터였다.”[16]라고 그때의 심정을 밝혔다.

당시 레벤과의 교류는 밥의 창작 의욕을 되살아나게 된다. 그 결과 나온 앨범이 밥 딜런의 최고 명반 중 하나이자 대중음악 최고의 명반 중 하나인 ‘Blood on the Tracks’이다. 밥은 이 당시 이렇게 말한다.

”한 장의 그림 같은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회화처럼 일부분 만을 볼 수도 있고 전체를 볼 수도 있는 노래다. ‘Tangled Up in Blue’에서 그것을 시험해보았다. 시간의 개념과 등장인물들이 1인칭에서 3인칭으로 변하는 방법을 시험해본 결과, 듣는 사람에게는 3인칭 인물이 말하고 있는지, 혹은 1인칭 인물이 말하고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전체를 거시적으로 조망할 때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1974년 8월 1일 밥은 어사일럼 레코드스와의 계약 갱신을 중지하고 다시 컬럼비아사와 레코드와 재계약한다. 그 해 여름에 밥은 미니애폴리스에서 지내며 곡을 쓴다. 교외에 농장을 사서 농민들에게 빌려주고 오래된 가옥을 주거지로 삼아 인접한 헛간을 아트 스튜디오로 다시 만든다. 밥의 동생 데이비드가 거기로 이사를 가서 밥의 집 인근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다. 밥의 입장에서는 그곳은 후에 휴가 기간 동안 남동생 일가, 어머니, 아이들과 지내는 소중한 공간이었다.

1974년 9월 새 앨범의 녹음이 시작된다. 레벤의 영향이 밥의 가사를 보다 다각적으로 만들어주었다. 직유와 은유의 교차, 정경묘사의 시점 변화, 인물들과의 교차가 복잡다단하게 이루어지며 덩달아서 담고있는 이야기도 복잡해진다. 기존의 작품에서는 없었던 회화적인 이미지가 각각의 곡들에 떠오른다. 밥이 기존의 실생활에서 겪은 괴로움에서 영감을 받아 태어난 곡들이 대다수를 차지했고 딜런의 영적 자서전으로 불리기도 했다. 녹음은 뉴욕에서 완료되었지만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자 12월에 미니애폴리스에 돌아올 즈음 동생 데이비드[17]의 조력을 얻어 지방 뮤지션들을 불러 몇 곡을 다시 녹음한다. 새 앨범의 타이틀은 ‘Blood on the Tracks’, 1975년 1월 20일 발매된다. 평단의 앨범 반응은 최고조에 달했고, ‘Blood on the Tracks’는 딜런이 7년이나 9년 만에 내놓은 최고의 작품이라 불렸다. 심지어 딜런의 최고 역작이라 부르는 평론가들도 있었다. 빌리지보이스의 평론가 로버트 크리스트가우는 음반에 A를 주며 “딜런의 새로운 입지는 그 어떤 것 못지않게 당황스럽다. 그렇지만 가장 즉각적이고 가장 심오한 놀라움은 음악에서 온다. 전체적으로 이것은 앞선 음악가의 가장 성숙하고 확신에 찬 음반이다”라고 호평했다.

1975년 여름, 그리니치 빌리지에 장기간 체류한다. 잭 엘리엇이나 밥 뉴워스 등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들의 라이브에 손님으로 초대받게 된다. 그들의 무대 뒤에서 일하고 있던 믹 론슨, 롭 스토너 등과의 교류도 이때 시작된다. 연출가이자 작사가인 자크 레비도 우연히 길에서 만나 같이 곡을 만들기도 한다. 옥중에서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는 루빈 허리케인 카터에 대해 노래한 곡 ‘Hurricane’도 이때 탄생한다.[18] 밥과 레비는 많은 곡들을 공동 작곡하는데 밥의 추상적 표현을 구체적으로 표현해 내는 일을 레비는 매우 효율적으로 수행했다.

1975년 7월 레코딩이 시작된다. 20명이 넘는 세션뮤지션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중 몇 사람씩 세션을 맡아 곡을 만들어간다. 몇 번인가 그런 상황이 반복된 후 일단 세션은 해산되고 곧바로 작은 규모의 편성 세트를 결성한 후 곡이 완성되어갔다. 바이올린을 담당한 스칼렛 리베라는 바이올린을 들고 길을 걸어가다가 밥의 눈에 띄어 그에게 작업 권유를 받고 합류하게 된 세션 뮤지션이었다. 이 세션과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쌓은 교우 관계를 바탕으로 밥은 녹음과 동시에 작은 마을들을 찾아다니는 유랑공연을 시도한다. 이러한 공연의 구상은 이미 1960년대 중반 무렵 밥에게 들었다고 로비 로버트슨은 밝혔다.

”집시나 카라반처럼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이고 다양한 곳에서 자유롭게 연주하며 동시에 그것이 하나로 통일성을 가질 수 있는 투어를 하고 싶다고 밥은 말했다.”


악단의 구성으로는 롭 스토너, 스칼렛 리베라 등, 레코딩 작업의 소장파 조로 이루어진다. 밥은 잭 엘리엇, 로저 맥귄 등에게도 참여를 요청했고 1965년 헤어지고 이후 거의 만난 적이 없었던 조안 바에즈에게도 참가를 권유한다. 그렇게 참가 인원은 겉잡을 수 없이 불어나서 킹키 프리드먼, 티 본 버넷, J.스티븐 솔즈, 앨런 긴즈버그, 데이비드 맨스핀드, 여배우 로니 블레이클리까지도 유랑공연을 위한 여행 멤버에 속하게 된다.

밥 딜런은 이 투어를 영상으로 남기고 싶어했다. 그것도 단순히 기록만 하는 것이 아닌 출연자, 여행 대동자들의 연기도 포함해서 말이다. 투어의 연주씬, 무대 뒤편의 모습, 여행 중의 대화, 그리고 여행을 하면서 즉흥적으로 떠오른 영감에 근거해 쓰여진 대본을 이용한 연극이 첨가된다. 두 개의 조로 나누어 촬영반을 편성하는데 각본 담당으로 샘 셰퍼드를 동행시켰다.[19] 밥이 정한 화 제목은 ‘레날드와 클라라’였고 투어명은 ‘Rolling Thunder Revue’로 정해진다.[20]

1975년 10월 30일 여행은 매사추세츠 주 프리머스에서 막을 올렸다. 공연 1회당 서너 시간이 들 정도로 길었기 때문에 관객들은 예측할 수 없는 공간에 들어가 긴장감 속에서 무대에 몰입하게 된다. 투어 일행은 밥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즉흥 연기 장면의 촬영 때문에 종종 연기를 중단하곤 했다. 출연자는 그때그때 지명당한 사람이 밥이 지시한 장소로 끌려가 거기서 무엇을 연기하는지 지시를 받는 식이었다. ‘지시’라고는 해도 아무런 테마도 없는 경우가 많았고 단순한 잡담이나 일신상에 대한 이야기가 수록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날마다 들어가는 참가자 중에는 밥의 전 여친들도 포함됐고 심지어 거기에는 전 아내 사라도 포함되었다. 사라는 영화에서 클라라 역할을 맡았고 밥은 그녀에게 쫓기는 레날드역을 연기했다. 한마디로 밥 부부 주연의 극 영화에 시샤 풍자극이 끼어들어간 구조였다. 방대한 양의 촬영분은 그 후 1년이상 밥의 감수로 편집되었고 무려 4시간분의 방대한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1978년 도시부 극장에 일주일 만에 일부 공개되었으나 일주일 만에 상영을 종료했다. 다시 2시간분량의 축소판을 만들었으나 평이 매우 좋지 않았다.

‘Rolling Thunder Revue’는 1975년 12월 8일 루빈 허리케인 카터의 변호 비용 조달 자선 이벤트로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행해진 쇼를 끝으로 잠시 막을 내린다. 미 북동부, 토론토, 몬트리올을 돌아 도합 31회 공연되었다. 투어 첫 번째 시기의 라이브 음원은 2002년 부틀렉 시리즈로 발표되며 상당한 호평을 받게 된다.

1976년 1월 16일 ‘Desire’가 발매된다. 일렉트릭 록 음반이며 가사에 서양의 전설과 현대의 의미를 결합시킨 앨범이었다. 욕망(Sesire’라는 단어는 이미 1964년부터 자주 입에 올렸다. Eleven Outlined Epitaphs에서 11번째 에피타프에서 그는 폭풍우 이후 “꾸준히 변화를 의미하는 하늘 아래서, 사신은 욕망을 환영할 거라고 선언한다.[21] Rolling Thunder Revue의 기점 중 하나가 되었던 1975년 7월 세션을 수록한 앨범으로 평단의 평은 호의적이었고 상업적인 면에서도 성공한다. 이 앨범은 그렇게 70년대 딜런을 대표하는 명반 중 하나가 되었다.

1976년 3월, 밥은 에릭 클랩튼의 앨범 ‘No Reason To Cry’ 제작에 참가한다. 그러고나서 8개월 후 더 밴드 해산 기념 이벤트에 참가한다.

4월 18일 Rolling Thunder Revue 투어는 다시 재개된다. 플로리다 주 레이크랜드에서 시작하여 미국 남부지역을 돌았고 5월 25일 유타 주 솔트레이크시티에서의 공연으로 막을 내린다. 이 가운데 1976년 5월 23일 콜로라도 주 포트콜린즈에서의 무대가 NBC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방송되었다. 음원 일부는 라이브 앨범 ‘Hard Rain’으로 1976년 9월 10일 발매된다. 후기 투어에서 밥은 전기보다 더 거친 목소리로 노래했다.

1977년 3월 1일 사라가 이혼을 청구했는데 양육권, 이혼수당, 법원 감독하의 부부공동재산 분배를 원했다. 딜런의 변호사들은 특정 법률 문서들의 대중적 금지하는 판결을 얻어냈다. 사라는 판결 끝에 아이들에 대한 일시적 양육권, 말리부 자택에 대한 독점권 사용권을 얻었다.

딜런은 즉시 대규모 투어를 계약한다. 1966년 이후의 첫 월드 투어였다. 1978년 2월부터 12월에 걸쳐 도합 130회였다. 투어는 일본에서 시작되었다. 1978년 2월 17일 밥은 도쿄땅을 밟는다. 2월 20일 무도관 공연을 시작으로 도쿄 8회, 오사카 3회, 도합 11회의 콘서트가 개최한다. 전설적인 뮤지션이 일본에 왔기에 일본 매스컴도 시끄러워졌고 NHK는 밥이 처음으로 일본에 온 것에 일본인의 반응을 추적하는 다큐멘터리 ‘밥 딜런이 왔다’를 내보낸다. 이 당시 밥 딜런의 일본 공연은 비틀즈가 일본에 온 이후 가장 중요한 음악적 사건으로 취급되고 있다.

무도관 공연에서 밥은 하얀 정장 차림으로 하얗게 화장을 하고 등장한다. 밴드는 밥 딜런의 생애 가장 많은 11인 편성이었다. 밥을 보조하는 형태로 음악감독을 베이스의 롭 스토너가 맡았다. Rolling Thunder Revue에 이어 기타의 스티븐 솔즈와 기타와 바이올린의 데이비드 맨스필드가 가세했고 유럽 투어 중이었던 기타의 빌리 크로스가 롭 스토너에 의해 호출됐다. 드럼에는 킹 크림슨의 초기 멤버였던 이안 왈리스, 퍼커션에 모타운의 바비 홀, 색소폰의 스티브 더글라스, 토니 윌리엄스, 알란 파스쿠아, 코러스에는 헬레나 스피링스, 조 앤 해리스, 데비 다이같은 쟁쟁한 뮤지션들이 가세했다. 일본의 밥 딜런 음반 배급원인 소니뮤직의 제안으로 밥은 2월 28일과 3월 1일의 일본 무도관 공연을 라이브 리코딩하여 LP 2매 1세트로 발매한다. 일본 공연은 2부 구성으로 도합 28곡, 그것들 중 거의 연주 순으로 22곡이 뽑혀 앨범에 수록되었다. 앨범 타이틀은 ‘BOODOKAN’, 1978년 8월 21일 일본에서 발매된다. 하지만 곧바로 해외에서 주문이 쇄도, 일본에서 오는 수출판의 고액 거래를 대비하여 컬럼비아 레코드사는 다음 해 1979년 4월 전세계를 대상으로 이 앨범을 발매했다. 밥의 생애 첫 단독 라이브 음반이었다.

