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우파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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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 反右派運動/反右派鬪爭
간체: 反右运动 /反右斗争
영어: Anti-Rightist Campaign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쌍백방침과 정풍운동의 개시
3.2. 반우파 투쟁으로 전환하다
3.2.1. 우파의 기준
3.3. 반우파 투쟁의 확대
3.4. 투쟁의 종결
4. 결과
5. 마오쩌둥은 왜 반우파투쟁을 감행했을까?
6. 중국 공산당의 평가
7. 영향
8. 참고 문헌


1. 개요[편집]


1957년부터 1958년까지 중국 공산당이 사회 각 계층에 실시한 군중 정치운동. 중국 공산당 내외의 수십만에 달하는 이들을 '우파'로 규정하고 대대적으로 박해했다. 1980년대 개혁개방 후, 중국 공산당은 집행과정에서의 '확대화' 문제, 즉 '반우 확대화'가 잘못되었음을 시인했지만 현재까지 우파로 규정되어 희생된 이들의 유족들로부터 복권 요구를 받고 있다.


2. 배경[편집]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전 중국 공산당의 세력 확장과 중일전쟁국공내전에서의 승리를 위해 지식인을 필요한 존재로 간주했고 이른바 신민주주의라는 그들과 연합하는 정책을 추진해 중국의 공산혁명을 성사시켰다. 하지만 이들 지식인들 중 상당수는 공산당에서 '착취계급'으로 간주한 지주, 관료 출신이었고 오랫동안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사상에 있어서도 구사회의 잔재가 남아있다는 인상을 피하기 어려웠다. 이에 공산당은 이들이 마르크스주의와 당의 방침을 학습할 수 있도록 사상교육을 진행하기 위해 각종 방법을 취했다.

1951년 9월, 저우언라이는 <지식인의 개조 문제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올렸고, 같은 해 11월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학내 사상개조와 조직 정리에 관한 지시>를 발표하여 자아교육과 자애개조를 진행할 것을 호소했다. 지식인의 자산계급 사상을 무산계급 사상으로 변화시키고자 했던 이 사상개조운동은 미국에 대항하여 북한을 지원하자는 '항미원조운동'과 함께 연계되어 미국을 대표로 하는 자산계급 교육과 존 듀이의 실용주의 교육에 대한 비판을 전개했으며, 후스 비판 운동도 함께 전개되었다. 여기에 1952년 동북 지역을 시작으로 중국 전역에 전개된 삼반오반운동에 호응하여 교육계에서 자산계급의 진부한 교육과 교학사상 비판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처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지식인들은 자산계급 속성을 지닌 것으로 분류되어 존재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고 대중으로부터 불신을 당해 깊은 실망과 좌절감을 느꼈다. 1956년 1월 10일, 베이징대학 철학과 교수 펑유란(馮友蘭)은 '인민일보'에 <지식분자의 잠재력을 불러일으키자>는 사설을 개재했다. 이에 베이징 사범대학 학장 천위안(陳垣)이 호응해 1월 20일 인민일보에 사설 <지식분자 문제에 관한 나의 의견>을 게재했다. 이 두 사설은 지식분자에 대한 대우를 개선해 줄 것과 공산당의 지식분자에 대한 이해와 관계 개선을 요구했다. 이러한 두 사설에 호응해 사회 각계 지식인들의 투서가 중앙위원회에 쏟아졌다.

중국 공산당은 이러한 지식인들의 요구를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당시 공산당은 전국의 토지를 국유화하고 부농을 타도하는 '토지개혁'을 완료했다고 판단하고 생산력의 향상에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생산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경제건설을 위한 과학, 기술의 진흥이 필요했고, 자연히 민주인사나 지식인의 적극적 참여가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 1956년 1월 14일부터 20일까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지식분자 문제'를 중심으로 회의를 열었다. 저우언라이는 이 자리에서 지식인 중 다수는 사회주의를 위해 일하는 국가의 일꾼이 되었기 때문에 이미 노동계급의 일부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지식인의 역량이 수에 있어서나 업무수준․정치의식에 있어 신속한 사회주의 건설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정치문제는 지식인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당 내부에 더 많이 존재한다."


1월 25일, 마오쩌둥은 최고국무회의를 소집하여 '1956~67년 농업발전요강'을 결정하면서 지식인들이 적극적으로 사회주의 건설에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경제와 과학면에서 신속하게 세계의 선진수준에 도달하려면 지식인들의 참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이후 1월 30일부터 2월 7일까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2기 전국위원회 제2회 회의, 이른바 '지식분자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앞의 두 회의의 결정을 구체적으로 토론하여 민주인사들과 연합한 민족민주통일전선을 조직하기로 결의했으며 민주인사 및 지식분자들의 분발을 촉구했다. 또한 저우언라이는 국가 발전을 위해 지식인들의 참여가 절실하다는 것을 피력하면서, 중국 공산당의 대 지식인 정책이 변했음을 강조했고 마오쩌둥도 중국의 산업 특히 중공업설비와 정밀기계제조 부문은 소련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임을 지적하고, 기술혁명과 문화혁명을 통하여 이를 해결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많은 고급지식분자와 일반지식분자의 양성이 필수적이라고 하면서 지식인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한편 국외에서도 중국 공산당이 위협을 느낄 만한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1956년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해 소련에서 일어난 '스탈린 격하운동'은 스탈린처럼 국내에서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리고 있던 마오쩌둥에게는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소련으로부터 원조를 받고 있던 중국으로서는 흐루시쵸프와 당장 대적할 수는 없었다. 중국 공산당은 흐루시쵸프가 스탈린에게 가한 비판 자체는 인정했지만 스탈린이 범한 잘못을 가지고 공적까지 포함한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에 대해선 반대했다. 또한 헝가리와 폴란드에서 반소련 민주화운동이 벌어졌다가 소련군에게 진압된 사건이 벌어지자, 공산당은 국내의 지식인들이 소요를 일으킬 것을 우려했고 그들에게 의견을 자유롭게 제시하게 해줌으로서 불만을 잠재울 수 있기를 희망했다.

중국의 민족문제도 1950년대 중반 중공의 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 중공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과제 중 하나는 한족을 제외하고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국가인 중국을 영역적, 제도적으로 어떻게 하나의 국가로 만들 것인가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초기, 중앙 정부는 민족구역자치제도를 실시해 민족간 평등 실현과 국가 통합 문제 등을 해결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민족구별' 작업을 통해 소수민족을 만들어내고, 그들에게 민족자치구역과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 선출과 한긑 정치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광대한 소수민족 지역을 중국의 한 지방으로 정착시키고 소수민족을 중국의 인민으로 새롭게 편제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 사회주의혁명과 공산사회 건설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결코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먼저 공산당의 토지개혁 과정에서 소수민족들의 반발이 거셌다. 특히 광시성에 몰려 살던 좡족들은 오랜 세월 애써 일궈왔던 토지를 국가에서 몰수하는 것에 반발해 1950년대 내내 대규모 민란을 일으켰고, 타오주를 비롯한 광시성장들은 이를 강경 진압해 수십만 명에 달하는 이들을 처형했다. 또한 한족 사이에서 만연하던 '대한족주의'와 소수민족의 '지방민족주의'가 충돌했다. 중국 공산당은 대한족주의를 "대민족주의의 중국식 표현으로, 착취계급 사상이 중국 국내민족 관계에 반영되어 비교적 작은 민족을 경시, 배척하고 압박하는 민족주의의 일종이다."라고 정의했고 지방민족주의를 "소수민족 중에서의 착취계급사상이 민족관계에 반영된 것으로 고립, 보수, 배외를 특징으로 한다."고 정의했다. 이 두 모순된 사상이 충돌하는 이상 중공이 바라는 완전한 통합은 요원했다.

1953년 3월, 마오쩌둥은 당내 지시를 통해 당내 많은 당원과 간부들 사이에 심각한 대한족주의가 존재하는데, 이것은 아주 위험한 것으로 빈드시 비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1956년 4월 25일 <10대 관계를 논함>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마오쩌둥은 대한족주의를 집중 비판할 것을 강조했다.

