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비노 갈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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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비노 갈베스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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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센트럴 리그 다승왕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2001 KBO 리그 승률왕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등번호 52번
빌 매들락(1985)

발비노 갈베스(1986)

팀 크류즈(1987~1992)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41번
살로몬 토레스(2001)

발비노 갈베스(2001)

정경주(2002)



발비노 갈베스
Balvino Galvez


파일:external/www.imaeil.com/20120521_091559000.jpg

본명
발비노 갈베스 헤레스
Balvino Gálvez Jerez
생년월일
1964년 3월 31일 (60세)
국적
[[도미니카 공화국|

도미니카 공화국
display: none; display: 도미니카 공화국"
행정구
]]

출신지
산페드로 데 마코리스
출신교
산페드로 데 마코리스 고등학교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신체
183cm / 77kg
프로입단
1981년 LAD
소속팀
LA 다저스 (1986)
슝디 엘리펀츠 (1994~1995)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6~2000)
삼성 라이온즈 (2001)

1. 개요
2. 선수 시절
2.1. 연도별 성적
3. 괴팍한 성격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 전 야구선수. 별명은 카리브해의 괴물.

대만프로야구, 일본프로야구, 한국프로야구에서 선발 투수로 뛰며 활약했던 선수지만, 실력보다도 그 괴팍한 성격 때문에 야구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선수.


2. 선수 시절[편집]


1981년 LA 다저스에 입단하지만, 1986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잠시 올라온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마이너리그에서 선수생활을 보냈다.

이후 1994년 대만프로야구 슝디 엘리펀츠에 입단하여 16승, 1995년 10승을 기록했고[1] 1996년에는 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춘계캠프에서 입단 테스트를 통해 요미우리에 입단하게 된다.

입단 첫 해인 1996년에 팀 동료 사이토 마사키와 함께 16승으로 공동 다승왕 자리에 오르며 팀의 센트럴리그 우승[2]의 주역이 되었고, 1999년에는 요미우리의 사상 첫 외국인 개막전 선발투수로 등판하는 등 꾸준한 활약을 펼친다. 그러나 2000년, 개막 후 6경기의 선발 등판에서 6경기 모두 3자책 이하로 막으며 평균자책점 3.26이라는 괜찮은 피칭에도 불구하고 0승 6패의 영 좋지 않은 기록으로 2군으로 강등되었고 결국 요미우리에서 방출당한다.

일본프로야구 통산 5시즌 46승 43패 34완투 7완봉 평균자책점 3.31. 다승왕 1회, 올스타 1회, 리그 최다 완투 2회, 10홈런.[3]

1998년 7월 31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강판 당한 뒤, 깃타카 아츠시(橘高淳) 구심을 향해 위협구를 던져버리는 사건을 일으켰다. 팀 관계자에 의하면 갈베스는 그 날 게임 시작 전부터 짜증을 내고 있었으며, 평소 자신과 잘맞는 구심과 그렇지 않은 구심을 구분해놓고 있었다고 한다. 하필이면 깃타카 심판은 후자였다는 게 문제, 승부구로 던진 코스에 던진 볼이 전부 볼판정을 받았다. 사실 그날도 구심은 공정했고 갈베스는 평소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피해망상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분을 참지 못했던 것. 결정적으로 볼판정 바로 이후에 홈런을 맞으면서[4] 심판에게 볼판정에 대해 항의했고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이 투수를 교체하기로 하고 덕아웃으로 들어가던 중에 분을 참지 못하고 심판을 향해 강속구를 던져버리고, 심판이 이에 항의하면서 심판과 선수의 벤치 클리어링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5] 결국 갈베스는 1998년 잔여경기 출장금지 징계를 받았고, 구단 자체적으로도 무기한 출장정지 및 4만엔 벌금을 내렸다.