투어는 일본에서 뉴질랜드, 호주를 돌아 일단 미국으로 돌아온다. 투어 도중 롭 스토너가 밴드 내의 알력다툼 때문에 해고되었고 이 빈 자리를 엘비스 프레슬리의 밴드에서 활동했었던 제리 셰프가 채워준다. 코러스의 데비 다이도 투어 도중에 빠진다. 대신해서 참가한 사람이 바로 미래의 아내가 되는 캐롤린 데니스였다. 참가 의뢰를 받았을 때 캐롤린 데니스는 밥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한다.

투어 재개는 1979년 6월 이루어졌다. 밥은 이 기간 동안 신작 앨범의 녹음을 감행한다. 프로듀서는 밥 존스톤을 예정했으나 스케줄이 맞지 않아 엔지니어 돈 드비토가 대신 맡게된다. 신곡은 전에 이미 작곡이 끝난 상태였다. 녹음장소는 밥이 리허설용으로 사용할 수 있게 구가옥을 개조하여 만든 산타모니카의 런다운 스튜디오로 정해진다. 음향상태는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로 구성된 연주에서 얻게되는 강한 결속감을 통해 다른 앨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자적인 사운드가 나오게 된다. 일각에서는 스티브 더글라스의 색소폰이 사운드의 핵이 되고 있었으며 곡조에 공통된 것이 느껴진다는 이유로 브루스 스프링스틴과의 비슷함을 지적했으나 밥 딜런은 “50세 이하 녀석들은 흉내 내거나 하지 않는다”라며 반박했다. 앨범은 사랑에 대한 고뇌와 초조를 노래했고 종교적인 특히 성경에서 영감을 얻은 곡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밥 딜런은 앨범의 완성도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앨범 제목은 “Street-Legal”, 1978년 6월 15일 발매된다. 평단의 반응은 찬반으로 갈려서 매우 미묘했으나 시간이 지난 현재는 재평가되어 딜런의 수작 앨범 중 하나로 남게 된다. 미국에서는 11위, 영국에서는 1위를 기록한다.

1978년 투어는 유럽에서 돌아와 미국 각지를 돈 후 12월 16일, 마이애미에서 종료된다. 투어 도중 밥은 코러스 중 한 사람인 헬레나 스프링스와 깊은 관계를 맺으며 두 사람은 곡을 함께 만들기에 이른다. 그동안 함께 만든 곡은 10여 곡에 이르며 그중 두 곡을 에릭 클랩튼이 사용한다.[22] 이 시기 헬레나 이외에도 여러 명의 흑인 여자친구를 사귀고 있었다. 이 당시 밥은 흑인 문화에 심취해있었으며 투어 도중 공연 후 식사로 소울 푸드를 제공받기도 했고, 일상생활을 보낼 때도 흑인 음악을 들었다. 흑인적인 것을 다각적으로 탐구했다는 증언도 있다. 이 당시 밥은 이혼 후 자녀들을 만날 수가 없어서 여러 명의 여자친구를 사귀며 위로를 얻게되는데 그녀들의 영향으로 밥 딜런은 가스펠, 거기서 더 나아가 기독교 신앙에까지 관심의 폭을 넓히게된다. “Street-Legal”의 수록곡 ‘Señor’는 기독교에 대한 관심에서 태어난 곡이다.

헬레나 스프링스에 의하면 밥은 당초 기도 방식조차 모른 비신자였지만 설명을 하자 기독교 탐구를 시작한다. 다른 여자친구였던 메리 앨리스 아티스는 소규모 복음교회 빈야드 펠로우쉽의 목사를 소개해 준다. 그때 딜런은 목사에게 자신의 인생은 공허하다고 말한다. 밥은 같은 교단의 신도 학급에 들어가 1979년 전반에 걸쳐 3개월간 성경을 배운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세례를 받고 이른바 Born Again(신생)파 교도가 된다. 밥 딜런의 친척들 중에는 이 선택을 화를 냈고 유대교도로 성장한 밥의 자녀들도 동요하게 된다. 하지만 훗날 밥은 당시 'Born Again'이라는 단어는 사용한 기억이 없다고 말한다.

밥은 그때의 신앙을 바탕으로 새로운 곡들은 만든다. 당초에 밥이 프로듀서가 되어 그 신곡들을 캐롤린 데니스가 노래하는 앨범으로 만들려 했으나 무산되었고 결국 밥 딜런 본인이 직접 부르는 ‘Slow Train Coming’이 1979년 8월 20일 발표된다. 녹음은 앨라배마 주에 있는 머슬 숄스 사운드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었다. 프로듀서는 거장 제리 웩슬러와 베리 베케트가 담당한다.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마크 노플러, 픽 위더즈, 팀 드럼몬드, 머슬 숄스 혼스의 호른 세션에 여성 코러스 세 사람이 포진한다. 앨범은 듣는 이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밥의 노래에는 윤기가 다시 살아났고 델라니&보니나 리언 러셀 등의 수많은 가스펠 록 명작들과 비견되는 동시에 진지한 표현력이 살아있는 노래와 비트가 깊게 결합됐다.

앨범은 평단의 평은 갈렸으나 로버트 크리스트가우가 B+를 주며 전작보다 좋은 평을 얻었으며 이 앨범을 혹평한 사람들 대부분은 앨범의 퀄리티가 아닌 딜런의 기독교 회귀에 대한 반감에 의해 혹평했다. 이런 논란이 사그라든 현시점에서는 상당한 수작으로 평가받는 앨범이다. 상업적으로 3위에 오르며 역시 이전 작품보다 좋은 성과를 얻으며 대성공을 거둔다 밥 딜런은 ‘Gotta Serve Somebody(누군가를 섬겨야만 해)’를 싱글컷했고 결과는 빌보드 차트 24위로 ‘Knockin' on Heaven's Door’ 이후 최고의 성과였다.

드럼에 짐 켈트너, 프레드 태키트, 오르간에 스프너 올드햄, 피아노에 테리 영, 그리고 리코딩 멤버인 팀 드럼몬드와 여성 코러스 세명이 포진한 멤버를 이끌고 1979년 11월부터 1980년 12월까지 전미 투어를 나선다. 이때 기존의 작품은 한 곡도 안 불렀다. 여성들이 노래하는 가스펠로 시작하고 밥이 등장해 직접 만든 가스펠을 불렀다. 객석은 당연히 대혼란이었다. 야유와 박수갈채가 뒤섞였지만 밥 딜런은 미동도 안 했다. 밥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많은 미디어들이 오랜만에 밥 딜런을 이때 까기 시작했고 기독교도들 중에서 밥 딜런의 신앙 자체는 진심인지 의심하는 사람이 있었고 유대인 사회에서는 경원시되었다. 록매니아들에게는 비아냥을 받았다. 이 무렵 밥이 적으로 돌린 자들은 자신이 일렉트릭 기타를 잡았던 그때보다 몇 배는 더 많았다.

하지만 밥 딜런은 1980년 2월 27일 ‘Gotta Serve Somebody’로 그래미상 최우수 남성 록 보컬 퍼포먼스를 수상한다. 이때 ‘Gotta Serve Somebody’를 가사를 바꿔 부르기도 했다.


5. 1980년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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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체기 그리고 네버 앤딩 투어의 시작.

1980년 6월 19일 가스펠 시리즈 2탄인 ‘Saved’를 발매한다. 보다 직접적인 메시지가 다수 포함되었고 연주도 매우 공격적이었다. 비트도 R&B 스타일에서 록으로 변화한다. 이 앨범은 상업적인 면에서도 굉장히 부진했고 호불호가 갈린 전작에 비해 비평가들에게 혹평을 받는다. 이때 가스펠 스타일로 변화한 밥에 실망해 투어도 악화되는데 밥은 다시 1980년 가을부터 예전 레퍼토리의 무대를 부활시킨다. 이때 라이브는 80년대 딜런 라이브 최고로 꼽히기도 한다.

1981년 4월부터 5월까지 밥 딜런은 투어 멤버에 몆 사람인가의 게스트를 더해 신작 리코딩을 시작한다. 딜런은 1980년 가을에 앞선 두 작품에 이어 가스펠 시리즈 제작에 들어갔는데 평소와 달리 곡을 만드는 시간이 꽤 걸렸다. 이 당시 밥 딜런은 1960년대의 록 스타가 모두 살해당하는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휩싸였다고 한다. 호신용으로 밴드 멤버들에게 방탄조끼까지 보냈을 정도다. 실제로 이 당시 밥 딜런을 스토킹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스펠 시리즈 제 3탄 ‘Shot of Love’가 1981년 8월 12일에 발매한다. 이 앨범은 전작들보다 신앙과 대중성 모두 고려했고 당대의 인기 가수였던 나나 무스쿠리에게 의뢰를 받아 만든 곡 ‘Every Grain of Sand’ 큰 호평을 얻기도 한다. 비평적인 면에서는 전작 Saved 보다는 좋은 평을 받았지만 상업적인면에서는 Saved보다 더 실패한다. 이 소식을 들은 밥 딜런은 크게 낙담하고 한다. 하지만 이 앨범의 리코딩 세션에서 밥 딜런은 앨범 세 장 분량의 작품들을 녹음했다. 투어 밴드를 축으로 데니 코치머, 도나드 덕 던, 론 우드, 링고 스타 등 여러 사람들이 세션으로 참가했다.

1981년 6월부터 투어를 재개한다. 미국에서 유럽으로 투어를 했고 미국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가스펠의 영향으로 관객 수가 늘지 않아 고전했다. 단, 연주와 노래 모두 질적으로 훌륭했기 때문에 무대는 대호평을 받았다. 고등학교 시절 같이 조커즈로 활동한 랠리 키건도 두 번 무대에 올라 노래한다. 이 당시 딜런은 설교도 하지 않았고 예전 레퍼토리의 연주를 끼워넣어 훌륭히 소화해냈다.

하지만 밥 딜런은 개종에 대한 거듭되는 비난, 실적 부진, 심지어 전 매니저 그로스맨에 과거에 얽였던 일로 법정 투쟁까지 발발했고 스태프가 사망하는 등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다. 결국 1982년이 되자마자 자신의 런다운 스튜디오를 폐쇄해버리고 활동을 중단한다. 1982년 밥 딜런은 공적인 장소에 두 번밖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번은 작곡가 명예의 전당 입성 축하식에서였고 또 다른 한번은 6월 6일 핵무장 해제를 촉구하는 집회였다. 밥은 단상에 올라가 조안 바에즈와 ‘With God on Our Side’, 지미 버펫의 ’A pirate Looks at Forty’ 그리고 본인의 곡 ‘Blowin’ in the Wind’를 듀엣으로 불렀다.

1983년 4월 밥 딜런은 새 앨범의 리코딩을 재개한다. 이 잠적 1년동안 앨런 긴즈버그와 녹음을 하거나 알 쿠퍼 등과 데모 테이프를 만들거나 클라이디 킹을 프로듀스하거나 카리브해의 앙귈라에서 현지 뮤지션들과 교류하기도 하면서 지낸다. 이때 프랭크 자파에게 프로듀스 의뢰를 하러갔는데 결국에는 다시 마크 노플러에게 프로듀스와 참가 뮤지션 선정을 의뢰한다. 레게 콤비인 슬라이&로비, 노클러의 절친 앨런 클라크, 롤링 스톤즈의 맴버였던 믹 테일러 등 맴버들이 포진해 있다. 밥은 이때 달라진 에코 감각이나 저음으로 울리는 사운드와 표면적으로는 아니지만 자신의 노래와 가사가 새로운 모습으로서 제시할 수 있는 자세에 대해 모색했다. 1년간의 휴식 중 밥 딜런은 20곡 가까운 신곡을 만들었고 새로움 앨범 세션에서는 오리지널 16곡, 14곡이나 되는 커버곡을 녹음한다.

