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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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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대한민국의 남성 정치인
- 제13대 국회의원
- 제14대 국회의원
- 제15대 국회의원
- 제16대 국회의원
- 제18대 국회의원
- 평화민주당 국회의원
- 신민주연합당 국회의원
- 민주당(1991년) 국회의원
- 새정치국민회의 국회의원
-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
- 통합민주당(2008년) 국회의원
- 민주당(2008년) 국회의원
- 민주통합당 국회의원
- 고흥군 출신 인물
- 대한민국의 법조인
- 법조인 출신 정치인
- 1938년 출생
- 2015년 사망
- 새천년민주당 총재 및 대표
- 민주당(2005년) 대표
- 중도통합민주당 대표
- 민주당(2007년) 대표
- 통합민주당(2008년) 대표
- 새천년민주당 원내대표
- 광주고등학교(광주) 출신
- 서울대학교 출신
- 법무부 장관
- 밀양 박씨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정치인, 법조인.
독립유공자이자 문교부 차관을 지낸 성동준은 박상천의 외숙부이다.
2. 생애[편집]
1938년 10월 31일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면(現 고흥군 고흥읍) 서문리 64번지에서 아버지 박생순(朴生順)과 어머니 창녕 성씨 사이에서 5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흥유치원, 고흥동초등학교(39회), 고흥중학교(8회), 1957년 광주고등학교(6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박상천의 선조들은 조부 박종대(朴種大)의 대까지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에서 대대로 살아왔는데, 박종대의 대에 이르러 박상천의 아버지 박생순을 6년제 고흥공립보통학교(現 고흥동초등학교)에 진학시키기 위해 1928년 봄에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에서 고흥면 서문리로 이주했다.[3] 이후 아버지 박생순은 일본으로 건너가 주오대학을 졸업했다. 어머니 성씨는 경기도 경성부에서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재학 중이던 1961년 제13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고, 이듬해인 1962년 서울대학교 졸업 후 군법무관으로 대한민국 육군에 임관했다. 예편 후 1965년 광주지방법원 판사 및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 판사, 1966년 광주지방검찰청 검사, 1968년 광주지방검찰청 순천지청 검사, 1970년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1973년 부산지방검찰청 검사, 1974년 제주지방검찰청 검사, 1976년 대구지방검찰청 검사, 1978년 광주지방검찰청 검사, 1979년 서울지방검찰청 동부지청 검사를 거쳐 1981년 5월 1일부터 1982년 8월 15일까지 제19대 대전지방검찰청 강경지청장, 1982년 8월 16일부터 1983년 8월 16일까지 제23대 전주지방검찰청 정읍지청장, 1983년 8월 17일부터 1985년 3월 11일 제22대 전주지방검찰청 군산지청장, 1985년 3월 12일부터 1987년 6월 14일까지 제27대 광주지방검찰청 순천지청장 등을 역임했다.
이후 검사직에서 물러나 순천시에서 변호사를 개업해 활동했다. 1988년 초 평화민주당 김대중 총재의 재야 영입 케이스로 평화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그리고 그 해 치러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라남도 고흥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직 국회의원이던 민주정의당 이대순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90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및 고등고시 사법과 동기인 박희태 민주자유당 의원이 대변인으로 임명되고 자신도 평화민주당 대변인이 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해 민주자유당 지연태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제14대 국회 후반기 대한민국 국회 보건사회위원회(현 보건복지위원회) 상임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해 신한국당 최문휴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가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직후인 1998년 3월 3일부터 1999년 5월 23일까지 제47대 법무부장관을 겸직하였다. 법무부장관 임기가 끝난 뒤에는 새정치국민회의 원내총무에 선임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해 무소속 신금식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이 해 추석 귀경길 도중 정체된 차량들을 빠져나와 경찰 호위를 받으며 도로를 역주행하여 논란이 되었다.출처 이후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원내총무를 역임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무현 후보와 대립하였다. 박관용 회고록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이 박상천과 정균환 이름만 들어도 질색'했을 정도였다고. 출처 이로 인해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전라남도 고흥군·보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열린우리당 신중식[4]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해 무소속 진종근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8대 국회에서 야당 몫의 국회부의장이 되길 원하였으나 전반기에는 문희상, 후반기에는 홍재형에 밀려서 되지 못하였다.
이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민주통합당, 민주당, 새정치민주연합 고문으로 있다가 2015년 8월 4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지병인 혈액암으로 별세하였다. 향년 76세.
3. 여담[편집]
박진영 JYP엔터테인먼트 대표의 당숙부이다. 차녀는 뮤지컬 배우 김소현의 남동생과 결혼하였다.
