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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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국보 제285호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蔚州 大谷里 盤龜臺 岩刻畫


소재지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반구대안길 285 (대곡리)
분류
유물 / 일반조각 / 암벽조각 / 암각화
수량/시설
1기
지정연도
1995년 6월 23일
제작시기
신석기시대
1. 개요
2. 암각화 내용
3. 고고학적 특징과 가설
3.1. 암각화가 그려진 연대 추정
3.2. 누가 그렸는가?
4. 의의
4.1. 반구대 이름의 유래
5. 관람
6. 사연댐으로 인한 암각화 멸실 위기
6.1. 암각화 보존을 위한 여러 방안들의 실패
6.2. 사연댐 수문 설치 결정
6.3. 사연댐 철거 방안
6.4. 또다른 암각화의 가능성?
7. 기타
8. 외부 링크
9. 국보 제285호



1. 개요[편집]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蔚州大谷里盤龜臺岩刻畫), 반구대 암각화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을 지나는 태화강의 지류 대곡천의 암벽에 새겨진 암각화이다. 제작 시기는 신석기시대 후기에서 청동기시대 초기로 추정되고 있다. 이름인 '반구대'는 거북이가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암각화가 발견되기 전부터 이미 붙여져 있었던 이름인데, 흔히 암각화가 세워진 바위의 이름으로 착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자세한 것은 후술.

인류의 포경 활동을 묘사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증거 가운데 하나로 인류학적 가치가 매우 높다. 반구대 암각화의 발견으로 인해 세계 최초의 포경 연도가 확 올라갔다.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기원전 6천년의 반구대 암각화를 근거로 해당 시기부터 포경이 행해졌다고 설명하고 있다.[1] 때문에 천전리각석과 함께 울산 반구천 일대 암각화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올랐으며, 현재 정식 등재를 준비 중이다.#

암각화에는 고래 말고도 야생동물 수렵을 포함해 의미를 알기 힘든 문양과 기호 등도 많이 그려져 있으며 훼손 정도가 덜했던 발견 초기에는 약 300개가 넘는 그림이 확인되었는데 이후 50년동안 침수에 의한 훼손이 발생한 끝에 현재는 육안으로 식별가능한 그림들이 많이 줄어들어 버렸다. 자세한 것은 6문단사연댐으로 인한 암각화 멸실 위기 부분을 참조.

반구대 암각화의 주요 내용이 고래이고, 울산시는 고래고기로 꽤 유명한 동네이기 때문에 울산시는 암각화의 디자인을 여러 곳에 사용하고 있다. 장생포의 고래박물관이나 울산역의 모조 암각화 등이 그것.

반구대 암각화가 발견된 대곡천 자락에는 이외에도 암각화가 여럿 발굴되었는데, 인근에 위치한 울주 천전리 각석[2]도 그 중 하나로, 천전리 각석에서는 선사시대의 그림과 함께 약 1500년 전 역사시대 인물[3]의 기록도 발견되어 주목을 끈다. 현재 학계에서는 천전리 각석과 반구대 암각화를 한대 묶어 울주 대곡천 암각화군(Petroglyphs of Bangudae Terrace in Daegok-ri, Ulju)이라는 이름으로 취급하고 있다. 사연댐 건립 과정에서 해당 지역에 대한 매장문화재 전수조사가 따로 없었기 때문에 만약 사연댐이 철거되어 수몰지역에 대한 전수 발굴조사가 이뤄진다면 이외에도 다른 암각화들이 많이 발견될지도 모른다. [4] 본 문서에서는 반구대 암각화에 대해서만 다루지만, 반구대 암각화가 대곡천 암각화군에서 가장 대표성을 띄는 문화재인 만큼 대곡천 암각화군에 관련된 전반적인 사항 또한 모두 함께 서술한다.


2. 암각화 내용[편집]


파일:external/cdn.wikitree.co.kr/img_20100913084044_338d1153.jpg
파일: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01.jpg
멀리서 본 사진과 확대한 모습
파일: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02.jpg
파일:external/www.dailies.kr/1046_671_2036.jpg
음영 강조 사진과 탁본
수렵 생활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 호랑이, 표범, 사슴 등 육지 생물들의 모습도 보이지만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해양 생물, 특히 고래다. 원시적 벽화임에도 고래에 대한 묘사가 매우 세밀한 편인데, 종류별로 새끼를 등에 올려놓은 고래(귀신고래)[5], 앞뒤의 색이 다른 고래(범고래), 수많은 세로줄 무늬가 있는 유별나게 큰 고래(혹등고래)[6] 등이 그려져 있다. 또, 고래 사냥에 대한 내용으로 미끼, 그물, 작살을 맞은 고래, 그 고래를 잡기위해 해양으로 나가는 배 등이 그려져 있는데, 10명 이상이 긴 나무배에 타 고래에게 작살을 던지고 잡은 고래를 끌고 가서 살을 발라내는 일을 하는 내용이 아주 자세히 묘사되었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이 암각화가 문자가 없었던 석기~청동기시대에 포경 교육을 목적으로 그려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림들을 잘 살펴보면 선만 새긴 것과 면을 채워 새긴 것들로 나눌 수 있는데, 이 둘이 겹쳐진 부분에서 면을 채운 것이 더 깊게 파였기 때문에 이것들이 더 먼저 그려졌다고 추정하고 있다. 면을 채운 것들은 대부분 고래 잡는 내용이고 선만 새긴 것들은 육지동물과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인데, 이를 통해 학자들은 이 지역이 예전에는 고래가 진입할 수 있는 해안 지대였으나 훗날 지형이 바뀌어 내륙 지대가 되었고 여태껏 고래를 잡던 사람들은 가축을 기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반구대 암각화가 있던 곳까지가 바다였다고 하기에는 좀 어려운 것이,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한반도 내륙 깊숙한 곳곳에서 당대 바다의 흔적이 발견되어야 한다. 그리고 만약 그때 이 지역이 바다였다면 태화강 상류를 따라 선을 긋고 낙동강 하류에서 북동쪽 양산단층을 따라 선을 그었을 때 두 선이 만나며 가르는 한반도 남동쪽 지형이 이었다는 말이 된다. 반구대 암각화가 있는 곳의 해발고도가 그 서쪽의 양산단층 평지보다 높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기후변화 등으로 고래가 잘 안 잡히자 육상생물 사냥으로 생계방향을 틀어다고 보는 게 나을 것이다.