앨범의 제목은 ‘Infidels’였고 1983년 10월 발매한다. 수록곡은 8곡이었고 수록되지 못했던 녹음곡들 중에는 걸작이라고 평가받는 ‘Blind Willie McTell’이 있었는데 이 노래는 후에 부틀렉 시리즈 1탄 ‘The Bootleg Series Volumes 1–3 (Rare & Unreleased) 1961–1991’에 수록된다. 앨범 안쪽 재킷에는 예루살렘 언덕에서 웅크리고 있는 밥의 사진이 보인다. Infidels(이교도)이란 다시 유대교로 돌아간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이스라엘 옹호로 추측할 수 있는 노래, 소돔과 고모라 인용, 자본주의 비판, 달 착륙 규탄 등 세상의 모습을 여러 각도로 비판하는 앨범이었다. 한 평론가는 “기독교나 유대교 중 그 어느 쪽에서 봐도 결국 딜런 자신은 이교를 믿는 어리석은 백성에 불과하다는 선언”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 당시 인터뷰에서 “앞으로는 완성되었다고 느껴질 때까지 앨범 발매는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23] 전작보다 훨씬 질이 높아진 앨범은 오랜만에 비평가들이 호평을 했고 침체기였던 딜런의 80년대를 대표하는 수작이다. 그러나 상업적인 면에서는 미묘한 반응이었다.

싱글 앨범 ‘Jokerman’의 비디오 클립[24]을 제작하거나 1984년 3월 펑크 밴드 프라그즈(The Plugz)[25] 맴버들과 인기 TV쇼 ‘데이비드 레터맨의 레이트 나이트’에 출연하기도 한다. 리허설도 하지 않은 곡이었던 소니 보이 윌리엄슨 2세의 ‘Don’t Start me to Talkin’을 갑자기 불러 뒤에 있던 프라그즈를 당황시키기도 했다.

1984년 3월 28일, 2년 만에 투어에 복귀한다.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네덜란드, 벨기에 등 유럽을, 산타나와 2인 주도 체재로 7월까지 순회 공연한다. 연 인원 10만명 이상으로 투어는 대성공을 거둔다. 밴드 페이시스의 맴버였던 이안 맥리건, 더 블루스브레이커스의 멤버였던 콜린 알런, 그룹 KGB의 맴버였던 그레그 서턴, 그리고 믹 테일러라는 구성원 등이 백을 담당한다. 밥은 오랜만에 빌 그래햄의 프로모션에 의한 스타디움 투어에 대응하여 록 형태의 어레인지와 대음량으로 화려한 밴드를 편성한다. 이 투어의 녹음을 통해 라이브 음반 ‘Real Live’가 만들어진다. 프로듀서는 글렌 존스였다. 익숙한 곡들이 줄줄이 나오고 산타나의 연주도 수록되어 있다.

이 투어 이후 밥 딜런은 차기작을 진행한다. 단독 프로듀스로 단속적으로 세번의 세션을 거쳐 만들어진다. 믹스는 힙합 프로듀서 아서 베이커가 담당한다. 밥 딜런은 그 당시의 절정기를 맞은 사운드를 원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기용이다. 이 앨범 제작 중 1985년 1월 28일, 마이클 잭슨라이오넬 리치, 퀸시 존스가 주도하는 역사적인 자선 레코드 We Are the World에 참여하게 된다.

앨범의 제목은 ‘Empire Burlesque’, 1985년 5월 30일 발매된다. 악곡이 굉장히 풍요로워진 앨범이고 제각각에 서로 다른 배려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일렉트릭한 음색에 비중이 실린 백 트랙과 밥의 목소리가 서로 반발하는 곡도 있다. 컬럼비아 레코드사 측의 요청으로 수록곡 ‘Tight Connection to My Heart’의 프로모션 비디오가 일본에서 촬영된다. 감독 폴 슈레이더가 제대로 일을 못해서 배우 바이쇼 미츠코만 나오는 퀄리티가 떨어지는 작품이다. 앨범은 상업적으로는 부진했고 평단에서도 호불호가 갈리긴 했지만 올뮤직에서 4.5점을 맞는 등 나쁘지 않은 실적을 거둔다.

또 이 해 여름 7월 13일 미디어에 출연하는데 밥 겔도프가 빌 그래햄, 하비 골드스미스와 함께 런던과 필라델피아를 이원 중계로 연결시켜 전 세계에 방영하는 자선 록 이벤트 라이브 에이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출연자로 등장한다. 당초에 피터 폴 앤 메리와 함께 ‘Blowin' in the Wind’를 부를 예정이었다. 실제로 리허설로 진행됐지만 밥이 막판에 거절한다. 결국엔 피터 폴 앤 매리 대신 키스 리처드, 론 우드와 진행한다. 이 때 공연이 끝난 후 느닷없이 밥 딜런이 말을 꺼내며 조그만 해프닝이 발생한다.

”아프리카인들을 위해 모인 돈의 일부, 아주 조금을, 100만이어도 200만이어도 좋으니 미국 농민의 부채 탕감을 도와주기 위해, 은행에 빚을 지고 있는 농민들을 위해 써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밥이 솔직한 발언에 밥 겔도프는 이 이벤트에 대한 자신의 의도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는 데 경악했다. 하지만 밥의 말을 들은 컨트리가수 윌리 넬슨은 농민 지원 이벤트 개최를 결심한다. 이 이벤트에 밥 딜런이 참가하기도 한다. 이때 백 코러스를 맡아주었던 것은 톰 페티 앤 더 하트브레이커스였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7일, 밥의 커리어의 작품들 중 엄선한 LP 5장에 수록산 박스 세트 ‘Biograph’가 발매된다. 여러 곡들이 시대 순이 아닌 랜덤으로 나열되어 있고 수록곡 53곡 중에 무려 21곡이 미발표 곡이다. 이것이 훗날에 ‘부틀렉 시리즈’로 이어진다. 이 박스세트는 높은 가격에도 25만 세트가 팔리며 성공을 거둔다.

1986년은 톰 페티 앤 더 하트브레이커스와의 투어로 일본 공연이 있었는데 이 공연에서의 밥 딜런은 컨디션 난조로 다소 주눅이 들어 있는 상태가 보인다. 이 투어는 2월부터 8월까지 계속된다. 투어를 진행하면서 그 사이에 밥 딜런은 앨범을 제작한다. 샘 셰퍼드, 캐롤 베이어 시거, 톰 패티 등과의 공동 작품으로, 주니어 파커,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의 커버 등 폭 넓은 내용을 담고 있다. 앨범은 ‘Knocked Out Loaded’라는 제목으로 1986년 7월 14일 발매한다. 싱글 히트를 노릴만한 대중적인 작품이 있는가 하면 11분이 넘는 실험적인 작품도 있다. 전체적으로 거칠게 들리는 느낌이 드는 앨범이나 밥의 커리어에 있어서 실험적인 작품이었다. 그러나 평단에 평은 만점을 준 위블리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혹평을 내렸다. 상업적인 면에서는 본인 커리어 미국 빌보드 앨범 차트 최저 순위를 기록한다.

이 앨범 발매 한 달 정도 전쯤 밥 딜런은 캐롤린 데니스와 정식으로 결혼한다. 데니스는 이 해 초 밥 딜런의 아이를 출산했다. 이 결혼에 관해서는 스태프 전원이 외부에 비밀로 할 것을 맹세했다고 한다.

이 시기 딜런은 생애 최초로 연기에 눈을 돌리게 되는데, 1987년 개봉한 영화 <Hearts of Fire>에 직접 주연으로 출연한다. 당시 그가 직접 발굴한 미모의 신인 여가수 피오나 플래너건(Fiona Flanagan)과 영국 출신의 꽃미남 배우 루퍼트 에버렛이 공동 주연한 이 영화는 그의 성공기를 담은 자전적 성격의 음악영화였지만, 전형적인 삼각관계를 다룬 어설픈 각본과 배우들의 발연기(...)로 엄청난 혹평을 받고 그대로 묻혀버렸다. 해외에서도 이 영화는 밥 딜런 생애 최대의 흑역사로 취급받는 수준이라 오늘날에는 거의 완전히 잊혀져 버렸고, 그나마 딜런이 3곡을 직접 참여한 OST만 비교적 호평을 받았다.

1987년이 되자 봄에는 다음 앨범 녹음에 들어갔다. 브라이언 페리의 노래로도 잘 알려져 있는 ‘Let’s Stick Together’ 등 커버곡 중심이었고 참가 뮤지션도 많았다. 오리지널 신곡 ‘Silvio’와 ‘Uglest Girl in the World’는 그레이트풀 데드의 로버트 헌터와의 공동작품이다. 세션 중에서 완성도가 양호한 것들을 모와 왔다는 구성으로 앨범에 대한 인상이 가볍다. 앨범의 제목은 ‘Down in the Groove’이며 다음 해 1988년 5월 19일 발매된다. 전작에 이어 평단의 앨범의 평은 매우 좋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이 앨범은 전작에 이어 본인 커리어 사상 미국 빌보드 앨범 차트 최저 순위를 기록한다.

이 당시 1980년대 후반 밥 딜런의 앨범 퀄리티는 밥 딜런의 커리어에서 가장 좋지 않다. 귀에 친숙하기 어려운, 뭔가 판단하기에 어려움을 느끼게 해주는 곡들이 다수 있다. 기독교 개종 이후 낸 앨범 가스펠 삼부작은 많은 리스너들에게 위화감을 주긴 했으나 ‘Saved’를 제외하면 평단의 나쁘지 않은 평을 얻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딜런의 앨범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딘가 납득할 수 없는 좋지 않은 퀄리티였다. 딜런의 자서전에 의하면 당시 톰 페티 등과 함께 투어를 하는 도중, 수년간 느껴왔던 우울증이 기력이나 체력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첬다고 한다. 이 당시 밥 딜런은 은퇴를 고려하기도 했다. 앨범을 만든 후 투어에 나선다는 제작 사이클로 인한 정신적 압박도 있었다. 작곡 자체가 본인의 뜻대로 되지 않자, 과거 리코딩 세션에서 모아둔 것들을 손본다거나 다른 아티스트와의 공동 작업을 시도해본다거나 커버곡을 수록하고 있던 것이다.

이런 최악의 부진에 빠저 있을 무렵 딜런은 그레이트풀 데드와 조인트 쇼트 투어를 진행하는데, 그 리허설 도중 그레이트풀 데드 측으로부터 수년간 라이브에서 하지 않았던 곡을 하고 싶다는 제안이 나온다. 밥은 매우 당황스러워하며 동요했고 리허설장을 퇴장해버린다. 밥 딜런은 당시 평소 하고 있던 곡, 자신이나 관객들에게 친숙한 곡들을, 그냥 즐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본인의 무대의 레퍼토리는 수년간의 라이브를 걸치며 어느새 한정되어 있었고 그런 사실을 후배 그레이트풀 데드를 통해 알게 되었다는 점에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모든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밥 딜런은 빗속을 해맸고 거리의 끝 길모퉁이 쪽에서 재즈 콤보의 연주소리가 들려왔다. 밥은 그 소리를 듣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무대 근처 카운터에 기대앉아 그것을 들었다. 드럼, 베이스, 피아노 트리오를 뒤로 하고 나이가 든 남성 가수가 스탠다드 재즈 발라드를 부르고 있었다. 밥 딜런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은 자연스러운 힘을 담아 노래하고 있었다”고 느꼈다고 한다. 그것을 듣고 있다가 갑자기 그 가수가 밥 딜런의 영혼을 통해 “이런 식으로 하는거야”라고 말을 걸어온 것 같았다고 한다.

”그의 목소리를 계기로 나는 자기 자신을 되찾았던 것이다. 나도 예전에는 이런 식으로 했었다고 생각했다.

(중략)

기본적이고 단순한 이 기법을 나는 잊고 있었다.”


