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 피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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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James 'Bobby' Fischer
로버트 제임스 '바비' 피셔

출생
1943년 3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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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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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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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노이 시카고
사망
2008년 1월 17일 (향년 6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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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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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캬비크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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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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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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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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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008)
타이틀
GM (1958)
세계 챔피언
1972-1975
Elo 레이팅
2785 (최대 레이팅)

1. 개요
2. 상세
3. 기풍
4. 성격
5. 여담




1. 개요[편집]


미국체스 선수이자 제11대 체스 세계 챔피언이다. 본명은 로버트 제임스 피셔.

2. 상세[편집]


현재에도 거의 모든 체스인들에게 기억되는 전설의 체스 선수이며, 날카로운 계산력과 매서운 공격력이 돋보이는 선수이다.[1]

6세에 처음 체스를 배웠다. 1957년 (당시 만 14세) 최연소 미국 챔피언이 되었으며 인터내셔널 마스터 타이틀을 취득했고, 그 다음 해인 1958년에 15세의 나이로 당시 역사상 최연소 그랜드 마스터 타이틀을 취득했다. 이후 1962년도에 미국 국내 대회에는 출전하는 대신 국제 무대에서 은퇴했다가 1966년도에 다시 복귀했다. 그리고 1968년도에 국제무대에서 은퇴했다가 1970년도 소련 대 세계전에서 다시 복귀했다.

1958년 세계 체스 챔피언십 지역 간 예선을 공동 5위로 통과, 1959년도 도전자 결정전에 첫 진출하였다. 이때 피셔의 나이는 16세로, 2007년 망누스 칼센 이전까지 역대 최연소 도전자 결정전 진출자였고, 규정에 따라 바로 그랜드마스터 타이틀을 받았다.

1962년 도전자 결정전에서 승부조작 논란을 제기하였다. 당시에는 도전자 결정전이 8명 간의 쿼드러플 라운드 로빈으로 진행되었는데, 상위 3명의 소련 체스 플레이어들이 서로간의 12경기에서 평균적으로 단 19수만 두고 모두 무승부로 끝내버린 것. 이에 피셔는 3명이 짜고 모든 경기를 무승부로 한 게 아니냐고 주장하였다. 결국 FIDE에서는 이러한 논란에 대응하기 위해 이후 도전자 결정전부터는 기존의 풀리그제에서 싱글 엘리미네이션 토너먼트제로 방식이 변경되었다.

1971년도 도전자 결정전에서는 소련의 마르크 타이마노프에 6 대 0으로 완승[2]하고 덴마크의 벤트 라르센에게도 6 대 0으로 완승을 거둔다. 전직 체스 세계 챔피언인 티그란 페트로시안에 5승 3무 1패로 승리하여 당시 제 10대 세계 체스챔피언이었던 보리스 스파스키의 도전자로 나설 자격을 얻게 된다. 승리 당시 현장의 영상 그리고 1972년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있었던 세계 체스 챔피언십에서 스파스키에게 7승 11무 3패로 승리하고 세계챔피언이 된다.

1975년도에는 방어전의 운영을 둘러싸고 세계 체스 연맹과 대립했다. 피셔는 기존 방식인 24전제가 무승부를 너무 유도한다고 주장하며, 초대 챔피언십 방식이었던 무승부 관계없이 먼저 10승을 거둔 플레이어가 이기는 방식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는 부분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3] 결국 그는 타이틀을 반납하고 그 타이틀은 1974년도 도전자 결정전 우승자인 카르포프에게 돌아간다.[4]

그 후 오랜 시간동안 체스계에서 모습을 감췄지만 1992년 돌연 복귀해 상술했던 규정대로 유고슬라비아에서 스파스키와 다시 맞붙어 승리한다. 이 승리로 300만달러 이상의 상금을 받지만 당시 미국이 취한 유고슬라비아 경제 제재 조치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다시 소식 불명이 된다. 이 기소에 대해 피셔 자신은 반유대주의 발언과 반미 발언에 대한 정치적 박해라고 주장했다.

그 후 일본에 주재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2004년 7월 14일 나리타 공항에서 필리핀으로 출국하려다 출입국 관리법 위반 혐의로 도쿄 입국 관리국 나리타 공항 지국에 구속되었다. 같은 해 8월 친교가 있던 일본 체스 협회 사무국장 와타이 미요코와 결혼하게 된다.

미국 정부는 피셔의 신변을 요구했지만 피셔 측은 거부했다. 2005년 3월 21일 아이슬란드 정부가 피셔에게 시민권을 주는 조치를 취해 일본 정부는 피셔의 아이슬란드 출국을 허락했다. 이후 아이슬란드에 체류했지만 2008년 1월 17일 64세의 나이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현지 미디어에 의해 전해졌다.

