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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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박경구.jpg
성명
박경구 (朴經九)
생몰
1900년 10월 12일 ~ 1989년 1월 10일
출생지
함경남도 함흥시 함흥읍 서상동
사망지
서울특별시 성북구 하월곡동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박경구는 1900년 10월 12일 함경남도 함흥시 함흥읍 서상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몇달간 수감되었다가 6월에 훈방 조치된 뒤 만주로 망명했고, 그해 12월에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 경호대에 가입했다. 1920년 7월 미국 의원단이 동아시아를 순방하면서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그는 함흥에 돌아와 대한독립단 지단을 조직하고 미국 의원단이 한국에 방문했을 때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보여주려 했다.

1920년 3월 12일, 박경구는 신창리 소재 교회에서 개최된 금주(禁酒) 공개연설회에서 청중 200명에게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1920년 12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채규연과 함께 대한청년단연합회 함경도 의용대 문예주임을 맡아 격문을 배포하고, 본회와의 연락을 담당했으며, 군자금 모집 및 단원 모집 활동을 병행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단원 17명과 함께 다시 체포되었고, 1921년 6월 21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일제의 감시를 받으며 오랫동안 곤궁하게 지내다가 8.15 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후에는 소련군의 진주와 공산정부 수립 이래 북한의 급격한 공산화를 피해 남한으로 이주했고,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89년 1월 10일에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2004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박경구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