이 당시 그레이트풀 데드와의 투어는 밥 딜런에게 중요한 자산이 된다. 무대가 일상이었고 음악 활동의 중심이었던 그레이트풀 데드의 라이브 방식은 밥 딜런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이들의 투어 음원 중 7곡이 뽑혀, 투어로부터 약 1년 반 후인 1989년 2월 9일 ‘Dylan & the Dead’라는 라이브 앨범으로 발표된다. 이 앨범이 발표된 직후인 2월 12일, 밥 딜런은 잉글우드에서 열린 그레이트풀 데드의 콘서트에 기습 참가한다. 무대에 올라간 밥 딜런은 자신의 곡은 안하고 그레이트풀 데드의 노래만 하겠다고 우겼고 어쩔 수 없이 그레이트풀 데드는 같이 함께 해주었다. 여기에서 웃긴 상황이 발생하는데 밥 딜런이 그레이트풀 데드의 곡 가사를 거의 몰랐고 최악의 무대가 되버린다. 모두가 설득해서 결국 밥 딜런의 곡을 노래했다. 밥 딜런과 그레이트풀 데드는 이후로도 관계가 계속됐고 1995년 8월 그레이트풀 데드의 멤버였던 제리 가르시아가 세상을 떠날때에는 장례식에 참석했고, 공식적으로 추도문[26]도 발표한다.

1987년 가을, 톰 페티 등과 함께 한 유럽 투에서 밥 딜런은 레퍼토리를 대폭 확장한다. 무려 110곡이었다. 노래 부르는 것의 고통은 제거됐고, 오히려 얼마만큼이나 할 수 있는지 스스로 목적의식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런데 투어 후반인 1987년 10월 5일, 스위스 로카르노의 야외무대에서 새로운 사고에 직면한다. 3만 명의 관객들 앞에서 노래를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된 것이다. 원인은 알 수 없었고 순간적으로 밥 딜런은 패닉에 빠진다. 여기서 딜런은 “잃어버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중해질 필요도 없다.”라고 밥 딜런은 생각했다. 자서전에 의하면 이 사건이 다시 태어난 듯한 에너지를 딜런에게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이 날을 기점으로 밥 딜런은 은퇴에 대한 생각을 접는다.

”나는 완전히 새로운, 진정한 의미에서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퍼포머가 된 기분이 들었다”


톰 페티와의 투어 종료 후, 바로 그 자리에서 투어 매니저에게 다음해인 1988년의 투어를 요청한다. 밥은 이때 연간 200회의 콘서트를 희망했다. 이 무렵 딜런은 1960년대 초 로니 존슨[27]에게 직접 배웠던 기타 연주법을 떠올렸고 그것을 응용해보고자 했다. 이 연주법은 관습에 의거하지 않는, 노래를 활성화시키는 존재감있는 연주법이라고 밥 딜런은 설명하기도 했다. 기타 주법에 대한 변화는 “자신이 연주하고 있는 것의 골격에 얽매이지 않고 노래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1988년 4월, 조지 해리슨이 프로듀서 겸 뮤지션인 제프 린을 동반해서 밥 딜런의 집에 찾아온다. 조지 해리슨의 앨범 ‘Cloud Nine’의 프로모션용 12인치 싱글의 B면에 넣기 위한 곡을 녹음하고 싶으니, 밥 딜런의 홈 스튜디오를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조지와 린은 작곡을 개시했고 거기의 린의 프로듀스로 앨범을 제작중이었던 로이 오비슨도 어쩌다 보니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고 우연한 일이지만, 빌렸던 기타를 밥 딜런에게 돌려주기 위해 톰 페티도 딜런의 집에 왔다.

“모처럼 이 정도의 멤버들이 모였으니 한 곡 함께 해보자”라고 밥 딜런도 가세하여 만들어진 노래가 바로 “Handle with Care”다. 이 곡은 히트를 치고 곧 바로 앨범 제작으로 발전한다. 밴드 이름까지 붙여보자는 이야기가 나와 이 5인조에 ‘Traveling Wilburys’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 데뷔 앨범 ‘Traveling Wilburys Vol. 1’는 1988년 10월 18일 발매되고 평단의 대호평을 받고 빌보드 200 3위까지 오른다.

밥 딜런은 1988년 6월 7일부터 10월 중순까지 미국 전역을 도는 투어에 나선다. 드럼, 베이스, 기타 그리고 밥 딜런이라는 4인 편성의 밴드였다. 이 해부터 2018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1년에 80~120회의 무대를 매년 계속하고 있다. 투어에는 각 회마다 명칭이 붙여지기 마련이지만 딜런의 팬들은 이 해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콘서트 활동을 ‘네버 엔딩 투어(Never Ending Tour)’라고 부르고 있다. 밥은 이때부터 회장도 1,000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소규모 공간부터 2만명 규모의 스타디움까지 다양하게 투어를 한다. 관객과의 대면을 통해 노래하는 것이 자신의 음악에 가장 적합한 존재양식이라는 생각을 굳힌 결과다.

1988년 밥은 자택 키친에서 창밖의 언덕 경사면이 달빛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느닷없이 영감이 떠올라 ‘Political World’라는 제목의 곡 가사를 스무 소절까지 단숨에 써버린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딜런은 한 달만에 무려 20곡을 쓰게된다. 가사들이 정리되어 완성된 상태에 있었으면서도, 이러한 것이 리코딩되기에 이른 것은 약 1년 후의 일이다. 그 무렵 딜런이 깊은 교류를 나눴던 U2보노가 밥 딜런의 집의 놀러 왔던 것이 계기가 된다. 잡담을 하다가 우연히 보노가 “새로운 곡은 있는 겁니까?”라고 묻는다. 밥은 옛날에 썼던 그대로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곡을 보노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보노는 딜런에게 프로듀서 다니엘 라노아를 추천한다. 1989년 3월, 딜런은 라노아가 있는 뉴올리언스를 갔고 그리고는 1개월 남짓하는 체재를 통해 앨범 ‘Oh Mercy’를 완성시킨다.[28]

앨범은 뉴올리언스 민가 하나 전체를 빌려 기자재를 가지고 들어와 ‘Oh Mercy’가 리코딩되었다. 해당 지역의 분위기, 느낌 그 자체까지 곡의 배경이나 기반에 반영시키는 것이 라노아의 방식이었다. 창작 활동상 하나의 벽을 뛰어넘어 새로운 영역을 탐색하고 있던 밥 딜런은, 뉴올리언스라는 지역에서 라노아와 작품을 만드는 것에 굉장히 좋아했다. 밥의 자서전 1장 전체가 ‘Oh Mercy’ 제작에 대한 이야기에 할애하고 있을 정도. ‘Oh Mercy’는 밥 딜런이 노래와 언어를 비트와 감응시키는 일에 매진한 앨범이기도 하다. 1989년 9월 12일 앨범이 발매됐고 오랜만에 평론가들에게 대호평을 얻었고 1980년대를 대표하는 명반이 된다. 상업적인 면에서는 미국에서는 여전히 부진했으나 UK차트에서는 간만에 6위까지 오르는 좋은 성적을 거둔다.

프로듀서 다니엘 라노아는 당시를 회상하며 자신의 책에 이렇게 적었다.[29]

”바야흐로 더 이상 각광받는 일이 없어진 복서가 컴백해서는 왕좌를 탈환하려는 듯한 분위기였다.”[30]



6. 1990년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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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의 부활.

1990년 초 신작 앨범 리코딩을 하게 되는데 프로듀서는 돈 워즈와 데이비드 워즈, 통칭 워즈라고 형제라고 불리는 프로듀서였다.[31] 이들은 직접 밥 딜런의 앨범을 프로듀싱하고 싶다고 나섰다고 한다.[32]

이 세션을 통해 태어난 앨범이 바로 ‘Under the Red Sky’다. 이 앨범은 악곡은 새로우나 일부러 구식의 접근 방식으로 완성시켜본다는 타입의 작품들이 많이 수록됐다. 워즈 형제는 다니엘 라노아가 프로듀스한 ‘Oh Mercy’의 좋은 성과를 의식하고 있었고 좋은 앨범을 만들려고 했다. 녹음 실무를 담당한 돈 워즈는 밥과 세상 간의 관계성, 록/밥 역사상 밥의 위치를 다시금 정립하는 것에 대해 갖가지 방법을 짜냈다. 활동 30주년을 맞이하려는 밥 딜런에 대한 의미 있는 시도였다. 그러나 악곡 각각의 매력을 끄집어내는 것에 관해서는 어려움이 있었다.

스티비 레이 본, 데이비드 린들러, 와디 와치텔, 슬래쉬, 알 쿠퍼, 조지 해리슨, 엘튼 존, 데이비드 크로스비 등 화려한 참가 멤버로 주변을 다지고 ‘긍정적으로 과거를 돌이켜본다’는 워즈의 방식은, 과거 작품들도 신곡도 마찬가지로 무대에서 계속 노래하고 있는 밥 딜런의 입장에서 위화감이 적지 않았다. 밥 딜런은 훗날 이 앨범의 제작 과정을 이렇게 말했다. “매일 서로 다른 밴드와 함께 연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에코가 너무 많아 힘들었다.” 심지어 이 앨범 제작과 트래블링 윌버리스 신작 리코딩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딜런은 이 당시 낮에는 조지 해리슨, 제프 린과 공동 작업을 하고 밤부터 새벽까지는 워즈 형제의 지휘하에 가사에 멜로디를 넣어 노래하고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 조지와 제프가 있는 곳으로 다시 가는 생활을 했다. 앨범 ‘Under the Red Sky’는 1990년 9월 11일 발매된다. 상당히 공을 들인 앨범이나 상업적인 면에서도 부진했고 평단에 호평을 받았던 ‘Oh Mercy’와는 달리 대부분의 평단에게 혹평 세례를 받는다.

이 당시 1년 가운데 3분의 1 가까운 시간을 투어로 보내게 되며 자연스럽게 아내 캐롤린과의 사이도 식어갔고 1990년 8월 캐롤린은 밥에게 이혼 소송을 했고 1992년 이혼한다.

같은 해 10월 밥 딜런은 뉴욕 주 웨스트포인트의 미육군사관학교에 초청받아 콘서트를 개최한다. 거기서 사관 후보생들에게 ‘Masters of War’을 들려준다. 그리고 3개월 후인 1991년 1월 17일 걸프전쟁이 발발한다. 걸프전이 한창 진행되는 가운데 밥 딜런은 1991년 1월 28일부터 2월 17일까지 유럽 순회공연을 했고 2월 20일 귀국 즉시, 그래미상에서 생애공로자로 평생공로상을 수상한다.[33] 밥은 수상식에 참석하여, 증정식 전 기념 라이브에서 ‘Masters of War’을 격한 연주와 쥐어짜내는 목소리와 함께 공연한다. 이 모습과 노래와 연주는 한참 전쟁 지지에 대한 기운이 고양되던 미국 전역에 방영되었다. 밥의 이 무대에는 찬반이 엇갈리기도 했다. 밥 딜런은 평생공로상 수상 후 스피치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는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언젠가 너를 남기고 사라져갈 이 세계에서는 나쁜 것들이 쉽사리 너를 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그렇게 되어도 너는 스스로의 잘못을 참회하고 다시금 시작할 힘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그렇게 믿어주시므로”


밥 딜런에게는 자신이 과거에 녹음했던 대량의 미발표 음원들이 있었고 그것을 발굴한 ‘The Bootleg Series’가 컬럼비아 레코드를 매수한 소니 뮤직에 의해 시작한다. 이 부틀렉 시리즈는 현재에도 계속해서 발매되고 있으며 딜런의 음악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 중 하나이기도 하다. 1991년 3월 26일 3종 1세트로 첫 번째 부틀렉 시리즈 ‘The Bootleg Series Volumes 1–3 (Rare & Unreleased) 1961–1991’가 발매된다. 1961년부터 1991년까지의 전 58곡이 수록됐는데 그중에 미발표곡은 45곡이었다. 이 시리즈는 평론가들에게 극찬을 받는다.

