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마르 공화국/역대 국가의회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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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대공황 이전
2.1. 초대 총선 (1919)
2.2. 제2대 총선 (1920)
2.3. 제3대 총선 (1924.5)
2.4. 제4대 총선 (1924.12)
2.5. 제5대 총선 (1928)
3. 대공황 이후
3.1. 제6대 총선 (1930)
3.2. 제7대 총선 (1932.7)
3.3. 제8대 총선 (1932.11)
3.4. 제9대 총선 (1933.3)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919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성립 이후 1933년 나치당의 집권 이전까지 실시된 총선 결과를 다루는 문서다.


2. 대공황 이전[편집]



2.1. 초대 총선 (1919)[편집]


1919년 1월 19일
총원: 423석, 과반의석: 212석
샤이데만 내각
331석
야당
92석
사회민주당
중앙당
민주당
국가인민당
독립사회민주당
인민당
기타
165석
91석
75석
44석
22석
19석
7석
1차 대전 종전 이후 독일 11월 혁명에 의해 처음 수립된 바이마르 공화국의 제헌의회를 선출하기 위해 시행된 선거. 독일 역사상 최초로 비례대표제가 도입되었으며, 여성참정권이 인정되고 선거연령이 25세에서 20세로 낮아졌다. 당시 투표율은 83%를 기록하였다.

헤르만 뮐러가 이끄는 사회민주당이 37%를 득표하며 제1당이 되었다. 사회민주당은 함께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을 주도했던 중앙당, 민주당과 흑적황 연정을 구성했고, 필리프 샤이데만이 초대 총리로 취임하였다. 이후 개각을 거치며 총리는 구스타프 바우어, 헤르만 뮐러로 교체되었지만 사회민주당-중앙당-민주당 연정이라는 기본 틀은 변하지 않았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출범을 지지한 친(親)민주주의 정당들이 압도적, 안정적 과반을 유지한, 사실상 유일한 시기였다.


2.2. 제2대 총선 (1920)[편집]


1920년 6월 6일
총원: 459석, 과반의석: 230석
페렌바흐 내각
168석
야당
291석
인민당
중앙당
민주당
사회민주당[신임]
독립사회민주당
국가인민당
바이에른
인민당

공산당
기타
65석
64석
39석
103석
83석
71석
20석
4석
10석
제헌의회에서 헌법이 제정된 이후, 새로운 바이마르 헌법에 따라 국가의회(Reichstag)를 선출한 첫 선거였다.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을 주도했던 사회민주당-중앙당-민주당 연립정부는 출범 1년여만에 과반을 상실하였다. 이에 제1당인 사회민주당은 기존의 3당 연정에 독립사회민주당을 포함하는 연립정부를 구상하였으나 독립사회민주당은 이를 거절하였다. 대신 인민당을 포함해 과반을 확보하는 방안도 제시되었으나 이는 정작 사회민주당에서 미온적이었다.

결국 중앙당-인민당-민주당이 소수연정을 구성하고 사회민주당이 내각에는 참여하지는 않되 외곽에서 지원하는 방향으로 콘스탄틴 페렌바흐 내각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1차대전 전후협상 문제로 연립정부 내 이견이 커지자 페렌바흐 내각은 1년만에 사임하였다. 이후에도 가까스로 연정이 세워졌다가 내각불신임결의나 내부 이견으로 내각이 교체되는 일이 반복적으로 이어졌다.


2.3. 제3대 총선 (1924.5)[편집]


1924년 5월 4일
총원: 472석, 과반의석: 237석
마르크스 2기 내각
138석
야당
334석
중앙당
인민당
민주당
사회민주당[신임]
국가인민당
공산당
국가사회주의자유운동
바이에른
인민당

기타
65석
45석
28석
100석
95석
62석
32석
16석
29석
선거 직전 빌헬름 마르크스 총리를 중심으로 소수연정을 구성하고 있던 중앙당, 인민당, 민주당의 합산 의석은 이전보다 더 줄어들었다. 더군다나 독일 공산당이 의석을 크게 늘리고, '국가사회주의자유운동'을 통해[1] 나치당원들이 처음으로 원내에 진입하며 안정적인 과반을 확보하는 것은 선거 이전보다 더 어려워졌다. 결국 별수없이 내각의 일부만 교체하여 동일한 정당 구성으로 빌헬름 마르크스 2기 내각이 출범하였다.


2.4. 제4대 총선 (1924.12)[편집]


1924년 12월 7일
총원: 493석, 과반의석: 247석
루터 1기 내각
242석
야당
251석
국가인민당
중앙당
인민당
바이에른
인민당

사회민주당
공산당
민주당[신임]
국가사회주의자유운동
기타
103석
69석
51석
19석
131석
45석
32석
14석
29석
빌헬름 마르크스 2기 내각이 소수연정이라는 한계로 인해 국정 운영에 난항을 겪자, 7개월 만에 의회를 해산하여 실시된 선거이다.

