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법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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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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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Only_logo_of_the_Prosecution_Service_of_Korea.png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
2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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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대
박영수


26대
이귀남







제36대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
박영수
朴英洙 | Park Young-soo


파일:박영수.jpg

출생
1952년 2월 15일 (72세)
전라남도 목포시[1]
현재지
경기도 의왕시 포일동 서울구치소
학력
동성고등학교 (졸업 / 45회)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종교학 / 학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법학 / 석사과정 수료)
단국대학교 대학원 (특수법무학 / 박사)
신분
미결수 (2023년 8월 3일 ~ 현재)
가족
배우자 오영희, 슬하 1남 1녀
경력
서울지방검찰청 부장검사
대검찰청 공안기획관
국민의 정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실 사정비서관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대전고등검찰청 검사장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
우리금융지주 이사회 의장
건국대학교 대학원 석좌교수
화천대유자산관리 상임고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특별검사
링크
블로그

1. 개요
2. 약력
3. 생애
3.1. 검사
3.2. 검사 퇴임 이후
3.3. 특별검사
3.4. 구속
4. 논란 및 사건사고
5.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검사 출신 변호사(사법시험 20회, 사법연수원 10기). 박명효 초대 북제주군수(초대 제주읍장도 역임)의 손자이고, 목포 지역의 향판(鄕判)으로 유명한 고(故) 박창택 변호사의 아들이다.

김대중 정부 때, 목포 출신 박지원과의 인연으로 발탁되어 청와대 사정비서관을 지냈다. 이후 노무현 정부 때 더욱 중용되어 대검 중수부장과 서울고검장 등 검찰의 핵심 요직을 두루 거치며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당시 노무현 정권 및 집권 열린우리당이 추진하던 재벌개혁에 앞장서며 SK, 현대 등 재벌 수사를 지휘하여 '재계의 저승사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수사 도중 자살하자 임채진 검찰총장이 과잉수사의 책임을 지고 사직하고 후임으로 후배인 김준규가 검찰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이에 관례에 따라 박영수도 검찰을 사직하고 변호사가 되어 법무법인 강남 대표변호사를 역임했다.

검찰 퇴임 직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들이 연루된 박연차 게이트 사건의 변호를 맡아 친노의 핵심인물로 부상하며 큰 주목을 받았다.[2] 2013년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세빛섬 사업에 대한 배임 의혹을 제기하며 검찰 수사를 의뢰했으나, 2015년 무혐의 판결되었다. 2016년 박지원의 추천으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특별검사로 임명되어 다시 한번 국민들의 큰 주목을 받았으나, 포항 가짜 수산업자 사기 사건에 연루된 의혹이 불거지자 사퇴했다. 이후 대장동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한번 구설수에 오르게 되었다.

과거 SK 최태원 회장, 현대차 정몽구 회장, 삼성 이재용 부회장, 롯데 신동빈 회장 등 국내 톱 재벌그룹들의 비리를 수사하며 재벌저승사자로 명성을 떨치며 큰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자 이번에는 박연차 게이트의 변호를 맡으며 기업인의 비리를 변론하는 반대 입장에 서게 되었다. 훗날 수산업자 사기사건, 대장동 사건 등 여러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수사를 받았다.


2. 약력[편집]




3. 생애[편집]


전라남도 목포시에서 태어나 자랐으나, 학창 시절 서울로 유학하였다. 중학생 시절에는 당시 종로에 있던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 휘문고 등 명문고에는 낙방하고 혜화동에 있는 동성고에 진학, 졸업하였다.

1971년 동성고 졸업 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종교학과에 진학, 1975년 졸업하였다. 서울대학교 졸업 후 고려대학교 대학원 법학과에 진학하여 1978년 수료하였다.

1978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3.1. 검사[편집]


수원지방검찰청에 있을 때,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의 주임검사로서 수사를 지휘하였다.

1990년대 후반에는 강력 및 특수 검사로 조폭들을 소탕했다.