이 당시 투어의 고정 멤버들과 많은 무대를 소화하게 되는데 한편으로는 밴드 편성에 의한 앨범 리코딩에 흥미를 잃어간다. 매일같이 대면하는 관객들이 최고의 청취자라는 의식이 높아진 상태였다. 투어를 하면서 밥 딜런은 자택에 설치된 스튜디오에 기타를 치면서 노래 부르는 전통 음악 작품을 두 편 녹음한다. 이 앨범들은 밥 딜런이 직접 편곡, 프로듀싱했다. 여기서 딜런은 기타 테크닉을 선보이기도 한다. 이전에는 자작곡 중에 그것을 집어넣거나 차용하는 형태로 전달되고 있었는데, 이 두 작품에는 가사나 곡 모두 옛날 형태를 답습하고 있고 밥 딜런의 해석도 적다. 첫 번째 작품은 1992년 11월 3일 발표된 ‘Good as I Been to You’, 두 번째 작품은 1993년 10월 26일 발표된 ‘World Gone Wrong’이다. ‘World Gone Wrong’에는 블루스가 다수 수록되어 있다. 두 앨범 모두 평단에 평은 주로 호평이었지만 상업적 성과에서는 부진했다.

1992년은 밥 딜런의 레코드 데뷔 30주년이었다. 그것을 축하하는 음악 이벤트가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10월 16일 개최된다. 밥 딜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수많은 뮤지션들이 모여 밥 딜런의 노래를 불렀다. 음악 감독은 과거 딜런 밴드의 기타리스트 G.E.스미스였고 참석한 뮤지션들은 대부분의 반주를 맡는 ‘하우스 밴드’에 부커티 앤 앰지스, 짐 켈트너, 안톤 피그, 케롤린 헤스터, 더 클랜시 브라더스, 토니 메이컴, 로비 오코넬, 리치 해이븐스, 조니 캐쉬 & 준 카터 캐쉬, 윌리 넬슨, 스티비 원더, 존 멜렌켐프, 루 리드, 에디 베더, 시네이드 오코너, 닐 영, 에릭 클랩튼, 더 밴드, 조니 윈터, 로저 맥귄, 조지 해리슨 등 거물급 아티스트들이 대거 출연했다. 이 공연은 전 세계로도 생중계됐다. 네 시간에 걸친 콘서트에 밥 딜런은 마지막에 등장해서 직접 기타를 치면서 두 곡[34]을 불렀고 ‘My Back Pages’를 닐 영과 에릭 클립튼 등이 릴레이로 선보였다. TV 방송시간 틀 안에 다 수록할 수 없어서 중계방송에서는 볼 수 없던 앵콜 장면에서는 밥 딜런은 혼자 직접 기타를 치면서 ‘Girl From the North Country’를 부르기도 했다. 이벤트는 성황리에 개최됐고 밥 딜런 역시 매우 감격했다고 전해진다. 이 날의 영상을 CD와 VTR로 시판됐다.

1994년 2월 밥 딜런은 일본 방문 투어를 개최했다. 이 해에는 5월 20일 나라 도다이지 경내에서 개최된 ‘The Great Music Experience 94 AONIYOSHI’에도 출연해 도쿄 뉴필하모닉 관현악단과의 공연 형식으로 ‘A Hard Rain's a Gonna Fall’, ‘I Shall Be Released’, ‘Ring Them Bells’를 부른다. 이 콘서트는 전 세계로 위성 생중계된다. 나아가 1994년 8월 14일에는 25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우드스톡 94’에도 출연한다. 딜런의 콘서트와는 전혀 다른 그런지하고 얼터너티브 록을 즐기는 젊은 관객들이 주를 이뤘기 때문에 반응을 알 수가 없었으나 딜런이 등장하자마자 장내는 환희를 하며 끓어올랐고 공연은 성공적으로 마첬다.

이 해 11월에는 MTV 언플러그드에 언제나 투어를 함께한 딜런 밴드와 출연한다. 브랜드 오브라이언이 해먼드 오르간으로 연주를 보조했다. 밥은 오래된 전통적인 포크송을 선보이려 했으나 제작 측으로부터 제지가 있어 어쩔 수 없이 히트곡 위주의 무대로 변경한다.

이 당시 밥 딜런의 레이블은 곡들을 손보고 이렇게 저렇게 순서를 바꿔가며 특별 음반들을 발매한다. 1994년 11월 15일에는 ‘Bob Dylan's Greatest Hits Volume 3’, 1995년 2월 7일에는 ‘Highway 61 Interactive’[35], 1996년 6월 2일에는 ‘The Best of Bob Dylan’이 발매된다.

1991년부터 1996년까지의 밥 딜런은 투어 위주의 활동을 하면서 본인의 자작곡을 발표하지 않는다. 1996년에는 ‘의무방어전적인 음반’마저 나오지 않게 된다. 당시 딜런은 본인의 계약이 갱신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컬럼비아 레코드/소니 뮤직은 밥 딜런과 관계를 끊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1996년 가을 밥 딜런은 한 뉴욕 호텔 객실에서 프로듀서 다니엘 라노아에게 새로운 가사를 읽어주고 있었다. 라노아의 자서전 ‘Soul Mising’에 의하면 라노아가 그 가사를 다 읽자, 딜런은 ‘레코드로 만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고, 그 가사는 라노아가 여태까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여태껏 일찍이 그 누구도 써본 적이 없는 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몇십 년에 걸친 인생 경험과 고백이 적힌 페이지가 내 눈앞에 있었다. 로큰롤은 젊은이들만의 전유물이라는 신화가 이 사내의 강철처럼 냉철한, 새파란 눈에 의해 분쇄되었다.”

― 다니엘 라노아


라노아는 이 가사를 읽자마자 딜런의 새 앨범이 걸작이라고 직감했다. 밥의 새로운 가사 안에 들어있는 비트와 멜로디에 대한 이미지의 조각들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밥은 그때 리코딩에 참고하라며 로큰롤, 블루스의 추천 레코드 리스트를 라노아에게 건넸다. 거기에는 찰리 패튼, 리틀 월터, 아서 알렉산더 등의 작품들이 적혀 있었다. 그 작품들에 공통되는 사운드 특성은 주로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의 작품들이 가지는 황량함, 녹음 기자재의 한계점을 음악의 파워가 능가함으로써 발생하는 비틀림, 라노아의 자서전에는 과대 입력(오버드라이브)이라고 적고 있는 현상에 의해 생기는 사운드, 바로 이것이 밥 딜런이 갈망하고 있는 것이라고 라노아는 추측했다.

밥의 새로운 앨범의 본격 리코딩 작업은 마이애미의 크라이테리아 스튜디오에서 진행됐다. 드러머 4명, 기타 2명, 페달 스틸 기타 1명, 슬라이드 기타 1명, 키보드 1명, 오르간 겸 아코디언 1명, 퍼커션 1명, 그리고 라노아 자신이 몇 종류나 되는 기타를 가지고 참가한다. 이 인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밥의 노래가 시작되길 기다리는 스튜디오 라이브 형식이었다. 사운드의 특색을 담당한 것은 키보드의 제임스 딕킨슨과 오르간의 명수인 오기 메이어스다.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느낌과 묵직한 중량감 양쪽 모두를 두 명의 건반주자가 자아냈고 포크, 블루스, 로큰롤이 교회음악으로 접착되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해주었다. 11일 정도의 녹음 작업 후,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믹스한 후 완성 작업이 진행되었다. 밥은 완성단계에서도 가사나 코드를 추가적으로 변경했다. 앨범의 내용은 실연, 방황, 고독, 좌절, 체념, 죽음을 아름답게 혹은 잔혹하게 표현한다.

도합 11곡이 수록된 이 앨범의 제목은 ‘Time Out of Mind’로 붙여졌고 1997년 9월 27일 발매된다. 앨범이 발매되자마자 그야말로 평단에서 오랜만에 극찬 세례가 쏟아진다. 평단은 거장의 부활이라고 찬사를 보냈고 이 앨범을 기점으로 80년대부터 주춤했던 음악 커리어가 완벽하게 다시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상업적인 성과도 영국, 미국 모두 10위를 기록하며 반등한다. 이 앨범은 그래미에서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하며 밥 딜런 커리어 최초 본인의 앨범으로 제너럴 필드를 수상하게 된다. 딜런은 훗날 이 앨범을 만들 당시에 대해, 과거의 컨디션을 회복하려던 와중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앨범의 성과는 평단의 극찬, 상업적 반등도 있겠지만 앨범을 만들 때마다 항상 고통스러워하던 밥이 마침내 편안해졌다는 점도 있고 녹음의 기본적 방법을 프로듀서에게 의존하지 않고 감각적으로 포착할 수 있게 된다.

앨범이 발매되는 동시에 밥 딜런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참석한 볼로냐 시에서 열린 가톨릭 유소년 집회에서 공연했다. 딜런은 부른 후, 그의 베이지색 카우보이 모자를 벗고 교황에게 인사하기 위해 연단으로 올라갔다. 교황은 밥 딜런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지난 1997년 고인이 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한 청소년 행사에 참석한 것에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밥 딜런을 잘못된 종류의 선지자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베네딕토 교황은 2007년 3월 8일 발표했다. 베네딕트 교황의 책에서, 베네딕트 교황은 왜 그가 밥 딜런을 좋아하지 않는지, 그리고 왜 그가 그를 잘못된 "예언자"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밝히지 않았다. 이 콘서트에서 20세기 대중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 중 하나로 선정된 딜런이 교황 앞에서 세 곡을 불렀다.[36]

1997년 5월 24일, 56세의 생일을 딸 마리아의 가족과 보낸 밥 딜런은 가슴에 급작스러운 통증을 느낀다. 다음날 진행된 검사 결과 입원이 결정된다. 결과는 히스토플라즈마균 감염에 의한 심낭염이었고 ‘치사율이 발견되는 상태’라고 보도된다. 다행히도 투약만으로 회복했지만 투어들은 불가피하게 취소된다. 이때를 기점으로 레이블 측에서는 발매 스케줄로 밥 딜런을 구속하는 일이 없어졌다. 이때 밥 딜런이 한 말이 “하마터면 엘비스를 만날뻔했어요.”였다.

1997년 12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딜런에게 백악관에서 케네디 센터 공로상을 수여했다. 빌 클린턴은 상을 수여하며 "그는 아마 다른 어떤 창조적인 예술가보다 우리 세대의 사람들에게 더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는 평화를 어지럽힌 힘 있는 자들을 물리쳤다."라고 말했다. 1999년 딜런은 북미 투어에서 사이먼 앤 가펑클의 폴 사이먼과 함께 시작했고, 6월 1일에 시작하여 9월 18일에 끝났다. 이 콜라보레이션은 호평을 받았다.

1999년 12월 31일 타임지는 밥 딜런을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타임지는 “거장 시인, 신랄한 사회 평론가, 용감무쌍한, 반문화 세대의 정신을 지도한 인물”이라고 밥 딜런을 평했다.


7. 2000년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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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에 맞는 새로운 전성기.

2000년 밥 딜런은 스웨덴 왕립음악원이 주관하는 음악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폴라음악상을 수상한다. 수상 이유는 “그의 업적은 50년동안 끊임없이 변화하는 창의성을 보여줬고, 항상 혁신적인 음악을 보여줬다.”였다.

영화 애호가인 밥 딜런은 1990년 이후 몇몇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에 악곡을 제공했다. 단, 그런 것들은 이미 발표된 곡들이나 재연 버전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2000년 커티스 핸슨 감독, 마이클 더글러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토비 맥과이어, 케이티 홈즈가 출연한 원더 보이즈에 딜런은 신곡 ‘Things Gave Changed’를 제공한다. 핸슨 감독이 밥 딜런의 광팬이었기때문에 실현됐다고 한다. 이 노래는 상당히 좋은 평을 얻었고 딜런은 2001년 골든글로브상 주제가상, 아카데미 시상식 주제가상을 모두 석권한다. 아카데미 시상식은 투어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현장 생중계로 수상 소감과 공연을 했다.