그의 묘지는 아이슬란드 쉬뒤를란드의 한 교회 앞에 위치해 있다.

3. 기풍[편집]


역대 최강, 천재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공격적이고 창의적인 수를 두었다.

오프닝에 대한 지식은 "깊지만 좁은" 편으로, 백일 때는 첫수로 킹즈 폰 오프닝만을 두었다. "시험해본 결과 e4가 가장 좋다.(e4 is best by test)"라는 어록이 유명하다. d4를 둔 것은 한손에 꼽을 정도로 적으며, 그나마도 명백히 낮은 플레이어들을 상대로 둔 것이다. 단, 보리스 스파스키와의 챔피언 결정전 6경기에서 일부러 스파스키의 주력 오프닝인 QGD 타르타코워로 들어가서 이겨버렸다. 그 외에도 카로칸 디펜스를 한 판도 두지 않았다거나, 알레킨 디펜스를 스파스키와의 챔피언전에서 두 번 사용한 것을 제외하면 둔 적이 없는 등 오프닝에 대한 호불호가 강했다.

무승부를 싫어해서 무승부 제의는 무승부가 확실한 경우에만 받아들였다.[5] 가끔 이는 독이 되기도 했는데, 스파스키와의 경기에서 스파스키가 킹즈 갬빗을 꺼낸 뒤 무승부격인 포지션에 들어갔다. 하지만 무승부를 싫어했던 피셔는 백을 공격하려다 포지션적 악수를 두고 말았고 지기도 했다.


4. 성격[편집]


무례하고 오만하며, 거의 정신병의 영역에 다다른 더러운 성격으로 악명높았다. 체스계 탕아라고 불릴 정도로 협회와 마찰이 잦았으며, 결국 스스로 챔피언 타이틀을 반납하는 결말을 맞이했다.

바비 피셔 본인은 폴란드계 미국인이였으나 그는 자신의 선조들이 건너온 나라인 폴란드를 싫어했다. 전 하인 도네르에 따르면 피셔는 오히려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나치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를 존경했고 나의 투쟁 등 히틀러가 쓴 저서라면 닥치는 대로 읽었다고 한다.

논란이 되는 발언도 서스럼없이 했는데, "여자 체스 챔피언은 내가 나이트 하나 접어도 이긴다."[6], "여자는 멍청해서 체스를 못 둔다, 여자는 집에서 밥하며 남자나 기다려야 한다" 등의 발언을 인터뷰에서 하기도 했다. 또한 "나는 '체스 천재'가 아니다. 나는 체스를 두는 '천재'이지 '체스 천재'가 아니다. 가리 카스파로프 같은 쓰레기는 체스 천재라 불릴 수 있는데, 걔는 병신 하수일 뿐이다. 체스도 잘 못 하지만 그것 말고는 정말 아무것도 못 한다."라는 발언은 체스인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실제로 정신 관련 질환을 진단받은 적은 없지만, 일부 의사나 심리학자들은 반유대주의 등 그의 감정이 과잉된 행동이 조현병이나 아스퍼거 증후군 때문이라 의심한다. 그는 1975년에 상대 선수가 자신의 음식에 독을 탔다고 주장하며 챔피언 타이틀 방어전을 거부했고, 러시아가 비행기에 폭탄을 장착해서 자신을 암살하려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기질은 피셔의 청년기와 유소년 시절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대전 상대였던 선수들은 피셔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하곤 했고, 체스에 광적으로 몰입하는 그의 정신건강을 걱정한 어머니가 의사와 상담을 받도록 한 적도 있다. 그 원인을 질병보다는 피셔의 어린 시절에서 비롯된 트라우마에서 찾기도 한다.

5. 여담[편집]


폴 모피 이후로 유럽(특히 소련러시아)이 독점하던 체스 챔피언계에 나타난 유일한 순수 미국인 세계 챔피언[7]이다보니 미국에서 인기가 많다.