이 암각화에는 사람도 그려져 있는데, 깃털 등을 온몸에 장식하고 굿을 하는 사람[7], 그 곁에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있다. 여기 그려진 남자들은 성기가 크게 묘사돼 있는데 자손 번성을 기원하기 위해서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3. 고고학적 특징과 가설[편집]



3.1. 암각화가 그려진 연대 추정[편집]


반구대 암각화가 언제 그려졌는지 그 정확한 연대를 비정하는 것은 아직 논란이 있다. 암각화의 최초 발견자인 문명대 교수를 포함해 신석기시대론을 주장하는 사람도 많지만, 김원용을 포함해 청동기시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국사교과서에도 청동기시대로 비정되어 있다. 다만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2019년 발간하여 가장 최근 연구들이 수록된 대곡천 암각화군 종합 연구보고서에서는, 경주대 강봉원 교수와 하인수 전 임시수도기념관장이 신석기시대론을, 계명대 김권구 교수가 청동기시대론을 주장하고 있는데, 종합적으로 볼 때 신석기 시대 말기 쪽으로 비정하는 논지에 조금 더 무게가 실리는 것은 사실이다.

암각화가 그려진 연대를 추정하는 청동기 시대 측의 주요 논거는 다음과 같다.

청동기 시대로 비정하는 측의 주요 지지 근거

* 첫째, 신석기시대에는 외양선을 제작하지 못하며,

* 둘째, 고래를 잡는 도구 역시 철기로 보이며,

* 셋째, 신석기 시대에 고래를 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고 보이지 않고,

* 넷째, 바위를 쪼아새기는 것이 가능한 것 역시 철제 도구이고,

* 다섯째, 반구대 인근지역에 신석기 시대 유적보다 청동기 시대 유적이 더 많다는 것

이에 대해 신석기 시대를 비정하는 이들의 주요 반론은 다음과 같다.

청동기 시대 지지측에 대해 신석기 시대로 비정하는 측의 주요 반론

* 첫째, 신석기시대 유적인 부산 동삼동 패총등에서 발견된 흑요석 등을 보면 이미 신석기 시대에 바다를 건너 구마모토, 규슈 등과 교류를 했는데 외양선이 없었다 할 수 없고,

* 둘째, 고래를 잡는 것이 반드시 철기로만 가능하다고 보이지 않고,

* 셋째, 동삼동 패총에서 발견된 수많은 고래 들을 보면 이들은 분명히 고래 사냥을 했으며,

* 넷째, 암각화가 새겨진 셰일 퇴적암층은 철기가 아닌 석기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 이미 기원전 만년의 미국이나 기원전 3만년의 유럽의 유적에서 밝혀졌고,

* 다섯째, 반구대 인근에는 신석기 시대 유적도 많이 있다는 점을 든다.


신석기 시대로 비정하는 측의 추가 근거

* 여섯째, 근교의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외해 항해 또는 고래사냥에 관련된 유적이 발견된 적은 한번도 없다는 것,

* 일곱째, 반면 울산 남구 황성동의 신석기 유적에서는 고래 경갑골과 경추에 골촉이 박힌 뼈가 발굴되었고,

* 여덟째, 청동기 시대의 다른 암각화 유적들의 추상성,상징성에 비교했을 때 반구대 암각화에서 보이는 사실적 표현이 궤가 다르고 분명히 연대가 다르다는 것을 논거로 든다.

이에 대해서,

신석기 시대 지지측에 대해 청동기 시대로 비정하는 측의 주요 반론

* 셋째 주장에 대해 동삼동 패총의 고래뼈들은 죽어 바다에 떠밀려온 것일 뿐이라며 반론하였고,

* 일곱째 주장에 대해서는 이미 죽은 고래를 가르기 위해 골촉도구를 사용했을 뿐이라고 반론하였다.

이에 대해

신석기 시대 지지측에 대해 청동기 시대로 비정하는 측의 재 반론

* 동삼동 패총에서는 아기 고래의 뼈도 발견되었는데 아기고래가 죽어서 바다에 떠밀려올 확률은 낮고, 죽은 고래 시체가 썩어서 폭발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재반론한다.

다만, 해당 논쟁은 아직 확실하게 결론지어지진 않았기에 일반적으로는 신석기 시대부터 청동기 시대에 걸쳐 그려졌다고 애매하게 일컬어진다. 논쟁에 대해 소개하는 전문을 참조.


3.2. 누가 그렸는가?[편집]


대곡천 암각화군 종합연구보고서에 수록된 울산박물관 학술팀장 김성욱 박사의 '반구대 암각화의 고고학적 검토' 논문은,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암각화를 놓고 시대별로 비교하면서 양측의 차이를 비교하였다. 논문의 상세 내용은 생략하고, 박사는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암각화를 제작기법과 표현방식에 따라 각각 4유형과 3유형으로 나누어 분석하였다.
대곡리
제작기법
표현기법
그림수
주요 주제
비고
유형 1
쪼기
윤곽선
45
주제미상 > 동물미상 > 기타 > 바다동물 > 육지동물

유형 2
쪼기>긋기
면각
150
바다동물 > 주제미상 > 육지동물 > 동물미상 > 기타
[8]
유형 3
갈기>쪼기
선각
34
육지동물 > 동물미상 > 주제미상 > 기타 > 바다동물

유형 4
갈기>쪼기
선각
2
바다동물, 육지동물
[9]

천전리
제작기법
주요 주제
비고
유형 1
점 쪼기
동물상,인물상
비고
유형 2
갈기 > 점 쪼기
동심원, 연속마름모, 지그재그
[10]
유형 3
선 긋기
기마행렬, 돛단배, 용
[11]
대곡리 암각화의 경우 시간에 따라 유형1 ➞ 유형2 ➞ 유형 3, 4로 변하는 과정에서 앞선 그림과 최대한 중복해서 겹치지 않도록 노력한 듯하고, 묘사에 사실적 도상 표현이 있다. 반면 천전리 암각화은 유형 2이 유형 1을 집요하게 갈아내 지우거나 또는 그 위에 덮어씌워 겹쳐 그리는 경우가 많았고, 또한 유형 2에서 그려지는 지그재그,동심원, 마름모 등은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 알기 어려운 추상적인 표현으로 가득하다. 이는 한문을 판독할 수 있는 유형 3과의 사이에도 차이가 분명하다.

즉, 이를 통해 그는 대곡리 암각화 1, 2, 3, 4유형과 천전리 암각화 1유형이 연속적으로 그려졌고, 다시 말해 같은 암면에 그려졌다는 공간적 차원에서의 연속성이 인정되지만, 천전리 암각화 유형 1과 2, 유형 2와 3 사이에는 각기 문화의 단절 또는 관념의 단절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또한 천전리 암각화 2유형에 나오는 그림들을 다른 청동기 시대(주로 청동기 후기~말기)의 국내 암각화들에서 나타나는 문양 또는 검형들과 비교하여 유형 2의 제작 연대를 청동기 시대라 비정하였다.