2001년 5월 24일에는 세계자연보호기금(WWF)의 공익 광고를 위해 자작곡 ‘Shelter from the Storm’을 무상으로 제공한다. 공적으로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을 무렵 동물들만이 나의 음악을 좋아해주었다. 이번엔 그 은혜를 갚을 차례다.”라는 코멘트를 남겼다.[37] 이 날 밥 딜런은 60세가 된다.

이 무렵 밥 딜런은 새로운 앨범 리코딩을 작업 중이었다. 투어 밴드 구성원들, 래리 캠벨, 찰리 색스톤, 토니 가르니에, 데이비드 켐퍼가 중심이 되었다. 거기에 앨범 ‘Time Out of Mind’에도 참가한 키보드 오기 메이어스가 다시 가세했다. 메이어스는 밥이 가장 특별하게 생각했던 세션 중 한명이었다. 메이어스는 밥 딜런의 절친 더그 샘과 오랜 세월 함께 연주를 해온 유능한 오르간 연주자다. 텍사스류 멕시코 음악과 텍사스류 블루스나 컨트리가 융합된 음악인 텍스멕스 뮤직(Tex-Mex Music)의 선봉장이었다. 밥 딜런은 이 당시 텍스멕스 음악에 빠저있었는데 그런 만큼 오기 메이어스는 중요한 존재였다.

그 무렵 제작하고 있던 앨범의 프로듀서는 잭 프로스트였는데 이것은 밥 딜런이 사용하던 가명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또 한 사람의 자신에 의한 셀프 프로듀스’를 착수했다. 한 평론가는 “‘Time Out of Mind’에서 포착한 새로운 감촉, 여태까지 없었던 창작에 대한 의지, 그것을 끝내버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오기 메이어스의 재등장으로 이어진것’이라고 평했다.

밥 딜런이 잭 프로스트라는 이름으로 첫 프로듀스를 시작한 앨범은 31번째 앨범 ‘Love and Theft’였다. ‘Love and Theft’라는 이름은 1993년 간행된 영문학자 에릭 도트의 저서 ‘사랑과 절도: 블렉 페이스 민스트렐시와 미국 노동자 계급(Love and theft : blackface minstrelsy and the American working class/ Oxford University Press 간행)에 의거 하고 있다. 이 책은 19세기의 미국 민스트럴 쇼[38]에 관한 연구서다.

밥 딜런은 루트 록에 대한 경의를, 과거의 음악이나 문학 작품을 거듭 본뜨고 모방하며 차용하고 해체함으로써 표현했다. ‘Love and Theft’도 그런 작품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 앨범에서 들리는 밥의 목소리는 전혀 그늘이 없었고 감정 표현도 섬세했다. 거기에서 자신의 ‘욕망=사랑’으로 뽑아낸 노래를 현재진행형의 가창 표현, 즉 현재 살아 있는 딜런의 방식으로 현재 세상에 발신한다. 진지한 표현의 노래만 있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가벼운 곡들이나 로맨틱한 밝은 곡들도 있다. 앨범은 2001년 9월 11일, 미국이 동시 다발 테러를 당했던 그 날 발매된다. 앨범은 평단에서 전작만큼의 극찬을 받고 2001년 평단에서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은 앨범을 기록한다.[39] 상업적 성과도 전작을 뛰어 넘는 미국 5위, 영국 3위를 기록했고 그래미에서 최우수 콘템포러리 포크상을 수상한다.

2002년 7월에는 밥 딜런이 주연하고 각본을 맡은 ‘가장과 익명’이 촬영되었다. 감독은 래리 찰스였고 함께 출연을 맡은 배우들은 존 굿맨, 제시카 랭, 제프 브리지스, 페넬로페 크루스 등이었다. 내용은 내전과 내란이 계속되는 어느 나라의 자선 콘서트에 초청된 왕년의 록 스타 잭 페이트(밥 딜런이 맡은 역할), 그가 그 나라에서 발생되는 온갖 트러블 속에서 웃음거리가 되는 이야기다. 여기에서 딜런은 신곡도 불렀는데 밥 딜런의 음악 안에서 나온 커버곡도 다수 사용된다. 밥 딜런이 출연하고 있음을 인지되는 것만으로도 현실과 영화 속 시간이 비틀어져 하나가 되어버린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영화다. 밥 딜런이 감독한 ‘레날드&클라라’에서도 그런 경향을 볼 수 있다. 영화의 평은 매우 좋지 않았고 뉴욕과 로스엔젤레스에서 2003년 7월 25일부터 단기간 상영됐다.

2000년대에도 역시 네버 엔딩 투어를 꾸준히 진행했고 그 가운데, 밥 딜런은 2004년 10월 ‘자서전(Chronicles: Volume One)’을 출판한다. 자서전은 출간하자마자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2004년 뉴욕타임스가 뽑은 올해 최고의 책에 선정되고 전미 도서상(National Book Critics Circle Award) 후보에도 오르는 등 비평과 상업적 성과를 거둔다.

2005년 9월 26일부터 27일까지는 미국 전역에서 밥 딜런의 텔레비전용 다큐멘터리 영화 ‘노 디렉션 홈: 밥 딜런(No Direction Home)이 방영되었다. 감독은 마틴 스콜세지였고, 방영시간은 3시간 28분의 장편이었다. 1966년에 있었던 딜런의 오토바이 사고까지의 밥 딜런의 발자취를 관계자들의 증언들과 기록 영상을 섞어가며 전하는 다큐멘터리다. 무엇보다 딜런이 자신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밥 딜런은 분명 스콜세지 감독을 향해 말하고 있을거라고만 보는 이들은 생각했지만 실제로 다큐멘터리 제작 중 두 사람은 단 한번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심지어 만난 적도 없다. 이 다큐멘터리는 비평적으로 높은 성과를 거뒀고 영화 평론가 로저 이버트는 4점 만점을 주었고 2006년 4월에는 피바디상을, 스콜세지 감독은 그래미상을 받는다. 이 영화의 방영 전에는 희귀 음원으로 가득 찬 ‘The Bootleg Series Vol. 7: No Direction Home: The Soundtrack’이 8월 30일 발매됐다. 역시 이 부틀렉도 비평가들에게 찬사를 받는다.

2006년이 되자마자 밥 딜런은 새로운 앨범 제작에 착수한다. 이번 앨범의 프로듀싱도 밥 딜런의 단독으로 이루어진다. 이 앨범의 녹음은 게스트를 넣지 않고 투어 밴드 구성원들만으로 이루어졌다. 일찍이 엘비스 프레슬리칼 퍼킨스가 녹음한 바 있던 멤피스의 선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했고 딜런은 이 곳에서의 녹음을 “최고를 녹음했다.”며 코멘트를 남겼다. 앨범은 인간의 죽음, 사라져 가는 자, 숙명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사운드와 언어와 연주가 쾌활한 비트를 각인시키며 결속하고 있다.

앨범은 5년만에 ‘Modern Times’라는 이름으로 2006년 8월 29일 발매된다. 평단은 역시 찬사를 보냈고 롤링 스톤은 “거장의 믿기 힘든 3연속 걸작”이라는 평을 내린다. 상업적 성과는 전작을 뛰어넘는 65세의 고령의 나이로 미국 빌보드 200 1위, 영국 3위를 기록한다. 또 그래미 최우수 콘템포러리 아메리카나상, ‘Someday Baby’는 최우수 록 보컬상을 수상한다.

2006년 5월 3일에는 밥 딜런을 알고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깜짝놀랄만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XM 위성 FM을 통해 딜런이 퍼스널리티를 담당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방송이 개시된다. 프로그램의 타이틀은 ‘Theme Time Radio Hour’였다. 날씨, 물, 어머니, 운세, 부자와 가난한 사람, 결혼, 이혼, 고양이, 개, 새 등, 매주 특정 테마를 따라 선택된 곡들로 구성된다. 밥 딜런은 그 한 곡 한 곡을 소개하고 각각에 코멘트도 단다. 해당 곡의 역사적 혹은 지리적, 문화적 배경에 대해 말해주는 경우도 있었고 연주하고 있는 뮤지션에 대해 해설도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테마와 관련된 고찰을 선보이기도 했다. 딜런은 라디오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이야기했고 풍부한 지식을 보여줬다. 선곡 스태프는 팀을 만들어 대응하고 있었는데, 매주 방송을 탄 곡들은, 컨트리, 포크, 재즈, 로큰롤, R&B, 라틴음악 등 광범위하게 분포됐다. 밥 딜런이 어린 시절 들었던 노래들, 혹은 그보다 더더욱 오래된 노래들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펑크, 힙합, 하드록에 최신 팝들도 선곡하기도 했다. 이 방송은 약간의 간격을 두면서 두 번째 시즌까지 100회가 방송되었고 2009년 4월까지 계속됐다. 딜런이 어린시절부터 라디오를 사랑했고 라디오에 의해 성장했기 때문에 의미가 남다른 프로그램이었다. 방송을 통해 방송에 탄 노래들을 묶은 옴니버스 음반들도 나왔다.

2007년 11월에는 밥 딜런을 이미지한 영화 ‘아임 낫 데어[40]’가 개봉한다. 감독은 바비 인형만을 사용한 카펜터스의 전기 영화, 글램 록을 테마로 한 영화 벨벳 골드마인을 감독한 토드 헤인즈였다. 감독 토드 헤인즈는 “밥 딜런의 예술적 업적은 내게서 어떤 보증 따위를 필요치 않는다. 그를 좋아하건 그렇지 않건 전후 문화와 대중음악의 영향력있는 리더로서 그를 피해갈 방법이란 없다”며 딜런을 평했다.

토드 헤인즈가 밥 딜런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딜런의 오랜 매니저 제프 로슨에게 조언을 구했을 때 그가 알려준 딱 한 가지 비책이란 이거였다. 절대로 “천재적인”, “시대의 목소리” 따위의 표현은 쓰지 말고 기획안을 작성하여 밥 딜런에게 보낼 것. 지금도 밥 딜런이 이 프로젝트를 허락한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실토하는 토드 헤인즈가 자기의 지난 작품들과 함께 묶어 밥 딜런에게 동봉해 보낸 기획안에는 이런 제목이 적혀 있었다. “아임 낫 데어: 딜런에 관한 영화에 있어서의 추정들.” 그리고 밥 딜런은 자기를 추정해보겠다고 청한 자에게 생애 처음으로 그 자신의 전기 영화를 허락했다. 지금껏 딜런은 뻔하고 당연한 헌사가 아니라 용감한 추정을 기다린 것이다.

밥 딜런에 관한 많은 자료들을 읽고 본 다음 토드 헤인즈가 결정한 영화의 방향이 실은 밥 딜런이 원하던 모양새와 이미 같았다. 밥 딜런에 관한 영화는 “시간대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전기영화가 될 수는 없다. 실제 딜런 혹은 진짜 딜런을 찾으려던 전기작가들은 모두 실패하고 있다. 픽션을 통하지 않고는 진실을 전달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동시에 “딜런에 관해 알려져 있던 인식들을 산산조각내고 싶었다. 특정 시대와 장소를 살았던 창조적 예술가로서, 동시에 미국 대중의 투쟁, 대립, 전통을 체화하고 있는 밥 딜런이라는 사람을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한번 뒤집어보고 싶었다. 이 영화가 딜런의 광팬들을 건드려 도취와 분노를 동시에 일으키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욕망도 갖고 있었다. 적어도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밥 딜런에 관한 영화가 확실한데 밥 딜런은 등장하지 않는 영화라면서, 그런데 밥 딜런은 이런 사람이었고 또는 저런 사람이었다며 빠지지 않고 한마디씩 거들고 싶어하니 토드 헤인즈의 욕망은 얼마간 성공이다.