미국 체스 챔피언십에 8회 출전하여 모두 우승을 거두었다. 그 중 6번째로 출전한 대회인 1963-64년 대회에서는 무려 전승 우승(11전 11승. 백(선수) 5승, 흑(후수) 6승)을 기록했는데, 이는 미국 체스 챔피언십 대회 역사상 유일무이한 전승 우승이다. 1971년도에 달성한 공식 대회 20연승 기록은 현재까지 깨지지 않았다.[8]

역사 상 최고의 체스 선수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다. 역대 Elo 레이팅 랭킹에선 30위 권이지만 이는 레이팅 인플레이션의 영향 때문이다. 인플레이션을 보정한 경우 2890점대에 해당한다는 연구도 있으며, 이는 50년이 지난 현대 선수들의 보정 레이팅까지 포함해도 최고 레이팅이다. 이렇다 보니 동시대 다른 플레이어들과 격차 면에서 압도적인 기록을 보이는데, 전 챔피언이자 2위 스파스키보다 레이팅이 120 더 높았다. (스파스키는 자신이 챔피언이던 시절에도 레이팅으로는 피셔보다 낮았다.) 이는 예상 승률 66%에 해당하는 차이다.[9]

체스960이라는 변형 체스 룰을 창시했으며, 이를 기려 체스960은 피셔 랜덤 체스라 불리기도 한다. 그가 이러한 방식을 만든 이유는 오프닝에 대한 암기가 체스를 망친다고 생각해서였으며, 이것이 그가 체스를 떠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타임컨트롤 방법 중 하나인 증초(Increment) 방식을 고안했으며 이를 피셔방식이라고도 한다. 초읽기의 일종인데, 오늘날 체스에서는 가장 기본적으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타임컨트롤이 30+15인 경기가 있다면 이는 기본시간 30분이 주어지며 매 수를 둘 때마다 남은 시간이 15초씩 증가한다는 의미이다.

2014년 9월 11일에 개봉 된 바비 피셔와 스파스키의 챔피언전을 스토리로 제작 된 영화 세기의 매치가 있다. 토비 맥과이어가 바비 피셔 역을 맡았다.

바비 피셔를 찾아서(Searching for Bobby Fischer; 한국 개봉명은 위대한 승부)라는 영화도 있는데 제2의 바비 피셔로 기대 받던 체스 신동 조쉬 웨이츠킨에 대한 이야기이다. 피셔는 출연하지 않는다.

넷플릭스 드라마 퀸스 갬빗(드라마)의 동명 원작 소설의 주인공인 베스 하먼이 바비 피셔를 모델로 한 등장인물이다.

IQ가 200 가까이 되는 고지능자이다.
[1]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체스 선수 Top 3를 뽑으라면 97%의 경우 피셔가 들어가 있다.[2] 타이마노프는 이 일로 고국에서 미국인에게 무력하게 졌다는 비난을 받고 체스를 은퇴하게 된다. 캐삭빵[3] 양쪽이 9승을 거둘 시 상금은 양분하고 피셔가 챔피언을 유지한다는 독소조항이 결정적이었다.[4] 이후 그의 제안은 부분적으로 인정되어 먼저 6승을 거둔 선수가 챔피언이 되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카르포프와 가리 카스파로프의 챔피언전이 장장 48게임 후에 승부가 나지 않자 다시 24전제가 된다.[5] 당시는 전략적인 판단에 따라 10수 남짓만 두고 합의 무승부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상기했듯이 피셔의 이의제기로 인해 대회 방식이 바뀌기도 했고, 오늘날 큰 대회는 대부분 초반 합의 무승부를 금지한다.[6] 그런데 당시 여성 챔피언과 피셔의 레이팅 차이를 봤을 때 이것은 맞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체스뿐만 아니라 바둑, 장기계도 여성기사와 남성기사의 차이가 제법 나는 편이다. 20위 내에 여성기사는 한 명도 없고 100위까지 뒤져야 한 명 있을까 말까한 수준이다. 이런 보드게임에서 남녀가 차이가 나는 이유에 대해선 여러가지로 갑론을박이 있지만 통계적인 모집단 숫자가 남성이 여성에 비해 훨씬 많기 때문이라는 것과 성향 차이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보통 중요한 전투국면에서 더 큰 이득이 있다면 어느 정도 타협을 하고 손을 떼는 남성기사들에 비해 여성기사들은 거기서 사생결단을 낼 기세로 끝장을 보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전체적으로 더 이득이 큰 곳에 수를 두어 안정적으로 이길 수 있었을 경기를 패하는 경우가 왕왕 생긴다. 바둑계를 통틀어 거의 유일하게 최상위권 남성기사들과 대등한 전적을 뽐낸 전설적인 여류기사 루이나이웨이도 비슷한 취지의 언급을 한 적이 있다.[7] 초대 세계 챔피언인 빌헬름 슈타이니츠는 귀화한 미국인이다.[8] 20세기 이전에는 더 높은 연승 기록도 찾아볼 수 있지만 명백히 수준 차이가 나는 플레이어들을 상대로 달성 한 것이다. 하지만 피셔는 도전자 결정전에서 세계 랭커들만을 상대로 기록을 쌓았다.[9] 실제로 챔피언십에서 스파스키와의 승률이 대략 60%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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