2001년 6월, 김대중 정부청와대 민정수석실 사정비서관으로 발탁되었다. 목포에서 향판 출신 변호사로 유명한 아버지 박창택과 DJ 정권의 실세인 목포 출신 박지원과의 친분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2002년 2월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 그는 정권의 지원을 받아 요직에서 고속 승진을 거듭하며 노무현 정부의 핵심 의제였던 재벌개혁을 앞장서서 진두 지휘했다. 노무현 정부 출범 직후 서울지검 2차장에 임명되었고 1년만인 2003년 3월 서울중앙지검 제2차장이 되었다. 이시절 SK그룹 글로벌 분식회계 사태 수사를 지휘하여 최태원 회장을 수사하여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후 2004년 6월 서울고등검찰청 차장검사가 되더니 1년이 채 지나기도 전인 2005년 4월 검찰의 꽃인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대검 중수부장)에 임명되었다. 대검 중수부장 시절인 2006년에는 현대자동차그룹 비자금 수사를 지휘하여 정몽구 회장을 구속 기소하면서 다시 한번 '재계의 저승사자'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였다.[3]

이후 노무현 정권 말기에도 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2007년 4월 대전고등검찰청 검사장이 되었고, 반년만인 2007년 11월 검찰의 핵심 요직인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이 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하면서 과잉수사의 책임을 지고 임채진 검찰총장이 사직하고 후배인 김준규가 검찰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이에 관례에 따라 퇴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박영수는 퇴임사에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핵심 인사였던 자신이 이명박 정부의 압박에 의해 퇴진한다는 뉘앙스로 말했다. 2009년 1월 1일자 한겨레. 이는 언론에 대서특필되어 민주당 지지자들이 인터넷상에서 이명박 정부를 맹비난하는 등 엄청난 후폭풍이 일었다. 이 사건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과 맞물려 출범한지 얼마 되지 않은 이명박 정부의 지지율이 떨어지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당시 사분오열되어 있던 친노 세력들이 화력을 모아 이명박 정부를 맹비난하며 재결집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


3.2. 검사 퇴임 이후[편집]


검사 퇴임 직후 노무현 전 대통령 일가와 측근이 연루되었던 박연차 게이트 때,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변호인을 담당했다. 이에 친노 세력과 민주당의 비호를, 한나라당의 견제를 동시에 받게 되었다.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이 10% 미만의 저조한 지지율로 퇴임한 직후라, 이해찬, 유시민 등 과거 친노 핵심들조차 열린우리당을 탈당하고 노무현을 직간접 비판하는 등 노무현과 거리두기를 시전하며 독자 생존을 모색하고 있을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박영수가 박연차 게이트의 변호를 맡자 친노 지지자들의 전폭적인 성원을 받았다. 이후, 한동안 노무현과 거리두기를 시전하던 정치인들이 노무현 추모 분위기를 조성하며 다시 결집하는데 한 역할을 했다.

2013년 2월, 지방자치단체 세금 낭비 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면서 서울특별시 세빛둥둥섬 사업과 관련하여 오세훈서울특별시장 등 12명을 대한민국 검찰청에 수사 의뢰, 7000여억 원이 투입된 용인경전철 사업에 대해 주민감사를 청구했다. 이로 인해 민주당 지지자들은 오세훈 전 시장의 혐의에 대해 맹비난을 쏟아냈고 오세훈 전 시장은 비리 정치인으로 비난받았다. 하지만 2015년 2월 법원은 오세훈 전 시장에 대해 무혐의 판결을 내렸다.