주드(케이트 블란쳇), 우디 거스리(마커스 칼 프랭클린), 아르튀르 랭보(벤 휘쇼), 잭/존(크리스천 베일), 로비(히스 레저), 빌리(리처드 기어). ‘아임 낫 데어’는 특별한 설명없이 이 여섯 인물의 이야기를 교차시키며 전개한다. 그 인물들은 각자의 이름을 갖고 있지만 실은 다 밥 딜런이다. 주드는 포크 음악을 등지고 백밴드들과 함께 일렉트릭 기타를 메고 연주하는 것으로 전향한 시기의 밥 딜런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포크와 시대를 배신한 명목으로 대중과 언론의 지탄에 시달리던 상황이 묘사된다. 우디 거스리는 젊은 시절 밥 딜런의 우상이었던 컨트리 음악가 우디 거스리의 실명을 가져온 것이다. 백인인 우디 거스리를 흑인 소년으로 바꾼 뒤 밥 딜런의 유년 시절에 이입한, 재치 넘치는 가정이다. 랭보의 경우는 음악적인 면모보다 언어를 다루는 시인의 기질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고, 밥 딜런이 했던 특정 기자회견의 모습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영화에서 “시대의 양심”으로 불리는 잭은 당연히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를 중심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데뷔 초기 포크계의 밥 딜런을 상기시킨다. 그 잭이 종적을 감추고 20년 뒤 음악가에서 목회자로 변신하여 ‘목사 존’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크리스천 베일은 이때도 존을 맡아 일인이역을 한다. 한편 ‘아임 낫 데어’에는 영화 속 영화가 삽입되는데, 사라진 전설의 포크 가수 잭에 관한 영화에서 잭의 역할을 로비라는 배우가 맡는다. 이때 로비는 밥 딜런의 연애사와 가정사에 대한 부분을 대변한다. 마침내 가장 뜬금없이 등장하는 서부 사나이 빌리는 밥 딜런이 조연으로 출연했던 샘 페킨파 영화 ‘관계의 종말’의 주인공 빌리 더 키드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왔다. ‘관계의 종말’에서 밥 딜런이 맡았던 역할 앨리아스는 무법자 빌리 더 키드를 선망하여 따르는 추종자 중 한명이다. ‘아임 낫 데어’에서는 이들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전개된다.

토드 헤인즈 감독은 캐스팅 기준에 대해 ‘내가 찾을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배우를 선택했을 뿐’이라는 대답을 했다. 그에 걸맞게 <아임 낫 데어>에는 6명의 밥 딜런 뿐 아니라 조연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배우들이 포진해있다. 촬영 전에는 케이트 블란쳇이 밥 딜런이 된다는 소식의 놀라움과 우려의 목소리들은 있었으나 그녀가 현장에 나타나는 순간 잠잠해졌다. 함께 연기한 배우들조차 ‘케이트가 가장 밥 딜런과 비슷하다. 외모와 분위기는 물론, 목소리까지 비슷하다’고 감탄했을 정도. ‘아임 낫 데어’가 처음 공개된 베니스 영화제는 심사위원 대상과 함께 그녀에게 여우주연상의 영광을 안겨주었다. 이후 그녀는 <아임 낫 데어>로 골든글로브 여우조연상,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 여우조연상, 시카고 영화평론가협회 여우조연상, 센트럴 오하이오 영화평론협회 여우조연상, 라스베가스 영화평론협회 여우조연상, 국제 영화평론 협회 여우조연상, 산 디에고 영화평론협회 특별상, 토론토 영화평론협회 여우조연상 등 세계의 연기상을 휩쓸고 아카데미 시상식에도 여우조연상의 후보에 오른다. 크리스찬 베일은 영화 속에서 60년대 초 저항가요의 스타로 떠오른 ‘잭’과 중년 이후 기독교에 귀의해 선교활동을 펼친 ‘존’의 1인 2역을 맡아 <벨벳 골드마인> 이후 두번째 토드 헤인즈 작품에 출연했다. 리처드 기어는 서부극에나 등장할 법한 시골 마을의 은퇴한 총잡이 ‘빌리 더 키드’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벤 휘쇼는 딜런이 사랑했다는 프랑스 시인 ‘아서 랭보’의 모습이며, 아역배우 마커스 칼 프랭클린에 이르러서 밥 딜런은 아예 천재적 소질을 가진 흑인 꼬마의 모습으로 변신한다. 히스 레저는 딜런의 사랑 이야기를 반영한 캐릭터인 ‘로비’로 변신했다. 영화는 흥행에는 실패했으나 비평가들에게 나쁘지 않은 평을 얻었고 상술했듯이 케이트 블란쳇은 많은 시상식에서 연기상을 휩쓴다. 그리고 밥 딜런 본인도 이 영화를 호평했으며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했다고 평했다.

2007년 10월 1일, 콜럼비아 레코드는 3장의 베스트 앨범 ‘Dylan’을 발매했고, Dylan07 로고 아래에 그의 전 생애를 그림으로 그렸다. 마크 론슨은 이 앨범에 참여해 1966년 발매된 싱글 “Most Likely You Go Your Way and I'll Go Mine"을 재리믹스 했고 이 버전은 UK차트 51위를 기록한다.

2008년 4월, 비교불가한 시의 힘을 가진 수 많은 서정적인 작품들을 통해 대중 음악과 미국 문화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이유로 퓰리쳐상 특별상을 수상한다.

2008년 10월 7일에는 1989년 ‘Oh Mercy’부터 2006년 ‘Modern Times’까지의 미발표 음원 27곡을 수록한 부틀렉 시리즈 8집 ‘The Bootleg Series Vol. 8 – Tell Tale Signs’을 발표했다. 이 앨범은 평단에서 극찬을 받는다.

2008년 딜런은 새로운 앨범 제작을 진행한다. 앨범 제작의 계기가 된 것은 ‘라 비앙 로즈’를 만든 프랑스 영화감독 올리비에 다한이 자신의 신작 영화용으로 밥 딜런에게 새로운 곡을 의뢰했기 때문이었다. 이 영화는 ‘마이 오운 러브 송’이었는데 내용은 사고로 다리를 잃고 어쩔 수 없이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는 전직 여성 가수가 켄자스에서 뉴올리언스까지 여행을 한다는 로드 무비다. 감독 올리비에 다한은 “미국 남부를 느끼게 해주는 노래를 원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또 다한 감독은 느닷없이 딜런에게 10~12곡의 신곡을 요구했다. 그 곡 모두를 영화 본편에서 사용할 것이며 제각각의 곡들에 의미를 부가할 작정이라는 것이다. 밥은 딜런은 이 요청에 다소 어이없어 했으나 이 제안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의뢰에 따라 처음으로 만든 노래는 ‘Life is Hard’었다.

이 곡이 완성됨으로써 영화용과는 별도의 곡들이 계속 만들어졌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앨범까지 나왔다. 텍사스에서 멕시코로 도피행을 떠나는 감각의 앨범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딜런은 말한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딜런은 작사에 관해서는 옛 친구이자 멕시코 주변과의 인연이 깊은 로버트 헌터와 공동 작업을 했고 둘이 함께 9곡을 만든다. 작품의 주된 무대는 휴스턴과 멕시코 국경 지역이다. 접경지대의 텍사스풍 멕시칸, 이른바 텍스맥스 음악과 50년대 시카고 블루스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는 곡들이 다수 있다. 이 앨범에는 밥 딜런의 키보드가 사운드의 핵심이 되고 있는 곡들이 적지 않다. 아울러 아코디언을 담당하고 있는 밴드 데이비드 히달고의 아코디언 로스 로보스이다.[41]

앨범은 ‘Together Through Life’라는 이름으로 2009년 4월 28일 발매된다. 앨범은 발매되자마자 대박이 났는데 67세의 나이로 미국 빌보드 200 최고령 1위를 기록한다.[42] 영국에서도 앨범 ‘New Mornig’ 이후 39년만에 1위를 기록한다. 이것도 신기록이었는데 가장 긴 공백 기간 이후 1위를 기록한 아티스트가 된다. 평단에 평은 전작들만큼의 극찬은 아니었으나 메타크리틱 76점을 기록하며 평균 이상의 수작이었다는 평이다.

2009년 10월 13일에는 크리스마스 앨범 ‘Christmas in the Heart’가 발매된다. 수록곡은 모두 크리스마스 스탠다들 곡들이다. 전작 연주진들과 함께 기타의 필 업처치와 코러스 부대가 7인 편성으로 가세했다. 앨범의 평은 망작까지는 아니나 평단의 호불호가 확 갈렸고 오랜만에 좋은 평을 얻지는 못했다. 이 앨범은 레코드 회사 주도가 아니라 밥 딜런 개인의 프로젝트로 추진되었다. 밥은 이 앨범 수익을 통해 발생되는 인세 전부를 영구히 기부한다고 공언했다. 미국 국내의 분은 식량지원기간 피딩아메리카로, 미국 이외의 수익은 유엔 세계식량계획(WFP)과 영국 홈리스 지원 단체 ‘Crisis’에게 갔다.

2009년 예술가로서 받을 수 있는 미국 최고의 훈장인 미국 국가 예술 훈장을 수훈받는다.


8. 2010년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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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고의 훈장과 노벨문학상을 받다.

1990년대 이후 밥 딜런의 음악은 음악적인 뿌리 (블루스, 포크) 를 찾아 회귀하는 인상을 보이고 있다. 그 후 2012년에 "Tempst"를 발매, 대중의 극찬은 물론 평론가에게도 극찬을 받았다.[43] 최근에는 프랭크 시나트라가 다룬 '스탠더드 팝' 앨범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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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을 통해, 밥 딜런은 시가 무엇인지 어떻게 작동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Horace Engdahl (전 스웨덴 아카데미 사무총장)


201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수상 이유는 "미국 가요 전통 안에서 참신하고 시적인 표현들을 창조해낸 공로." 링크

1996년 시인 앨런 긴즈버그의 제안으로 버지니아 군사대학교 교수 고든 볼이 밥 딜런을 노벨문학상 후보에 추천한 이래 해마다 유력 후보 중 한 명으로 이름이 거론되긴 했지만, 아무래도 가수라는 한계 때문에 실제로는 수상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평이 많았고 실질적으로는 유력 후보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1993년 토니 모리슨의 수상 이후 23년만에 미국인이 받는 노벨문학상이다.

문인이 아닌데 노벨문학상에 선정된 경우는 역사학자 테오도르 몸젠, 정치인 윈스턴 처칠,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장폴 사르트르가 있지만 이들은 기존의 문학이라고 생각되는 범주에서 활동한 이력이 있었고[44] 가수로서 이 상을 수상한 것은 밥 딜런이 처음이다.[45]

하지만 2016년 10월 19일, 밥 딜런은 노벨위원회의 연락을 받지 않고 있었고, 노벨위원회는 밥 딜런에게 연락을 포기해서 측근에게만 수상 사실을 알렸다는 기사가 나왔다. 실제로 밥 딜런은 노벨문학상 수상과 관련하여 어떠한 입장도 내놓지 않았고 일부에서는 사르트르처럼 노벨상 수상을 거부할 것이라는 관측까지 조심스럽게 나오기도 했다. 노벨위원회는 시상식에 오고 싶지 않으면 오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10월 28일,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한 소감을 밝히며 상을 받겠다고 했지만# 다른 약속이 있다는 사유로 불참을 선언했으며, 어떤 약속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딜런은 노벨상 시상식에 수락 연설문을 보냈고, 다른 사람이 대신 연설한다고 밝혔다.# 결국 아지타 라지 주스웨덴 미국 대사가 대독하였다. #

다음은 밥 딜런이 스웨덴 한림원에 보낸 편지 전문.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의 가장 따뜻한 인사를 스웨덴 한림원 회원들과 오늘밤 참석해주신 기품있는 참석자들에게 보냅니다.