김선옥의 논문에서는 위와 같은 결론으로 끝을 지었는데, 다시 말해 신석기 시대 어느 순간까지 존재하며 대곡리 유형 1~4와 천전리 유형 1을 그린 집단이 기원전 15세기를 전후로 하여 사라지고, 유형 2를 그린 집단이 기원전 10세기~4세기 사이의 어떠한 시기에 같은 공간에 나타났으며, 철기시대를 거쳐 삼국시대에 유형 3이 그려졌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최대 두 번, 최소 한 번의 단절이 천전리 각석이라는 공간 속에 등장했는데, 그 단절이 일어난 시기는 바로 기원전 15세기 전후로부터 기원전 10세기 사이 어느 때라는 것이다.

특히 김장석(2011)이 밝힌 바와 같이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의 전환 과정에 있어 확실한 것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시작이 외부로부터의 자극 또는 기술 또는 주민의 유입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합의가 있는데, 원주민이었던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터전에 청동기시대 문화의 유입과 함께 정주성이 더욱 강한 농경문화를 가진 주민들이 유입되어 일정 기간 공존하다가 환경의 변화 및 정주성이 강한 청동기시대 사람들 때문에 주요 생업 영역을 잃게 된 신석기인들의 문화가 소멸하게 되는 형태를 추정할 수 있다.

실제로 대곡리 암각화 1, 2유형을 그린 이전 시대의 선주민들, 고래를 잡고, 바다를 항해하며 해양생물을 잡던 사람들이, 점차 육상동물을 사냥하는 수렵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BP 3000년경(기원전 1050년) 전후로 하여 청동기 시대로 바뀌면 농사를 짓는 정주민족의 문화가 더 강하게 보이고 이 시기 주로 보이는 것이 송국리식 토기나 검단리식 토기와 같은 토기들이다.

또, 이 천전리 암각화 유형 1과 대곡리 암각화 유형 1, 2, 3, 4를 그린 이들은 주위의 신석기 유적에서 사용되는 즐문토기, 즉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청동기 시대에 등장하는 무문토기 즉 민무늬 토기와의 단절이 눈에 띈다. 반면 동시대 일본 열도에 존재했던 조몬 토기와는 모양이 아주 비슷하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결국 이들은 조몬인의 동계이거나 그 친척일 수 있다.


4. 의의[편집]


신석기-청동기 시대의 벽화 가운데 상태가 좋은 것으로, 몇 안 되는 한국의 포경 생활사의 시초를 담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사실 특이하다면 특이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한국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가끔 고래들이 지나다니는 곳 근처[12]에 있는 나라임에도 포경의 역사가 짧고 기록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선사 시대의 문화와 포경 역사를 모두 담고 있는 반구대 암각화는 꽤 높이 평가받는다.

또한 세계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데 이 암각화가 원시 포경의 모습이 그려진 최초의 기록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암각화는 세계 학술적으로도 유명한 편이며 영어 위키백과포경 항목에도 인류의 포경 역사의 시작 부분에서 맨 처음 언급된다.


4.1. 반구대 이름의 유래[편집]


반구대 암각화의 반구대가 거북이가 앉은 모습을 한 바위에서 명칭이 유래하였다는 설명을 듣고 흔히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의 이름이라 착각하기 쉽지만, 그것이 아니라 암각화가 위치한 대곡리 인근의 유명 문화재의 이름을 따 온 것이다. 원래 '반구대(盤龜臺)'는 비경으로 신라 때부터 알려졌던 곳으로 고려시대, 조선시대까지 정몽주, 정선 등 많은 역사적 인물이 여기서 를 남기거나 겸재 정선이 공회첩에 산수화를 남기기도 하는 등 암각화로 알려지기 전에도 경치가 좋다고 소문난 지역 명소였다. 바위의 위치는 반구대 암각화에서 돌아나오면서 보이는 반구서원의 강 맞은편에 있다. 해당 위치는 반구천[13]이 한바퀴 휘돌아 나가는 곳의 바위 이름이며 현재에는 그 위에 '반구대정자'가 건립되어 있다. 후술한대로 원효가 세운 반고사 터로 비정되고 불상도 출토된 곳이기도 하다.

문제는 대체 반구대가 언제부터 반구대라 불리웠는지에 대해서는 알기가 어렵다는 점인데, 우선 같은 울산광역시의 중구에는 반구동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반구대와는 직선거리로만 15 km정도 차이나며 해당 행정구역의 이름은 한자부터 반구(伴鷗)로 다르고 그 이름의 유래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 세운 반구정(伴鷗亭)에서 유래한 것으로 반구대(盤龜臺)와는 별 관련이 없다.

앞서 말한 반구서원의 다른 이름은 포은대인데, 정몽주가 이곳으로 유배를 왔다 하여 그의 호를 딴 것이다. 다만 여말선초 사람인 정몽주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며, 조선 후기인 1712년(숙종 38)에 포은 정몽주, 회재 이언적, 한강 정구를 기리기 위해 언양지역 유림들에 의해 창건된 것이다. 또한 현재의 위치 또한 원래 건립 위치가 아닌데, 1712년에 지어진 본래 반구서원은 강 건너편인 반구대 자리에 있었으나 흥선대원군에 의해 1871년 철폐되었으며, 그 자리에 포은대영묘비, 포은대중수비, 반구서원유허비가 1905년까지 세워지다가 1965년 사연댐 건설과 함께 수몰됨에 따라 현재 위치로 이전된 것이다.

포은대 이외에 반구서원(盤龜書院)의 또다른 이름은 반계서원(盤溪書院) 인데, 이는 반계 유형원과는 관련이 없고, 그냥 반구대의 반과 개울을 뜻하는 계 자를 합한 것으로 보이므로 사실상 '반구 계곡'이라는 뜻에 불과하다.

또 반구서원의 원래 이름은 반고서원(盤皐書院)인데 이는 한강 정구가 1673년의 자신의 서간에서 반구대에 들러 이곳에 살고 싶다고 말하는 내용이 있는데, 1712년 반구서원의 창건 당시의 유학자들이 그의 서간 내용의 반고(盤皐)를 따와 이름지었다고 한다. 다만 해당 기사에 의하면 정작 정구가 썼다는 실제 서간 내용에는 '언양 인근에 잠시 들렀을 때 반고(盤皐)의 형승(形勝)을 보고 싶으나 길을 몰라서 가지 못했다는 내용'으로, 그가 실제로 반구대에 들렀는지는 알 수 없으며 또한 이 반고(盤皐)가 반구대를 뜻하는 것인지도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그냥 18세기초 언양 유림들이 끼워맞춘(...) 것이라고 말한다. 다만 반고(盤皐)에 거북 구()자가 없지만 언양 일대에 반구 또는 반고라는 이름의 명승지가 반구대 이외에는 없는 것을 생각하면 반구대라고 비정한 것은 틀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14] 또한 겸재 정선(1676~1759)의 그림에도 盤龜라고 하여 반구대를 그린 그림이 남아있으나, 정선의 노년에 그린 그림으로 추정되므로 사실상 반구서원의 건립시기와 비슷하거나 그 후대이다.

