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상(범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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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상
朴漢相 | Park Han Sang

파일:Untitled-21.jpg
출생
1971년 (52세)
충청남도 천안시[1]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구속 전 거주지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60-1[2]
가족
아버지 박순태(1947~1994.05.19)
어머니 조순희(1948~1994.05.19)
남동생 박영상(1973년생)[3]
친척
큰아버지 박순영(1944년생)
이모부 이관수(1955년생)
이종사촌동생 이석규(1981~1994.05.19)[4]
학력
현대고등학교 (졸업)
원광대학교 (토목공학 90 / 중퇴)
범죄유형
존속살해, 방화, 도박죄
살해인원
3명
선고
사형 (형집행 무기한대기)

1. 개요
2. 성장 과정
2.1. 학업 태만과 유흥 중독
3. 범행
3.1. 준비
3.2. 실행
3.3. 검거
4. 검거 이후
4.1. 수감 생활
4.2. 사회에 끼친 영향
4.3. 근황
5. 다른 존속살해 사건들과 차이점
6. 여담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파일:1000004705.jpg

부부를 살해하고 불까지 지른 범인은 바로 그 집 큰아들이었습니다. 소문은 전국적으로 삽시간에 퍼져 나갔습니다. 그럴 수가 있을까? 모두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고,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 박한상의 범행이 밝혀진 날, 앵커 이윤성KBS 뉴스 9 오프닝 멘트

대한민국범죄자.

2. 성장 과정[편집]


파일:attachment/phs02.jpg

▲ 박한상의 가족사진. 왼쪽의 인물이 박한상이고 가운데 두 부부가 박한상에게 희생당한 부모[5], 오른쪽의 얼굴을 가린 이는 박한상의 동생 박영상이다.

박한상은 1971년에 아버지 박순태(朴淳泰, 前 고려한약유통공사[6], 현 고려허브 대표)와 어머니 조순희(趙順姬)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가 출생했을 당시 아버지는 24세, 어머니는 23세로 당시에도 비교적 젊은 나이에 아이를 얻었다. 박한상은 어렸을 때부터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경동시장에서 대형 약재상 '덕양한약방'을 경영하던 부모 덕분에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거기다 가부장제의 영향력이 강력하던 시절에 장남으로 태어나서 편애를 받고 자랐다.


2.1. 학업 태만과 유흥 중독[편집]


강남의 명문고등학교인 현대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박한상은 공부에 관심이 없었고 성적 역시 저조했다. 경동시장의 한약방을 기업체로 키워낸 자수성가한 약재상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인 박한상이 가업을 잇기 위해 한의대에 진학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으나 박한상의 친구의 증언에 따르면 박한상이 자동차에 관심이 많아 자동차 튜닝 분야로 진로를 정하려고 했기에 아버지가 못마땅히 여겼다고 한다.[7]

유복하게 자란 금수저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욕망을 위해 부모를 죽이는 몹쓸 짓을 저지른 것에서 알 수 있듯 박한상은 선천적으로 끔찍하게 나쁜 인성으로 인해서 학교와 병원을 옮겨 다녀야 했다. 학창 시절엔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비행을 일삼고 싸움질과 폭력을 휘두르는 쌩양아치였다.[8] 게다가 후술하겠지만 박한상은 성인이 되어서도 친구로 하여금 보증을 서게 만들면서 큰 돈을 구하기도 했는데 애초에 친구가 보증을 서게 했다는 점에서 이 인간의 인성이 매우 저열하다는 것이 제대로 드러난 셈이었다. 박한상의 아버지는 아들을 강압과 폭력, 학대로 통제하려고 했지만 박한상은 더욱 엇나갔다.[9]

이 때문에 박한상의 부모가 막장 부모였고 이런 부모 밑에서 자라서 비뚤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지만 그렇지 않았다. 박한상의 아버지는 원래는 자상한 성격이었고 차별대우까지 하며 차남보다 장남인 박한상을 아꼈고 박한상이 원하는 대로 다 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한상이 워낙 문제를 많이 일으켰기 때문에 아버지도 점점 아들에 대해 강압적인 태도로 변한 것이었다. 비록 박한상을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는 강압적이었으나, 1993년에 18,000달러라는 엄청난 거금을 박한상이 달라고 해서 내 줄 정도면 아버지는 아들을 미워했던 게 아니라 어떻게든 제대로 된 사람으로 한 번 만들어 보려는 의도로 강압적으로 나왔던 것이라고 보면 된다.[10] 그리고 그렇게 편애해 주던 아버지를 강압적으로 만들 정도로 박한상이 반사회적인 인간이라는 것은 결국 나중에 돈을 목적으로 부모를 살해하면서 확실히 드러났다.

동정할 가치가 전혀 없는 인간이었기에 그의 친구들도 사건 이후 박한상을 극심한 패륜아로 규정하고 그 형량을 집행하는 것에 대해서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박한상에게 주어질 동정표는 그가 재산을 탈취하기 위해 존속살해를 저지른 이상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증거를 인멸하려고 불을 질러 죄 없는 13살의 어린 사촌 동생의 목숨까지 앗아갔다. 박한상이 완전히 미쳐 버려서 증오할 일이 아닌데도 부모에게 증오심을 불태웠다고 쳐도 사촌 동생이 죽는 것도 감수했다는 건 부모의 강압이라든지 심정이라든지 하는 수준에서 아득히 벗어난 것이다.