개인적으로 여러분과 함께 있지 못해 유감입니다. 하지만, 제가 정신적으로는 여러분과 분명히 함께 있으며 이런 권위 있는 상을 받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긴다는 것을 알아주세요. 노벨문학상 수상은 제가 전혀 상상해본 적이 없던 것입니다. 어렸을 때 저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러디어드 키플링, 버나드 쇼, 토마스 만, 펄 벅, 알베르 카뮈 같은 빼어난 가치가 있는 이들의 작품을 흡수하고 읽는 것에 친숙했습니다. 세계 곳곳 도서관에 소장되고 학교에서 가르치며 존경어린 어조로 말해지는 작품을 쓴 문학의 거장들에 언제나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제가 이런 이름들과 함께 같은 명단에 오른다는 것은 진정으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들이 노벨상 (수상)에 대해서 생각해봤는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책과 시 그리고 극본을 쓰는 세계 누구라도 안쪽 깊숙한 곳에서 비밀스러운 꿈을 품고 있을지 모릅니다. 아마도 너무 깊이 묻어뒀기 때문에 거기 있는지를 자신들도 모를 수 있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노벨상을 받을 아주 적은 기회가 있다고 이야기했다면, 에 서 있다고 하는 이야기와 똑같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내가 태어나고 그리고 몇 년 뒤까지는, 세상 누구도 이 노벨상을 받을 만큼 훌륭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나는 매우 드문 대열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뉴스를 들었을 때 저는 길 위에 있었습니다. 정확히 의미를 깨닫는데 몇 분 이상 걸렸습니다. 위대한 문학가인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가 자신을 극작가로 생각했다고 봅니다. 문학 작품을 쓰고 있다는 생각은 그의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무대를 위한 말을 썼습니다.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해지기 위해서 썼다는 뜻입니다. 그가 <햄릿>을 썼을 때, 저는 그가 여러 다른 생각을 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이 역에 맞는 배우는 누구지?” “어떻게 무대에 올리지?” “이 작품 (배경을) 덴마크로 설정하는 게 맞나?” 그의 창조적 비전과 야망은 그의 마음 전면에 있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다루고 고려해야 할 일상적인 문제도 있었습니다. “자금 조달이 제대로 될까?” “후원자들을 위한 좋은 자리가 충분할까?” “해골을 어디에 가져다 놓아야 할까?” 저는 셰익스피어의 마음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질문이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문학인가?”

저는 10대 때부터 곡을 쓰기 시작했고 제 능력으로 어느 정도 명성을 얻기 시작한 이후에도, 노래들에 대한 제 열망은 그 정도 거리까지만 그쳤습니다. 커피숍이나 바, 나중에는 카네기 홀이나 런던 팰라디움에서 제 노래가 들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정말 크게 꿈을 꾼 게 있다면, 노래를 녹음해서 제 노래를 라디오에서 들을 수 있기를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녹음을 해서 라디오에서 자기 노래가 나온다는 뜻은 많은 청중이 있다는 뜻이고 시작하고자 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저는 제가 하고자 한 일을 지금까지 오랫동안 계속해왔습니다. 수십여번 녹음을 했고 전 세계에서 수천번의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하는 모든 일의 필수적 중심에는 제 노래들이 있었습니다. 여러 다른 문화에 속한 많은 사람의 인생에서 제 노래들은 공간을 찾아낸 듯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를 아주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말해야만 하는 게 한 가지 있습니다. 5만명 앞에서 그리고 50명 앞에서 공연해본 공연자로서 전 50명 앞에서 공연하는 게 더 어렵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5만명은 한가지 페르소나이지만 50명과 함께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각자 모두 개인이고 다른 정체성과 세계가 있습니다. 더 명확히 사물을 인식합니다. 정직함과 그것이 재능의 깊이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가 시험 됩니다. 노벨 위원회 (위원이) 소수라는 사실이 제게는 효과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처럼, 저는 자주 창조를 위한 노력에 대한 추구와 일상의 문제들의 모든 측면을 다루는 데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 노래들에 적합한 최상의 음악가는 누구지?” “맞는 스튜디오에서 녹음하고 있는 걸까?” “이 노래 조성이 맞나?” 어떤 것(고민)들은 400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한 번도 저 자신에게 “내 노래가 문학일까?”라고 질문한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웨덴 한림원에 바로 그 질문(자신의 노래가 문학인지)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는 점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런 멋진 답을 주었다는 점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그럼 모두 안녕히 계세요, 밥 딜런.


이날 시상식에서 축하 공연을 한 가수 겸 작가 패티 스미스는 딜런의 노래 'A Hard Rain's A-Gonna Fall'를 선곡했다.


9. 2020년대[편집]


2022년 1월. 지금까지 녹음한 모든 음악은 물론 앞으로 내놓을 신곡에 대한 권리까지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에 매각했다.#

[1] 한국 시간 1941년 5월 25일 오전 11시 5분.[2] 밥 딜런의 기억의 오류로 실은 일곱살 때다.[3] 재즈 연주자들이 모여서 악보없이 즉흥적으로 하는 연주.[4] 미니애폴리, 세인트폴 두 도시를 합쳐 부를때의 애칭.[5] 레코드 제작에서 통상 행해지는 오리지널 테이프에 대한 녹음, 편집 등의 프로세스를 거치지 않고 녹음한 음곡 등을 그 자리에서 믹스다운에서 만든 레코드.[6] 밥 딜런의 무대 이름.[7] 포크송을 부르며 춤을 추는 사교적인 집회[8]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던 카페로 코엔 형제인사이드 르윈의 직접적인 배경이 된 카페다. 비트족 시인들이나 전설적인 포크 가수들이 거주한 곳이다.[9] 미네소타 태생 외에는 다 거짓말이다.[10] 1954년 23살에 자신의 레이블을 설립하고 세실 테일러, 존 콜트레인, 선 라 등의 앨범을 제작, 발매했다. 1963년에는 컬럼비아 레코드사 프로듀서가 됐다.[11] 백인 부잣집 출신 남성 '윌리엄 잰트징어'가 술에 취한 채 호텔 여종업원들을 지팡이로 마구 폭행하는 과정에서 그 여종업원 중 한명인 중년 흑인 여성 '해티 캐럴'이 사망한 사건과 그 뒤에 이뤄진 재판을 다루고 있다. 참고로 잰트징어에게 가해진 형량은 고작 6개월뿐이다. 그 뒤에 잰트징어는 딜런을 그런 개쓰레기 같은 거짓말로 가득한 노래를 만든 놈을 감옥에 처넣겠다며 디스하다가 결국 2009년 1월 3일에 69세의 나이로 사망.[12] 밥은 자서전에서 이 발언이 나를 굉장히 불쾌하게 만들었다고 토로했다.[13] 이전에도 다 합쳐서 6분 정도 되는 히트곡은 있었다. 1959년 발매된 레이 찰스의 ‘What’d I Say, 아일리 브라더스의 ‘Shout’ 등인데, 모두 곡의 반을 잘라 a면과 b면으로 나누어 발매된다.[14] 단 조지가 참여한 곡은 수록되지 않았다.[15] 바이오그래피, 1985년[16] 1978년 11월 23일, 텍사스 모닝 뉴스’[17] 미니애폴리스의 음악 프로듀서였다.[18] 밥은 형무소로 가 카터의 지원을 약속하기도 한다.[19] 처음에 셰퍼드는 밥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밥은 셰페드에게 프랑스와 트뤼포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를 쏴라처럼 만들고 싶다고 전한다.[20] 밥은 특별한 뜻이 있는 건 아니고 정원에서 투어 명칭을 생각하다가 우연히 천둥소리가 났기 때문이라고 저렇게 이름을 정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훗날 롤링 썬더가 네이티브 아메리카의 가르침으로 ‘진심을 말한다’는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에 크게 기뻐한다.[21] 그리고 그 후 돌아오는/그것은 욕망/그 밑에서 나와 함께 돌아오는/그것과 함께 돌아오는/결고 두려움 없이/마침내 믿음 가득한/그것은 나를 잘 이끌어주리/결고 실패 없이[22] 앨범 'Backless'에 수록.[23] 그러나 이 해부터 밥 딜런에게는 매년 앨범 한 작품씩 발매라는 계약조건이 의무사항으로 있었다.[24] 딜런 인생 최초의 비디오 클립.[25] 나중에 크루자도스(Cruzados)로 개명한다.[26] “그는 친구일 뿐 아니라 형제 같은 존재였습니다.”[27] 재즈, 블루스 기타리스트. 1930년대부터 활약했다.[28] 밥이 라노아에게 프로듀스를 맡긴 이유 중 하나가 밥이 좋아하는 네빌 브라더스의 앨범 ‘Yellow Moon’을 라노아가 프로듀스해서다.[29] 또 라노아는 밥에 대해 “함께 일했던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집중력이 뛰어난 인간”이라고 평했다.[30] Soul Mining, 다니엘 라노아 저[31] 참고로 혈연관계가 아니다.[32] “현재의 밥의 내면에 계속 살아 있는. 과거의 밥으로 통하는 숨결을 꼬집어 내고 싶다.”[33] 시상은 잭 니콜슨이 했고 매리언 앤더슨, 존 레논, 줄리 스턴, 키티 웰스와 공동 수상했다.[34] Song to Woody, It’s Alright Ma’.[35] 그리니치 빌리지를 탐방하고 밥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관련 데이터를 볼 수 있다.[36] "Knockin' on Heaven's Door", "A Hard Rain's A-Gonna Fall", "Forever Youn".[37] 양승갑 전남대 교수는 밥 딜런을 생태문학적으로 접근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논문에서 밥 딜런의 음악이 대중에게 생태적 인식을 주입하는 훌륭한 생태학적 텍스트임을 입증하고 있다라고 밝혔다.[38] 백인 예능인들이 얼굴을 쌔까맣게 칠하고 흑인들 흉내를 내며 노래하고 춤추는 무대다. 비슷하게 꾸민 겉모습, 즉 의장에 의해 성립되고 있다. 백인이 흑인들의 생태를 관찰하고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백인 관객들 내면에 있는 이미지로서의 흑인풍 태도나, 동작, 가창법 등을 과장함으로써 웃음을 이끌어낸다. 이것은 백인이 흑인 지배와 인종차별이 잉태시킨 문화다. 남북 전쟁 후에는 그 무대에 검게 칠한 백인들 사이에 섞여 흑인 예능인들도 출연하게 되어, 백인들이 흉내 낸 흑인들을 흑인들이 다시금 흉내 낸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상태도 보이게 된다. 이것은 포크나 록에서도 농후하게 나타났고 역사적으로 어느 시대에나 그런 의식은 내재되어 있다고 딜런은 시사한 것 이다.[39] 2001년 메타크리틱 올해의 앨범 1위.[40] 제목은 밥 딜런의 곡에서 가져왔다. 1966년 밥 딜런은 급작스러운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뒤 몇년간 칩거하며 더 밴드(마틴 스코시즈의 음악다큐 <라스트 왈츠>의 주인공들)와 함께 우드스탁의 빅 핑크 별장에서 연주와 녹음을 하며 보낸다. <아임 낫 데어>라는 곡은 당시 연주 녹음된 것으로 1975년 발매된 앨범 ‘The Basement Tapes’에 실릴 예정이었지만 실제 발표되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해적판으로 떠돌다가 <The Genuine Basement Tapes, Vol2>(1992)에 실렸고, 이번 사운드트랙에도 들어갔다. 이 제목은 “여러 명의 밥 딜런이 등장하는 것을 가리키는 제목으로 합당하다”는 의미에서 지어졌고, 또 하나는 토드 헤인즈 개인에게 이 말(나는 거기에 없다)이 프랑스의 낭만주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시구를 생각나게 했기 때문이다(“나는 타자다.”).[41] 로보스는 1992년 밥 딜런의 멕시코 투어에서 오프닝 아웃을 담당했다.[42] 이 기록은 2011년 토니 베넷에 의해 깨진다.[43] “금세기 밥 딜런 최고의 앨범“ - MOJO ★★★★★, “밥 딜런의 카탈로그 중 가장 낯선 앨범“,"이 시대의 마스터피스" - 롤링 스톤 ★★★★★, 밥 딜런의 최근작 중 가장 도발적이고 충격적인 앨범 - 10점 만점 Uncut, “지난 10년간 밥 딜런의 작품 중 최고의 결과물 “ - The Guardian[44] 역사학자인 테오도르 몸젠을 제외하고서 윈스턴 처칠은 '2차 세계대전 회고록'를 집필. 러셀은 수필을 많이 남겼고, 사르트르는 <구토> 같은 뛰어난 소설을 남겼다.[45] 1990년대 이후부터 노벨문학상 후보로 여러 차례 올랐다는 소문도 있어왔지만 실제로는 수상하지 못했고 2016년에 도박사들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수상자로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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