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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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바알(Baal)은 고대 가나안 지역의 토속신이자 유대교에서 적대시하는 우상, 그리스도교의 악마이다.
셈어로 '왕', '주인', '소유자'[1] 혹은 '희생'이라는 의미의 어휘로, 본래의 신격은 아다드와 같은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풍요・기상의 신으로 추정되고 있다[2] .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의 예에서 볼 수 있듯, 당시 종교에서는 직접 신의 이름을 부르기보다 '바알(주님)'하는 식으로 돌려 말하는 것이 신에 대한 예의였다.[3] 이에 '바알'로 구전되다가 나중에는 그것이 신의 이름처럼 불리게 된 것이다.[4] 또한 하나의 형태로 고정되지 않고, 바알 제폰[5] 과 바알 함몬 등 여려 형태로 변화하여 나타났다고 한다.
이명으로 바알세불(Baal-Zebul)이 있으며, 바엘(Bael), 베엘제붑(Beelzebūb)등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서 붙인 이름의 변형으로, 바알을 보잘 것 없는 존재로 격하하거나 악마로 간주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면서, 신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신이며, 유피테르-카일루스(Jupiter Caelus: ‘하늘의 유피테르’)가 된 오르마즈드(아후라 마즈다)와 쉽게 동일시되었다고 한다.
2. 신격[편집]
바알의 신격은 다른 초기 농경 사회의 신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폭풍우와 비, 번개, 풍요의 신이자 태양신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신인 벨과 동격으로 사료되며, 이집트 신화의 세트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가나안 지역에서는 최고신 엘의 아들로 알려졌는데, 여신 아셰라(트) 혹은 아스타르테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라고도 한다. 이본에 따라서는 그 아버지가 다곤으로 되어 있거나, 또는 아스타르테가 바알 자신의 아내라는 신화도 있다. 승리의 여신 아나트의 오빠이자 남편으로, 허리춤에 단검을 차고, 왼손에는 창을 움켜쥐고, 오른손으로 곤봉을 휘두르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창과 마법의 곤봉을 주무기로 사용하고 단검은 부무기로 사용했으며 창과 곤봉, 또는 두 마법 곤봉들의 이름은 각각 야그루시(제거)와 아야무르(추방)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물의 신 얌 나할(Baal Cycle), 사신(死神) 모트과는 적대 관계이다. 물의 신과의 싸움은 그가 거친 자연의 물을 다스리는 치수의 신이라는 것을, 모트와의 싸움은 풍요를 관장하는 신임을 상징한다.
그러면서, 바람, 천둥번개, 비와 샘물을 주관하다보니 하늘의 신으로 여겨지곤 했으며, 아이들을 출산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으며,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고 한다.
3. 바알 신앙의 역사[편집]
우가리트의 문헌에[6] 엘, 아세라와 함께 바알의 이름이 언급될 정도로 그 기원이 오래된 신이다. 아나트와의 관계와 모트와의 싸움과 죽음에 관한 내용도 우가리트 신화에 나온다. 가나안 전역에서 숭배를 받았기 때문에 히브리인들도 바알-하다드라는 명칭으로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가 망할 때까지 시골 농촌에서는 야훼 신앙과 함께 숭배했다고 하며[7] 팔레스타인에서는 멜카르트라 불리기도 했다. 고대 히브리의 바알 사제는 제를 올리며 무언가를 간구히 청할 때 자해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들은 준비한 황소를 받아 잡아놓고는 아침부터 한낮이 되기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렀다.
"오, 바알이여, 대답하소서."
그러나 대답은커녕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 예언자들은 자기네가 만든 제단을 돌면서 절뚝거리는 춤을 추었다. 한낮이 되자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말하였다.
"바알은 신이니까, 더 크게 불러보아라. 깊은 사색에 빠져 계신지도 모르지. 외출 중인지 아니면 여행 중인지 혹은 잠이 드셨는지도 모르니 어서 깨워보아라."
그들은 더 크게 소리쳤다. 자기네 의식을 따라 칼과 창으로 몸에 상처를 내어 피까지 흘렸다.
