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김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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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김종필계
반김계

형성
1963년
해체
1980년
수장
정구영 김성곤
정치적 이념
보수주의
경제적 이념
경제적 자유주의
주요 정치인
김재춘
이만섭
박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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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성향
4. 주요 인물


1. 개요[편집]


민주공화당 내에서 김종필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을 총칭해서 부르는 명칭이다. 주로 공화당 소장파나 3선 개헌 이후 4인방 세력을 일컫는 말이다.

2. 역사[편집]


5.16 군사쿠데타의 성공과 군부의 정계 정착은 김종필의 공로였다. 당시로썬 획기적이었던 체계적 당구조와 비전으로 당세를 확보하였다. 또한 김종필은 구 정치인과 언론인, 지식인들을 영입하여 기존 민주당(당시에는 재건민주당), 신민당(당시에는 민정당)과 달리 투명하고 깨끗한 정치를 표방했다.[1]

그러나 김종필이 독자 세력을 구축하고 나서 이권을 그들에게만 나눠주는 파벌 정치를 행하자 그에게 반기를 드는 인물들이 늘어났다. 결정타는 한일협정이었다. 기존에 김종필을 지지하던 소장파들은 김종필이 오히려 타도해야할 구시대적 정치인이라고 생각하게되었다.

여기서 또 하나 문제가 되는 것이 박정희로 박정희는 내내 민주공화당의 총재를 역임했지만 의회민주주의를 불신한 박정희는 여당인 민주공화당을 무시하는 행동을 할 때가 있었으며, 민주공화당은 때때로 행정부에 반발하기도 했다. 박정희의 독재 성향이 점점 더 강해지면서 민주공화당과의 '정권 내 충돌'이 간간이 벌어지게 된다.

그리고 정구영이만섭을 주축으로 하는 개혁파들은 3선 개헌과 박정희 독재 강화를 위한 법안들을 부결시키는 1969년 4.8 항명을 벌였고 박정희는 분노하며 반란표를 색출할 것을 의원들에게 명령하게 된다.

4인방이라고 불리던 김성곤, 백남억, 김진만, 길재호의 "10.2 항명 파동"(1971년)도 있다. 4인방은 김종필의 득세를 막기 위해 키워졌으나, 이원집정부제(의원 내각제 요소 도입)를 구상하는 등 박정희 일인체제에 걸림돌이 되기 시작했다. 이에 박정희는 오치성 내무장관을 발탁하여 기존 경찰 조직의 4인방 세력을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실미도 특수군 사건(실미도 사건). 광주대단지사건. 한진빌딩 노동자 난입사건. 기동경찰 총기 난사 사건 등으로 내무장관 해임건의안이 야당에 의해 표결에 부쳐졌고, 여기에 4인방이 동조하여 가결된 것이 바로 항명파동.

항명파동이 일아나자 박정희는 의회민주주의를 손절하기로 마음먹고 가결파 의원들을 남산으로 연행했다. 그리고...

박정희의 사망 후 반김종필 세력은 이후 공화계로 통합되게 된다.

3. 성향[편집]


협동조합주의, 지시경제를 강조하던 김종필과 달리 야당처럼 경제적 자유주의를 주장했다. 그러나 반김도 김종필의 당시로썬 선구적인 정당체제에 혹해서 들어온 사람들이기에 내각제 개헌을 거의 신조처럼 달고 있던 청구동계 마냥 이원집정부제 개헌과 책임정부를 중요시했다. 그래서 박정희 개인을 추종하던 박정희 친위 세력과는 상극이었다.

4. 주요 인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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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당시 박정희는 혁신계를 기반으로 당선되었다. 그때도 박정희는 강력하게 반공을 표방했지만 남로당 출신으로 윤보선과 민정당으로부터 메카시즘 공세를 당했는데 이에 기존 혁신계 텃밭이었던 경상도와 빨치산 문제로 차별받던 전라도 지역의 지지를 등에 업고 당선되었다. 그리고 이 메커니즘은 제3대 대통령 선거조봉암에서 일부 구현된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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