2013년 2월 25일, 우리금융지주 이사회에서 사외이사에 선임되었다. #

2014년 3월 24일, 우리금융지주 이사회 의장에 취임했다. #

2014년 11월 3일, 기존에 우리금융지주와 우리은행 이사회가 분리되어 있었으나 두 이사회가 통합하게 되었고, 박영수 우리금융지주 이사회 의장이 새로 통합된 우리은행 통합이사회 의장에 취임했다. #

2014년 11월, 제48대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2015년 2월 실시된 선거에서 낙선하였다. 훗날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 핵심 인물들이 박영수의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선거를 계기로 만나 의기투합하게 된 것으로 보도되었다. 남욱, 조현성 변호사 등이 당시 박영수 캠프 멤버였다고 보도되었다. 남욱, 조현성 변호사는 이전에 박영수와 한 법무법인에서 한솥밥을 먹기도 했다. 또 김만배 전 기자도 이때 박영수 캠프의 선거를 도왔다고 한다. # 대장동 비자금이 박영수 선거 자금으로 쓰였다는 기사도 나왔다. #

2015년 6월 10일 열린 황교안의 국회 인사청문회에 참고인으로 나온 박영수는 "황 후보자는 소신형으로 본인의 소신이 뚜렷하면서도 지나치게 자기를 내세우지 않아 (검찰) 조직 내에서 상하 간 신망이 두터웠다"라고 밝혔다. 이어 "황 후보자는 또 업무에 있어 꼼꼼하고 언행이 무겁고 신중했다"라며 "또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누구나 일을 맡기고 싶어 했사람"이라고 추켜올렸다. # 박영수는 황 후보자와 인연에 대해 "검찰에 30년 가까이 있으면서 저랑 가장 많이 근무했고 가까운 사이"라며 "부산 동부지청장 재직 시, 또 서울 고검 차장 검사 시절 함께 일했다"라고 밝혔다. 박영수는 또 황 후보자가 검찰에서 퇴직한 후 "법무법인 태평양에 근무하도록 소개했다"는 점도 공개했다. 박영수는 "황 후보자는 대단한 노력형으로 매사에 주어진 현안에 대해 끝까지 진상을 파악하려는 노력이 돋보였다"라며 "황 후보가 색소폰 연주를 하는데 사실 부산 동부지청장 시절 제 권유로 배우기 시작했다, 저는 아직도 잘 못하는데 황 후보자는 (실력이 대단하다)"라고 설명했다. # 김제식 새누리당 의원이 '황 후보자가 국무총리직을 잘 수행할 수 있다고 보느냐'라고 묻자, 박영수는 "황 후보자가 주로 법무 분야에 근무해서 경제·국방 분야에서 전문성은 약할 것"이라면서 "하지만 평소 노력하는 모습, 대화하는 모습을 볼 때 부처 장관과 국회와 두루 협력하면서 부드럽게 업무를 수행할 적합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2015년 6월 17일 자정 무렵에 사무실에서 퇴근하던 도중 서울 도심의 길거리에서 과거 소송결과에 불만을 품은 상대편 당사자에 의해 흉기로 습격을 당했다.# 문제의 인물은 결국 살인미수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2016년 11월 30일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로 임명되었다.


3.3. 특별검사[편집]


국민의당 박지원 비대위원장이 특별검사로 적극 추천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함께 일한 인연 덕분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황교안, 우병우와도 친분이 있는 사이인 것이 알려지면서, 특검 후보로서의 공정성이 의심하는 한편, 국민의당의 후보 추천에 특검을 약화시키거나 주도적으로 좌우하겠다는 의도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음모론이 트위터를 비롯한 SNS상 일어났다. # 특히 당시엔 박지원-김무성-박근혜 3각동맹 음모론이 성했기 때문에 민주당에서 추천한 전 대검 형사부장 조승식은 껄끄러워서 거부하고 박영수를 특별검사를 생각도 안 하고 선택했다는 소문이 돌았다.[4][5]

취임 시 인터뷰에서 세월호 7시간 등에 대해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고 밝혔고 12월 1일 일각의 생각과 달리 수사팀장으로 당시 대전고검 검사였던 윤석열 대통령을 임명하였고 # 조윤선 전 장관, 김기춘 전 비서실장 등의 정부인사와 삼성 이재용 부회장을 구속하였다. 그러나 우병우 전 민정수석을 구속하는 데 실패하였다.

사기꾼 김태우로부터 대게, 과메기, 포르쉐 차량을 제공 받았다는 의혹으로 특별검사로 임명된지 5년만에 특검 사의를 표명했다.