아버지의 상당한 기대와는 달리 박한상은 한의대 진학에도 관심이 없었고 애초에 갈 능력도 없었다. 그래도 원광대학교 토목공학과[11]에 90학번으로 입학했으나 대학 생활에는 적응하지 못했고 이미 이때부터 유흥업소를 들락날락했다고 한다.[12] 박한상을 기억하는 대학 동기들에 의하면 수업에 거의 안 들어오고 거의 매일같이 놀러다녀서 소문이 안 좋았다고 했을 정도다. 사실 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대학들은 의대, 법대, 공대 정도를 제외하곤 노는 분위기가 강했고 대학만 나왔다 하면 기업들이 모셔갈 정도였는데 놀러다녔다는 이유로 이미지가 나빴을 정도면 박한상은 그 정도가 매우 심했다는 것이다.

또 박한상은 1991~1992년경 대한민국 육군 방위병으로 군복무를 했는데 육군 방위병으로 입대한 후에도 수입 오렌지족으로서 저녁엔 압구정으로 차를 타고 놀러다녔다고 하며 함께 근무한 동료들에 따르면 박한상에 대해 툭하면 힘든 일을 열외받으려 했고 승용차, 여자, 돈에 대한 자랑을 하는 것이 특기였다고 한다. 그리고 소집해제 후 복학을 포기하고 학교에 다니지 않자 아버지가 동네 교회 목사와 상의해서 아들을 자퇴시키고 강제로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프레즈노 퍼시픽 칼리지 부설 어학원으로 도피유학을 보냈다. 하지만 친구들조차도 “결국 거기서 놀러다니고 카지노에서 도박이나 하게 될 것”이라고 이미 당시부터 예상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역시나 예상대로 대한민국에서 새는 바가지는 바깥에 미국에서도 제대로 새고 있었다.[13]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차별받고 자란 차남이 한의대에 입학하게 되면서 맨날 사고나 치고 다니는 장남 박한상은 더 이상 편애받는 집안의 기대 대상이 아니라 돈만 빨아먹는 사고뭉치 골칫덩어리로 전락하게 되었다.[14]

박한상은 전형적인 야타족이기도 했는데 압구정에서 처음 보는 여자들과 원나잇을 즐기다가 한 번은 함께 원나잇을 즐긴 한 여자가 자길 임신시킨 걸 책임지라고 하는 바람에 부모가 합의금을 내 준 적이 있다고 하고[15] 또 한 번은 여자들과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다 혼자 도망쳐서 부모랑 함께 경찰에 불려가서 조서를 쓴 적도 있다고 한다.

박한상의 집안은 교회를 다니는 집안이었고 박한상의 아버지 또한 교회 집사였다. 박한상은 고3을 앞두고 교회에서 청소년부 활동을 하면서 활동을 열심히 하다가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모습도 보였다고 하지만 태생부터 인성이 나빴기 때문인지 상술했듯이, 그리고 또 후술하겠지만 도박에 빠지거나 친구를 보증서게 만드는 등 인간으로써 하면 안 될 행동들을 했다.


2.2. 도박 중독[편집]


상술한 내용만 봐도 가관인데 그걸로도 모자라 도박 문제로 박한상이 3,700만 원에 달하는 도박 빚을 지게 되면서[16] 아버지한테 빚을 갚아 줄 것을 부탁했지만 아버지는 거부했고 박한상은 대한민국으로 불려오게 되었다. 그리고 박한상은 대한민국으로 귀국한 뒤 위와 같이 패륜적인 범죄를 저질렀다.

사건 당시 박한상은 미국에서 유학 중에 도박과 향락에 빠져 학업에 제대로 열중하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 하룻밤에 5천 달러를[17] 잃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며 1994년 1월 귀국해 아버지에게 혼다 어코드를 사 달라고 졸라 18,000 달러를 받아 출국했지만 그 돈마저 도박으로 잃었다. 심지어 이때 친구가 보증을 서게 했다고 한다.

1994년 4월에는 부모 몰래 귀국해 은행에서 발급받은 카드로 사채업자에게 현금을 빌린 뒤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며 오렌지족 생활을 했다. 그러나 4일 만에 부모에게 대한민국으로 귀국한 것을 들켜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정확히는 친척이 박한상을 본 후 그게 부모한테 알려진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술, 마약, 도박에 빠져 살던 그는 오히려 3,700만 원의 빚만 지게 되고 결국 아버지의 반강제적인 부름을 받아 귀국했으며 아버지로부터 "넌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놈", "내 아들이 아니니 호적 파서 나가라"는 꾸지람을 들었다.