한자는 서로 다르더라도 반구, 또는 발음 비슷한 이름이 기록에서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원형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 반고사(磻高寺)이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중대의 고승 원효대사가 이곳에 머무르며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 을 저술했다고 하는데, 이 반고사가 위치한 곳이 바로 현재의 반구대라는 것이 거의 확실시된다. 참고로 1970년대에 이 반고사를 찾기 위해서 동국대학교 교수들이 대곡천 인근을 뒤지다가 울주 천전리 각석과 그 재조사 과정에서 반구대 암각화까지 발견한 것이기도 하다. 참고로 조사의 목적인 절터 발굴 과정에서 천전리 각석의 맞은편에 무너진 탑이나 파편 등 통일신라시대의 절터가 발굴되었는데 이곳은 정확히 어디였는지 알 수 없지만 너무 작아서 그냥 천전리사지라고 명명되었고, 지금의 복원된 위치가 아닌 과거의 반구서원 자리 즉 반구대에서 불상 등이 발굴되어 기존에 반구사지라고만 부르던 곳을 반고사터로 비정하였다.[15]

이는 단순히 이름이 비슷하다고 비정한 것만은 아니고, 삼국유사[16]를 보면 삽량주 아곡현 영취산에 낭지스님이 살고, 원효스님이 그 서북쪽의 반고사에 머물면서 낭지스님을 찾아뵈었다고 나와 있다. 이 영취산(靈鷲山)은 영축산이라고도 읽는다.[17] 문제는 이 영축산,영취산,취서산 등 정확히 불교 유래의 여러 이름들이 혼용되어 왔던 산이 바로 언양 인근에 2곳이 있다. 한 곳은 통도사[18] 의 인근에 위치한 현재의 영축산(1082.2m)[19]이고, 하나는 현재의 문수구장 서쪽에 위치한 영취산(352.1m)[20]이다. 다만 방향이 완전 다른데, 천미터 영축산은 언양의 서남쪽에 있고, 반구대는 그 동북쪽에 있기 때문에 이곳이 낭지스님이 살던 자리라면 그 서북쪽은 간월산이나 가지산, 신불산 등이 되지만 반구대와는 영 멀다.

그러나 300미터 영취산은 현재의 굴화 남쪽에 있기 때문에 그 동북쪽은 반구대가 된다. 게다가 천미터 영축산이 현재의 양산 즉 삽량주에 있는 것은 맞지만, 삽량주 아곡현은 구불, 굴불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이 현재의 굴화의 옛이름 굴아화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또 영취산 아래 율리에서 영축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절터도 발굴되어 영축사지라 하면서, 따라서 학자들은 굴화 남쪽에 있는 삼백미터 영취산을 낭지스님이 사는 곳으로 추정하고 그 동북쪽이라는 반고사의 터를 현재의 반구대 인근으로 비정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전문 참조.

결과적으로 이 반고사(磻高寺)가 반구대의 가장 첫 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자가 엄연히 다르기는 하나 각기 사용되는 글자들을 살펴보면 물이 흐르는 곳이니 강이름 반(磻), 거북이가 엎어진 것처럼 보이니 거북 구(龜), 굽이굽이 돌아가니 굽다, 돌다 반(盤), 언덕도 되고 물가도 되니 고(皐) 등으로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의미가 통하는 한자를 가져다 쓴 듯하다. 전문 참조 이에 따르면, 실제로 반구산 아래의 대곡천(반구천)이 빙 돌아가는 지형 한가운데(磻高)에 위치한 반고사(磻高寺)가 반구천, 반구산, 반구대 등이 가장 원래 이름이라고 할 수 있고, 그 유래는 대략 7세기 이전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셈이다. 반고사가 위치하여 반고대라고 불리던 곳이 이후에 여러 가지 이유[21]로 반구대, 반구천 등으로 변했으며, 이후에 거북이의 형상을 닮았기에 반구대라고 한다던가는 해설은 이후에 덧붙여진 일종의 민간어원 즉 한자부회일 가능성이 있다.

또한 반고사의 창건시기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7세기 인물인 원효대사가 젊은 시절 머물렀던 것이 가장 빠른 기록으로 확인되는데, 천전리 각석의 내용을 살펴보면 을사년(525년)까지는 대곡천, 즉 반구천 인근의 골짜기가 이름 없는 계곡일 뿐이었으므로 반고사가 525년 이전에 들어서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22] 그런데 원효대사가 머문 것은 빨라도 7세기경일테므로 딱히 모순되는 부분은 없다.[23]


5. 관람[편집]


울산광역시에서도 상당히 외진 곳에 위치.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348번 버스를 이용하면 갈 수 있는데 하루에 몇 번 안 다니기 때문에 시간표를 맞춰야 하며, 울산역이나 언양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면 환승도 해야 한다. 그리고 버스에서 내린 뒤에도 계곡 안쪽에 있어 자가용을 이용하든 대중교통을 이용하든 어느 정도는 걸어야 한다.

근처에 있는 울주 천전리 암각화와 달리 실물 바로 앞에서 볼 수는 없어서 뭐가 새겨져 있는지는 육안으로는 거의 안 보인다. 얼마나 보이는지는 햇빛의 방향이나 관람자의 시력에 따라 다른데 그림을 하나도 못 찾는 사람도 많을 정도다. 위에도 언급했듯 암각화가 아니라도 기본적으로 경치가 좋은 계곡이고 공룡 화석이나 대나무숲, 늪지대도 있고 역사시대 유적지도 많은 곳이니, 암각화를 관찰하는 것 자체에만 큰 기대를 할 필요는 없다. 대신 실물 크기의 모조품이 울산박물관 등에 전시돼 있고, 울산역 내부의 자투리 공간에도 암각화 일부를 부조로 조각해 놓은 곳이 있다.

햇빛이 암각화에 비칠 때 가장 그림이 잘 보이는데 4월부터 9월 중순 사이 맑은 날 오후 4시가 잘 보이는 시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10월 중순부터 2월 말까지는 24시간 내내 암각화에 햇빛이 비치지 않는다고 한다.[24] 물론 햇빛이 비치지 않는 시간대에 가도 비치된 무료 망원경으로 잘 보면 뚜렷한 그림 몇 개는 보인다.