"지방민족주의 문제도 있지만 그것은 중점이 아니다. 중점은 대한족주의를 반대하는 것이다. 인구에 따라 한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가령 한인이 대한족주의를 가지고 소수민족을 배척하면 그것은 아주 좋지 않다. 한족에게 프롤레타리아 민족정책 교육을 광범위하게 진행해야 한다."


이러한 마오쩌둥의 "대한족주의"에 대한 비판은 실용적인 방침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한족은 인구의 94%를 차지하지만 중국 영토의 적은 부분을 차지하는 반면에, 전체 인구의 6%를 차지하는 소수민족은 중국 영토의 60% 이상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또한 소수민족 지역은 풍부한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어서 중국 사회주의 건설 사업에 아주 중요했다. 따라서 소수민족을 제대로 대우하여 협조를 받아내는 것이 필요했고, 그러자면 지식인들의 협조가 절실했다. 이리하여 마오쩌둥은 지식인 포섭을 위한 일련의 정책을 개시했다.

3. 전개[편집]



3.1. 쌍백방침과 정풍운동의 개시[편집]


1956년 4월25일에 열린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마오쩌둥 공산당 주석은 "10대 논제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여 지식인들의 자유발언을 허용하는 문제를 논의했고 4월 28일 정치국 확대회의에서는 '백화제방(百花齊放),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는 방침을 제시했다. 마오쩌둥은 예술상에서는 '백화제방', 학술상에서는 '백가쟁명'을 우리의 방침으로 해야 한다며 공식적으로 "쌍백방침"을 제기했다. 공산당 내부에서는 이에 대해 부정적 시각이 많았지만, 마오쩌둥은 5월 2일 최고국무회의에서도 또다시 백가쟁명의 문제를 제기하며 자신의 뜻이 확고하다는 것을 표명했다.

이에 1956년 9월 중국 공산당 제8기 전국대표대회에서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당의 공식 방침으로 정하기로 합의했다. 이대회에서 개정된 중국 공산당의 당규 총강에는, 금후 중국공산당의 임무는 "계획적으로 국민경제를 발전시키고, 가능한 산속하게 나라의 공업화를 실현하며, 순서에 따라 국민경제의 기술적 개조를 행한다. 그리고 현대적 공업, 현대적 농업, 현대적 교통운수업, 현대적 국방을 실현하고, 그것들에 필요한 물자적 기초를 만든다."라고 규정했다.

1956년 5월 26일, 중국공산당 선전부장 루딩이(陸定一)는 문학자, 예술가 및 공산당원, 민주제당파, 무당파의 자연과학자, 사회과학자, 의학자 등 2천여 명을 모아놓고 '백화제방, 백가쟁명'에 대해 강연했다.

"독립적인 사고와 자유로운 토론이 장려되지 않는다면 학술발전은 정체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역사는 보여준다. 문학예술활동과 과학연구에 있어서 독립적인 사고의 자유, 논쟁의 자유, 창작과 비평의 자유, 자기의 의견을 발표, 견지, 유보할 수 있는 제유를 제창한다."


그러나 루딩이는 이런 자유의 약속에 대해 여러 조건을 달았다. 예술, 문화, 역사, 철학 작품은 자연과학과는 달리 계급성을 띠고 있으므로 "계급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나라에서는 여전히 정치적 감독하에 있어야 하며, 주어진 자유는 "인민속의 자유'를 의미하고 생산된 작품은 당연히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사상투쟁은 인민내부의 것이어야 하고, 인민내부의 사상투쟁과 반혁명분자에 대한 투쟁은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비판은 호의적인 것, 조용하게 도리를 설명하여 들려주는 식의 것, 대국을 생각하여 단결의 입장에서 시작해야 하고, 단결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며 어디까지나 당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비판을 전개해 줄 것을 당부했다.

1956년 6월 18일, 궈모뤄는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3회 회의에서 과학발전 12개년 계획의 경위와 계획실현을 위한 금후의 임무에 대해서 발언함과 동시에, 그 실현을 ‘백가쟁명’에 의해서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가 주장하는 ‘백가쟁명’이라는 것은 각종 학술연구 상호간의 사회주의 경쟁이고, 동일부문 내에서의 사회주의 경쟁이다. 결코 학술을 위한 학술, 연구를 위한 연구는 아니며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그 모든 임무이다. 따라서 우리의 '백가쟁명'은 우리의 학술연구를 번영시키는 것이고 훌륭하게 사회주의를 위해서 복무하기 위한 것이다."


마오쩌둥은 1957년 6월 인민일보에 "쌍백방침"의 6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1. 전국의 각 민족 인민을 분열시키지 않고, 그 단결에 유리할 것.

2. 사회주의 개조와 사회주의 건설에 불리하지 않고, 사회주의 개조와 사회주의 건설에 유리할 것.

3. 인민민주주의 독재를 파괴하거나 약화시키지 않고, 이 독재를 강화하는데 유리할 것.

4. 민주집중제를 파괴하거나 약화시키지 않고, 이 제도를 공고히 하는데 유리할 것.

5. 공산당의 지도에서 이탈하거나 이를 약화시키지 않고, 이 지도를 공고히 하는데 유리할 것.

6. 사회주의의 국제적 단결과 전 세계의 평화를 사랑하는 인민의 국제적 단결을 파손하는 것이 없이, 이 단결에 유리할 것.


물론 이것은 반우파투쟁이 시작되는 시기에야 출판하여 일반에 공개 발표된 것이었지만, 기본적으로 "쌍백방침"에 대한 마오쩌둥의 기본 인식은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렇듯 공산당과 중앙정부는 우호적 비판은 허용하되 '비난'은 철저히 용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공산당의 이러한 입장 표명에, 지식인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뻐했다. 중국 문학자 주광첸(朱光潛)은 훗날 당시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백가쟁명의 주장이 나오자 나는 크게 한숨을 돌렸다. (중략) 내가 아는 한 관념론자로 낙인찍힌 구 지식분자들은 얼굴을 마주하고 이 '복음'을 말하였지만 기쁨을 얼굴에 나타내지는 않았다."


지식인들은 그동안의 사상개조운동의 영향으로 폐쇄된 언로와 중국공산당의 독주에 불만을 품으면서도 은근히 개방을 바라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이러한 지식인들의 기대를 더욱 부채질했다. 1956년 11월,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 제8차 중앙위원회 제2차 전체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우리는 내년에 정풍운동을 전개하려고 한다. 세 가지를 정돈해야 하는데, 첫째가 주관주의, 둘째가 종파주의, 셋째가 관료주의이다. (중략) 목표는 잘못은 고치고 사람은 살리는 것이다. 또한 정풍은 인민 내부의 일, 당내의 일을 처리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비판과 자아비판을 통해 해결해야지 무력으로 해결해서는 안된다."


또한 마오쩌둥은 1957년 1월 18일부터 27일에 걸쳐 열린 '성, 시, 자치구 당위원회서기회의'에서 소부르주아 계급을 포함한 지식분자, 나아가 인민 대중에게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말하라, 말하는 자는 죄가 없다."고 선언했다. 이어 그는 2월 27일 정치협상회의대표 400인이 모인 최고국무회의에서 <인민내부의 모순을 바로 처리하는 문제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이미 적대적 모순은 없어졌기 때문에 계급투쟁적인 방법이 아닌 교육을 통해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민주인사와 지식인들에게 더이상의 계급투쟁은 없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이러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공산당에게 호되게 시달려왔던 지식인들은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자 중공중앙선전부는 전국선전공작회의를 소집하여 쌍백방침을 호소했고 방침의 확산을 위해 3월 5일부터 20일 사이에 정치협상회의 제2회 전국위원회 3회 회의를 베이징에서 개최했다. 그래도 지식인들이 거의 호응하지 않자, 당시 칭화대학교수이자 민주동맹 중앙위원이었던 페이샤오퉁(費孝通)은 1957년 3월 24일 인민일보에 지식인이 적극성을 갖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사설을 실었다.

