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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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98년 11월 6일
충청북도 당진군 당진면 읍내리
사망
1950년 7월 20일
충청북도 당진군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박쾌인은 1898년 11월 6일 충청북도 당진군 당진면 읍내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무렵 경성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하고 있었으며, 매월 아버지로부터 15원을 송금받으며 경성 송현동 56번지에서 하숙하고 있었다. 그러던 1919년 2월 10일, 장채극이 그를 찾아와 다음과 같이 설득했다.

“요즘 파리 강화담판에서 민족자결주의가 주창되고 있으며, 여하한 약소국이라도 독립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신문지상에도 나오고 있으니 그것을 믿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시위운동을 하고 독립을 하지 않으면 안 되니 거기에 참가하는 것이 필요하다”


박쾌인은 이에 공감하여 독립선언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극평, 박노영, 강기덕, 김백평(金栢坪) 등과 함께 동교생들을 규합하였다. 여기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대표 김원벽, 경성의학전문학교 대표 한위건 등과 만나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민족대표 33인이 준비하는 독립선언과는 별도로 독립선언 및 시위를 준비했다.

그러던 중 박희도로부터 학생들이 단독으로 독립선언 및 시위를 벌이지 말고 함께 독립운동을 하자는 제안을 받았고, 박쾌인 등 학생들은 흔쾌히 수락했다. 이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발발한 시위에 참여하여 독립선언서를 경성 시내에 배포했다. 이후 아버지의 권고로 귀향했으나, 다음달에 체포되어 경성으로 소환되었다.

조선총독부 신문조서에 따르면, 박쾌인은 "독립선언을 하고 만세를 부르면서 다니는 것이 독립운동인가"라는 검사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당시 강화담판으로 민족자결주의가 창도되어 애란(愛蘭, 아일 랜드) 파란(波蘭, 폴란드)가 모두 그 주의에 의해 독립하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조선도 불쌍한 상태에 있으므로 심혈을 기울여 발표하면 강화회의에서도 이것을 인정해 줄 것으로 생각하고, 그 방법으로서 독립선언을 하고 만세를 부르며 독립의 희망을 발표하고 또 한편으로 시위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검사가 이어서 장래에도 독립운동을 할 작정이냐고 묻자, 그는 "장래 독립할 시기가 오면 또 운동할 작정이다."라고 답했다. 이후 재판에 기소된 그는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당진으로 귀향한 그의 행적은 불확실하다. 일각에서는 당진객사(당진공립보통학교)에서 학생들을 교육하다가 당진향교 명륜당으로 이동하여 다시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이를 입증할 기록이나 증언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일제 형사의 감시를 받으며 조용히 지냈던 것으로 추정된다.

2007년 7월 16일자 <매일경제> 기사에 북한에 거주하던 박쾌인의 아들 박명규가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했다는 내용이 기재되었다. 이 신청서에 따르면, 박쾌인은 3년 연하의 이기월과 결혼하여 4남 1녀를 두었으며, 박명규가 가족과 헤어지기 전 주소는 당진면 읍내리로 되어 있었다. 이는 박쾌인이 최소한 8.15 광복 이후까지 당진면 읍내리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쾌인은 1950년 7월 20일에 사망했고, 천주교 용인교원 묘소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박쾌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모교인 경기고등학교는 2007년 10월 2일 박쾌인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