박한상은 미국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유학생을 만나 함께 학교 근처의 도박장에 가게 된 것을 계기로 도박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처음엔 학교 근처였으나 나중엔 다른 주로 원정 도박까지 갔다고 하며 생판 처음 보는 미국인과 도박하다 돈을 잃으면서도 도박을 멈추지 못했다. 얼핏 보면 유학 생활 중 친구를 잘못 만나서 인생이 망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상술했듯이 박한상은 천성적으로 인성이 안 좋았음이 드러난 데다 학창 시절부터 문제를 많이 일으켰기 때문에 동정의 여지가 없다. 오히려 미국에서 박한상과 함께 도박장에 간 유학생이야말로 친구 잘못 만나서 마치 박한상 마냥 범죄자가 안 된 게 다행일 지경. 박한상과 비슷한 처지였던 유학생의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3. 범행[편집]



3.1. 준비[편집]


자신이 원하는 고급 승용차를 사주지도 않고[18] 자신의 빚도 안 갚아 주고 호되게 꾸중한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앙심을 품은 그는 본격적인 살인 계획을 세우고 5월 13일 세운상가호남정유 주유소 등지를 돌며 등산용 칼, 휘발유 등 살인에 필요한 도구들을 구입했다.


3.2. 실행[편집]


1994년 5월 19일 박한상은 속옷까지 다 벗어 버린 알몸에 몸에 피가 최대한 묻지 않게 하기 위해 침대시트를 뒤집어 쓰고 양손에 등산용 칼 하나를 쥐고 부모를 40군데나 찔러서 살해했다. 옷을 벗은 것은 살해 후 샤워로 혈흔을 지워 버리기 위해서였으나 칼에 난자당하면서 그의 아버지가 박한상의 발목을 물어뜯어 결국 그가 검거되는 빌미가 되었다.

게다가 살해 후 샤워를 마친 뒤 집에 불을 질러 증거를 인멸했다. 여기서 더 충격적이고 안타까운 것은 이 때문에 다른 방에서 자고 있던 13살 사촌동생 이 모 군도 사망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모 군은 본인의 부모(박한상의 이모 부부)가 하필 그때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충주 수안보로 여행을 가서 이모 집에 맡겨진 상태였다. 1990년대는 학교 개근을 무척 중요시하던 시절[19]이라 함께 가지 못한 것이 화근이 된 것. 박한상의 친동생은 다행히도 학업 관계로 타지 거주 중이었기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경찰은 처음에는 단순 화재 사고로 처리했으나 형식적으로 실시한 부검에서 화재 현장에서 잔해로 발견된 시신이 각각 40여 군데 난자된 상태였음을 발견하고 살인 사건인 것으로 추정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3.3. 검거[편집]


결국 당시 여러 정황을 봐서 면식범의 소행으로 파악하던 경찰은 "박한상의 머리에 피가 묻었다"는 간호사의 증언과 박한상의 다리의 잇자국을 이야기한 친척의 제보로 수사 끝에 범행 일체를 자백받았다.

사실 화재 당시에도 오줌이 마려워서 나가다가 불이 나자 부모와 이종사촌 동생에게 알리지 않고 먼저 도망간 그의 행색이 수상해서 경찰의 수사대상에도 올랐지만 당시 관점으로 친아들이 부모를 그렇게 살해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집안의 문제아였긴 했어도 장례식 때 기절까지 한 친아들을 처음부터 범인으로 생각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범인으로 지목되기 전 태연자약한 모습이 찍힌 사진

하지만 경찰은 한 집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박한상만 이렇다 할 상처가 없고 특이하게 잇자국이 종아리에 남아 있는 점과 머리에 묻은 타인의 혈흔, 살해 잔해 등을 근거로 추궁하자 이내 박한상은 부모의 재산을 노리고 범죄를 저지른 사실을 자백했으며 그 자리에서 구속했다. 옷을 모두 벗고 나체인 채로 부모를 살해한 뒤 샤워를 해서 몸에 묻은 혈흔을 지워 버리기는 했지만 머리에는 피가 묻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머리를 감지 않아서 범행이 6일만에 발각됐다. 머리에 묻은 피의 경우 머리에 피가 묻었는데도 정작 머리를 다치진 않았단 점을 간호사가 제보했다. 만약 머리의 혈흔이 없었거나 간호사의 제보가 아니었다면 범행이 발각되지 않고 미제사건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결정적인 제보였던 셈.

사실 발각되기 전에도 외가 쪽 친척들은 모두가 박한상이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외가 쪽 친척들은 박한상이 범인으로 드러날 경우를 대비해서 자신들끼리 일종의 대책 회의까지 했다고 한다.[20] 반면 친가 쪽에선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기 전엔 경찰이 박한상을 상대로 참고인 조사를 하려고 했다는 이유로 박한상의 고모가 “부모 잃고 정신적으로 큰 충격에 빠져 있는 아이한테 지금 무슨 짓이냐”며 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항의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외가 쪽 사람들은 박한상에게 문제가 있으며 피해 가정에 가정불화가 있었음을 친가 쪽 사람들보다 더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므로 이 사건이 미제사건으로 끝났어도 외가 쪽 친척들은 제3의 범인이 나오지 않는 이상 심증 때문에라도 박한상을 계속 경계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처음부터 박한상이 범인일 가능성을 생각하며 회의까지 했을 정도면 외가 쪽에선 이미 사건 이전부터 평판이 안 좋았거나 뒷말이 나오던 상황이었을 가능성도 높다.