"지식분자는 자신이 머리를 드러내려고 해도 주위를 둘러보고 적당히, 그리고 잠시 기다려 말을 하며, 앞장서려고 하지 않는다. (중략) 백가쟁명의 방침에 대해서 명확히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이 우려하고 있는 것은 그물에 걸리거나, 약간의 사상정황이라도 탐색되어 다음 숙청운동이 시작되면 징계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비판이 아예 제기되지 않은 건 아니었다. 3월에 개최된 정치협상회의에서, 국민당혁명위원회의 장즈중은 공산당과 당외 인사의 관계에 대해 다음 3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1. 유직유권유책(有職有權有責): 당원과 당외인사는 같은 지위에 있어도 당원이 알고 있는 것을 당외 인사에게는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또한 일부 당원 간부는 항상 당외 인사에 대한 배려를 단순하게 생각하거나 국가가 그들을 배치하는 것은 외관을 꾸미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결국 당외인사는 직위는 있으나 권리가 없고, 책임도 없다.

2. 통일전선정책의 인식과 실행방법 문제: 당원들은 당외인사와의 대화에서 협의를 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지시를 하고, 좌담회는 형식일 뿐 자신이 좋아하는 말을 들을 뿐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서만 말하고 자기비판은 하지 않는다. 때문에 당외인사는 의견을 내지 않고 특히 반대 의견은 내지 않지만, 회의를 마친 후에는 많은 의견이 나온다.

3. 당원과 당외인사의 우호협력 문제: 당원들은 당외인사와 생활을 함께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유람이나 오락조차 따로 한다. 당원들은 말을 주고받다가도 당외인사가 오면 대화를 그치고, 거꾸로 당외인사들은 대화를 하다가 당원이 오면 대화를 그만둔다. 또 당외인사는 일부 관계하는 회의에 참가할 수 없고, 관계되는 문건도 볼 수 없으며, 정책이나 정강이 적시에 전달되지 않아서 책임있는 당외인사도 상세하게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규칙을 위반하기 쉽다. 당과 대중의 관계는 피부와 뼈인데 살이 없는 형편으로, 많은 지식분자들이 당에 접근하려고 해도 높은 담에 의해서 차단되어 접근이 불가능하다.


민주동맹의 뤄룽지(羅隆基)는 고급지식분자에 대한 대우를 계선하기 위해 등급평가를 채용했지만, 소수의 교수에게는 등급 평가가 불공평하게 이뤄지며, 정치를 중시하고 학술을 낮게 하며, 당원에게는 높게 평가하고 당외인사는 낮게 평가한다고 하면서 당원과 비당원 사이의 불평등을 지적했다. 또한 농공민주당의 장보쥔(章伯鈞)은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민주제도 확립을 강조하고, 그것에 기초한 민주당파의 장기공존의 문제, 조직공작의 문제,반혁명 숙청의 문제, 공작임무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만주당파와 공산당과의 관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주당파는 정치자유, 조직독립 및 지위의 평등을 갖는다고 하지만, 다른 한편 공산당의 지도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다. 이것은 모순인가, 아닌가? 민주당파와 공산당원이 공존하기 위해서는 양자간의 거리를 없애야 하고 민주당파나 무당파는 주인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하면서, 공산당이 인민 내부의 일상적인 비판과 자기비판의 생활방식으로 감독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민주의 범람은 부르주아계급 사상과 유심주의가 들어올 것이라고 불안해하지만 오히려 민주생활을 풍부히하고 민주제도를 강화해서 사회주의 건설에 참가시키는 것이야말로 마르크스 레닌주의 진리를 발양하는 것이다. (중략) 정치협상회의를 전국인민대표대회와 같은 지위로 끌어올려, 이원제를 구성해야 한다."[1]


장즈중, 뤄룽지, 장보쥔의 이같은 주장은 아직 조심스런 의견개진의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이 마오쩌둥의 뜻에 따라 공산당 내부의 문제에 대한 정풍운동을 1957년 4월 25일부터 전개하고 모든 '우호적' 비판을 허용한다는 입장을 거듭 표명하면서 지식인들은 점차 용기를 얻었다. 1957년 4월 30일, 마오쩌둥은 천안문 성루에서 각 민주당파 책임자들을 모아 좌담회를 열고 당의 정풍을 원조해달라고 요청했다. 공산당원 리웨이한(李維漢)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마오쩌둥은 신시대, 신임무로서 계급투쟁은 종결되었으니 민주인사에게 교육, 위생 등의 부문에 있어서 관료주의를 지적할 것을 중점적으로 호소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고등학교(전문학교 이상)의 지도체제 정비의 책임자로 덩샤오핑을 임명할 것이며 지식분자에게 직무와 권한을 주고 학교 당위원회제에 대해 의견을 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중공중앙통일전선부는 1957년 5월 8일부터 5월 16일, 그리고 5월 21일부터 6월 3일까지 13회에 걸쳐 당의 정풍운동 전개를 촉구하고 당외인사들로부터 인민 내부모순의 지적, 즉 당이나 정부의 정치상의 잘못, 결점 등에 대한 의견과 비판을 듣기 위한 좌담회를 개최했다. 이에 6월 3일까지 70여 명의 민주당파 인사와 지식인들의 의견진술이 이뤄졌다. 좌담회를 주최한 리웨이한은 첫날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회의를 소집한 목적은 여러분에게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정풍을 원조해달라는 것과 우리의 결점과 잘못을 고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다. 통일전선의 방법을 가지고 우리의 정풍을 추진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로서 여러분이 자세한 비판과 의견을 많이 제시해 줄 것을 희망한다."


이렇듯 마오쩌둥과 공산당이 대놓고 '마음껏 떠들어도 좋다'. '절대로 계급투쟁을 하지 않겠다.'라고 부추기자, 지식인들은 마침내 가슴속에 품어왔던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먼저 농공민주당의 장보쥔은 공산당원의 특권의식을 비판하며 당외 인사의 직위와 권한을 요구했다.

"직위, 권한, 책임 세 가지는 불가분으로 당외인사가 직위와 권한을 가지도록 하려면, 동시에 당외인사가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만 현재 당외인사가 지도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실제로는 당조직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책임을 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권한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당외인사의 '유직무권(有職無權)'의 근본원인으로 되어 있다. 당은 행정에 관한 직위와 권한을 확실히 해야 한다."


중국민주건국회의 장나이치(章乃器)는 당과 당외의 문제, 당과 행정의 구별, 통일선전부의 결점을 거론하면서 당원, 당외인사가 갖고 있는 '벽'과 '구'의 사상적 근거에 대해 발언했다.

"당은 혁명, 건설을 지도하여 지금의 중국이 있게 하였지만, 이 때문에 당외 인사들은 당원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게 되었다. 또 당원들은 오만한 기풍을 조장하고 있는데, 이는 스탈린의 레닌 추도사에 '우리 공산당은 특수한 자들로 만들어진다.'고 한 말 때문이다. 즉, 이 구절은 수양이 덜 된 당원이라도 자신은 특수한 인간이라고 자임하는 것을 조장하고 있다. 따라서 공산당이 특수한 자들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공식, 즉 교조주의를 비판할 필요가 있다."


국민당혁명위원회의 천밍수(陳銘樞)는 장나이치의 발언에 호응하여 "당원이 허심탄회하게 당밖에서 스승을 구하고 친구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9.3학사의 마오이성(茅以升)은 "이러한 '벽'과 '구'는 수년 동안 단지 당과 대중과의 사이만이 아니라 대중 상호간, 각 기관 사이, 기관과 대중 사이에도 존재하고 있다."고 발언했다.

당조직이 행정기구를 대신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지적도 있었다. 국민당혁명위원회의 사오리쯔(邵力子)는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특히 현 이하의 지도기관에서의 문제가 크다. 현장(縣長)은 대체로 무시되는 반면 현 당위원회의 권력은 대단히 크다. 마찬가지로 현 인민위원회는 중시되지 않고 모든 일은 현 당위원회가 결정한다. 앞으로 행정적 지시는 국무원이 각 정부 부문에 하고, 당 중앙은 당의 계통으로 분리하도록 고려해야 한다."


통일전선부의 태도가 모든 정파에 동일하지 않는 상황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장보쥔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통일전선부의 처리 방법이 집중에 대해서는 강조하지만 민주에 대해서는 소홀히 한다. 특정한 파를 지지하고 다른 풍부한 의견을 가진 사람이나 집단을 억압하며, 처리를 명확히 하지 않고 시비를 구별하는 것이 명확하지 않다. 때문에 약간의 독재적 작용과 가부장적 작용을 증장시키고, 스스로 종파주의 활동도 조장하였다. 따라서 민주당파에 대한 직접 관리를 보다 느슨하게 해야 한다.”


