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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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주 방면 독립운동가, 박원식
2. 홍성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원식
3. 단천시 출신 독립운동가, 박원식
4. 구성시 출신 독립운동가, 박원식



1. 만주 방면 독립운동가, 박원식[편집]


성명
박원식(朴元植)
생몰
? ~ 1921년 2월 2일
출생지
미상
사망지
중국 봉천성 안동현 구연성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간한 <독립신문> 1921년 2월 25일자 기사에 따르면, 박원식은 중국 봉천성 구연성에서 보합단원(普合團員)으로 활동하던 중 1921년 2월 2일 구연성 부근 민가에서 유숙하다가 일제 경찰의 습격을 받고 분전했으나 끝내 전사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박원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 홍성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원식[편집]


파일:박원식.jpg
성명
박원식(朴源植)
생몰
1893년 8월 6일 ~ 1955년 10월 20일
출생지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사망지
서울특별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박원식은 1893년 8월 6일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보광학교(普光學校)를 졸업 후 조치원청년회 회장으로 청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3.1 운동 때는 홍천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3.1 운동 직후에는 비밀결사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에 가입하여 제2회 독립만세 시위계획에 참가하였다.

3.1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던 상황에서 전협·최익환(崔益煥) 등이 주도하여 결성한 조선민족대동단은 조선 독립을 위하여 먼저 민족 대단결을 목표로 민족사회의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망라한 조직을 구상했다. 또한 그들은 의친왕의 상하이 망명을 계획·추진하는 한편 3·1운동 때와 같은 만세시위를 일으키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이 때 박원식은 조선민족대동단의 단원으로 만세시위 계획의 실무를 맡았다. 그는 나창헌·안교일 등과 함께 만세시위에 사용할 격문 인쇄 및 배포의 책임을 맡았으며, 거사 당일에 만세시위를 선도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제1차 계획은 거사 당일날 운동원간의 약속에 차질이 생겨 예정대로 만세시위를 벌이지 못하였는데, 이에 그는 이신애·정규식(鄭奎植)[1] 등과 함께 재차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11월 28일 안국동 광장에서 미리 준비해 간 태극기와 '조선독립 만세'라고 쓴 깃발을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붙잡혔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1921년 3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죄 처벌령·출판법·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3년 조선일보 홍성지국장으로 있으면서 농민들을 대상으로 한 문맹퇴치운동과 학생들의 항일의식 고취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1925년에는 광천노동조합(廣川勞動組合)과 광천청년회·광천소년회 등의 조직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9년 11월의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1930년 2월 홍성에서도 홍성공립공업전수학교 학생들에 의해 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 그런데 이 일이 일경에 의해 탐지되면서 10여 명의 학생이 붙잡혔을 때, 그는 일경의 무리한 언사와 탄압에 항의하다가 일경의 불법적 직권남용에 의해 소위 경찰범처벌규칙 위반이라는 명목으로 구류 25일을 받았다. 한편 그는 1930년 11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전개했다. 신간회가 해소된 후에는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5년 10월 2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박원식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2012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3. 단천시 출신 독립운동가, 박원식[편집]


성명
박원식(朴元植)
생몰
1885년 12월 20일 ~ 1927년
출생지
함경남도 단천군 하다면 송파리
사망지
함경남도 단천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박원식은 1885년 12월 20일 함경남도 단천군 하다면 송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천도교 신자로, 1919년 3월 10일 교조 최제우의 순도기념일(殉道記念日)을 거사일로 정하고 그날 천도교 신자들과 함께 단천군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날 3백 명의 신도들이 천도교당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다음,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위행진에 돌입하였다. 이 시위로 헌병대에 의해 7명이 한꺼번에 희생당하고 142명이 체포되었다.

다음날인 11일에도 만세시위가 일어나 헌병대와 군청을 공격하여 유혈 충돌이 빚어졌다. 또한 22일에 단천군민 500여 명이 다시 헌병대를 공격하였다. 군중은 동포에게 총질한 헌병의 만행을 규탄하고 투석을 시작하였다. 이에 헌병들은 또 군중을 향하여 총질을 하였다. 이 총격으로 8명의 군중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2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후 체포된 박원식은 1919년 5월 23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소요 등으로 징역 8월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8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그는 다시 상고하였으나 10월 1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단천에서 조용히 지내다 1927년경 사망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박원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4. 구성시 출신 독립운동가, 박원식[편집]


성명
박원식(朴元植)
생몰
1882년 ~ ?
출생지
평안북도 구성군 구성면 여구리
사망지
미상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박원식은 1882년생이며 평안북도 구성시 구성면 여구리 출신이다. 그는 1919년 3월 31일 구성군 남문 밖 시장에서 발발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체포된 뒤 1919년 9월 15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박원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정규식과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