4. 검거 이후[편집]



4.1. 수감 생활[편집]


박한상의 자백에 의하면 원래 처음엔 자살 시도도 생각했고 자수할 생각도 해 봤으나 두려워서 미수에 그쳤다고 한다.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박한상이 천성적으로 인성이 나쁜 걸 넘어서 정말 답도 없는 수준인 걸 생각하면 정말로 진지하게 자살 시도나 자수를 생각했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오만가지 생각을 했을 터이니 아예 없는 말은 아닐 것이다. 하나 그래봤자 동정을 사서 감형받아 보려고 한 말일 가능성이 높다.

파일:박한상 사형선고.jpg

저명한 인권변호사이자 바로 직전에 환경부장관을 지낸 황산성이 그의 변호를 자처했으나 3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상술된 박한상의 진술인 “누군가 나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정신 나간 주장을 한 직후에 그만둔 것으로 보면 전혀 반성의 기미가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21]

당연한 이야기지만 동정의 여지가 전혀 없는 패륜아에게 법원은 관대할 이유가 없었다. 1심, 2심 모두 사형 판결이 났으며 1995년 8월 25일 대법원은 존속살해 등의 혐의로 기소된 박한상에게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22] 이에 따라 사형수의 신분으로 수감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대한민국이 실질적 사형 폐지국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이라고 봐도 무방하다.[23]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가 원하던 재산은 전부 다 그의 남동생이 상속받게 되었다.[24]


4.2. 사회에 끼친 영향[편집]


박한상이 범죄 사실을 진술하면서 "미국 영화 장면을 보고 살인 수법을 배웠다."는 말을 내뱉은 때문에 많은 영화는 물론이요, 애꿎은 애니메이션까지 도매금으로 올라 탄압받았다. 심지어 '유산을 물려주는 게 범죄의 원인'이라는 본질에서 한참 벗어난 생각을 한 사람들이 유산 안 물려주기 운동을 한 적이 있었지만 묻혔다.

당시 영화 등급을 심의하는 기관이었던 공연윤리위원회(현 영상물등급위원회)는 박한상이 폭력영화를 보고 사건을 저지른 점을 반영해 사건 이후로 폭력물에 대한 심의를 대폭 강화하는 바람에 당시 수입 예정이었던 외화들인 <하드 타겟>, <아담스 패밀리 2>, <굿 선>, <슬립워커>, <바이퍼>, <시리얼 맘>, <백색의 공포> 등이 강화된 심의 기준에 부딪쳐 수입이 반려되기도 했다. 링크


4.3. 근황[편집]


파일:한상근황.jpg

MBC의 교양 프로그램 경찰청 사람들 2015에 등장한 박한상의 근황(당시 44세)으로, 얼굴은 블러처리됐지만 사형수로 지내온 세월로 나이가 든 모습이 보인다.

언론에서 사형제에 관해 다루면서 알려진 그의 공식적인 근황은 1997년과 2002년에 동료 수형자와 큰 주먹다툼을 하자 교도관들에 의해 독방으로 보내졌고 두 달 후 다시 혼거실로 복귀했다는 것이다. 사건 이후에는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수형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다고 한다. 가장 최근의 언론 보도인 경찰청 사람들 2015 7월 16일 방송분에 모자이크 처리된 채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 나왔다. 세월이 흘러 중년이 되었는데(방송 당시 기준 44세) 본인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살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그를 6년 동안 상담한 교화위원 양순자의 인터뷰에 따르면 모두 거짓이며 전혀 반성하지 않는다고 한다. 부모를 살해하고도 반성은 커녕 빠져나갈 생각만 하면서 범행을 끝까지 부인하는 모습에 느낀 참담함은 말할 수가 없으며 양씨도 상담해 보고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고 했다. 면회 갈 때 피자를 사 갔는데 고마워하기는커녕 자기가 먹는 브랜드의 피자가 아니라고 투덜대지를 않나, 심지어 교도소에서 만나는 다른 수형자들에게 '자기가 재산이 많이 있는데[25] 그걸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것들을 물어보고 다니더라고 했다. 아마 정치, 경제 사범 같이 법 관련 지식이 많은 수형자들한테 조언을 구하러 다니는 듯하며 줄곧 가석방을 노린다는 얘기. 상식적으로 답이 없는 데다 이미 사형까지 받은 인간이 뭔 가석방인가 싶겠고 실제로도 그는 십원 한 푼도 상속받을 자격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무기징역이 아닌 사형을 선고받았기에 탈옥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살아서 교도소를 나갈 수 없다.[26]