심지어 공산당의 무능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대두되었다. 장나이치는 관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더 위험하다고 주장했고 무당파이자 국무원 교육부장 장시뤄(張奚若)는 공산당의 세가지 해로운 점(관료, 종파, 주관주의)의 원인에 대해 발언했다.

"주관주의는 당원의 자연계와의 투쟁이나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지식이 불충분하고 경험이 부족한 것에 있으며, (중략) 임무가 많은 것에 원인이 있다. 이러한 주관주의를 배경으로 하여 간부는 임무달성, 초과달성, 기한 전 달성을 해야 하는데 이것이 단순한 행정명령으로 되어 관료주의를 낳는다. 종파주의는 당원이 해방 후 8년간의 역사를 배경으로 '천하는 내가 건설했다.'는 사고에서 온 것이다. 게다가 교조주의는 낮은 지식수준과 경험의 부족 등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소련에서 사용된 교조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러한 장시뤄의 설명은 거의 모든 문제가 공산당원의 무능력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베이징대학 교수 향달(向達)은 당원의 지식부족, 경험부족, 정황의 복잡함, 일의 양이 많음이 관료, 종파, 주관주의의 요인이 되고 교조주의에 빠지는 원인이 된다고 지적했다.

또한 공산당원이 법과 제도를 운용할 능력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동북사범대학 교육계 주임 양칭(楊淸)은 당원들이 헌법, 법제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어서 법을 위반하고 규율을 혼란시키며, 하고자 하는 것을 마음대로 한다고 주장했고, 국민당혁명위원회의 슝커우(熊克武)는 법제의 건전화는 반혁명 숙청공작만이 아니라 인민 내부의 모순을 바로 처리하는 것에도 중대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법제의 건전화를 주장했다. 여기에 국민당혁명위원회의 노욱문(盧郁文)은 법제 확립의 구체적 방법을 제시했다.

1. 당과 정부의 관계를 정한다.

2. 법제질서법을 제정하여 전국인민대표대회와 국무원, 국무원과 각부, 중앙과 지방의 입법 및 법규제정상의 권한 문제를 해결한다.

3. 각 기관의 조직법을 정하고 각 기관의 업무의 성질, 직권의 범위, 기구편제를 명확하게 규정한다.

4. 각 기관의 공작 규정을 제정하고, 내부를 장악하는 것부터 하여, 각 급별 책임, 각 계층별 책임문제를 해결하고 전문직을 두어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한편 뤄룽지는 '평반위원회(平反委員會)의 설립을 요구했다. 즉, 삼반오반운동에 있어서 잘못 처결된 인사들이 명예회복할 수 있도록 위원회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공산당으로서는 지금까지 행해왔던 사상개조운동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여겨질 수 있는 발언이었다. 또한 민주건국회의 황옌페이(黃炎培)는 공사합영(公私合營)에 의해 개인 기업이 차별을 받고 있는 상황을 설명하며 자본가라는 계급 딱지를 떼어줄 것을 요구했다.

광명일보 편집장이자 민주동맹원 겸 9.3학사 중앙위원인 추안핑(儲安平)은 공산당의 독주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신중국 성립 후 처음 중앙인민정부의 6명의 부주석 안에 3명, 4명의 부총리 안에 2명이 중공당원 이외에서 임명되어 ‘연합정부’의 분위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부주석이 1명으로 감소한 것은 좋다고 해도, 12명의 부총리에 한 사람의 비당원도 없다. (중략) 전국의 모든 부문에서 말단에 이르기까지 당원을 배치하고, 사람들은 일의 대소를 불문하고 당원의 얼굴을 살펴 일을 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공산당에서 천하는 공산당의 것, 즉 「黨의 천하」라는 사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민주당파는 공산당의 독재적 경향을 비판하고 사회주의 민주의 확립을 요구하며, 당이 행정을 대신하고 있는 상황을 고치고, 또 반혁명 숙청에 의한 잘못을 바로 하기 위하여 확고한 법제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이러한 주장을 한 까닭은 연합정권 하에서 직위가 부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가 갈수록 강화되고, 자신들은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계속적으로 사상개조만을 강요받은 것에 대한 불만과 소외의식이 있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얼마 후 대학 교수를 중심으로 지식인들의 공산당에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1957년 4월 27일 베이징대학 화학과 제1회 좌담회에서, 화학과 교수 후우잉(傅鷹)은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당과 당외 인사간의 관계가 좋지 않은 것은 우선 '3반' 시기의 편향된 방법 때문이었다. '3반' 이후 교수들이 말하고 있을 때 당원이 오면 얼굴을 마주보고 웃고, 뭔가 당원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한다. 하지만 실은 교수들은 모주석의 악담을 말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메이란팡(梅蘭芳)의 귀비취주(貴妃醉酒)"의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중략) 투쟁(숙청)의 때가 오면 당원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어느 시기에 후우잉이 메이란팡의 말을 하면서 왜 예술가를 존중하지 않는 것인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들었다. 이것은 어떤 사상인가? 근원은 무엇인가?'"


"때문에 젊은 당원에 대한 우리들의 시각은 중경국민정부의 국민당 특무에 대한 것과 같다고 본다. 특히 입당해서 당원후보에서 정당원이 되려고 하고 있는 인간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가진다. 그들은 사람에게 곤봉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정당원이 되는 기회가 증가한다."


후우잉은 뒤이어 <3반이 또 오지 않는다는 보증은 없다>는 글에서 "지금은 죽을 위험이나 실업의 위험은 없다. 그렇지만 3반이 또 오지 않는다는 보증이 없다."라며 중국 공산당에 대한 극도의 불신을 표시했고 <사상개조는 질색이다>라는 다른 글에서는 "나는 사상개조는 질색이다. 개조라고 하는 단어는 노동개조와 연결되어 있다. 잘못을 범하였다면 고쳐야 한다. 나는 일생 커다란 잘못은 범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다. 나라를 사랑하는 것에 어떤 당원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당원들은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등의 경전을 인용하여 의기양양해 하는데,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을 아무도 모르는 말을 사용하여 설명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라며 공산당원을 조롱했다.

또한 후우잉은 학교문제에 대해서 <학교에서의 관료적 공기는 해방 전보다도 증가하였다>라는 글을 작성했다.

"학교에는 지금도 아직 학술적 기풍이 세워져 있지 않다. 관료적 공기는 해방 전에 비해서 농후하다. 교학․연구 면에서는 교수가 가장 잘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수는 학교의 일체에 발언권을 가져야 하는 것이고, 그들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 해방 이래 교수에게는 지위가 없다. 어느 졸업생을 조수로 해서 학교에 남길 것인가는 인사처가 결정하고, 모두 정치적 수준이 기준으로, 선발되는 기회가 당원은 단원보다 많고 단원은 대중보다 많다."


아울러 그는 <진실로 진보적인 것은 의견을 내는 것이다>라는 글에서 현실의 세태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모주석이 백가쟁명을 제창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활발하게 되지 않고, 이제 겨우 활발하게 되었다. (중략) 진실로 진보적인 것은 의견을 내어 국가를 정확히 계속 이끌고 가는 것이다. 중국의 지식분자에게는 기절(氣節: 기개와 절조)의 전통에 있다. 아첨이나 아부는 사용하지 않는다. 지금은 기절이라고 하는 단어는 옛것이 되었다. 봉건적이라고 한다."

상하이 경제학원교수 왕유중(王惟中)은 당과 지식분자 사이의 세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첫째, 일부 당원의 지도방법이 지식인의 특성에 적응하고 있지 못하다. 지식분자는 우선 체면을 중시하고,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그의 눈을 제거하는 것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보다도 중대한 것이다. 당은 그들의 애국심과 연구활동을 인정하고, 그들의 체면을 중시하는 특성을 배려하여 조금씩 교육개조를 해야 할 것이다.

둘째, 교조주의와 사상의 자유에 모순이 있다. 학술과 사상의 문제에 반동사상이라는 딱지를 붙이게 되면 진리를 설명할 수가 없다.