이후 2000년까지 요미우리에서 뛰다가 시즌 후 요미우리와 재계약에 실패했고, 멕시코 리그에서 뛰다가 2001년 5월 부상으로 퇴출된 살로몬 토레스의 대체 외국인선수로 삼성 라이온즈와 연봉 20만 달러에 계약하였다.[6] 시즌 중 합류했음에도 불구하고, 15경기를 선발 등판해서 9회에도 149km/h[7]대 강속구를 뿌리는 등 특유의 강철 체력으로 당시 나이 37세의[8] 노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기당 평균 7.78이닝이라는 이닝 이터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5완투 2완봉 10승 4패 평균자책점 2.47로 삼성 선발진에서 맹활약했다.[9]

하지만 후술하듯이 8월 이후 돌연 귀국한 뒤 시즌이 끝날 때까지 한국 입국을 연기하는 등 멘탈 문제로 각종 잡음이 끊이질 않았고, 어찌어찌 잠적 끝에 돌아온 뒤에도 2001년 한국시리즈 1,4차전에서 도합 6이닝 10실점이라는 최악의 피칭[10]을 보이고 여기에 상술했던 멘탈 문제, 많은 나이까지 겹쳐 결국 재계약에 실패하며 방출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22년 후 새로운 갈베스가 등장하게 되었다.

2.1. 연도별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1986
LAD
10
20⅔
0
1
0
-
3.92
19
12
11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1994
中信
27
201⅓
16
5
4
-
2.55
186
44
132
1995
21
168⅔
10
11
0
-
2.51
161
42
71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1996
読売
28
203⅔
(1위)
16
(공동 1위)
6
0
-
3.05
(2위)
186
(2위)
68
112
1997
27
192⅔
(2위)
12
(4위)
12
(공동 3위)
0
-
3.32
165
(5위)
53
118
1998
18
137⅓
9
7
0
-
3.21
136
48
85
1999
27
187
(4위)
9
12
(2위)
0
-
3.66
174
57
106
2000
6
30⅓
0
6
0
-
3.26
34
8
22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001
삼성
15
116⅔
10
4
0
0
2.47
100
42
85
MLB 통산(1시즌)
10
20⅔
0
1
0
-
3.92
19
12
11
CPBL 통산(2시즌)
48
370
26
16
4
-
2.53
347
86
203
NPB 통산(5시즌)
106
751
46
43
0
-
3.31
695
234
443
KBO 통산(1시즌)
15
116⅔
10
4
0
0
2.47
100
42
85


3. 괴팍한 성격[편집]


상당히 괴팍한 성격으로 유명했는데, 프로야구 용병 역사에서 손꼽히는 멘탈갑(부정적 의미)이다. 대만, 일본, 한국 가리지 않고 사고를 치고 다녔다.

주자를 허용하면 신경질적으로 변하여 심판의 판정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것이 심해서 미트를 땅바닥에 던진다든지, 혹은 공을 아무데나 던진다든지 해서[11] 벤치 클리어링 사태를 일으키는 경우도 많았다.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의 두통을 늘린 주요 원인 중 하나.[12] 심지어 상술했듯 판정에 불만을 품고 심판에 패스트볼을 그대로 세게 던저서 흥분한 심판들과 벤치 클리어링을 하는 사건을 남기기도 했다.

주먹 실력도 상당했던 선수였다. 강타자 야마사키 타케시[13]가 주니치 시절 갈베스에게 데드볼을 얻어맞고 마운드로 걸어올라가 기싸움을 시도했다가 오히려 안면에 무자비한 펀치연타를 얻어맞은 일이 있었다. 다만 이건 갈베스가 자신의 주먹실력만 믿고 일본 선수들을 얕보다가 그걸 벼르고 벼르던 야마사키가 폭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야마사키도 일본인 선수 중에서는 상당한 피지컬을 갖고 있어서 나름 호기를 부리긴 했지만 결과는 앞니 3개가 빠졌다.