하지만 이런 희망을 품은 이유가 있긴 있는데 일단 박한상 본인은 줄곧 범행을 부인해 왔으며 대한민국은 1997년 이후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있기에 사형 제도가 사실상 폐지되자 가석방될 수도 있다는 헛된 희망을 품은 듯하다. 실제로 사형을 집행하던 시절에는 사형수들은 이미 인생 끝났답시고 수틀리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를 만큼 막나가서 통제는커녕 되려 교도관들이 눈치를 볼 정도였다가 사형제가 사실상 폐지되자 조금은 통제가 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특히 사형수 중 한 명인 원언식이 언젠간 감형될 가능성이 거론되면서 다른 사형수들도 자신들도 언젠간 감형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경우가 생겨난 듯하며 박한상 또한 여기에 해당한다고 보면 될 듯하다. 물론 죄를 반성하며 모범수로 지내면 언젠가 진짜 감형돼서 가석방이 될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부모를 살해한 희대의 패륜아를 풀어줄 정도로 사법부도 자비로운 건 아니다. 사실 사형을 집행하던 시절에도 박한상의 사형 집행이 안 된 이유는 사형을 집행시킬 가치조차도 없는 존재로 낙인찍혔기 때문인 게 컸다.-사형시킬 가치보다 밥먹이고 재워줄 가치가 더욱 없지- 또 박한상을 무기수로 만들지 않고 계속 사형수로 놔두는 것도 사법부가 박한상을 풀어줄 생각이 아예 없으며 돈에 미쳐서 부모를 살해했기에 무기수로 감형시키면 노역을 통해 돈 한 푼이라도 만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박한상이 양순자에게 수십 통의 편지를 보냈지만 내용은 늘 위와 같이 한결같았다고 한다. 양씨는 '보통 사형수들을 상담하면서 이야기를 듣다 보면 동정이 가는 경우도 많은데 박한상만큼은 지금도 용서할 수가 없다'며 아예 상담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강남의 X라이 박한상. 범죄 사실 끝끝내 부인...그 아이(박한상)를 더 이상 상담할 수 없어 포기해 버렸다.

- 양순자, <인생이 묻는다 내가 답한다> 101p 中

사형을 선고받을 정도의 흉악범들조차 웬만하면 동정하는 사람마저 이럴 정도면 정말 대책이 안 서는 답이 없는 인간인 모양이다.[27] 가장 결정적으로 사형수가 가석방을 노린다면서 정작 교도소에서 모범수이긴커녕 오히려 자신의 죄를 반성하지 않았다는 점이나 동료 수감자랑 주먹다툼을 해서 독방에 수감된 일이 무려 2번이나 있었다는 점, 부모의 유산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지에 대해 다른 수감자들한테 물어보고 다닌다는 점을 보면 그러한데 자신이 국가와 부모에 의한 억울한 피해자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다만 양순자는 박한상에 대해 부모가 어느 정도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점도 있다는 입장도 보였다. 현명한 부모는 자식이 몇 점짜리 그릇인가 알고 있으나 부모로서 그들의 행보는 자기들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었다는 것.[28]


5. 다른 존속살해 사건들과 차이점[편집]


존속살해는 박한상 말고도 가끔 일어나는 범죄지만 박한상의 범죄는 대부분의 존속살해와 큰 차이점이 있다.

존속살해가 벌어지는 원인은 주로 가정환경이 안 좋아서 부부싸움이 심각했거나 학대를 가하는 막장 부모 밑에서 자라는 자식의 고통이 외면받고 곧잘 해결되지 않는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이은석 사건은 가정폭력학교폭력, 군대폭력까지 당해서 참다 못해 터진 것이다. 이처럼 대다수의 존속살해는 사회적으로 안타까운 시선을 받는다.

반면 이 사건은 부유층 가족에서 발생한 사건이며 1차적인 원인이 도덕성 결여와 반사회적 성격, 2차적인 원인이 금전이라는 점에서 다른 존속살해와 상당한 차이점을 보였다. 한마디로 막장 아들이라고 보면 된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 최악의 존속살해범을 논할 때 첫 손으로 꼽히는 범죄자다.

이 당시만 해도 존속살해가 일어나도 대부분 원인은 가정불화지 이와 같은 계획적인 재산 상속 목적의 살해는 없었기에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패륜의 대명사급 사건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6. 여담[편집]


  • 박한상은 사건 이후에는 오줌이 마려워서 일어나려는데 무언가 이상한 냄새가 나서 정신을 잃었고 칼을 누군가가 쥐어 주었다는 식의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 박한상에게 형이 한 명 더 있다는 보도가# 존재하지만 그 기사에만 그렇게 적혀 있고 다른 언론들은 모두 박한상이 큰아들이었던 것으로 보도했으므로 이 기사를 올린 기자가 처음에 박한상의 가족관계를 잘못 기재한 것으로 보인다.

  • 당시 검찰청과 교도소로 송치되는 과정에서 몰려든 취재진을 향해 "비켜, 비키라고 씨발!"이라고 외치며 눈을 부라리는 모습이 뉴스 영상을 통해 그대로 방영되기도 했다. 아무리 흉악범이라고 해도 보통 이 과정에서는 다소 체념 상태로 말이 없이 지나가는데 박한상은 굉장히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고 폭언을 해 댔다. 평소의 성격이 개차반임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 범죄자들 중에서도 이런 사례는 정말 드물다.