울주 천전리 각석까지 산책로로 이어져 있다. 여긴 반구대보다 훨씬 바위에서 가까운 위치에서 관람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림이 훨씬 잘 보이므로 선사시대 암각화를 실제로 보는 게 목적이라면 여기로 가는 게 낫다.

근처에 울산암각화박물관이 있다. 반구대 암각화로 오는 버스를 타고 내리는 곳이기도 한데,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암각화를 비롯 국내외의 암각화에 대한 박물관이다.


6. 사연댐으로 인한 암각화 멸실 위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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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대 암각화는 한 나라의 국보임에도 수몰되어 훼손이 반복된 끝에 멸실될 위기에 수십 년째 처해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반구대 암각화가 위치한 대곡천의 수위가 대곡천 하류에 위치한 사연댐으로 인하여 높아졌기 때문으로, 강우량이 적은 건기에는 수량이 줄어들었다가 강우량이 많아질 때 수위가 급격히 불어나면서 암각화가 물에 잠겨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훼손의 정도는 아주 심각하며, 이미 2009년 당시 문화재청 조사에서 암각화의 훼손 정도는 6단계 중 5단계에 달했을 정도이며# 2016년 조사에서는 이미 육안으로 식별 가능한 그림이 300점 중 30여점도 되지 않는 수준으로 전락해 버렸다.# 이미 암각화는 훼손을 우려할 시기를 넘어서 존재 자체를 걱정해야할 단계로 넘어가버린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울주 천전리 각석과 반구대 암각화가 신석기 시대에 처음 그려진 이후 역사 속에서 거의 수천년 동안이나 완전히 잊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만 그림이 그려진 신기한 암벽이 있다는 식으로라도 구전되어 내려오던 문화재들은 반고사 터를 탐사하기 위해 내려온 동국대 문명대 교수 탐사팀에 의해 1970년 천전리 각석이 재조명된 이후 약 1년 뒤 2차 조사에서야 재발견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1965년 건설된 사연댐이 이미 가동되고 있는 상황이었고, 당시에는 문화재 보호와 관리에 대한 의식 수준이 무척 낮았기 때문에 암각화가 물에 잠긴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별다른 대처방안이 검토되지 못하고 유야무야되었다. [25]

때문에 반구대 암각화는 거의 반세기 동안 물에 잠겨 물살에 휘말려 침식되고 풍화되면서 훼손되어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참고로, 이러한 충격적인 관리 실태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하려다 실패했다는 풍문이 있다.

그나마 문화재 보호에 대한 의식 수준이 함양된 00년대에 들어서야 암각화 훼손 문제가 재조명될 수 있었으나, 조사가 반복되면서 이미 암각화의 침식 및 훼손의 속도가 급격히 빨라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 결국 반구대 암각화를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암각화 앞에 물막이 설치, 사연댐의 수위조절, 사연댐 수문 설치 등 여러 가지 방안들이 제시되었으나 대부분 실패하거나 큰 효과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 해결이 더딘 가장 큰 문제는 사연댐이 울산시민의 식수원으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때문에 울산시는 암각화에 대한 보존 의지보다도 식수원 확보를 더 중요하게 여겨 사연댐의 수위 확보를 가장 우선하여 생각하였고, 그나마 울산시의 전향적인 양보에 의하여 사연댐에 수문 설치가 결정될 수 있었으나, 수문 설치가 오히려 암각화를 보존하기보다 훼손을 촉진한다는 의견까지 나오면서 현재로써는 확실한 방책이 없는 상황이며 암각화가 불과 100년 뒤까지라도 보존될 수 있을지의 여부는 불확실하다.


6.1. 암각화 보존을 위한 여러 방안들의 실패[편집]


결국 침식을 막아 훼손을 지연할 수 있도록 이렇게 이동식 댐을 설치하는 계획이 나왔다. 구조상 댐 안쪽에 무빙워크 비슷한 장치도 있어 가만히 플랫폼 위에 서서 암각화를 감상할 수도 있다. 해당 방책은 사연댐의 수위를 건드리지 않고 암각화의 침식과 풍화를 모두 막을 수 있기에 암각화를 영구히 보존할 결정적인 해결책으로 한동안 주목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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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물막이 댐의 최종 모형 실험 결과, 투명 물막이판 모형의 연결 부분에 누수가 발생하여 실험이 실패했다. 이를 두고 울산대학교 조홍제 교수는 '실패가 예견된 방안' 이라고 밝혔다. 해당 기사 실험 비용은 28억이 들었다고 한다.

2016년 7월 24일 결국 이동식 댐 설치 방안은 백지화 되었다. 울산시는 지난 21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건축분과 회의에서 임시 물막이 안건을 심의해 사업을 중단하기로 했다고 24일 밝혔다.

물막이 안건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심지어 울산시 또한 암각화의 보전에 큰 의지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는데, 2017년 울산시가 국토부에 보낸 요구사항을 살펴보면 울산시가 사연댐 내진능력 보강에 맞춰 '반구대암각화 보존을 위한 수위조절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명문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사연댐을 식수전용으로 명문화할 것을 요구하는 등 사실상 울산시가 사실상 사연댐을 영구히 식수원으로 사용하면서 대체 식수원 확보 의지 또한 없음을 드러내었다. #

울산시의 이러한 미온적 태도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으로, 울산시 내에 위치하여 이용부담금이 극히 낮은 사연댐[26]과 달리 낙동강은 톤당 170원으로, 낙동강을 취수원으로 활용하면 물 사용료로 수자원공사에 최소 월 20억원을 더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큰 비판을 받은 울산시는 결국 수자원공사와 협의 끝에 단순히 사연댐의 수위 조절, 즉 암각화의 침수 수위인 53m를 넘지 않도록 사연댐을 상시 관리하여 훼손을 지연하겠다는 방침을 내세웠으나, 이 또한 현실적으로 큰 효과가 없을뿐더러 장기적으로 볼 때 훼손의 정도를 늦출 뿐 최종적인 해결책도 아니라는 점에서 크게 비판받고 있다. 평시 대곡천에서의 사연댐 유입수량은 초당 4~5t에 불과하여 초당 5t의 배수능력을 가진 양수기로 수위조절이 가능하지만 매년 반복되는 호우시 최대 2~300t까지 증가하는 유입수량을 양수기를 통해 배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사실상 수위조절이 불가능하다는것이 요지이다. #

2020년 11월 18일 한국수자원공사울산시가 반구대 암각화 보존을 위해 업무 협약을 맺어 앞으로 암각화를 보존하면서 훼손되지 않게 방안을 세울 것으로 보인다. #


6.2. 사연댐 수문 설치 결정[편집]


현재 사연댐은 따로 수문이 없는 취수댐으로, 수위조절이 필요할 경우 양수탑을 이용해 최대 초당 5t씩의 물을 배수할 수 있다. 따라서 홍수시 최대 2~300t까지 늘어나는 유수량을 조절할 방법은 사연댐이 최대 수위까지 차오른 뒤 넘쳐서 자연방류되는 방안밖에 없었던 것이다.