셋째, 지식인의 특성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사상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


국민당혁명위원회의 천밍수(陳銘樞)는 아예 교내 당위원회제도를 폐지하자고 주장했다.

“당위가 학교를 지도하는 것은 중국 현재의 정치제도의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공산당의 지도에 의한 공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독재를 실행하고, 각 민주당파도 모두 정권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필요가 있어서 학교에 ‘당위치교’를 실행하는가. ‘당위치교’는 개정되어야 한다”


1957년 5월 19일, 베이징 대학생들이 교수들의 뒤를 이어 공산당 비판운동을 개시했다. 그들은 이른바 '민주의 벽' '3대'에 출석하는 베이징대학의 대표는 어떻게 선발되었는가를 당위원회에 묻는 대자보를 붙였다. 유기제(劉奇弟)는 5월 21일 <후펑(胡風)[2]은 결코 반혁명분자가 아니다.>라는 대자보를 붙이고 후펑의 석방을 정부에 요구했다. 그러자 베이징 대학은 후펑 옹호파와 후펑 비판파 간의 논쟁으로 시끄러워졌고 곳곳이 토론회장 또는 연단으로 변했다. 급기야 23일 법학과 학생들은 유기제 등 3인을 불러 토론회를 열었다.

베이징대학 법학과 여학생 린시링(林希翎)은 후펑에 대한 유기제의 의견에 찬성하며, 청년은 인간의 특징이 충분히 발휘되고 개성이 진정으로 해방되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진실로 평등, 우애의 생활이 행해지는 것 같은 진정한 사회주의적 인간생활을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나도 과거에 후펑을 비판하는 문장을 쓴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유치하고 부끄럽다. 현재 생각해보면 그에게 반혁명의 죄명을 가하는 것은 엉터리이다. 그의 의견서가 반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가. 당중앙에 의견을 내는 것이 어떻게 반혁명인가. 이는 스탈린주의의 방법이다. 후펑의 의견서는 기본적으로 정확하다. 그는 모주석의 ‘문예강화’에 반대하였다고 한다. 모주석은 ‘문예는 노․농․병에 복무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후펑은 이를 적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모주석의 말이라고 해서 금과옥조는 아니다. 왜 반대하면 안 되는 것인가. (중략) 후펑의 의견서가 만약 오늘 제출되었으면 그가 반혁명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루쉰이 제출하였다면 반혁명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탄톈룽(譚天榮) 학생은 한 물리학 교수의 처지를 빗대어 중국 공산당 정권을 비판했다.

"난카이대학의 청징(程京) 교수는 미국과 영국에 유학하여 영국에서 세 개의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상대성원리에 공헌한 바가 있는 물리학자이다. 1949년 가슴 가득히 열의를 품고 귀국하였다. 1950년 사상개조운동을 만났다. 그렇지만 난카이대학의 그것은 어떤 사상개조였던가? 그는 여러 가지 인신공격을 받았고 33세의 이 젊은이는 가슴에 잔혹한 상처를 받았다.현재 난카이대학의 구내에 괴이한 사람을 볼 수 있다. 매일 관절염을 앓고 있는 두 다리를 끌고 여러 잡일에 종사하고 있지만, 스스로 세탁할 비누도 없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바로 철학박사요 물리학 교수인 청징인 것이다!"


탄톈룽은 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숙반운동을 비판했다.

"숙반 때 나는 반에서 ‘반혁명’으로 투쟁의 대상이 되었다. 처음 그것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자, 반의 간부는 그 사람들은 당을 믿지 않고 있다고 하였다. 나의 가까운 친구 한 사람이 나는 결코 현행 반혁명은 아니라고 보증하자, 그들은 그것은 내가 그를 유혹하고 속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나를 압박하여 있지도 하지도 않은 여러 죄행을 자백하라고 하였다. (중략) 어떻게 이러한 것이 있을 수 있는가? 대중이 당의 모든 것을 바르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당은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바르고, 당 만이 바르며, 당 외 대중이 다른 의견을 내면 그것은 틀림없이 잘못된 것이다. (중략) 이런 공격과 압제는그가 남을 만족시키는 자기비판을 할 때까지 계속된다.”


베이징대학에서 시작된 대학생들의 공산당 비판은 전국 대학으로 확산되었다. 그들은 민주당파나 대학교수들보다 훨씬 과격했을 뿐만 아니라 일부는 마오쩌둥의 존재까지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대학생들은 건국 이후 중국 공산당이 주도하였던 사상개조와 사회주의화는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대학생들의 주장에 일부 고등중학교 학생들도 동조했다. 이러한 사상개조운동에 대한 비판과 부정은 사실상 중국 공산당과 마오쩌둥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다.

한편, 소수민족 지역에서도 공산당에 대한 비판 의견이 쏟아졌다. 1957년 4월 14일부터 25일까지 개최된 신장자치구 제1기 인민대표대회 제4차 회의에서는 정풍운동과 관련된 문제를 논의했다. 이에 자치구 내 각종 문제, 특히 민족정책 집행 상황이나 민족관계 등을 둘러싼 문제에 주의할 것을 강조하고 왕은마오, 사이푸딘 등의 지도자로 구성된 '정풍개조소조'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정풍운동을 준비했다. 5월초부터 약 한달 가량 진행된 각종 좌담회에서 소수민족 출신 간부나 당외 인사들은 다양한 의견을 제출했는데, 이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민족간부정책: 5월 10일에 열린 공산업자 좌담회에서, 신장자치구 공업종합회사 부사장 아브리즈 무샤바예프는 회사 내 민족관계 문제에 있어 명의상으로는 동등한 직무이지만, 실제 권력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는 점, 한족 출신 기술 노동자 가족에게는 일을 마련해주면서 소수민족 출신 노동자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점, 한족 간부가 소수민족 성원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는 문제 등을 언급했다. 그는 한족 출신의 한 목장장이 소수미족 출신 방목공을 깔보며 자기 아이의 용변을 받아내는 일을 시킨 것을 예로 들었다. 셀리모글루도 회사의 대부분의 일을 한족 간부가 독단적으로 처리해 소수민족 출신 간부는 할 일이 없다고 말했다. 또, 미지티는 소수민족 출신 간부를 선발할 때 정치조건만을 중시하고 업무능력 등을 고려하지 않는 점, 소수민족 지도간부를 양성한다고 하지만 하부조직에는 여전히 한족 간부가 대부분이어서 소수민족 출신 지도간부가 업무를 지시해도 아래 한족 간부가 제대로 시행하지 않아 유명무실하다고 지적했다.


2. 사회주의 개조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 쟈스무는 자치구의 사영 상공업에 대한 사회주의 개조 이후, 정부 측으로부터의 지원이 없는 점을 지적했다. 아브리즈 무샤바예프는 사회주의 개조 이후 당원의 경영 능력이 좋지 않고 목장에 파견되어 온 간부들 중 일부는 피서하러 오거나 말 젖을 마시러 오는 등 목축업 일을 중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3. 신장생산건설병단 문제: 미지티는 신장생산건설병단이 각 방면에서 특수한 성격을 지닌 점, 지방 국영 농장을 무시하고 소수민족 출신 간부나 방목공은 받아들이지 않는 점을 들며 카자흐족 등은 목축업에 상당한경험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니 이들이 병단의 목축업 경영에 참여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장지아야오는 병단이 면화 생산지를 맹목적으로 확대해 토지자원이용이 불합리하고 수리건설에도 어려움을 초래한 점을 지적하며 이런 문제로 인해 현지인들과 토지, 수리자원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고 비판했다.


4. 소수문제의 풍속습관이나 문화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은 문제: 소수민족의 풍속 습관에 대한 공산당의 이해가 충분하지 않아, 돼지고기, 소고기, 양고기 등을 같이 섞어서 만든 통조림이 시중에 유통되는 점, 시장에 유통되는 물품 가운데 한족의 것이 많고 소수민족이 필요한 물품은 아주 적은 점, 민족문화 사업을 전개함에 있어 한족의 것을 소수민족 문자로 번역하는 것만 중시하고 소수민족의 것을 한족에게 소개하는 작업은 그다지 많지 않은 점 등이 지적되었다.