지독한 애연가로, 하루 3갑 넘게 담배를 피웠으며, 비흡연자 의원들은 오죽하면 그와 회의를 하는 것을 꺼릴 정도였다. 김대중 전 앞에서도 당당하게 담배를 피웠으며, 혐연가였던 권노갑이 담배를 못 피우게 하자 설전을 벌인 적도 있다(...). 거기에 오랫동안 같이 정치를 한 한화갑 역시 박상천의 골초 기질엔 학을 뗐는데, 신문 사진에서도 박상천이 담배를 피우며 웃고 있을때 한화갑은 담배 연기를 손으로 털어내는 사진이 찍힌 바도 있다.(...) 김성순은 자신의 시에서 "담배를 사랑하며 연기로 산다. 피우고 피우고 또 피운다. 한 번 뿜는 연기 속에 지혜가 솟고 두 번 뿜는 연기 타고 논리가 흐른다."라고 박상천을 묘사하기도 했다. 이러고도 76세까지 산 게 기적이라면 기적인데, 사실 박상천은 골초긴 하나 연기를 들이마시지 않고 입에 머금다가 뱉는 소위 겉담을 했다. 법무부장관 시절 폐검사를 한 적이 있는데, 폐가 깨끗했다고 한다. # 문제는 이게 박상천 이후로 민주당의 문화가 되어서 이해찬, 문희상, 김한길 등도 박상천의 현역 시절처럼 실내에서 마음껏 펴댔다는 거다.
보수계열 정당의 박희태와는 영원한 정치적 맞수로 유명했다. 1938년 생 동갑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57학번 동기이고, 1961년 제13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나란히 합격하였으며, 동기로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둘 다 1966년 검사의 길을 걸었다.[5] 이후 1988년 13대 총선을 통해 동시에 정계에 입문하였으며, 초선 의원 시절 각각 민정당과 평민당의 대변인으로 유명세를 날렸다. 또한 둘 다 문민 정부와 국민의 정부 시절 법무부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15대 국회이던 1997년에는 함께 3선 의원으로서 각각 신한국당과 새정치국민회의의 원내총무로 대립했다. 18대 국회까지 박희태는 내리 6선[6] , 박상천은 17대 국회를 제외하고는 모두 당선되어 5선 의원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2012년 2월 9일 박희태 당시 국회의장은 돈봉투 파문의 책임을 지고 사퇴를 선언하였는데, 박상천 의원도 같은 날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함께 정치 인생을 마무리짓게 되었다. 다만 둘의 성격은 대조적이었다. 박희태가 좀처럼 화를 내지 않고 유머러스한 화법을 썼다면, 박상천은 직설적인 논평으로 유명했다. 박상천이 혈액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박희태는 "한 마리 짝 잃은 거위가 됐다."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여담으로, 박희태는 정치 인생 말년이 매우 좋지 못했는데, 돈봉투 사건도 그렇고, 특히 2014년 가을에는 골프장에서 캐디를 성추행해 유죄를 선고받아 새누리당에서도 제명됐다.
똑같이 호남 기반 정치인이었던 김영진 전 의원과는 의원 선수(13-16, 18대)가 정확하게 같다. 13대 총선이 첫 선거에 새천년민주당 잔류파고, 탄핵 역풍이 분 17대 총선에서는 낙선했다가 18대 총선 때 나란히 원내 복귀를 했다. 차이점은 박상천은 본인의 고향인 고흥군에 계속 출마한 반면 김영진은 13-15대까지는 역시 본인의 고향인 강진군에서 내리 3선을 한 뒤 16대 때는 천용택 전 의원에 공천에 탈락해 전국구로 배정받았고, 17대부터는 광주광역시로 기반을 옮겼다는 것이다.
4. 선거 이력[편집]
5. 소속 정당[편집]
6. 둘러보기[편집]
[1] 1988년 치러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에는 1939년생으로 되어 있었다.[2] #[3]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박상천의 집을 '발포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4] 전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인 신형식의 친동생이다.[5] 박희태는 1966년 바로 청주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한 반면, 박상천은 1965년 먼저 판사로 임용되고 1년 뒤 검사로 전직하여 광주지검에서 근무하였다.[6] 다만 박희태는 6선의 경우에는 정식 총선은 공천에서 탈락해서 출마하지 못했다가 이듬해 보궐선거에서 허범도가 선거법을 위반해서 의원직을 상실한 것을 운좋게 본인이 차지한 뒤 당선돼서 중도에 정계에 복귀했다.[7] 1995년 탈당, 새정치국민회의 입당[8] 5번의 선거 중 처음이자 마지막 낙선[9] 민주당과 신설 합당[10]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을 위한 탈당[11]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12] 중도개혁통합신당과 신설 합당[13] 대통합민주신당과 신설 합당[14] 시민통합당과 신설 합당[15] 새정치민주연합에 흡수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