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환(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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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承煥
1918년 ~ 1947년?/1948년?

대한민국의 전 군인이다. 박명근 전 국회의원의 숙부이다.

1918년 경기도 파주군 월롱면에서 대지주 박우용(朴禹鏞)의 2남으로 태어났다. 경성제2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여운형의 권고에 따라 1937년 만주국 봉천군관학교 제7기로 입학하여 우등졸업하였다. 졸업 후 만주군 기병장교로 근무하다 항공장교로 전과하여 봉천항공대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

1942년 봉천의 친일파 유지였던 김태덕(金泰德)의 2녀 김순자와 결혼하였는데, 이는 여운형홍사익 장군에게 부탁해 성사된 것으로 김태덕의 그늘을 빌려 박승환의 조직 활동을 엄호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1945년 4월 여운형의 지시로 중국 연안의 조선의용군과 협동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건국동맹 대표 자격으로 메시지를 지참하고 연안에 파견되어 김무정을 만나고 왔다.

일제 패망시의 국내 진공 계획에 따라 만주군 내의 조선인 장교들을 포섭하는 역할을 하였다. 일부에서는 박정희가 여운형-박승환계의 만주군내 비밀조직의 회원이었다는 식의 날조를 통해 박정희가 사실은 비밀독립군이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다만 술자리 등에서 접선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1] 비밀독립군이라고 할 만한 활동을 안해서 그렇지. 아무튼 박정희는 이때 비밀조직 인사들과 얼굴을 봐둔 덕분에, 그리고 좌익계 독립운동가인 형 박상희 덕분에 광복 이후 광복군에 구렁이 담타넘듯이 들어갈 수 있었다.

예상보다 빠른 일본의 항복으로 국내 진공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고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데 철로는 끊긴 상황이었다. 1945년 8월 17일 간노 히로시(菅野弘)[2]에게 비행기를 하나 내어달라고 부탁하여 최창륜, 방원철, 양국진 등 조선인 장교 7명을 태우고 서울로 돌아왔다.

1946년 여운형의 지시에 따라 최창륜, 박창암, 박임항, 방원철 등 만주군 출신 장교들과 함께 월북하여 김일성을 만나고 조선인민군 창설에 참여하였으나, 여운형 암살 이후 다른 동지들과 함께 숙청되어 감옥에서 옥사하였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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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주군 내에서도 조선계-중국계 장교들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다. 일본계에게는 쌀밥을 먹이면서 조선계나 중국계 생도나 장교들에게는 잡곡과 고구마를 배식하는 쪼잔한 짓을 했을 정도. 이렇다 보니 술자리 등에서 조선계 장교들이 불만을 토로하는 일도 잦았는데, 심지어 박정희는 "선배님들 이 노래 모르시죠?" 라면서 독립군가 가사를 불러재껴 아연실색하게 만든 일도 있었다.[2] 2.26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만주로 밀려온 일본인 교관으로 만주국육군군관학교 2기생 중대장을 맡았었다.[3] 이후 최창륜, 박창암, 박임항, 방원철 등은 다시 월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