삼성에서도 성깔 때문에 민폐를 많이 끼쳤다. 정규 시즌 때의 성적과 퍼포먼스 자체는 뛰어났지만, 역시 일본 시절부터 타고났던 성격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특히 10승을 거둔 이후 돌연 귀국해버리는 등 그의 행보는 최악에 가까웠는데, 그 이유가 계약서에 적힌 옵션 조건이 10승이어서 딱 10승만 달성하고 그 이후로 태업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14] 그러나 나중에 김응용이 삼성 라이온즈 때문에 산다라는 책에서 김은식과 한 인터뷰에 따르면, 사실 멘탈 문제로 속을 썩이긴 했지만 실제 한국시리즈에서의 부진은 시즌 막판에 당한 부상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닌 김응용이 10년 전의 용병에 대해 저렇게 말했다면 실드가 아니라 부상이 부진의 원인이 맞는 듯. 그리고 그 이후로 야구선수 생활을 하지 못한 걸 보면 생각보다 부상이 치명적인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아직 삼성 팬들에겐 시즌 막판 돌연 귀국을 한 기행과 한국시리즈 부진 때문에 태업이라는 이미지가 훨씬 강한 편이긴 하다.

삼성 시절의 대표적인 민폐 사례는 시즌 10승을 거둔 직후인 2001년 8월 20일, 모친의 병환을 이유로 고국에 돌아간 뒤 부상 등 갖가지 핑계를 대가며 무려 7번씩이나 한국 입국을 미루었던 사건.[15] 처음엔 모친의 입원수속 절차 문제로 미루다가, 마침 시의적절하게 터진 9.11 테러를 핑계로 또 미루고,[16] 이후에는 어깨에 부상이 있어 검진을 받아봐야 할 것 같다고 또 미뤘다. 우여곡절 끝에 김재하 단장이 도미니카공화국까지 가서 수소문한 끝에 시즌이 다 끝난 10월 4일에야 입국했지만, 무려 45일이나 운동을 쉬었기 때문에 한국시리즈 전까지 몸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몸을 만들 시간이 부족했는지, 2001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정규시즌 당시 포스는 죄다 사라지고 구위가 저하된 모습을 보였다. 결정적인 건 4차전에서의 대량 실점. 삼성 라이온즈 입장에선 에이스라고 데려왔다가 가장 중요한 순간에 뒤통수를 맞았다. 이로 인해 삼성팬들 사이에선 최악의 용병 얘기가 나오면 톰 션, 에스마일린 카리대, 아놀드 레온과 함께 갈베스의 이름이 꼭 나온다.[17]

한편 이렇게 제멋대로였던 갈베스에게 단단히 혼이 난 삼성 프런트는, 이후 외국인 선수 영입 때 반드시 인성을 고려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18]


4. 관련 문서[편집]