3.4. 구속[편집]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1부(엄희준 부장검사)는 2023년 8월 21일 박영수 전 특검을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수재, 청탁금지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 했다. 검찰에 따르면 박 전 특검은 2014∼2015년 우리은행의 사외이사 겸 이사회 의장, 감사위원으로 재직하면서 대장동 개발사업과 관련해 남욱 씨 등 민간업자들의 컨소시엄 관련 청탁을 들어주는 대가로 200억원 등을 약속받고 8억원을 수수한 혐의를 받는다.딸 박모씨를 통해 2019년 9월∼2021년 2월 5차례에 걸쳐 김만배 씨가 대주주인 화천대유자산관리에서 '단기 대여금' 명목으로 11억원을 받은 혐의도 있다. #


4. 논란 및 사건사고[편집]



4.1. 흉기 피습 사건[편집]


박영수는 법무법인 강남 대표변호사 시절인 2015년 6월 16일, 사무실 앞에서 자신이 맡고 있는 사건의 상대방 피고인에게 흉기로 피습을 당했다. 얼굴과 목을 10cm가량 칼에 베이는 중상을 입었으나 바로 서울성모병원으로 후송되었고 다행히 경동맥과 신경을 다치지 않아 며칠만에 퇴원했다.

범인 이모씨는 2009년 자신이 고소한 ‘슬롯머신 대부’ 정모씨가 무혐의 판결을 받자, 그의 대리인을 맡았던 박영수에게 앙심을 품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전해졌다. 사건 당시 이씨는 법무법인 사무실 주위를 맴돌다 퇴근하는 박영수를 칼로 위협했다. 박영수는 "말로 하자"며 이씨를 설득해 칼을 내려놓게 했고, 1시간 넘게 이씨와 대화를 나눴다. 이후 박영수가 “문제 삼지 않을 테니 돌아가라”고 설득하자 이씨는 "내 칼을 돌려달라"고 했고, 함께 있던 박영수의 운전기사가 칼을 되돌려주러 차로 간 사이 다른 커터 칼을 꺼내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이씨는 범행 직후 도망했다가 이튿날인 17일 새벽 경찰에 자수했다. 하지만 이씨는 경찰 조사에서 횡설수설하면서 진술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조사 과정에서도 자해를 해 박영수가 후송되었던 같은 병원 응급실로 후송돼 치료를 받기도 했다. 이씨는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되었고, 이후 재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한편 대한변호사협회에서는 사건 직후 "사건의 당사자가 상대방 변호인의 생명과 신체를 공격하는 사적 보복행위는 사법체계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이자 법치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는 규탄 성명을 냈다. #


4.2. 가짜 수산업자 금품 수수 의혹[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포항 가짜 수산업자 사기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수산업자를 자칭하여 110억여원을 편취한 사기꾼 김태우(43·수감 중)가 검찰 및 경찰 간부 등에 한 금품 로비 의혹에 수사가 벌어지던 중, 박영수에게 김 씨가 고급 수산물[6]포르쉐 차량을 제공했다는 의혹이 알려졌다. # 이 사건으로 특검 사의를 표명했다. #


4.2.1. 재판[편집]



4.2.1.1. 1심 서울중앙지방법원[편집]

  • 사건번호: 서울중앙지방법원 2022고합903
  • 재판부: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재판장 김동현)


박영수 전 특별검사가 첫 공판준비기일에서 “특검은 공직자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혐의를 모두 부인했다.#

첫 공판기일에서 박 전 특검과 함께 기소된 이모 부부장 검사, 기자 엄모 씨, 이모 씨 등도 공소사실을 부인했다. 이들은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검찰 측 증거들이 위법수집증거에 해당해 증거능력이 없다고 주장했다.법률신문

