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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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95년 12월 26일
전라북도 전주군 이동면 노송리
사망
1950년 10월 27일
전라북도 전주군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박태련은 1895년 12월 26일 전랍구도 전주군 이동면 노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무렵 신흥학교에 재학하고 있었다. 그러던 1919년 3월 동창생 최종삼(崔宗三)·유병민(劉秉敏)·김한순(金漢淳)·함의선(咸義善) 등과 침식을 같이 하면서, 신흥학교 지하실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등사하였다. 이들은 3월 13일 전주 장날에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거사 예정일이 다가오자, 시위계획을 미리 눈치챈 일본 경찰·헌병은 더욱 삼엄한 경계를 하였다. 3월 13일 정오, 기독교도·천도교도·학생이 중심이 된 1백 50여명의 시위군중이 공립제2보통학교에 모이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대화동(大和洞)을 거쳐 우편국까지 시위행진하였다. 그러나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경찰과 우체국 앞에서 대치했다.

이때 군중이 저항하자, 일본경찰, 헌병대는 총검을 휘둘러 시위군중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주동자를 체포했다. 이때 박태련은 체포되었고, 1919년 8월 2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에 불복해 공소했고, 1919년 9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으로 감형되었다.# 이에 다시 상고하였고, 1919년 10월 30일 고등법원은 사건을 경성복심법원으로 이송했다.# 1919년 11월 28일, 경성복심법원은 징역 8개월, 2년간 집행유예를 선고하였고, 박태련은 석방되었다.#

이후 전주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0년 10월 2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박태련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