[1] 대만프로야구 통산 2시즌 48경기 42선발 34완투 8완봉 26승 16패 4세이브 평균자책점 2.53.[2] 일본시리즈 우승은 오기 아키라 감독이 이끌고 스즈키 이치로가 활약하던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차지가 된다.[3] 좋은 타격 실력을 가진 투수로도 유명했으며 투수가 한 시즌에 만루홈런을 2번 친 경우는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99년의 갈베스가 유일하다. 통산 타격 성적은 259타수 39안타 10홈런 30타점 타출장 .151/.163/.297[4] 이 때 홈런을 때려낸 선수는 이 해에 데뷔한 츠보이 토모치카(坪井智哉; 現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의 1군 타격 코치)로 시즌 2호. 이 때 날린게 프로 통산 첫 담장을 넘기는 홈런이었다고 한다(시즌 1호는 인사이드 파크 홈런).[5] 이때 갈베스를 말리던 포수 요시하라 코스케가 흥분한 갈베스의 팔꿈치에 입을 가격당해 코피를 흘리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다. 잡는 팔을 갈베스가 마구 뿌리치면서 쳤다. 거기에 갈베스의 무시무시한 힘은 덤. 그를 붙잡는 요미우리 선수 & 코치 10여명이 오히려 갈베스가 용을 쓰자 질질 끌려다닌다.[6] 물론 명목상 발표한 금액만 20만 달러고, 갈베스가 직전 시즌 요미우리에서 연봉으로만 2억 5000만엔을 받았다는 걸 감안하면 최소 150만~200만 달러는 줬을 거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실제로 삼성이 갈베스와 20만 달러에 계약했다고 발표하자 몇몇 팀에서 이면계약설을 주장하기도 했다.[7] 2001년 6월 28일 대전 한화전. 갈베스의 삼성 시절 최고구속은 이날 7회에 황우구를 상대로 던진 151km/h. 요미우리에서의 최고구속도 1996년의 151km/h이다.[8] 실제 나이는 이것보다 더 많을 거라는 추측도 있었다. 20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중남미 선수들의 경우 메이저리그 구단과 조금 더 좋은 조건에 계약하기 위해 나이를 낮춰서 등록하는 일이 잦았고, 거기에 도미니카공화국의 경우 행정 체계가 완전히 갖춰지지 않아 실제 생년월일과 등록상 생년월일이 다른 경우가 많고, 더 심할경우 실제 생년월일을 아예 모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알폰소 소리아노훌리오 프랑코가 대표적인 사례.[9] 6월 16일 광주 해태전에서 완봉승(5-0)을 거뒀으며 이 과정에서 KBO 외국인투수 사상 최초로 완봉승을 기록했다.[10] 참고로 2001년 한국시리즈 4차전은 18:11로 두산 베어스가 승리하였는데, 3회말에만 3:8로 뒤진 상황에서 갈베스, 김진웅, 박동희가 차례로 털리면서 김동주의 한국시리즈 사상 2번째 만루홈런과 이후 안경현의 솔로 홈런 등 무려 12점을 뽑아내며 한국시리즈 한 이닝 최다득점을 기록한 경기였다. 그리고 한국시리즈 사상 첫 선발타자 전원득점, 한 이닝 최다타석(15타석), 최다점수차 역전승 등 각종 한국시리즈 관련 기록들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왔다. 갈베스는 이러한 막장 상황을 만든 주범 중 하나인 셈.[11] 주니치 시절 이종범도 한창 잘 나가던 도중, 갈베스의 빈볼에 헤드샷을 당한 적이 있다.[12] 일본프로야구에서 뛰는 외국인 선수들 중엔 의도적으로 일본 국내 선수들에게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도 많다. 일본 야구선수들의 평균 체격은 한국 선수들보다도 작은데, 아무래도 외국인 선수들이 상대적으로 체격이 크다 보니 위협을 하기가 쉬운 편이다. 또 위협적인 행동을 해서 상대를 위축시킴과 동시에 자신의 플레이를 펼침에 있어서 지장을 받지 않기 위한 측면도 있다. 그걸 가장 잘 이용한 선수들 중 타이론 우즈가 있었다. 그리고 일본프로야구에서 뛰는 용병들의 경우 몸값이 높고 나름 수준이 있는 데다 큰 선수들이 유난히 많아서 다혈질 용병이 드물지만은 않다. 일본프로야구에서 뛰었던 외국인 선수들의 증언으로는 아예 영입한 이후 팀에서 외국인 선수에게 몸싸움 요원으로서의 역할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13] 기복이 많은 커리어였지만 어찌저찌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서 부활하여 40대의 나이에 홈런왕을 차지하는 활약을 보인다.[14] 김은식 저, 한국프로야구 결정적 30장면 출처.[15] 옵션 조건이 10승 달성이라 해당 목표를 이루자마자 태업을 했다는 설, 포스트 시즌 출전에 따른 옵션이라는 설, 팀 동료 용병인 카를로스 바에르가와의 불화라는 설도 있다. 실제로 갈베스는 같은 외국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에르가와는 같이 식사도 하지 않을 정도로 바에르가를 피해다닐 정도였다고 한다.[16] 당시 상황상 이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했다. 9.11 테러가 터진 직후 미국 영공을 비행 중인 여객기들을 강제로 착륙시켰을 정도로 미국 전역이 아비규환인 상황이었고, 테러 재발 방지를 위해 보안검색 및 미국 입출국심사 규정, 거기다 흑인, 아랍인 등 유색인종에 대한 보안검색 규정도 한층 강화되었기 때문이다.[17] 여기서 카리대와 갈베스는 사용한 번호가 똑같다.[18] 물론 이후에 인성을 고려하게 된 이유는 암묵적으로 인정받는 야마이코 나바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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