2021년 4월 13일 그리고 환경부수자원공사가 토론회를 열고 문화재청, 울산시 등이 모여 사연댐에 수문을 설치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 울산시 등은 해당 방안을 통해 사연댐의 수위를 상시로 조절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해당 방안에 대해서 울산대학교 조홍제 교수는 경상일보에 사설을 기고해 해당 방안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내었다. # 요약하자면 암각화가 물에 잠기면서 침식되는 것보다, 수위조절을 한다며 수위를 어중간하게 낮추었을 때 매년 반복되는 홍수시에 빠른 유속으로 세굴되는 정도가 훨씬 빠르다는 것.

2022년 4월 5일 그러나 비판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결국 수문으로 설치하기로 했고 이후 구미시와 대구와 협약을 맺고 부족한 식수를 낙동강의 운문댐에서 끌어오는 것으로 최종 합의가 되었다.


6.3. 사연댐 철거 방안[편집]


근 7~8천년 동안 잘 보존되어 왔던 암각화는 사연댐으로 인해 물에 잠기기 시작하면서 불과 50여년만에 완전 멸실의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뒤늦게나마 사연댐에 수문을 설치하는 방안으로 정책을 전환한다고 하였으나, 이 또한 완전한 방안이 아닌 만큼 결국 사연댐을 울산시민의 식수원으로 사용하며 계속 기능을 유지하는 이상 반구대 암각화의 훼손 문제는 지속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때문에 이상헌 더불어민주당 의원 및 서범수 국민의힘 의원, 이선호 전 울주군수와 김진규 전 울산시 남구청장을 비롯해 사연댐 철거를 주장하는 정치인이 여럿 있고, 지역에서도 사연댐 철거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꽤 높다. 울산저널 기고 2020년에는 문광위 소속의 여야 국회의원들이 참여한 국정감사에서 반구대 암각화 보존을 위한 사연댐 철거방안이 논의되기도 했다. 머니투데이 기사

하지만 울산시에서 사연댐을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연댐이 울산시의 식수원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으로, 낙동강의 운문댐과 인근의 대암댐을 사연댐의 대체식수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지적에도 사연댐 철거가 아직도 전향적으로 논의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앞서 말했듯 이다. 울산시에서 자체적으로 확보한 취수원과 달리 낙동강 물을 취수원으로 이용하면 가격이 상당히 비싸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2019년 송철호 울산시장은 사연댐 철거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 없다고 선을 그었다. 연합신문

사연댐의 철거 가능성에 대한 자세한 문제를 알기 위해서는 울산시의 공업,생활용수 공급에 대한 세부적인 사항을 알아야 한다. 현재 울산시에 공업용수와 생활용수를 공급하는 댐은 대곡댐, 사연댐, 대암댐, 선암댐, 회야댐으로, 이 중 대곡댐과 사연댐은 울산시 북서부, 회야댐과 선암댐은 동남부에 위치해 있다. 동남부의 회야댐은 울산시 인구의 절반 이상, 구체적으로는 남구와 동구 전 지역, 북구 양정동, 울주군 온양, 온산, 청량, 서생, 웅촌 등에 생활용수를 공급하고 있으며, 유역면적이 적기 때문에 매일 사용량의 40%정도인 8만톤 가까이 낙동강물을 가지고 와 회야정수장을 통해 공급하고 있다. 또, 같은 지역의 선암댐은 송수로를 통해 낙동강 물을 그대로 받아서 공업용수로 전용하고 있다.

한편 북서부의 사연댐,대곡댐,대암댐의 경우 대암댐은 태화강 남쪽, 대곡댐과 사연댐은 태화강 북쪽에 위치하여 대곡천 물을 저장하고 있다. 태화강 남쪽의 대암댐[27]의 경우 자연수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평시에는 90% 이상의 낙동강 물을 가져와서 저장해놓고 오로지 공업용수로만 쓰여지며, 갈수기에 가끔 천상취수장에서 무거동과 우정동에 생활용수를 공급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연댐과 대곡댐은 같은 대곡천 자락에 세워져 있으나, 대곡천 상류에서 대곡댐을 거쳐 사연댐으로 유입되는 수량은 일일 9만톤, 그리고 인보천, 반곡천에서 사연댐으로 유입되는 수량이 일일 9만톤으로 천상정수장에서 약 18만 톤을 정수해 울주군 범서, 언양, 두동, 두서 그리고 중구와 북구로 보내고 있다. [28]

만일 사연댐이 철거되고 대곡댐에 취수탑이 설치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문제는 크게 세 가지로, 첫째는 사연댐에서 내보내는 저장하는 일일 9만톤의 생활용수 부족, 둘째는 대곡댐과 천상정수장까지의 송수관 건설과정의 난관, 셋째로 생활용수로 사용하기 위해 낙동강 물을 공급받는 것의 적절성이다.

2022년 기준으로 현재 사연댐의 수위를 낮게 유지하기 위해 사연댐에 수문을 설치하는 방안이 확정된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울산시는 사연댐의 취수기능을 어느 정도 타협한 것으로 보인다. 수문 건설로 인해 사연댐에서 공급하는 18만톤의 생활용수 중 약 9만 톤이 부족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는데, 울산시는 현재 사연댐에 위치한 취수탑을 대곡댐으로 옮기고 또 부족분 중 7만 톤을 운문댐에서 송수관을 통해 공급받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즉 사연댐의 취수기능을 사실상 정지하겠다는 뜻으로, 이 경우 사연댐의 존재이유는 사실 크게 없다. 그러나 대곡댐으로 옮겨간 취수탑이 천상정류장으로 용수를 공급하기 위해서는 새로 취수관 건설이 필요한데, 이에 대해 큰 사업비가 들어갈 것이 우려된다. 울산신문 기사

한편으로는 현재 생활, 공업용수로 사용되고 있는 대암댐의 용수를 생활용수로 전용하여 5만t의 물을 추가 확보하는 방안 또한 고려되고 있으며, 이 경우 천상정류장으로 이미 송수관이 건설되어 있어서 큰 예산절감이 가능하다 .울산매일 기사 이렇게 되면 현재도 이미 회야정수장에서는 낙동강 물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울산시의 취수원은 거의 낙동강 물을 사용하게 되는 셈이다.