1921년부터 독일 경제를 추락시킨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점차 진정되며 독일 공산당과 국가사회주의자유운동의 의석이 크게 줄었다. 그 결과, 당적이 없음에도 이전 내각들에서 장관으로 중용되어오던 한스 루터를 중심으로, 민주당의 지원을 받는 국가인민당-중앙당-인민당-바이에른 인민당 소수연정이 구성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내 로카르노 조약에 반대해 국가인민당이 연정에서 탈퇴했고, 이후 정국 불안정 속에서 개각이 여러차례 이뤄졌으나 모두 단명하였다.


2.5. 제5대 총선 (1928)[편집]


1928년 5월 20일
총원: 491석, 과반의석: 246석
뮐러 2기 내각
301석
야당
190석
사회민주당
중앙당
인민당
민주당
바이에른
인민당

국가인민당
공산당
나치당
기타
153석
61석
45석
25석
17석
73석
54석
12석
51석
4년 전 선거에 비해 사회민주당이 22석을 늘리며 독보적인 제1당이 되었다. 이에 사회민주당을 중심으로 중앙당, 인민당, 민주당, 바이에른 인민당이 연립하는 대연정인 헤르만 뮐러 2기 내각이 성사되었다.

헤르만 뮐러 2기 내각은 1년 9개월 동안 유지되며 상대적으로 오랜 기간 존속했으나 결국 1930년 3월 내부 갈등으로 인해 사임한다. 이에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처음으로 헌법 상의 대통령 비상대권을 발동하여 의회의 인준 없이 하인리히 브뤼닝을 총리로 하는 '대통령 내각'을 구성한다. 이 내각에는 중앙당, 인민당, 민주당, 바이에른 인민당, 그 외 보수우파 소수정당들이 참여한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브뤼닝 1기 내각부터는 모든 내각이 대통령 비상대권을 통해서만 세워졌다. 대통령 비상대권 발동이 일상(...)이 된 것이다. 즉, 공식적으로 의회에서 과반의 지지를 얻어 출범한 내각은 뮐러 2기 내각 이후로는 없었다.


3. 대공황 이후[편집]



3.1. 제6대 총선 (1930)[편집]


1930년 9월 14일
총원: 577석, 과반의석: 289석
브뤼닝 1기 내각[비상대권A]
183석
야당
394석
중앙당
인민당
국가당[A]
바이에른
인민당

기타[2]
사회민주당[신임]
나치당
공산당
국가인민당[3]
기타
68석
30석
20석
19석
46석
143석
107석
77석
41석
26석
브뤼닝 내각의 국정운영은 입법이 아닌, 입법부를 거치지 않는 대통령 비상대권에 의존해 이뤄졌다. 급기야 예산안이 대통령 비상대권으로 통과되기에 이르자 사회민주당은 헌법에 따라 독일 공산당, 나치당, 국가인민당과 연합해 해당 대통령 비상대권을 무효화시키며 정부에 비협조하였다. 이에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아예 의회를 해산했고, 총선이 열리게 되었다.

하지만 세계 대공황으로 인한 디플레이션이 심화되면서 민심은 끊임없이 정국 불안정이 반복되는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에 크게 실망하게 되었다. 그 결과, 독일 공산당나치당이 민심을 파고들며 선전하였고, 특히 나치당의 득표율은 2년만에 2.6%에서 18.3%로 수직상승했다.

이러한 나치당과 공산당의 상승세에 놀라 정국 안정을 급선무로 받아들인 사회민주당은 브뤼닝 내각에 적극 협조하는 방향으로 정치 노선을 전격 선회하였다.[4] 이를 통해 브뤼닝 내각은 국정운영에 큰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었다.


3.2. 제7대 총선 (1932.7)[편집]


1932년 7월 31일
총원: 608석, 과반의석: 305석
파펜 내각[비상대권A]
37석
야당
571석
국가인민당[B]
나치당
사회민주당
공산당
중앙당
바이에른
인민당

인민당
국가당[A]
기타
37석
230석
133석
89석
75석
22석
7석
4석
11석
우익 권위주의 성격이 짙었던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브뤼닝 내각이 사회민주당의 협조를 받아 국정을 운영하는 것을 못마땅히 여겼다.[5] 이에 1932년 6월 힌덴부르크는 대통령 비상대권을 활용해 프란츠 폰 파펜을 새로운 총리로 임명하였고, 연이어 의회까지 해산하면서 총선이 열리게 되었다.

나치당이 37.3%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처음으로 원내 1당에 등극했다. 나치당과 공산당의 의석을 합산하면 과반을 넘겼기에, 다른 정당들이 어떻게든 힘을 합쳐도 연정을 구성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파펜 내각이 대통령 비상대권을 바탕으로 하는 임시방편으로서 유지된다.


3.3. 제8대 총선 (1932.11)[편집]


1932년 11월 6일
총원: 584석, 과반의석: 293석
슐라이허 내각[비상대권B]
51석
야당
533석
국가인민당[B]
나치당
사회민주당
공산당
중앙당
바이에른
인민당

인민당
국가당[A]
기타
51석
196석
121석
100석
70석
20석
11석
2석
13석
1932년 9월, 독일 공산당이 파펜 내각에 대해 내각불신임결의를 발의하고, 사회민주당은 물론 나치당도 불신임에 찬성하자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했다. 이에 4개월 만에 총선이 다시 열렸다.

