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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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응구(朴應九)
일본식 이름
아라이 구니마사(新井國正)
본관
밀양 박씨
생몰
1921년 4월 16일 ~ 1989년 7월 22일
출생지
충청남도 아산군 선장면 신동리[1]
사망지
충청남도 아산시
추서
건국포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박응구는 1921년 4월 16일 충청남도 아산군(현 아산시) 선장면 신동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갔고, 1939년 무렵 일본 나가사키현 이사하야시 소재 나가사키현립 이사하야농학교[2] 1학년에 재학했다. 그러던 중 선배인 이상만(李相晩)·박근철·심재인 등과 함께 민족정신을 고취하여 독립을 쟁취할 목적으로 '3인조 지하조직'을 결성하여 독립운동 지침과 지하조직 강령을 작성하고 조직원을 33명으로 정하였다.

1940년 4월 신입생 입학 자축회가 열리자 참석한 그는 신입생들을 상대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우리 조선학생은 조선인의 문화향상과 동포를 위해 공부해야 한다. (중략) 또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모멸은 그 원인이 조선문화가 열등한 데 있다. 그러나 만약 조선이 일본 식민지가 아니었다면 문화도 이와 같이 저열하지 않았을 것이고 오늘과 같은 차별적 모욕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나게 함이 가장 중요하다. 조선의 독립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조선인이 모름지기 조선인 정신을 견지하여 앙양함과 동시에 조선 독립을 목표로 서서히 시기가 도래하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


이후 그는 신입생들의 찬동을 얻고 독립운동 실행 방안에 대해 논의한 끝에 민지정책과 한인에 대한 민족차별정책, 창씨개명을 통한 민족혼 말살정책 등 일제정책을 규탄하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 함양과 유사시에 대비한 무술 연마와 지하운동 전개, 일본의 전쟁 수행에 불리한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인심 교란과 전의를 상실시킬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이 일이 발각되면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된 그는 조선으로 송환되었고, 경북 예천·영주·안동경찰서와 대구형무소에서 2년여 동안 수감되어 심한 고문을 받다가 1943년 5월 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제 형사의 감시를 받다 8.15 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고, 광복 후 한때 전남대학교와 도립 광주농과대학에서 강사로 활동하다가 국회 농림위원회 전문위원 등을 역임하고, 정치인으로 민정당 등에서 활동했다. 1989년 7월 22일 아산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박응구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1] 밀양 박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박준덕·박준욱·박태진도 이 마을 출신이다.[2] 현 나가사키현립 이사하야농업고등학교(長崎県立諫早農業高等学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