위와 같이 운문댐과 대암호를 대체 식수원으로 사용함으로써 생활용수로 필요한 충부한 수량이 확보된 상황으로, 수문 설치와 사연댐 철거에 따라 울산시가 낙동강에서 추가로 공급받아야 하는 양은 앞선 단락에서 언급된 하루 40만톤의 1/5인 약 7만톤 정도에 불과하고, 즉 앞선 단락에서 계산한 20억이 아닌 월 3억 5천만원 정도가 추가로 소요될 뿐이다.

위와 같이 사연댐 철거의 가능성도 아직 사라지지는 않은 상황이다.


6.4. 또다른 암각화의 가능성?[편집]


산적한 수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반구대 암각화 보존을 위한 최종적 방안이 사연댐 철거를 포함해 전향적인 쪽으로 최대한 빨리 논의되어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1965년의 사연댐 건립 과정에서 해당 지역에 대한 매장문화재나 벽화에 대한 전수조사가 따로 없었다는 점이다. 이미 드러난 바위 표면에 대해서는 몇 차례 조사가 진행되었으나, 사연댐에서 사용하는 수량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 수위의 수면하에 대해서는 조사가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따라서 해당 지역에 어떠한 암각화가 또 잠들어있을지 알 수 없다.

사연댐 아래에 제 2,제 3의 반구대 암각화가 있을 것이라는 주장은 암각화 최초 발견자문명대 교수도 동의하는 바였는데, 60년대 사연댐 건립 전에 해당 지역에 살았던 수몰지구 주민들에게서 반구대 암각화 이외에도 대곡천 하류에 1~2군데에 비슷한 구도의 그림이 더 있었다는 증언을 받았다는 것이다. 구체적 위치를 대곡리 옹태골 인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문명대 교수 인터뷰

실제로, 반구대 암각화가 발견된 대곡천 인근에는 반구대 암각화이외에도 울주 천전리 각석을 비롯해 암각화가 여럿 발견되었고, 울산 암각화박물관이 주도한 바위 표면 전수조사에서 긴 나팔부는 선사인, 꽃사슴, 임종해서 잡힌 고래나 모래톱에 걸려 잡힌 고래를 뭍으로 끌어올리는 대형그물그림 등이 추가로 발견될 정도로 암각화가 운집한 곳이기에 울산 암각화박물관은 대곡천 일대를 울주 대곡천 암각화군(Petroglyphs of Bangudae Terrace in Daegok-ri, Ulju)이라는 이름으로 학술조사 보고서를 발간하고 있다. 때문에 대곡천 지류에 이미 수몰되어 발견되지 못한 암각화가 여럿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2013년과 2018년 양차에 걸쳐 문화재청에서 반구대 암각화 바위 인근의 물길을 돌리고 지표조사를 시행하여 2013년경 같은 바위에 있던 그림을 새로 식별하기도 하였고 몇 점의 유구를 발견한 발굴조사 결과가 '대곡천 암각화군 종합연구보고서'에 수록된 바 있고, 또한 2021년 6월 울산시[29]이 울산문화재연구원에 연구용역을 발주하여 6개월 동안 수면 아래를 제외한 대곡천 인근 반경 3km 주변의 전수조사를 진행한 바도 있었으나, 반구대 계곡에서 새로운 암각화를 발견하지는 못하였다. 반구대계곡에 새로운 암각화는 없어 - 울산제일일보 이상길 2021 문화재청 민원 질의 결과 해당 조사는 2022년 4월 기준으로 보고서 발간 준비 중이며, 자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암각화세계유산추진단에 문의해달라는 답변을 받았다.

때문에 만약 사연댐을 철거하고 수몰지역에 대한 전수 발굴조사가 이뤄진다면 이외에도 다른 암각화들이 많이 발견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는 다소 과도하게 낙관적인 관측으로, 물 속에 잠들어 있던 시간보다는 물 위에 나와 있던 시간이 긴 반구대 암각화조차 50년만에 멸실에 가까운 훼손을 입었는데, 50년동안 내내 물속에 잠겨 물에 씻겨져 나갔을 암각화가 계속 보존되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물론 암각화 표면에 뻘이 쌓여서 오히려 어느 정도 풍화에서 보존해주었을 가능성도 없다는 할 수 없으므로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이 하루빨리 사연댐 수몰지구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7. 기타[편집]


  • 영어 표기로 Bangudae를 쓰는 곳이 있는데 이렇게 하면 로마자 사용자는 '반구대'(Ban gu dae)로 읽는 건지 '방우대'Bang-udae/Bang-u-dae)로 읽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로마자 표기 시 Ban-gu dae라고 하이픈(-)[30]으로 음절이 구분되게 표기하고 있다.

  • 2013년에는 암각화 근처 암반에서 공룡 발자국 화석 81점이 확인됐다. 초식공룡인 용각류, 조각류와 함께 육식공룡인 수각류 발자국이 함께 확인된 점이 특징이며 특히 길이 9cm, 폭 5.4cm의 작은 수각류 공룡 발자국은 지금까지 경상도 지역에서 발견된 육식공룡 발자국 화석과 다른 종류라고 한다. 근처에 있다뿐이지 본문의 암각화와는 별 관련이 없다. 덤으로 근처 천전리 암각화에도 공룡 발자국 화석이 존재한다.[31] 2020년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공룡은 아니고 도마뱀과 가까운 파충류 '코리스토데라(Choristodera)' 종류의 발자국이라고 밝혀졌으며, '노바페스 울산엔시스(Novapes ulsanensis)'로 명명되었다.#

  • 도전 골든벨 구리고등학교 편에서 골든벨 문제로 출제되었다.



8. 외부 링크[편집]




9. 국보 제285호[편집]



높이 4m, 너비 10m의 ‘ㄱ’자 모양으로 꺾인 절벽암반에 여러 가지 모양을 새긴 바위그림이다. 바위에는 육지동물과 바다고기, 사냥하는 장면 등 총 200여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육지동물은 호랑이, 멧돼지, 사슴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호랑이는 함정에 빠진 모습과 새끼를 밴 호랑이의 모습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멧돼지는 교미하는 모습을 묘사하였고, 사슴은 새끼를 거느리거나 밴 모습 등으로 표현하였다. 바다고기는 작살 맞은 고래, 새끼를 배거나 데리고 다니는 고래의 모습 등으로 표현하였다. 사냥하는 장면은 탈을 쓴 무당, 짐승을 사냥하는 사냥꾼, 배를 타고 고래를 잡는 어부 등의 모습을 묘사하였으며, 그물이나 배의 모습도 표현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선사인들의 사냥활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길 기원하며, 사냥감이 풍성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바위에 새긴 것이다.