나치당은 여전히 원내 1당이었지만 과반에는 실패했으며 오히려 4개월 전보다 득표율 및 의석수가 감소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나치당공산당이 전체 의석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정국은 여전히 이도저도 할 수 없는 교착 상태였다. 이에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다시 한 번 대통령 비상대권으로 쿠르트 폰 슐라이허를 총리에 임명했다.

하지만 이내 전직 총리였던 프란츠 폰 파펜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 회복을 위해 히틀러의 총리 임명을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파펜의 설득 끝에 1933년 1월 히틀러를 대통령 비상대권으로 총리에 임명하였다.


3.4. 제9대 총선 (1933.3)[편집]


1933년 3월 5일
총원: 647석, 과반의석: 324석
히틀러 내각
340석
야당
307석
나치당
국가인민당
사회민주당
공산당
중앙당
바이에른
인민당

국가당[A]
인민당
기타
288석
52석
120석
81석
73석
19석
5석
2석
7석
히틀러대통령 비상대권으로 총리에 임명된 직후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다시 의회를 해산하며 치러진 선거로, 바이마르 공화국 최후의 선거였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나치의 돌격대친위대는 사회민주당과 공산당 후보들을 공격하고 당사에 난입하며 테러를 자행하였다.[6] 중앙당 계열 신문에서 이를 비판하자 나치 정부는 중앙당까지 탄압하였다. 선거 6일 전인 1933년 2월 27일에는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발생하였다. 나치당 정부는 이를 독일 공산당의 소행으로 단정하며 공산당이 정부 전복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선전했다. 히틀러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설득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에른스트 텔만 공산당 당수를 포함한 공산당 간부 4,000여명을 체포했다. 다만 사회민주당으로의 좌파진영 표 결집을 막기 위해 공산당을 불법화하지는 않았다.

나치당은 43%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자그마치 288석을 확보했고, 연립여당 국가인민당의 의석수를 합쳐 과반을 달성하였다.[7] 권력 기반을 확고히 한 나치당은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묵인 속에 속전속결로 수권법을 발의하였다. 야당에 대한 탄압과 회유 속에 수권법이 통과되면서 나치당의 권력은 공고해졌고 이후의 선거는 모두 나치당만이 존재할 수 있는 노골적인 일당독재 속에서 진행되었다.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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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A B C D 인준투표에서 찬성표를 던지거나 내각불신임결의에서 정부 측에 힘을 실어주는 등, 사실상 신임 공급에 준하는 협력이 이뤄진 경우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내각의 핵심 정책 추진을 돕거나 일부 당원이 당의 묵인 하에 개인 자격으로 내각에 참여하는 일도 있었다.[1] 1923년 뮌헨 폭동 이후 나치당의 활동은 사실상 불법화되었고, 히틀러를 비롯한 당 간부들은 체포되었다. 이에 나치당 잔존 세력은 독일민족자유당과 통합하여 '국가사회주의자유운동'을 형성했다. 이를 통해 나치당원들은 우회적으로 원내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이후 히틀러가 석방되고 나치당이 본격적인 활동을 재개하면서 국가사회주의자유운동은 자연스럽게 붕괴되어 나치당에 흡수되었다.[비상대권A] A B 의회의 동의 없이 대통령 비상대권으로 선거 이전의 내각이 교체 없이 지속됨[A] A B C D 민주당이 다른 군소정당과 합당하여 창당한 정당[2] 중간계급제국당 23석, 기독교국가농민당 19석, 보수인민당 4석[3] 국가인민당은 본래 1930년 3월에 결성된 브뤼닝 1기 내각에 참여하였으나, 국가인민당 소속 장관이 1930년 7월 탈당하여 기독교국가농민당으로 당적을 옮기면서 공식적으로 야당이 되었다. 국가인민당 내 대다수는 애초부터 브뤼닝 내각에 호의적이지 않았다.[4] 심지어 브뤼닝 내각이 적극적으로 재정 긴축 정책을 펼쳤고, 이로 인한 민심 이반이 심각했음에도 사회민주당은 이를 수용하였다.[B] A B 대통령 비상대권으로 성립된 파펜 내각과 슐라이허 내각은 국가인민당 인사들을 장관직에 기용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국가인민당이 여당이 된 것은 아니었다. 국가인민당은 애초부터 두 내각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지 않았고, 특히 슐라이허 내각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지 않았다.[5] 힌덴부르크나치당에게 총리직을 제외한 장관직을 양보해서라도 보다 우익 성향이 짙은 정부가 자리잡기를 희망했다.[비상대권B] 의회의 동의 없이 대통령 비상대권으로 새롭게 내각이 교체됨[6] 사회민주당에는 국기단이, 공산당은 전위대가 당집회를 보호하였지만 행정력까지 동원해 무작정 체포하는 탓에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7] 아돌프 히틀러대통령 비상대권을 통해 처음 총리직에 임명되었을 때는 나치당과 국가인민당의 의석 합이 과반에 못미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