박영수와 조선·중앙 출신 언론인들 피고인석에...뇌물 혐의 전면부인

4.3. 대장동 화천대유 사건 연루 의혹[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대장동 개발 사업 논란/쟁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대장동 개발 사업 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정영학 녹취록 공개 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만배 녹취록 공개 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21년 9월, 이재명 아들에 대한 화천대유자산관리(이하 화천대유) 계열사 취직 의혹 제기 해프닝[7]을 시작으로 점차 대장동 개발과 관련된 특혜가 거론되면서 언론들이 화천대유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박영수는 2016년에 화천대유의 상임고문으로 활동했으며 회계사인 딸도 화천대유에 입사했단 것이 밝혀졌다. 딸의 퇴직금 금액에 대해서도 훗날 확인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다. 박영수는 사장의 요청으로 고문에 올랐으나 특검이 된 뒤엔 사임했으며, 딸은 전문성을 인정받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

2021년 9월 박영수의 딸이 화천대유자산관리에서 보유한 대장지구의 7억대 아파트를 분양받은 것으로 드러나 특혜 분양 의혹이 커지고 있다. #

또한 곽상도 의원의 아들의 화천대유 퇴직금 50억 논란이 불거진 가운데, 국민의힘 박수영 의원이 폭로한 이른바 50억 클럽의 일원으로 박영수도 거론되고 있다. 이에 대해 박영수 측은 사실무근이라며 반박했다. #

2022년 2월 박영수의 딸이 화천대유자산관리에서 11억 원을 받은 걸로 드러났다. 경기 성남시 대장동 민간개발사업자인 화천대유자산관리(화천대유)에 근무 중인 박영수 전 특별검사의 딸 박모 씨가 최근 3년간 회사로부터 대여금 명목으로 11억 원의 거액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성과급과 대장동 아파트 분양 등을 합칠 경우 논란이 되는 금액은 최대 25억 원으로 추산된다.# 11억에 대해 박영수 측은 빌린 돈이라고 주장했다.#

경기남부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는 9월 2일 주택법 위반 혐의로 박 전 특검의 딸 박씨를 검찰에 송치했다고 5일 밝혔다.#


2023년 6월 26일 검찰은 구속영창을 청구했으나 동년 6월 30일 기각됐다.##

2023년 7월 31일 검찰은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동년 8월 3일 결국 구속됐다.##

2023년 8월 21일,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1부(부장검사 엄희준)는 박 전 특별검사를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수재, 청탁금지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했다. 측근인 양재식 전 특검보는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수재 혐의 등으로 불구속 기소했다.#


4.3.1. 재판[편집]



4.3.1.1. 1심 서울중앙지방법원[편집]

  • 사건번호 : 서울중앙지방법원 2023고합769
  • 재판부 :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김동현 부장판사)

8월 2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부장판사 김동현)는 9월 14일 오전 10시 첫 공판기일을 연다고 밝혔다.#

4.4. 부산저축은행 대장동 불법대출 부실수사 의혹[편집]







4.5. SG증권발 하한가 사태 법률자문[편집]


SG증권발 하한가 사태에서 해당 사건을 설계했다고 알려진 라덕연에게 법률 자문을 하고 6600만원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5. 여담[편집]