조각기로 쪼아 윤곽선을 만들거나 전체를 떼어낸 기법, 쪼아낸 윤곽선을 갈아내는 기법의 사용으로 보아 신석기말에서 청동기시대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과 점을 이용하여 동물과 사냥장면을 생명력있게 표현하고 사물의 특징을 실감나게 묘사한 미술작품으로 사냥미술인 동시에 종교미술로서 선사시대 사람의 생활과 풍습을 알 수 있는 최고 걸작품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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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이는 산업으로서의 포경과는 별개의 이야기로, 이후 역사시대 동안 아시아에서는 일본 외에 고래잡이 문화가 그다지 발달하지는 않았다.[2] 걸어서 약 1.5km 정도이다[3] 문무왕, 진흥왕 시대[4] 자세한 것은 또다른 암각화의 가능성 문단을 참조.[5] 오랫동안 새끼를 밴 고래로 추정되었으나, 새끼를 '밴' 게 아니라 '업은' 모습인 걸로 밝혀졌다고 한다. 이는 귀신고래의 습성이다.[6] 이전에는 흰긴수염고래라고 작성되어 있었으나, 여러 자료들에 따르면 복부의 주름 양상으로 보아 혹등고래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된다.[7] 포경선 선장의 아내로 추정[8] 가장 많은 유형이자, 고래가 등장[9] 2점밖에 없으나 도상을 앞보다 크게 표현하였다.[10] 뜻을 알 수 없으나, 타 지역의 암각화와 비슷한 문양[11] 통일신라시대로 연대 확인 가능[12] 지금도 매우 드물게나마 방사형 그물에 엉켜 죽거나 죽은 채 떠밀려온 고래가 발견된다. 주로 돌고래류(이빨고래류), 밍크고래이며, 한국의 경우 합법적으로 판매하기 위해서는 신고를 한 뒤 허가를 받고 해체하여 경매 등으로 판매해야 한다.[13] 대곡천의 옛 이름[14] 현재의 반구동에 위치한 반구정은 한자가 伴鷗亭으로 갈매기와 벗하는 정자라는 뜻이 되어 완전 다르다.[15] 발굴된 불상은 부산대학교 박물관 뒤편에 있으며 반고사 석조여래좌상이라 한다. 참고로 울산대학교 박물관 등에서 해당 불상의 원래 위치를 울주군 천전리 탑등으로 잘못 기재하고 있어서 일부 블로그 등에서도 천전리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 천전리사지와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불상이 발굴된 반고사지는 천전리가 아닌 대곡리이다. 울산매일신문에서 위치까지 정확히 비정하고 있다.[16] 피은(避隱) 제8(第八), 낭지승운(朗智乘雲) 보현수(普賢樹) 조 전문[17] 한편 그 연유에 대하여 위키백과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고대 인도의 산 이름에서 유래한 영축산의 한자 표기는 '영축산(靈鷲山)'과 '취서산(鷲栖山)' 두 가지로 표기되는데, 현대 한국에서는 영축, 영취, 축서, 취서 등으로 혼용된다. 일반적으로는 독수리 취로 읽으나, 불교에서는 축으로 읽는다. 취 또는 축의 원래 발음이 '축'이었다는 것은 1463년(세조 9) 간행된 '법화경언해본'에서 밝히기를 불교에서 유래된 '축(鷲)' 자를 취(就)자와 조(鳥)자의 합자로 된 '취(鷲)'자와 혼동했기 때문이라고 한다.[18] 신라 선덕여왕 15년(646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므로 원효대사보다 조금 앞선 시대에 건립된 셈이다.[19] 취서산이라고도 한다.[20] 영축산이라고도 한다.[21] 가령 발음 ㅗ와 ㅜ를 혼동했다던가, 혹은 고대 한국어의 표기과정에서 같은 발음을 뜻이 다른 한자로 표기하는 일은 여럿 있었다[22] 1964년 사연댐이 들어서기 전의 대곡천을 보면 구량리에서 대곡천을 따라 골짜기만 타고 가면 별다른 갈림길 없이 그대로 굴화까지 도달한다. 그런데 굴화와 구량리 둘 다 신라 상대에서도 극초기부터 나타나는 지명이다. 굴화는 파사왕(80~112)대에 굴아화가 병합되었다는 조에서, 구량리는 아예 삼국유사 박혁거세조에서 신라 6촌(또는 진한 6부)의 일원 돌산 고허촌을 설명할 때 구량벌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신라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경주 월성에서 활천리로 나가는 35번 국도불국사쪽으로 내려가는 7번 국도 단 2가지가 있는데, 35번 국도를 따라가면 구량벌에서 언양으로, 7번 국도를 따라가면 호계를 거처 울산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언양에서 태화강을 따라 내려가면 굴화를 지나 울산에 닿는다. 다시 말해, 구량리에서 굳이 언양까지 내려가서 돌지 않고 대곡천을 따라 굴화까지 가는 길이 한 번 발견되었다면 이후에는 꽤나 인적이 있었을 것이다.[23] 일부에서는 심지어 불교계의 홈페이지에서 낭지화상이 반고사에 머물렀다고 잘못 서술되었다. 근거가 앞서 첨부된 삼국유사 낭지승운조이므로 이는 앞서 원효가 반고사에 머물 때 영취산의 낭지승운에게 가르침을 청하러 갔다는 구절을 잘못 이해한 듯하다. 낭지승운이 머문 곳은 영취산 혁목암이고, 반고사가 영취산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낭지가 반고사에 머물렀다 하더라도 낭지승운이 기록에서 발견되는 가장 빠른 연대가 삼국사기 3권의 법흥왕(法興王) 14년(527년) 영취산(靈鷲山)에 법장(法場)을 열었다는 조이므로 이 역시 연대상 문제 없다.[24] 반구대에 가면 표지판에 햇빛 들어오는 시간이 정리돼 있다.[25] 무령왕릉 발굴 당시 박정희가 발굴된 금팔찌를 손으로 접었다 폈다 해보았다는건 유명한 풍문으로, 당대의 문화재에 대한 의식을 잘 말해준다.[26] 울산의 수자원 이용부담금은 톤당 2014년 27.2원, 2015년 29.2원, 2016년 21.1원, 2017년 14.3원이었다.[27] 롯데그룹 신격호 별장이 있다는 그 곳이다.[28] 해당 내용의 출처는 이곳이다.[29] 울산광역시 반구대암각화세계유산추진단[30] 사실 하이픈은 음절 분리가 아니라 두 단어를 하나로 엮어놓는 역할을 한다. 음절 분리 표시는 하이픈이 아닌 어포스트로피가 국제적으로 통용되며(예:San'in, Xi'an 등) 어포스트로피를 쓰는 게 바람직할 수 있으나 국내의 로마자 표기법에 의해 붙임표를 쓰고 있다(쓰지 않거나 붙임표 사용 선택).[31] 이 쪽은 발견된 지 꽤 되었는데 1997년에 이미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