이들이 제출한 의견은 주로 민족간부의 증가 및 실질적인 권한 확대, 한족 간부의 소수민족 특성을 존중하지 않는 소위 "대한족주의"에 대한 시정, 그리고 사회주의 개조와 건설과정에 따른 문제점과 그것에 대한 해결 등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안가서 자신들이 용기를 내어 비판을 제기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3.2. 반우파 투쟁으로 전환하다[편집]


마오쩌둥은 '백화제방', '백가쟁명' 방침을 정하고 지식인들에게 자유롭게 발언할 기회를 제공한 후 상황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을 목격했다. 지식인들은 공산당이 허용할 수 없는 범위의 비판을 넘어서 공산당의 통치 전반에 걸쳐 비판 및 비난을 퍼부었고, 일부 대학생들은 더 나아가 "공산당을 탈퇴하고 자유시민이 되자", "영국의 하이드 파크[3] 방식을 도입하라", "마오쩌둥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에 마오쩌둥은 지식인들에게 철퇴를 가하기로 결심했다. 5월 15일, 그는 <일이 변하고 있다>는 글을 써서 공산당내 고위간부들에게 돌렸다.

"최근 민주당파 당사자들과 고등교육 기관들 가운데 우파가 가장 결정적이고 미친듯이 행동하고 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중국 전역의 농사를 망치고 집을 파괴하는 7급 이상의 태풍을 몰고 싶어한다. 현재 우파의 공격은 최고점에 도달하지 못했고, 그들은 한창 신이 나고 있다. 우리들은 그들은 한동안 광기를 떨치게 해서 정점으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


또한 그는 좌담회에서 쏟아지는 극단적인 발언들을 인민일보에 그대로 발표하도록 하고, 또한 묵묵히 듣기만 하고, 반박하지 말며, 모든 것을 말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6월 8일, 인민일보는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국무원비서장 보좌 노욱문(盧郁文)에게 보내진 협박장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사설을 게재했다.

"소수의 우파분자는 '공산당의 정풍을 원조하라'라는 이름하에 공산당과 노동자계급의 지도권에 도전하고 거리낌없이 공산당에게 퇴장하라고 외치고 있다. 그들은 이 기회에 편승하여 공산당과 노동자 계급을 전복시키고 사회주의의 위대한 사업을 전복시키려고 하고 있다."


같은 날 중공 중앙은 각 성위에게 <힘을 조직하여 우파분자의 공격에 반격을 준비하는 것에 관한 지시>를 하달했다. 이 지시는 모택동이 직접 쓴 것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반동분자가 광분하여 공격을 가하고 있다. 일부 좋지 못한 자본가, 좋지 못한 지식분자 및 사회의 반동파가 노동자 계급과 공산당에 미친듯이 공격을 가하고 노동자계급이 지도하는 정권을 타도하려고 하고 있다."


1957년 7월 1일, 인민일보에 <문회보의 부르주아적 방향 비판>이라는 제목이 사설이 개재되었다.

중국민주동맹이 백가쟁명과 정풍 과정에서 행한 역할은 매우 열악하며 그들의 조직, 계획, 강령, 노선은 모두 인민을 도외시하는 것이며, 반공반사회주의이자 반공 반민주의이다. 그리고 농공민주당도 똑같다. (중략) 중국의 하늘은 흑구름으로 뒤덮였고, 이것의 출처는 장보쥔, 뤄룽지, 장즈중 동맹이다. 그들은 죄가 있으며, '말하는 사람은 무죄다'라는 원칙이 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후 뤄룽지, 장보쥔 등 민주당파는 자아비판을 강요받았다. 뤄룽지는 “모주석과 당 지도부, 그리고 수만의 (민주)동맹동지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나 자신을 철저히 개조하고 싶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중국인민과 사회주의 사업을 위해 정직하게 일하고 싶다.”라고 자아비판했고, 장보쥔은 “전국 인민이 우익분자인 나를 준엄하게 처벌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는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할 일이고, 나는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 당과 모주석의 지도와 가르침 아래 새 생명을 얻고, 당과 사회주의를 사랑하는 위치로 돌아가기를 희망한다.”라고 말했다.

8월 22일 '8당대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은 정풍운동에 대한 보고를 하면서 이른바 부르주아 우파분자들의 행위 네 가지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1. 부르주아 계급의 경제정치제도와 문화를 선전, 발양하였다.

2. 국가의 기본정책, 예컨대 외교정책, 통일구입․통일판매 정책, 사회주의 혁명, 6대운동(토지개혁, 항미원조, 반혁명숙청, 3반․5반운동, 사상개조운동)을 반대하였다.

3. 인민민주혁명, 사회주의혁명, 사회주의건설의 성과를 부정하고, 당과 프롤레타리아계급이 국가의 건설을 지도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4. 당의 국가공작, 당의 각부(특히 문교과학기술부문)에 대한 지도에 반대하여, 당의 약간의 기층단위(고등학교와 신문출판기관)에 대한 지도의 취소를 요구하였다.


1957년 7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반우파투쟁 이후의 정책과 주요 업무를 논의하기 위해 공산당 성시현서기위원회, 일명 청도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의 구체적인 논의 과정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주로 반우파투쟁과 정풍운동에 대한 이후 업무 안배, 농촌 문제 등이 논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중국이 사회주의 개조를 기본적으로 완성해 사회주의 단계에 진입했지만 중국 사회의 주요 모순은 여전히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두 노선 간의 모순이라고 규정, 1956년 중공 8대 회의에서의 결의를 뒤집었다. 이리하여 계급 이념에 근거한 자산계급과 무산계급 간의 투쟁이 다시 중국 공산당의 주요 초점이 되었으며, 회의 이후 농촌사회주의 교유운동과 정풍운동의 형태로 반우파 투쟁이 중국 전체로 확대되었다.


3.2.1. 우파의 기준[편집]


1957년 10월 15일, 중국 공산당 중앙발기문에서 공산당 중앙의 우파 분자 확정의 표준에 관한 통지를 발표했다. 여기에 따르면, 우파의 분류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1. 사회주의 제도를 반대한다: 도시와 농촌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을 반대하며, 공산당과 인민 정부의 사회경제에 관한 기본정책(공업화, 일괄구매 등) 반대 사회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의 성과를 부정하며, 자본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자본주의 제도와 자산 착취를 선전한다.

2. 프롤레타리아 독제를 반대하며 민주집중제를 반대한다: 반제국주의를 공격하는 투쟁과 인민정부의 외교정책, 반혁명분자를 공격 숙청하는 투쟁, '5대 운동'의 성과를 부정하고, 자산계급과 자산계급 지식인에 대한 개조 반대, 공산당과 인민 정부를 공격하는 인사제도와 간부정책 등을 요구한다.

3. 국가 정치생활에서 공산당의 지도적 지위를 반대한다: 경제사업과 문화사업에 대한 공산당의 지도를 반대하며, 사회주의와 공산당을 반대할 목적으로 공산당과 인민정부의 지도기관과 지도자를 악의적으로 공격하고, 공농 간부와 혁명적 열성분자를 모독하며 공산당의 혁명 활동과 조직 원칙을 헐뜯는다.

4. 사회주의 반대와 공산당 반대의 목적으로 인민의 단결을 분열시킨다: 대중을 선동하여 공산당과 인민 정부를 반대하며 노동자와 농민의 분열을 선동하며, 각 민족 간의 분열을 선동하며, 사회주의 진영을 모독하고, 사회주의 진영의 각국 국민 간의 분열을 선동한다.

5. 반사회주의, 반공산당 성향의 지하조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특정 부서나 한 기층 단위의 공산당을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공산당 반대를 선동하고, 인민 정부를 반대하는 소요를 선동한다.

6. 위와 같은 범죄를 저지른 우파분자를 위해 관계를 맺고 정보를 교환하며, 그들에게 혁명 조직의 기밀을 보고한다.


또다른 '극우분자' 기준은 다음과 같다.

1. 우파활동의 야심가, 주모자, 주요 인사.

2. 반당 반사회주의의 강령적 의견을 제기하며, 이러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선동하는 분자.