  • 황교안 국무총리에게 특검 임명장을 수여받을 때, 인사를 먼저 받았다.[8] 아무래도 검사 시절에 박영수 특검을 선배로 대하던 황교안 총리의 자연스런 습관 때문에 일어난 일인 것으로 보인다. 박 특검이 부산지검 동부지청장을 할 때에 황 총리가 차장검사였다고. 차장검사였던 황교안 검사에게 취미로 색소폰 연주를 권유했는데 지금도 황교안 본인의 취미가 되었다고 한다.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특검 경쟁후보였던 조승식 전 대검부장은 조폭들 사이에서 저승사자라 불릴 정도로 전설적인 인물이었던 사람이라 처음 특검 지명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박영수 특검의 지명을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 자유한국당 김진태 의원에 의하면 노무현 정권 시 '바다이야기'가 문제가 퍼지고 수사가 진행되었을 때 박영수가 중수부장으로 있을 당시 중수부가 그 사건의 수사권을 가져간 뒤 사건을 유야무야시켰다고 말해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김 의원의 말을 요약하면 자신이 대검 강력과장으로 있을 때 바다 이야기 사건 수사를 대검 중수부에서 사건을 빼앗아 와서 흐지부지 시켰고 그때 중수부장이 박영수다! 그리고 그 문제로 경대수 마약조사부장이 사표 던지고 나왔다! 라고 하는데 김 의원이 대검 과장으로 있었고 사건 당사자였다는 것과 박영수 특검이 대검 중수부장이라는 걸 제외하면 중수부의 개입과 마약조사부장의 사표 제출 문제는 논란이 있다. # 노컷 뉴스의 이 논란을 보도하며 팩트 체크와 관계자 취재를 하였는데 당시 사건축소가 아닌 전방위 수사를 위한 사건 이관, 당시 마약조사부장의 사표 제출도 수사권 가로채기와 관련 없는 마약조사부장과 검찰 수뇌부와의 트러블이 문제였다 라는 취재결과가 나왔다. 간단히 줄이면 그때 그 사람들이 그자리에 있었다는 걸 제외하면 사건을 흐지부지시켰다는 확실한 근거는 아직 안 나온 것이다.


  • 조선 후기에 조방장을 지낸 증조부 박경보가 구입했고 아버지인 박창택 변호사가 한때 거주했던 초가집이 제주시 삼도2동에 위치해 있다. 제주시내의 유일한 초가로 지금은 박영수 변호사의 작은어머니가 거주하고 있다.


[1] 고향세탁을 자주 했다. 제주특별자치도 출신으로 알고 있는 법조인들이 많았다. #[2] 당시 이해찬, 유시민 등 친노 핵심 인물들조차 선거 유세에서 노무현을 직간접 비판하며 노무현과 거리두기를 시전하고 있을 때였다.[3] 현대차 비자금 수사를 지휘 했을 때 그 아래의 수사기획관이 채동욱검찰총장, 중수1과장이 특검 임명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었던 최재경 수석이었다.[4] 하지만 강적들의 검사출신 강민구 패널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재벌이 대규모로 연루되어 있는 사건이기에 대기업 수사 전문가인 박영수 특검이 훨씬 더 나은 선택이라며 박 특검의 지명을 옹호했다. 어떻게 보면 박근혜는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판 것.[5] 인터넷 여론과는 별개로, 언론이나 정치판에선 넷상에 떠도는 '친분'이란 게 사실은 사시출신 법조인들이라면 기본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정도의 관계에 불과해 별 문제가 안 된다고 보는 편이었다. 일례로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권영철 대기자(당시는 선임기자)는 '일각에서는 박영수 특검 후보가 황교안이나 우병우와 친하다고 하지만 그런 식으로 치면 비사시 출신인 전 법사위원장 노회찬 의원이나(여담이지만 여기서 사시패스 만능주의가 잘못되었음이 잘 드러난다. 사시패스를 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노회찬 전 의원이 해 낸 의정활동 결과물은 그 어느 법조인 출신에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비주류이었기에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전직 판사였던 박범계 의원과도 그 정도 친분은 있다. 이런 수준 인맥까지 따져버리면 후보 추천조차도 불가능해진다'는 평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결과론적으로 볼 때, 그런 우려는 기우였음이 증명되었다.[6] 대게, 과메기를 3~4차례 보냈다고 한다.[7] 취직설은 사실무근으로, 조선일보는 9월 16일자 보도에서 박영수 관련 의혹에 기사 사용된 대장동 부지에 대한 사진에 ‘이재명 지사의 아들이 계열사에 취직해 있었다’는 등의 설명을 붙인 기사를 내보냈다가 이후 '이재명 지사 아들은 대장동 관련 회사에 취직하지 않았다'면서 이재명 지사와 독자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는 정정보도문을 게재하기도 했다. #[8] 박근혜 대통령이 수여해야 하지만 대구 서문시장 화재 현장 방문을 이유로 황교안 총리가 대신해서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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