  • 그는 패륜 살인까지 저지르며 100억대 재산을 노렸지만 결국 본인은 한 푼도 못 받고 동생이 모두 물려받게 되었다. 민법 제1004조는 직계가족 및 부모를 살해하려 하거나 살해한 사람은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다고 규정한다.

  • 박한상이 범행을 저지른 것은 극심한 도박에 빠진 것과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 때문에 제 발로 굴러들어온 복을 자기 스스로 차 버렸던 것에 가깝다. 범행을 저지르지 않고 얌전히 지냈다면 한의대에 갈 능력이 없었더라도 가업은 동생에게 경영하도록 넘기고 부모의 재산의 일부를 물려받아 불로소득으로 거액의 부를 누릴 수 있었다.[29] 그러나 대학 시절에도 유흥에 도박까지 빠져 거액을 날린 전적이 있으니 재산을 물려받았다고 한들 그 많은 재산을 얼마 못 가서 탕진했을 듯하다. 또 당시 박한상은 애인이 있었는데 만약 그 상태로 결혼까지 했다면 재산 탕진으로 인해 가정파탄까지 났을 확률이 높다.

  • 2002년에 개봉한 영화 공공의 적의 악역 조규환의 모티브가 되었다. 단, 조규환은 인성은 그야말로 쓰레기 그 자체이지만 직업적인 면에서만큼은 나름 잘 나가는 금융맨에 혼자서도 자산을 불릴 능력을 갖춘 엘리트인 반면 박한상은 그마저도 아니다.



  • 박한상의 범행이 밝혀진 날 방영된 KBS, MBC 뉴스.


  • 1심(서울형사지법 합의23부)에서 사형 판결을 내린 부장판사는 이명박 정부 시절 감사원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김황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김황식 본인은 사형제 폐지론자에 가깝다. 다만 당시 법리상 사형 판결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 비슷한 범죄자로 대한민국에는 부천 원미동 존속살해 사건의 범인인 패륜아 김근우[30]가 있으며 미국에는 메넨데즈 형제가 존재한다.[31]


  • 사이트는 접속이 안 되지만 고려허브는 사건 이후에도 운영되고 있다. 지금은 접속되지 않는 과거에 회사 사이트에 기재된 연혁을 보면 1994년에 새로운 대표이사가 취임했다고 적혀 있었다.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경동시장 일대에 여전히 있는 듯.

  •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악역 '백한상(백 선생)'의 이름은 박한상에서 따 온 것으로 보인다. 저지른 범죄는 많이 다르지만 인간쓰레기라는 점은 마찬가지.

  • 정유정의 소설 <종의 기원>은 이 인간의 존속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32]

  • 원언식 다음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 복역 중인 사형수이다.

  • 죄질이 워낙 나쁜 데다 반성의 기미도 없다 보니 박한상이 사형 판결을 받은 이후 형제들과 친척들, 친구들, 애인, 원나잇한 상대들, 학창 시절 교사들 등 박한상을 알던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박한상을 면회하러 간 적이 없다고 한다. 면회 온 사람도 교화 위원이 유일하다. 사형 확정 이전 재판 진행 도중에는 동생이 한 차례 면회하러 간 적이 있으나 참회는커녕 "나는 무죄다"라고 주장하는 모습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돌아섰고 이후 두 번 다시는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박한상은 동생이 불쌍하다는 말은 종종 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작 부모님에 대한 얘기에는 침묵을 지켰지만. 2005년 보도 당연하지만 친척들이라고 이런 인간을 옥바라지하고 싶을 리가 없었는지 모두 없는 사람 취급하며 연을 끊어 버렸기에 재판 기간 중 구치소에서 사식 한 번 못 먹었고 변호사 선임도 못해서 국선변호인의 변호를 받을 뻔했는데 담당 검사가 그래도 박한상에게 일말의 동정심이 들었는지 자신의 연수원 후배에게 박한상의 무료변론을 해 줄 것을 요청해 검사 후배의 변호를 받았다고 한다.#