팔레스타인에서 이주한 페니키아인들이 세운 국가인 카르타고에서도 바알-함몬(Ba'al-Hammon)이라는 이름으로 숭배되었다. 후에 그리스 폴리스들과의 교류를 통해 크로노스와 동일시되었다. 바알-함몬은 카르타고의 주신(主神)인 동시에 달의 여신이자 카르타고의 수호 여신인 타니트의 남편인데, 카르타고인들의 이름에서 자주 나오는 '발'(한니발, 하스드루발, 마하르발 등)은 이 '바알'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니발은 어린 시절에 바알의 신전 앞에서 로마에 대한 복수를 맹세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의 제우스, 유피테르, 바빌론의 마르두크와 인도 신화의 미트라와 바루나, 그리고 인드라와도 동일시되었으며 인드라 그 자체, 혹은 인드라의 권속 중 하나인 지원정사란 신의 수호신인 우두천왕이라는 소 머리신[8] 이 되어 중국, 한국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들어와 일본의 신 스사노오 혹은 아마테라스, 카르타고 신화의 주신 몰레크, 켈트 신화의 죽음의 신 던, 헤라클레스, 성경의 바알세붑(루시퍼)와 창조신 야훼와도 동일시 및 불리어졌다고 한다.
3.1. 고대 이스라엘[편집]
그는 바알을 섬기고 예배하여 그의 부왕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의 속을 썩여드렸다.
열왕기 상권 22장 54절(공동번역성서)
성경에는 바알이 이민족의 신으로 등장하여, 바알을 섬기고 있는 것을 타락의 상징으로 묘사하고 있다. 끊임없이 그 사제들과 야훼의 예언자들이 충돌한다. 주로 남북왕조로 나뉘어진 열왕기, 역대기에 이러한 대립이 중점적으로 나온다.
바알 숭배 신앙에 대한 영향력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 사이에 끼여있는 유대인들에게도 매우 강력한 영향력이 있었다. 이는 모세가 최초로 야훼로부터 십계명을 받는 순간부터, 유대 왕국이 바빌로니아 제국 등에 의해서 완전히 몰락할 때까지, 바알 숭배의 영향을 받았다. 사실, 유대교의 유일신앙의 사상은 그들 내부에서도 오랫동안 제대로 지켜지지 못했으며, 우리가 잘 아는 구약성경에서도 이 바알 숭배와 야훼 숭배의 갈등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스라엘 왕국에서는 야훼 신앙과 바알 신앙의 혼합을 경계시하였다. 이는 크게 두 가지 문제로 첫째는 바알(몰록)신앙이 암몬족과 다른 셈족들의 신앙에서 기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정복자인 히브리인 입장에서는 이들 종교와 동화되는 것은 이스라엘의 고유 문화와 국가 정체성까지 흔드는 행위였다. 둘째는 성적으로 엄격하던 히브리인들의 교리와 난교 등의 성행위를 종교의식 삼아 시행하는 다른 셈족들의 문화는 도저히 섞일 수 없었으며, 제사장들이 용납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였다. 따라서 야훼와 바알을 혼동한다는 것은 상당히 중대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자칫하면 히브리인들이 이에 동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신공양 같은 악질적인 행위 또한 성경에서 수차례 언급한다. 성경에 야훼에게 바치는 인신공양 행위가 성경에 그대로 나오기도 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지만, 애초에 이 행위 자체가 특이한 사례라 기록된 것이며, 이후 이 행위에 대해 애곡하는 사례가 생겼다는 바로 뒤에 나오는 서술을 빼버린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정체성 사수를 위해 바알은 사탄 혹은 악마와 동의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시편에서 바알을 악마라고 언급하는 부분이 나올 정도다.[9]
그래서 바알 신앙과 적대하는 유대인들은 바알에게 멸칭을 붙여 바알세붑이라 불렀다. 자세한 내용은 바알세붑 참조.
3.1.1. 출애굽기에서의 바알 숭배[편집]
백성은 모세가 오래도록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아론에게 몰려와 청하였다. "어서 우리를 앞장설 신을 만들어주시오.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온 그 어른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론이 그들에게 "너희 아내와 아들 딸의 귀에 걸린 금고리를 나에게 가져오라." 하고 대답하자 백성이 모두 저희 귀에 걸린 금고리를 떼어 아론에게 가져왔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것을 받아 수송아지 신상을 부어 만들자 모두들 외쳤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내온 우리의 신이다." 아론은 이것을 보고 그 신상 앞에 제단을 만들고 "내일 야훼 앞에서 축제를 올리자." 하고 선포하였다. 이튿날 그들은 일찍 일어나 번제를 드리고 친교제물을 바쳤다. 그리고 나서 백성은 앉아서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서 정신없이 뛰놀았다.
출애굽기 32장 1~6절
탈출기에서는 야훼의 기적으로 통해서 이집트로부터 해방된 유대민족들이 소 신상을 만들어 그것을 숭배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위에서 보았듯의 바알의 상징은 소, 특히 황소[10] . (숫소)로 묘사되기도 한다. 바알의 여신인 아낫이 암송아지로 상징되고, 만신전의 주신인 엘신이 황소로 상징된다. 다시 말해,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구원해준 존재 야훼를 바알과 동일시했던 것이다.