3. 반당 반사회주의 활동을 특히 악랄하고 단호하게 전개하는 자.

4. 역사상 줄곧 반공반민이었고 이번 우판 공격에서 또 적극적으로 반동활동을 한 자.


한마디로, 공산당과 그 정책에 반대하는 것은 우파이며 그 중의 지도자는 극우분자라는 것이다.


3.3. 반우파 투쟁의 확대[편집]


현재 중국 공산당은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비림비공운동 등을 "극좌적 태도에 빠진" 마오쩌둥과 4인방 등 극좌분자들이 잘못 처결한 실책이라고 인정했지만, 반우파 투쟁 자체는 중공의 잘못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반우파 투쟁의 후기 단계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확장"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한다. 많은 지역에서 우파 기준을 단순화하고 우익 분자의 비율을 하위 단위에 할당해 결과적으로 별 관련이 없는 이들까지 우파로 간주되어 온갖 탄압을 받았다.

한편, 당초 소수민족을 존중하기로 정했던 중국공산당은 1957년 청도회의에서 정책 방향을 급격히 바꾸었다. 저우언라이는 중국에서 민족공화국 건립이나 연방제 실시는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했다. 다만 이 회의에서는 소수민족 인사들의 주장을 일부 수용해 소수민족의 열악한 경제사정을 개선하고 그들의 대우를 정당하게 해주기로 합의하긴 했다. 그러나 얼마 후, 이와 같은 약속은 공수표였음이 드러났다. 1957년 10월 15일, 중공 중앙은 소수민족 중에 지방민족주의 사상이 새롭게 조장되고 있다며 지방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을 주요 내용으로 삼아 사회주의교육 운동과 정풍 운동을 전개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이 운동의 성패는 소수민족 지구에서의 당의 지도력에 달려있다며 지역 간부들에게 정치적 압력을 가했다.

1957년 11월 19~20일 베이징에서 열린 민족사무위원회는 소수민족지구와 소수민족 성원들에게 사회주의교육운동 전개와 관련된 문제를논의했다. 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 왕펑은 소수민족 지역에서의 사회주의 개조를 기본적으로 실현한 후 지방민족주의가 새롭게 조장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비판을 집중적으로 진행할것을 강조했다. 1957년 12월 16일 중공 신장위구르자치구위원회 확대회의에서도 소수민족 중의 지방민족주의 문제를 중점으로 논의했다. 자치구 당위서기 사이프틴은 민족문에제 있어 독립 혹은 공화국 건립을 요구한 것, 민족자치권의 확대를 요구한 것, 한족의 도움을 반대한 것 등이 모두 반당, 반사회주의적 행위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사회주의 혁명과 사회주의건설에 관한 기본 원칙은 소수민족의 특징에 따라 바꿀 수 없으며, 만약 이 기본선을 넘는 사람은 모두 수정주의자로 간주할 거라고 경고했다.

1958년 4월 28일, 중공 신장위구르자치구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신장위구르자치구 인민위원회 문화청장 즈야 쟈마티, 민정청장 이브라인 툴디, 압둘 라만 아샤 등으로 구성된 소위 "지방민족주의 반당 소집단"이 폭로되었다. 이들 반당 소집단은 조국 통일을 분열시키고 민족단결을 파괴했으며, 사회주의를 반대하고 당의 지도를 반대하고 인민민주전정을 약화시킨 반당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들의 당적은 박탈되었고 당 내외 모든 직무가 정지되었다. 하지만 이들이 어떻게 조직을 결성하고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었다. 뒤이어 6월에 개최된 확대회의에서는 위의 세사람 외에 우루무치 시장 아샤드, 자치구 부청장 아블리즈 카리 등이 추가되어 비판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정부에게 소수민족의 권리 개선 및 생활여건 개선을 요구했던 인사들 상당수가 '지방민족주의자'로 낙인찍혀 탄압받았고 자연히 이들이 제기됐던 문제제기는 흐지부지되었다.


3.4. 투쟁의 종결[편집]


1957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완성되자,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지식인들에게 의존할 것 없이 군중의 힘을 믿고 자본주의보다 빠른 속도로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58년 제8차 전국대회 제2차 회의에서, "강력한 의욕을 북돋아 사회주의를 빨리 건설하자"는 '총노선'과 '인민공사', 대약진 운동이 안건으로 제시되었다. 전국의 중심 임무가 반우파 투쟁에서 대약진 운동으로 바뀌면서, 반우파투쟁은 중단되었다. 이후 루산 회의에서 펑더화이가 대약진운동을 비판했다가 도로 우경주의로 몰리면서, 펑더화이의 지지자들을 숙청하기 위한 '반우경주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4. 결과[편집]


1978년 우파로 간주되어 탄압받았던 이들을 복권시키는 과정에서 제시된 통계자료에 따르면, 1957~58년 반우파 투쟁 시기 중국 전체에서 55만명의 '극우분자'가 적발되었고 지식인 40~70만 명이 일자리를 잃고 농촌이나 공장 노동개조로 보내졌다고 하며, 총 140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우익으로 분류되거나 우익으로 의심되어 심문받았다고 한다.


5. 마오쩌둥은 왜 반우파투쟁을 감행했을까?[편집]


마오쩌둥의 주치의 리즈수이는 마오쩌둥이 정말로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려고 했는데 내외적 환경이 너무 극단으로 흐르자 이에 놀라서 탄압책을 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백화제방, 백가쟁명'부터가 마오쩌둥과 공산당 지도부가 놓은 덫이었으며 불평분자들이 모습을 충분히 드러내도록 하여 분쇄하려는 음모였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마오쩌둥은 그것이 미리 예고된 것이었기 때문에 음모(陰謀)가 아니라 “양모(陽謀)”였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반우파투쟁이 예고된 것이었음을 암시했다.

"독초(毒草)는 자라게 한 다음에 파내야 하며, 파내고 나면 비료가 될 수 있다. 이런 말을 했는가 안 했는가? 말하지 않았는가? (중략) 우파는 그래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내가 이 말을 했을 때, 파낼 것이라고 말만 했지 실제로 파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모리스 마이스너 교수는 이러한 '음모론'과는 달리 마오쩌둥의 의도를 좀더 면밀하게 살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마오쩌둥은 1953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소련식 공업화와 사회주의화의 결과로 당의 혁명정신이 퇴화되고 관료주의가 팽배하게 되었다는 인식 하에 당외의 지식인들의 힘을 빌어 당을 개조하고 활력을 되찾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백화제방, 백가쟁명'이었다. 마오쩌둥은 당내 지도자 대부분의 반대를 무릅쓰면서도 계속해서 쌍백방침을 옹호하고자 했지만, ‘독초’의 위험에 대한 당의 경고에 결국은 공감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1957년에 당외에서 터져나온 격렬한 비판들을 마오는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공격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마이스너는 당시의 “우파”들은 사회주의 자체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공산당이 사회주의 원칙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한 것이라고 본다. 그의 설명에 따른다면, 마오쩌둥은 “우파”들의 정당한 사회주의적 비판을 사회주의 자체에 대한 공격으로 ‘오해’한 결과 쌍백방침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는 게 된다. 하지만 당시의 '우파'가 모두 관료주의로 퇴행한 공산당으로부터 진정한 사회주의를 지키려 했는지는 의문이다. 그들이 모두 한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고, 그 중 일부는 실제로 공산당 퇴진과 마오쩌둥 하야를 외쳐서 마오쩌둥의 우려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마오쩌둥은 연설에서 학생들이 “파시스트를 타도하자!”, “사회주의는 우월성이 없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공산당과 사회주의를 비판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을 ‘오해’라고만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첸리췬(钱理群)은 <망각을 거부하라: 1957년학 연구기록> 에서 당시 “우파”로 낙인찍혔던 학생 및 지식인들이 사실은 진정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사회주의 민주”)를 추구했던 이들이라고 평가하면서, 그때 이후로 억압되어온 그들의 “민간 사조”가 지금 중국에서 복원되고 참조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마오쩌둥에게는 "내재적 모순"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즉, 마오쩌둥 본인이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논리를 밀고 나가면 필연적으로 국가 정치, 사상, 문화‧생활 전면의 민주화를 초래하게 되며,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존의 일당전제체제(一黨專制體制)를 포기해야 함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오는 전면적 민주화와 공산당 일당전제체제의 유지 사이에서 공산당의 통치권을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는 것이 첸리췬의 주장이다.