  • 만약 그의 범행동기가 가정불화였거나 자신의 잘못을 반성했다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을 가능성도 있다.[33] 범행동기가 워낙 불량하고 반성도 없었기에 사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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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당 기사 참조[2] 이 집은 방화살인 이후 남에게 팔렸고 본인은 가석방 자체가 불가능한 사형을 선고받았으니 법적인 주소지 또한 자신이 살고 있는 교도소일 것으로 추정된다.[3] 이 기사에는 박한상이 차남이고 박한상 위에 형 박원상이 있다고 적혀 있으나 이 기사에만 그렇게 적혀 있을 뿐 다른 기사에서는 형의 존재가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사촌형이었거나 박한상의 신상을 오해해 박한상과 중복해서 쓴 것으로 추정된다. 해당 기사가 작성된 5월 20일은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고 아직 범인이 잡히지 않아 범인을 가족 외의 인물로 추정하고 수사를 진행했던 시점이라 가족관계에 대해 사실확인이 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남동생은 사건 이후 큰아버지 박순영의 집에 몸을 의탁하게 된 듯하다. [4] 이관수의 아들이다.[5] 한겨레에 의하면 아버지는 당시 47세(1947년생), 어머니는 46세(1948년생)였다고 한다.[6] 1991년에 박순태 등 전국의 한약업자 98명이 7억 5,000만원을 출자해 세운 법인이다.(관련 기사)[7] 사실 박한상이 고교생이었던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에는 지금과는 달리 자동차 정비사가 꽤나 유망한 직종으로 거론되었고 일단 한 번 배워 두면 평생 써먹을 수 있으면서 자동차 정비소 하나를 차리면 적어도 굶어죽을 일은 없었으니 아주 잘못된 선택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8] 그나마 박한상이 있는 집 자식이라서 비행과 학교폭력을 저지르고도 퇴학이 아니라 매번 전학으로 끝날 수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가난한 집의 자식이라도 대한민국에서는 얼마든지 퇴학이 아닌 전학으로 끝내는 것은 가능하다. 있는 집 자식이라서 퇴학을 면한 비슷한 예가 이영학이다.[9] 그나마 다행인 점은 박한상에게서 정신질환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정신질환이 없는 내에서 안 좋은 성격과 요소는 다 쑤셔박은 인물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만약 반사회성 성격장애 같은 정신질환까지 있었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10] 한화로 약 2100만원 정도이며 1989년 당시에는 서울에 갓 지어진 30평짜리 아파트 한 채가 2000만원이었으니 말 그대로 아파트 한 채 값이나 되는 엄청난 거금을 아들에게 그냥 준 것이다.[11] 전과를 통해서든 아니든 어떻게든 한의대로 보내려고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다만 실제 원광대의 의학계열(의대, 치대, 한의대) 전과 제도는 2010년~2015년에 한시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원광대학교 의학계열(의대, 치대, 한의대)은 모두 2015년에 제정된 학칙에 따라 전과가 금지되었기에 이 인간이 원광대학교를 제대로 다녔다고 해도 전과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더 자세히 알아보려면 원광대학교/사건사고 문서로. 만약 이 인간이 대학을 제대로 다녔다고 한들 전과를 했다면 비리가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12] 실제로 학창 시절에 자기만의 삶이 없었거나 원하던 삶을 살지 못했을수록 성인이 되어 머리도 커지고 넓은 세상을 알게 되어 부모의 지배에 잘 휘둘리지 않게 되면 보상심리와 늦바람으로 인해 학업을 게을리하고 유흥에 빠져 사는 경향이 있는 편이다.[13] 박한상이 유학 보내 달라고 아버지를 졸라서 미국으로 도피유학을 가게 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실제로는 박한상이 졸라서가 아니라 복학을 포기하자 다른 공부라도 하라는 의미에서 보낸 것이었다.[14] 박한상의 부모는 장남인 박한상을 기본적으로 편애했는데 특히 아버지는 장남을 더 많이 편애하면서 키웠고 당연히 장남이 한의사가 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박한상은 학업에 관심이 없었고 유흥에 중독되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이런 장남한테 실망도 컸을 것이다. 반대로 차남인 박영상은 차별대우를 받으면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학업에 열심히 임했고 공부도 굉장히 잘했다. 그런데도 차남은 계속 차별받고 자라다가 한의대에 입학하게 되면서 부모의 사랑이 자연히 차남한테 향함에 따라 박한상은 결국 아버지한테 구박과 미움만 받는 신세가 된 것이다. 거기다가 차남 또한 최대 피해자다. 부모한테 차별받고 자란 것, 결정적으로 형이 자신의 부모를 살해한 것까지...[15] 정황상 낙태되었을 확률이 높지만 만약 태어났다면 이 아이가 박한상의 유일한 (생물학적) 자녀가 된다.[16] 원금 2,000만원. 