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근(1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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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용근(朴龍根)
생몰
1883년 7월 3일 ~ 1940년 8월 5일
출생지
경상남도 진주시 비봉동
사망지
경상남도 진주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박용근은 1883년 7월 3일 경상남도 진주시 비봉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0년부터 서당에서 천자문, 명심보감, 논어, 맹자, 대학을 배웠고, 1906년에는 사립 봉양학교(鳳陽學校)를 졸업했다. 1919년 3월, 그는 전국적으로 3.1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강우·김재화(金在華)·강달영(姜達永)·박진환·권채근·강상호 등과 만나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3월 10일경,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제작하여 비밀리에 배부하였다.

이 사실을 눈치챈 일본군경은 삼엄한 경계를 하며 각 학교에 임시 휴교령을 내리고 타지방에 사는 학생들에게는 여비까지 주어가며 귀향시키는 한편, 일본인 교사들로 하여금 학생들을 정탐하도록 지시하였다. 이같은 상황에서도 그는 다른 동지들과 함께 조직을 확대시켜 나가면서, 광림학교(光林學校)의 악대원으로 활동하다가 졸업한 천명옥(千命玉)·박성오(朴星午)[1]·김영조(金永祚)·이영규(李永圭) 등에게 시위행진 때의 주악을 부탁하였다.

3월 18일 오후 1시경, 이영규가 비봉산(飛鳳山)에 올라가 불어대는 나팔소리를 신호로 3개지역에 분산되어져 있던 시위대열은 악대를 선두로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하였다. 사태의 절박함을 느낀 일제는 헌병과 경찰력만으로는 이를 저지할 수 없자 소방대까지 출동시켜 물감과 오물을 뿌리며 곤봉으로 시위군중들을 난타하였다.

오후 4시경 이같은 일제의 폭력제지도 물리치고 경상도청 앞에 모인 시위군중은 3만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저녁 무렵에 일제는 옷에 물감이 묻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검거작업을 시작하였다. 이때 3백여명이 체포되었는데, 결국 박용근도 함께 체포되었으며, 1919년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요시찰인으로 지정되어 일제 형사들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한민족의 민속문화를 연구했으며, 진주도청 이전을 반대하는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40년 8월 5일 진주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박용근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2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박성오와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