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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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박창원2.jpg
본관
밀양 박씨
출생
1921년 10월 18일
경기도 경성부 남미창정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남창동)
사망
1998년 10월 28일
서울특별시
창씨명
新井昶遠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212실 108호
상훈
건국포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1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박창원은 1921년 10월 18일 경기도 경성부 남미창정(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남창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42년 5월 3,000명의 청년들과 함께 '군속'이라는 명목으로 연합군 포로감시원이 되었다. 부산에서 2개월간 훈련을 받은 1,400명의 한인 청년들은 1942년 9월 14일 인도네시아 자바의 딴중 쁘리옥(tanjon priok) 항에 도착하였다.

연합군 포로감시원으로 근무하던 박창원은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한인 동료들과 연합군을 돕는 항일운동 조직을 결성하기로 계획하였다. 한인 군속들은 1944년 12월 29일 세마랑(semarang)주 스모워노(sumowono) 교육대 취사장 뒤편에서 고려독립청년당(高麗獨立靑年黨)을 결성하였다. 고려독립청년당의 조직은 총령에 이억관, 군사부장에 김현재, 조직부장에 임헌근, 세마랑지구 책임자에 이상문, 암바라와 지부장에 손양섭, 암바라와 부지부장에 조규홍, 자카르타 지부장에 문학선, 자카르타 부지부장에 백문기가 선임되었고, 박창원은 반둥 지부장을 맡았다.

고려독립청년당 결성 이후 1945년 1월 4일 중부 자바 암바라와에서 당원 손양섭이 규합한 민영학, 노병한 등 세 명이 일본군, 군속, 어용상인 등을 사살하는 의거를 일으켰다. 암바라와 의거 후 일본군은 한인 군속들의 저항이 또 다시 일어날까 두려워 대규모의 전속을 실시하였다. 이때 고려독립청년당에서는 딴중 쁘리옥 항구에 정박 중인 수송선을 탈취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계획은 일본군에 발각되어 고려독립청년당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1945년 1월 28일 총령 이억관이 체포되었으며, 싱가포르에서 압송된 박창원 등은 5월 24일 군사법정에 송치되었다. 박창원은 1945년 7월 21일 자카르타의 일본군 제16군 군사 재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7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 일제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뒤인 9월 4일 석방되었다. 이후 귀국하여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98년 10월 2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박창원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2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212실 108호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