이는 당시 상황을 보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데, 유대인들은 수백 년 동안 이집트의 영향력 안에서 생활하였고, 그 결과 당시 이집트에서도 인기가 있었던 바알 숭배를 습득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자신들을 구원한 신을 향해서 제사행위를 하려고 하였을 때, 유대인들은 소 신상을 만들어서 자신들을 구원해 준 신에게 보답하려고 했을 것이다.[11]
3.1.2. 기타 구약성서에서의 바알 숭배[편집]
성지 예루살렘을 보유하고 종교적인 우위에 서려는 남유다 왕국에 대항해 북이스라엘의 1대 왕인 여로보암 1세가 황금 송아지상을 북이스라엘 최남단과 최북단에 세우면서 북이스라엘은 다신교 신앙이 강화된 사회가 된다. 여기에 북이스라엘의 4번째 왕조, 오므리 왕조의 2대왕인 아합왕이 시돈의 공주 이세벨을 아내로 맞으면서 처가의 종교인 가나안 토속 신앙을 대대적으로 장려.[12] 바알뿐만 아니라 아쉬타로트, 아세라 등의 가나안 토속 신들이 숭배된다.
현대 역사가들은 북이스라엘 왕실들이 지속적으로 비(非)야훼신앙 및 바알로 위시되는 가나안 다신교를 추종했던 것을 남유다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교로부터 백성의 눈을 돌려 유다의 종교적 우위를 약화시키려했던 종교정책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
이스라엘 12족속 중 국민 다수가 유다 족속이고 소수가 베냐민 지파였던 남유다 왕국에 비해 나머지 10개 족속[13] 의 연합왕국 형태였던 북이스라엘 왕국은 각 족속 간의 알력다툼으로 정치가 불안정했다. 실제로 유다가 다윗 왕가로 계속 이어진 데 반해서 이스라엘은 왕조가 여러 번 바뀌었다. 게다가 북이스라엘의 각 지방에 산재한 종교적 보수파와 기존 신앙을 유지하고자 하는 민중이 엘리야, 엘리사로 대표되는 "예언자"들의 "예언"을 등에 업고, 외래종교를 강요하는 왕실 및 귀족, 그리고 이민족 세력과 충돌을 일으켜 남유다에 비해 북이스라엘은 사회 전반이 종교적으로 혼란스러웠다.
그러다가 앗시리아 제국(아시리아), 바빌론 제국(신바빌로니아), 특히 페르시아 제국(아케메네스 왕조)에 의해 가나안의 북이스라엘 왕국과 주변 국가들(모압, 암몬, 에돔, 블레셋 등)이 폭삭 망하고, 유다 왕국의 유대교 신앙이 정립되면서 바알 신앙은 힘을 잃어, 이후로 성서에서 바알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게 된다. 여기에 바빌론 포로로 끌려 갔다가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해방된 유대인들은 본국으로 돌아가서 종교 개혁운동을 일으켜 유대인들 사이의 바알 신앙을 완전히 뿌리 뽑아 버렸다.
바빌론 유수 전, '주인'이란 의미로 바알을 지명이나 인명에 이용한 예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사울 왕의 아들 중 하나인 에스바알(Eshbaal). 그러나 이런 경우는 후에 성경 집필자들이 바알에 대한 원한을 가지고 바알을 죽입시다 정신으로 모두 치욕이란 뜻의 보셋(bosheth)로 바꾸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는 에스바알의 이름이 이스보셋(Ish-bosheth)이라고 나와 있다. 그외에도 므립바알(Meri-baal, 므비보셋)이나 여룹바알[14] (Jerubbaal, 여룹베셋) 등이 있다. 고대 근동에서는 인명에 신의 이름을 넣는 경우가 흔하였다.
3.2. 중세 유럽(바엘)[편집]
바알 신앙은 그 후로도 명맥이 그럭저럭 유지되다가,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문화의 침입으로 흔들리고, 유다 마카베오 왕조의 바알신앙 탄압으로 약화되고, 로마에 의해 정복당하면서 또 흔들리더니, 로마가 그리스도교화되면서 소멸했다. 그리고 중동이 이슬람화되면서 티끌만 한 흔적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적대적이다가 소멸된 신들이 으레 그렇듯, 중세 유럽에서는 솔로몬의 72악마 가운데 으뜸인 바엘이라는 악마의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자세한 사항은 바엘 항목 참조.
사실 바엘이란 이름이 왕을 의미하기에, 악마[15] 중에서 악마 바알제붑, 악마 벨페골 등 발, 바알, 벨이 들어가는 악마가 많다.[16]
4. 대중 매체에서[편집]
자세한 내용은 바알/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