아마 1,700만원의 이자를 포함한 액수일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이정도 액수면 국산 최고급 승용차 그랜저 2세대 3.0을 사고도 남을 금액이었고, 물가상승율 고려 시 2022년 기준으로 약 8천만 원 상당의 금액이다.[17] 1994년 기준으로, 2023년으로 치면 1만 달러를 조금 넘기는 금액이다. 하루만에 도박으로 1천만 원을 넘게 잃은 셈.[18] 기억해야 할 것은 아버지는 분명 박한상에게 차를 살 돈을 이미 줬다는 것이다. 정작 본인이 사려는 차는 안 사고 그 돈을 전부 노름질로 날리고는 이런 천인공노할 범행을 계획했다.[19] 당시만 해도 '개근상이 우등상보다 낫다'는 사회적 통념이 있었다. 우등상은 시험 전날 벼락치기로 좋은 점수를 받을 여지가 있지만 개근상은 재학기간 중 단 한 번의 결석, 지각, 조퇴, 결과(缺課)도 있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몸이 아픈 것을 억지로 참고 학교에 등교하는 사례가 많았고 일부는 성인이 되어서도 이게 버릇이 되어 심한 경우 지병을 안고 있음에도 출근 등을 하다가 병세가 악화되거나 돌연사 등으로 목숨까지 잃는 경우가 있었을 정도다. 2020년대 들어서는 코로나19 사태로 부모들이 자녀의 건강과 안전에 더욱 신경쓰게 되어 개근을 그렇게까지 중요시하지는 않게 되었다. 오히려 개근을 하면 '개근거지' 등의 별명이 붙을 정도.[20] 박한상의 외삼촌이 당시 인터뷰에서 언급했다.[21] 황산성은 훗날 이은석도 변호했는데 박한상을 변호했을 때와 반대로 끝까지 수임하였다.[22] 1심 재판을 맡은 김황식 부장판사는 선고 공판에서 사형을 선고하며 "사형을 피할 명분을 찾기 위해 고심했으나 찾을 수 있는 명분이라곤 고작 피고인의 부모가 살아 있을 경우 아들의 사형을 원치 않을 것이란 추측뿐이었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23] 일반적인 무기징역은 최소 20년 이상의 형기를 살고 경우에 따라 가석방 심사 대상이 되지만 사형수는 제외되는데 실제로 장대호가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24] 민법 제1004조(상속인의 결격사유)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는 상속인이 되지 못한다. 1. 고의로 직계존속, 피상속인, 그 배우자 또는 상속의 선순위나 동순위에 있는 자를 살해하거나 살해하려 한 자 (이하생략). 호주제가 있던 시절에는 호주 상속도 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장남이라고 하더라도.(당시 민법 992조) 가족 성원으로서의 자격을 완전 박탈하는 것. 비슷한 사건이 연고자가 거의 없는 남자와 사실혼한 상태에서 몰래 혼인신고를 하고 내연남과 짜고 남자를 살해한 후 재산을 가로채려 한 남양주 니코틴 살인사건인데 범인이 체포된 뒤 유산은 조카에게 상속되었다.[25] 이건 박한상이 착각한 것이다. 민법 상 존속살인자는 상속 대상에서 자동 제외된다. 즉 부모의 유산 중 그의 몫은 한푼도 없다.[26] 만약 출소로 나간다 한들, 이미 지인이나 친척, 동생, 연인을 비롯해 관계를 맺은 사람들과 모조리 연이 끊어졌으니 감싸줄 이는 아무도 없다. 거기다가 본인의 범행과 신상이 만천하에 다 드러났으니 사회적 매장을 당해 얼굴도 못 들고 다닐 확률만 더 높아질 뿐이다.[27] 인터넷에 떠도는 사형수 근황은 이런 식으로 언론에 정식으로 공개된 것이 아니면 철저하게 가려 듣는 게 필요하다. 보통 출처가 사형수 동을 맡는 교도관이 그랬다 카더라인데 사형수 동에 배치되는 교도관들은 은퇴한 이후라도 사형수들의 근황에 대해 절대 함구하도록 서약서를 쓰며 굳이 서약 때문이 아니더라도 심리적으로 사형수 동에 근무했던 일 자체를 몹시 꺼림칙하게 여기기 때문에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28] 당장 박한상의 부모는 상술했듯 박한상이 애초부터 공부에 의욕도 소질도 없고 진로도 한의학이 아닌 자동차 튜닝 쪽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박한상이 한의대에 갈 생각도 없고 그릇이 못 된다는 것을 정말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그런 현실을 인정하지 못한 것인지 자동차 튜닝으로 진로를 정하는 것을 반대한 데다 박한상이 지방대 토목학과에 입학하자 한의대로 편입시키는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다만 당시 사회는 2020년대 이후보다 훨씬 더 가부장적 가치관이 강해서 장남에게 가업을 물려줄 필요가 크다는 의견이 암묵적으로 통했다.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본인의 영어 실력이 부족함을 알면서도 미국 유학을 가고 그곳에서 도박에 빠져서 빚을 남긴 건 그냥 이 인간이 개차반이라는 것이다.[29] 박한상의 부모가 박한상에게 결정적으로 실망하고 부친이 호적을 파겠다고 폭언을 한 이유는 박한상의 학업 문제가 아니라 박한상이 사채를 써서 빚을 져 가면서까지 유흥과 사치, 도박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 유학 도중 지원을 끊겠다고 하여 박한상을 반강제로 귀국시킨 것도 친척에게 사채를 쓴 것이 들켰기 때문.[30] 카드빚을 갚아 주기를 거부한 가족들을 살해하기로 결정하고 어머니와 할머니를 살해했고 아버지와 형도 살해하려다가 실패했으며 역시 사형을 선고받고 현재도 수감 중이다. 다만 이쪽은 흙수저 집안이다.[31] 재산을 노리고 노인과 부모를 살해한 형제 살인범. 둘 다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32] 주인공의 캐릭터는 박한상에 유영철을 더한 이미지로 설정되었다.[33] 2000년에 일어나긴 했지만 가정불화로 인한 범행동기를 인정받은 이은석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