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화

덤프버전 : r20210301



1. 고원군 출신 독립운동가
2. 의주군 출신 독립운동가



1. 고원군 출신 독립운동가[편집]


파일:박세화.jpg
성명
박세화(朴世和)
자 / 호
연길(年吉) / 의당(毅堂)
본관
밀양 박씨
생몰
1834년 ~ 1910년 8월 28일
출생지
함경남도 고원군 하발면 남흥리
사망지
충청북도 음성군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박세화는 1834년생이며 함경남도 고원군 하발면 남흥리 출신이다. 그는 묵재(默齋) 박경상(朴景祥)의 8세손으로, 아버지는 알려지지 않았고 어머니는 우씨(禹氏)이다. 그는 어려서 남보다 크게 뛰어나 9세에 소학(小學)을 읽었는데 스승이 "소학의 일을 이루다 실천할 수는 없는 일이다"라고 하자 크게 실망하고 다시는 그 스승을 섬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성현의 말씀을 몸소 실천하고자 노력했던 그는 일찍이 명성이 사방에 떨쳤다고 하며, 18세 때 서양의 문물이 조선에 흘러들어오는 것을 우려하여 위정척사할 것을 결의하고 신명(身命)을 다 바쳐 저지하고자 뜻을 세웠다.

일찍이 어머니 우씨의 병환이 심중하여졌을 때 손가락을 잘라 관혈(灌血)하여 회생시킨 적이 있었다. 10여 년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치상(致喪)을 정성껏 하여 병을 얻을 지경에 이르렀다. 1884년 갑신정변 소식을 듣고 태백산으로 들어갔으며, 1893년 조정에 추천되었지만 사양했고, 1895년 영릉참봉(英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해 8월 을미사변이 벌어지자 제자들을 거느리고 거애(擧哀)하였다.

이후 단발령이 발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에 가담하기로 결심하고 문생인 윤응선(尹應善)과 함께 문경(聞慶)의 산중으로 들어가 거의할 것을 계획했으며, 1896년 1월 유인석이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1896년 2월 윤응선을 보내 돕게 했다. 그러나 문경에서의 거사 계획이 적에게 노출되었고 박세화 자신 노환으로 성사시키지 못한 채 문경 병참소(兵站所)에 체포되었다.

그가 체포되자 문인 신현국(申鉉國)과 이수영(李秀榮)이 경찰서장에게 투서하여 스승의 거사가 대의(大義)에 합당한 것이었으니 석방시켜 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들이 경찰서를 크게 파괴하였는데, 이 일로 3개월간 구금되었다. 출소 후 자택에 은거하던 그는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윤응선과 함께 남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청풍에서 다시 체포되어 몇달간 옥고를 치렀다.

1910년 한일병합 소식을 접하자, 그는 길이 탄식했다.

“대명이 멸망한 후 천하에 임군이 없었고, 오로지 우리만이 동쪽에서 예의를 보존해 오면서 장래 좋은 일을 기대하여 왔다. 이제 나라가 망하게 되어 도(道)가 화(華, 小中華)와 더불어 망하게 될 터이니 장차 어찌 해야겠는가!”


그는 단식을 결심하고 다음과 같은 절명시를 지었다.

道亡吾奈何 도가 망했는데 내 어찌해야 하는가

仰天一慟哭 하늘을 우러러보고 한바탕 크게 통곡 하노라

自靖獻聖賢 자정하여 성현께 내 몸을 바치니

嗚呼君莫惑 오호라 그대는 미혹되지 말지어다.


그는 단식 23일째인 1910년 8월 28일에 충북 음성군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박세화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6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2. 의주군 출신 독립운동가[편집]


성명
박세화(朴世和)
생몰
1885년 12월 16일 ~ ?
출생지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 하강동
사망지
미상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박세화는 1885년 12월 16일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 하강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1 운동에 가담한 뒤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단(獨立團)에 가입하여 국내특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2년 정의부(正義府)원으로 국내로 들어와서 군자금 모집과 적기관 파괴를 여러 번 감행하였다. 1927년 7월부터 수개월간 장기천·최성준(崔成俊)·장병두(張炳斗)·김봉수(金奉秀)·최성춘(崔成椿) 등과 같이 평북일대에서 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8월에는 식산(殖産)은행 의주지점과 용만(龍灣)금융조합을 습격하여 수천원의 군자금을 확보했다.

그러나 추격해 온 일 경찰대와 치열한 사격전을 벌인 끝에 체포되고 말았고, 1927년 7월 1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은 언도받았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박세화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