하지만 과연 쌍백방침의 끝이 전면적 민주화였던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마오쩌둥은 시종일관 "민주란 영도가 있는 민주이며 집중된 영도 하의 민주이지 무정부주의적 민주가 아니다. 무정부주의는 인민이 요구하는 바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공산당의 영도를 전제로 하는 민주주의의 방향을 분명히 제시했고 쌍백방침을 추진하면서도 비판의 허용 범위를 정했다. 그러니 쌍백방침으로 인해 비판이 퍼부어지는 걸 계속 허용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민주화로 이뤄질 가능성은 낮다.


6. 중국 공산당의 평가[편집]


1977년, 중국 공산당 중앙당교 부총장에 임명된 후야오방은 누명을 쓴 이들을 복권시키는 문제를 논의할 것을 지시했다. 후야오방의 지시에 따라 교사들은 1977년 10월 7일 인민일보 전면에 4인방의 노선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내용의 사설을 게재했다. 1977년 12월 15일 중국 공산당 조직부장으로 재임한 후야오방은 1978년 봄 통전부, 공안부, 중조부, 중선부, 민정부 인사들을 산둥성 엔타이에서 모아놓고 반우파 투쟁 현안을 전문적으로 토론했다. 이 회의에서 보수파 간부들은 우파로 분류된 군중과 간부에 대해 우파 누명을 벗기고 더 이상 차별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며, 반우파 운동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보수파의 의견이 우세했고, 1978년 4월 8일 중공 중앙은 통전부에서 보고한 '우파분자의 누명을 모두 벗기는 데 관한 청시보고서'를 채택해 1978년 11호 문건으로 배포했다. 이 문건에서 1957년 반우파 투쟁 자체는 잘못이 없었으나 문제는 확대된 것에 있다."라며 잘못된 누명을 쓴 '우파'를 복권시키는 것을 거론하긴 했지만 직급 상향 조정, 인사 조정, 직명 부여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않았다.

옌타이 회의 후 후야오방은 우파에 대한 전면적인 복권을 계속 추진했고, 1978년 5월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연설을 발표해 진리 기준에 대한 대 논의를 펼쳤다. 이 과정에서 보수파는 약화되었고 베이징에서 열린 5대 회의에서 반우파 투쟁 문제에 관한 2차 회의가 열렸다. 그 결과 완전한 반우파 문제 해결을 주장하는 의견이 받아들여져 1978년 9월 17일 중앙은 전반적인 결정을 발표했다. 시행안은 우파 정착 정책을 명확하게 세분화한 규정을 제시했고 우파를 잘못 그어 획일화 시켜서는 안되는 만큼 실사구시적으로 시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밝혔다. 또한 정치적 명예회복, 적절한 일자리 분배, 기존 임금피크제 부활, 공산당원으로 복당시키는 등 여러 조치를 제시했다. 1980년 5월 8일 반우파 복권 작업은 일단락되어 한때 우파로 분류됐던 55만 명 중 대다수가 복권되었지만 일부는 여전히 누명만 벗었을 뿐 우파 원안을 유지하며 시정되지 않았다. 또한 조사 결과, 확실히 우파로 분류될 수 있는 인사는 90명 정도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중국 공산당은 1981년 제11기 6중전회에서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적 문제에 관한 결의」를 발표했다. 이 결의는 반우파 투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 해에 전당이 전개한 정풍운동 속에서 대중이 당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제기하도록 선동한 것은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발양하는 정상적인 과정이었다. 정풍 과정 속에서 극소수의 부르주아 우파분자들이 기회를 틈타 소위 “대명대방”을 고취하며 당과 신생 사회주의제도에 대해 방자하게 공격을 가하고 공산당의 영도를 대체하려 하였으니, 이러한 공격에 대한 결연한 반격은 전적으로 올바르고도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반우파투쟁이 지나치게 확대되어 지식인, 애국인사, 당내간부가 “우파분자”로 잘못 낙인찍힌 것이 불행한 결과를 만들었다.


즉, 쌍백방침에 이은 1957년의 정풍(整風)운동은 올바른 과정이었지만, 이에 편승하여 사회주의제도와 공산당의 영도를 공격한 “우파분자”들은 분명히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반우파투쟁은 정당한 것이었다는 평가이다. 다만 실제 진행과정에서 투쟁이 지나치게 확대되는 바람에 정당한 취지가 희석되었다는 것이다.

반우파 투쟁 직후, 우파로 분류된 이들 중 몇명을 제외한 모든 인사들이 공직에서 추방되었고 모두 경제적으로 고립되었다. 한 달에 10위안의 기본 생활비에서 몇 차례의 연속 급여까지 모든 권리자들의 가족 경제가 타격을 입었다. 우파 가족의 대부분은 가족이 일에 연루되어있어 장기적인 곤경에 빠졌다. 우익들은 기본적으로 지식인이며, 자녀들은 정치적으로 차별대우를 받았으며 교육 수준은 중학교 졸업에 그쳤다. 그러나 제 11차 중앙위원회 제 6기 본회의 이후 우파로 분류된 인사들을 복권할 때 경제적 보상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우파는 복권되었지만, 중앙정부가 지명한 5인(장보쥔, 뤄룽지, 펑원잉(彭文應), 추안핑, 진인병(陳仁炳))과 지방 각 성시가 정한 이들 등 총 96명은 현재까지 우파로 규정되고 있다.


7. 영향[편집]


반우파 투쟁 이후 중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매우 중대했다. 6.25 전쟁 이후 중국은 계급 투쟁을 종식하고 앞으로 사회주의 건설 위주의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중국 공산당 8대 회의에 규정에 따라 지식인들을 참여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반우파 투쟁 이후, 이념 투쟁의 중요성이 경제를 압도했다. 지식인들은 더이상 공산당과 정부를 비판할 수 없었고 공산당도 당외의 비판에서 벗어났고 정치투쟁은 오직 당 내에서만 이뤄질 뿐 당외에서 벌어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특히 마오쩌둥의 공산당 내의 영향력은 절대적인 수준이 되었다. 이제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었고, 수많은 아첨꾼과 어용 지식인들이 그의 무모한 계획에 적극 찬동했다. 그결과 그가 추진한 대약진 운동에 대해 브레이크를 걸 수 없게 되었고, 중국 인민 수천만 명이 굶어죽는 참극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대약진운동으로 인해 마오쩌동은 류사오치에게 권좌를 넘겨주는데, 그 권력을 다시 되찾기 위해 일으킨 것이 문화대혁명이다.


8. 참고 문헌[편집]


  • 나의 중국 현대사, 장이허(章怡和), 글항아리
  • 쌍백방침에서 반우파투쟁으로의 전환에대한 마오쩌둥의 인식: 마오쩌둥의 주요 문건을 중심으로, 이현정,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연구소
  • 1957-1958년 중국공산당의 "지방민족주의 비판"-신장위구르자치구를 중심으로, 구소영, 대구사학회
  • 1950~1960년대 중국의 지식인 관련 정책 시행 배경에 관한 연구, 김기효, 충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 지식인 저항운동으로서의 명방운동, 송한용,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 중문 위키피디아 반우파 투쟁 문서
  • 영문 위키피디아 반우파 투쟁 문서
  • 바이두백과 반우파 투쟁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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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보쥔은 나중에 자신의 이같은 주장을 정치설계원(政治設計院) 개설론으로 정의했다.[2] 중국의 평론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인민문학'의 편집에 참가했으나 문예정책의 수정을 요구하는 장문의 의견을 공산당 중앙에 제출했다가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국민정부의 특무기관과 관련된 사적인 편지가 폭로되어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1955년 공직에서 추방되었다.[3] 영국 왕실의 소유지였다가 찰스 1세에 의해 일반인에게 개방된 런던의 유명 공원. 이곳에선 매주 주말과 공휴일에 스피커스 코너(Speaker’s Corner)에서 누구나 연단에 올라가 어떤 이야기든 할 수 있으며, 가끔 열변을 토하는 사람에게 지나가는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